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143d69><tablebgcolor=#143d69>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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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우승 ★★★★★★★★★★★★★ | 1956 · 1957 · 1958 · 1982 · 1983 · 1986 · 1987 · 1988 · 1990 · 1991 · 1992 · 2004 · 2008 | |
리그 우승 (23회) | 1954 · 1956 · 1957 · 1958 · 1963 · 1982 · 1983 · 1985 · 1986 · 1987 · 1988 · 1990 · 1991 · 1992 · 1993 1994 · 1997 · 1998 · 2002 · 2004 · 2008 · 2018 · 20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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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 1군 베루나 돔 · 2군 CAR3219 필드 · 지방 홈구장 사이타마현영 오미야공원 야구장 · 조모 신문 시키시마 구장 | |
과거 헤이와다이 야구장 | ||
홈 중계 채널 | 후지 테레비 2 | |
주요 인물 | 구단주 고토 타카시 · 단장 공석 · 감독 니시구치 후미야 · 선수회장 토노사키 슈타 · 주장 겐다 소스케 | |
구단 상세 정보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응원가 · 유니폼 · 10.19(야구) · 미스터 레오 | |
틀 문서 | ||
세이부 그룹 |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 선수 | 역대 감독 | 영구 결번 역대 1라운드 지명 선수 |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미스터 레오 |
1. 개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역사 및 시즌별 기록이다.2. 역사
2.1. 니시테츠 시절
니시테츠 라이온즈 시절 구단기 |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최다 우승팀으로, 1949년 창단하고 1950년 양대 리그 시행 이후 후쿠오카의 헤이와다이 구장[1]을 연고지로 한 니시테츠 클리퍼스를 시작으로 이듬해 같은 후쿠오카의 센트럴 리그 구단 니시닛폰 파이리츠와 합병하여 니시테츠 라이온즈가 되었다. 애초에 후쿠오카 정도의 지방 도시에 야구팀이 두 개나 있는 게 무리였으나, 당초에는 철도회사인 서일본철도와 신문사인 서일본신문(西日本新聞)의 합작으로 후쿠오카의 단일 연고 팀을 만들려 했다. 그러나 센트럴 리그, 퍼시픽리그 중 어느 리그에 속할 것인가를 두고 두 회사 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여 결국 각자 팀을 창단했고 1년 후에 니시닛폰이 니시테츠에 합병되면서 퍼시픽 리그 소속이 되었다. 1950~60년대의 강팀으로 군림하면서 1956~1958년에는 명감독 미하라 오사무, 명투수 이나오 카즈히사와 강타자 오시타 히로시, 나카니시 후토시의 활약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물리치고 일본시리즈 3연패를 차지했다.
그 후 1963년 리그 우승을 끝으로[2] 우승권에서 멀어졌다. 원래 지방 사철이 모기업이라 재정도 넉넉하지 않은 데다 당시 비인기 팀들이 모여 있던 퍼시픽 리그 소속에 소규모 지방 도시를 홈으로 쓰는 덕분에 관중 동원도 여의치 않아 팀의 부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본프로야구 최악의 흑역사인 검은 안개 사건으로 주전들 대부분이 줄줄이 구속→영구 제명 크리를 먹어 팀이 순식간에 약체화되었고, 그 때문에 니시테츠가 더 이상 팀을 유지할 수 없어서 1972년 구단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2.2. 고난의 시기: 타이헤이요클럽-크라운라이터 시절
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 시절 구단기 |
고난의 시기 구단가, 君こそライオンズ.[4]
이후의 사정은 현대 유니콘스와 우리/서울/넥센/키움 히어로즈가 짬뽕된듯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니시테츠가 1972년 시즌을 끝으로 구단 운영에서 손을 떼면서 롯데 오리온즈 구단 오너였던 나카무라 나가요시[5]에게 구단 매각을 의뢰했는데, 인수하겠다는 기업이 나타나지 않자 자신이 직접 후쿠오카 베이스볼(주)라는 구단 운영법인을 만들어 팀을 인수하고 팀 운영비는 자신이 구단 경영을 맡았던 롯데 오리온즈 시절처럼 팀의 명명권을 팔아 조달했다.
이렇게 해서 스폰서의 변천에 따라 1973년 타이헤이요 클럽(太平洋クラブ)[6] 라이온즈, 1977년 크라운라이터(クラウンライター)[7] 라이온즈로 이름을 바꾸면서 라이온즈는 어찌저찌 존속하게 된다. 그러나 롯데와는 달리 라이온즈의 스폰서로 나선 기업들은 업종을 보면 알겠지만 프로야구 구단을 인수할만한 능력은 전혀 되지 않아서 이 당시의 라이온즈는 계속해서 자금난에 시달리며 키움 히어로즈 창단 이후 2년간과 거의 비슷한 침체기를 보내게 된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가 바로 히가시오 오사무로, 니시테츠 말기-타이헤이요/크라운라이터 시대-세이부 최전성기를 모두 거쳤던 라이온즈 구단 역사의 산 증인 그 자체로써 라이온즈 한 팀에서만 꿋꿋이 20년간 뛰며 간판 스타이자 에이스로서 암흑기였던 팀을 지탱해 나갔다.
결국 미덥지 못한 스폰서의 쥐꼬리만 한 재정 지원으로 강팀을 만들 수도 없거니와 팀의 막장화만 가속되었다. 끝내 얼마 안되는 스폰서 자금과 나카무라의 개인 인맥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에 이르러 GG를 치고 팀 해체의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해 있을 때 한 줄기 빛과 같은 광명이 비추었으니 당시 부동산, 사철 재벌로 막강한 자금력을 보유한 세이부 그룹이 구단 인수에 관심을 보인 것이었다. 마침내 후쿠오카의 시민들도 든든한 구단주를 얻어서 옛 영광을 다시 재현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후쿠오카의 라이온즈 팬들은 이것이 후쿠오카 야구의 영광스런 부활이 아닌, 라이온즈와 후쿠오카의 작별일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했다.[8]
2.3. 세이부의 인수
2.3.1. 1980년대~1990년대 초반 황금기, 라이온즈 왕조 건설
9회 우승을 함께한 로고[9] |
1978년 말 세이부 그룹은 라이온즈 구단을 인수할 것을 표명했다. 세이부 그룹은 라이온즈 프랜차이즈를 인수하기 전에 두 차례나 야구단 스폰서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일본프로야구가 양대리그로 나눠지기 이전에 존재했던 일본야구연맹(JBL)에 참여했던 도쿄 세네터스(東京セネタース)-츠바사군(翼軍)의 재정적 스폰서를 해줬다.[10] 당시 귀족원 의원이었던 아리마 요리야스와 세이부 그룹의 모종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후 2차 세계대전 이후 세너터스가 재건에 실패하자 1970년대에는 다이요 훼일스의 요코하마 스타디움 건립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다이요의 2대 주주로 경영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이부는 구단 인수의 조건에 자신들이 한창 부동산 개발 중이던 도쿄 근교의 사이타마로의 이전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사철인 도쿄-사이타마 지역의 세이부 철도를 기반으로 하는 세이부 그룹에게 있어서 거의 적자가 안 발생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프로스포츠단인 라이온즈를 그나마 적자가 최대한 안 나게 운영하고, 연고지 주변 지역의 관중을 끌어들어 수익을 올리려면 반드시 사철이 자리잡은 곳 근처에 스포츠단 연고지를 두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애초에 간토 도쿄-사이타마 및 간사이 시가[11] 지역의 세이부가 드럽게 멀리 떨어진, 자기네 철도도 안 다니는 규슈 후쿠오카 지방에서 야구단을 운영하는 게 넌센스였다. 당장 훗날의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가 왜 해체됐는지 생각해 봐도 답은 나온다.
어쨌거나 당시 라이온즈 구단은 그런걸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 연고지 이전의 조건을 내거는 기업이라도 인수하겠다고 해주면 넙죽 받아야 하는 게 당시 구단이 처한 현실이었다. 결국 팀은 세이부 그룹에 인수되어 후쿠오카를 떠나 사이타마로 이전했고, 후쿠오카의 팬들은 옛 영광의 재현은커녕 크나큰 상실감만 맛보아야 했다. 결국 후쿠오카는 1989년 서로 죽이지 않고는 못살던 예전의 라이벌 호크스가 후쿠오카 이전을 발표할 때까지 무려 10년의 세월을 연고팀 없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야 했다.
세이부에게 인수된 뒤 인기 만화였던 밀림의 왕자 레오의 레오를 마스코트로 삼았다. 레오의 일러스트는 실제로 테즈카 오사무에게 저작권료를 주고 정식으로 사용권을 승인받았다.[12] 후쿠오카에서 도쿄 근교로 이전해 오면서 일단 기존 팬층은 개척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만화 주인공을 마스코트로 해서 어린이들부터 공략하자는 마케팅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공략당한 어린이들이 밑에서 기술한 세이부 황금 시대를 거치면서 3, 40대 성인으로 성장한 지금 세이부 팬층의 주축을 형성하고 있다.
세이부 라이온즈로 바뀐 이래, 오로지 이기는 것만이 팬을 확보하는 것이라는 일념하에 구단주인 츠츠미 요시아키는 감독 겸 관리부장(GM 역할)이던 네모토 리쿠오(1982년부터는 관리부장 직에만 전념)에게 구단 운영의 전권을 위임했고, 네모토는 각종 방법을 동원[13]하여 팀의 전력을 강화시켰다.[14] 결국 이러한 전력 보강 등을 이어간 끝에 1982년, 팀은 드디어 퍼시픽리그 전기리그 우승에 이어 플레이오프 에서도 후기리그 우승팀 닛폰햄 파이터즈를 격파하며 퍼시픽리그 우승을 이루고[15] 뒤이어 일본시리즈에서도 주니치 드래곤즈를 격파. 24년 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룩하며 그 결실을 이루어냈다. 그 뒤로부터 1992년까지 10여년의 기간, 그러니까 1980년대~1990년대 초반 동안은 가히 세이부의 황금 시대, 왕조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세이부는 이시게 히로미치-츠지 하츠히코 키스톤과 아키야마 코지-키요하라 카즈히로-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의 일명 AKD 클린업 트리오, 모리의 계승자 이토 쓰토무가 버티는 백스톱까지 갖춘 철벽 야수진을 갖췄고, 투수진에는 와타나베 히사노부-쿠도 키미야스 원투펀치에 '오리엔탈 특급' 곽태원(궈타이위안, 카쿠 타이겐)가 선발진에 버티고 있고 구원진에는 카토리 요시타카. 시오자키 테츠야 등이 건재했다. 이 시기 세이부는 V9 시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버금가는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강 전력의 팀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명장 모리 마사아키의 지도 아래 이 기간만 리그 우승 9회, 일본시리즈 우승 8회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리그 우승으로 일본시리즈 진출 후 패한 경우는 한신 타이거즈의 양대 리그제 실시 이후 두 번 한 일본시리즈 우승 중 하나인 1985년... 리그 우승을 못한 경우는 1984년의 한큐 브레이브스에 1위 자리를 내준 경우와[16] 1989년의 긴테츠 버팔로즈에게 리그 3번째 우승을 헌납한 경우.[17]
그렇게 해서 세이부(西武) 라이온즈로 30년 가까이 이어졌으나, 인기도 떨어지고 모기업 세이부 철도의 상태가 영 좋지 않게 되자 2008년 지역 이미지 부각을 위해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가 되었다. 도쿄에 미련이 남아 있던 세이부 그룹으로서는 끝까지 사이타마라는 명칭의 사용을 거부해왔으나[18] 결국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팬베이스가 자신들이 원하던 도쿄 중심부가 아닌 사이타마의 베드타운 지역에 형성된 탓에 결국은 고집을 꺾었다. 오죽 사이타마라는 명칭을 쓰기 싫었으면 세이부(西武)라는 명칭은 과거 전국시대의 도쿄와 그 주변 지역을 의미하는 무사시노(「武」蔵野)의 서부지역을 의미하는 이름이라고 주장하며[19] 본거지와 팬베이스가 도쿄의 서부 지역이니 세이부라는 명칭도 지역명칭이라는 해석을 굳이 강조하면서까지 사이타마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거부하면서 버텼다.[20]
2.3.2. 황금 시대 이후~2012년 시즌
1992년 이후 세이부 황금 시대 주역들이 노쇠하거나 타 팀으로 트레이드[21] 및 주축 선수들의 FA(자유계약선수) 선언[22]으로 1980년대의 황금기는 끝난다...라고는 하지만, 1990년대 중후반에도 세이부는 여전히 파리그의 강호였고, 첫 번째 리그 우승을 이룬 1982년부터 2007년[23]까지 B클래스로 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단지 문제는 일본시리즈 우승을 못 해서 그렇지. 모리 마사아키의 뒤를 이어 팀을 맡은 히가시오 오사무 감독이 지휘한 1997~1998년에는 2년 연속으로 파리그 우승을 하였지만, 당시 일본시리즈에서는 각각 노무라 카츠야의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머신건 타선'을 앞세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게 발목을 잡혔다. 그 이후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제4대 괴동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명 유격수 마쓰이 카즈오, 대형 슬러거 알렉스 카브레라 등이 투타의 기둥으로 활약하면서 이하라 하루키 감독 지휘 하에서 2002년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오랜 기간의 감독 수업을 거친 이토 츠토무가 감독으로 취임한 2004년에는 정규시즌에 2위를 하였으나 플레이오프를 통해 닛폰햄과 다이에를 차례대로 꺾고 리그 우승을 하고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1992년 이후 12년 만에 다시 일본시리즈를 우승하게 된다.와타나베 히사노부 감독이 지휘한 2008년 시즌에는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대결하여 4승 3패를 기록, 우승을 거머쥐었다. 전신인 니시테츠 시절을 포함하여 1950년 양대리그제 시행 후 현재까지 리그 21회, 일본시리즈 13회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엠블렘[24], 홈 덕아웃 위치(1루에서 3루로), 유니폼을 변경하고 출발한
애니메이션 아노하나의 배경이 사이타마라서 정식으로 콜라보하여 이런 이미지도 나왔다.
2.3.3. 모기업의 위기와 매각위기
라이온즈는 세이부 그룹에 매각된 이후 산하의 주요 핵심 회사이자 세이부 그룹의 수장 츠츠미 요시아키가 사장으로 있으면서 그룹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부동산 회사 코쿠도(コクド)가 운영을 맡았으나, 버블 붕괴의 여파로 코쿠도와 함께 세이부 그룹까지 경영 위기에 빠지게 되면서 그 여파로 세이부 라이온즈 역시 이전과 달리 자금 여유가 없어졌다. 이 때문에 세이부는 2004년 세이부 돔과 2군 구단의 명명권을 인보이스에 매각하는 등 자구책 마련에 분주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였다. 2004년 킨테츠-오릭스 구단 합병으로 인한 프로야구 재편 논의를 전후해 세이부 라이온즈도 치바 롯데 마린즈, 닛폰햄 파이터즈,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합병을 논의하였으나 닛폰햄은 삿포로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합병에서 발을 뺐고 롯데와 다이에도 세이부가 아닌 서로 간의 양자 합병을 모색하게 되면서 세이부의 합병 시도는 무산되었다.[25]이후 세이부 철도의 뇌물 공여 및 유가증권 허위 기재 등 비리 사건이 연달아 터지고 결국 상장폐지까지 되자 세이부 그룹에서는 구단 매각 방침을 세웠고 킨테츠 인수, 신구단 창단 등에서 연달아 물을 먹은 라이브도어에서 적극적으로 인수 의사를 밝히면서 순조롭게 매각 협상이 진행되나 싶었지만 200억~250억에 이르는 구단 인수 비용과 세이부 돔을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인수 협상이 지지부진해지면서 세이부 그룹에서는 구단 매각을 포기하게 되었고, 라이온즈는 2006년 코쿠도를 흡수합병한 프린스 호텔을 거쳐 최종적으로 2009년 세이부 철도 산하로 들어가게 된다.
2.3.4. 2013년~2021년
자세한 내용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2013-2021 문서 참고하십시오.2.4. 2022 시즌
자세한 내용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2022년 문서 참고하십시오.2.5. 2023 시즌
자세한 내용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2023년 문서 참고하십시오.2.6. 2024 시즌
자세한 내용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2024년 문서 참고하십시오.2.7. 2025 시즌
자세한 내용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2025년 문서 참고하십시오.[1] 후쿠오카 돔이 지어지기 전까지 오사카에서 이사온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홈구장이기도 했다. 그러다 구장 보수를 하던 도중 이 구장 부지가 헤이안 시대에 있었던 코로칸(鴻臚館)이 위치했던 유적지였음이 밝혀졌고, 결국 1997년 폐장 후 철거된 뒤 역사공원이 조성되었다.[2]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패배했다. 근데 누가 알았을까. 이로부터 불과 2년 뒤가 진정한 요미우리의 캐사기 리즈 시절인 V9의 시작이란 걸.[3] 활동 기간이 얼마 안돼서인지 구글에 일본어로 검색해도 구단기를 거의 찾기 힘들다.[4] 이전의 단가가 니시데츠 라이온스의 노래이다 보니 당연 이전 회사 이름이 빠진 새로운 단가가 필요했다. 이 단가는 타이헤이요, 크라운라이터 시절에 모두 사용했으며 세이부 인수 후에는 연고지가 바뀌는 관계로 또다시 단가가 바뀌게 된다. (이후의 단가는 응원 문서 참고)[5] 당시 오리온즈는 1964년 마이니치 신문이 구단 운영에서 손을 뗀 후에 영화회사 다이에이의 사장인 나가타 마사이치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이때 팀 이름이 도쿄 오리온즈로 바뀌었다가 1969년 롯데의 네이밍 스폰싱을 받으면서 롯데 오리온즈로 재차 이름이 변경되었고, 1971년 다이에이가 경영난으로 구단 경영에서 손을 떼면서 롯데가 1971년부터 정식으로 오리온즈 구단 운영을 맡게 된다. 나카무라는 롯데가 네이밍 스폰서 시기였던 1969~70년에 부오너를, 구단 정식 모기업이 된 1971~72년에 오너를 맡았다가 라이온즈 매입을 위해 1972년 시즌 종료 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오리온즈 구단 주식을 롯데에 완전히 매각하고(야구협약상 개인 혹은 한 기업에 의한 복수 구단 경영은 불가능하다) 오너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참고로 나카무라는 키시 노부스케의 비서를 지낸 경력이 있으며 오리온즈 구단 경영을 맡게 된 것 역시 나가타 마사이치와 친분이 있었던 키시의 지시로 맡았던 것이었다.[6] 골프장, 리조트 개발회사이다.[7] 구 크라운 가스라이터(クラウンガスライター), 현 코사이도(広済堂) 홀딩스. 본래는 코사이도와 별개의 라이터 제조사였으나, 라이온즈 매각 직전이었던 1978년 6월에 인쇄업 회사인 코사이도와 합병하여 코사이도 크라운 주식회사가 된 이후 1981년 4월에 사명에서 크라운을 떼면서 완전히 코사이도에 흡수되어 회사의 자취가 소멸되었다.[8] 훗날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도 구단 운영 포기로 인하여 한국가스공사에 매각이 되는 과정이 유사하다.[9] 세이부 철도가 운영하는 철도차량과 버스 도장에도 이 사자 로고가 많이 붙어 있다.[10] 나중에 도쿄 세네터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팀이 바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다.[11] 세이부 그룹이 시가현에서도 영업하는 이유는 오미 철도 문서에 간략하게 나와있다.[12] 그 전에도 1960~70년대에 산케이-야쿠르트 아톰즈(現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철완 아톰의 아톰을 마스코트로 쓴 적 있다. 참고로 테즈카 오사무는 한신 팬이다.[13] 마유미 아키노부 등을 보내고 거포 타부치 코이치를 데려오는 등의 대형 선수 트레이드는 기본이고, 드래프트에 지명이 확실한 전국의 고교 유망주를 뒷공작과 다른 구단과의 물밑 협상으로 선수 자격이 아닌 구단 직원 채용 형식으로 확보해둔 뒤, 드래프트외 선발로 입단시키는 방법(20년간 세이부의 안방을 지켜온 이토 쓰토무 前 치바 롯데 마린스 감독이 이런 케이스)이나 그룹 계열사 내 일본의 사회인야구 팀인 프린스 호텔 야구부로 빼돌려서 아예 다른 팀의 지명을 포기하게 하는 방법(세이부 황금기의 팀의 주장을 맡은 이시게 히로미치가 이런 케이스. 방법은 간단하다. 학교를 졸업할 때 "난 프로 안 갈래" 하고 일단 프린스 호텔에 입단한다. 그러고 나서 다른 팀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다음 드래프트 때는 미리 포기하는 것)까지 동원했다.[14] 1990년대 후반의 현대 피닉스가 연상된다면 이는 착각이 아니다.[15] 여담이로 이 해를 끝으로 퍼시픽리그는 1973부터 운영해 온 전후기리그-플레이오프 제도를 폐지하고 센트럴리그처럼 6구단 중 리그 우승(1위)팀만 일본시리즈에 가는 것으로 변경했다. 그러니 세이부가 전후기리그-플레이오프 제도 시대의 마지막 플레이오프 우승팀인 것이다.[16] 그러나 한큐는 일본시리즈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패배. 참고로 이게 현재 카프의 마지막 일본시리즈 우승 기록이다.[17]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3연승 후 4연패로 내리 역관광당하며 처참하게 패배했다. 참고로 이때 긴테츠 감독은 공교롭게도 전신인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전성기를 이끈 선수였던 오기 아키라였다.[18] 이것도 수도권의 수원구장에서 경기를 치르면서 끝까지 서울 연고를 포기하지 않은 대한민국의 현대 유니콘스와도 비슷하다.[19] 세이부라는 그룹 명칭의 기원인 것은 맞다. 하지만 타지 철도 회사이자 도시권이나 공업 지대 지역 이름으로도 많이 쓰이는 '한신'과는 달리 '세이부'는 어떤 곳에서도 지역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20] 사실 세이부 돔은 다른 사이타마 지역보다 도쿄 중심부에서의 접근성이 더 좋다. 사이타마현의 중심지 오미야에서 세이부 돔 가는 게 많이 어렵다.[21] 대표적으로 1994년 오프시즌의 세이부 - 다이에 간 2-3 트레이드. 아키야마 코지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건너갔다. 참고로 당시 다이에의 단장은 공교롭게도 1980년대 세이부의 황금기를 구축한 그 네모토 리쿠오였다.[22] 쿠도 키미야스가 FA로 다이에로 이적하고, 기요하라 카즈히로도 1996년 FA로 그토록 원하던 요미우리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게 된다.[23] 이토 쓰토무의 세이부맨 커리어가 이로 인해 끝장나게 된다.[24] 이때 밀림의 왕자 레오 사용권이 만료되었다.[25] 롯데 - 다이에의 양자 합병 논의도 마지막에 호크스 구단을 소프트뱅크가 인수하게 되면서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