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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29 19:04:56

우노 마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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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파일:external/dragons.jp/uno_m.jpg
주니치 드래곤즈 타격코치 시절
이름 우노 마사루 (宇野 勝)
생년월일 1958년 5월 30일 ([age(1958-05-30)]세)
국적 일본
출신지 치바현 요카이치바시(現 소사시)
포지션 유격수, 3루수, 2루수
투타 우투우타
학력 치바현립 쵸시상업고등학교
프로입단 1976년 드래프트 3순위
소속팀 주니치 드래곤즈(1977~1992)
치바 롯데 마린즈(1993~1994)
지도자 경력 주니치 드래곤즈 타격코치(2004~2008, 2012)
주니치 드래곤즈 2군 타격 겸 종합 코치(2013)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4년 센트럴리그 최다 홈런
1983년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오오시마 야스노리
(주니치 드래곤즈)
36홈런
우노 마사루
(주니치 드래곤즈)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타이거스)
37홈런
1985년
랜디 바스
(한신 타이거스)
54홈런

1. 개요2. 선수 생활3. 은퇴 이후4. 기타

1. 개요

일본의 전 야구 선수.

2. 선수 생활

1976년에 드래프트 3순위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동갑내기 하라 타츠노리와 비견되는 강타자일 뿐만 아니라 호타준족까지 갖춘 유망주로 주목을 받았다.

입단 후 첫 2년 동안엔 간간히 대타로 출장하면서 힘 있는 타구를 선보이며 기대를 모았고, 1979년부터 주전 유격수 자리를 꿰차면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1년부터 본격적으로 포텐이 폭발해 1979년부터 1992년까지 14년 연속 두 자릿 수 홈런 기록과 더불어 40홈런 시즌을 1차례 포함한 4번의 30홈런을 치는, 당대의 유격수로써는 상상을 초월하는 장타력을 보여주며 베스트나인 3회 수상과 함께 주니치의 간판타자이자 주전 내야수로 오랫동안 활약했다. 이 중 1984년엔 37홈런을 기록하며 카케후 마사유키와 공동 홈런왕을 수상했는데 이는 현재까지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유격수 홈런왕이며, 다음 해인 1985년에는 41홈런을 치며 역대 유격수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수립했다.[1] 1990년 이후로 서서히 기량이 떨어져 가면서 1993년에 고향에 새로 자리잡은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했으나 롯데에선 주전에서 밀려나 백업으로만 뛰었고, 이듬해인 1994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프로 통산 338홈런은 유격수 통산 홈런 역대 1위이며, 주니치 시절에 친 334홈런은 구단 사상 최다 홈런 기록이기도 하다.[2]

우노 마사루의 통산성적


여기까지만 보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포 유격수의 화려했던 일대기라 할 만하지만, 그 이면에는 온갖 몸개그변태스탯, 정교함 따윈 개나 줘버리는 야구센스가 공존하고 있었다. 특히 수비에 있어서는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관객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던 선수였으며, 그의 역사에 길이 남을 수비는 여러 차례나 자팀 팬들은 뒷목잡고 쓰러지게, 타팀 팬들은 배를 잡고 아프도록 웃게 만들었다.

우노의 현역 시절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신체조건이 좋은 덕에 파워는 물론 강한 어깨까지 가지는 등 포텐 자체는 엄청난데 정교함이 심할 정도로 부족해서 매번마다 어이상실한 개그성 플레이를 보여주며 지금까지도 전설로 회자되는 장면을 많이 연출했다. 1979년부터 1982년까지 4년 연속 실책 1위를 차지했으며, 17년 동안 현역에서 뛰며 통산 270실책 및 실책 1위 7회라는 충격과 공포의 기록을 보여줬다. 당연히 수비가 저랬던 탓에 선수생활 내내 수비로만 평가하는 골든글러브와는 단 1번도 인연이 없었다.

보통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일본야구 선수들의 진기명기를 보면 대부분의 명선수들은 아크로바틱한 뛰어난 수비가 많은 데 비해 우노 마사루는 일명 珍プレー라 불리는 개그 플레이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가장 유명한 몸개그 플레이로는 1981년 8월 26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코라쿠엔 구장 원정경기에서 자신에게 날아오는 뜬공을 잡으려다 헤딩을 해버리는 바람에 실점을 허용했고[3][4] 이에 분노한 호시노가 글러브를 패대기치는 장면이 있다. 1983년부터 후지 테레비에서 매 시즌마다 방영하는 야구 프로그램인 '프로야구 진기명기 대상'이 이 플레이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장면인데, 당시 요미우리가 지난 시즌부터 이어나가던 연속 경기 득점 기록을 저지할 수 있었던 찬스라 특히 안티 요미우리의 화신으로 이름난 호시노로서는 자신이 그 기록을 저지할 수 있었던 좋은 찬스였음에도 그 찬스를 후배가 어이없는 실책으로 날려버렸으니 화가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었던 것. 이때 주니치 선수들이 호시노가 우노를 폭행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고 아니나다를까 우노는 그날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곧장 호시노에게 얻어맞았다고 한다. 막상 이날 경기에서 호시노는 완투승을 거뒀고 결승타를 친 선수가 바로 우노였음에도 그 실책 한 방에 모든 게 다 잊힌 것.

나중에 우노가 유튜브에서 당시의 일화를 풀었는데, 본인이 결승타를 친 주인공임에도 그 실책 한 번에 연속 득점 기록 저지에 실패한 것 때문에 기가 푹 죽어있었는데 호시노가 풀이 죽은 우노를 보자마자 "멍청한 자식. 기운 좀 차려!"라고 주먹으로 화풀이때리고선 바로 위로를 해줬다고 한다. 여담으로 당시 호시노는 절친한 후배인 코마츠 타츠오와 요미우리의 연속 득점 기록 저지를 두고 내기를 했었는데, 결국 한 달 뒤에 코마츠가 요미우리를 상대로 연속 득점 기록을 끝장내는 완봉승을 거두며 내기에서 승리했다.

이런 유형의 선수들이 가장 키우기 어려운 유형인데도 코치들이 포기 못하는 타입이기도 하다.[5] 다만 유격수를 계속 지킨 건 나름 사연이 있었는데, 코치들이 어떻게든 공격이라도 써먹으려고 수비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은 3루수외야수 기용을 시도해봤는데 우노는 묘한 루틴을 가지고 있어서 유격수 이외의 포지션에 출장하는 날엔 타격성적이 항상 바닥을 기었고, 그런 탓에 우노가 코치들에게 유격수로 계속 기용해달라고 간청해서 유격수로만 출장하면 수비는 둘째치더라도 장타는 뻥뻥 쳐대니 계속 유격수로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30대부턴 타츠나미 카즈요시 등의 신예 선수들에게 유격수 자리를 내주고 주로 3루수로 출장했다.

스탯을 참고해보면 알겠지만 볼넷/삼진(BB/K) 비율(통산 605볼넷/1306삼진)도 주목할만한데 나쁜 볼도 '에라 모르겠다' 식으로 풀스윙으로 일관한 덕분에 삼진이 볼넷보다 두 배가 넘은 시즌이 대부분이었다. 즉, 전형적인 영웅스윙어.[6] 그래서인지 3할 타율을 기록한 시즌은 1989년(.304)뿐이었다.[7] 여기에 통산 78도루를 기록했는데 도루실패가 그보다 더 많은 96개라 통산 도루성공율이 절반도 안 되는 45%에 그쳤다. 당연히 개인의 스탯에나 팀 득점에나 도움이 안 되며, 특히 현대의 세이버매트릭스 기준으로 도루는 70%~80%의 성공률은 가져야 해볼 만하다고 하는데 45%는 불가능한 걸 억지로 한 수준이다.

그래도 이런 류의 거포 유격수가 워낙 드문데다, 화끈한 스타일 덕분에 오히려 우노를 좋아하는 팬도 많았다.

3. 은퇴 이후

은퇴 후 현장을 오래 떠나 있었는데 그동안 TV나 라디오에서 해설가로 일했다. 그러다가 2004~2008년 시즌까지 친정팀 주니치 드래곤즈의 타격코치를 맡으면서 선수시절때 못해본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2009년에 팀을 떠나 4년 간의 야인 생활을 거친 후 2012년 시즌부터 다시 주니치의 타격코치로 복귀하여 이듬해엔 2군 타격 겸 종합 코치로써 시즌 종료 때까지 근무했다.

4. 기타



[1] 어지간한 시즌이었다면 홈런왕도 노려봤을 수치였으나 하필 이 시즌에 한신 타이거스랜디 바스가 홈런을 무려 54개나 치며 트리플 크라운까지 꿰차는 바람에 무관에 그쳤다.[2] 다만 30대 이후로는 거의 유격수로 출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 338홈런 전부가 순수히 유격수 포지션으로 기록한 홈런은 아니다.[3] 12년 뒤 MLB에서 호세 칸세코가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는데, 이때는 헤딩으로 홈런을 허용하는 장면을 선사했다(...)#[4] 이후 38년 만에 KBO에서 롯데 자이언츠 소속 유격수인 신본기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며 이 일이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다만 신본기의 경우 머리를 맞고 튀어나간 공이 얼마 날아가지 않아 옆에 있던 외야수인 전준우가 잡아 플라이 아웃으로 처리했다는 점. 공식 기록 또한 유격수맞고 좌익수 플라이로 처리되었다.[5] 신장 181cm인데, 당시만 해도 일본 출신 유격수 중에서 이 정도 키를 가진 유격수는 거의 없었다. 큰 키에 유격수를 보는 선수로선 드물게 파워까지 겸비했으니 코칭스태프 입장에서는 탐이 날 수밖에 없다.[6] 이 선수가 남긴 진기한 기록들 중에는 10타석 연속 볼넷과 23경기 연속 삼진도 있다. 10타석 연속 볼넷은 1984년 한신의 카케후 마사유키와 홈런 공동 1위였는데 마침 마지막 2경기가 한신과의 경기여서 나온 기록으로, 카케후 마사유키도 10타석 연속 고의사구성 볼넷을 얻어내며 공동 홈런왕이 되었다. 참고로 이 10타석 연속 볼넷 중에는 만루에서 밀어내기도 있었다.[7] 이 시즌마저도 40사사구/82삼진으로 볼삼비가 1:2를 넘겼다.[8] 1990년 우노와 동일한 타율인 .304를 기록했는데, 이 해 31홈런을 친 덕분에 일본프로야구 유격수 역대 최초의 3할-30홈런을 달성했다. 참고로 우노가 유일한 3할을 찍은 1989년 친 홈런은 25개.[9] 은퇴 후 토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코치를 맡으며 원클럽맨에선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