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 일본프로야구선수회 역대 회장 | |||||
{{{#!wiki style="margin: 0px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border: 0px solid; margin-bottom: -15px;" | <rowcolor=#ffffff> 초대 | 2대 | 3대 | 4대 | 5대 |
나카하타 키요시 1985~1989 | 하라 타츠노리 1989~1992 | 오카다 아키노부 1992~1995 | 쇼다 코우조 1995~1998 | 후루타 아츠야 1998~20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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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신야 2005~2008 | 아라이 타카히로 2008~2012 | 시마 모토히로 2012~2017 | 스미타니 긴지로 2017~2021 | 아이자와 츠바사 2021~ |
미야모토 신야 宮本 慎也 | Shinya Miyamoto | |
출생 | 1970년 11월 5일 ([age(1970-11-05)]세) |
오사카부 스이타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PL학원고등학교 - 도시샤대학 |
신체 | 176cm, 82kg |
포지션 | 유격수, 3루수, 2루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데뷔 | 1994년 드래프트 2위(역지명) |
소속팀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1995~2013) |
지도자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1군 타격코치[1] (2009~2013)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1군 수석코치 (2018~2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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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프랜차이즈 스타 내야수였던 선수. 통산 2133안타를 기록한 명구회 회원 중 한 명이며, 그가 현역 시절 달았던 등번호 6번은 현재 야쿠르트에서 준영구결번으로 취급되고 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일본 야구 대표팀의 주장을 맡으며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했었다.2. 데뷔 이전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어린이 야구팀에 투수로 들어가면서 야구를 시작했고, 나가시마 시게오의 팬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졸업문에 "장래의 꿈은 일본프로야구 선수가 되어 교진에 입단하는 것"이라고 적었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프로야구 선수를 지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같은 연고지의 교진을 원수로 여기는 팀으로 들어가서 그 팀의 레전드가 되었다.중학교 때부터는 내야수로 전향. 이때부터 신체가 급격히 성장하였고 전국대회 결승까지 진출했다. 이후 오사카의 명문 야구 고등학교인 PL학원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선배 다쓰나미 가즈요시 등과 함께 활약하며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7년 하계 고시엔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도시샤대학으로 진학하여, 1990년 춘계 간사이 대학리그 수위타자를 차지하고 대학 통산타율 3할 등의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졸업 당시 일본프로야구 구단들은 잇달아 하위지명(4위 미만)을 제시하였고 당시 대학 감독의 "사회인야구에서 힘을 기른 뒤 프로에 입단하는 게 좋다. 사회 경험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란 조언을 따라 프린스 호텔[2]에 입사해 그곳의 사회인 야구부에서 뛴다.
이후 1994년 드래프트에서 역지명 제도[3]를 사용하여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드래프트 1위로 입단. 프로에 데뷔한다.
3. 현역 시절
야쿠르트에 입단한 미야모토는 당시 감독이었던 노무라 카츠야[4]의 혹독한 지도를 받으면서 실력이 성장. 2년차부터 이전의 주전이었던 강타자 이케야마 타카히로를 3루수로 밀어내며 주전 유격수 자리를 차지. 3년차인 1997년엔 처음으로 규정타석을 넘기고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하며 빠르게 주전으로 도약하였고, 하위타선의 한 축을 맡아 2번의 센트럴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의 일원으로 뛰었다. 하지만 1997년 시즌 종료 후 당시 고쿠보 히로키, 타네다 히토시, 후지이 마사오 등의 일본프로야구 선수들이 대규모로 연루된 탈세사건에 휘말려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고 그와 동시에 출장정지 4주, 벌금+제제금 합계 450만엔 처분을 받는 흑역사를 낳았다(...)이후 임시 코치였던 나카니시 후토시의 지도로 타격이 대폭 성장. 2번 타자로 뛰며 테이블 세터의 한 축을 맡았다. 2000년엔 처음으로 3할 타율을 기록했다. 2001년엔 일본프로야구 사상 단일시즌 최다 기록이자 세계기록인 67희생타를 기록하며 야쿠르트의 센트럴리그 -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견실한 수비를 발휘함과 동시에 작전에 능한 2번타자로써 활약하며 5년 연속(1999~2003) 유격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2008년 베이징 올림픽[5]에서 일본 야구 대표팀의 주장을 맡고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도 뛰면서 동메달 1회를 획득하는 등 국가대표 선수로써도 활약했다.
2008년부터는 후지모토 아츠시의 FA 이적 등으로 인해 3루수로 전향했고, 3루수로써도 뛰어난 수비를 선보이며 4년 연속(2009~2012)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고, 2011년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베스트나인을 수상했다. 2009년부터는타격코치도 겸임하였으며 2012년엔 통산 2000안타를 기록해 명구회에 들어갔고, 다음 해인 2013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통산 성적은 2162시합 출장, 7557타수 2133안타, 62홈런[6] 578타점 111도루, 408희생타(통산 3위) 29희생플라이, 490사사구 909삼진 153병살타, 타율 .282/출루율 .325/장타율 .350이다.
4. 플레이 스타일
미야모토 류라고 할법한 수비테크닉의 달인으로 10회의 골든글러브[7]를 수상했다. 특히 미야모토의 수비스타일은 얕은 글러브로 타구를 막아 맞춰, 받아잡는 일본 특유의 수비스타일에 비해 깊은 패턴의 글러브를 사용하며 자연스럽게 타구를 돌려서 오른 손으로 옮겨주는 핸들링으로 특징 지을 수 있다. 통성 왼발에서 포인트를 잡는데에 비해 오른발을 포인트로 타이밍을 잡아 한발을 줄여 원스텝으로 간결한 송구를 할수 있다.링크 참조미야모토 류는 이바타 히로카즈를 통해 사카모토 하야토에게 까지 그 영향을 미쳤으며, 미즈노가 큰 성장을 하는데 보탬이 되었다. (미야모토 신야, 이바타 히로카즈, 사카모토 하야토는 같은 패턴의 미즈노글러브를 사용) 현재까지도 미즈노사의 주력 모델로 이어지고 있다.
타격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단일시즌 기록도 세운 번트 등의 작전 수행능력이었지만, 그를 제하더라도 괜찮은 컨택능력을 갖춘 타자였다. 수비형 유격수의 이미지가 강함에도 4번의 규정타석 3할 시즌을 남겼을 정도. 다만 파워는 아테네 올림픽 차출로 90경기만 출장했음에도 11홈런을 때린 2004년[8]을 빼면 단 한 번도 두 자릿수 홈런을 때린 시즌이 없을 정도로 기대할 것이 못 되었고, 적극적인 컨택 위주에 파워도 없는 타자라 출루율도 그리 높지 않았다.
한마디로 NPB판 오마 비즈켈이라고 볼 수 있다.
5. 은퇴 이후
2013년 은퇴 이후 2017년까지 닛칸 스포츠 야구평론가, NHK 야구해설가로 활동하다, 2018년부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수석코치를 맡으며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2018년 시즌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도움을 주었으나, 2019년 최하위로 추락한 것에 책임을 지고 오가와 감독과 함께 시즌 후 사임하였다. 오가와 준지의 후임 감독으로 유력하단 소리가 나왔었지만 퇴단을 발표하면서 2군 감독인 다카쓰 신고가 유력한 차기 감독 후보로 떠올랐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6. 여담
일본 야구계에서 손꼽히는 AV 매니아라고 한다. 그 마쓰이 히데키조차 혀를 내둘렀을 정도라고.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팬이라고 밝혔다. 선배의 아버지가 요미우리의 스카우트 이토 키쿠오라 "자이언츠 가라"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밝혔으며, 베스트나인을 선정하는 과정에서도 나가시마 시게오, 오 사다하루는 그분들을 감히 베스트나인에 선정할 수 없다면서 뺐다.
술을 못 하며, 도쿄에서 오래 살았지만 칸사이벤이 현재까지도 심한 편이다.
7. 관련 문서
[1] 선수 겸임[2] 세이부 라이온즈의 모기업 세이부 그룹에서 운영하던 호텔로, 당시 세이부 구단에서 대형 유망주들을 먼저 이곳에 입사시킨 뒤 드래프트에 지명하는 방식으로 입단시켜 전력을 키우는 데 사용하였으며, 이곳에서 배출한 야구선수들 중 상당수가 일본프로야구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 2000년 폐부.[3] 1993~2006년까지 존재하던 제도로, 드래프트 대상자중 대학야구, 사회인야구 선수들이 원하는 팀을 골라 입단할 수 있던 제도다. 후에 자유계약권 제도, 희망입단권 제도로 명칭을 바꿨으나 대형 유망주에 대한 뒷돈 제공 , 부정 스카우트 문제 등의 부정행위가 빈발한 부작용로 인해 결국 폐지되었다.[4] 뛰어난 수비력에 비해 빈약한 타격력을 지녔던 프로 초창기의 미야모토를 지키기만 하고 공격은 못한다는 투로 전수방위 전략의 자위대에 비유한 적이 있다.[5] 이 때 차출된 미야모토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땜빵 영입된 것이 윌슨 발데스다.[6] 2000안타 달성 시점에서 홈런, 출루율, 장타율, OPS 모두 일본프로야구 2000안타 달성자 중 최하위였으나 모두 아라키 마사히로에 의해 갱신.[7] 유격수 6회, 3루수 4회[8] NPB 역대 가장 타고투저가 심했던 시즌으로, 비거리가 잘 나오는 소위 '래빗 볼'이 널리 쓰였다 하여 래빗 볼 시대라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