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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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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덕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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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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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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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2대 3대 4대
배성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6~1987)
김영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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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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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한용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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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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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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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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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베로 파일:베네수엘라 국기.svg
(2021~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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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024)
감독대행
정경배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4)
김경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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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빙그레 이글스|빙그레]]/[[한화 이글스|한화 이글스]] 등번호 40번}}}
오문현
(1986~1987)
<colbgcolor=#000><colcolor=#fff> 한용덕
(1988~2004)
김인철
(2005~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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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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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덕
(2006~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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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한용덕
(2015~2017)
고토
(2018)
한화 이글스 등번호 40번
로사리오
(2016~2017)
한용덕
(2018~2020)
신지후
(2021~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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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1712140500_12110923866334_1.jpg
KBO 경기운영위원
한용덕
韓容悳 | Han Yong-duk
출생 1965년 6월 30일[1] ([age(1965-06-30)]세)
경상북도 대구시 (現 대구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천동초 - 충남중 - 북일고 - 동아대(중퇴)
신체 183cm, 84kg, AB형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7년 연습생 (빙그레)
소속팀 빙그레-한화 이글스 (1987~2004)
지도자 한화 이글스 2군 투수코치 (2006)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2007)[2]
한화 이글스 재활군 코치 (2007~2008)[3]
한화 이글스 2군 투수코치 (2009)[4]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2009)[5]
한화 이글스 2군 투수코치 (2010)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2011~2012)[6]
한화 이글스 1군 수석코치 (2012)[7]
한화 이글스 감독대행 (2012)[8]
두산 베어스 2군 투수 총괄코치 (2015)
두산 베어스 1군 투수코치 (2015)
두산 베어스 1군 수석·투수코치 (2016)
두산 베어스 1군 수석코치 (2017)[9]
두산 베어스 1군 수석·투수코치 (2017)[10][11]
한화 이글스 감독 (2018~2020)[12][13]
프런트 한화 이글스 2군 담당 스카우트
한화 이글스 단장 특별보좌 (2013~2014)
경력 KBO 경기운영위원 (2021~)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기술위원 (2023)

1. 개요2. 불우했던 젊은 시절3. 선수 경력4. 피칭 스타일5. 지도자 경력6. 감독직 이후 행보7. 평가8. 연도별 주요 성적9. 감독 성적10.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10323104211491G.jpg
그는 화려한 투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꾸준한 투수였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투수였다.
무관의 투수왕 '한용덕'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2018년부터 2020년 6월 7일 홈 NC 다이노스전까지 한화 이글스 감독을 맡았다가 자진사퇴 하였다.

이글스의 연습생 신화에 타자로 장종훈이 있다면 투수에는 한용덕이 있다는 평을 받는다. 다리를 최대한 높게 들어올린 후 대충 던지는 듯한 특이한 투구 폼을 지니고 있었다. 후술하겠지만 배팅볼을 던지기 조금 더 편한 자세를 연구하다 만든 자세라고.

선수시절 등번호는 40번이었다. 감독으로 다시 돌아오면서도 역시 40번을 달았다. 이는 장종훈, 송진우 등 여타 지도자들도 마찬가지.

초장기엔 준수한 선수였으나 점점 더 클래스업을 이루면서 국내무대를 평정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메이저리그에서도 상당히 주의깊게 지켜보는 선수였다.

2. 불우했던 젊은 시절

그의 젊은 시절은 고난으로 가득했다. 원래 고향은 대구지만, 부친의 사업 실패로 8살 때 대전으로 이사하여 가난에 찌든 유소년기를 보냈다. 대전 천동초교 때 유격수로 야구를 시작했지만 덩치가 작은 데다가 실력도 그저 그래서 홀대를 많이 받았다. 북일고를 졸업하고 동아대 야구부에 진학하면서 덩치는 커졌지만, 이번엔 중학교 시절에 부상당한 왼 무릎의 관절염이 재발하여 결국 1년 만에 중퇴했다.

그 뒤로 자포자기하여 술에 찌들어 사는 나날을 보내는가 하면, 관절염과 약시로 군 면제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야구를 잊기 위해 병을 숨기고 16개월 방위병 판정을 받아 방위 복무를 하였고, 소집해제 후에는 잡부나 트럭 운전도 했다[14]. 그러나 야구를 끝내 잊지 못해 대전구장을 자주 기웃거리다가, 결국 1987년에 북일고 시절 은사이자 당시 한화의 전신 팀인 빙그레에 막 감독으로 부임한 김영덕 감독에게 "배팅볼 투수라도 시켜 달라"고 하소연하여 허락을 받고 연습생 신분으로 야구 인생을 재개했다. 그 뒤 3개월 후에 연봉 600만 원[15]#에 정식 선수로 등록, 포지션도 투수로 바뀌었다. 이때 타자들에게 배팅볼을 던져 주며 제구하는 법을 익혔다고 한다. 특유의 하이 키킹 후 대충 던지는 듯한 투구 폼도 (현역 시절 투구영상), 배팅볼을 상체를 이용해 던지면 팔이 아프니까, 조금이라도 오래 던지려고 연구하다가 하체를 활용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 배팅볼을 던지면서 완성한 것이다. 첫 1군 데뷔전은 1988년 7월 1일.

3. 선수 경력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40325162117408.jpg 파일:한용덕 투구폼.gif
선수생활 막바지의 한화 이글스 선수 시절 투구폼
7월 콜업된 한용덕은 스윙맨으로 전천후 활약하며 감독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는다. 2년차에도 스윙맨으로 뛰었으나 선발로 점차 고정되는 모양새였고, 90년부터는 선발 로테이션에 고정되었다.
처음엔 구종이 패스트볼 밖에 없는 등 투수로서도 그저 그랬으나[16], 1990년 전지훈련을 다녀온 뒤로 슬라이더를 장착하며 화려하게 변신하여 그 해 13승[17]을 기록하는가 하면 1991년에는 17승[18]을 거두며 한일 슈퍼게임 대표 선수로 선발, 4차전에서 승리 투수가 되는 영광도 누렸다. 1991년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해보면, 그 당시 최강 팀인 해태 타이거즈는 빙그레와 상대하며 8승 3무 7패로 아주 근소한 우위이기는 했지만 단일 팀에게 3무를 기록할 정도로 피튀기는 접전을 많이 벌였으며, 결국 1991년 한국시리즈에서 서로 상대 팀으로 만나 명승부를 펼쳤다. 그 당시 선동열이 투구수 10회 미만으로 한 이닝을 끝내면, 그 대항마인 한용덕 역시 10회 미만으로 끝냈다. 결코 선동열에 밀리지 않았던 그의 최고 전성기였다. 1993년에는 완투 1위를 달성할 정도로 분투했지만 팀은 부상자 속출로 인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고, 연속진출 기록은 5년으로 끝나게 된다.

1994년에 해태의 '팔색조' 조계현과 다승 경쟁을 벌이며 16승을 올렸으나 강병철 당시 감독과의 불화, 대형 교통사고로 인해[19] 시즌 아웃되었다. 다행히도 1995년 무사히 복귀해 3점대 ERA와 규정이닝을 넘기며 자신이 여전히 한화의 주축임을 강조했으나, 승운이 안 따라주며 8승 13패를 기록한다. 승패만 제외하면 평균자책점은 전년도와 비슷했고, 이닝이나 FIP는 전년도보다 확실히 나았음에도 저 오버패 때문에 기량 하락의 우려가 피어나기 시작한다.[20]

그런데 1996년 ERA가 4점대로 상승하며 기량 하락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원인은 6년 연속 규정이닝을 돌파할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던진 데다 전년도 큰 부상에서 갓 돌아오고도 관리 없이 180이닝을 소화한 후유증.[21] 그래도 111.1이닝에 8승 8패로 3~4선발 정도의 성적을 찍으며 어느 정도 체면치레는 했는데, 1997년은 기록상 보여지듯이 승운이 정말정말로 없었다. 25경기 중 11번을 선발로 나와서 평자책 4점대에 93이닝밖에 못 채운 건 그렇다 쳐도, 1승 8패.

그리고 1998년 한용덕은 계투로 뛰면서, 평균자책점 2.26으로 부문 3위를 찍으며 화려하게 부활한다.[22] 계투로 131.2이닝을 기록하며 규정이닝을 넘기는 가운데 선발등판 횟수는 단 2회였고, 56경기는 리그 9위[23]이자 구대성에 이은 팀내 2위였다. 게다가 당시 한용덕은 34세의 노장이었다. 아마 홀드가 좀 더 일찍 도입되었다면 1998년 홀드왕은 한용덕이 확실했을 만큼, 당시 한용덕은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24]

그러나 이 때 무리해서였는지 다시 하락세가 시작되었다. 미들맨으로 활약하며 부활하는 모습을 보인 한용덕은 다음 시즌인 1999년 다시 선발 로테이션에 들었으나 90.1이닝 동안 2승 7패에 ERA 7.47로 데뷔 후 가장 부진한 성적을 냈다. 때문에 그해 팀의 우승에 별 기여를 못했다.[25][26] 2000년에도 선발진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김원형과 함께 리그 최다패(15패)를 기록하며 한화의 급추락에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 해 8월 23일에 100승을 달성하는 경사가 있었다. 2001년 37세로 다시 부활하며 노장의 투혼을 보여주었으나[27], 나이는 어쩔 수 없었던지 2002년부터 다시 하락세를 탔으며 2003년부터는 아예 불펜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2004년에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된 후 은퇴를 결정하여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참고로 현역 당시의 등번호는 40번이었는데, 이 번호를 선택한 이유는 은퇴할 때까지 40승 정도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담아서 고른 번호라고 한다. 그런데 은퇴할 때까지 거둔 승수는 40의 3배. 또 다른 설로 김은식의 야구의 추억에서는 40살까지 야구하고 싶다고 해서 달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확실한 건 은퇴 년도인 2004년이 대한민국 나이로 딱 40세가 되던 나이였다.

4. 피칭 스타일

패스트볼 최고 구속은 140km/h대 초반, 평균 구속 130km/h대 중후반 정도로 강속구 투수라고 보기 어려운[28] 그가 탈삼진 랭크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활약한 이유는 칼같은 제구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통산 9이닝당 볼넷 평균 허용개수는 2.19로 역대 12위. 10년 이상 선수 생활한 선수 중 4위이다.[29] 그의 주무기로는 1990년 전지훈련 때 익힌 슬라이더와 투심이 있는데, 그의 제구력은 상당히 절묘하여 카운트를 잡고 스트라이크존에서 공 반개 정도 빠지는 투심을 꽂아넣어 헛스윙을 유도, 삼진을 잡아내는 스타일이였다.

5. 지도자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한용덕/지도자 경력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6. 감독직 이후 행보

자진사퇴 뒤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코치, 감독 시절 누려보지 못한 여유를 즐기고 있는 중이라고.

2021년 2월 5일 자로 KBO 경기운영위원으로 선임되어 경기감독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2022년 8월 20일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열릴 NC와 삼성과의 경기에서 경기감독관으로 파견되었는데, 전날 폭우로 그라운드 상황이 좋지 못했음에도 경기 개시를 강행하였다. 결국 이 날 경기는 늦은 시각에 취소되면서, 경기를 관람하러 온 팬들이 불만을 쏟아냈다.

조범현 전 감독, WBC 기술위원장 선임

최근 두산 베어스 이승엽 감독의 경질설이 급부상하면서 팀 팬들 내에서 두산 1군 투수코치 재직 시절 성과가 있는 한용덕을 감독에 앉히자는 의견이 일부 존재한다.

7. 평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한용덕/평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8.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8 빙그레 12 41⅓ 2 1 0 - 0.667 3.05 39 9 21 16 15 14 1.45
1989 23 67 2 2 1 - 0.500 3.22 64 5 29 47 25 24 1.33
1990 38 171 13
(5위)
9 3 - 0.591 2.53
(5위)
147 10 65 100 59 48 1.20
1991 31 201⅔
(5위)
17
(2위)
6 2 - 0.739
(2위)
2.23
(3위)
164 10 56 123 59 50 1.05
1992 29 186⅓ 9 11 3 - 0.450 2.99 144 16 65 122 69 62 1.05
1993 27 172⅓ 10 11 5 - 0.476 2.98 143 13 36 112 61 57 0.98
1994 한화 27 177⅓ 16
(3위)
8 0 - 0.667 3.25 168 22 33 105 71 64 1.11
1995 26 180⅓ 8 13 0 - 0.381 3.29 162 13 51 121 72 66 1.13
1996 21 111⅓ 8 8 1 - 0.500 4.37 111 13 29 57 59 54 1.20
1997 25 93 1 8 1 - 0.111 4.16 89 10 25 61 45 43 1.18
1998 56 131⅔ 7 3 4 - 0.700 2.26
(3위)
104 9 38 96 38 33 1.01
1999 23 90⅓ 2 7 1 - 0.222 7.47 123 21 39 51 83 75 1.71
2000 38 130⅔ 7 13 0 4 0.350 4.68 133 17 50 85 81 68 1.32
2001 31 144 8 10 0 2 0.444 3.56
(4위)
150 14 40 112 65 57 1.27
2002 33 116⅔ 8 7 2 1 0.533 4.94 116 17 30 86 68 64 1.17
2003 32 55 2 1 1 3 0.666 4.91 59 5 14 42 31 30 1.24
2004 10 10 0 0 0 1 0.000 9.00 17 2 4 8 13 10 1.90
KBO 통산
(17시즌)
482 2080
(5위)
120 118 24 11 0.504 3.54 1933 206 625 1344 914 819 1.17
완투, 완봉 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0년 3완투 1완봉
1991년 12완투
(2위)
4완봉
(1위)
1992년 9완투 2완봉
(4위)
1993년 12완투
(1위)
3완봉
(5위)
1994년 4완투 1완봉
1995년 9완투
(3위)
3완봉
(2위)
1996년 3완투 1완봉
1997년 2완투 0완봉
1999년 1완투 0완봉
2000년 3완투
(3위)
0완봉
2001년 2완투 1완봉
(4위)
KBO 통산 60완투 16완봉

9.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승률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12[30] 한화 이글스 28 14 1 13 0.519 8위 -
2018 144 77 0 67 0.535 3위 3위[31]
2019 144 58 0 86 0.403 9위 -
2020[32] 30 7 0 23 0.233 10위
통산 346 156 1 189 0.452

10. 관련 문서


[1] 음력 6월 2일.[2] ~8월 21일[3] 8월 22일~[4] ~6월 21일[5] 6월 22일~[6] ~5월 11일[7] 5월 12일~8월 27일[8] 8월 28일~[9] ~4월 17일[10] 4월 18일~[11] 하단에도 나왔듯이 2017년 8월 20일에 김태형 감독이 게슬염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동안 3경기를 당시 감독대행으로서 팀을 지휘했었다. 감독대행시절 전적은 2승 1패.[12] ~6월 7일[13] 자진사퇴[14] 정확히는 트럭 운전을 한 건 아니고 조수를 했는데 운전사가 좋아했다고 한다. 그 외에 전기선 정리, 전화기 수거 등 일도 했다고. 그의 젊은 시절과 2018년 야구 생활을 담은 기사 참조[15] 그나마도 원래는 300만 원(당시 프로야구 선수 최저연봉)을 제시해 때려치려던 걸 김영덕 감독이 빙그레 프런트에 강력히 항의하여 2배로 받은 것이었다. 김영덕 감독은 한화그룹이 운영하던 북일고를 사상 첫 전국대회 정상에 올린 경력으로 입지가 탄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16] 그저 그랬다기엔 적지 않은 이닝을 던지면서도 3점대 초중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구위 하나는 끝내주던 선수.[17] 8선발승으로 한희민과 팀내 최다 선발승[18] 16선발승으로 그 해 최다 선발승을 기록했고 해태 선동열과 롯데 윤학길이 15선발승으로 선발승 공동 2위[19] 아내가 운전하던 승용차가 트럭과 충돌해 일어난 사고였다. 이 사고로 한용덕 자신도 크게 다쳤고, 아들도 크게 다쳤으며, 아내는 다리 절단까지 고려할 정도로 심한 중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회복했다.[20] 당시엔 투승타타라는 말대로 승리가 에이스의 척도로 평가되던 시절이고, FIP 같은 건 도입되기도 한참 전이다. 팀의 에이스 정민철은 딱 이 시기에 리그를 호령했는데 오버패 때문에 저평가를 받고 골든글러브 하나 못 받았다.[21] 투수 혹사로 이름을 날린 강병철 감독은 한화에서도 구대성, 정민철 등 여러 혹사 사례를 남겼고, 한용덕도 그중 한 명이다.[22] 8월까지만 해도 1점대를 기록하며 당해 ERA 부문 1, 2위였던 정명원, 임창용과 함께 나란히 타이틀 경쟁을 했었고, 9월 초에는 승률 부문도 1등에 올라있었으나 막판에 추월당하고 만다.[23] 차명석과 공동 기록[24] 1998년 한용덕보다 많은 경기에 나온 투수들 중 한용덕보다 확실히 나은 성적을 찍은 임창용, 진필중의 경우 마무리 투수였고, 경기수 공동 9위를 기록한 차명석은 77.1이닝에 ERA가 4점대를 바라보고 있었다.[25] 이 당시 에피소드로 1999년 6월 3일 롯데전에서 박정태에게 연속안타 타이기록을 허용했는데, 다음 날 박정태가 또 안타를 쳐서 신기록을 수립하자 주장(투수조장) 자격으로 축하 꽃다발을 전달해야 했던 에피소드가 있었다.[26] 그나마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는 간신히 들어가서 우승 반지는 얻긴 했다.[27] 다만 이 시즌에 삼성을 상대로 4연타석 홈런을 얻어맞았다.[28] 최고 구속은 145km/h 정도였으나 한 경기에 이 정도 구속의 볼을 많이 던지지는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당시 선발 투수는 길게 던지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언급된 것 정도의 구속으로 던지다가 위기 상황에서만 저 정도의 구속으로 타자를 상대했다. 사실 선발 투수의 평균 구속이 불펜 투수보다 낮은 게 당연한 것이, 선발 투수는 많은 이닝을 소화해야 하기 위해 완급 조절이 필수적으로, 이를 위해서라도 경기 내내 강속구를 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29] 제구력도 좋았지만, 구위가 좋아 '볼이 매우 무거운 선수' 중 하나였다. 윗 기술만 따르면 한용덕은, 동 시대에 활약했던 이상군이나 주형광과 비슷한 것처럼 생각되나, 실제로는 그 당시 기준으로 강속구 투수까지는 아니어도 볼이 빠른 군에 속했다.[30] 한대화 감독 경질 이후 감독대행.[31] 준PO에서 넥센 히어로즈 상대로 패했으나 넥센이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로 최종 순위는 3위 그대로 유지.[32] 시즌 중 자진사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