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320><tablebordercolor=#000000><tablebgcolor=#000000> | 치바 롯데 마린즈 2025 시즌 코칭스태프 |
{{{#!wiki style="margin: 0 -10px;" {{{#000000,#e5e5e5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000000,#e5e5e5 | <colcolor=#cccccc,#323232> '''<1군> 21 요시이 마사토 [[감독#s-1.1| ★ ]] · 70 후쿠우라 카즈야 · 73 카나자와 타케시 80 오츠카 아키라 · 82 오노 신고 · 84 쿠로키 토모히로 · 87 네모토 슌이치 88 카네코 마코토 · 90 미츠야마 히데카즈''' | |
'''<2군> 72 미키 료 · 75 호리 코이치 · 76 에무라 나오야 · 77 구리하라 켄타 78 오토나리 켄지 · 81 이시미네 쇼타 · 83 모로즈미 켄지 · 86 사부로 [[감독#s-1.1| ★ ]]''' | ||
<재활/잔류군> 79 마츠나가 타카히로 · 85 오타니 토모히사 | ||
<트레이닝> 1군 키쿠치 다이스케 · 네모토 준페이 | ||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선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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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0000> | 치바 롯데 마린즈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191919,#ffffff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1953 | 1954 | 1955~1956 |
에바라 요시미 | 호시노 타케오 | 노무라 타케시 | 시미즈 히로카즈 | 아라마키 아츠시 | |
<rowcolor=#ffffff> 1957 | 1958~1959 | 1960~1961 | 1962 | 1963 | |
우에무라 요시노부 | 아라마키 아츠시 | 오노 쇼이치 | 사카이 카츠지 | 오노 쇼이치 | |
<rowcolor=#ffffff> 1964 | 1965 | 1966 | 1967 | 1968~1969 | |
호리모토 리츠오 | 코야마 마사아키 | 츠마시마 요시로 | 코야마 마사아키 | 사카이 카츠지 | |
<rowcolor=#ffffff> 1970~1971 | 1972 | 1973 | 1974 | 1975~1982 | |
키타루 마사아키 | 나리타 후미오 | 키타루 마사아키 | 나리타 후미오 | 무라타 쵸지 | |
<rowcolor=#ffffff> 1983~1984 | 1985 | 1986~1990 | 1991~1994 | 1995 | |
미즈타니 노리히로 | 후카자와 요시오 | 무라타 쵸지 | 코미야마 사토루 | 이라부 히데키 | |
<rowcolor=#ffffff> 1996 | 1997~1998 | 1999~2001 | 2002~2003 | 2004~2005 | |
소노카와 카즈미 | 코미야마 사토루 | 쿠로키 토모히로 | 네이선 민치 | 시미즈 나오유키 | |
<rowcolor=#ffffff> 2006 | 2007 | 2008 | 2009 | 2010~2014 | |
쿠보 야스토모 | 시미즈 나오유키 | 코바야시 히로유키 | 시미즈 나오유키 | 나루세 요시히사 | |
<rowcolor=#ffffff> 2015~2018 | 2019~2020 | 2021 | 2022 | 2023~2024 | |
와쿠이 히데아키 | 이시카와 아유무 | 후타키 코타 | 이시카와 아유무 | 오지마 카즈야 |
<colbgcolor=#191919><colcolor=#ffffff> 치바 롯데 마린즈 No.84 | |
쿠로키 토모히로 黒木知宏 | Tomohiro Kuroki | |
출생 | 1973년 12월 13일 ([age(1973-12-13)]세) |
미야자키현 휴가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노베오카가쿠엔고등학교 |
신체 | 178cm / 84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4년 대학생ㆍ사회인 드래프트 2순위(역지명)[1] |
소속팀 | 치바 롯데 마린즈 (1995~2007) |
지도자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군 투수코치(2013~2017) 치바 롯데 마린즈 1군 투수코치(2023~) |
해설위원 | 닛폰 방송 야구 해설위원(2008~2012) NHK BS1, 닛폰 테레비, J SPORTS 야구 해설위원 (2018~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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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치바 롯데 마린즈 소속 투수이자 現 치바 롯데 마린즈 투수코치.코미야마 사토루와 함께 90년대 치바 롯데의 암흑기를 지탱했으며 투혼의 에이스[2], 죠니, 죠니 쿠로키라는 별명도 가졌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초등학교 시절 소프트볼팀의 에이스로 활약을 하였다. 이후 중학교로 진학하고 나선 보디빌딩에 열중하였으며 파워 리프팅 현 대회에 나가서 우승한 경력도 있었다.노베오카 가쿠엔 고등학교로 진학한 후 3학년 때 처음으로 여름 코시엔 대회에 출전했지만, 첫 출전 경기인 2차전에서 이데모토 켄이치로[3]가 에이스로 활약하던 미에현의 욧카이치 공업 고등학교에게 8:4로 패배하며 바로 짐을 싸야 했다. 이때 함께 배터리를 짰던 후배 포수 쿠로키 준지[4]와 훗날 롯데에서 같이 뛰게 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인야구로 진로를 잡고 아이치현 카스가이시의 신오지제지 카스가이 경식야구부(現 오지 경식야구부)에서 투수로 뛰었고, 1994년 도시대항야구대회에서 혼다기연 스즈카 경식야구부의 보강선수[5]로 뽑혀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직후 열린 신인 드래프트에서 치바 롯데 마린즈를 역지명하여 드래프트 2순위로 입단하였다.
2.2. 치바 롯데 마린즈 시절
2.2.1. 데뷔 초창기
입단 1년차인 1995년에는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활약했으며. 데뷔 첫 승을 완봉승으로 장식하며 20경기에 등판해 5승 7패를 기록하였다.
2년차인 1996년에는 개막 엔트리에 합류하지 못했으나, 팀 선발 로테이션이 일찌감찌 무너지면서 1군에 합류하게 되었다. 하지만 선발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불펜으로 전환되었다.
1997년엔 처음으로 개막 로테이션에 합류하여 팀 최다승인 12승과 평균자책점 2.99를 기록했고, 리그 최다인 13완투를 기록하며 선배 코미야마 사토루[6]와 함께 더블 에이스로 활약하였다. 다만 팀 전력이 워낙 나빴던 탓에 리그 최다인 15패도 기록했고 팀도 최하위로 추락했다.
2.2.2. 1998년
1998년엔 팀이 간만에 개막부터 좋은 모습을 보이며 4월을 마친 시점에서 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쿠로키 자신도 4월은 패전 기록 없이 3연승을 기록하며 출발이 좋았다. 그러나 마무리였던 카와모토 야스유키[7]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팀 성적이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이에 코칭스태프들은 지금까지 팀 최다승인 6승을 올리며 좋은 활약을 펼친 쿠로키를 마무리로 전환해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으나 쿠로키가 블론세이브를 연달아 터뜨리며 마무리 적응에 실패했고 결국 카와모토를 대신할 마무리를 세우지 못한 롯데는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지며 당시프로야구 최다 연패 기록인 16연패와 타이 기록을 세우고야 말았다.이후 2군에서 선발 복귀를 위해 재조정을 하고 돌아온 쿠로키는 팀의 연패 신기록 경신 혹은 연패 정지가 걸린 7월 7일 오릭스 블루웨이브 원정경기(그린 스타디움 코베)에서 선발 등판해 9회말 2아웃까지 자신의 폭투로 인한 4회 말 1실점을 제외하곤 점수를 내주지 않으며 오릭스 타선을 틀어막았고, 타선 역시 후쿠우라 카즈야, 훌리오 프랑코 등이 적시타를 뽑아내며 쿠로키를 도왔다.
이 패전은 훗날 칠석의 비극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후일담으로 나중에 코미야마 사토루가 쿠로키에게 "왜 마운드에 주저앉았어?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잖니. 거기서 마운드에 주저앉거나 마운드를 내려오면 안돼. 마지막까지,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포기하면 안돼. 쿠로(쿠로키의 애칭)."라고 타일렀는데, 이후 쿠로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코미야마의 질책에 대해 "그 날부터 사람들은 나를 '비극의 에이스'라고 부르게 되었지만, 일본에서 단 한 사람, 코미야마 씨만이 나의 무른 모습을 간파해 주셨다."고 적으며 그의 가르침에 감사했다.
이후 팀이 18연패를 탈출한 후엔 폼을 회복하며 감독 추천으로 올스타전에 처음으로 출장했고, 팀은 18연패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2년 연속 최하위로 주저앉았으나 쿠로키 자신은 리그 최다승(13승)과 최고승률(.591[9]) 타이틀을 수상했다.
2.2.3. 1999 시즌~2000 시즌
1999시즌도 올스타에 선출되었으며 리그에서도 개인 최다인 14승을 올리는 등 오랫동안 코미야마 사토루와 함께 팀의 암흑기를 지탱하였다.2000년에 코미야마 사토루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하면서 진정한 에이스로 기대를 하였지만. 이후 스프링캠프에서 오른쪽 허벅지에 부상을 입고말았다. 쿠로키는 개막전 등판을 위해 무리해서 재활을했지만, 개막전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에서 아키야마 코지에게 1회 선두타자 홈런을 맞으며 개막전부터 질질 끌려가버렸다. 전반기에 평균자책점 10점대를 기록하며 부진의 늪에 빠지게된다. 이후 전년도에 선발된 시드니 올림픽야구 대표팀 출전을 위해 2군으로 내려가게되었다. 올림픽에서 활약이후. 복귀한 후반기에서는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오른쪽 어깨의 위화감을 가진 채로 등판이 계속되고 있었다.
9월 13일에는 통산 1000이닝을 달성하였다.
2.2.4. 2001 시즌
2001년 3월 24일 세이부 돔에서 열린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개막전에서 등판하여 당시 헤이세이의 괴물이라고 불리던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승부하여 이기며 21세기 초 일본프로야구 공식전 승리 투수가 되었다. 이후 절정의 폼으로 올스타전 전까지 11승을 올리며 리그1위에 올랐지만. 작년부터 계속되던 오른쪽 어깨의 위화감을 치료없이 질질 끌고온 상태였으며 올스타전과 그다음으로 출전한 오릭스전에 강행으로 출전한 후, 후반기부터는 부상으로 1군에서 사라져버렸다.이 부상 때문에 도시락의 저주를 받은 선수 중 한 명으로 여겨지고 있다.
2.2.5. 공백의 3년과 2004시즌
오른쪽 어깨의 위화감에 관해서, 당초에는 가시상근 염증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부상으로 진단 받았지만. 어깨 안쪽 인대가 몇개나 완전 손상시키는 중상이었던 것이 나중에 판명되었다, 수술을 선택하지 않고 자연 치유를 선택해 단조로운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달리기를 반복하는 나날이 계속되었고, 또한 투구 폼도 어깨에 부담이 되지않는 사이드암 스로에 가까운 폼으로 바꾸는 등 2004년 1군으로 승격할때까지 3년이라는 긴 세월을 재활에 매진하게되었다.이후 2004년 6월에 3년만에 1군으로 승격하여 3년만에 승을 올렸다,
시즌종료 후 연봉협상에서 스스로 구단 제시액보다 1000만만 엔[10]을 감소하며 계약을 갱신했다.
2.2.6. 2005 시즌~2007 시즌
2005년에는 오른쪽 팔꿈치에 부상을 입으며 전반기에는 재활을 하였다.8월 28일에 치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열린 오릭스 버팔로즈전에서 선발로 등판하여 3만명의 마린즈 팬 앞에서 복귀 후 1545일 만에 홈구장 승을 올렸다.
2005년에는 롯데의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진출과, 1995년 이후 10년 만의 A클래스를 확정하였고. 이후 팀은 일본시리즈 우승을 하였다 하지만 쿠로키는 일본시리즈에서 등판할 기회는 없었지만 2005년 시즌 종료 후 열린 아시아 시리즈 3차전 3회에 등판해 1이닝을 무실점을 기록하면서 초대 아시아 시리즈 우승에 공헌하였다.
2006년 7월 28일 2군으로 말소 후 1개월 반 만에 1군에 등록되어 오릭스 버팔로즈전에서 프로 12년만에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전성기때 1억 8000만 엔이었던 연봉이 2007년에는 10분의 1이하로 떨어졌다.
2007년에는 2001년 이후 개막엔트리에 포함되었다.
4월 27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전 7회말 2아웃 주자 1루 상황에서 등판하여 G.G.사토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이후 4월 30일 2군으로 말소되고 나서 다시는 1군에 등록되는 것을 볼수없었다...
2.2.7. 은퇴
2007년 10월 2일에 구단으로 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았지만 쿠로키는 현역연장 의지가 있었기에 다른 구단의 오퍼를 기다렸다. 하지만 오퍼는 오지않았고. 결국 12월 12일 기자회견을 열어 은퇴를 발표했다. 기자회견에서 쿠로키는 자신이 등판했던 칠석의 비극을 통해 18연패를 잊을수 없는 추억이 되었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야구의 훌륭함과 무서움을 전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3. 코치 경력
2013년부터 2017년까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1군 투수코치를 맡았으며, 2023년 시즌부터 선수시절 소속팀인 치바 롯데 마린즈의 1군 투수코치를 맡고 있다.4. 기타
- 별명인 죠니 는 사회인 시절 미팅에서 졸았다는 벌로 머리를 짧게 깎았는데 야마모토 죠지[11]를 닮았다고 죠지 라고 불렸지만 후배가 '죠지가 아니라, 조니로 합시다' 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에 유래라고한다. 그 후 프로 첫승 인터뷰에서 쿠로키가 '54번은 죠니이니 잘부탁드림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죠니의 애칭이 정착되었다.
- 낚시가 취미이다.
- 학창시절에는 야구보다 보디 빌딩에 빠졌으며 파워리프팅 대회에서 우승한 적도 있다.
- 와타모테의 주인공인 쿠로키 토모코를 비롯한 쿠로키 가족의 성씨는 이 야구선수에서 따왔다.[12]
- 딸이 둘 있는데 큰딸은 현재 치바 롯데 마린즈의 치어리더 팀인 M☆Splash!!의 멤버인 MEI라고 한다. #
[1] 1993년부터 2006년까지 대학/사회인 선수 한정으로 한 구단 당 2명까지 드래프트를 거치지 않고 입단을 확정지을 수 있는 대신 구단은 영입한 선수들의 수에 따라 드래프트 상위순위 지명권을 반납하는(단, 2000년까진 지명권 반납 제도가 없었다) 제도였다.[2] 치바 롯데가 일본프로야구 연패 기록을 경신한 1998년 칠석의 비극 경기에서 혼신의 역투를 펼치고도 하비 풀리엄에게 동점 홈런을 맞고 마운드에 주저앉은 모습은 롯데 올드팬들의 기억에 현재까지 생생한 이미지로 남아있다.[3] 1992년 주니치 드래곤즈에 드래프트 5순위로 입단했으나 별다른 활약없이 2000년에 세이부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어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4] 코시엔 대회 직후에 투수로 전향해 사회인야구를 거쳐 1996년 닛폰햄 파이터즈에 드래프트 4순위로 입단해 중간 계투로 활약했으나 2001년부터 등판기회가 감소하며 2002년에 쿠로키가 있는 롯데로 트레이드되었으나 여기서도 별다른 활약은 하지 못한 채 2003년에 은퇴하여 현재는 구단 스카우터로 일하고 있다.(2011년 한정으로 2군 투수코치 보좌 역임) 여담으로 데뷔 당시 스즈키 이치로를 삼진으로 잡아내고, 이치로의 팬을 자신의 팬으로 만들고 싶다라는 대담한 발언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5] 도시대항야구대회 기간 동안 예선 탈락팀의 선수 몇 명을 뽑아 대회에서 쓸 수 있는 제도.[6] 같은 해 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2.49)을 수상했다.[7] 1992년 막 연고이전을 한 치바 롯데에 드래프트 2순위로 입단해 1997년까지 마무리 투수를 맡아 1997년에 리그 최다인 25세이브를 기록(다만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은 당시 시상 기준인 세이브 포인트 2개 차이로 킨테츠 버팔로즈의 아카호리 모토유키에게 내줘야 했다.)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으나 1998년 어깨 부상으로 마무리 자리를 내준 뒤 2000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 이후엔 요미우리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3구단에서 중간계투로 뛰다가 2007년에 은퇴하였다.[8] 여기에 탈수 증상과 피로로 인해 쿠로키는 마운드에서 내려온 뒤 경련을 일으켰다고 한다.[9] 역대 최고승률 기록자 중 승률이 가장 낮다.[10] 약 1억[11] 일본의 가수[12] 쿠로키 토모코외에도 와타모테에 등장한 모든 등장인물들이 치바 롯데 마린즈 출신 선수들에게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