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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2 23:37:50

마쓰이 가즈오

마쓰이 카즈오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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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시즌 코칭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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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e5e5e5
감독 77 마츠이 카즈오
1군 83 히라이시 요스케(수석코치) 81 토요다 키요시(투수코치) · 93 아오키 하야토(투수코치)
80 시마 시게노부(타격코치) · 91 타카야마 히사시(타격코치) · 82 노다 코스케(배터리코치)
76 아베 마사히로(내야수비·주루코치) · 86 아카다 쇼고(외야수비·1루 주루코치)
2군 74 니시구치 후미야(2군 감독) · 92 키요카와 에이지(투수종합코치) · 79 오제키 타츠야(야수종합 겸 타격코치)
88 오오시마 히로유키(타격코치) · 95 오이시 타츠야(투수종합코치) · 85 에노키다 다이키(투수코치)
90 오사다 슈이치로(투수코치) · 96 나카타 쇼타(배터리코치)
87 쿠로다 사토시(내야수비·3루 주루코치) · 84 쿠마시로 마사토(외야수비·주루코치)
3군 98 아라카와 유타(배터리코치) · 94 오니자키 유지(내야수비·주루코치) · 97 아오키 토모시(육성코치 겸 인재개발총괄)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육성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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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NPB 팀 명단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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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 가즈오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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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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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신 타이거스 엠블럼.svg 파일:히로시마 도요 카프 엠블럼.svg 파일:오릭스 버팔로즈 엠블럼.svg 파일:치바 롯데 마린즈 엠블럼.svg
오카다 아키노부 아라이 타카히로 나카지마 사토시 요시이 마사토
파일: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엠블럼.svg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svg 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엠블럼.svg 파일: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엠블럼.svg
미우라 다이스케 아베 신노스케 코쿠보 히로키 이마에 토시아키
파일: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엠블럼.svg 파일:주니치 드래곤즈 엠블럼.svg 파일: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엠블럼.svg 파일: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엠블럼.svg
타카츠 신고 타츠나미 카즈요시 마츠이 카즈오 신조 츠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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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Leo
ミスターレ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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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2c9fe8> 초대 제2대 제3대
No.7 이시게 히로미치 No.7 마츠이 카즈오 No.1 쿠리야마 타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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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 가즈오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V1.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2013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8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MVP
니시구치 후미야
(세이부 라이온즈)
마쓰이 가즈오
(세이부 라이온즈)
쿠도 키미야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7~2003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유격수 부문 베스트 나인
타나카 유키오
(닛폰햄 파이터즈)
마쓰이 가즈오
(세이부 라이온즈)
가와사키 무네노리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7, 1998, 2002, 2003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
타나카 유키오
(닛폰햄 파이터즈)
마쓰이 가즈오
(세이부 라이온즈)
코사카 마코토
(치바 롯데 마린즈)
코사카 마코토
(치바 롯데 마린즈)
마쓰이 가즈오
(세이부 라이온즈)
가와사키 무네노리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7~1999 퍼시픽 리그 최다 도루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9, 2002 퍼시픽 리그 최다 안타

파일:NPB 로고.svg 일본프로야구 선정 20세기 베스트9

외야수

외야수

외야수

유격수

2루수

3루수

투수

오 사다하루
{{{#!wiki style="background-color:#008275; margin : 2px ; border-radius : 3px ; display:inline-block ; color :#00264F; font-style: normal ; width:80px ; text-align: center"
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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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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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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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555,#aaaaaa
초대
미야자키
파일:일본 국기.svg
(1950)
2대
미하라
파일:일본 국기.svg
(1951~1959)
3대
카와사키
파일:일본 국기.svg
(1960~1961)
4대
나카니시
파일:일본 국기.svg
(1962~1969)
5대
이나오
파일:일본 국기.svg
(1970~1974)
6대
에토
파일:일본 국기.svg
(1975)
7대
듀로셔
파일:미국 국기.svg
(1976)
8대
키토
파일:일본 국기.svg
(1976~1977)
9대
네모토
파일:일본 국기.svg
(1978~1981)
10대
히로오카
파일:일본 국기.svg
(1982~1985)
11대
모리
파일:일본 국기.svg
(1986~1994)
12대
히가시오
파일:일본 국기.svg
(1995~2001)
13대
이하라
파일:일본 국기.svg
(2002~2003)
14대
이토
파일:일본 국기.svg
(2004~2007)
15대
와타나베
파일:일본 국기.svg
(2008~2013)
16대
이하라
파일:일본 국기.svg
(2014)
17대
타나베
파일:일본 국기.svg
(2014~2016)
18대
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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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022)
19대
마쓰이
파일:일본 국기.svg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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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 가즈오의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보유 기록(NPB)
연속 경기 끝내기 홈런 2경기
한 경기 최다 도루자 3개
연속 시즌 150안타 이상 1997~2003
연속 시즌 170안타 이상 1997~2003
한시즌 1번타자 최다 홈런 36홈런
올스타전 한 경기 최다 도루 4개

보유 기록(MLB)
데뷔 첫타석 초구 홈런 2004년

세이부 라이온즈 등번호 32번
하라구치 테츠야
(1989~1993)
마쓰이 가즈오
(1994~1996)
이누부시 토시아키
(1997~2000)
세이부 라이온즈 등번호 7번
다린 잭슨
(1995~1996)
마쓰이 가즈오
(1997~2003)
카타오카 야스유키
(2005~2013)
{{{#Fff [[뉴욕 메츠|뉴욕 메츠]] 등번호 25번}}}
게리 매튜스 주니어
(2002)
마쓰이 가즈오
(2004~2006)
페드로 펠리치아노
(2006~2010)
{{{#c4ced4 [[콜로라도 로키스|콜로라도 로키스]] 등번호 16번}}}
엘리 마레로
(2004~2005)
마쓰이 가즈오
(2006)
제로니모 길
(2007)
{{{#c4ced4 [[콜로라도 로키스|콜로라도 로키스]] 등번호 7번}}}
JD 클로서
(2005~2006)
마쓰이 가즈오
(2007)
세스 스미스
(2009~2011)
휴스턴 애스트로스 등번호 3번
필 가너
(2004~2007)
마쓰이 가즈오
(2008~2010)
루이스 두랑고
(2011)
{{{#ffffff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등번호 32번}}}
코사카 마코토
(2009~2010)
마쓰이 가즈오
(2011)
마스다 신타로
(2012~2018)
{{{#ffffff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등번호 7번}}}
야마사키 타케시
(2005~2011)
마쓰이 가즈오
(2012~2017)
타츠미 료스케
(2019)
{{{#fff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등번호 7번}}}
와키야 료타
(2014~2015)
마쓰이 가즈오
(2018)
가네코 유지
(2020~)
{{{#fff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등번호 77번}}}
아카다 쇼고
(2015~2018)
마쓰이 가즈오
(2019~)
현역
}}} ||
}}}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No.77
마쓰이 가즈오
松井稼頭央[1] | Kazuo Matsui
<colbgcolor=#143d69><colcolor=#fff> 생년월일 1975년 10월 23일 ([age(1975-10-23)]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오사카부 히가시오사카시
학력 PL학원고등학교 (오사카)
신체 177cm, 85kg
포지션 유격수, 2루수, 외야수, 3루수
투타 우투양타
프로입단 1993년 드래프트 3라운드 (전체 35번, 세이부)
소속팀 세이부 라이온즈 (1994~2003)
뉴욕 메츠 (2004~2006)
콜로라도 로키스 (2006~2007)
휴스턴 애스트로스 (2008~2010)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011~2017)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018)
지도자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군 테크니컬 코치[2] (2018)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군 감독 (2019~2021)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군 수석코치 (2022)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 (2023~)

1. 개요2. 선수생활
2.1. 세이부 시절2.2. 뉴욕 메츠 시절2.3. 콜로라도 로키스 시절2.4. 휴스턴 애스트로스 시절2.5. 일본 복귀
3. 플레이 스타일
3.1. 타격3.2. 주루3.3. 수비
4. 지도자 시절
4.1.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군 감독 (2019~2021)4.2.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군 수석 코치 (2022)4.3.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군 감독 (2023~)
5. 여담6. 응원가7. 연도별 기록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일본프로야구 야구 선수. 전 메이저리거. 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활동하다가 200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진출해 2010년까지 활동했고, 그 후 다시 일본으로 복귀하여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활동하다가 2018년 친정팀 세이부로 복귀해 한 해 동안 활동한 후 현역 생활을 마쳤다.

통산 안타는 2,090개로 2021년 기준 35위에 랭크되어 있다.

2023년 기준 퍼시픽리그 최연소 감독이다.

2. 선수생활

2.1. 세이부 시절

파일:external/fan.npb.or.jp/kazuo_main.jpg
야구계를 대표하는 리드오프맨
마쓰이 가즈오
2000년대까지 오사카부를 대표하는 고교야구 명문이자 수많은 프로 선수를 배출한 학교로 이름을 날린 PL학원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팀의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다. 이 시기 갑작스런 팔 골절상으로 인한 슬럼프를 겪어 자신이 달고 있던 에이스의 상징인 등번호 1번은 일시적으로 반납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각 구단의 스카우터진에게 뛰어난 운동 능력을 주목받아 1993년 드래프트에서 3순위로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하게 되었다. 입단 직후 강한 어깨와 빠른 발을 높게 평가받으며 투수에서 내야수로 전향한 데 이어 스위치 히터로 변신하게 된다.

1년차인 1994년엔 2군에서만 뛰며 담금질을 거듭했고, 그 이듬해인 1995년에 1군에 데뷔하여 곧바로 1군 붙박이로 정착했다. 3년차인 1996년부터 타나베 노리오를 밀어내고 본격적으로 유격수로 정착했고, 이 해에 퍼시픽리그 2위인 시즌 50도루[3]를 기록하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데 이어 시즌 종료 후엔 등번호를 32번에서 과거 같은 내야수였던 세이부를 대표하던 프랜차이즈 스타 이시게 히로미치의 등번호였던 7번으로 바꾸며 향후 본인을 상징하는 등번호로 만들게 된다.[4]

1997년에 처음으로 3할 타율을 기록했고 62도루를 기록하며 개인 첫 도루왕 타이틀을 수상, 팀의 3년만의 퍼시픽리그 우승에 큰 몫을 하였다. 특히 이 해 올스타전에서 1경기 4도루를 기록하여 올스타전 MVP를 기록할 정도로 스타로써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도 2년 연속 도루왕 타이틀[5]과 함께 팀의 2년 연속 퍼시픽리그 우승에 공헌하여 그해 5년 연속 수위타자를 수상한 스즈키 이치로, 최다승을 수상한 팀 선배 니시구치 후미야를 제치고 퍼시픽리그 MVP를 수상했다.[6] 1997년부터 1999년까지 3년 연속 최다 도루를 기록했고, 나아가 퍼시픽 리그, 1990년대는 물론 일본프로야구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일본의 간판 유격수로 성장했다. 마침 이 때가 마쓰이 히데키가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거포로 명성을 얻던 시기인지라 그는 자연스럽게 리틀 마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1996~2003년까지 세이부의 유격수로 활약하면서 이전까진 대부분 수비 위주로 평가받던 유격수의 고정관념을 깨며 일본프로야구 유격수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갔다. 1996년부터 2003년까지 8시즌 동안 통산 1143경기 연속출장, 1997년부터 2003년까지 7시즌 연속 3할 이상 타율과 시즌 170개 이상의 안타를 기록할 정도로 꾸준했다(1999년, 2002년 리그 최다안타 포함. 특히 2002년에는 193안타 기록). 거기에 장타력까지 더하여 1999년에 15홈런을 시작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전까지인 2003년까지 131개의 홈런(연평균 26.2홈런)을 때려냈다. 20-20을 세 번(2000~2002) 기록했고, 특히 2002년에 일본프로야구 역대 8번째이자 스위치 히터로서는 사상 최초의 트리플 쓰리(3할-30홈런-30도루)을 기록했다. 거기에 통산 1000안타를 역대 4위의 속도로 달성하는 등 일본프로야구의 역사를 써나갔다.

베스트 나인 7회(1997~2003), 골든 글러브 4회(1997, 1998, 2002, 2003) 수상에, 2001년에는 일본프로야구 20세기 센츄리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기도 했다.[7]

하지만 우승하고는 인연이 없어서 퍼시픽 리그 우승을 3번(1997, 1998, 2002) 경험했지만 일본시리즈에서는 각각 야쿠르트 스왈로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밀려 준우승에 머물렀고 여기에 후술될 콜로라도 로키스 락토버 시절까지 포함하면 5번의 준우승을 경험한 일본프로야구의 대표적인 콩라인이었다.[8] 하지만 2013년 라쿠텐 소속으로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하면서 콩라인 탈출에 성공한다.

2.2. 뉴욕 메츠 시절

파일:external/www.posters.ws/kazuo_matsui_2004_studio_plus_photofile.jpg

마쓰이 가즈오의 화려했던 리즈 시절,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스카우터들은 그의 좋은 수비와 다재다능한 공격능력을 높히 샀다. 게다가 스즈키 이치로의 메이저리그 적응 성공과 마쓰이 히데키의 메이저리그 진출 선언과 맞물려 더욱 주목받기 시작했다. 실제로 2002년 미일 올스타전에서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은 두 마쓰이의 활약에 집중했다.

결국 마쓰이 가즈오도 2003년 시즌이 끝난 뒤 FA로 풀렸고 오프 시즌에 뉴욕 메츠로 전격 입단하게 된다.[9] 연봉은 연평균 $6M.

많은 관심을 받으며 어메이징 메츠에 입단했지만 처음부터 주전 유격수자리를 보장받을 수 없었다. 5툴 플레이어로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립서비스. 당시 메츠에서 애지중지 키우고 있던 호세 레예스를 메이저로 콜업시킨 상황에서 이 둘의 유격수 자리를 둔 경쟁을 피할 수 없었다. 일단은 시즌 초에 마쓰이가 유격수, 레예스가 2루수로 수비진이 운영이 됐다.

처음에는 마쓰이 가즈오가 2004년 개막전에서 메이저리그 신인으로서는 첫 타석 초구를 홈런으로 쳐낸 최초의 선수로 기록되며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지만 이후 침착하게 성장한 호세 레예스가 주춤한 마쓰이의 슬럼프를 틈타 다시 유격수로 돌아왔고 결국 마쓰이는 2루수로 수비 위치가 변경됐다. 그러나 타격 부진은 그 이후에도 계속 되면서 결국 시즌 후반부에 주전 자리도 빼앗기며 메이저리그 첫 시즌을 마감했다.

첫해 최종 성적은 509타석 .272/.331/.396 7홈런, 14도루 .727OPS를 기록했다. 사실 후반기때 부진해서 그렇지 최종성적만 놓고 본다면 내야수로서 꽤 준수한 타격 성적이고 규정타석역시 채웠다.[10]

이후 2005년 개막전에 첫 타석에서 또 한번 홈런을 기록하면서 메이저리그 드디어 기량을 만개하나 했더니 부상과 부진에 빠지며 .255 /.300/.352 .652OPS라는 성적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2006년 자신의 시즌 첫 경기 첫 타석에서 동양인 최초의 인사이드 파크 홈런을 기록하는 등 3년 연속으로 첫 경기, 첫 타석, 첫 홈런을 기록했지만 .267/.310/.379 .689OPS로 시즌을 마무리하며 진귀한 기록만 내는 선수로 전락했다.

결국 2006 시즌 포스트시즌을 노리고 있던 메츠는 6월 9일 마쓰이 가즈오+현금에 콜로라도 로키스로부터 백업 야수 일라이 머레로를 교환하는 트레이드 딜을 성사시킨다.

2.3. 콜로라도 로키스 시절

파일:external/www2.pictures.gi.zimbio.com/Kazuo%2BMatsui%2BMark%2BReynolds%2BColorado%2BRockies%2B3_sQa-3Uilkl.jpg

마쓰이는 메츠에서는 기대보다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줬지만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부활하며 로키스 사상 최고의 시즌의 일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로키스로 이적했을 때 가장 반겼던 사람은 바로 토드 헬튼. 마쓰이와 헬튼은 1995년 하와이 겨울 훈련에서 처음 만났는데, 당시 헬튼은 마쓰이의 수비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로키스로 이적한 이후 2루수로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32경기동안 타율 .345, 출루율 .392, 장타율 .504, 19타점, 8도루에 OPS는 무려 .896을 찍으면서 기적적인 반등에 성공했다. 따라서 시즌이 끝나고 FA로 풀렸지만 로키스와 바로 단년계약($1.5M)을 맺을 수 있었다.

2007 시즌에 종종 부상에 시달리면서 규정타석을 채우지는 못했지만, 클러치 히팅, 빈틈없는 주루 플레이와 수비를 보여주며 시즌 중반부터 주전 2루수로 활약했다. 특히 시즌 32도루, 4도루실패를 기록하면서 뛰어난 주루 능력을 보여주었다.[11]

최종성적은 .288/.342/.405 .746OPS bWAR 3.4으로 처음 메이저리그에서 마쓰이에 기대하였던 그모습 이상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수비WAR만 1.6을 기록했고 2루수 중 수비범위(레인지팩터) 1위를 기록하며 리그 최상급의 2루 수비를 보여줬다.

그리고 마쓰이의 활약은 포스트 시즌에 두드러졌는데 2007 NLCS, 2007 월드 시리즈 등 포스트시즌 합계 타율 .340, OPS .847를 기록하며 앞으로도 전설로 남을 락토버의 첨병으로 활약하며 화려하게 시즌을 마무리했다.

2.4. 휴스턴 애스트로스 시절

로키스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마쓰이는 크레이그 비지오제프 켄트 이후 공석이 된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2루수로서 32세의 나이에 3년의 좋은 계약을 받고 2008 시즌부터 활약하게 된다.

하지만 애스트로스의 기대와는 달리 2008 시즌 개막부터 DL에 올라간 것을 시작으로 이후에도 각종 잔부상에 시달리며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293, OPS는 .781 커리어하이를 찍는듯 했으나 부상으로 96경기 밖에 나오지 못했다.

이듬해인 2009 시즌 8월 15일에 미일통산 2000안타(일본 1433안타, 미국 567안타)를 기록하여 명구회에 가입되기도 했지만 부상과 노쇠화로 예전의 명성을 이을 수가 없었다. 결국 타율은 2할5푼으로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다만 리그 2루수 중 수비율 2위, 수비범위와 토탈존 1위를 기록하며 수비만큼은 좋은 2루수였다...

결국 잦은 부상유리몸화?이 문제가 되어 2010 시즌 중반에 애스트로스에서 방출되고 이후 콜로라도 로키스 산하 AAA팀에 머물었다.

2.5. 일본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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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메이저리그 생활을 접고 2011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 입단하면서 7년 만에 일본프로야구로 되돌아왔다. 등번호도 자신이 처음 프로에서 썼던 32번[12]을 달며 처음으로 돌아가는 마음으로 시즌에 임했다. 시즌 결과는 타율 .260, 9홈런[13] 48타점[14], 15도루 등 전성기보다는 한참 먼 성적을 냈다. 하지만 시즌 34개 2루타(파리그 1위), 8할대의 도루성공률 등 아직까지는 리드오프로서 준수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2012년 기존에 7번을 달던 야마사키 타케시의 퇴단으로 7번을 닮과 동시에 팀의 주장이 되었고, 고참 선수로써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도 수행하게 되었다.

2013년에는 개인 성적은 하락세를 겪었지만 다나카 마사히로빨을 등에 업은 소속팀 라쿠텐 이글스가 선풍을 일으키는 가운데 주전 유격수이자 주장으로서 야수진을 이끌면서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 프로 데뷔 18년만에 생애 첫 우승반지를 끼게 됐다. 

2014년부터는 나이 탓인지 외야수로 자주 나오는 편이었으나...

2017년 3년만에 유격수로서 출전하기도 했다. 수비능력은 여전한듯.[15]

2017 시즌 후 라쿠텐 측에선 코치직을 제안했지만 본인은 현역 연장을 원해 팀을 떠나게 됐다. 그리고 친정팀인 세이부에 플레잉코치로 복귀하게 되었다! 프랜차이즈 스타들이 줄줄이 FA로 팀을 떠나는 것만 보던 세이부 팬들은 늦게나마 귀향한 왕년의 판타지스타의 귀환에 크게 환영하는 중. 덤으로 2018 시즌 일본프로야구 최고령 야수가 되었다. 이후 타율 0.129 2타점의 기록을 남긴뒤 은퇴를 선언했고, 세이부 구단은 2군 감독 자리를 마쓰이에게 제안했다.
여담으로 2018년 10월 4일 치바 롯데 마린즈 전은 ZOZO 마린 스타디움에서의 현역 마지막 경기였는데, 이 날 롯데에서는 경기 전에 전광판에 수고 메시지를 띄우고 동갑내기인 후쿠우라 카즈야가 꽃다발을 전해 주는 등 조촐하게 은퇴 행사를 치러 주었다.[16] 여담으로 이 날 경기 후에 롯데에서도 은퇴식을 하는 타자가 있었다. 그래서 1경기에서 2명의 타자가 은퇴 기념으로 꽃다발과 축하 메시지를 받는 감동적인 결과가 연출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5툴 플레이어이자 스위치 히터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유격수 계보를 잇는 선수로 꼽혔다.

3.1. 타격

세이부 시절 첫 해만 빼고 그의 리즈시절이라 할 수 있는 1996년~2003년 동안 평균 .313 타율, 도루 35.6개, 홈런 18.5개의 뛰어난 성적을 냈다. 적어도 저 시절만큼은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공격형 유격수로 봐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일본 복귀 이후에는 메이저에서 당한 여러 부상과 노쇠화로 모든 공격 능력이 감소하면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에는 스즈키 이치로처럼 일본 시절 장타력을 크게 포기하고 교타자로 스타일을 바꿨다. 메이저리그 통산 타율은 .267 홈런 년평균 5개 정도에 불과했으나 2루타를 어느정도 때려내면서 통산 OPS는 7할대를 사수했다.

세이버메트릭스의 경우 메이저리그 통산 공격WAR은 6.0[17]을 쌓았고 통산 OPS+는 83을 기록하면서 메이저리그 평균 2루수[18]의 공격 생산력에 조금 못미치는 정도였다.[19]

3.2. 주루

일본 시절 주루는 1996년~2003년 동안 평균 도루 35.6개를 기록할 정도로 좋았으나 메이저리그에 와서는 첫 3시즌 동안 평균 도루 갯수가 10개에 불과할 정도로 많이 하락하였다.

하지만 락토버의 일원이었던 2007년에 32도루,4도루사로 일본 시절과 변함없는 도루 능력을 보여줬고 그 다음해는 20개, 19개를 기록하였다.

사실 도루 갯수가 많이 하락한 것은 리그차보다 마쓰이가 메이저리그에서 부상을 많이 당했기에 자제했던게 컸다. 그예로 메이저리그 통산 도루 102개에 도루 실패는 18개로 성공률이 약 85%에 달하며 이는 메이저리그 역대 7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3.3. 수비

일본 기준으로는 정상급 유격수 수비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빠른 타구등에 고전하며 본 포지션인 유격수에서 밀려나 2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동양인 유격수 메이저리그 적응 문제를 이야기할 때 항상 거론되는 선수.[20]

전성기 때는 탈아시아급 운동능력으로 평가를 받았는데, 일본의 유격수 치고는 다소 큰 체격(178cm)으로 강견에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했다. 어느 정도였다하면, 통상적으로 2루수가 커버하는 우중간 얕은 외야를 커버하기도 했고,[21] 3-유간의 깊은 땅볼을 노스텝으로 던져 1루에 송구해 아웃 시키는 메쟈리그 급의 플레이를 보여줬다. 골든 글러브를 4회 수상(1997, 1998, 2002, 2003)했다.
하지만 화려한 퍼포먼스 때문에 실책이 적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수비쪽에서 가 은근 있었다. 한 예로, 평론가로 활동하던 오이시 다이지로(大石第二郞)[22]는 "수비면에서는 마쓰이 가즈오보다 더 견실하고 범위도 더 넓은 코사카 마코토가 골든글러브를 받아야 한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23] 다만, 마쓰이가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해를 보면 코사카의 출장 경기수가 적거나 부진했던 점을 감안해도, 어쨌든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공수에서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했던 유격수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정작 미국에 가서는 자신의 포지션인 유격수를 지킬 수가 없어 뉴욕 메츠에서는 호세 레예스와의 경쟁에서 밀려 2루수로 전향했다. 특히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에서도 땅볼타구는 기본적으로 정면에서 처리하는 수비를 요구하는데, 뉴욕 메츠 입단 초기 유격수로 출전하던 시절 미국에서는 보통 백핸드로 처리하는 타구도 정면으로 처리하려다가 에러를 저지르거나 내야안타를 내주는 상황이 상당히 많았다.[24] 레예스가 훗날 거물급 유격수로 성장 한 것과 별개로 미국무대에서 유격수 마쓰이 가즈오의 수비는 실패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다만 이때문에 마쓰이 가즈오의 수비가 메이저리그에서 안좋았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는 유격수로 한정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2루수로 전향한 후에는 매우 좋은 평을 들었으며 세이버메트릭스로 봐도 2루수중 탑급의 수비범위(레인지팩터)를 기록했으며 2007년에는 무려 14 DRS를 기록하였다.

이에 마쓰이 가즈오가 MLB에서도 수준급의 2루수비를 보여준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습관을 고친 덕이라고 봐야할지 아니면 유격수급 송구를 2루수 쪽에서 1루로 꽂는 것으로[25] 좋지 않은 일본식 포구습관의 단점을 가렸다고 봐야 하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이후 일본 라쿠텐으로 복귀해서는 자신의 원 포지션인 유격수로 돌아왔지만 이전 기량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4. 지도자 시절

4.1.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군 감독 (2019~2021)

2019년부터 2021년까지 3년간 세이부의 2군 감독을 맡으며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세이부가 2020년, 2021년 주축 선수들이 계속해서 부상과 부진으로 전력에서 이탈할 동안 온갖 신인 선수들을 동원하여 구멍난 전력을 간신히 메꿨는데, 이는 카즈오가 2군 감독으로서 신진 선수 육성 역할을 잘 수행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

구체적으로 서술하자면 2020년 신인 드래프트로 지명한 12명의 선수 중 5명이 1년차인 2021년부터 1군 데뷔를 한 데 이어 4위로 지명한 외야수 와카바야시 가쿠토, 육성 5위로 지명한 투수 미즈카미 요시노부는 1군 레귤러로 정착하는 데 성공했으며, 특히 미즈카미는 2년차인 2022년에 리그 신인왕까지 수상하며 초대박을 쳤다.[26]

2군에서도 1순위로 지명된 신인 거포 와타나베 켄토를 꾸준히 기용하여 2021년 2군 홈런, 타점 2관왕 수상으로 이끄는 수완을 발휘했다.

4.2.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군 수석 코치 (2022)

2021년, 츠지 하츠히코 감독이 계약이 만료되고 시즌 성적도 부진해 사임의사를 밝히면서[27] 2군 감독이던 마쓰이가 후임 감독 0순위로 급부상했다. 사임 소식이 뜬 이후부터는 사실상 마쓰이의 1군 감독 승격이 확정적인 분위기나 다름없었지만 10월 14일 기사에선 구단이 츠지 감독의 사임을 만류하고 1군 감독이 아닌 1군 수석 코치를 맡길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놔 아직까지는 거취가 불분명하다.#

결국 10월 26일, 츠지 감독의 유임이 확정되자 1군 수석코치로 영전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대신 니시구치 후미야 1군 투수코치가 2군감독을 맡게 되었다.

2022년 8월 13일 현재 1위 자리를 놓고 팀은 소프트뱅크와 경쟁중이며 2022년 시즌 후 1군 감독으로 임명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스테이지 경기 하루전 10월 7일 새벽 예상대로 츠지 후임으로 세이부 감독으로 내정됐다.

4.3.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군 감독 (2023~)

10월 19일 취임 기자회견을 열었다. 수석코치로 전 시즌까지 팀 내 타격 코치를 맡았던 히라이시 요스케[28]를 내정했다.

감독 취임 이후 FA를 선언한 닛폰햄 외야수 콘도 켄스케 영입 협상에 직접 나섰으나, 7년 50억엔이란 초대형 계약을 제시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밀려 영입에 실패했고 모리 토모야까지 FA로 오릭스 버팔로즈로 이적해 버리면서 스토브리그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지난 해보다 약화된 전력으로 감독 데뷔 시즌을 맞이하게 되었다. 2020년 이후로 컨택이 나빠져 버린 토노사키 슈타 등 기존 전력들의 성적 회복과 신예 스타들의 발굴이 절실해진 상황.

4월엔 높은 위닝시리즈 비율로 많은 승수를 쌓으면서 출발했지만 서서히 약화된 전력과 겐다의 부상으로 인한 한계가 드러나고 있고, 결국 5월 중순 5할 승률마저 깨졌으며, 야마카와 호타카마저 성범죄로 고발당하는 대형사고를 치고 사실상 시즌아웃이 확정되면서 골치가 아프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나카무라 타케야마저 5월 하순에 부상을 입고 2군으로 가면서 결국 6월에 최하위까지 떨어졌다.

7월에는 갑자기 5연승을 달리며 소프트뱅크(8연패)와 닛폰햄(최하위)을 각각 궁지로 몰아넣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다시 부진하면서 9월 시점에서는 닛폰햄과 탈꼴찌 경쟁을 펼치고 있다. 결국 시즌 5위로 마감. 야마카와의 논란과 산적타선 시절 멤버들의 이적, 부진과 노쇠화 등으로 타선의 중심으로 세울만한 파워히터가 없는[29] 상황에서 경험이 일천한 젊은 선수들을 데리고 점수를 짜내는 적극적인 주루플레이를 강조했는데, 이 과정에서 주루사나 무뇌플레이가 속출하며 까이기는 했다. 다만 상술했듯 1년차 감독의 역량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차원의 전력상 악재가 너무 많았던 탓에 까임 지분이 아주 많지는 않다. 이미 투수진에 타카하시 코나, 타이라 카이마, 이마이 타츠야, 요자 카이토, 스미다 치히로 등 충분한 전력이 갖춰진 만큼 앞으로 야수진 리빌딩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여지가 있다. 스스로 야수진 전력과 팀 분위기를박살낸 PL학원 선배 옆동네 타츠나미 카즈요시에 비하면 아주 양반

5. 여담

6. 응원가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쓰던 응원가 중 팀의 원조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이시게 히로미치의 응원가를 물려받은 곡이 유명하다. 가사는 이시게(石毛) 부분을 카즈오(稼頭央)로 바꾼 걸 빼면 두 선수 버전 모두 동일하다.

狙い球は豪速球 打てば飛ぶ飛ぶ 銀河の果てに
노리는 공은 강속구 치면은 난다 난다 은하의 끝으로
ミスターレオ稼頭央
미스터 레오 카즈오

7. 연도별 기록

역대 기록 (NPB)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1995 세이부 69 219 45 9 1 2 25 15 21 7 26 .221 .245 .304 .549 0.6
1996 130 518 134 22 5 1 51 29 50 14 93 .283 .307 .357 .664 3.6
1997 135 645 178 23 13 7 91 63 62 44 89 .309 .362 .431 .793 5.8
1998 135 641 179 38 5 9 92 58 43 55 89 .311 .370 .442 .812 4.9
1999 135 609 178 29 4 15 87 67 32 56 75 .330 .389 .482 .872 7.4
2000 135 611 177 40 11 23 99 90 26 46 60 .322 .372 .560 .932 7.3
2001 140 613 170 28 2 24 94 76 26 46 83 .308 .365 .496 .861 5.6
2002 140 651 193 46 6 36 119 87 33 53 112 .332 .389 .617 1.006 10.7
2003 140 655 179 36 4 33 104 84 13 55 124 .305 .365 .549 .913 6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2011 라쿠텐 139 572 140 34 2 9 51 48 15 26 94 .260 .294 .381 .675 3.2
2012 106 433 107 22 4 9 55 43 14 26 55 .266 .312 .408 .720 4
2013 125 497 111 26 2 11 55 58 1 40 85 .248 .311 .388 .700 1.7
2014 128 488 129 32 3 8 57 46 9 36 78 .291 .342 .430 .752 0.7
2015 126 501 114 17 1 10 52 48 14 43 82 .256 .324 .366 .690 0.7
2016 56 179 34 6 1 2 19 13 3 17 42 .213 .291 .300 .591 -1
2017 44 83 16 2 1 2 6 10 0 6 23 .211 .277 .342 .619 -0.2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2018 세이부 30 41 6 1 0 0 8 2 0 2 10 .154 .195 .179 .375 -0.5
NPB 통산
(17시즌)
1913 7956 2090 411 65 201 1065 837 363 572 1220 .291 .344 .450 .793 60.5
역대 기록(MLB)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2004 NYM 114 509 125 32 2 7 65 44 14 40 97 .272 .331 .396 .727 0.4
2005 87 295 68 9 4 3 31 24 6 14 43 .255 .300 .352 .652 0.1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2006 NYM/COL 104 453 65 12 3 3 32 26 10 16 46 .267 .310 .379 .688 0.4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2007 COL 104 453 118 24 6 4 84 37 32 34 69 .288 .342 .405 .747 2.7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2008 HOU 96 422 110 26 3 6 58 33 20 37 53 .293 .354 .427 .781 1.8
2009 132 533 118 20 2 9 56 46 9 34 85 .250 .302 .357 .659 0.7
2010 27 78 10 1 0 0 4 1 1 4 10 .141 .197 .155 .352 -0.8
MLB 통산
(7시즌)
630 2555 615 124 20 32 330 211 102 179 403 .267 .321 .380 .701 5.3

8. 관련 문서



[1] 본명은 松井和夫. 등록명과 발음은 똑같다.[2] 선수 겸임.[3] 이 해 도루왕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무라마츠 아리히토가 58도루로 수상했다.[4] 이시게가 1994년 FA로 팀을 떠난 직후엔 외국인 타자 다린 잭슨이 1995~1996년까지 2년간 7번을 달고 있었다. 이후 잭슨의 퇴단에 맞춰 딱 7번이 비게 되면서 마쓰이 가즈오가 이 번호를 달게 된 것.[5] 코사카 마코토와 공동 수상이며, 이 도루왕 경쟁 과정에서 세이부 벤치가 코사카를 상대로 고의 보크를 시전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코사카 항목에 자세한 상황이 서술되어있다.[6] 투표에서는 앞의 두 선수들보다 1위표를 적게 받았으나, 그 대신 2위표를 배로 받으면서 총 점수에서 19점 차이로 1위를 차지하여 MVP 수상에 성공했다.[7] 일본프로야구 20세기 센츄리 베스트 나인 선정자 : 투수 에나츠 유타카, 포수 후루타 아츠야, 1루수 오 사다하루, 2루수 오치아이 히로미츠, 3루수 나가시마 시게오, 유격수 마쓰이 가즈오, 외야수 장훈, 스즈키 이치로, 마쓰이 히데키[8] 심지어 그의 대표적 소속팀이었던 세이부는 그가 입단하기 직전인 1992년을 마지막으로 일본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마쓰이가 메이저로 떠난 직후인 2004년에 바로 일본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9] 같은 시기 이승엽도 FA로 풀려 해외진출을 타진하고 있어 여러모로 비교대상이었는데,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전 국내 모 방송과 인터뷰를 갖기도 했다.[10] 사실 메이저리그에서 규정타석을 채우기도 힘든데 그만큼 실력이 있어야하고 부상을 당하지 않아야한다.(KBO 출신중에선 메이저리그에서 규정타석을 채운 선수가 아무도 없었다가 2022년에 비로소 김하성이 최초로 규정타석에 도달했다.)[11] 이에 시즌 후반에는 1번 타자로 주로 나섰다.[12] 이유는 따로 없고, 마쓰이가 돌아올 당시 거포 타자로 활약하던 야마사키 타케시가 7번을 등번호로 쓰고 있었다. 그리고 2011 시즌 종료 후 방출된 야마사키가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면서 마쓰이가 7번으로 바꿔 달았다.[13] 진짜 적은 홈런 수인데 이게 팀 2위 기록이다(...) 아무리 2011년 NPB가 반발력이 적은 공인구를 새롭게 도입하면서 최악의 투고타저 시즌이 되었다곤 하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참고로 팀 1위는 위에 나온 야마사키 타케시인데 이 사람마저도 홈런이 꼴랑 11개(...) 야마사키가 당시 43세의 고령인 걸 감안해도 이건 뭐..[14] 이건 팀내 공동 1위. 물빠따 라쿠텐.[15] https://youtu.be/GoIMsHk7s9g[16] 한국으로 치면 이종범이 다른 팀 구장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도 작게 은퇴기념 행사를 했던 것과 비슷하다.[17] 강정호와 똑같다.[18] 마쓰이는 메이저리그에서 유격수보다 2루수로 출전한 경기가 많기에 주로 2루수로 비교하는편이다.[19] 2020년 기준으로 평균적인 2루수는 약 90정도를 기록한다.[20] 특히 강정호의 진출때 많이 언급된 사항이다.[21] 마쓰이 가즈오가 데뷔할 당시 세이부의 2루수는 츠지 하츠히코였다. 츠지는 전성기 시절 되려 유격수의 수비범위를 야금야금 뺏어먹는 아크로바틱한 수비를 펼쳤지만 세월 앞에서는 장사 없었고, 결국 마쓰이 가즈오는 츠지가 커버하지 못하는 수비범위를 보완했고, 이러한 플레이는 츠지가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하고 타나베 노리오다카기 히로유키등이 2루를 맡았을 때도 계속되었다.[22] 킨테츠 버팔로즈 출신의 2루수, 후쿠모토 유타카의 연속 도루왕 타이틀을 저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2008~2009년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을 맡기도 했다.[23] 코사카 마코토는 억울하게도 소속팀의 성적과 저조한 타격 때문에 저평가 받아왔다. 하지만 교진군으로 가서는 시망. 결국 니오카 토모히로의 백업으로 전락(...) 참고로 일본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골든 글러브는 수비위주로 주는 상이다. 각 포지션에서 가장 뛰어난 공격력을 보인 선수에게는 미국의 실버 슬러거처럼 베스트 나인 상이 수여된다. 그래서 비록 타격이 부실하지만 코사카에게 수상자격이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 한국에도 도입이 시급합니다.[24] 이때문에 톰 글래빈이 '왜 일본인들은 땅볼 타구를 정면으로만 처리하는지 모르겠다.'고 언론에 대놓고 디스를 할 정도였다.[25] 일반적으로 2루수는 유격수보다 어깨가 약하지만 다른 능력은 좋은 선수들이 가는 포지션이라 마쓰이 가즈오의 어깨는 MLB에서도 2루수중 매우 좋았다.[26] 다만 와카바야시는 데뷔 시즌 초반부터 20도루를 기록하며 순조롭게 주축 리드오프로 정착하나 싶었지만 시즌 도중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며 잔여시즌을 날려버렸고, 부상 여파 탓인지 2년차인 2022년엔 성적 부진으로 인해 백업으로 밀려났다.[27] 후에 밝혀지기로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28] 마츠이 본인에겐 PL학원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하며, 라쿠텐에선 입단 첫 해인 2011년엔 팀메이트, 이후엔 마츠이 본인이 퇴단할 때까지 선수-코치로써 함께 뛰었다.[29] 외국인 타자 데이비드 맥키넌이 파리그 외국인타자 WAR 1등이긴 하지만 극한의 투고타저인 리그 환경에서 그나마 평균을 조금 상회하는 정도의 타격과 괜찮은 수비능력을 보여준다는 정도이지 중심타자로 아주 만족스러운 성적은 아니다.[30] Kaz Matsui는 주로 언론에서 많이 쓰던 이름이었고, 실제는 자신의 이름 영어 표기 그대로 등록됐다.[31] 미국 언론에서는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발음과 표기가 쉽지 않은 동양계 선수들의 이름을 저런 식으로 짧게 쓰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보스턴 레드삭스 등에서 활동했던 오카 토모카즈와 캔자스시티 로열스 등에서 활동했던 스즈키 마코토로, 오카는 'Tomo Ohka'로 불렸었고, 스즈키 마코토는 'Mac Suzuki'로 불렸었다. 이쪽은 일본프로야구에 복귀한 후 아예 '맥 스즈키'를 등록명으로 사용했을 정도. 봉중근도 한동안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론에서 Jung Bong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32] 2011년 4월 15일 고시엔 구장.[33] 그리고 마쓰이 가즈오는 박찬호를 상대로 1회 선두타자 홈런을 쳤다.[34] 2004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예선을 겸한 대회였다.[35] 두 대회 모두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세이부 라이온즈를 대표해서 참가했다.[36] 대신 그해에는 본인의 처음이자 마지막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37] 2009년 박동희 기자가 재일동포 고교생 야구단 한재우 前 감독을 취재한 기사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출처[38] 여담으로 일본에는 마쓰이 가즈오가 2000년에 귀화했다며 관보에 그 기록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블로거들이 일부 있지만, 가즈오 본인이 귀화했다고 말한 적이 없고 제도권 언론에서 팩트 체크가 이뤄진 적도 없기 때문에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