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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05:31:24

나카하타 키요시

나카하타 키요시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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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49c00>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파일:일본 국기.svg 나가사와 후지오
(永沢富士雄)
파일:일본 국기.svg 이토 켄타로
(伊藤健太郎)
파일:일본 국기.svg 나카지마 하루야스
(中島治康)
파일:일본 국기.svg 츠츠이 오사무
(筒井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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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川八郎)
1936夏 1936夏-1943 1936夏-1948 1936秋 1937秋
<rowcolor=#f49c00>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파일:일본 국기.svg 미즈하라 시게루
(水原茂)
파일:일본 국기.svg 카와카미 테츠하루
(川上哲治)
파일:일본 국기.svg 아오타 노보루
(青田昇)
파일:일본 국기.svg 키구레 리쿠조
(木暮力三)
파일:일본 국기.svg 나카무라 마사미
(中村政美)
1937秋 1939-1958 1943-1952 1943 1943-1944
<rowcolor=#f49c00>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스다 히로시
(須田博)
파일:일본 국기.svg 콘도 사다오
(近藤貞雄)
파일:일본 국기.svg 카와바타 히로시
(川畑博)
파일:일본 국기.svg 쿠로사와 토시오
(黒沢俊夫)
파일:일본 국기.svg 코마츠바라 히로키
(小松原博喜)
1944 1944 1944 1946 1947
<rowcolor=#f49c00>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파일:일본 국기.svg 히라야마 키쿠지
(平山菊二)
파일:일본 국기.svg 우노 미츠오
(宇野光雄)
파일:일본 국기.svg 미나미무라 후카시
(南村不可止)
파일:일본 국기.svg 테즈카 아키하루
(手塚明治)
파일:미국 국기.svg 미야모토 토시오
(宮本敏雄)
1948 1951-1953 1951-1952 1953-1954 1955-1961
<rowcolor=#f49c00>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파일:일본 국기.svg 히가사 카즈오
(樋笠一夫)
파일:일본 국기.svg 후지오 시게루
(藤尾茂)
파일:일본 국기.svg 카시와에다 분지
(柏枝文治)
파일:일본 국기.svg 요나미네 카나메
(与那嶺要)
파일:일본 국기.svg 나가시마 시게오
(長嶋茂雄)
1955 1955-1961 1955 1958 1958-1974
<rowcolor=#f49c00> 제26대 제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파일:일본 국기.svg 사카자키 카즈히코
(坂崎一彦)
파일:일본 국기.svg 쿠니마츠 아키라
(国松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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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貞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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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沢義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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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森昌彦)
1959-1962 1960-1968 1962-1980 1963 1964-1965
<rowcolor=#f49c00> 제31대 제32대 제33대 제34대 제35대
파일:일본 국기.svg 아이바 요시히로
(相羽欣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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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田勝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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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中久寿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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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倉照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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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森永勝也)
1965 1965 1967 1967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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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末次利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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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田真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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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淡口憲治)
1969 1970-1975 1974 1976-1979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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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ジョンソ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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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シピ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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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畑清)
1976 1978-1979 1979-1980 1980-1982 1981-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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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トマソン)
파일:일본 국기.svg 마츠바라 마코토
(松原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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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辰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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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クロマティ)
1981 1981 1982-1995 1983-1984 1984-1990
<rowcolor=#f49c00> 제51대 제52대 제53대 제54대 제55대
파일:대만 국기.svg 루밍쑤
(呂明賜)
파일:일본 국기.svg 코마다 노리히로
(駒田徳広)
파일:일본 국기.svg 요시무라 사다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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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ブラウン)
파일:미국 국기.svg 필 브래들리
(ブラッドリー)
1988 1988-1992 1990-1998 1990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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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미국 국기.svg 로이드 모즈비
(モスビー)
파일:미국 국기.svg 제시 바필드
(バーフィール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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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落合博満)
1992-1993 1993 1993 1993 1994-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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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 국기.svg 히로사와 카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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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998 1995-2002 1996 1997-2005 1997-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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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2007-2019 2007 2008-2011 2011-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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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田翔)
2022
1) 연도는 해당 선수가 4번 타자로 1경기 이상 출장한 해.
2) 볼드체일본야구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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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988 NPB 센트럴리그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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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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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 현재
초대
와타나베 타이리쿠
(1950)
2대
나카지마 하루야스
(1951)
3대
아리마 기이치
(1951)
4대
코니시 도쿠로
(1952~1953)
5대
나가사와 타케오
(1954)
6대
후지이 이사무
(1955)
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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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1958)
8대
모리 시게오
(1959)
9대
미하라 오사무
(1960~1967)
10대
벳토 카오루
(1968~1972)
1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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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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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1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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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1976)
14대
벳토 카오루
(1977~1979)
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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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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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네 쥰조
(1982~1984)
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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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1986)
1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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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1989)
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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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992)
2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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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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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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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2000)
24대
모리 마사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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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대
오오야 아키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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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나 타카오
(2010~2011)
29대
나카하타 키요시
(2012~2015)
30대
알렉스 라미레스
(2016~2020)
31대
미우라 다이스케
(2021~)
: 일본시리즈 우승 / : 센트럴리그 우승 / ☆: 일본시리즈 진출(리그 2~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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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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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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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프로야구선수회 로고.png 노동조합 일본프로야구선수회 역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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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1989
하라 타츠노리
1989~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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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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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998
후루타 아츠야
1998~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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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신야
2005~2008
아라이 타카히로
2008~2012
시마 모토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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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타니 긴지로
2017~2021
아이자와 츠바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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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01kiyoshinakahata.jpg
나카하타 키요시
中畑清 | Kiyoshi Nakahata
생년월일 1954년 1월 6일 ([age(1954-01-06)]세)
후쿠시마현 니시시라카와군 야부키정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아사카상업고등학교 - 고마자와대학
포지션 3루수, 1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75년 드래프트 3위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6~1989)
지도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1993~1994)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감독 (2012~2015)

1. 개요2. 프로 입단 이전3. 거인의 스타가 되다4. 현역에서 물러나다5. 요코하마 감독이 되다6. 감독 퇴임 이후7. 기타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前 프로야구 선수이자, 前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 감독.

선수시절 별명은 애칭은 얏타맨(ヤッターマン), 절호조남(絶好調男). 한국한정으로 '열도의 갓동님.'

2. 프로 입단 이전

후쿠시마 현 니시시라카와 군 야부키 정에서 낙농업을 운영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나가시마 시게오의 활약상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면서 나가시마를 동경하게 되었다. 아사카 상업고등학교(현재의 데이쿄아사카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야구부에 입단해 포지션인 3루수, 유격수, 포수를 각각 맡았고 고교 졸업 후 고마자와 대학에 진학하여 1973년 추계 리그에서 최고 수훈 선수로 선정된 것을 포함해 베스트나인에 네 차례나 선정되는 등의 실적을 남겼다. 검은 선글라스[1]와 특유의 한발타법으로 주목을 받았고 2학년 때인 춘계 시즌에서는 도토 대학 리그의 수위타자 타이틀을 놓고 경쟁에 참여하는 등 도토 대학 리그 통산 82경기에 출전해 300타수 92안타, 타율 3할 7리, 10홈런, 51타점을 기록했다.

일명 ‘고마자와 트리오’라고 불린 히라타 가오루, 니노미야 이타루와 함께 1975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주목을 받았고 요미우리의 1순위 지명이 유력시 되면서 고마자와 대학의 합숙소에 기자들이 몰려오기도 했지만 지바 현립 조시 상업고등학교의 시노즈카 도시오가 1순위로 지명되었다. 기자들이 발길을 돌린 모습을 지켜본 나카하타는 별실에서 팀 동료와 함께 쇼기를 두고 있었지만 3위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으면서 “고졸인 사람에게 먼저 지명되었다”라고 실망감을 느낀 반면에 투쟁심은 늘어났다고 한다.

나카하타는 홋카이도 다쿠쇼쿠 은행[2]의 입사가 결정되어 있었지만 결국 프로팀에 입단하기로 결심했고 드래프트 회의에서 지명받지 못한 히라타와 니노미야도 함께 입단한다고 신청하여 요미우리도 이를 받아들였다. 같이 입단한 히라타는 1981년 일본시리즈때 활약으로 우수선수에 뽑히기도 했다.

3. 거인의 스타가 되다

파일:external/www.hatatoy.jp/etc007.jpg

입단 후 3년 간은 1군에서의 뚜렷한 성적을 낼 수 없었지만 프로 3년째인 1978년 시즌 종료 후에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3]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합동팀을 짜 신시내티 레즈와 친선경기를 개최한 미일 야구 1차전에서 나카하타는 타카다 시게루의 대타로 출전해 신시내티 레즈의 마리오 소트로부터 2점 홈런을 때려냈다. 이 날은 눈에 있던 콘텍트 렌즈를 제거하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출전했지만 아내가 고라쿠엔 구장까지 보낸 새 물건 덕분에 자주 보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미일 야구에서의 활약을 계기로 1군에 정착한 1979년에는 타격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다카다를 대신해서 출전했고 다카다가 복귀한 이후에도 3루수의 주전 자리를 지켰다. 그 해 센트럴 리그 신인왕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시즌 종반에 갑작스런 부상을 당하면서 신인왕을 차지하지 못했다.

이듬해 1980년에는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웠고(503타석) 같은 해 가을에는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사임과 오 사다하루의 은퇴, 그리고 드래프트 회의에서 나카하타와 같은 3루 포지션을 갖고 있던 하라 다쓰노리의 입단을 둘러싼 사건이 일어났다. 여기서 포지션의 문제가 발생하였지만 감독으로 취임한 후지타 모토시 등의 수뇌진은 애초에 ‘나카하타는 3루·하라는 2루’라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1년이 되면서 나카하타는 시즌 도중 부상을 당해 전력에서 이탈하는 등 그 사이에 하라는 3루에, 2루에는 시노즈카 도시오가 들어오면서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 그리고 나카하타는 다시 복귀하면서 1루수로 전향해 나카하타의 부상 덕분에 포지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일각에서의 평가도 있었다. 그 해 요미우리는 1973년 이후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해 나카하타 본인도 타율 3할 2푼 2리, 16홈런, 66타점을 기록하며 맹활약을 했다.

1983년에 당시 수비주루코치였던 스에쓰구 도시미쓰[4]가 최종전에서 3할대 전후를 기록한 선수들의 타율을 한 타석마다 계산기를 이용해 계산하였고 3할대에 오르면서 교체시켰기 때문에 타율은 3할 대에 머물렀다. 이 점을 지적받은 나카하타는 “3할 만은 계약 갱신 자리의 인상이 바뀌므로 용서해 주었으면 한다. 그 대신에 만약 자신이 타이틀 경쟁을 하면 절대로 쉬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나카하타는 고마자와 대학 시절에 마지막 경기까지 출전하고 수위타자를 놓친 경험은 있었지만 정작 프로에 입문한 후 그런 기회는 없었다. 이듬해 1984년 올스타전에서는 2차전과 3차전에 걸친 2타석 연속 홈런을 때려냈다.

1985년, 매스컴 앞에서 오 사다하루 감독의 지도력을 비판했는데 이후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오 사다하루 감독의 지휘하에서는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시절(제1차)에 신인이었던 선수가 주력을 담당하고 있었고 팀의 내분과 관련해서는 주로 잡지나 신문에서 보도된 적도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결성된 노동조합인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의 초대회장으로 취임했고 1985년 시즌 종료 후 고교 야구 역사상 최고의 간판 타자로 군림한 같은 내야수인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요미우리의 입단을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비 위치를 빼앗길 정도의 위기감을 가졌다. 비록 기요하라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에 입단했고 가토 히데지가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에 이적을 하면서 포지션을 놓고 경쟁하는 형태가 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가토를 대타에 밀어냈다(가토는 1986년 시즌 종료 후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1989년에 3루수로 다시 변경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의 경기 도중 상대 투수가 견제구를 던져 1루로 되돌아왔을 때 손가락을 다치는 부상을 당했다. 그 사이 3루에는 오카자키 가오루[5], 1루에는 고마다 노리히로가 주전으로 차지한 적도 있어 그 해 시즌 종반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경기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2루타를 날렸을 때 “자신은 일본의 구장에서 최초로 웨이브를 일으켰다”라고 발언했다. 그 후 1989년 일본시리즈 7차전(후지이데라 구장)에서는 본인의 입단동기인 시노즈카의 진언[6]으로 대타에 기용되어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요시이 마사토로부터 홈런[7]을 때려냈다.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통산 성적은 타율 .290 1294안타 171홈런 621타점.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7회 수상했으며(1982~1988, 7년 연속), 일본시리즈 우수선수상(준 MVP)도 1회 수상했다(1983).

4. 현역에서 물러나다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니혼 TV와 스포츠 닛폰의 야구 해설위원을 역임했고 1993년부터 나가시마 감독(제2기)이 이끄는 요미우리의 타격 코치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1993년 시즌에 팀은 리그에서 가장 저조한 타격 성적을 기록하면서 코치로서의 지도력에 대한 비판을 받았고, 아울러 FA를 앞둔 강타자 코마다 노리히로[8]와 타격 이론 등을 놓고 불화를 일으켜 그해 스토브리그에 고마다가 교진군을 떠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 입단하는 화근을 제공했다는 악평을 듣기도 했고, 고마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양대리그 홈런왕에 빛나는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FA로 입단하면서 존재감마저 잃어 버렸다. 심지어 오치아이와 나카하타는 지금도 53모임회에 같이 참여하는 동기생이다. 그러나 1994년에는 1루 주루 코치이자 팀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교진군의 5년 만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94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 코치직에서 물러나 다시 닛폰 테레비의 야구 해설위원과 스포츠 닛폰의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다.

해설자로써의 나카하타의 평가는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선수시절의 일화등을 보면 의외일지 모르지만 굉장히 차분하게 해설하는 편으로, 보통 상황에 대한 선수 심리에 대한 설명을 주로 하면서 시청자에게 이런 부분을 보면 좋을것이라는 포인트를 짚어주는 스타일.

2004년에는 아테네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팀의 수석 코치를 맡았지만, 본선에서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규정에 의해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등록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9]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팀의 동메달을 이끌었다. 같은 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비공식적으로 조감독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여담으로 정계 입문에 뜻이 있었는지 호리우치 츠네오처럼 국정 선거까지 도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탈락. 이후 정치에 미련은 없어진 듯. 다만 이때 정계의 문을 두드렸던 당이 극우로 분류되는 일어나라 일본이었다는 것 때문에 까임의 여지가 있다.

5. 요코하마 감독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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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9일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의 감독으로 영입되었다.[10] 후쿠시마 현 출신자로서는 처음.

자신의 생일이기도 한 이듬해 2012년 1월 6일에 취임 기자회견을 열었고 동시에 ‘뜨겁다! DeNA’(熱いぜ!DeNA) 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2012년 2월 1일부터 시작된 오키나와 현 기노완 시에서의 춘계 스프링 캠프에서는 “수비에 능하지 못한 선수는 주전이 될 수 없다”라는 팀의 방침을 명확하게 드러내면서 수비를 중시하는 팀을 만들겠다고 밝혔다.[11] 그러나 춘계 캠프 도중인 2월 2일에 인플루엔자 A형에 감염되면서[12] 다음날부터 휴양 생활에 들어가 그 기간 동안에 다카기 유타카 수석 코치가 팀 지휘를 맡고 있었지만 나카하타는 휴양중에도 호텔 방안에서 팀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2월 7일부터는 현장에 복귀했다.

하지만 부임 시기던 첫 해부터 2012년부터 3년차인 2014 시즌 성적은 6-5-5. B클래스다.

그래도 요코하마가 최근 리빌딩을 정조준으로 하여금 신진급 선수들의 포텐이 터지고 있으며 2016, 2017년을 기점으로 나카하타의 '믿음의 야구'[13]에 기반한 리빌딩이 성과를 내고 있다. 츠츠고 요시토모는 3할-20홈런을 치는 팀의 주포로 성장했고, 포수 구로바네 토시키, 다카조 슈토 등도 괜찮은 타격을 보내고 있다. 전임 감독이 투수코치로 이름난 오바나 타카오였다. 요미우리에서 투수들 잘 가르치기로 유명했지만, 정작 베이스타즈에 와서 투수들의 몰락과 시발점을 모두 보고 포기해야 할 지경까지 다다른다.

'믿음의 야구', '포기하지 않는 야구'를 기치로 내걸고 활발한 팀 분위기를 만드는 데 힘썼지만 그도 감독이라 팀 케미스트리를 해치는 행동에는 얄짤없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나카무라 노리히로[14]. 실제로 나카무라가 타석에 선 상황에서 선행주자가 도루하고 나서 벤치에서 화를 내고[15] 타자배치에 이의를 제기하자 등록말소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고 2군으로 내려버렸으며 전지훈련 소집 때 불량한 태도로 등장한 외국인선수에게 등록말소 조치를 내렸다.

2015년 10월 3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가 끝난 후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퇴임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유는 성적부진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구단 측에서는 구단의 인기를 높인 점을 평가해 사임을 만류하고 재계약을 추진했다고 한다. 현지에서는 다음 시즌의 코칭스태프 구성을 둘러싸고 구단과의 이견을 좁히지 못해서 스스로 나왔다는 보도가 있다.

나카하타의 퇴임 이후 공석이 된 요코하마 감독 자리는 알렉스 라미레스가 이어받게 되었고, 나카하타가 취임 초부터 강조한 포기하지 않는 야구[16]는 퇴임 이후부터 DeNA의 달라진 팀 컬러로 이어져 오고 있다.

6. 감독 퇴임 이후

요코하마 퇴임 이후 스포츠닛폰 야구 평론가, TBS 등 방송국 해설가로 활동하면서 요미우리 OB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가 2020년부터 OB회 회장직에 취임했다.[17]

2017년 시즌 종료 후 요코하마 레전드매치에서 감독 겸 대타로 나와 사사키 카즈히로에게 안타를 뽑아냈다.

2022년 하라 다쓰노리 체제의 요미우리가 급격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자 타 팀 감독 경력이 있음에도 차기 감독으로 추천하는 기사가 올라왔다.

2023년 요코하마의 홈 개막전에서 전임 감독 5명의 일원으로 시구를 한다. 문제는 상대가 요미우리라 이기는팀 우리팀이라는 기묘한 상황이 되었다(...).

2024년 일본시리즈 6차전 시구와 해설을 맡아 자신이 매각 후 첫 감독으로써 초석을 다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가 26년 만에 우승하는 모습에 감격했는지 울먹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야구 팬들도 베이스타즈를 TBS시절의 지리멸렬한 약체에서 벗어나 강팀으로 도약할 수 있게 팀 분위기를 바로잡고 초석을 다진 나카하타 감독에게 경의를 표했다.

7. 기타

8. 관련 문서



[1] 파일:external/sovicariate.org/npb151003_2.jpg[2] 홋카이도척식은행. 예전에 10대 도시은행으로 분류되었으나 1990년대 불량채권 문제로 파산하였다.[3] 이 해 시즌 종료 후 라이온즈가 세이부에게 매각됨과 동시에 사이타마 연고 이전이 결정되면서 이해 일미야구는 라이온즈가 후쿠오카 연고 팀으로써 마지막으로 치른 경기가 되었다.[4] 선수시절에는 살인적인 파괴력을 가진 ON포 뒤를 받쳐주는 5번타자 겸 우익수로 주로 뛰었다. 다만 이양반도 역대 요미우리 4번타자 명단에 있다. 요미우리 유일한 꼴찌시즌인 1975년 개막전 4번타자이기도 했다.[5] 야마우치 가즈히로가 주니치 감독직에서 시즌도중 모가지가 짤려나가고 쉬었다가 왕정치가 부르자마자 냅다 요미우리로 복귀하면서 비로소 1군에 중용되기 시작했다. 93년 시즌 나카하타의 지도자 커리어 첫해 하라보살이 에이징커브를 제대로 쳐맞으면서 4번타자로 선발출장한적이 있다.[6] 다만 나이는 나카하타가 시노즈카보다 4살 많다.[7] 이후에 1타석 더 들어왔지만 마지막 타석에서는 3루 쪽 내야 플라이로 끝났다.[8] 입단동기가 무려 하라보살이다. 다만 나이는 4살어리다. 공교롭게도 93년시즌 코마다의 입단동기인 하라보살은 에이징커브를 제대로 쳐맞고 주전에서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9] 올림픽 본선을 앞두고 나가시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감독직을 직접 맡을 수 없게 되었던 사정 때문인데, 당시 일본 대표팀에서는 본선 엔트리 등록 당시 나가시마를 명목상의 감독으로 등록하고 수석코치였던 나카하타를 감독대행으로 등록해서 엔트리 제출을 하려고 했으나 국제 올림픽 위원회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엔트리에는 나카하타를 정식 감독으로 등록해서 올림픽 본선 엔트리 제출을 완료했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 규정상 대회 현장에 참여하지 않는 인원을 명목상으로 엔트리에 넣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일본 국내에서는 여전히 나카하타는 감독대행 취급이고 나가시마 시게오를 감독으로 간주하고 있다.[10] 사실 나카하타의 목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감독이었고, 타 팀의 코치 제안을 고사해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하라 다쓰노리에게 밀린 데다 한참 후배들인 타카하시 요시노부, 마쓰이 히데키까지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기회가 오기는 어려웠고, 이러다가는 아예 평생 감독 한번 못 해볼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마침 요코하마의 감독직 제의가 들어오자 결국 수락한 것. 실제로 요미우리는 이 순수혈통주의 때문에 감독 한번 해보려고 선수시절 뛰어난 성적을 내고 은퇴한 뒤에도 타 팀의 감독이나 코치직을 고사하고 해설자나 평론가로 보내는 사람이 적지 않으며, 그러다가 마지막까지 감독 한번 못해보는 경우도 많다.[11] 원체 요코하마는 그 암울한 수비로 투수들이 개털렸었다. 반도모 팀과 비슷하지 않는가?[12] 일례로, 2009년 닛폰햄 파이터즈 선수들 대다수가 이것 때문에 시즌 중간 이탈이 심하였다. 다행히 리그 우승을 했다.[13] 재임 시 나카하타가 지속적으로 기용한 선수들이 야마사키 야스아키, 카지타니 타카유키 등이었고 이들은 2016년부터 요코하마의 기둥뿌리가 된다.[14] NPB 팬이라면 잘 아는 선수인데 의외로 꼰대 계열이라 신참 선수들이 어려워 하는 타입이라 한다. 단, 별개로 선수 개인은 아니라고만 하는데.. 서로 진술이 달라 신빙성이 없다.[15] 선행주자는 구단 수뇌진으로부터 그린라이트를 받아 놓은 상황이었다.[16] 실제로 인터뷰에서 '포기하지 않는 야구'를 강조했으며, 선수들에게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했다.[17] 요미우리 순혈주의는 1군 감독에만 해당되며 나카하타처럼 잠시 타팀 지도자를 맡았어도 OB회 회장까지는 될 수 있다.[18] 요미우리 제60대 4번타자이고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다.[19] 여성팬은 무려 8배나 증가했다.[20] 예선 풀리그에서 라이벌 쿠바에 승리하는 등, 예선을 1위(6승 1패)로 통과하고 준결승에 진출했었다. 금메달이 당연시되었던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