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도사 번 土佐藩 | ||
중심지 | ||
現 고치현 고치시 | ||
다이묘 | 야마우치 가문 | |
고쿠다카 | 202,600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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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도 시대 시코쿠 남부 도사국, 현 고치현을 다스린 일본의 옛 번(藩).센고쿠 시대 도사의 지배자로 군림한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쵸소카베 가문이 몰락한 뒤 야마우치 카즈토요가 다이묘로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막말 혼란 속에서 많은 존황양이 지사들을 배출하고 메이지 유신에 기여했다. 특히 사카모토 료마의 출신 번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도사 번은 고치 성을 본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고치 번으로도 불린다. 판적봉환 당시 고치 번으로 명명되었다.
2. 역사
쵸소카베 가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가해했다가 패해서 개역당하고,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었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선 야마우치 카즈토요가 들어와 도사 번의 새로운 번주가 되었다. 그 후 야마우치의 가신은 상급무사, 기존의 쵸소카베 가의 신하들은 향사(鄕士)라고 불리는 하급무사로 전락해서, 에도 막부 말기까지 두 계급 사이에는 신분적 차별이 심했다.막말에는 사카모토 료마[1]의 타도 막부 정신과 다케치 즈이잔의 존황양이 정신의 영향으로 인해 대표적인 도바쿠하(討幕派)[2]로 떠올랐다. 메이지 유신의 4대 번[3] 중 하나이며, 사쓰마 번과 조슈 번에 밀려 존재감이 떨어지는 번. 다만 당대 도사 번주 야마우치 요도는 히토츠바시파의 일원으로서 막말 정치에 깊게 관여하며 막부 말기의 4현후로 꼽혔고, 고토 쇼지로를 통해 전해 받은 사카모토 료마의 이른바 '선중팔책'을 이타쿠라 가쓰키요를 통해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올린 사람이 이 사람이다. 인구, 군사력 같은 수치적인 '국력'에서는 사쓰마나 조슈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상술했듯 도사번 출신 정치가들의 활약으로 인해 토막혁명에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신정부에선 큰 혜택을 보지는 못했다.[4]
사쓰마나 조슈에 밀렸을 뿐이지 도사나 사가는 여러 유신지사들이 참의 자리를 받는 등 어느 정도는 메이지 정부에서 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도사 번사들은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삿초 핵심인사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을 지지하며 정부를 뒤엎으려 했다가 오히려 이와쿠라 도모미의 견제를 받아 메이지 6년 정변으로 정부에서 실각해 버렸다. 이렇게 메이지 유신에서 공을 세우고도 다시 소외당한 경험 때문인지 메이저 유신지사였으며 토막 혁명 후 자유민권운동의 지도자가 된 이타가키 다이스케, 일본 군부의 폭주를 막으려다 암살당한 하마구치 오사치,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 아나키스트 혁명가 고토쿠 슈스이 '동양의 장 자크 루소'라고 불린 나카에 초민을 비롯한 메이지 시대 재야 정치운동가, 사민평등주의자 등 근대 일본의 '운동권' 인물들을 배출한 지방이기도 하다.
존 만지로는 도사 번의 평범한 어부였다가 배가 좌초되어 미국 어선에 구조된 뒤 일본의 개국에 관여하고 사무라이로 신분이 상승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