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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6-01 11:38:36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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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엠블럼.svg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ruby(埼玉, ruby=さいたま)] [ruby(西武, ruby=せいぶ)]ライオンズ
Saitama Seibu Lions
법인명 ㈜세이부 라이온즈
株式会社西武ライオンズ
창단 1949년 11월 26일
연고지 파일:사이타마현 현기.png 사이타마현 파일:토코로자와시 시기.png 토코로자와시
연고지 변천 후쿠오카현 (1950~1978)
사이타마현 (1979~)
구단명 변천 니시테츠 클리퍼스 (1950)
니시테츠 라이온즈 (1951~1972)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 (1973~1976)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 (1977~1978)
세이부 라이온즈 (1979~2007)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008~)
홈 구장 카스가하라 구장 (1950)
헤이와다이 구장 (1951~1978)
메트라이프 돔 (1979[1]~)
사이타마현영 오미야공원 야구장 (2008[2]~)
2군 구장 세이부 제2구장 (1979~)
모기업 파일:Seibu_logo.png
감독 츠지 하츠히코(辻発彦)
킷 스폰서 파일:Majestic_Athletic_logo.png
마스코트 파일:Saitama_Seibu_Lions_Mascot.png
레오 & 라이나
구단기 파일:Saitama Seibu Lions Team Flag.jpg
일본시리즈 우승
(13회[3])
1956, 1957, 1958, 1982, 1983, 1986, 1987, 1988, 1990, 1991,
1992, 2004, 2008
퍼시픽 리그 우승
(23회 / 최다 우승)
1954, 1956, 1957, 1958, 1963, 1982전기리그 , 1983, 1985, 1986,
1987, 1988, 1990, 1991, 1992, 1993, 1994, 1997, 1998, 2002,
2004, 2008, 2018, 2019
퍼시픽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우승
(1회)
2008
플레이오프 우승
(2회)
1982, 2004
아시아 시리즈 우승
(1회)
2008
역대
한국인 선수
백인천(1975~1976)
링크 파일:Seibu_Lions_Symbol.png파일:유튜브 아이콘.svg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파일:트위터 아이콘.svg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역사
2.1. 니시테츠 시절2.2. 고난의 시기: 다이헤이요 클럽-크라운 라이터 시절2.3. 세이부의 인수
2.3.1. 1980년대 황금기2.3.2. 황금시대 이후 ~ 2012년 시즌2.3.3. 모기업의 위기와 매각위기2.3.4. 2013년 시즌 이후
3. 홈구장4. 최근 5년간 관중수 추이5. 2군 시설 및 클럽하우스6. 이모저모
6.1. 마스코트6.2. 팬덤
7. 유니폼8. 주요 선수들
8.1. 현역
8.1.1. 감독 및 코치8.1.2. 투수8.1.3. 포수8.1.4. 내야수8.1.5. 외야수
8.2. OB
8.2.1. 투수8.2.2. 포수8.2.3. 내야수8.2.4. 외야수8.2.5.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8.3. 영구결번8.4. 준영구결번
9. 역대 성적

[clearfix]

1. 개요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의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사이타마현으로 195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총 3번의 일본시리즈 3연패로 왕조를 구축했던 퍼시픽 리그 전통의 명문팀이다.[4]10년간의 기간 동안 총 7번의 우승과 센트럴리그 전 구단 격파, 특히나 2020년 일본시리즈의 우승으로 세이부조차 이뤄내지 못한 퍼시픽리그 구단의 JS 4연패를 달성함으로서 이젠 독보적인 명문이라는 주장은 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래도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전성기를 가진 명문 구단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특히 80년대 ~ 90년대 라이온스는 이 기간동안에만 퍼시픽 리그 우승 9회, 일본 시리즈 우승 8회를 달성하며 요미우리의 V9 시대에 버금가는 왕조를 구축했었다. 23회 퍼시픽 리그 우승, 13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일본야구 그 자체인 요미우리 자이언츠 다음가는 성적으로 퍼시픽 리그에서는 최근에 떠오르는 강호인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제외하면 독보적인 기록이다.

한국 언론에는 예전에도 그랬고 현재도 '세이부 라이온즈'라고 쓰지만, 매체 등에서는 '세이부', '사이타마 세이부' 식으로 쓴다. 하지만 그냥 일반적으로는 오랫동안 익숙해져서 저 식으로 부르는 사람이 대다수이고 굳이 귀찮게 사이타마까지 붙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2. 역사

2.1. 니시테츠 시절

파일:external/star.ap.teacup.com/1337494116.jpg
니시테츠 라이온즈 시절 구단기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최다 우승팀으로, 1949년 창단하고 1950년 양대리그제 시행 이후 후쿠오카헤이와다이 구장[5]을 연고지로 한 니시테츠 클리퍼스를 시작으로 이듬해 같은 후쿠오카의 센트럴리그 구단 니시닛폰 파이리츠와 합병하여 니시테츠 라이온즈가 되었다. 애초에 후쿠오카 정도의 지방도시에 야구팀이 두 개나 있는게 무리였으나, 당초에는 철도회사인 서일본철도와 신문사인 서일본신문(西日本新聞)의 합작으로 후쿠오카의 단일연고팀을 만들려 했다. 그러나 센트럴리그, 퍼시픽리그 중 어느 리그에 속할 것인가를 두고 두 회사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여 결국 따로따로 팀을 창단했고 결국 1년만에 니시닛폰이 GG를 치고 니시테츠와 합병하여 퍼시픽리그 소속이 되었다. 1950~60년대의 강팀으로 군림하면서 1956~1958년에는 명감독 미하라 오사무. 명투수 이나오 카즈히사와 강타자 오시타 히로시, 나카니시 후토시의 활약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물리치고 일본시리즈 3연패를 차지했다.

그 후 1963년 리그 우승을 끝으로[6] 우승권에서 멀어졌다. 원래 지방 사철이 모기업이라 재정도 넉넉하지 않은데다 당시 비인기팀들이 모여있던 퍼시픽리그 소속에 소규모 지방도시를 홈으로 쓰는 덕분에 관중동원도 여의치 않아 팀의 부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본프로야구 최악의 흑역사인 검은 안개 사건으로 주전들 대부분이 줄줄이 구속→영구제명 크리를 먹어 팀이 순식간에 약체화되었고, 그 때문에 니시테츠가 더이상 팀을 유지할 수 없어서 1972년 구단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2.2. 고난의 시기: 다이헤이요 클럽-크라운 라이터 시절

파일: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 시절 구단기.jpg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 시절 구단기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 시절 구단기.[7]

이후의 사정은 현대 유니콘스우리/서울/넥센/키움 히어로즈가 짬뽕된듯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니시테쓰는 1972년 시즌을 끝으로 구단에서 손을 떼면서 기시 노부스케의 비서이자 롯데 오리온즈의 구단주였던 나카무라 나가요시[8]에게 구단 매각을 의뢰했는데, 인수하겠다는 기업이 나타나지 않자 자신이 직접 후쿠오카 베이스볼(주)라는 구단 운영법인을 만들어 팀을 인수하고 팀 운영비는 롯데 오리온즈 시절처럼 팀의 명칭을 팔아 조달했다.

이렇게 해서 스폰서의 변천에 따라 1973년 다이헤이요 클럽(太平洋クラブ)라이온즈[9][10], 1977년 크라운 라이터[11] 라이온즈로 이름을 바꾸면서 라이온즈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롯데와는 달리 라이온즈의 스폰서로 나선 기업들은 업종을 보면 알겠지만 프로야구 구단을 인수할만한 능력은 전혀 되지 않아서 이 당시의 라이온즈는 키움 히어로즈 창단 이후 2년간과 거의 비슷한 안습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12] 1976년에 MLB 명장이던 레오 듀로처를 영전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미덥지 못한 스폰서의 쥐꼬리만한 재정지원으로 강팀을 만들 수도 없거니와 팀의 막장화만 가속되었다. 끝내 얼마 안되는 스폰서 자금과 나카무라의 개인 인맥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에 이르러 GG를 치고 팀 해체의 수순을 밟을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처해있을때 한 줄기 빛과 같은 광명이 비추었으니 당시 부동산, 사철 재벌로 막강한 자금력을 보유한 세이부 그룹이 구단 인수에 관심을 보인 것이었다. 마침내 후쿠오카의 시민들도 든든한 구단주를 얻어서 옛 영광을 다시 재현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세이부가 관심을 표명했을 때만 해도 이것이 일본판 현대 유니콘스, 아니 현대 유니콘스의 선구자적 사건이 될 줄은...

2.3. 세이부의 인수

2.3.1. 1980년대 황금기

파일:세이부로고1979.jpg
9회 우승을 함께한 로고

1978년 말 세이부 그룹은 라이온즈 구단을 인수할 것을 표명했다. 세이부 그룹은 라이온즈 프랜차이즈를 인수하기 전에 두 차례나 야구단 스폰서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일본프로야구가 양대리그로 나눠지기 이전에 존재했던 일본야구연맹(JBL)에 참여했던 도쿄 세네터스(東京セネタース)-츠바사군(翼軍)의 재정적 스폰서를 해줬다.[13] 당시 귀족원 의원이었던 아리마 요리야스와 세이부 그룹의 모종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후 2차 세계대전 이후 세너터스가 재건에 실패하자 1970년대에는 다이요 훼일스요코하마 스타디움 건립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다이요의 2대 주주로 경영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이부는 구단인수의 조건에 자신들이 한창 부동산 개발중이던 도쿄 근교의 사이타마로의 이전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사철인 도쿄-사이타마 지방의 세이부 철도를 기반으로 하는 세이부 그룹에게 있어서 거의 적자가 안 발생하는게 불가능에 가까운 프로스포츠단인 라이온즈를 그나마 적자가 최대한 안 나게 운영하고, 연고지 주변 지역의 관중을 끌어들어 수익을 올리려면 반드시 사철이 자리잡은 곳 근처에 스포츠단 연고지를 두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애초에 간토 도쿄-사이타마간사이 시가[14] 지방의 세이부가 드럽게 멀리 떨어진, 자기네 철도도 안 다니는 큐슈 후쿠오카 지방에서 야구단을 운영하는 게 넌센스였다. 당장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왜 해체되었는 질 생각해 봐도 답은 나온다.

어쨌거나 당시 라이온즈 구단은 그런걸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 연고지 이전의 조건을 내거는 기업이라도 인수하겠다고 해주면 넙죽 받아야 하는게 당시 구단이 처한 현실이었다. 결국 팀은 세이부 그룹에 인수되어 후쿠오카를 떠나 사이타마로 이전했고, 후쿠오카의 팬들은 옛 영광의 재현은커녕 크나큰 상실감만 맛보아야 했다. 결국 후쿠오카는 1989년 서로 죽이지 않고는 못살던 예전의 라이벌 호크스가 후쿠오카 이전을 발표할 때까지 무려 10년동안의 세월을 연고팀 없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야 했다.

세이부에게 인수된 뒤 인기 만화였던 밀림의 왕자 레오의 레오를 마스코트로 삼았다. 레오의 일러스트는 실제로 테즈카 오사무에게 저작권료를 주고 정식으로 사용권을 승인받았다. 근데 정작 테즈카 오사무는 한신팬이다. 어?[15] 후쿠오카에서 도쿄 근교로 이전해 오면서 일단 기존 팬층은 개척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만화주인공을 마스코트로 해서 어린이들부터 공략하자는 마케팅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공략당한 어린이들이 밑에서 기술한 세이부 황금시대를 거치면서 3, 40대 성인으로 성장한 지금 세이부 팬층의 주축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계약이 끝난 2009년부터 이 로고는 폐기되고[16] 클래식 유니폼 데이 때만 일 단위로 계약하고 있다. 아무리 사용 못 한다 해도 아주리 블루까지 버릴 필요는 없는데.

세이부 라이온즈로 바뀐 이래, 오로지 이기는 것만이 팬을 확보하는 것이라는 일념하에 구단주인 츠츠미 요시아키는 감독 겸 관리부장(GM 역할)이던 네모토 리쿠오(1982년부터는 관리부장 직에만 전념)에게 구단 운영의 전권을 위임했고, 네모토는 각종 방법을 동원[17]하여 팀의 전력을 강화시켰다.[18] 결국 이러한 전력 보강 등을 이어간 끝에 1982년, 팀은 드디어 퍼시픽리그 전기리그 우승에 이어 플레이오프 에서도 후기리그 우승팀 닛폰햄 파이터즈를 격파하며 퍼시픽리그 우승을 이루고[19] 뒤이어 일본시리즈에서도 주니치 드래곤즈를 격파. 24년 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룩하며 그 결실을 이루어냈다. 그 뒤로부터 1992년까지 10여년의 기간, 그러니까 1980년대~1990년대 초반 동안은 가히 세이부의 황금시대, 왕조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세이부는 이시게 히로미치-츠지 하츠히코 키스톤과 아키야마 코지-키요하라 카즈히로-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의 일명 AKD 클린업 트리오, 모리의 계승자 이토 쓰토무가 버티는 백스톱까지 갖춘 철벽 야수진을 갖췄고, 투수진에는 와타나베 히사노부-쿠도 키미야스 원투펀치에 '오리엔탈 특급' 곽태원(궈타이위안, 카쿠 타이겐)가 선발진에 버티고 있고 구원진에는 카토리 요시타카. 시오자키 테츠야 등이 건재했다. 이 시기 세이부는 V9 시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버금가는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강 전력의 팀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명장 모리 마사아키의 지도 아래 이 기간만 리그 우승 9회, 일본시리즈 우승 8회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리그 우승으로 일본시리즈 진출 후 패한 경우는 한신 타이거즈양대리그제 실시 이후 현재까지 유일한 일본시리즈 우승인 1985년... 이래저래 한신 타이거스만 여러 의미로 안습 리그 우승을 못한 경우는 1984년의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1위 자리를 내준 경우와[20] 1989년의 긴테츠 버팔로즈에게 리그 3번째 우승을 헌납한 경우.[21]
그렇게 해서 세이부(西武) 라이온즈로 30년 가까이 이어졌으나, 인기도 떨어지고 모기업 세이부 철도의 상태가 영 좋지 않게 되자 2008년 지역 이미지 부각을 위해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가 되었다. 도쿄에 미련이 남아있던 세이부 그룹으로서는 끝까지 사이타마라는 명칭의 사용을 거부해왔으나(이것도 수도권의 수원구장에서 경기를 치르면서 끝까지 서울 연고를 포기하지 않은 한국의 현대 유니콘스와도 비슷하다.) 결국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팬베이스가 자신들이 원하던 자이언츠 네이션 도쿄 중심부가 아닌 사이타마의 베드타운 지역에 형성된 탓에 결국은 고집을 꺾었다. 오죽 사이타마라는 명칭을 쓰기 싫었으면 세이부(西武)라는 명칭은 과거 전국시대의 도쿄와 그 주변지역을 의미하는 무사시노(「武」蔵野)의 서부지역을 의미하는 이름이라고 주장하며[22] 본거지와 팬베이스가 도쿄의 서부지역이니 세이부라는 명칭도 지역명칭이라는 해석을 굳이 강조하면서까지 사이타마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거부하면서 버텼다.[23]

2.3.2. 황금시대 이후 ~ 2012년 시즌

1992년 이후 세이부 황금시대 주역들이 노쇠하거나 타 팀으로 트레이드[24] 및 주축 선수들의 FA(자유계약선수) 선언[25]으로 1980년대의 황금기는 끝난다...라고는 하지만, 1990년대 중후반에도 세이부는 여전히 파리그의 강호였고, 첫번째 리그 우승을 이룬 1982년부터 2007년[26]까지 B클래스로 떨어진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단지 문제는 일본시리즈 우승을 못 해서 그렇지. 모리 마사아키의 뒤를 이어 팀을 맡은 히가시오 오사무 감독이 지휘한 1997~1998년에는 2년 연속으로 파리그 우승을 하였지만, 당시 일본시리즈에서는 각각 노무라 카츠야야쿠르트 스왈로즈와 '머신건 타선'을 앞세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게 발목을 잡혔다. 그 이후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제4대 괴동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명 유격수 마쓰이 카즈오, 대형 슬러거 알렉스 카브레라 등이 투타의 기둥으로 활약하면서 이하라 하루키 감독 지휘 하에서 2002년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오랜 기간의 감독 수업을 거친 이토 츠토무가 감독으로 취임한 2004년에는 정규시즌에 2위를 하였으나 플레이오프를 통해 닛폰햄과 다이에를 차례대로 꺾고 리그 우승을 하고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와 7차전 까지 가는 접전 끝에 1992년 이후 12년만에 다시 일본시리즈를 우승하게 된다.

와타나베 히사노부 감독이 지휘한 2008년 시즌에는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대결하여 4승 3패를 기록, 우승을 거머쥐었다. 전신인 니시테츠 시절을 포함하여 1950년 2리그제 시행 후 현재까지 리그 21회, 일본시리즈 14회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엠블렘, 홈 덕아웃 위치(1루에서 3루로), 유니폼을 변경하고 출발한 원정 유니폼이 희대의 좆망 유니폼으로 바뀐 뒤에는 2009년에는 B클래스를 기록하였고 2010년에는 퍼시픽리그 2위를 기록했지만 PS에서 치바 롯데 마린즈에게 패배하며 탈락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2011년과 2012년에서 UTU을 하다가 각각 2011 클라이맥스 2스테이지에서, 2012클라이맥스 1스테이지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파일:external/www.seibulions.jp/ph_illust01.jpg
애니메이션 아노하나의 배경이 사이타마라서 정식으로 콜라보하여 이런 이미지도 나왔다.

2.3.3. 모기업의 위기와 매각위기

모기업인 고쿠도[27]의 경영 부진이 계속되자 세이부 구단도 점점 살림을 줄여나갔고 2004년 세이부 돔과 2군 구단의 명명권을 인보이스에 매각하는 등 자구책 마련에 분주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였다. 2004년 긴테츠-오릭스 구단 합병으로 일본 야구계 재편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세이부 구단도 치바 롯데, 니혼햄 파이터즈, 다이에 호크스 4개 구단과 합병을 논의하였으나 니혼햄 파이터즈는 삿포로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합병에서 발을 빼고 롯데 마린즈와 다이에 호크스도 세이부가 아닌 서로 간의 양자 합병을 모색하게 되면서 세이부의 합병 시도는 무산되었다.[28]

이후 세이부 철도의 뇌물공여 및 유가증권 허위기재 등 비리사건이 연달아 터지고 결국 상장폐지까지 되자 세이부 그룹에서는 구단 매각 방침을 세웠고 긴테츠 인수, 신구단 창단 등에서 연달아 물을 먹은 라이브도어에서 적극적으로 인수의사를 밝히면서 순조롭게 매각협상이 진행되나 싶었지만 200억~250억에 이르는 구단 인수비용과 세이부 돔을 반드시 사용해야한다는 조건 때문에 인수협상이 지지부진해지면서 세이부 그룹에서는 매각을 포기하게 된다.

2.3.4. 2013년 시즌 이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역사/2013년 이후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홈구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메트라이프 돔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니시테츠로부터 구단을 인수한 후 메트라이프 돔을 홈구장으로 쓰고있다. 세이부 연선과 유원지에 있어 구장에 올 때 자차 이동이 아니라면 세이부 철도 이용이 강제되는 구장이다. 문제는 세이부 철도는 오미야 쪽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것.[29] 그래서 주중과 주말 관중편차가 크다.

그 외에 사이타마현영 오미야공원 야구장이 제2홈구장이다. 여기선 1년에 3경기 정도 치른다.

4. 최근 5년간 관중수 추이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총 관중 1,498,365명 1,616,827명 1,618,194명 1,673,219명 1,763,174명 1,821,519명
일일 평균 20,811명 22,456명 22,791명 23,239명 24,833명 25,299명

5. 2군 시설 및 클럽하우스

세이부 제2구장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공단에 있는 컨테이너 기숙사나 군부대의 BEQ처럼 생겼다(...) 안습했던 세이부의 선수 기숙사 현지에서는 도호쿠 대지진 등으로 집을 통째로 날린 이재민들을 수용하는 가설주택이라고 까였다. 사진에는 안 나와있지만 세이부 돔 안에 있는 1군 라커룸도 안습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한 때 구리기로 유명했던 요코하마 스타디움만 하더라도 DeNA가 구단을 인수한 후로 적극적인 투자의 일환으로 대대적으로 개수가 이루어져 지금은 메이저리그가 부럽지 않은 클럽하우스가 됐는데 이 팀의 클럽하우스는 팬들로부터 "만화가게냐"라면서 까였을 정도.

츠츠미 일가가 그룹 총수자리에서 야구단에 아낌없이 투자하던 80년대만 하더라도 선수들이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12개 구단 중에서 손꼽히는 시설이었으나 츠츠미 일가가 그룹 경영에서 손을 뗀 이후로는 시설이 낡아가는데도 그냥 방치하는 바람에 현재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중 열악한 쪽으로 선두를 다투는 기숙사, 훈련 시설이 되어버다. [30] 경영주체가 바뀐 이후로 모기업인 세이부 측에서 야구단을 짐짝으로 보고 있는 시선이 많아지다 보니[31] 제대로 된 개/보수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홈구장인 세이부 돔의 개/보수에도 적극적이지 않았으나 키시 타카유키의 FA 이적, 세이부 선수단의 집단 성명 등이 이어지자 그제서야 공조 시설 확충 등의 시설 개선을 하였다.

그리고 2017년 시즌 종료 이후 세이부돔과 2군 시설, 기숙사 시설 리모델링에 180억 엔을 투자해 2021년까지 완공하기로 했다. 2019년 7월 현재 스토어샵, 실내 연습장, 기숙사가 최신 시설로 완비되어있는 상태. 이젠 더 이상 컨테이너가 아니다 기사+탐방 동영상

6. 이모저모

6.1. 마스코트

예전에 쓰던 로고는 밀림의 왕자 레오의 레오를 로고 겸 마스코트로 사용했다. 지금은 마스코트만 레오와 라이나로 사용중.

이에 대해서 나오는 이야기중 유명한 것이 데즈카 오사무가 자신은 마스코트로 판쟈를 그렸는데, 세이부 라이온즈 측에서 멋대로 레오라고 주장한다더라하는 카더라 통신도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일본위키백과에서도 언급은 하지만 출처제시가 안되는 부분이고, 세이부는 레오라고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정글대제 출판본을 기준으로 보면 미묘하게 다르게 생겼다 같은 이야기를 제외하고 보면, 판쟈와 레오의 외모 차이를 두는 부분은 귀 끝의 검은 부분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물론 판쟈의 귀끝도 검게 그리는 예가 없지는 않지만[53], 전집을 포함해서 둘의 차이를 둘 때는 판쟈는 그야말로 순백으로 그려진다. 이런 점에서 보면 마스코트는 판쟈보다는 레오의 성체 버전일 가능성이 높다...기 보다는 판쟈라는 근거가 저 카더라와 느낌적 느낌 밖에 없다. 사실 이런 것 다 필요없이 세이부 측이 레오라고 사용하고 있고, 이름 들어가는 부분은 다 레오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마스코트는 레오가 맞다.

프로야구 초창기 삼성라이온즈 어린이 회원 점퍼의 마스코트가 저 마스코트를 약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하는 수준에서 모방한 것이었다. 어느 어린이 회원은 삼성 라이온즈 점퍼를 입고 민속촌에 갔다가 일본 관광객들이 '세이부 라이온즈네' 하는 바람에 약간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8년 팀명을 바꾸면서 사이타마현 캐릭터인 코바톤을 비공식 마스코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6.2. 팬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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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폼 교체 이후 응원문화가 점차 바뀌고 있다. 과거 1루 외야 홈 시절엔 작은 배트를 사용한 비교적 전통적 응원이었는데, 같은 현 안의 축구단 보고 끌렸나 보다 서포터즈들은 배트를 놓고 손뼉응원을 많이 하고 있으며, 한 손으로 드는 작은 깃발이 완전히 정착되었다. 거기다 게이트기도 심심찮게 보여 축구장이 다 되어가고 있다. 샄카현 인증 연고지 정착은 23년이나 빠른데 응원은 대놓고 치바 롯데 파크리 누가 응원으로 경쟁하는 팀 아니랄까봐 롯데처럼 점프 응원도 즐겨 한다. 그래서 응원할 때 체력이 많이 소모된다. 그러나 응원콜을 좋아해서 응원가를 안 부르는 타석도 많은 롯데와는 다르게 응원가를 많이 부르며 선발 라인업 발표 직후에 모든 선수의 응원가를 한번씩 불러주는 것도 여전히 하고 있다.(롯데는 현재 선발 라인업 발표 후에 응원가를 불러주지 않는다.)

2013년에 비교적 가까운 치바 롯데 마린즈와 라이벌전을 선포하고 양 측 홈에서 3연전을 아노하나 vs 오레이모[54] '사이타마 vs 치바 라이벌 시리즈'로 각 한번씩 치뤘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클라이맥스 퍼스트에서 도호쿠행 티켓을 놓고 붙게 되었다.그리고 3위였던 롯데에게 하극상 당했다.[55]

간사이권에서 다른 부, 현은 한신 인기가 가장 많은 데 비해 시가현에 팬이 상당히 많다. 세이부 계열 오미 철도가 있고, 세이부 그룹의 발상지가 시가현이기 때문. 기사

참고로 응원단 멤버 중 테드 스미스가 있다.

7. 유니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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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주요 선수들

8.1. 현역

8.1.1. 감독 및 코치

8.1.2. 투수

8.1.3. 포수

8.1.4. 내야수

8.1.5. 외야수

8.2. OB[64]

8.2.1. 투수

8.2.2. 포수

8.2.3. 내야수

8.2.4. 외야수

8.2.5.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8.3. 영구결번

24. 이나오 카즈히사: 하느님, 부처님, 이나오 님. 이나오가 은퇴한 때부터 1972년까지 24번을 달고 감독직을 지냈다. 그런데 구단이 다이헤이요로 매각된 1973년에 이나오 자신은 81번으로 번호를 바꾸고 24번을 후배 선수들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하며 준영구결번으로 남겼다. 이후 라이온즈 24번의 계보는 고가 마사아키(古賀正明)-아키야마 코지-히라노 켄(平野謙)-마츠나가 히로노리(松永浩典)로 이어지다, 결국 2012년에 이나오 탄생 75주년을 맞아 동년 5월에 구단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8.4. 준영구결번

3. 오시타 히로시: 1960년 은퇴 후 오시타의 커리어를 기리기 위해 당시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구단사장이었던 니시 마다지로(西亦次郎)가 '당분간 오시타의 3번을 결번으로 처리하겠다'라고 해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으나, 1968년 오시타가 토에이 플라이어즈에 감독으로 내정되면서 슬그머니 영구결번을 해제했다. 이에 대해 오시타의 동의가 있었는지는 불명이라고. 어쨌든 세이부가 구단을 인수하고 나서는 라이온즈의 3번은 키요하라 카즈히로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이후 이 번호를 받은 선수로는 나카지마 히로유키, 아사무라 히데토가 있었고 2020년부터는 야마카와 호타카가 단다.

6. 나카니시 후토시: 1970년에 은퇴 당시 나카니시에 견줄만한 선수가 등장하면 그 선수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여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위의 이나오 카즈히사와 비슷한 이유로 해제가 됐고, 당시 감독이었던 이나오가 추천한 키쿠카와 소지로(菊川昭二郎)가 이 번호를 사용했다. 세이부로 바뀌고 나서 그나마 이 등번호를 달만한 자격이 있던 플레이를 했던 선수는 90년대 초반 유격수로서 황금시대를 떠받친 타나베 노리오. 2017년부터는 사회인야구 출신의 신인 유격수 겐다 소스케가 이 번호를 달고 플레이하는 중이며, 빈틈없는 수비주루와 정교한 타격을 보여주며 2017년 신인왕을 수상해 이 등번호의 전망을 밝게 하는 중.

27. 이토 쓰토무: 은퇴 후 이토 스스로가 인정한 후배 포수에게 넘겨주기로 하여 준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이후 2006년 호소카와 토오루(細川亨)가 사용했으나 2010 시즌 종료 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FA 이적하면서 결번 상태였다가, 2012년부터 스미타니 긴지로(炭谷銀仁朗)가 사용하고 있다가 FA이적한 후로는 그의 보상선수로 요미우리에서 넘어온 우츠미 테츠야가 달고 있다.

9. 역대 성적

­ 리그 우승[72]
­ 2위
­ 3위
B클래스
연도 정규시즌 순위 최종순위 팀이름 경기수 승률 포스트시즌
1950 5위/7팀 5위 니시테쓰 클리퍼스 120 51 67 2 .432
1951 2위/7팀 2위 니시테쓰 라이온즈 105 53 42 10 .558
1952 3위/7팀 3위 120 67 52 1 .563
1953 4위/7팀 4위 120 57 61 2 .483
1954 1위/8팀 <colbgcolor=#ffd700> 우승 140 90 47 3 .657 일본시리즈 (3-4 vs 주니치)
1955 2위/8팀 2위 144 90 50 4 .643
1956 1위/8팀 우승 154 96 51 7 .646 일본시리즈 (4-2 vs 요미우리)
1957 1위/7팀 우승 132 83 44 5 .648 일본시리즈 (4-1-0 vs 요미우리)
1958 1위/6팀 우승 130 78 47 5 .619 일본시리즈 (4-3 vs 요미우리)
1959 4위/6팀 4위 144 66 64 15 .508
1960 3위/6팀 3위 136 70 60 6 .539
1961 3위/6팀 3위 140 81 56 3 .589
1962 3위/6팀 3위 136 62 68 6 .477
1963 1위/6팀 우승 150 86 60 4 .589 일본시리즈 (3-4 vs 요미우리)
1964 5위/6팀 5위 150 63 81 6 .438
1965 3위/6팀 3위 140 72 64 4 .529
1966 2위/6팀 2위 138 75 55 8 .577
1967 2위/6팀 2위 140 66 64 10 .508
1968 5위/6팀 5위 133 56 74 3 .431
1969 5위/6팀 5위 130 51 75 4 .405
1970 6위/6팀 6위 130 43 78 9 .355
1971 6위/6팀 6위 130 38 84 8 .312
1972 6위/6팀 6위 130 47 80 3 .370
1973 전기 4위/6팀
후기 5위/6팀
4위 다이헤이요클럽
라이온즈
130 59 64 7 .480
1974 전기 3위/6팀
후기 4위/6팀
4위 130 59 64 7 .480
1975 전기 2위/6팀
후기 4위/6팀
3위 130 58 62 10 .483
1976 전기 6위/6팀
후기 6위/6팀
6위 130 44 76 10 .367
1977 전기 6위/6팀
후기 5위/6팀
6위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
130 49 73 8 .402
1978 전기 4위/6팀
후기 5위/6팀
5위 130 51 67 12 .432
1979 전기 6위/6팀
후기 5위/6팀
6위 세이부 라이온즈 130 45 73 12 .381
1980 전기 6위/6팀
후기 4위/6팀
4위 130 62 64 4 .492
1981 전기 2위/6팀
후기 5위/6팀
4위 130 61 61 8 .500
1982 전기 1위/6팀
후기 3위/6팀
우승 130 68 58 4 .540 플레이오프 (3-1 vs 닛폰햄)
일본시리즈 (4-2 vs 주니치)
1983 1위/6팀 우승 130 86 40 4 .683 일본시리즈 (4-3 vs 요미우리)
1984 3위/6팀 3위 130 62 61 7 .504
1985 1위/6팀 우승 130 79 45 6 .637 일본시리즈 (2-4 vs 한신)
1986 1위/6팀 우승 130 68 49 13 .581 일본시리즈 (4-1-3 vs 히로시마)
1987 1위/6팀 우승 130 71 45 14 .612 일본시리즈 (4-2 vs 요미우리)
1988 1위/6팀 우승 130 73 51 6 .589 일본시리즈 (4-1 vs 주니치)
1989 3위/6팀 3위 130 69 53 8 .566
1990 1위/6팀 우승 130 81 45 4 .643 일본시리즈 (4-0 vs 요미우리)
1991 1위/6팀 우승 130 81 43 6 .653 일본시리즈 (4-3 vs 히로시마)
1992 1위/6팀 우승 130 80 47 3 .630 일본시리즈 (4-3 vs 야쿠르트)
1993 1위/6팀 우승 130 74 53 3 .583 일본시리즈 (3-4 vs 야쿠르트)
1994 1위/6팀 우승 130 76 52 2 .594 일본시리즈 (2-4 vs 요미우리)
1995 3위/6팀 3위 130 67 57 6 .540
1996 3위/6팀 3위 130 62 64 4 .492
1997 1위/6팀 우승 135 76 56 3 .576 일본시리즈 (1-4 vs 야쿠르트)
1998 1위/6팀 우승 135 70 61 4 .534 일본시리즈 (2-4 vs 요코하마)
1999 2위/6팀 2위 135 75 59 1 .560
2000 2위/6팀 2위 135 69 61 5 .531
2001 3위/6팀 3위 140 73 67 0 .521`
2002 1위/6팀 우승 140 90 49 1 .648 일본시리즈 (0-4 vs 요미우리)
2003 2위/6팀 2위 140 77 61 2 .558
2004 2위/6팀 우승 133 74 58 1 .561 퍼스트 스테이지 (2-1 vs 닛폰햄)
세컨드 스테이지 (3-2 vs 다이에)
일본시리즈 (4-3 vs 주니치)
2005 3위/6팀 3위 136 67 69 0 .493 퍼스트 스테이지 (0-2 vs 롯데)
2006 2위/6팀 2위 136 80 54 2 .597 퍼스트 스테이지 (1-2 vs 소프트뱅크)
2007 5위/6팀 5위 144 66 76 2 .465
2008 1위/6팀 우승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44 76 64 4 .543 세컨드 스테이지 (3-2 vs 닛폰햄)
일본시리즈 (4-3 vs 요미우리)
2009 4위/6팀 4위 144 70 70 4 .500
2010 2위/6팀 2위 144 78 65 1 .546 퍼스트 스테이지 (0-2 vs 롯데)
2011 3위/6팀 3위 144 68 67 9 .504 퍼스트 스테이지 (2-0 vs 닛폰햄)
파이널 스테이지 (0-4 vs 소프트뱅크)
2012 2위/6팀 2위 144 72 63 9 .533 퍼스트 스테이지 (1-2 vs 소프트뱅크)
2013 2위/6팀 2위 144 74 66 4 .529 퍼스트 스테이지 (1-2 vs 롯데)
2014 5위/6팀 5위 144 63 77 4 .450
2015 4위/6팀 4위 143 69 69 5 .500
2016 4위/6팀 4위 143 64 76 3 .457
2017 2위/6팀 2위 143 79 61 3 .564 퍼스트 스테이지 (1-2 vs 라쿠텐)
2018 1위/6팀 우승 143 88 53 2 .624 파이널 스테이지(2-4 vs 소프트뱅크)
2019 1위/6팀 우승 143 80 62 1 .563 파이널 스테이지(1-4 vs 소프트뱅크)
2020 3위/6팀 3위 120 58 58 4 .500
NPB 통산 71시즌 리그우승 23회 9564 4882 4313 369 .531 일본시리즈 우승 13회


[1] 개장 당시에는 야외 구장이었으나 이후에 지붕을 덮었다.[2] 제 2홈구장[3] 전후기리그제 성적도 포함.[4] 다만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2010년대 들어 단[5] 후쿠오카 돔이 지어지기 전까지 오사카에서 이사온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홈구장이기도 했다. 그러다 구장 보수를 하던 도중 이 구장 부지가 헤이안 시대에 있었던 유적지 코로칸(鴻臚館)이 위치했던 유적지였음이 밝혀졌고, 결국 1997년 폐장 후 철거된 뒤 역사공원이 조성되었다.[6]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패배했다. 근데 누가 알았을까. 이로부터 불과 2년 뒤가 진정한 요미우리의 캐씹사기 리즈시절인 V9의 시작이란 걸(...).[7] 활동기간이 얼마 안 돼서인지 구글에 일본어로 검색해도 구단기를 거의 찾기 힘들다.[8] 당시 오리온즈는 1964년 마이니치 신문이 손을 뗀 후에 영화회사 다이에이의 사장인 나가타 마사이치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그래서 팀 이름도 마이니치 오리온즈에서 도쿄 오리온즈로 바꾸었고 다시 롯데의 자금지원을 받아서 현재 키움 히어로즈와 같은 방식으로 롯데 오리온즈로 이름을 바꾼다. 롯데는 1970년 퍼시픽리그 우승 이후 팀 운영에 자신을 보이고 정식으로 구단을 인수했다. 이 롯데가 오리온즈의 네이밍 스폰서만 맡던 시절에 구단주를 맡은 사람이 나카무라였다.[9] 골프장, 리조트 개발회사이다.[10] 백인천이 이 때 리그 수위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11] 우리가 아는 그 담뱃불 붙이는 라이터 만드는 회사 맞다. 80년대에 타업체에 인수되면서 업종변경으로 회사의 자취가 소멸되었다.[12] 물론 자금난을 버티지 못해 가끔 주력선수를 팔아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도 있긴 했지만, 적어도 이때의 라이온즈는 주력선수를 팔아서 연명하지는 않았다. 라이온즈 프랜차이즈의 레전드 중 한 명인 히가시오 오사무(東尾修)는 저무는 니시테츠-고난의 행군기-세이부의 최전성기를 두루 거쳤던 팀의 간판이자 에이스였다. 팀이 막장이던 시절 타선의 빈타 때문에 시즌 20패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은퇴할 때까지 한 팀에서만 선수생활을 해 일본프로야구계에서도 '사나이 중의 사나이'로 평하기도 한다.[13] 나중에 도쿄 세네터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팀이 바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다.[14] 세이부 그룹이 시가현에서도 영업하는 이유는 오미 철도 문서에 간략하게 나와있다.[15] 근데 그 전에도 1960~70년대에 산케이-야쿠르트 아톰즈(現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철완 아톰아톰을 마스코트로 쓴 적 있기도 하다.[16] 다만 걸어놓는 팀 깃발에서는 잘만 쓰고 있다. 물론 영리 목적 사용은 금지이므로 판매하고 있지는 않다.[17] 마유미 아키노부 등을 보내고 거포 타부치 코이치를 데려오는 등의 대형 선수 트레이드는 기본이고, 드래프트에 지명이 확실한 전국의 고교 유망주를 뒷공작과 다른 구단과의 물밑 협상으로 선수 자격이 아닌 구단 직원 채용 형식으로 확보해둔 뒤, 드래프트외 선발로 입단시키는 방법(20년간 세이부의 안방을 지켜온 이토 쓰토무치바 롯데 마린스 감독이 이런 케이스)이나 그룹 계열사 내 일본의 사회인야구 팀인 프린스 호텔 야구부로 빼돌려서 아예 다른 팀의 지명을 포기하게 하는 방법(세이부 황금기의 팀의 주장을 맡은 이시게 히로미치가 이런 케이스. 방법은 간단하다. 학교를 졸업할 때 '난 프로 안 갈래' 하고 일단 프린스 호텔에 입단한다. 그러고 나서 다른 팀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다음 드래프트 때는 미리 포기하는 것)까지 동원했다.[18] 1990년대 후반의 현대 피닉스가 연상된다면 이는 착각이 아니다.[19] 여담이로 이 해를 끝으로 퍼시픽리그는 1973부터 운영해 온 전후기리그-플레이오프 제도를 폐지하고 센트럴리그처럼 6구단 중 리그 우승(1위)팀만 일본시리즈에 가는 것으로 변경했다. 그러니 세이부가 전후기리그-플레이오프 제도 시대의 마지막 플레이오프 우승팀인 것이다.[20] 그러나 한큐는 일본시리즈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패배. 참고로 이게 현재 카프의 마지막 일본시리즈 우승 기록이다.[21]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3연승 후 4연패로 내리 역관광당하며 처참하게(...) 패배했다. 참고로 이때 긴테츠 감독은 공교롭게도 전신인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전성기를 이끈 선수였던 오기 아키라였다.[22] 세이부라는 그룹 명칭의 기원인 것은 맞다. 하지만 타지 철도회사이자 도시권이나 공업 지대 지역 이름으로도 많이 쓰이는 '한신'과는 달리 '세이부'는 어떤 곳에서도 지역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23] 사실 세이부 돔은 다른 사이타마 지역보다 도쿄 중심부에서의 접근성이 더 좋다. 사이타마현의 중심지 오미야에서 세이부 돔 가는 게 많이 어렵다.[24] 대표적으로 1994년 오프시즌의 세이부 - 다이에 간 2-3 트레이드. 아키야마 코지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건너갔다. 참고로 당시 다이에의 단장은 공교롭게도 1980년대 세이부의 황금기를 구축한 그 네모토 리쿠오였다.[25] 쿠도 키미야스가 FA로 다이에로 이적하고, 기요하라 카즈히로도 1996년 FA로 그토록 원하던 요미우리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게 된다.[26] 이토 쓰토무의 세이부맨 커리어가 이로 인해 끝장나게 된다.[27] 세이부 철도의 최대주주[28] 롯데-다이에 간의 합병 논의도 마지막에 다이에 호크스 구단을 소프트뱅크가 인수하게 되면서 무산되었다[29] 세이부 신주쿠선혼카와고에역으로 연결되어 있어 카와고에역까지 걸어가서 카와고에선을 타면 되긴 하지만,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30] 세이부 급으로 열악한 훈련시설로는 비만 좀 오면 그라운드가 침수되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야쿠르트 토다 구장, 공장 부지의 자투리 땅에 대충 그라운드만 만든 치바 롯데 마린즈의 롯데 우라와 구장 등이 꼽힌다. 어째 전부 사이타마에 있다[31] 이는 세이부 구단에 투자를 아끼지 않은 츠츠미 가문이 분식회계, 허위공시로 축출되고 전문경영인 체제로 바뀐 때부터 이어져온 기조로, 매년 주주총회에서 한신만큼은 아니지만 야구단 운영에 대해 볼멘소리가 나온다. 이를 보다 못한 세이부홀딩스 주주가 2017년 구단 2군 시설 및 인재육성 시스템에 대해 주주총회에서 GM, 그룹 오너 앞에서 항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구단 사장이 라쿠텐보다 연봉 많다는 개드립을 쳐서 세이부 팬들에게 까였다.[32] 당연히 이곳을 연고지로 둔 J리그우라와 레즈는 일본의 인기 프로축구팀이며, 게다가 서포터들의 규모 역시 일본 최대다.[33] 참고로 사이타마 시는 세이부 철도의 영업구간이 아니라 토부 철도의 영업구간이며, 야쿠르트와 롯데 2군 구장이 오히려 사이타마 시에서 더 가깝다. 그리고 세이부의 홈구장은 사이타마 시에서 접근하기 좀 골룸한 위치에 있는데, 평일에도 경기가 있는 야구는 경기장 접근성이 관중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히려 세이부를 지지하는 팬층은 사이타마 현보다도 도코로자와 시에 인접한 도쿄 도의 시 지역부분(우리가 생각하는 도쿄가 아닌 그 외곽의 위성도시들로 이루어진 도쿄 도의 영역)에 더 많이 분포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세이부가 도쿄에 집착한 것도 일리는 있지만 홈구장이 사이타마 현에 있어서...[34] 일각에서는 사이타마를 연고로 하는 J리그 최고의 인기구단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의 존재와 그에 못지 않은 오미야 아르디자의 인기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둘의 더비는 '사이타마 더비'로도 불릴 정도다.) 실제로는 같은 사이타마현이지만 세이부 라이온즈가 있는 도코로자와시와 사방에서 우라와 레즈깃발이 펄럭이는 사이타마시는 완전히 다른 동네다. 베드타운인 사이타마현의 특징 덕분에 도쿄로 가는 교통시설만 잘 정비돼 있기 때문에 사이타마 동부와 서부는 같은 현이라도 교류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장 사이타마 시에서 야구를 보러 가려면 도쿄 돔이 오히려 더 가깝고 가는 시간은 세이부돔의 절반 정도밖에 안걸린다.(무사시노선 참조)[35] 사이타마TV, 분카 방송, NACK5 FM이 전담중계를 하는 세이부와는 다르게 오릭스는 그 어떤 간사이권 지상파 방송사에서도 전담중계를 하지 않으며, 제작해도 타국으로 보내버린다.[36] 일본프로야구의 경우 1차지명은 전구단 제비뽑기로 뽑는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프로야구 항목 참조.[37] 당연히 복수의 구단이 1순위로 지명한다.[38] 특히 기요하라가 있던 10년간 세이부는 퍼시픽 리그 우승 8회에 일본 시리즈 우승 6회를 차지하는 리즈시절을 누렸다.[39] 단 오오이시 타츠야는 1군에 자리 잡는 데 실패하고 2군에서만 줄창 썩고 있다...[40] 결과적으로 2010년 드래프트에서 무려 6구단과의 경합에서 얻은 귀중한 1라운더 오오이시 타츠야는 폭망했고, 그다음으로 뽑은 2라운더 마키타 가즈히사와 3라운더 아키야마 쇼고가 훗날 메이저리그 까지 도전하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41] 대신 1990년대 세이부 불펜진의 핵심인 시오자키 테츠야를 지명했다.[42] 대신 와쿠이 히데아키를 지명했고 세이부의 에이스가 되었다가 FA선언하고 롯데로 튀었다.[43] 한국에서는 개막 투수로 한국 선수를 내세우는 게 특이할 정도로 용병들이 에이스를 맡지만, 일본에서는 선발 용병은 보통 3~5선발을 맡는 경우가 많고 개막 투수는 어지간하면 토종선발을 내세운다. 수준급 선발투수가 한국에 비해서 많다보니 각 팀별로 못해도 토종선발 3명 정도는 두기 때문. 세이부도 100이닝 이상 던져줄 토종선발은 그래도 3~4명 가까이 있기는 하다.[44] 당장 최근 세이부의 용병 선발들은 2020년의 션 노린, 2018년의 파비오 카스티요(그나마 중박은 쳐서 1년 더 재계약은 했다.), 2017년의 알렉시스 칸델라리오, 스테판 파이프, 2016년의 앤디 밴 헤켄, 2015년의 웨이드 르블랑, 궈쥔린(2019년까지 일본에서 버텼지만 잘 한 시즌은 없었다.)등 실패 사례만 수두룩했다.[45] 2012년에만 50개가량의 빈볼을 던져 리그 탑순위의 빈볼을 기록했다. 심지어 빈볼의 대부분은 중간계투가 아닌 선발투수의 의한 고의성 빈볼[46] 2018년 소프트뱅크와 히로시마의 맞대결이 성사되었다.[47] 요미우리 : 1956~1958, 1963, 1983, 1987, 1990, 1994, 2002, 2008/한신 : 1985/주니치 : 1954, 1982, 1988, 2004/야쿠르트 : 1992, 1993, 1997/히로시마 : 1986, 1991/요코하마 : 1998. 승리한 연도는 볼드체 표시.[48] 센트럴 리그도 쉽지는 않은 게 오릭스가 클라이맥스 시리즈 시행 이후로 퍼시픽, 아니 12구단 중 유일하게 한 번도 일본시리즈에 올라온 적이 없다. 라쿠텐도 잘 안 보이지만 그나마 2013년에 진출했다.[49] 제 2 홈구장은 실제로도 고교야구 전국대회 기간에도 쓰는 교세라 돔 오사카. 홈경기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오릭스 원정 때도 한신 머리수가 더 많다.[50] 세이부 홈구장인 메트라이프돔은 간사이 주요 도시에서도 기본 4시간은 걸릴 정도로 심각하게 접근성이 나쁘다. 일단 도쿄역에서 2번 환승해서 1시간~1시간 반[51] 공교롭게도 옆동네 라이온즈도 결승전에서 타이거즈를 꺾은 적이 없다. 아니 저쪽은 11-0이라서 이긴 팀 찾는 거 자체가 안 될텐데?[52] 일본에서 거의 정상급 위치를 차지하는 사회인야구 대회[53] 데즈카 오사무 스스로 정글대제는 6번 단행본이 나왔고, 뭐가 맞다고 할 수 없다고 전집에서 언급했다.[54] 2013년 시즌 당시 타이업한 작품들.[55] 그러나 그 롯데도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라쿠텐에게 패하면서 2010년의 하극상은 이루지 못했다.롯데는 2010년에 하극상 한번 했다고 맨날 3위하고 하극상으로 닛폰이치 먹으려고 하는데 그 마인드가 문제다[56] [57] 축구선수 혼다 케이스케랑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58] 외국인 선발 10승 이상은 2002년 이후 마지막이며, 비 대만인 출신으로는 라이온즈 사상 최초.[59] 참고로 19년전인 1998년의 퍼시픽리그 야수 신인왕도 세이부에서 나왔다. 바로 아래에 나오는 오제키 타츠야가 주인공.[60] 300경기째 되는 날에 에토 미사와 열애중임을 인정했고, 하늘이 이를 시샘했는지 3회에 몸에 맞는 볼로 인해 교체당했다.[61] 정식 등록 명칭은 '브랜든'[62] 사실 한글로는 길이차이가 엄청나게 크게 나진 않지만 일본인들의 이름은 보통 한자 4글자인 것을 감안한다면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이 선수의 이름을 일본어로 써보면 タイシンガーブランドン大河로 13자가 된다. 영어로는 Brandon Taiga Tysinger 라고 쓴다.[63] 관보에 생년월일과 사는 곳이 똑같은 김유사(金侑司)라는 한국인이 귀화해서 재일교포 설이 나온 케이스. 카네코 유지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금자유사(金子侑司)이다 보니. 그런데 일본 웹에서 김유사라는 사람의 귀화 기록이 실제 관보에는 없고 누군가가 꾸며낸 가짜 기록이라고 쓴 블로그 글이 있는 걸 보면 동성인 카네코 치히로처럼 정말 재일교포와 무관한 순수 일본인일수도.[64] 괄호 안은 재적 연도[65] 한자: 郭泰源. 일본에서의 등록명은 가쿠 타이겐. 중국식 발음으로는 궈타이위안.나이 든 일본야구 전문가들은 곽태원이 더 익숙하다.[66] 등록명은 데니였으며, 일본식 이름은 유이 토모리이다.[67] 사이토 유키의 동기로, 6개 구단에 1지명을 받은 와세다대학의 영건이었지만 연이은 부상에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은퇴.[68] 일본판 톰 션. 작년의 밴헤켄보다 더 허접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즌 말기인 9월에 방출당했다(...) 세이부에서는 똑같이 전력 외로 밀려난 다른 외국인 선수들을 10월 시즌 끝 까지 기다려줬는데 이 선수는 얼마나 빡쳤는지 중도에 방출.[69] BB/K가 메히아는 .334인데 스미타니는 .212 (...) 참고로 볼넷을 절대로 못 얻어나간다고 개까이는 박종윤의 통산 BB/K가 .277이다...[70] 후에 본인이 결백을 주장하여 재조사 후 영구제명은 취소되었다.[71] 2016년 아라이 타카히로가 경신할 때까지 센트럴리그 최고령 MVP였다. 다만 아라이의 MVP 수상은 베테랑 예우가 꽤 많이 반영되어 논란이 있다.[72] 볼드체는 일본시리즈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