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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3 14:37:59

로베르토 바르본

파일:external/blogimg.goo.ne.jp/3070302d72ee0da1cb259d93cd9ed927.jpg
이름 로베르토 바르본(Roberto Barbon)
생년월일 1933년 3월 13일
사망년월일 2023년 3월 12일 (향년 89세)
국적 파일:쿠바 국기.svg 쿠바
출신지 쿠바 아바나
포지션 2루수
투타 우투우타
데뷔 1954년
소속팀 한큐 브레이브스(1955~1964)
킨테츠 버팔로즈(1965)
지도자 경력 한큐 브레이브스 코치(1974~1975)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58~1960년 퍼시픽리그 최다 도루
1957년
코노 아키테루
(한큐 브레이브스)
56도루
1958~1960년
로베르토 바르본
(한큐 브레이브스)
38도루(1958~1959년)
42도루(1960년)
1961년
히로세 요시노리
(난카이 호크스)
42도루

1. 개요2. 현역 시절3. 은퇴 이후4. 여담

1. 개요

쿠바 출신의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현역 시절 외국인 선수로써는 이례적으로 장타력이 아닌 준족으로 이름을 날렸던 선수였으며 스페인어로 꼬마, 도련님을 뜻하는 치코(Chico) 바르본 이라는 애칭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2. 현역 시절

11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바르본은 대부분의 쿠바 출신 선수들이 그랬듯 동네 야구에 입문하며 야구에 눈을 떴고, 1954년 브루클린 다저스 산하 마이너리그 선수로 1년 간 뛰다 한큐 브레이브스의 입단 제의를 받고 연봉 5천 달러에 계약을 맺으며 1955년 일본에서의 선수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바르본은 막 휴전했던 한국전쟁일본에서 벌어진 걸로 착각해서 처음엔 일본행을 꺼렸고, "일본은 기후가 따뜻해서 쿠바랑 별 차이가 없다"라고 꼬드기던 대리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등 일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데다 통역조차 없었던 탓에[1] 초창기 땐 머나먼 타지인 일본에 적응하느라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하며 식사도 입에 안 맞는 통에 한동안 치킨 라이스[2]만 주구장창 먹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3]

이러한 고생에도 바르본은 입단 첫 해부터 주전 2루수 및 1번 타자를 꿰차고 장타력은 보잘 것 없었지만 주특기인 빠른 발을 앞세워 타율 0.280에 49도루라는 준수한 성적에 163안타, 3루타 13개로 시즌 최다 안타 및 3루타 기록을 달성[4]했고, 수비에서도 견실한 활약을 보이며 코칭스태프와 팬들의 눈도장을 받았다. 당초 바르본은 일본에서 1년만 뛰고 미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출장기회가 늘어가는 즐거움에 계속 일본에서 뛰기로 결심했다. 이후 타격에선 2할대 초중반에 10홈런을 단 1번도 못 넘길 만큼 빈약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대신 빠른 발과 준수한 수비로 빈약한 타격을 보완하며 3시즌 연속(1958~1960년) 도루왕을 수상하고 1964년엔 통산 1000안타를 기록하는 등 한큐에서 딱 10시즌을 채우면서 일본프로야구의 롱런 용병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1964년 시즌 출장기회가 현저히 줄어든 바르본은 1965년 킨테츠 버팔로즈로 이적하여 4년 만에 규정타석을 채우는 성과를 올렸지만, 타율 .231/OPS .543, 1홈런 15타점 11도루의 저조한 성적에 그치며 노쇠화가 완연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11시즌 동안의 통산 성적은 1353경기 출장, 1123안타, 타율 0.241, 33홈런, 260타점, 308도루[5]로, 외국인 선수 하면 파워라는 이미지를 빠른 발로 깨버린 스피드 타입의 선구자라고 볼 수 있으며 2루수로서 경쾌한 풋워크를 앞세운 화려한 수비도 주목 받으면서 쿠바산 우시와카마루[6]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3. 은퇴 이후

1959년 시즌 후 바르본은 쿠바로 돌아가려 했지만 하필 그 해 피델 카스트로쿠바 혁명 으로 정권을 잡고 사회주의 정부를 출범시키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바르본은 교제하던 일본 여성과 결혼하여 아예 일본에 정착해 버렸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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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야구장에서 오릭스 버팔로즈의 경기를 지켜보던 바르본

그라운드를 떠난 이후 바르본은 고베에서 스테이크 식당을 경영했고, 1974~1975년 2시즌 동안 친정팀 한큐의 코치로 활동하면서 1975년 일본시리즈 우승 멤버로 포함되기도 했다. 이후 한큐의 외국인 선수 통역담당 등 구단 직원으로 계속 근무했고 오릭스 버팔로즈의 야구교실 고문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렇게 여생을 보내던 중 90세 생일을 하루 앞둔 2023년 3월 12일, 급성 폐렴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그가 숨을 거둔 지 5일 후, 현역 시절 소속팀인 한큐의 후신이자 야구교실 고문으로 재직했던 오릭스 버팔로즈 구단에서 바르본의 사망 소식을 공표했다.https://www.jiji.com/jc/article?k=2023031700878&g=spo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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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지어 바르본은 한국, 중국, 일본이 같은 언어를 쓴다고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한자를 쓰는 건 맞긴 한데..[2] 닭고기토마토 케첩을 넣은 볶음밥.[3] 후술한 것 처럼 라멘도 즐겨먹을 정도로 일본 음식에 적응하긴 했지만 생선회초밥 같은 날생선 요리는 끝내 손을 대지 못했다고.[4] 1955년의 3루타 13개는 팀 선배이기도 한 래리 레인즈(한큐)의 16개를 잇는 한큐-오릭스 구단 2위 기록이며 퍼시픽 리그를 통틀어서는 공동 4위에 해당된다. 센트럴리그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최다 3루타 기록은 1951년 오사카 타이거스카네다 마사야스가 세운 18개이다.[5] 바르본의 1353경기 출장은 2007년 터피 로즈가 갱신하기 전 까지 외국인 선수 최다 출장 기록이었다. 또한 바르본은 1953년 시즌 퍼시픽 리그 도루왕 래리 레인즈와 더불어 유이한 시즌 최다도루 타이틀을 가진 외국인 선수다.[6] 우시와카마루는 한신 타이거스의 명 유격수이자 한신의 현재까지 유일한 일본시리즈 우승 감독인 요시다 요시오의 현역 시절 별명이기도 하다.[7] 바르본의 말에 따르면 일본으로 간 이후 고향인 쿠바에 가본 적은 딱 1번 뿐으로, 현역 은퇴 후 20여년이 지난 1988년에 당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감독으로 취임한 야마모토 코지가 쿠바 야구 시찰을 위해 바르본에게 통역 요원으로 쿠바에 동행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오랜만에 쿠바에 갔던 것이 유일한 고향 방문이었다고 한다. 이후 바르본은 2023년 일본에서 세상을 떠나면서 이 때의 방문이 바르본의 생애 마지막 쿠바 방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