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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28 13:38:42

나카무라 노리히로

나카무라 노리히로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07주니치.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2007


파일:2004 아테네 올림픽 로고.svg
2004 아테네 올림픽
{{{#bd5c24 동메달}}}
2004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6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3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하츠시바 키요시
(치바 롯데 마린즈)
나카무라 노리히로
(킨테츠 버팔로즈)
스즈키 켄
(세이부 라이온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9~2002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3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카타오카 아츠시
(닛폰햄 파이터즈)
나카무라 노리히로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파이터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9~2002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3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카타오카 아츠시
(닛폰햄 파이터즈)
나카무라 노리히로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파이터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4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3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파이터즈)
나카무라 노리히로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이마에 토시아키
(치바 롯데 마린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7, 200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3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이와무라 아키노리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나카무라 노리히로
(주니치 드래곤즈)
미야모토 신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tablebgcolor=#3fb1e5>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0년 퍼시픽 리그 최다 홈런
터피 로즈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나카무라 노리히로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터피 로즈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tablebgcolor=#3fb1e5>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0, 2001년 퍼시픽 리그 최다 타점
터피 로즈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나카무라 노리히로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터피 로즈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tablebgcolor=#3fb1e5>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1년 퍼시픽 리그 최고 출루율
1999-2000
스즈키 이치로
(오릭스 블루웨이브)
나카무라 노리히로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알렉스 카브레라
(세이부 라이온즈)

파일:NPB 로고.svg 2007년 일본 시리즈 MVP
이나바 아츠노리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나카무라 노리히로
(주니치 드래곤즈)
키시 타카유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파일:NPB 로고.svg 일본프로야구 보유 기록
단일 경기 최다 득점 (6득점)
양익 100m 이상 구장에서의 연속 경기 최다 홈런 (5경기 연속)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센트럴 리그 보유 기록
단일 경기 최다 볼넷 타이 (5개)

킨테츠 버팔로즈 등번호 66번
쿠리타 사토시
(1991)
나카무라 노리히로
(1992~1996)
타카츠카 노부유키
(1998~2003)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등번호 3번
이시이 히로
(1990~1996)
나카무라 노리히로
(1997~2000)
요시오카 유지
(2001~2004)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등번호 5번
무라카미 타카유키
(1987~2000)
나카무라 노리히로
(2001~2004)
해체[1]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66번
히람 보카치카
(2000)
나카무라 노리히로
(2005)
마이크 맥두걸
(2011~2012)
{{{#ffffff [[오릭스 버팔로즈|오릭스 버팔로즈]] 등번호 8번}}}
랜들 사이먼
(2005)
나카무라 노리히로
(2006)
터피 로즈
(2007~2009)
{{{#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205번}}}
공번 나카무라 노리히로
(2007)
[2]
이토 신고
(2011~2013)
{{{#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99번}}}
야마사키 아키히로
(2005~2006)
나카무라 노리히로
(2007~2008)
이노우에 카즈키
(2010~2013)
{{{#ffffff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등번호 99번}}}
나카무라 마사토
(2008)
나카무라 노리히로
(2009~2010)
김병현
(2011)
{{{#fff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요코하마 베이스타즈-DeNA 베이스타즈]] 등번호 99번}}}
요코야마 유키야
(2007~2009)
나카무라 노리히로
(2011~2014)
네프탈리 소토
(2018~)
{{{#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74번}}}
아와노 히데유키
(2019~2021)
나카무라 노리히로
(2022~2023)
결번
}}} ||
파일:230615 나카무라 노리히로.jpg
나카무라 노리히로
中村紀洋 | Nakamura Norihiro
출생 1973년 7월 24일 ([age(1973-07-24)]세)
오사카부 오사카시 요도가와구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오사카부립 시부타니 고교[3]
신체 180cm, 93kg, O형
포지션 3루수, 1루수[4]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1년 드래프트 4라운드 (킨테츠)
소속팀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1992~2004)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5)
오릭스 버팔로즈 (2006)
주니치 드래곤즈 (2007~2008)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009~2010)
요코하마 베이스타즈-DeNA 베이스타즈 (2011~2014)
지도자 주니치 드래곤즈 타격코치 (2022)[A]
주니치 드래곤즈 2군 타격코치 (2022~2023)[A]
SNS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커리어3. 은퇴 후4. 일본 인터넷 커뮤니티 내에서의 나카무라 노리히로5. 여담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나카무라 노리히로 킨테츠 시절2.jpg
일본프로야구의 선수. 별명은 '노리' (ノリ).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마지막 4번 타자로 킨테츠의 마지막 리그 우승인 2001년의 주역으로 막강 '이테마에 타선'의 4번을 맡아 3번 터피 로즈와 함께 공포의 클린업을 이룬 3루수였다. 호쾌한 풀스윙과 배트 플립, 견고한 3루 수비력으로도 유명했다. 3루수 베스트나인을 총 5회[7], 골든글러브를 7회[8] 수상했으며 홈런왕 1회(2002), 타점왕 2회(2000, 2001), 최고출루율 1회(2001)의 타이틀을 가져간 이력이 있다.

하지만 메이저 도전에 실패하며 현역 후기에는 오릭스-주니치-라쿠텐-요코하마의 4팀을 전전한 저니맨의 길을 걸은 풍운아이기도 했다. 한국에선 이병규 동료로 유명세를 탔다.
선수 은퇴 후에는 아마야구 인스트럭터, 유튜버, 야구평론가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 커리어

2.1. 아마추어 시절

어린시절, 1985년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한신 타이거스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경기에서 ‘백스크린 3연발’을 관중석에서 직접 목격했다. 1990년 고교 2학년 시절 무명의 공립 시부타니 고교의 중심선수로 4번타자, 3루수, 투수 역할을 수행하며 지역 예선에서 4홈런을 기록하는 활약으로 격전지 오사카의 여러 사립 강호들을 격파하고 고시엔 대회 본선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9]다만 팀은 본선 2회전에서 야마구치현의 우베 상고와 맞붙어서 9회말에 4-4 동점을 만들었으나 10회초에 우베 상고한테 만루홈런을 당하면서 8-4로 패하며 탈락했다.(이 경기에서 시부타니 고교는 후공이었다.)

고교 통산 35홈런을 기록했으며 긴테츠 버팔로즈로부터 4순위 지명을 받았다. 이 때 지명받은 포지션은 투수.

2.2.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시절


입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타자로 전향했다. 1992 ~ 1995년에는 인상 깊은 족적을 남기지 못했으나 1996년 첫 3루수 베스트나인을 차지했고 1998년에는 리그 2위인 32개의 홈런을 기록하면서 처음으로 시즌 30홈런을 달성했다. 1999년에는 시즌 전 경기 출전을 처음으로 달성했고 첫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하였다. 2000년에는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했으나 팀은 4위에 그쳤다. 그 대신 .277 .381 .578 OPS .959에 39홈런 110타점을 올리며 프로 커리어 첫 홈런왕과 타점왕을 수상했고 베스트나인과 골든글러브를 가져갔다. 그러나 팀은 2년 연속 최하위에 그쳤다. 시애틀 매리너스 로 떠난 스즈키 이치로의 뒤를 이어 퍼시픽리그 일본인 선수 최고연봉자가 됐다.

2001년에는 3번 터피 로즈, 5번 이소베 코이치와 함께 중심타선을 이룬다. 막강 '이테마에 타선'의 4번타자로 활약하면서 .320 .434 .630 OPS 1.064, 46홈런 132타점의 커리어하이[10] 시즌을 보냈고 킨테츠의 퍼시픽리그 우승 및 일본시리즈 준우승에 크게 기여했다.[11] 타점왕, 최고출루율, 베스트나인, 골든글러브 등의 개인 타이틀도 가져간 최고의 해. 2002년 시즌 도중 FA권을 취득했고 시즌 종료 후 FA권 행사 의사를 밝혔다. 뉴욕 메츠와 교섭이 진행됐으나 결렬됐고 킨테츠와 재계약하였다.

2003년에 무릎 부상을 입었음에도 경기 출전을 강행했으며 이는 이후의 성적 하락의 원인이 됐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해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시즌 종료 후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고 포스팅 결과 LA 다저스에 낙찰됐다. 다만 개막 로스터 합류가 보장되지 않은 스프링캠프 초청 스플릿 계약. 만약 메이저리그로 가지 않았다면 2004년 11월 8일에 있었던 오릭스-라쿠텐 분배 드래프트 결과에 따라 합병 구단인 오릭스 버팔로즈로 가는 거였다.

2.3. LA다저스 시절

2005년 트리플A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트리플A에서 22홈런을 기록했지만 타율 0.249 및 20실책을 기록하며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고 메이저에 콜업된 17경기에서도 .128의 타율에 .350의 OPS로 총체적 난국의 모습이었다.

결국 1년만에 메이저 도전을 포기하고 일본프로야구 복귀를 선언했다.

2.4. 일본 프로야구 복귀,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

세이부 - 요미우리를 거쳐 고향인 오사카 부로 돌아온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함께 2006년 시즌을 시작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부상으로 좀처럼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시즌 종료 후 계약 교섭에서 60% 삭감안을 제시받자 계약을 거부, 자유계약선수가 됐다.

2.5.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다음 해 초까지도 소속팀을 찾지 못한 무적 선수로 남았지만,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의 주니치 드래곤즈부터 연습생 제의를 받아 스프링 캠프에 참가했고 입단 테스트를 통과하여 육성선수로 계약했다. 연봉은 400만엔, 등번호는 205번이었다. 시범경기에서 활약하자 개막 직전 지배하선수 계약을 맺고 연봉 600만엔, 등번호 99번으로 변경됐다. 정식선수 전환 후 타율 0.293/20홈런/79타점을 기록하며 3루수 골든글러브도 탈환하는 등 건재를 과시했다. 팀은 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를 통해 일본시리즈에 진출. 2007년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의 53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해 시리즈 MVP를 차지했다.[12]

2008년 시즌을 앞두고 무려 733%가 인상된 연봉 5,000만엔에 재계약했다. 이 시즌에는 타율 0.274/24홈런/72타점을 기록하여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시즌이 끝나고 FA권을 행사해 라쿠텐으로 이적했다.

2.6.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시절

2009년 타율 0.221/2홈런/26타점을 기록하여 부진하였고 2010년에도 부진하여 방출통보를 받았다. 본인은 현역 속행 의지를 보였다.

2.7.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 시절

2011년 62경기에 출전했지만 타율 0.209/1홈런/14타점으로 부진했다. 하지만 2012년에는 부활. 극한의 투고타저 시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자릿수 홈런을 치며 무라타 슈이치FA 이적으로 무주공산이 된 주전 3루수 자리를 쟁취했다. 이 해 일본프로야구 역대 22번째의 전 구단으로부터 홈런 기록을 달성했다. 2013년에도 전년도의 활약을 이어가며 스즈키 이치로, 마쓰이 히데키, 마쓰이 가즈오에 이어 일본인 선수로는 사상 4번째로 NPB/MLB합계 2,000안타를 홈런으로 달성했다. 물론 나카무라는 메이저에서 딱 5안타를 쳤다. 같은 해 NPB 사상 43번째 2,000안타를 달성하여 명구회 입회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NPB 사상 18번째 400홈런을 달성했다.

2014년 "팀의 방침에 따르지 않는 언행을 했다"는 이유로 등록 말소된다. 코치에게 "자신의 타석에서는 상황에 따라서는 주자를 움직이지 않고[13] 타석에 집중하고 싶다"와 상의한 것이 나카하타 키요시 감독에 대한 비판으로 여겨졌고 이후로는 한 번도 1군에 오르지 못했다. 결국 10월 3일 구단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 DeNA 구단으로부터 그동안의 실적과 공헌도를 고려해 은퇴식을 제안받았으나 현역 속행 의지를 보이며 거절했다.

3. 은퇴 후

그를 찾는 팀은 없었다. 그 뒤로 학생들을 위한 야구 교실의 강사 활동, 프로야구 해설자 및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8년 4월 21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였다.

유튜버로 잘 지내던 중 타츠나미가 주니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2022년 주니치 드래곤즈 1군 타격코치로 현장에 복귀했다. 슬러거 출신의 타격코치로서 2010년대 이후 물방망이로 변해버린 주니치 타선을 어떻게 되살릴지와 신예 타자들을 어떻게 성장시킬지에 대한 기대를 많이 받았고, 실제로 2022년 개막 직후엔 작년까지 답이 없던 주니치 타선이 어느 정도 개선된 모습을 보여주며 호평을 받았으나 시즌 도중인 5월 23일에 갑작스럽게 하루 토시오와 자리를 맞바꿔 2군 타격코치로 가게 되었다.

시즌 도중에 별다른 성적 부진이나 구설수가 없음에도 2군으로 강등되는 이례적인 사례에 팬들로부터 논란이 일게 되었는데, 주간문춘을 통해 넓은 나고야 돔에 맞춰 컨택과 주루를 중심으로 한 타츠나미 감독의 타자 육성 계획과는 반대되는 장타를 중심으로 한 육성 이론을 내세운 점과, 이시카와 타카야 등 특정 신인에게 타격 지도를 하지 말라는 지시를 어긴 점 때문에 타츠나미가 분노하여 나카무라를 2군에 강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 다만 출처가 연예계 스캔들 외엔 신빙성에 다소 논란이 있는 주간문춘인 만큼 어느 정도 걸러들을 필요는 있다.

그렇게 하루 코치 체제로 바뀐 이후 주니치의 팀 타격 지표가 귀신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며 팬들 사이에서 타츠나미의 여론이 최악으로 번지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고, 결국 시즌 종료 후 하루 코치는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팀을 떠나 오릭스 버팔로즈 육성 코치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2022년 시즌 이후 퇴단할 것이란 예측까지 나오기도 했으나, 시즌 종료 후인 12월 2일에 잔류가 발표되면서 2023시즌에도 주니치에서 계속해서 코치를 역임하게 되었다. 2023 시즌을 끝으로 퇴단.

4. 일본 인터넷 커뮤니티 내에서의 나카무라 노리히로

나카무라 노리히로의 현역시절 수많은 어록들을 적는 봇

2021년 5ch유저들이 나카무라의 2002년 FA 당시를 회상하는 인터뷰를 보고 적은 스레

나카무라 노리히로의 경우 여러 이적과정에서 보여준 모습과 각 구단에서 보여준 모습으로 인해 현역시절 일본내 인터넷 커뮤니티 여론이 안 좋은편이다.특히 돈 관련 트러블이 많다.

2002년 시즌종료후 FA행사를 하면서 나카무라 노리히로라는 브랜드를 생각해서 킨테츠에서 끝내도 될까?(中村紀洋というブランドを考えて近鉄で終わっていいのか)말을 필두로 수많은 어록들을 남겼고 심지어 저 2002년 사가에서 거부한 구단이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즈 두 거대인기팀이다보니 2ch/5ch의 야구 관련 스레드에선 거의 동네북처럼 맞는게 일상이었다.[14]

그영향인지 2003년 카와사키 축제의 경우 다른 포지션에서 누구누구 누구누구를 올리자라는 의견이 제시 되는 와중에 나카무라 노리히로만은 떨구자라는 의견이 제시되어 그 반사이익으로 오가사와라 미치히로가 올스타에 승선하기도 했다.

나름 주니치에 와서 갱생한 모습을 보여줬기에 선수의 별명인 노리(ノリ)를 따와 옛날에 수많은 어록들을 쏟아내던 나카무라는 검은노리(黒ノリ), 주니치에 와서 갱생한 베테랑의 모습을 보여준 나카무라는 흰노리(白ノリ)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요코하마 말년에 방출의 계기가 된 도루 작전을 둘러싼 나카하타 감독과의 충돌 건도 있었을 정도로 트러블메이커의 모습은 남아있었다.

20년대 초중반에 와서야 이 선수가 유튜브도 하고 현장복귀도 하는등 여러 모습을 보여줘서 안티여론은 나름 덜해진편이다.물론 저 5ch글이 2021년인거 감안하면 씹을사람은 아직도 씹는다.

5. 여담

국제대회에서 한국팀과의 대결전적이 많다. 1995년1999년한일 슈퍼게임에 연달아 참가했고, 2000년에는 시드니 올림픽 본선에도 참가했다.[15] 특히 동메달결정전 한국전에서는 2회초에 구대성을 상대로 펜스상단을 직격하는 2루타를 쳤는데, 만약 이 타구가 홈런으로 연결되어 일본이 1대0로 앞서나갔다면 본경기에 병역문제까지 걸린 한국팀 입장에서는 경기내내 압박감이 더했을 가능성이 높다.[16] 또한 (일본이 리드상황이었다면) 8회말 일본의 위기상황에서 당시 마운드에 있었던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볼배합 또한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준결승전 호주전 9회 1사 주자없는 상황에서 타석에 나와, 내야땅볼을 친 후에 1루에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까지 했던 적이 있다.[17][18][19]

2001년 9월 24일, 팀동료인 터피 로즈가 당시 일본타이기록인 55홈런[20]을 기록했던 경기에서,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상대로 역전 끝내기 홈런[21]을 친 타자가 바로 나카무라 노리히로이다.[22] 로즈와는 사적으로도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나카무라와 메츠와의 입단교섭이 파기되며 긴테츠가 나카무라를 잡기 위해 거액의 장기계약을 사인하면서 로즈가 요구한 다년계약을 거절해 본의 아니게 로즈의 퇴단 원인에 일조하기도 했다.[23]

2007년 주니치 드래곤즈의 일본시리즈 우승 당시 이병규와 팀동료 사이였다.

6. 관련 문서


[1] 2004 시즌 종료 이후,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병합되었다.[2] 육성선수 신분으로 3월 22일까지 해당 번호를 달았다.[3] 시부야의 渋谷와는 한자만 같다.[4] 드래프트 당시엔 투수로 입단했으나 타자로 전향했다.[A] 시즌 도중인 5월 23일에 보직 변경.[A] [7] 퍼시픽리그 : 1996, 1999~2002.[8] 퍼시픽리그 : 1999 ~ 2002, 2004. 센트럴리그 : 2007 ~ 2008.[9]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이다.[10] 커리어 유일의 규정타석 3할도 이 해 쳤다.[11] 3번 터피 로즈와 합작한 101홈런은 한 팀의 두 타자가 합작한 것으론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최고 기록이다.[12] 이병규, 타이론 우즈 등 한국 팬들에게 익숙한 이름들도 이 해 주니치에서 뛰었다.[13] 도루 작전을 걸지 말라는 뜻[14]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2002년 FA를 선언한 당시 가장 먼저 관심의사를 표시한 팀은 마쓰이 히데키가 MLB로 진출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였다. 하지만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회장은 당시 금발로 염색을 하고있던 나카무라의 머리에 대해 난색을 표했는데, 그 기사를 봤는지 나카무라가 비시즌에 열린 대회인 동서대항전에서 머리를 좀더 화려한 스타일로 꾸미면서, 간접적으로 거절의사를 표시한다. 이후 뉴욕 메츠와 접촉을 하고 계약직전까지 갔지만 계약성사 직전에 mlb.com에 게시된 본인의 계약기사를 보고 이런 구단은 믿을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면서 딜이 파토되었다. 그 다음은 한신 타이거즈와 접촉했는데 선수 본인이 거절하면서 결국 킨테츠에 잔류하게 되었다. 참고로 이 와중에 8년 43억엔이라는 거액의 돈을 요구했다, 보디가드를 요청했다, 골프회원권을 요구 했다는등 여러 루머가 돌았다.근데 2003년 후에 킨테츠 회장에게 적자의 원인으로 대놓고 지목당한거보면 협상기간때 돈을 쎄게 부른거 같긴하다. 루머자체는 믿거나 말거나지만 이후 나카무라가 2005년 오릭스과의 연봉협상중 의견충돌로 퇴단하면서 자유계약신분이 되었을때 요미우리, 한신 두 구단은 저 영향인지 대놓고 영입에 관심없다는 뉘앙스를 내비쳤다. 특히 요미우리는 간사이 사투리인 いらん(필요없어)라는 말까지 대놓고 하면서 불편함을 내비쳤다.[15] 예선 한국전 때는 1회에 정민태가 나카무라의 강습타구에 맞아 강판되기도 했다.[16] 2회 일본은 나카무라의 2루타 이후 후속타 불발로 득점에 실패하고 8회말이 시작할때까지 0대0 상황이 이어졌다.[17] 결과는 아웃. 이후 다음타자 다니 요시토모마저 아웃되면서 경기는 일본의 패배로 끝난다.[18] 참고로 9회에 상대했던 호주투수는 (당시 한신 타이거즈의 필승조이기도 했던) 좌완불펜 제프 윌리엄스였다. 최종스코어는 0대1로 일본 패배.[19] 이후 동메달결정전에서 캐나다를 꺾고 동메달 획득.[20] 2013년에 블라디미르 발렌틴60홈런을 치면서 갱신한다.[21] 2점홈런.[22] 장소는 교세라 돔 오사카. 최종스코어는 7대6으로 긴테쓰 버팔로즈의 승리.[23] 물론 긴테츠 버팔로즈는 모기업의 실적부진과 야구단의 누적된 적자로 몇 년 안 가 오릭스와 합병하는 형태로 소멸했으니, 누굴 잡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