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
1990 | 1991 | 1992 |
코마다 노리히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 (세이부 라이온즈) | → | 아키야마 코지 (세이부 라이온즈) |
<colbgcolor=#143D69><colcolor=#fff>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구단 스페셜 어드바이저 | |
오레스테스 쿠쿠아스 데스트라데 Orestes Cucuas Destrade | |
생년월일 | 1962년 5월 8일 ([age(1962-05-08)]세) |
국적 | 미국 |
출신지 | 쿠바 산티아고 데 쿠바 주 |
학력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고교 - 플로리다 대학교 |
포지션 | 1루수, 지명타자 |
투타 | 우투양타 |
프로입단 | 1981년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 뉴욕 양키스 지명 |
소속팀 | 뉴욕 양키스 (1987) 피츠버그 파이리츠 (1988) 세이부 라이온즈 (1989~1992) 플로리다 말린스 (1993~1994) 세이부 라이온즈 (1995) |
프런트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구단 스페셜 어드바이저 (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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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과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야구 선수.NPB 역대 최강팀 중 하나로 꼽히는 80년대 말~90년대 초 세이부 왕조에 공헌한 거포 스위치 히터로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외국인 타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선수이기도 하다. 일본에서의 별명은 카리브의 괴인(カリブの怪人).
2. 커리어
2.1. 데뷔 시절
쿠바의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태어난 데스트라데는 6살 때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해 플로리다 주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후 야구를 시작해 1981년에 뉴욕 양키스와 계약을 맺었다. 마이너리그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끝에 1987년 빅리그 무대를 밟아 9경기를 뛰지만, 이미 양키스의 1루 베이스는 돈 매팅리라는 걸출한 선수가 꿰찬 상태였고, 결국 데스트라데는 1988년 5월에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트레이드된다. 주로 대타 요원으로 나서며 36경기를 뛰었지만 성적은 .149 1홈런 3타점으로 초라했는데, 그의 파워를 눈여겨본 몇몇 NPB 구단으로부터 이적 제의를 받았으나 이 때까지는 아직 메이저리그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어 거절했다.하지만 마이너리그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자 데스트라데는 결국 1989년 5월 세이부 라이온즈와 계약을 맺으며 일본으로 향하게 된다.
2.2. 세이부 라이온즈
세이부에서의 첫 시즌, 시즌 도중인 6월에 영입된 탓에 83경기밖에 뛰지 못했음에도 32홈런을 때려내고 81타점을 기록하는 괴력을 보이며 일본 무대에 연착륙한다. 타율이 다소 낮긴 했지만 뻥뻥 터지는 장타 앞에서 그깟 타율이 대수랴(...). 그리고 1990년에는 .263 42홈런 106타점으로 퍼시픽리그 홈런왕과 타점왕에 올랐고, 지명타자 부문 베스트나인에도 오른다. 또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시리즈에서 2홈런 8타점을 쓸어담으며 팀의 우승에 기여, 일본시리즈 MVP까지 수상했다.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스위치 히터 홈런왕으로 기록된 건 덤.1991년에는 .268 39홈런 92타점으로 2년 연속으로 파리그 홈런왕과 타점왕을 동시에 석권했고 역시 지명타자 부문 베스트나인에 올랐다. 1992년에는 .266 41홈런 87타점의 호성적을 거두며 3년 연속 홈런왕,
이렇게 세이부에서 화려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데스트라데는 시즌이 끝난 후 메이저리그의 신생팀 플로리다 말린스로부터 오퍼를 받게 된다. 일본에서의 선수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던 데스트라데였지만 자신에게 있어 제2의 고향인 플로리다를 연고로 한 신생팀의 창단 멤버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뿌리치기 힘든 매력적인 조건이었고, 결국 데스트라데는 플로리다 말린스와 2년 계약을 맺으며 메이저리그로 돌아갔다.
2.3. 플로리다 말린스
1993년, 데스트라데는 말린스의 주전 1루수로 나서며 .255 20홈런 87타점의 성적을 기록했다. 수비가 좋지 않은 1루수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렇게 좋다고 말할 수는 없는 성적이었지만 그래도 홈런[1]과 타점 부문에서 팀 내 1위를 마크했다.하지만 1994년에는 부진에 빠지며 타율이 멘도사 라인에 걸쳤는데, 5월 22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전에서 상대 선발 투수인 알렌 왓슨에게 빈볼을 맞고 격분한 나머지 난투극을 벌이며 한 차례 소동을 일으켰고 이후 두 경기만에 웨이버 공시되었다. 말린스에서 방출된 이후에는 새 팀을 구하지 않은 채 그대로 1년을 푹 쉬었다.
2.4. 다시 세이부로
사실상 은퇴 수순을 밟는 듯 했던 데스트라데는 1995년 친정팀인 세이부로 돌아갔지만 이미 그의 몸 상태는 예전 같지 않았다. 46경기에 나와 .245 6홈런 23타점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기록하던 도중 아내와의 이혼 등 가정 문제가 겹치며 6월에 방출 요청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된다.3. 현재
왼쪽의 인물이 데스트라데.
현역 시절에는 일견 호리호리해 보이기까지 하는 군살없는 탄탄한 몸매를 지녔었고 큼직한 안경으로 지적인 분위기까지 풍겼었으나 은퇴하고 나서는 거의 두 배 가까이 몸이 불었다. 많은 운동선수들이 현역을 은퇴하면 현역시절 먹던 위장은 그대로인데 운동을 안 해서 살이 찌는 경우가 많고 데스트라데도 그렇게 되었다.
은퇴 후에는 탬파베이 레이스 지역방송 채널의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다. 입담이 좋다고 하며 간간히 일본방송에도 얼굴을 비추고 있다.
그러다 2024년 7월 11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구단 스페셜 어드바이저로 취임하게 되었다.#
4. 일본 시리즈 진기록
데스트라데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세이부의 전성기를 전기/후기[2]로 나눌 때 후기에 해당되는 1990~1992년 일본시리즈 3연패에 크게 공헌했기 때문이다. 시즌 중은 물론 일본 시리즈에서도 큰 활약을 했는데 그 와중에 세운 진기록이 바로 3년 연속 일본 시리즈 1차전 첫 타석 홈런이다.1990년 요미우리와의 1차전에선 상대 선발 마키하라 히로미로부터, 91년 히로시마와의 1차전에선 당해 MVP / 사와무라상 / 평균자책점 / 다승 1위 타이틀을 독식한 사사오카 신지로부터, 92년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선 오카바야시 요이치로부터 달성해 내었다.
시리즈 1차전은 전체 흐름의 기선을 제압하는 쪽에 유리한 분위기로 흐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대 중심 타선에서 나온 한 방은 일반적인 홈런과의 차이가 있다. 이 역할을 팀 내 최고 거포가 매번 해결해 주었으니 세이부 입장에선 시리즈를 운용해 나가는데 있어 더할 나위 없이 편했던 셈. 참고로 각 시리즈 1차전은 1992년을 제외하곤[3] 전부 승리했다.
5. 기타
- 얼핏 보면 전 OB 베어스 선수 김상호와 외모가 흡사하다.
- 랜디 존슨의 메이저리그 첫번째 삼진의 제물이기도 했다.
- 요미우리 자이언츠 사상 최고의 외국인선수인 워렌 크로마티의 이름을 딴 만화 돌격!! 크로마티 고교에서 '데스트라데 고교'라는 이름으로 차용당했던 적이 있다.
- 원래는 왼손잡이로, 야구를 우투우타로 시작했었지만, 우타석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좌타자로 전향했다가 좌완 투수의 체인지업 등의 변화구에 대한 대응을 위해 우타석에도 다시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스위치 히터가 됐다고 한다.
[1] 플로리다의 옛 홈구장인 조 로비 스타디움('댄 마리노'의 집)의 광활한 외야를 생각한다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2] 일반적으로 모리 마사아키 감독의 세이부를 황금시대로 부르는데 전기는 1986년부터 1988년, 후기는 1990년부터 1992년으로 나눌 수 있다. (중간인 1989년은 킨테츠에게 밀려 3위, 일본시리즈는 요미우리가 우승) 1993년, 1994년에도 퍼시픽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나 일본시리즈에서 야쿠르트, 요미우리에 패하여 다소 빛이 바랬다. 그럼에도 요미우리의 V9에 필적할 팀은 요미우리조차 못해본 리그 10연패까지 노려볼 수 있었던 모리가 이끌던 세이부 밖에 없다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 재밌게도 모리 감독은 요미우리의 V9 시절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3] 3회 말 2:1로 역전당하고 6회 말에 1점을 더 준 뒤 9회까지 어찌저찌 동점을 만들었지만, 연장 12회 말에 은퇴 예정이었던 베테랑 스기우라 토오루에게 만루 홈런을 맞고 패배했다. 1992년 일본시리즈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홈런이 계기가 되서 스기우라는 은퇴를 1년 더 미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