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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바츠(財閥, 재벌)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게이레츠(系列, 계열)는 대전 이후 일본의 기업 집단을 각각 가리킨다. ※전후 미군정에 의해 해체 당하고 이후 1950년대부터 재결집을 했고 그것이 게이레츠가 됐다. * 스즈키 자이바츠는 스즈키가 아닌 현재의 소지츠(Sojitz)다. |
,미쓰비시 그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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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쓰비시 금요회 회원사 중 주요 13개 사 ** 미쓰비시 그룹 트로이카 |
<colbgcolor=#e60012><colcolor=#ffffff> 미쓰비시 그룹 三菱グループ | MITSUBISHI GROUP | |
정식 명칭 | 미쓰비시 그룹 |
일본어 명칭 | 三菱グループ |
로마자 명칭 | Mitsubishi Group |
국가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설립 | 1870년 |
주소 | 도쿄도 치요다구 오테마치1초메 3-2 |
창업주 | 이와사키 야타로 |
시가 총액 | 57조 3,703억 엔 |
대표 | 고바야시 켄 |
규모 | 대기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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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직의 미쓰비시[1]
일본 3대 재벌 기업 집단 중 하나이다.[2] 나머지 두 회사는 스미토모, 미쓰이. 상징적인 요소가 스미토모가 결속, 미쓰이가 사람이라면 미쓰비시는 이른바 '조직의 미쓰비시'라 일컬어진다.로고는 3개의 마름모로 미쓰비시의 한자 석삼(三), 식물 마름 릉(菱)의 잎사귀를 그대로 로고로 만들어놨다. 세 개의 다이아몬드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의 출신 번인 토사 번의 번주였던 야마우치 집안의 가몬(일본) 三つ柏紋(세 장의 떡갈나무 잎사귀) 문양 배치를 이와사키 집안의 가몬과 섞어 만든 것이다.#
3대 재벌 중 가장 대외 인지도가 높은 기업이기도 하다. 스미토모나 미쓰이가 소비재 계열사에 그룹명을 쓰는 경우가 별로 없는 반면, 미쓰비시에 소속된 기업들은 공통된 3가지 강령[3]을 공유하는 등, 기업 간의 유대관계가 깊고 따라서 '미쓰비시 브랜드'를 강하게 어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영향을 미친 듯하다.[4]
계열사 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영향력을 가진 미쓰비시 상사, 미쓰비시 중공업, 미쓰비시 UFJ 은행 위 3개 사를 미쓰비시의 트로이카라고 칭한다.
2. 계열사 목록
어디까지나 비공식 조직인 만큼 정의에 따라 크게 오가지만, 총 계열사 수는 1,000여개에 이른다. 이 중 '금요회' 회원사(○로 표기. 그 중 주요 13개사는 ◎로 표기) 27개, 또는 홍보위원회 회원사가 37개가 주축 계열사이며, 각 회원사가 거느린 자회사를 합치면 그 수가 크게 불어난다.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된 기업의 경우 기린처럼 지주회사가 참여하는 경우나 미쓰비시화학, 미쓰비시UFJ 금융사처럼 사업회사가 직접 참여하는 경우가 각각 존재한다.한편 기존 미쓰비시 계열사가 외부 자본에 인수되거나(미쓰비시 후소 등. ☆로 표기) 타 그룹 기업과 합병한 경우(미쓰비시UFJ 등. ★로 표기)에도 일단 금요회와 홍보위원회 활동은 계속 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룹 계열사로 인식되는 편. 이 때문에 미쓰비시의 계열사가 타 그룹 계열사를 겸하기도 한다.
미쓰비시 그룹을 지탱하는 중핵기업(中核企業)은 볼드체.
이하 목록은 홍보위원회 회원사이며('금요회' 회원사는 미쓰비시 케미컬 사업회사를 제외하고 홍보위원회에도 포함), 유명 자회사는 주석으로 별도 표기.
- 기린 홀딩스◎[5]
- 니콘○
- 대일본도료(大日本塗料)
- 도쿄해상홀딩스 계열 (지주회사는 비회원)
- 도쿄해상일동화재보험(東京海上日動火災保険)◎★[6]
- 메이지 야스다 생명보험(明治安田生命保険相互会社 Meiji Yasuda Seimei Hoken)◎★
- 미쓰비시 가스화학(三菱瓦斯 (ガス) 化学)○
- 미쓰비시 광석운송(三菱鉱石運送)
- 미쓰비시 머티리얼(三菱マテリアル Mitsubishi Materials Corporation)◎[7]
- 미쓰비시 알루미늄○ (三菱アルミニウム)
- P.S. 미쓰비시○
- 미쓰비시 상사◎[8]
- 로손
- 미쓰비시 식품
- 미쓰비시 오토리스(三菱オートリース)[9]
- 미쓰비시 자동차○☆[10]
- 미쓰비시전기◎[11][12][13]
- 미쓰비시 스페이스 소프트웨어
- 미쓰비시 프리시전
- 미쓰비시엘리베이터
- 미쓰비시 제강(三菱製鋼)○
- 미쓰비시 제지(三菱製紙 Mitsubishi Paper Mills Limted)○
- 미쓰비시 종합연구소○
- 미쓰비시 중공업◎[14]
- 미쓰비시 지소(三菱地所 Mitsubishi Estate)◎[15]
- 미쓰비시 창고(三菱倉庫 Mitsubishi Logistics)○
- 미쓰비시 케미컬 홀딩스◎[16]
- 다나베 미쓰비시 파마
- 미쓰비시 후소 트럭-버스○☆[17]
- 미쓰비시 화공기(三菱化工機)○
- 미쓰비시UFJ 파이낸셜그룹 계열 (지주회사는 비회원)
- 일본 마스터 트러스트 신탁은행
- 미쓰비시 UFJ 은행◎★
- 미쓰비시UFJ 증권 HD○
- 미쓰비시 UFJ 신탁은행(三菱UFJ信託銀行 Mitsubishi UFJ Trust and Banking Corporation)◎★
- 미쓰비시UFJ니코스★
- 미쓰비시UFJ 리스★
- 아코무(アコム)[18]
- 아사히 글라스(旭硝子, AGC)◎[19]
- 아스토모스 에너지[20]
- 닛폰유센(일본우선)(日本郵船)◎[21]
- 유센(우선) 로지스틱스(郵船ロジスティクス)○
- 일본 타타 컨설턴시 서비시즈[22]
- ENEOS○[23]
2.1. 현재 계열사/자회사가 아닌 기업
상기하였다시피 심지어 외국 기업에 90% 가까이 지분이 넘어간 경우 (미쓰비시 후소) 조차 그룹 협의체에는 남아있다시피 할 정도로 결속이 강하다.[24] 다만 이탈한 케이스가 없지는 않다.- 캐터필러 저팬: 과거 미쓰비시 중공업과 합작 법인이었으나 2012년 합작관계 철폐.
3. 스포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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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사
4.1. 창업
창업자는 토사 번 출신의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다. 2010년 NHK 대하드라마 료마전은 이 사람의 나레이션(카가와 테루유키가 담당)으로 진행된다. 주인공 사카모토 료마와 아는 사이로 극 초반부터 등장하는데 그때 그의 젊은 시절 집안형편을 묘사해놓고 있다.[25]1868년 메이지 유신의 일환으로 일본 정부가 여러 봉건영지들을 해체하자, 1871년 오사카에서 자신이 경영을 맡아오던 도사번 운영의 작은 선박회사와 상점을 인수하여 도사 가이세이라는 회사를 세웠다. 사카모토 료마의 해원대가 가지고 있던 회사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후 츠쿠모(九十九) 상회, 미쓰카와 상회를 거쳐 1873년부터 미쓰비시 상회로 사명을 바꾸며 사세를 확장했다. 특히 이 때 미쓰이 상회와 도사 가이세이의 피터지는 경쟁이 일본 경제사에서 유명해서, 나중에는 고베-오사카 간 도선요금이 풍덩풍덩 내려가다 못해 무료(!)로 출혈경쟁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결국 두 회사는 신사협정을 맺어서 타협하게 된다.
이후의 역사는 미쓰비시 상사 문서 참조.
참고로 이와사키 집안은 토사 번의 하급 사무라이 출신이었는데, 아버지대에 '지하낭인'이라고 해서 무사계급을 팔아버린 신분으로 일반 백성이었으며[26] 어릴 적에는 아버지 야지로와 새장을 팔았지만 형편이 좋지 않았다. 20대에는 목재를 팔아 장사에 성공하였다.
또한 오쿠보 도시미치 정권 하에서 사가의 난, 타이완 출병, 서남전쟁 등에 적극적으로 메이지 신정부를 지원하고 이에 따른 지속적이고 엄청난 양의 떡고물을 통한 해운 운수업의 확장으로 ‘해운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예를 들어 13척의 관유선 무상불하, 5년간 약 250만 엔의 준비금 대부, 미쓰비시 소유의 선박 17척 정부매입 후 무상불하(약 62만 엔) 등으로 급성장하게 된다.
한편 정경유착 관계를 바탕으로 급성장하던 와중에 언론으로부터 특혜를 받는다는 비난이 일었고, 특히 미쓰비시 상회의 후원자였던 오쿠보 도시미치의 암살과 오쿠마 시게노부의 실각으로 잠깐 사세가 휘청거리던 시절도 있었다. 1882년에는 (막신으로 활동하였던 사업자들로도 포함하는) 반 미쓰비시 사업자들이 정부의 출자를 획득하고 교도운수회사(共同運輸会社) 설립으로 미쓰비시 상회를 견제하기도 했으나, 결국 미쓰비시가 경쟁에서 이겼다.
4.2. 확장
1885년에는 경쟁관계에 있던 교도운수회사를 합병, 일본우선(日本郵船, 닛폰유센)[27]을 설립하여 주력사업이었던 해운업을 여기에 일임하고, 부업이었던 광산 ·탄광, 그 후에 소유하게 된 조선소나 은행에 주력함으로써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1893년 미쓰비시 합자회사로 개편하고, 사업회사로서 다각적 사업을 은행 ·광산 ·조선 ·영업의 각부로 편성하여 종합적으로 관리하였다. 그 밖에 방계회사로서 도쿄 해상, 메이지 생명, 미쓰비시 제지, 기린 맥주, 아사히 유리 등이 설립 ·흡수되었다. 1916년 이후 미쓰비시의 각 사업은 조선 ·제철 ·창고 ·광업 ·상사 ·은행 등의 주식회사로 조직되어, 미쓰비시 합자가 지주회사로서 총사령탑 역할을 하는 콘체른이 성립하였다.
미쓰비시 재벌의 다각적 사업망 확충 중에서도 특히 조선 ·광업 부문을 토대로 전기(電機) ·항공기 ·화학 ·석유 등 중화학 공업 부문에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일본의 군용기중 가장 유명한 A6M 제로센을 미쓰비시에서 만들었다.[28] 특히, 2차대전 때는 첩보활동도 벌었다는 문서 기록에도 있다.#[29]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점령군의 명령에 의하여 미쓰비시를 포함한 거대 재벌들이 해체되었다. 하지만 껍데기만 남아버린 미쓰이와 스미토모와 달리 부활에 성공했는데, 한국 전쟁으로 일본 경제가 부흥하자 해체되었던 회사들이 재결합을 시도, 1954년 종합상사로서 미쓰비시 상사가 부활하였으며, 중화학 공업 및 항공 ·군사 산업 부문도 미쓰비시 케미컬과 미쓰비시 중공업으로 되살아났다. 2차대전 이후로 자본 관계는 상당히 끊어졌으나, 1954년 미쓰비시 금요회[30], 1964년 미쓰비시 홍보위원회 등의 협력 기구가 구성되어 있다.
5. 한국인 징용에 대한 배상 및 사과 논란
미쓰비시가 과거 하시마 섬(군함도) 강제징용에 대해 어떤 법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는 과거의 언급과 한일기본조약에 근거해 크게 2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첫째로, 미쓰비시의 사외 이사인 오카모토 유키오(岡本行夫)는 국가적인 문제에서 봤을 때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것은 원죄라는 것을 인정하였지만, 기본적으로 1910년 이후 조선인들은 법적으로 일본 국민으로 분류되고 있었기 때문에 1938년, 국가 총동원법에 의해서 국가가 자국민을 징용한 것은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는 발언을 하였다. 즉 도의적으로 잘못되었으나 법리적으로 잘못하지 않았다는 발언이다. 당시 교전국이던 미국, 중국, 영국 등의 연합국의 전쟁포로를 강제노역시킨 것과 자국민을 징용한 것은 법적 상황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둘째로, 미쓰비시 그룹에 대한 한국 강제 징용 피해자의 청구권이 존재한다 가정하더라도 한일기본조약을 기점으로 소멸되었다는 입장이다. 한국 이외의 국가에 대해 미쓰비시는 중국에 2차대전 기간의 중국인 강제노역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합의하기도 하고, 이러한 행보를 앞으로도 이어나갈 듯하다. 그러나 한국인 징용 노무자에 대해서는 "법적인 상황이 다르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입장의 근거가 되는 것이 한일기본조약.# 왜냐하면 중국은 당시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 중 어느쪽을 정통으로 인정할지에 대해 연합국 사이에서 갈등이 있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배상을 받지 못했고, 이후에도 중국 공산당이 자신들을 인정해줄 우방을 늘리기 위해서 국가 단위의 청구권은 자진해서 포기하였지만, 개인 단위의 청구권은 포기하지 않았기에 미쓰비시 그룹이 중국에 대한 배상을 진행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애시당초 개인 및 국가 단위의 청구권 문제가 모두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해결된 상황이라 배상을 받을 법적 근거가 없다. 요컨대, "중국에는 준 적이 없으니 줬는데 한국은 받아놓고 뭘 또 달라고 하냐?"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 어쨌든 위와 같은 이유로 청구권이 존재하는지도 불분명한, 또는 존재했더라도 이미 청구권 문제가 해결된[31] 상황이 되었다. 실제로 2008년에 양금덕 등 징용피해자 8명이 나고야 지방재판소에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한일기본조약을 근거로 최종 패소 판결을 받았다. 일본이 배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받은 게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대한민국 제3공화국 ~ 4공화국 정부에서 일본에게 받은 배상금의 대부분을 경제 개발에 투입하였기 때문이다.[32][33]
일제 피해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보상문제를 한국정부가 손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76년에 경제기획원이 발간한 "청구권 자금백서"에 의하면 당시까지 일제에 의한 피해가 입증된 이들에게 한일기본조약 배상금 8억달러의 5%가량을 지급하였으며 훗날 참여정부는 보다 많은 피해자들에게 훨씬 증액된 금액을 지급하였다. 하지만 역대 정부는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지원 책임을 지자체에 떠넘기면서 지자체의 재정 악화에 기여하였다. 이로 인해 위안부 할머니들 중 상당수가 노환으로 사망한 상황이라, 이제와서 어떻게 해보려 해도 이미 곱게 해결할 타이밍은 한참 전에 놓쳐버린 상황이다. 한국 정부의 실책도 있는 만큼 아베 정권 들어 심각해진 과거사 망언에 대한 사죄만 요구하고 배상 문제를 패키지로 끌고 오지 말자는 주장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설사 한국 법원에서 미쓰비시가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형태로 판결이 나온다고 해도, 미쓰비시는 한국이 한일기본조약을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이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여 국제법상 한국이 패소할 가능성도 있다. 한국 법원은 간혹 '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볼 수만은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리지만 실제 배상으로 이어진 경우는 전무하고, 아직 전범기업에 대한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이루어진 사례도 없다. 2017년 강경화 당시 외교부 장관 후보의 청문회에서도 의원들의 질문에 대해 배상 책임을 함께 언급하고 대다수 여론도 마찬가지로 배상과 사과를 분리하지 않는 등, 여전히 한국 국내의 전체적인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관련 문제 인식은 첨예한 쟁점을 이루고 있다.
일본은 한일수교로 인한 금액 지급, 공적개발원조와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해 무상지원 및 위안부 위로금 지급, 고노 담화 ~ 무라야마 담화로 이어지는 정부 차원의 사죄 성명,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총리의 친필 사과 친서, 일본 천황(아키히토 천황)의 과거사 사죄 발언 등의 방식으로 성의를 보였다. 그러나 이후 잊을 만하면 고이즈미, 아소, 아베 같은 극우 정치인들의 각종 망언이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역사왜곡, 독도 분쟁 등으로 어그로를 끄는 바람에 과거 일본이 했던 사과에 대해 진정성 논란을 만들긴 했지만(...). 어쨌든 '일본 입장에서는' 한국이 양보할 수 없는 영역까지 양보하길 원한다는 여론이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만 해도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에서 볼 수 있다시피 재협상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2018년 말에 한국 대법원에서 강제징용피해자 대상으로 여러 리스크에 오른 기업들과 함께 미쓰비시한테도 피해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미쓰비시가 항상 주장했듯이 한일기본조약을 배경으로 배상했다는 근거로 배상의 의무를 거부하자 배상 체납혐의로 한국 내 미쓰비시 자산이 압류된 상태이다.
5.1. 반론
한일 양국은 국제인권규약에 가입한 국가다, 그 중 "시민적ㆍ정치적 권리규약(B규약)"의 "제1선택의정서[개인진정]"은 한일 양국이 전부 채택하고 있는 조항인데 그 중 7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이 의정서의 규정은 1960년 12월 14일 국제연합총회에 의하여 채택된 식민지와 그 인민에 대한 독립부여 선언에 관한 결의 1514(XV)의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국제연합헌장과 국제연합 및 그 전문기관 하에서 체결된 여타 국제협약과 문서에 의하여 이들에게 부여된 청원권을 어떤 경우에도 제한하지 않는다.
즉 양국간의 정부가 협의를 맺었다 하더라도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시킬 수 없다는 내용이다.이뿐만 아니라 개인의 청구권을 정부가 소멸시킬 수 없다는 것은 국제법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 게다가 이는 일본도 인정한 사례가 수두룩하게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히로시마에 끌려간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일본 최고재판소가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는다며 니시마쓰 건설에게 자발적으로 피해를 구제하라고 권고하였고, 2009년 중국 강제징용자들를 위해 2억 5천만 엔의 기금을 조성하여 지급하기도 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배상 청구권을 포기했지만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원폭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출처또한 91년 당시 일본 국회에서도 이를 세번이나 인정하기까지 했고, 고노 다로 당시 외무상이 판결 나기 직전에 개인의 청구권이 남아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출처
또한 일각에서는 "한일협정에서 받은 기금으로 기업에 투자를 한 정부나 그 투자를 받은 기업도 직접적인 배상 문제에 대해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일본에게 따진다는 게 말이 되냐?" 라고 하지만 이는 피장파장의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정부의 대처가 미흡했다곤 하나 이는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
5.2. 사죄 문제
다만, "법적 배상 책임과 별개로 사죄는 가능하지 않겠느냐?" 하는 주장에는 분명 일리가 있다. 물론 국가총동원 사태에서 기업 차원에서 이러한 상황에 저항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점이 있는 게 사실이다.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전시와 같은 국가비상사태에는 비상계엄령 등으로 개인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데, 하물며 민주주의 국가에 비교하면 실례인 일본 제국이 국가총동원을 선포한 상황에서 '난 협조할 수 없소'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결과적으로 하시마 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미쓰비시 그룹에게는 전쟁기간 동안 한국인 징용피해자들을 가혹한 노동환경 및 인권침해 상황으로 몰아넣으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한 전력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형식적인 차원에서나마 피해자들에게 사과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던가? 미쓰비시 그룹은 배상과 별개로 단 한 번도 피해자들에게 사죄한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배상의 법적 의무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한다는 점에서는 미쓰비시 그룹이 징용 문제 관련해서 비판을 받을 여지가 충분하다.또한 미쓰비시 그룹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인들의 강제 노동을 이용하였는데, 이 노동자들이 미쓰비시 법인에 보상 요구 소송을 하여 중국에 대해서는 중국인을 강제동원하여 인명피해를 낸 것에 피해 보상을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었기도 했으며,# 미국에 대해서도 2015년 미군 포로 900명을 미쓰비시 탄광 등 4곳에서 강제노역을 시킨 것에 사과했다.#
6. 기타
- 전범기업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미쓰비시 계열사들은 한국 경제 발전사를 논할 때 중요하게 언급된다. 대표적인 예시가 소양강댐이다. 당시 소양강댐 건설을 위해 일본이 제공한 무상 차관으로 미쓰비시를 포함한 일본 대기업에게서 용역과 건설장비를 구매하여 이를 현대그룹에 대여해 주었고, 덕분에 현대그룹은 소양강댐 건설에서 장비 운용 노하우 및 대규모 건설에서의 인력 운용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또 다른 예시가 현대자동차다.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모델이자 대한민국 자동차공업 자립화의 신호탄인 포니 제작 당시 미쓰비시 랜서 1세대 후륜구동 플랫폼과 새턴 엔진등의 파워트레인을 미쓰비시에서 라이선스 생산 방식으로 들여왔다.
- 미쓰비시 그룹과 미쓰비시 연필 주식회사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남남이다. 그저 우연히 같은 상표와 상징을 쓰고 있을 뿐이다. 하도 그것 때문에 문의가 많았는지, 미쓰비시 연필은 홈페이지에 대문짝만 하게 "저희 회사는 미쓰비시그룹과 관계가 없습니다" 라고 하기도 하고, 회사명 중간에 하이픈을 넣는다든가, 아예 'uni'라는 브랜드를 적극적으로 미는 등, 완전히 다른 회사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호소한다. 미쓰비시의 마름모 3개 로고 또한 사실 미쓰비시 연필쪽이 먼저 사용한 것이고 미쓰비시 연필사에서도 이걸 홍보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사명과 로고가 겹치다보니까 일본인들부터도 미쓰비시 연필을 미쓰비시 계열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2동(동수역 근처) 근처를 '삼릉'이라고도 부르는 경우가 있는 이유가, 일제강점기 때 부평에 미쓰비시의 군수 공장이 있었기 때문이다(三菱 : 삼릉/훈독으로 みつびし, 이를 다시 순우리말로 직역하면 세마름).[35] 이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왜 삼릉이라 불리는지, "왕릉이 세 곳 있어서 '삼릉(三陵)'"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해방 후 세대 중 나이가 든 몇몇 지역 유지마저 저렇게 막연히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 고속도로 폐쇄식 구간에 설치된 대부분의 통행권 발행기가 이 회사(미쓰비시 전기)의 제품이다.
- 이름을 미쓰시비로 틀리는 경우가 간혹 있다.
[1] 이에 비견되는 슬로건이 미쓰이 그룹의 "인화(人和)의 미쓰이(사람의 미쓰이)"다. 한국도 일본 기업문화 영향으로 삼성이 "조직관리의 삼성", LG가 "인화의 LG"라고 불린다.[2] 한참 전성기였던 1940년대에는 일개 기업 주제에 국가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그 영향력이 막강하였다. 또한 일본의 침략전쟁 중 제로센 같은 복잡하고 많은 기술을 필요로 하는 주력 무기들은 대부분 미쓰비시가 만들어내었다.[3] 소기 봉공 / 処事 광명 / 立業 무역[4] 다만 그룹 내의 개개의 면면을 보면 3대 재벌 중에 좀 처진다고 평가받는 미쓰이도 그 유명한 토요타와 도레이, 후지필름, 미쓰코시 등을 계열로 두고 있다.[5] 사업회사 기린맥주, 기린베버리지 등은 중간지주회사 기린주식회사를 거친 손자회사이다. 고이와이유업은 자회사.[6] 일본 손해보험업계 1위.[7] 고베제강처럼 품질 데이터 조작 부정을 저지른 회사이다. 기사1 기사2 기사3[8] 일본 서열1위 상사이자 매출 20조 엔의 초거대 기업. 하기 2사 이외 일본KFC, 이토햄 등의 자회사가 있다. 일본 최대 광미디어 (CD, DVD, 블루레이 등) 제조사인 메모리테크의 주요 주주이기도 하여, 미쓰비시상사가 왕왕 애니메이션 제작위원회의 스폰서로 참가하기도 한다.[9] 미쓰비시상사 및 미쓰비시UFJ리스 합작사.[10] 2016년 5월 부로 닛산자동차가 지분 34%를 취득하면서 르노, 닛산과 함께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 산하기업이 되었다. 하기 미쓰비시 후소는 리콜 은폐 사건 때 위기 탈출을 위해 2003년 분사하여 매각한 것.[11] 주로 정부/기업용 전기제품을 만드는 회사이다. 매출의 80%는 BtoB제품에서 나온다.[12] 제품 포트폴리오도 '전기로 움직이는 중공업 제품'이 대부분. 미쓰비시중공업과의 차이점은, 중공업제품 중 전기가 필요없는건 중공업이, 전기로 움직이는건 전기가 만드는 식이다. 한국에는 사업부별로 따로 진출했는데, 한국미쓰비시엘리베이터, 미쓰비시전기오토메이션 등의 자회사로 한국에 진출해있다.[13] 미쓰비시중공업의 전기제작소가 분리독립하는 형태로 1921년에 설립되었으나, 지금은 매출액과 시가총액 모두 역전하였다. 발전사업이나 F-35라이센스생산에서 공동입찰을 하는 등, 미쓰비시중공업과는 일부 사업분야에서 협업관계이다.[14] 일본 중공업계 1위회사. 자회사로 미쓰비시 항공기, 미쓰비시 파워 등이 있다. 여기서 분리 독립한 회사로는 미쓰비시전기와 미쓰비시 자동차가 있다.[15] 부동산 기업으로 마루노우치 빌딩, 프리미엄 아웃렛, 선샤인 시티, 요코하마 랜드마크 타워 등 유명 상업시설을 보유했다.[16] 금요회 멤버인 사업자회사 미쓰비시 케미컬은 홍보위원회에는 빠져 있다. 버바팀 브랜드 미디어를 제조하는 미쓰비시 케미컬 미디어는 손자회사이다.[17] 2005년 이후 다임러 벤츠 그룹 산하로 편입되었다.[18] 일본의 유명 제3금융권 회사중 하나. 일본에서 이 회사의 광고간판이나 TV광고가 심심치 않게 뜨는걸 볼 수 있다.[19] 각종 유리제품을 만드는 회사이며, 세계적으로 점유율 상위권을 자랑한다.[20] 미쓰비시상사-이데미쓰코산의 합작사[21] 미쓰비시의 시작점에 해당하는 일본 1위 해운사. 해외에선 흔히 NYK로 불린다. 자회사로 일본화물항공 등이 있다.[22] 미쓰비시상사-인도 타타 그룹의 합작사[23] 주로 에너지관련 사업을 하는 회사. 일본에서 흔히 보이는 주유소.[24] 이런 기준이라면 르노코리아도 삼성의 자회사로 남아있는 것이 된다. 삼성카드의 지분이 13% 정도 남아있기 때문.[25] 참고로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창작에서의 설정일 뿐이다. 둘이 사이가 안 좋았다는 기록이 남아있긴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인연이 있었다는 것은 드라마 내에서의 설정일 뿐.[26] 지하낭인이라는 계급 자체도 천한 것이지만 당시 토사번은 사무라이가 다른 번들과는 달리 토사를 다스리는 야마우치 가문의 가신 출신들인 상사와 센고쿠 시대 토사를 다스렸던 쵸소카베 가문의 가신 출신들인 하사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하사는 상사들에게 짐승과 다름없는 취급을 받으며 심한 꼴을 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사극에선 대부분 심한 수준의 멸시를 받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대하드라마 신선조에 등장한 사카모토 료마의 대사에선 취급이 벌레 이하라는 언급이 있고 료마전에선 그것이 더욱 생생하게 묘사된다.[27] 오늘날 일본의 3대 해운사 중 하나인 NYK Lines.[28] 애초에 A6M이란 기종명 자체가 미쓰비시 설계의 여섯번째 모델인 전투기라는 뜻이다. 제로센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는 이 기종이 해군의 주력 함상기로 채택된 해가 일본의 황기 기준 2600년이었기 때문에 '영(0)식함상전투기'라는 제식명에서 온 것이다.[29] 이런 정보수집 활동은 다른 자이바쯔들도 마찬가지였고 국책회사들도 했었다. 대표적인 것이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정보수집 및 조사 담당 부서, 일명 만철조사부다. 이 자이바츠들의 정보력 역량은 패전 후 느슨한 기업집단으로 바뀐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어 1970~80년대 일본은 타국의 정보기관 주도 정보수집과 달리 종합상사들이 정보수집을 담당했다(다만 일본에도 정보기관으로 총리대신 직속 내각조사부가 있긴 하다).[30] 월 1회 개최되는 경영진 친목회를 자칭하고 있으나 믿거나 말거나. 유사한 경영진 회의체는 타 그룹도 운영하고 있다.[31] 법리적으로는 청구권 자체는 소멸하지 않았으나 일본 정부와 일본의 법인들을 포함한 일본의 국민들은 그러한 청구권에 법적으로 응할 의무가 소멸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결국 끝났다는 점은 같다.[32] 이 때문에 왜 처음부터 배상금을 피해자들에게 지급하지 않았냐며 비난하는 여론이 종종 나오곤 하는데, 이는 당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오해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해방 직후의 혼란, 한국전쟁, 4.19 혁명 등 극심한 사회혼란을 겪으며 50-60년대까지 현대적인 관료제가 확립되지 않았는데, 그마저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기존에 근무하던 약 4만여명의 공무원을 해고하면서, 모든 피해자들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행정체계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일본은 강제징용 배상과 별개로 이미 자신들이 거액을 투입해 만든 자산들을 강탈 당했다는 인식이 있다. 왜냐하면 미군정이 일본정부나 민간인이 설립한 시설, 기업들을 전혀 보상하지 않고 몰수하여 3년후 성립되는 한국정부에 인계하였고, 열악한 재정상황의 한국정부는 이를 "적산불하"로 민간에 매각하였다. 한국의 자산가들이 헐값에 매입한 이러한 시설, 기업이 오늘날 쟁쟁한 대기업/대한민국의 시발점이 되었다.[33] 일각에서는 일본측이 자금 유용을 방지하려고 식민 피해자에게 직접 배상하려 했다는 소문이 돌지만, 실제로는 시간을 끌어 배상액을 줄이기 위한 일본의 주장이다. 2005년 당시 한일수교 40주년을 맞아 참여정부는 이와 관련한 비밀문서 들을 모두 공개하였는데, 이를 연구한 학자들은 일본 정부는 35년 식민지배 역사를 부정하는 시각이었다고 평했다.[34] 현대 에쿠스/1세대까지는 미쓰비시 디그니티의 설계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현대차가 미쓰비시 자동차로부터 기술적으로 완전히 독립한 시기는 불과 2009년이다.[35] 현재 공장터는 신축된 빌라들로 원래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고, 공장노동자들의 숙소라고 여겨지던 '미쯔비시 구락부 건물터'는 슬레이트 지붕에 금방이라도 무너질것처럼 보이는 1960~70년대 지은 판자촌 건물이 운집해있는 곳으로 남아있다. 2018년 말 이 곳을 허물어 공영주차장으로 사용하자는 계획이 발표 된 이후 흔치 않은 일제강점기 유적으로 취급해야 된다는 의견과 흉물이라는 의견이 충돌했고 2022년 말 현재는 보존쪽으로 가닥이 잡히는 듯. 위치는 부평2동 행정센터 바로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