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3595><tablebgcolor=#003595> | 주니치 드래곤즈 2025 시즌 코칭스태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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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군 | 오치아이 에이지 (2군감독) · 82 아사오 타쿠야 (투수코치) 78 모리노 마사히코 (타격코치) · 84 후쿠다 노부마사 (타격코치) · 72 오노 쇼타 (포수코치) 81 모리코시 유토 (내야수비·주루코치) · 87 나카무라 유타카 (외야수비·주루코치) · 85 와타나베 히로유키 (육성코치) | |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외야수 | 육성선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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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오 타쿠야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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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 ||||||||||||||||||||||||||||||||||||||||||||||||||||||||||||||||||||||||||||||||||||||||||||||||||||||||||||||||||||||||||||||||||||||||||||||||||||||||||||||
와다 가즈히로 (주니치 드래곤즈) | → | 아사오 타쿠야 (주니치 드래곤즈) | → | 아베 신노스케 (요미우리 자이언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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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2020) | → | 아사오 타쿠야 (2022~) | → | 현역 |
주니치 드래곤즈 No.82 | |
<colbgcolor=#003570> 아사오 타쿠야 浅尾拓也 | Asao Takuya | |
생년월일 | 1984년 10월 22일 ([age(1984-10-22)]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아이치현 치타시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학력 | 일본복지대학 |
프로입단 | 2006년 대학생·사회인 드래프트 3순위 |
소속팀 | 주니치 드래곤즈 (2007~2018) |
지도자 | 주니치 드래곤즈 2군 투수코치 (20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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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역 시절 |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주니치 드래곤즈의 2군 투수코치.
주니치 드래곤즈의 핵심 중간계투 요원이였다. 아울러 NPB 태동 후 마무리도 아닌 전문 중간계투요원으로서는 사상 첫 MVP를 차지한 인물이기도 하다.[1] 또한 현대야구에서 매우 보기 드문 팜볼을 구사했던 선수이기도 하다.
2. 선수시절
2.1. 아마야구 시절
야구를 늦게 시작했다. 더군다나 중학교 때부터 시작한 야구는 경식야구도 아닌 연식야구로서 포수로 출발해서 경식야구로 전환한 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전문포수로서 야구를 했었는데 당시 그의 고교팀에 투수가 부족해지는 상황이 벌어지자 야수중 어깨가 가장 좋았던 아사오에게 투수로서의 임무가 떨어짐으로서 그김에 투수로 전향하게 된다. 그때문인진 모르지만 고교졸업때는 프로팀에서 아사오가 누군지도 모를 정도였고 고교시절 투수로서도 인상적인 성적을 남기진 못했다. 2012년 기준으로도 상당히 마른 체구인데 고교 시절엔 뼈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던 아사오에게 관심을 가질 구단은 없었다.고교 졸업 이후 일본복지대학[2]에 입학해 선수생활을 이어나갔고, 대학 1학년 시절만 해도 이악물고 던져도 구속이 138km/h이상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으나 2학년때 대학에 재학하는 동안 공항청소 아르바이트와 투수에게 필수로 요구되는 하반신과 코어 운동 등의 혹독한 훈련들을 거듭한 끝에 3학년 때 140km/h가 넘더니 4학년때 152km/h를 던지게 된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일본복지대학에서 에이스로 활약하며 일본복지대학을 1부리그까지 끌어올리는 어마어마한 업적을 남겼고 대학리그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등 자신의 잠재력을 과시하면서 프로스카우터들의 눈길을 끌었다.
2.2. 주니치 시절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뒤 복지대학 재학 중부터 그를 눈여겨 봐왔던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의리를 지키며 대학생 & 사회인 드래프트 3순위로 주니치의 입단하며 프로선수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대학 졸업하고도 3순위[3] 지명을 받은 터라 그냥저냥 로또로 평가되어서 몆 년은 2군에서 기량을 닦아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그런데 데뷔 그해에 의외로 스프링캠프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던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을 비롯한 코치들도 이 삐쩍마르고 여성스럽게 생긴 투수가 굉장히 힘있는 공을 던지면서 가능성을 보이자 프로 데뷔 첫 해에 중간요원으로 배치를 했고 간간히 선발로도 던지며 낮은 순위의 대학신인으로썬 제법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두 번째 시즌부터 그는 구속이 156km/h를 넘나들게 되고 위력적인 고속포크볼까지 장착하게 되며 핵심계투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2009년 시즌에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었는지 전년도에 1점대였던 방어율이 3점대 중반으로 치솟아서 정체를 겪기도 했다. 물론 2009시즌에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많은 이닝(113⅓이닝)을 소화했고 선발까지 오가며 던진지라 지쳤던 탓도 있었다.
2010년부터 아사오는 선발로 등판하는 일이 일절 없이 철저하게 당시 주니치의 마무리 투수 이와세 히토키 바로 이전에 등판하는 전문 계투요원으로 포지션이 고정되었고 이때부터 일본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그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2010년 ~ 2011년 불펜투수로만 등판하며 거의 매경기 출첵을 하다시피하며 닥치는대로 던졌고, 잘생기고 이쁘장한 외모와 그에 걸맞지 않는 무시무시한 패스트볼과 고속 포크볼 & 팜볼 & 슬라이더까지 구사하면서 수많은 타자들을 덕아웃 돌려보내 버렸다.
그리고 2011년, 아사오는 79경기 87.2이닝 7승 2패 ERA 0.41 45홀드 52홀드포인트 100K WHIP 0.82 피홈런 0개라는 정신나간 기록으로 중간계투 최초의 MVP와 골드글러브를 수상하며 일본프로야구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4] 특히 45홀드라는 엄청난 기록을 썼지만 전시즌이었던 2010년도에 아사오 본인이 47홀드를 기록해버린 탓에 역대급 시즌을 보냈음에도 NPB 역대 홀드 2위에 그치는 웃픈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성적으로 당연히 클로저로 나설 만 했지만 다카쓰 신고의 NPB 세이브 기록 갱신에 도전하고 있는 이와세 히토키 때문에 마무리 투수로 나서지 못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다만 이 시즌의 이와세도 37세이브 ERA 1.48로 충분히 훌륭한 성적을 거뒀으며, NPB 세이브 기록 갱신에도 성공했다.
2012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 못했지만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시즌 성적은 29경기 30이닝 1승 1세이브 15홀드 16홀드포인트(구원승+홀드) 29삼진 9볼넷 0사구(死球) 0피홈런, 방어율 1.50
2013년에는 지난 몇년동안 거의 매경기 등판해서 선발투수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많은 공을 던진 탓에 어깨에 과부화가 생겨 시즌이 시작되기 전부터 어깨부상에 시달리면서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팀 승선에서도 실패했으며, 이후 재활을 거듭하면서 전반기를 통째로 날려먹었다. 7월 12일 복귀전을 치렀고, 3달동안 34경기 등판 30⅔이닝 2승 3패 1세이브 22홀드 24홀드포인트 19삼진 14볼넷 1사구 2피홈런, 방어율 1.47의 성적을 거뒀다. 스탯은 잘 쌓았지만 BB/9 5.57,WHIP 1.30을 기록하며 볼넷 부분에서는 커리어 로우 성적을 기록했다. 팀 주니치도 센트럴리그 3위 히로시마와 무려 5게임차로 센트럴리그 4위에 머무르며 같이 침몰했다.
2014년에는 아래 성적을 보면 알겠지만, 완전 망했다. 방어율은 6.16로 본인 시즌 최악이었고 팀도 망했다.
2015년에는 그냥저냥 넘어가다가 감독님 선수 은퇴 시합[5]에서 사요나라 홈런을 맞았다.
2016년은 어깨 부상 탓에 프로 입단 이후 처음으로 등판 제로를 기록하고, 시즌 후 연봉삭감을 감안하며 주니치와 재계약을 맺었다.
2017년은 554일만인 4월 2일에 1군 등판. 10월 1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경기에서 홀드를 기록하며 일본프로야구 사상 3번째, 센트럴리그 사상 2번째로 통산 200 홀드를 달성했다.
2018년은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고 시즌 중반 1군에 올라와 9경기를 던졌으나 신통치 않은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9월 26일 은퇴를 선언하며 34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그라운드와 작별인사를 하게 되었다. 2009[6]~2011 시즌 동안 219경기 280이닝을 던진것이 어깨 부상으로 돌아와 몇 년간 끊임없이 괴롭혔던 것이 결국 선수생활을 단축시킨 주 원인이 되었다.
선수생활 마지막 경기에서는 주니치의 전성기처럼 셋업맨 아사오의 뒤에 이와세 히토키가 후속해서 등판하는 것으로 자신의 프로생활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했고 이 과정에서 아사오 본인을 포함해 수많은 야구팬들이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3. 지도자 시절
2019년부터는 주니치의 2군 코치를 맡게 되었다. 센트럴리그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주니치의 투수진과 매년 2군에서 쏟아져 나오는 주니치 신예 투수들을 볼 때 코칭 능력이 좋다고 인정받고 있다. 다만 주니치가 타격이 역대급으로 망하는 암흑기를 겪고 있어서 팀은 반등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4. 기타
- 선수로서 인품이나 평판은 아주 좋아서 팬들의 사인요구를 단 한번도 거절하지 않았다고 한다.[7] 팀선배들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할 정도였다. 워낙 동안에다 잘생기다 못해 예쁘기까지 한 얼굴 덕에 이런저런 별명이 많이 붙었는데 사람 좋은 아사오지만 귀엽다는 소리는 그래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력에서 볼 수 있듯 구속 상승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노력가이기도 하다.
- 상술했듯이 강력한 구위에 어울리지 않는 미려한 외모의 소유자였고, 미남이라기보단 미인에 더 가까운, 남성호르몬이 많을 수밖에 없는 운동선수로서는 매우 특이한 케이스였다. 그러나 과거완 달리 역시 나이는 속일수 없는지 서서히 이마가 넒어지고 있다.
- 팜볼을 구사한 선수 자체가 MLB-NPB-KBO를 통틀어서 몇 안되지만, 그의 은퇴 후 명맥이 끊길 뻔 했던 팜볼이 2022년부터 카프의 토코다 히로키가 구사하면서 이어지고 있다.
- 수비가 굉장히 뛰어났다. 입단때 자신의 세일즈 포인트로 '견제와 수비'를 뽑았고. 한신과의 경기 상대 선수 번트를 자신이 잡아서 더블 플레이를 하자 오치아이가 '이 번트 수비는 아사오 밖에 할수없다'라고 말하며 칭찬했다.2011년 투수부분 골든글러브를 수상 했다.
5. 연도별 주요성적
역대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 | 경기 | 이닝 | 승 | 패 | 홀 | 세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사사구 | 탈삼진 | WHIP |
<colbgcolor=#dcdcdc,#222222>2007 | 中日 | 19 | 51 | 4 | 1 | 1 | 0 | .800 | 3.53 | 51 | 5 | 20 | 40 | 1.29 |
2008 | 44 | 50⅓ | 3 | 1 | 12 | 1 | .750 | 1.79 | 43 | 0 | 12 | 35 | 1.03 | |
2009 | 67 | 113⅓ | 7 | 9 | 33 | 6 | .438 | 3.49 | 108 | 6 | 30 | 96 | 1.16 | |
2010 | 72 | 80⅓ | 12 | 3 | 47 | 1 | .800 | 1.68 | 60 | 4 | 11 | 75 | 0.87 | |
2011 | 79 | 87⅓ | 7 | 2 | 45 | 10 | .778 | 0.41 | 57 | 0 | 17 | 100 | 0.82 | |
2012 | 29 | 30 | 1 | 0 | 15 | 1 | 1.000 | 1.50 | 21 | 0 | 9 | 29 | 1.00 | |
2013 | 34 | 30⅔ | 2 | 3 | 22 | 1 | .400 | 1.47 | 26 | 2 | 15 | 19 | 1.30 | |
2014 | 22 | 19 | 1 | 1 | 8 | 0 | .500 | 6.16 | 17 | 4 | 14 | 20 | 1.52 | |
2015 | 36 | 31 | 1 | 1 | 16 | 3 | .500 | 3.19 | 31 | 3 | 18 | 34 | 1.58 | |
2016 | 1군 기록 없음 | |||||||||||||
2017 | 4 | 3 | 0 | 0 | 1 | 0 | .000 | 12.00 | 6 | 0 | 0 | 2 | 2.67 | |
2018 | 10 | 9⅓ | 0 | 0 | 0 | 0 | .000 | 4.82 | 7 | 1 | 0 | 8 | 1.61 | |
통산 | 12시즌 | 416 | 505⅓ | 38 | 21 | 200 | 23 | .644 | 2.42 | 427 | 25 | 156 | 460 | 1.12 |
6. 관련 문서
[1] 일본프로야구의 역사를 1936년부터 잡아도 무려 80년이 넘는다.[2] 당시 아사오가 입학한 일본복지대학은 프로 선수를 배출시키기는 커녕, 당시 대학리그에서 3부리그 수준에 그치는 무명 중의 무명 학교였다고 한다.[3] 이 시기는 고졸과 대학생/사회인의 드래프트를 따로 진행하던 때라 일반적인 드래프트였다면 대충 5~6순위 정도의 기대치라 볼 수 있다.[4] 팀 동료 요시미 카즈키가 그 해 18승 3패 ERA 1.65로 다승과 승률, ERA 부문 센트럴리그 1위를 차지하고도 리그 MVP를 놓친 기이한 사례다. 대신 요시미는 베스트나인에 선정되었다. 인터뷰에서 아사오는 본인이 중간계투로 등판해 요시미의 2승을 날려먹었고 요시미가 20승을 달성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5] '14년과 '15년에는 감독과 선수를 겸임했으나, '16년은 감독 전임 그리고 시즌 종료 후 사퇴했다.[6] 이 시즌엔 7경기를 선발로 나서기도 했다. 선발 불펜을 가리지 않고 나와 113.1이닝이나 던졌다.[7] 일화로 한 스포츠 기자가 2012년 시즌 시작 전에 전년도 리그 MVP였던 아사오의 2012시즌 포부, 다짐 등을 취재하고자 인터뷰를 진행하려 했지만 아사오는 취재시간을 계속 미루는 모습을 보여 실망감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알고보니 훈련시간을 맞춰가면서까지 자신을 기다리는 모든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기 위해 취재시간을 미룬 것이었고, 이후 기자에게 정중히 사과한 후 인터뷰에 응했다고 한다. 또한 취재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졌음에도 괜찮다며 말해주었고, 취재가 끝난 이후에도 자신을 기다려주는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모습에 깊게 감명받아 이 기자는 아사오의 열혈 팬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