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cc800><tablebgcolor=#fcc800>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24 시즌 코칭스태프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000000,#e5e5e5 | 감독 | 90 고쿠보 히로키 |
1군 | 92 나라하라 히로시(수석코치) · 94 쿠라노 신지(수석투수코치 겸 수석코디네이터) · 71 나카타 켄이치(투수코치) 72 와카타베 켄이치(투수코치) · 78 무라카미 타카유키(타격코치) · 93 무라마츠 아리히토(타격코치) 80 혼다 유이치(내야수비·주루·작전코치) · 87 이데 타츠야(외야수비·주루·작전코치) · 84 타카야 히로아키(배터리코치) | |
2군 | 74 마츠야마 히데아키(2군 감독) · 73 오가사와라 타카시(투수수석코치) · 76 테라하라 하야토(투수코치) · 77 요시모토 료(타격코치) 88 아카시 켄지(타격코치) · 82 타카타 토모키(내야수비·주루코치) · 96 키도코로 류마(외야수비·주루코치) · 83 시미즈 마사우미(배터리코치) | |
3군 | 85 오가와 히로시(3군 감독) · 86 사쿠모토 마사히로(투수수석코치) · 97 마키타 카즈히사(투수코치) · 75 오미치 노리요시(타격코치) 91 카네코 케이스케(내야수비·주루코치) · 98 타카나미 후미카즈(외야수비·주루코치) · 95 요시츠루 켄지(배터리코치) | |
4군 | 011 사이토 카즈미(4군 감독) · 012 카와고에 히데타카(투수수석코치) · 021 오쿠무라 마사토(투수코치) · 013 모리카사 시게루(타격코치) 014 사사가와 타카시(내야수비·주루코치) · 015 카마모토 고(외야수비·주루코치) · 016 마토야마 테츠야(배터리코치) · 017 모리야마 료지(투수 재활코치) 018 나카타니 마사히로(야수 재활코치) · 019 세키가와 코이치(야수 코디네이터) · 020 호시노 쥰(투수 코디네이터) · 022 모리 히로유키(배터리 코디네이터) 023 아라카네 히사오(야수 총괄 겸 수비·주루 코디네이터) | |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선수 | ||
틀: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돌아가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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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보 히로키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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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PB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 |||||||||||||||||||||||||||||||||||||||||||||||||||||||||||||||||||||||||||||||||||||||||||||||||||||||||||||||||||||||||||||||||||||||||||||||||||||||||||||||||||||||||||||||||||||||||||||||||||||||||||||||||||||||||||||||||||||||||||||||||||||||||||||||||||||||||||||||||||||||||||||||||||||||||
1999[1] | 2011 |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bd5c24 동메달}}} |
1992 |
2015 프리미어 12 {{{#c63 동메달(감독)}}} |
2015 |
1995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2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후쿠라 준이치 (오릭스 블루웨이브) | → | 고쿠보 히로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 | 오오시마 코이치 (오릭스 블루웨이브) |
1997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2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오오시마 코이치 (오릭스 블루웨이브) | → | 고쿠보 히로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 | 훌리오 프랑코 (치바 롯데 마린즈) |
2011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1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알렉스 카브레라 (오릭스 버팔로즈) | → | 고쿠보 히로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 | 이대호 (오릭스 버팔로즈) |
1995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 ||||
츠지 하츠히코 (세이부 라이온즈) | → | 고쿠보 히로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 | 오오시마 코이치 (오릭스 블루웨이브) |
2010, 2011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 ||||
타카하시 신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 → | 고쿠보 히로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 | 이나바 아츠노리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
1995년 퍼시픽 리그 최다 홈런 |
1997년 퍼시픽 리그 최다 타점 |
이마에 토시아키 (치바 롯데 마린즈) | → | 고쿠보 히로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 | 우츠미 테츠야 (요미우리 자이언츠) |
고쿠보 히로키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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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f6b00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등번호 9번}}} | ||||||||||||||||||||||||||||||||||||||||||||||||||||||||||||||||||||||||||||||||||||||||||||||||||||||||||||||||||||||||||||||||||||||||
우치노쿠라 타카시 (1991~1993) | → | 고쿠보 히로키 (1994~2003) | → | 임시결번 | |||||||||||||||||||||||||||||||||||||||||||||||||||||||||||||||||||||||||||||||||||||||||||||||||||||||||||||||||||||||||||||||||||||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6번}}} | |||||||||||||||||||||||||||||||||||||||||||||||||||||||||||||||||||||||||||||||||||||||||||||||||||||||||||||||||||||||||||||||||||||||||
카와이 마사히로 (2000~2003) | → | 고쿠보 히로키 (2004~2006) | → | 코사카 마코토 (2007~2008) |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등번호 9번 | |||||||||||||||||||||||||||||||||||||||||||||||||||||||||||||||||||||||||||||||||||||||||||||||||||||||||||||||||||||||||||||||||||||||||
임시결번 | → | 고쿠보 히로키 (2007~2012) | → | 야나기타 유키 (2015~) | |||||||||||||||||||||||||||||||||||||||||||||||||||||||||||||||||||||||||||||||||||||||||||||||||||||||||||||||||||||||||||||||||||||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등번호 90번 | |||||||||||||||||||||||||||||||||||||||||||||||||||||||||||||||||||||||||||||||||||||||||||||||||||||||||||||||||||||||||||||||||||||||||
공번 | → | 고쿠보 히로키 (2013~2017) | → | 타구치 카즈토 (2017~2019) |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등번호 90번 | |||||||||||||||||||||||||||||||||||||||||||||||||||||||||||||||||||||||||||||||||||||||||||||||||||||||||||||||||||||||||||||||||||||||||
로베르트 수아레스 (2016~2019) | → | 고쿠보 히로키 (2021~) | → | 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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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800><colcolor=#000000>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No.90 ★ | |
고쿠보 히로키 [ruby(小久保, ruby=こくぼ)] [ruby(裕紀, ruby=ひろき)] | Hiroki Kokubo | |
출생 | 1971년 10월 8일 ([age(1971-10-08)]세) |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와카야마 현립 세이린고등학교 (와카야마)[2] 아오야마가쿠인대학 |
신체 | 182cm | 87kg | AB형 |
포지션 | 3루수, 1루수, 2루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93년 드래프트 2라운드 (다이에, 역지명[3]) |
소속팀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4~2003)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4~2006)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07~2012) |
지도자 |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3~2017)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군 수석코치 (2021)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군 감독 (2022~2023)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2024~) |
응원가 | 요미우리 시절[4][5] 소프트뱅크 시절[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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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前 야구 선수. 現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내야수.선수 시절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거포 내야수로 활약했고 두 구단에서 주장을 맡기도 했다. 다만 요미우리에서의 선수 생활은 3년뿐에 그 이전과 이후를 포함하는 대부분의 프로 선수생활은 호크스에서 지냈고 요미우리 이적에도 나름 사유가 있었기 때문에 호크스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인정받는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사단법인 일본프로야구선수회의 제10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2. 선수 생활
아오야마가쿠인대학에서 주전으로 뛰며 3학년 때인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장해 동메달을 수상했고, 4학년 때인 1993년엔 야구부를 첫 전일본 대학야구 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직후인 1993년 드래프트에서 러브콜을 받은 요미우리 자이언츠,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중 다이에를 역지명해 드래프트 2순위로 입단한다.
입단할 때부터 대타자였던 오 사다하루 감독에게 타자로써의 자질을 인정받았고, 데뷔 첫 시즌인 1994년엔 타율 .215 6홈런으로 아직 프로에 적응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지만 다음 해인 1995년부터 주전 2루수로 정착해 그 해 전시합(130시합) 출장에 리그 홈런왕(28홈런)을 수상했고[7], 1997년엔 개인 첫 3할 타율과 리그 타점왕(114타점) 수상, OPS 1위를 달성하면서 준수한 타격을 자랑하는 강타자로써 투타의 베테랑 쿠도 키미야스와 아키야마 코지, 함께 타선의 핵심을 맡은 주전 포수 죠지마 켄지 등과 함께 다이에의 중심 선수로 활약하면서 1999년 일본시리즈 우승, 2000년 퍼시픽리그 연패에 공헌하는 등 호크스의 암흑기 탈출의 일등공신으로 활약한다. 1998년엔 후술할 탈세사건으로 인한 출장정지와 부상으로 거의 드러누웠고 1996년과 1999년엔 타격 부진으로 허덕인 흑역사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다음 해 바로 성적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꾸준히 중심 타자 자리를 맡았고 2001년엔 44홈런 123타점[8], 2002년에도 32홈런을 치는 등 우수한 장타력을 뽐냈다.
그러나 2003년에 또 다시 시범경기에서 큰 부상[9]을 당하는 바람에 데뷔 후 처음으로 시즌을 완전히 날리고 말았는데, 고쿠보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콜업된 카와사키 무네노리의 도약을 비롯해 이구치 타다히토, 마츠나카 노부히코, 죠지마 켄지, 페드로 발데스의 "100타점 4인방"으로 대표되는 다이에의 일명 '다이하드 타선'은 쉴새없이 불을 뿜었고 여기에 사이토 카즈미, 스기우치 토시야, 와다 츠요시, 아라카키 나기사 등 준수한 투수진의 활약이 더해진 다이에는 코쿠보의 공백이 실감이 안 갈 정도로 연전연승을 이어가며 한신 타이거스와 7차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일본시리즈를 제패했다.
이것을 본 팬들은 물론 선수들도 "이 핵타선에 고쿠보까지 부상에서 돌아온다면 다이에 타선은 내년에도 최강이다!"라고 예상했으나, 시즌 종료 후 고쿠보는 갑작스럽게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무상 트레이드로 이적하게 되었다. 부상 치료비 지급을 둘러싼 구단과의 트러블이 결국 무상 트레이드로 이어졌는데, 부상 이전까지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선수단의 리더였던 고쿠보를 허무하게 떠나보내게 된 선수단과 팬들은 당연히 멘붕에 빠지게 되었다. 선수단은 아래의 코멘트로 항의한 것은 물론, 더 나아가 구단 오너 나카우치 타다시[10]가 후쿠오카 돔에 방문했을 때 인사를 무시하고 예정되어 있던 우승 여행을 보이콧하며 고쿠보를 방출시킨 구단을 크게 비난했다.
마츠나카 노부히코 : "구단에 '웃기지 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째서 고쿠보 씨를 그렇게 공짜로 쿄진에 넘겨버릴 수 있죠? 그렇게 팀을 위해 열심히 뛴 사람이 간단히 방출된다면, 우리들도 똑같은 꼴(고쿠보처럼 무상 트레이드)이 될 수밖에 없네요. 이 구단은 이기고 싶다는 생각조차 없나 보네요. 끝장입니다. 팬분들껜 죄송하지만 내년에 리그 연패를 하겠다는 의지가 급격히 떨어져 버렸습니다."[11]
사이토 카즈미 : "지금은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해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트레이드를 한 다이에 구단이) 부끄럽습니다. 아무리 봐도 일본 제일의 구단이 할 짓이 아닙니다. 선수를 모욕하는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시바하라 히로시[12] : "팀을 뭉치게 한 사람이 코쿠보 씨였기에 팀에 있어서도 큰 타격입니다."
죠지마 켄지 : "보통 일이 아니다."
와다 츠요시 : "시즌 때 몇 번이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내년에 (팀에) 없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오 사다하루 감독 : "팀이 붕괴되고 있다."
사이토 카즈미 : "지금은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해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트레이드를 한 다이에 구단이) 부끄럽습니다. 아무리 봐도 일본 제일의 구단이 할 짓이 아닙니다. 선수를 모욕하는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시바하라 히로시[12] : "팀을 뭉치게 한 사람이 코쿠보 씨였기에 팀에 있어서도 큰 타격입니다."
죠지마 켄지 : "보통 일이 아니다."
와다 츠요시 : "시즌 때 몇 번이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내년에 (팀에) 없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오 사다하루 감독 : "팀이 붕괴되고 있다."
이 무상 트레이드의 진실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으나, 고쿠보가 훗날 자서전에서 트레이드는 코쿠보 자신이 요청한 것이었으며 트레이드의 계기는 단순히 수술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언급하면서 진실이 밝혀졌다. 당시의 다이에 프런트는 선수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에도 화류계 여성들을 불러들이고, 심지어 경기가 끝난 다음 경기에서 활약한 선수와 화류계 여성들이 사진을 찍도록 하는 등 구단 운영이 엉망진창으로 진행되었고 여기다 선수의 성적이 아니라 선수 관련 상품의 판매실적을 연봉협상에 반영하겠다는 등 도가 넘는 짓들을 하기 시작하자 고쿠보가 구단의 행태에 지속적으로 항의하는 입장이었던 것. 이후 고쿠보가 상술한 시범경기에서의 큰 부상으로 미국에서 수술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다이에 프런트가 구단이 지정한 병원 이외의 곳에서 진료를 받으면 치료비를 줄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수술비 2,000만엔을 자비로 지불하게 했고, 이것이 고쿠보가 가진 마지막 인내심을 끊는 계기가 되어 결국 트레이드를 요청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고쿠보 자신은 딱히 요미우리 이적을 바란 것이 아니라 다이에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다는 입장이었으며 다이에와 요미우리 간에 어떤 계약이 있었는지도 본인은 알지 못한다고 언급했는데, 사실 무상 트레이드로 이적하게 된 것은 코쿠보의 대학 선배인 나카우치 타다시 오너가 현금 트레이드로 받게 될 돈을 대신 코쿠보의 연봉에 써달라며 요미우리에 요청했기 때문이었다고 하며 실제로 나카우치는 코쿠보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지 코쿠보와 함께한 트레이드 발표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요미우리에 입단한 고쿠보는 녹슬지 않은 기량을 뽐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2004년에는 구단 역사상 최초로 우타자 40홈런을 기록하며(41홈런) 컴백상을 수상했고 2006년에는 리더십을 인정받아 타팀 출신 선수로써는 최초로 요미우리의 주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다만 그 시절 요미우리는 하라 타츠노리 감독이 구단과의 불화로 갑작스럽게 사임한 뒤 후임인 호리우치 츠네오가 여러 삽질로 팀을 추락시키고, 감독으로 복귀한 하라가 그 뒷수습을 하던 때라 고쿠보의 활약이 다소 빛바랜 감은 있다.
2006년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취득했고, 오 사다하루 감독에게 다시 한 번 헹가래를 시켜드리겠다는 포부와 함께 친정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금의환향했다. 복귀 후엔 전성기만큼의 성적은 내지 못했어도 꾸준히 뛰어가며 팀의 지주로 활약했고, 2011년에는 40세의 나이로 일본시리즈 MVP를 차지하면서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령 일본시리즈 MVP가 되었다.[13]
2000안타 달성 후.
2012년 대망의 2,000안타를 달성하고 통산 2,041안타, 413홈런의 대기록과 함께 파란만장했던 현역 시절을 마감했다. 그러나 정작 은퇴경기이자 2012년 정규시즌 마지막 홈경기인 10월 8일 경기에서 상대팀인 오릭스 버팔로즈의 니시 유키에게 노히트 노런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는데, 이 날은 다름아닌 고쿠보 본인이의 생일이었고 현역 시절 처음으로 경험하는 노히트 노런이기도 했다.
워낙 전성기 때의 임팩트가 강했던 데다, 불의의 부상으로 시즌을 말아먹은 적이 여러 번이다 보니 팬들에게서 부상만 아니었으면 더 좋은 성적을 냈을 거 같은 선수로 자주 손꼽히기도 한다.
3. 지도자 생활
이듬해인 2013년부터는 NHK의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다가, 같은 해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전임 감독으로 선임되었다.[14]3.1. 2015 WBSC 프리미어 12
2015 WBSC 프리미어 12를 통해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첫 데뷔 대회를 치르게 되었다. MLB 사무국에서 메이저리거들의 출전을 불허함에 따라 강력한 자국리그를 보유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은 단숨에 우승후보 1순위로 평가받게 되었다.[15] 세간의 예상대로 고쿠보 호는 대회 최강의 전력이었다. 그들은 한국 야구 국가대표팀과의 개막전 5:0 완승을 시작으로 5전 전승으로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도 승리하며, 대회 총 6전 전승 파죽지세로 4강에 진출했다. 4강전 역시 선발투수 오타니 쇼헤이[16]의 호투에 힘업어 8회까지 3:0 리드를 가져갔지만 9회초 이른바 도쿄 대첩을 허용하며 대회 초대 우승의 영광을 안방에서 놓치게 되었다. 이후 멕시코 야구 국가대표팀과의 3,4위 결정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비판적인 여론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대회 후 그에 대한 경질설이 연일 불거지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 야구계는 이번 대회가 그가 감독으로서 치른 첫 대회라는 점과 정말 중요한 대회는 다가올 2017 WBC와 2020 도쿄 올림픽이라는 점을 이유로 그를 연임시켰다.
3.2.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운 고쿠보 히로키 감독의 임기 마지막 대회로 이번 대회의 성적에 따라 2019 WBSC 프리미어 12와 2020 도쿄 올림픽까지 그가 지휘봉을 잡을 수 있을지 결정되는 대회였다. 고쿠보 히로키 감독 개인적으로서 역시 지난 2015 WBSC 프리미어 12에서의 부진[17]의 치욕을 한번에 되갚을 수 있는 대회이기도 하였다.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은 쿠바, 호주, 중국과 1라운드 B조에 배치되었다. 고쿠보호는 아마 최강 쿠바전 11:6 대승을 시작으로 호주전 4:1 승, 중국전 7:1 승, 최종 3전 전승을 거두며 2라운드에 진출했다.2라운드 역시 네덜란드전 8:6 승, 쿠바전 8:5 승, 이스라엘전 8:3 승, 최종 3전 전승을 거두며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WBC 전 대회 4강 이상 진출에 성공했다.[18]이어진 4강전, 메이저리거 올스타들로 중무장한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을 만났지만 2:1 석패를 거두며 8년만의 세계 야구 패권 탈환은 4년 후로 미루게 되었다. 하지만 단 한명의 메이저리거[19]만을 포함한 채 전원 자국리거로 미국을 상대한 고쿠보호는 실력면에서 전혀 뒤쳐지지 않는 명경기를 선보이며 세계 야구계를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특히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가노 도모유키는 메이저리거 올스타 타선을 상대로 6이닝 비자책 호투를 펼치며 일본프로야구의 높은 수준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결국 당초 목표로 삼았던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일본인 메이저리거들의 연이은 불참[20] 속에서 WBC 4대회 연속 4강이라는 호성적, 세계 최강 미국과의 호각으로 고쿠보 히로키는 지난 대회에서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는 것에 성공하였고, 처음에는 재계약을 통해 2020 도쿄 올림픽까지 지휘봉을 잡게 하려고 했으나 본인이 오퍼를 고사하고 스스로 감독직을 그만뒀다. 후임은 야쿠르트, 니혼햄 캡틴 출신인 이나바 아츠노리.
그러나 고쿠보 감독의 WBC 성적으론 애당초 올림픽까지는 무리였다는 의견이 많은데, 애당초 WBC 4강은 일본 입장에서는 큰 성적도 아니기 때문인게 고쿠보 감독 이전 감독인 야마모토 고지 감독이 이끄는 2013 WBC 대표팀도 큰 무리 없이 4강은 갔기 때문이다.[21] 고쿠보 감독의 4강도 지난번 프리미어 12에서 일본을 쓰러뜨린 한국이 1라운드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일본 측에서 한 언플이란 것이다. 자국 리그가 탄탄한 일본 입장에서는 4강 정도는 사실 본전치기인 성적인 것이다. 그래서 실제론 일본야구협회도 언플은 했지만 협회가 원하던 성적은 프리미어 12 우승, 그리고 WBC 준우승 정도의 성적이었기에 프리미어 12 3위와 WBC 4강의 성적을 이끈 고쿠보 감독은 애초에 재계약은 무리였다는 게 평론이다.
3.3.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난뒤 2021 시즌부터 데뷔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수석코치로 돌아와 쿠도 키미야스 감독을 보좌하게 되었다. 쿠도 감독과는 요미우리 시절인 2006년 이후 15년 만의 재회.하지만 현장 복귀 이후의 평가는 매우 좋지 않다. 취임 1년 차부터 호크스 팬덤 내에서 금지어화가 진행중으로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벤치를 싸늘하게 만드는가 하면 오로지 자신의 야구 철학만을 가지고 팀 운영에 관여,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며[22] 팀을 망치는 1등공신으로 찍혔다. 오죽했으면 쿠도 감독이 타격에 대한 전권을 고쿠보에게 맡겼음에도 결과가 신통치 않아 다시 본인이 타격에 재차 관여하자마자 팀 타선이 나아지는 등 명색이 2000안타-400홈런을 기록한 대타자 출신 코치가 투수 출신 감독보다 타선 운영을 못하는 희한한 광경을 보여줬다.
스프링캠프 때부터 올드스쿨식 반복 훈련을 도입하는가 하면 선수 개개인의 성향이나 특징도 파악하지 못해 무작정 작전을 남발하다 실패하여 기껏 만든 찬스를 날리는 등 호크스 팬들의 뒷목을 수도 없이 잡게 만들었으나 차기 감독직이 유력한 1군 수석 코치라는 자리에 있는 데다 2021년 시즌 종료 후 쿠도 감독이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확정되면서 호크스 팬들은 차기 감독으로 고쿠보가 승격되는 참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며 매우 불안해했었다.
그러나 구단 수뇌부가 고쿠보의 능력 부족을 뒤늦게나마 인지한 듯 2군 감독이었던 후지모토 히로시를 1군 감독으로 승격시키고 공석이 된 2군 감독에 고쿠보를 보냈다. 그리고 후지모토는 비록 2022시즌 막판 중요한 경기를 연달아 놓치며 오릭스 버팔로즈에게 리그 우승을 내줬지만 하위권을 전전했던 지난 해와는 달리 최후반까지 우승 경쟁을 벌이는 등 팀을 상위권으로 재차 올려놓으며 감독 선임은 그럭저럭 맞았던 선택이라 평가받는 듯했다.
그러나 2023 시즌 센가 코다이의 MLB 이적이라는 악재는 있었어도 콘도 켄스케의 영입 등으로 여전히 우수한 전력을 보유했던 호크스가 후지모토의 선수기용 미스로 우승은 커녕 12연패를 찍으며 3위로 추락하고 간신히 진출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조차 광탈을 확정짓자 탈락한지 1시간도 안되어 후지모토 히로시 감독의 해임 소식과 함께 곧바로 후임 감독 취임이 발표되었다.
야마카와 호타카의 FA 영입 등으로 빵빵한 지원을 받고 출발한 2024년엔 초반부터 다른 팀들과의 승차를 크게 벌리며 압도적인 1위를 달리는 중. 수석코치 시절의 악평으로 1군 감독 후보에서 밀려나 2군 감독으로 다시 경험치를 쌓을 동안 느낀 바가 있었는지 수석코치 시절 보여준 문제점은 현재까진 잘 드러나지 않고 있고, 무엇보다 전임의 지휘능력이 워낙 개판이었다 보니 팬들은 일단 성적도 잘 나오니까 어찌됐든 전임보단 낫다고 호평 중.
결국 압도적인 타선의 힘으로 4년 만의 퍼시픽리그 우승을 일찌감치 확정짓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를 상대로 단 한 경기도 내주지 않으며 일본시리즈로 직행했다. 하지만 일본시리즈에서 CS 6차전까지 뛰고 온 요코하마를 상대로 원정에서 2연승하며 기반을 만들어 놓고선 타선이 갑자기 홈구장에서 물방망이가 되었고 결국에는 4연패를 하며 사상 최대의 하극상을 당하고 말았다.[23] 타선의 부진 탓이 크긴 했지만 고쿠보도 1,2점차 중요한 상황에서 오가타, 이와이 등 신인급 투수들을 올리며 투마카세를 시전하거나 2024년 일본 최고의 타자인 콘도 켄스케를 5번 타순에 계속 배치하는 등의 이상한 운용으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4. 기타
- 어릴 적부터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 성적이 뛰어났고 은퇴한 지금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노래도 엄청 잘 한다고 한다.
- 위에서 언급한 장점과는 별개로 옷을 엄청 못 입는 것으로도 유명해 현역 시절엔 일본 야구계를 대표하는 패션 테러리스트 소리를 듣기도 했다.
- 자신의 7년 선배이자 이전에 호크스의 거포 유망주로 주목받던 오미치 노리요시를 '세계에서 가장 배트를 짧게 잡는 사나이'라는 컨택형 타자로 방향을 바꾸는 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물론 고쿠보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고, 신인 시절의 고쿠보가 프리배팅에서 무지막지한 괴력을 뽐내는 모습을 지켜보던 오미치가 이 모습을 보고 "거포 타자로 저 녀석과 경쟁해서는 밥 먹고 살기도 힘들겠다."라는 생각에 타격 방향을 바꿀 것을 결심해 이전의 장타를 노리던 타격 스타일을 버리고 극단적으로 배트를 짧게 잡는 컨택형 타자가 된 것. 결과적으로 고쿠보는 팀의 주포로 맹활약하고, 장타 소질은 있었지만 컨택 문제로 1군에서 기회를 많이 못 받던 오미치도 장타를 버린 대신 컨택 능력이 늘어나 준주전 타자로 도약해 무시 못할 컨택을 보여주며 서로 윈윈이 되었다.
- 흑역사로 1997년 시즌오프에 프로야구 선수들[24]이 허위지출을 만들어 소득을 은폐함으로써 탈세를 꾀했던 '프로야구 탈세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형과 벌금 700만엔을 선고받고 이와는 별개의 커미셔너 징계로 제재금 400만엔, 8주간의 출장정지에 처해진 적이 있다. 이 당시 연루된 선수들 중 가장 탈세액이 많았고(2,833만엔) 여기에 탈세를 도와줄 경영 컨설턴트와 선수를 엮어주는 브로커 노릇까지 했기에 그만큼 무거운 형벌을 받았는데, 결국 이 사건으로 받은 출장정지와 어깨 부상이 쌍으로 겹치면서 1998 시즌을 거의 날렸고[25] 이듬해인 1999 시즌에도 후유증이 가시지 않으면서 부진한 성적에 그쳤다.[26]
- 주니치 드래곤즈에겐 저승사자 그 자체였는데, 요미우리 시절 가장 많은 홈런을 주니치에게 뽑아냈고[27] 2011년 일본시리즈에선 아예 역대 최고령 시리즈 MVP까지 가져갔다.
- 요미우리 시절인 2005년 5월 21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의 경기 중 4회 말 공격에서 닛폰햄의 투수 에지리 신타로에게 투런 홈런을 때려냈는데, 고쿠보의 확신에 찬 배트 플립과 그 직후 격분해 글러브를 내던진 에지리의 모습이 겹치며 인상적인 대비를 이루는 명장면으로 남았다.
5.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무 | 승률 | 정규시즌 | 포스트시즌 |
2024 | 소프트뱅크 | 143 | 91 | 49 | 3 | .650 | 우승 | 일본시리즈 패퇴 |
총계 | 143 | 91 | 49 | 3 | .650 | 리그 우승 1회 | 일본시리즈 진출 1회 |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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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조 | 고쿠보 히로키 | 존 디블 | 존 맥라렌 | 카를로스 마티 | ||||||
C조 | 짐 릴랜드 ★ | 어니 위트 | 루이스 우루에타 | 토니 페냐 | ||||||
D조 | 에드가 곤잘레스 | 마르코 마치에리 | 에드윈 로드리게스 ☆ | 오마 비즈켈 | ||||||
[1] 2003년에도 다이에가 우승을 했으나, 후술하겠지만 고쿠보는 부상으로 이해 시즌을 통째로 날린 데다가 전대미문의 무상 트레이드 사건 때문에 이 시즌 자체가 흑역사가 되는 아픔을 겪고 말았다[2] 옛날에 대원외국어고등학교 일본어과가 이 학교와 교류를 맺은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수업 중 코쿠보에 대한 이야기도 간혹 나왔다고 한다.[3] 과거 1994년부터 2007년까지 존재한 제도로 선수가 자신이 원하는 구단을 선택해 구단과 합의해서 확정적으로 입단할 수 있었던 제도였다.[4] 전주:我等の旗の下 集いし戦士よ 力の限り 大きく羽ばたけ 小久保!(우리의 깃발 아래 모인 전사여 있는 힘껏 크게 날개쳐라 고쿠보!×4)[5] 千の夢を 胸に秘めた 勝利の申し子 その叡智と その力で 我等を導け(천개의 꿈을 가슴에 간직한 승리의 신이 내린 아이 그 지혜와 그 힘으로 우리를 이끌어라)[6] 鷹のプレイグラウンドに 帰ってきたんだ 小久保戦えよ 勝利の為に(매의 플레이 그라운드에 돌아왔다 고쿠보 싸워라 승리를 위해서), 소프트뱅크 복귀 후 사용한 응원가로 다이에 시절엔 다른 응원가를 썼다.[7] 참고로 이 해에는 스즈키 이치로가 홈런왕을 뺀 모든 타이틀 시상 분야(타율, 타점, 최다안타, 출루율, 도루)에서 1위를 차지했는데, 고쿠보가 이치로의 25홈런보다 3개 많은 28홈런을 치고 장타율(타이틀 미시상)도 .548로 리그 1위를 차지하며 타격 전부문 타이틀 획득을 저지했다. 덤으로 3루타도 9개로 리그 1위를 기록하면서 1947년 오시타 히로시 이래 48년 만에 양대리그 최초로 3루타+홈런 동시 1위 기록도 차지했다.[8] 보통의 시즌이었으면 홈런왕과 타점왕을 수상하기엔 충분한 성적이었으나, 하필 이 당시가 역대 최악의 타고투저 시즌이라 불리는 '래빗볼 시대'의 시작인 데다 이 해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특유의 '이테마에(쳐부숴라) 타선'이 본격적으로 폭발한 탓에 당시 킨테츠의 중심타선을 맡고 있던 터피 로즈(홈런왕, 55홈런)와 나카무라 노리히로(타점왕, 132타점)에게 홈런, 타점왕 타이틀을 내준 것은 물론 팀도 리그 3연패를 놓치는 굴욕을 겪었다.[9] 홈플레이트 접전 도중 상대팀 포수와 충돌해 무릎 전방 십자 인대 파열 및 내측 인대와 외부 반월판 연골 손상, 경골 및 대퇴골 타박상 등 완치까지 최소 6개월이 필요한 중상을 입었다.[10] 구단주이자 다이에의 창업자였던 나카우치 이사오의 차남으로, 고쿠보와는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선후배 관계였다. 후술하겠지만 고쿠보의 무상 트레이드에도 관여했다.[11] 그런데 결국 마츠나카의 말처럼 이듬해인 2004년에 다이에는 정규시즌 1위를 차지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패해 리그 연패에 실패했고, 시즌 종료 후 호크스는 소프트뱅크에 매각된다.[12]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중반까지 주전 외야수로 활약한 선수. 이 해 주로 8번 타자 등의 하위타선으로 나왔음에도 타율 .333을 기록하는 무시 못할 공격력을 보여줬다.[13] 고쿠보 이전의 최고령 일본시리즈 MVP 기록은 2011년 소프트뱅크의 감독이자 1999년 일본시리즈에서 37세로 MVP를 수상한 아키야마 코지였다.[14] WBC, 올림픽, 프리미어12를 중점으로 준비할 것으로 예상된다.[15] 당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역시 메이저리거들을 전부 제외했다고는 하지만 마에다 겐타, 오타니 쇼헤이, 마키타 가즈히사 등의 예비 메이저리거들을 포함한 상당한 력이었다.[16] 이미 한국과의 개막전에서 6이닝 0실점 완벽투로 승리투수가 된 경험이 있었다.[17] 최종 성적은 3위로 낮다할 수 없지만 미국, 도미니카, 베네수엘라, 푸에르토리코, 네덜란드 등의 야구 강국들이 메이저리거들을 전원 제외한 채 치른 대회에서의 성적이기에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18] 2006년 우승, 2009년 우승, 2013년 4강, 2017년 4강.[19] 아오키 노리치카[20] 마에다 겐타, 다나카 마사히로, 다르빗슈 유, 타자와 준이치, 우에하라 고지 등이 대표팀 불참을 선언했다. 아오키 노리치카 만이 유일하게 메이저리거 신분으로서 국가대표팀에 합류했다.[21] 심지어 이 당시에는 메이저리거 차출에 실패해서 국내파로만 대회를 치렀었다.[22] 일례로 팀에서 가장 잘치는 타자를 4번으로 써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서 야나기타 유키를 무작정 4번으로 기용했는데 오히려 성적이 떨어지는 부작용만 초래했다. 전임 수석인 히라이시 요스케가 철저한 분석을 통해 타순 변동에 관여한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23] 양팀의 올해 승수는 91승 대 71승으로, 무려 20승 차이가 난다. 2024년 KBO로 치면 KIA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에서 롯데 자이언츠나 한화 이글스에게 패배한 수준의 승수 차이이다.[24] 코쿠보 외에도 팀 동료 후지이 마사오나 미야모토 신야, 타네다 히토시 등이 마찬가지로 탈세가 발각되어 기소 처분이나 커미셔너 징계를 받았다.[25] 17경기 타율 .225 2홈런[26] 130경기 타율 .234 24홈런 77타점. 당시 홈런과 타점은 팀 내 1위였지만 어깨 부상의 후유증이 타격에 영향을 미치면서 풀타임 4번타자로썬 썩 좋지 못한 성적을 남겼다.[27] 특히 50살 투수로 유명했던 야마모토 마사가 고쿠보에게 홈런을 많이 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