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3595><tablebgcolor=#003595> | 주니치 드래곤즈 2025 시즌 코칭스태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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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 | 76 오츠카 아키노리 (투수코치) · 83 야마이 다이스케 (투수코치) — 마츠나카 노부히코 (타격코치) · 80 오다 코헤이 (포수코치) 71 도노우에 나오미치 (내야수비·주루코치) · 79 오니시 다카유키 (외야수비·주루코치) | |
2군 | 오치아이 에이지 (2군감독) · 82 아사오 타쿠야 (투수코치) 78 모리노 마사히코 (타격코치) · 84 후쿠다 노부마사 (타격코치) · 72 오노 쇼타 (포수코치) 81 모리코시 유토 (내야수비·주루코치) · 87 나카무라 유타카 (외야수비·주루코치) · 85 와타나베 히로유키 (육성코치) | |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외야수 | 육성선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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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츠카 아키노리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c7bc69 우승 반지}}} |
2006 |
1998년 퍼시픽리그 최우수 구원투수[1] | ||||
1997년 아카호리 모토유키 (킨테츠) 33SP | → | 오츠카 아키노리 (킨테츠 버팔로즈) 38SP | → | 1999년 브라이언 워렌 (롯데) 31SP |
{{{#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74번}}} | ||||
요시무라 카즈히토 (2014) | → | 오츠카 아키노리 (2015~2017) | → | 아와노 히데유키 (2019~2021) |
{{{#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76번}}} | ||||
와타나베 히로유키 (2020~2021) | → | 오츠카 아키노리 (2022~) | → | 현역 |
<colbgcolor=#003595><colcolor=#ffffff> 주니치 드래곤즈 No.76 | |
오츠카 아키노리 大塚晶文[2] | Otsuka Akinori | |
출생 | 1972년 1월 13일 ([age(1972-01-13)]세) |
치바현 치바시 하나미가와구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요코시바케이아이고등학교 - 토카이대학 |
사회인야구 | 닛폰통운 (1994~1996)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6년 드래프트 2순위 (킨테츠) |
소속팀 |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1997~2002) 주니치 드래곤즈 (2003)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4~2005) 텍사스 레인저스 (2006~2007) 시나노 그란세로즈 (2013~2014[A]) |
지도자 | 시나노 그란세로즈 감독 (2014[A]) 주니치 드래곤즈 2군 투수코치 (2015~2017) 엘패소 치와와스 불펜 순회코치 (2017~2021) 주니치 드래곤즈 1군 투수코치 (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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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역 시절 |
2. 선수 생활
2.1. 일본프로야구 시절
대학 졸업 후 사회인야구팀 닛폰통운 경식야구부를 거쳐 1996년 드래프트에서 킨테츠 버팔로즈에 2순위로 지명받아 입단했다. 데뷔 시즌인 1997년에는 셋업맨으로 나서며 82.2이닝동안 127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는 등 4승 5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2.07의 성적을 기록했고, 이듬해인 1998년에는 기존의 마무리 투수였던 아카호리 모토유키가 부상으로 이탈하게 되자 아카호리를 대신할 새로운 마무리 투수가 되어 리그 최다의 38SP(35세이브(1위)+3구원승)를 기록하고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을 수상했다. 1999년에는 부상으로 마무리 투수 자리에서 이탈한 채 25경기 등판에 그쳤고 이후 다소 부침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2000년부터 2002년까지 3년 연속 20세이브 이상을 기록하는 등 킨테츠의 부동의 마무리로 활약한다. 2002년 시즌이 끝난 뒤 오츠카는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시도했으나 입찰을 원하는 구단이 없던 탓에 무산되었고, 이후 자신을 자유계약으로 풀어줄 것을 요청해 2003년 시즌 개막 직전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게 된다.주니치에서도 17세이브를 올리며[5] 주축 불펜으로 활약한 오츠카는 2003년 시즌이 끝난 뒤 다시 메이저리그 진출을 시도했고, 30만 달러에 낙찰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3년 계약을 맺는다. 주니치의 후임 마무리는 후일 일본프로야구 통산 세이브 1위 기록을 세우게 되는 이와세 히토키. 주니치에 있을 땐 훗날 LG 트윈스에서 뛰게 되는 후배 오카모토 신야에게 투구의 기술을 알려주기도 했다고 한다.
2.2.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절
샌디에이고에서 처음 받은 보직은 추격조였지만 이후 호투를 거듭하며 셋업으로 승격, 마무리 트레버 호프만의 뒤를 든든히 받쳤다. 2004시즌 성적은 7승 2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1.75로, 내셔널리그 신인왕 투표 3위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2005년에는 홈-어웨이 성적이 다소 극단적으로 벌어지면서 전년보다 떨어진 성적인 2승 8패 평균자책점 3.59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시즌 후, 샌디에이고는 텍사스 레인저스에게 오츠카와 선발투수 애덤 이튼을 내주고 아드리안 곤잘레스, 크리스 영을 받아오는 트레이드를 단행한다.[6]2006년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로 선발된 오츠카는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고 정규시즌에 들어와서도 안정적인 투구를 보였다. 그리고 개막 이후 한달동안 블론세이브만 5개를 적립하는 등 무시무시한 불쇼를 선보인
2.3. 재활, 그리고 은퇴
텍사스에서 방출된 후 2008년 초에 토미 존 수술을 받은 데 이어 2010년에 팔꿈치 수술을 받고 재활에 몰두했으나 끝내 마운드에 돌아오진 못했다. 2011년엔 펫코 파크에서 시구식 및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기부 사인회를 개최하거나 같은 해 미국 유학 중이거나 아마추어, 독립리그에서 활약하는 일본인 선수들로 구성된 미국 대학야구 서머리그 팀인 사무라이 ALL JAPANS에서 선수 겸 투수코치(상술했듯 등판은 하지 못했다.)로 뛰기도 했다.2013년에 독립리그 팀인 시나노 그랜시로즈에 입단했지만 경기에 나서지는 못했고, 이듬해인 2014년에는 시나노의 감독 겸 선수로 취임, 그 해 9월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3. 지도자 시절
2015 시즌부터 주니치 드래곤즈의 2군 투수코치를 맡게 되었다. 2017년까지 2군 코치직을 수행했고 그 와중에 2016년 U-23 야구월드컵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투수코치를 맡기도 했다.2017년부터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산하 AAA 마이너리그 팀인 엘 파소 치와와스의 불펜 순회코치를 맡는다. 2020년부터는 스카우트 업무도 맡는다는 근황이 아들을 다룬 기사에서 알려졌다.
2022년에 주니치로 복귀한다. 보직은 1군 투수코치.
4. 기타
- 트레버 호프먼과는 고아원 등에 함께 봉사활동을 하러 다닐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고 하며, 텍사스로 이적한 후에는 호프먼에게 허락을 받고 AC/DC의 'Hell's Bells'를 등장 음악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 존경하는 선수는 노모 히데오. 이 때문에 긴테쓰에 입단했을 당시 노모가 남기고 간 등번호인 11번을 자신의 등번호로 선택하기도 했다.
- 메이저리그에 진출 초반에 이중 키킹 투구동작으로 인해 숱하게 보크를 받았었다. 결국 세트 포지션 자세로 투구하는 것으로 바꿨고, 보크를 범하는 횟수도 크게 줄어들었다.
- 아들 오츠카 토라노스케도 야구를 하고 있으며, 2020년 현재 샌디에이고 대학교에서 뛰고 있다. 프로필 일본 스포츠잡지 Number의 기사
5. 관련 문서
[1] 당시 시상기준은 세이브 포인트[2] 2003년 6월 18일부터 2007년까지는 등록명 표기를 大塚晶則로 바꿨었다.[A] 2014년에는 선수 겸 감독 겸임. 다만 소속 기간 동안 부상으로 등판한 적이 없어서 실질적으로 2014년에는 감독 전임과 같았다.[A] [5] 처음에는 셋업맨으로 뛰다가 선동열 이후 주니치의 마무리를 맡아오던 미국인 투수 에디 갈리아드가 맨손으로 타구를 잡다 부상을 당해 2군으로 내려간 뒤부터 마무리로 기용되었다.[6] 오츠카가 밥값을 해주긴 했지만 정작 메인으로 생각했던 선수인 애덤 이튼이 부상으로 망해버리면서, 결과적으로 이 트레이드는 텍사스와 존 대니얼스 단장에게 씁쓸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