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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18:16:10

박종호(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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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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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수 현재윤 선수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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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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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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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998.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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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용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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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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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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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용석
(2018~2019)
박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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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호
(2022~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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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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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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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9539D> 투수 10 이승호 · 15 구대성 · 19 정대현 · 20 정민태
21 송진우 · 30 김수경 · 39 임창용 · 35 진필중
54 임선동 · 59 박석진 · 61 손민한
포수 22 홍성흔 · 26 박경완
내야수 5 김한수 · 6 김태균 · 7 박진만
18 김동주 · 31 박종호 · 36 이승엽
외야수 1 장성호 · 8 정수근 · 9 이병규
11 김기태 · 62 박재홍
'''
감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0''' 김응용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1 강병철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81 김인식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5 주성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 역대 로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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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백송고 박종호.jpg
<colbgcolor=#3E62AC><colcolor=#fff> 백송고등학교 야구부 No.73
박종호
朴鍾皓 | Park Jong-Ho
출생 1973년 8월 25일[1] ([age(1973-08-25)]세)
서울특별시 관악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6cm, 83kg[2]
학력 구암초 - 성남중 - 성남고
포지션 2루수, 3루수[3], 유격수[4]
투타 우투양타
프로 입단 1992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LG)
소속팀 LG 트윈스 (1992~1998)
현대 유니콘스 (1998~2003)
삼성 라이온즈 (2004~2008)
LG 트윈스 (2009~2010)
지도자 LG 트윈스 2군 수비코치 (2011~2015)[5]
LG 트윈스 1군 수비코치 (2015~2018)[6]
상무 피닉스 야구단 수비코치 (2019)
롯데 자이언츠 1군 수석·수비코치 (2020~2021)[7]
롯데 자이언츠 2군 수비코치 (2021)[8]
백송고등학교 감독 (2022~)
응원가 삼성 시절: Baltimora - Tarzan Boy[9]
LG 시절: 동요 《밀과 보리가 자라네》[10][11]링크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연도별 성적5. 여담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LG 트윈스, 현대 유니콘스, 삼성 라이온즈 소속 2루수. 은퇴 후 LG 트윈스, 상무 피닉스, 롯데 자이언츠에서 코치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백송고등학교 야구부의 감독을 맡고 있다.

LG 트윈스에 지명 받아 우승 멤버이자 프랜차이즈로 활약하던 중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 되었고, 팀의 간판 스타로 활약한다. 이후 FA로 삼성 라이온즈에 이적하였고, 말년에 LG 트윈스로 돌아와 은퇴하였다.

KBO 리그의 대표적인 스위치 히터로, 스위치 히터로서 골든글러브를 수상해본 유일한 국내선수다.[12]

2. 선수 경력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2루수 부문 수상자 (1994, 2000, 2004)

2.1. LG 트윈스

파일:external/dimg.donga.com/5067517.1.jpg

서울구암초, 성남중, 성남고를 졸업한 1992년, 대학 진학 대신 고졸연고 자유계약으로 LG 트윈스에 입단하였다. 입단 때만해도 유격수였고 실제로 LG도 박종호를 유격수로 키우려고 시도했으나, 당시 감독 이광환이 박종호의 어깨가 약하다 판단하고 2루수로 전향시켰다. 그 해 시즌 종료 후 김용달 타격코치 주도로 스위치 히터 전향을 시도하였고, 1993년에 좌우타석 홈런을 치는 등 주전 2루수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스위치 히터 전향에도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원래 스위치 히터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아예 안 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때문에 스위치 히터 전향을 주장하던 김용달 타격코치와도 약간의 갈등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너를 마음껏 밀어줄 테니 한 번 바꿔서 하자. 실패하면 모든 욕은 내가 먹겠다. 너는 따라와라." 라고...하면서 스위치 히터로 전환하게 된 일화가 있다.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 중 한 명으로, 그 해 주전 2루수로 나서 타율 .260에 21도루, 56타점으로 하위타선의 해결사 역할을 하며 같은 팀 유지현과 준수한 키스톤 콤비를 이루면서 데뷔 3년차에 2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근데 생각해보면 굉장히 운이 좋은 시즌이었다. 단순히 성적만 보기에는 그다지 뛰어난 성적은 아니었기도 하고, 비슷한 시대에 박정태, 강기웅, 이명수[13] 리그에 타격이 뛰어난 2루수가 많았다 보니 박종호가 골든글러브를 받을 거라고 예상하기는 힘들었다. 근데 마침 94년도에 이 선수들이 부상으로 풀타임을 못 뛰거나 부진하는 바람에 박종호가 받은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완전한 주전 2루수로 안착하나 했는데, 이후 박종호의 LG 시절 커리어는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해 위기를 맞는다. 1995년에는 롯데 자이언츠 포수 강성우와의 충돌로 인한 손목 부상과 시즌 중 방위병 복무로 인해 1군 61경기 출장에 그쳤고, 설상가상으로 1996년 1월부터 방위병의 경기 출장이 전면 금지되면서[14] 잔여 기간 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는 바람에 1996년 한 시즌을 사실상 날렸다. 군 복무를 마친 1997년부터 다시 LG로 돌아왔지만,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고, 이는 곧 밑에 서술되어 있듯 현대 유니콘스트레이드되는 계기가 되고 만다. 거기다 그 당시 LG 내야진은 신국환, 안상준, 권용관 등 센터 내야 자원이 많았기 때문에 방위 복무와 부상으로 고전했던 박종호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15]

2.2. 현대 유니콘스

1998년 7월 31일, 좌완투수 최창호를 상대로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된다. 이는 LG 트윈스의 트레이드 흑역사 가운데 하나로 뽑힌다. 박종호는 현대 이적 이후 주전 2루수 자리를 꿰차고[16] 이후 현대의 주전 2루수로 자리잡으면서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를 3개나 더 챙기며 현대 왕조의 핵심 멤버가 됐지만, 30대 중반에 접어들어 이미 노쇠화가 온 최창호는 LG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파일:현박종호.jpg
파일:박박.jpg

현대 유니콘스로 이적한 후에는 유격수 박진만과 호흡을 맞춰 류중일 - 강기웅 키스톤 콤비 이래 박진만 - 박종호라는 최강의 키스톤 콤비가 탄생되었다.[17] 이후 현대에서 3번이나 우승을 맛보게 된다.[18]

이후 현대에 있던 박종호-박진만 키스톤 콤비는 삼성에서도 이어지나 이후에는 그의 노쇠화와 잔부상이 찾아오면서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기존의 박진만의 파트너였던 박종호의 자리에는 김재걸이 땜빵으로 메워 주다가 2007년부터 신명철이 대신하게 되었다.

트레이드 첫 해인 1998년에는 타율 .229, 2홈런에 그쳤지만 그래도 팀이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며[19] 이적 반 시즌 만에 우승 반지를 하나 더 추가했다. 이듬해인 1999년, 3루수와 2루수를 오가며 타율 .301, 10홈런, 13도루를 기록하면서 생애 첫 3할+두 자릿 수 홈런을 기록하면서 이듬해의 대활약을 암시하는 성적을 냈다. 이 해의 10홈런은 2000년과 더불어 둘 뿐인 박종호의 두 자리수 홈런. 이 해에 골든글러브를 탔으면 홍현우도 하지 못한 2루와 3루에서 모두 골글을 탄 유일무이한 선수가 될 수 있었으나 경쟁자들이 .321의 타율에 22홈런을 때려낸 김동주와 .303에 24도루를 기록, 한화의 우승을 이끈 강석천 등으로 쟁쟁했고, 결국 .340의 타율을 기록하며 커리어하이를 찍은 김한수가 타갔다. 여담으로 이 해 박종호가 맞은 사구는 무려 31개로, 종전 기록이던 공필성의 기록을 경신했다. [20]

현대 시절에는 김재박 감독이 좋아했던 작전형 2번타자로 1번 리드오프 전준호의 뒤를 받쳐주는 역할을 했다. 전준호가 안타치고 도루하면 박종호가 번트를 대거나 진루타를 만들어주는 식. 그만큼 잘 쳤고 본인의 작전수행능력도 뛰어났다.[21]

2000년 소속 팀이 역대 최강팀으로 불리울 때는 미묘하게도 성이 같은 박경완, 박재홍, 박진만과 같이 역사상 최강의 골글 센터라인[22]을 구성하였고, 특히 121경기 .340의 타율로 타격왕[23]에 올랐으며[24] 59경기 연속 출루 기록도 세웠다.[25] 한 가지 흠이라면 한국시리즈에서의 실책.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9회 초 병살성 타구를 최고 수준의 수비를 보여주던 박종호가 실책을 2개 연속으로 저지른 것이다. 이로 인해 현대는 3연승 내리 달린 후 3연패를 하면서 사지에 몰리지만 7차전의 톰 퀸란의 활약으로 역대 최강 팀의 이름에 걸맞게 한국시리즈까지 제패했으니 박종호에게 다행이라면 다행. 참고로 7차전에서 박종호는 지명타자로 출전했고, 현대의 창단 첫 우승이자 핵심 멤버였던 노장 이명수가 2루를 맡았다.

그리고 그해 시드니 올림픽에 국가대표에 선발되면서 대표팀의 주전 2루수를 맡으며 같이 출전한 팀 동료 박재홍과 함께 맹활약했다.[26] 허나 2001년 전 해의 활약이 무색하게 .241로 규정 타석 꼴찌행.[27] 무려 1할이나 떨어졌다. 물론 전 해 멤버들이 거의 예외없이 00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진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우승만을 보고 달린 작년의 후유증으로 볼 수도 있었으나, 어찌됐건 팀의 정규 시즌 2위 달성에 힘을 보탰다. 2002년과 2003년에는[28] 조금씩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팀의 3번째 우승을 이끌었다.[29]

2.3. 삼성 라이온즈

파일:삼성 라이온즈 시절의 박종호.jpg

2003년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었다. 박종호는 애초 현대 유니콘스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시장에 나가지 않고 잔류할 생각이었지만 현대 구단의 재정난, 그리고 같은 해 FA 자격을 취득한 팀 선배 이숭용과의 대우 문제로 인해 결별하게 된다. 당시 현대는 모기업이던 현대전자의 자금난 이후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던지라 내부 FA 단속하기에도 힘에 부치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이숭용과 박종호가 FA로 풀렸는데 현대 구단은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주장이었던 이숭용을 내부 FA 협상의 우선순위 대상자로 낙점하고[30] 상호 면담 후 계약을 했다. 이숭용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자 현대 구단의 자금 사정에는 박종호의 제안까지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고 더구나 박종호의 기량에 노쇠화가 올 것이라 판단하여 박종호와 현대의 협상은 최종 결렬, 그렇게 현대와의 인연은 끝났다.

현대와의 협상 결렬 후 FA 시장으로 나왔고, 삼성 라이온즈와 협상을 벌여 4년 총 22억에 계약한다. 사실 여기에도 사연이 하나 더 있는데, 박종호에게는 삼성 외에 타 구단의 오퍼가 거의 없었고[31] 결국 삼성으로 가게 된다. 사실 삼성은 당초 두산 베어스에서 FA로 풀린 정수근을 영입하려고 했으나[32] 정수근이 롯데로 이적하자 사실상 보상심리 차원으로 FA 시장에 남아 있던 박종호와 계약을 하게 된다.[33] 박종호는 개인적으로 삼성 이적을 매우 반겼는데 어린 시절 삼성 라이온즈 어린이 회원이었다고 한다. 현대에서는 박종호의 보상 선수로 노병오를 지명했으나 정작 노병오는 부상의 여파로 인해 2군에서도 불만 지르다가 은퇴하게 된다. 여담으로 박종호와 노병오는 2020년 롯데에서 코치 신분으로 만나게 되었다.
파일:32경기 연속 안타를 달성한 박종호.jpg
<colbgcolor=#0047ab><colcolor=#fff> 32경기 연속 안타를 달성한 박종호
파일:34경기 연속 안타 아시아 신기록을 달성한 박종호.jpg
34경기 연속 안타 한국 신기록을 달성한 박종호
39경기 연속안타 기록을 세운 박종호

히스토리 23 박종호, '39G 연속안타' 亞 신기록의 전설
삼성 이적 첫 해인 2004년에는 2003년 후반기부터 이어온 연속 안타 기록을[34] 그대로 이어가는 등 꾸준히 활약을 하였으며, 39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35] 이 때는 삼성이 박종호의 연속 안타 이벤트를 열었을 정도.[36][37] 이 39경기 연속 안타 기록은 10년 후인 2014년에 KBO가 비 더 레전드라는 일종의 게임으로 쓰이게 된다. 2004년에도 작년과 비슷한 성적을 찍었다. 수비에서는 괜찮았고 골든글러브도 4년만에 탈환하였다.

그러나 두산과의 2004년 플레이오프에서 큰 부상을 당한 것을 기점으로 이후 2005년부터 잦은 부상에 시달리면서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2007년 1할대의 타율에 그치고 시즌 초부터 부상으로 이탈한 뒤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거기에 당시 선동열의 야구 스타일인 기동력 야구에 맞지 않았던 그는 강영식[38]과 트레이드 된 신명철이 영입되면서 출전 비중이 줄어들었고, 2008 시즌 도중 한화에서 건너온 용병 제이콥 크루즈와 함께 웨이버 공시되어 사실상 은퇴에 몰렸지만, 2008 시즌 후 친정 팀 LG 트윈스 감독으로 있던 옛 스승 김재박[39]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받게 되었다.

2.4. LG 트윈스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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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시즌을 앞두고 LG 트윈스와 계약하며 11년 만에 친정팀 LG로 복귀했다. 2009년에는 타격에서 괜찮은 성적을 올리긴 했지만 노쇠화는 숨길 수가 없어 좁은 수비범위가 문제시되었다.[40]

이후에 김재박 대신 박종훈이 2010년에 감독으로 오고 박경수가 2루수로 전향하면서 주전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2010년 5월 27일에 은퇴를 선언했다. 2010년 9월 26일 잠실 삼성전에서 은퇴식을 열었으나 그 날 LG는 차우찬의 완투 쇼에 막혀 패했다.

3.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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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를 선언하자마자 2군 야수 인스트럭터로 LG 구단에서 임명하여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2군 수비코치를 맡고 있다가 2015년 6월 15일 서용빈과 함께 1군으로 올라왔다.

2016년 들어서는 과감한 수비 시프트를 선보이고 있다. 결과는 나름대로 성공하는 편. 다만, 시간이 갈수록 이 수비 시프트로 인해 평범한 땅볼타구가 외야로 빠져나가고, 평범한 플라이나 단타성 타구가 장타로 둔갑되어 실점이 크게 올라간다는 단점도 있다.

하지만 2018년에 들어선 기본적인 수비에서조차 잔실수가 많아지고 또 실책수가 증가함에 따라 슬슬 까이고 있다. 결국 시즌 종료 후인 2018년 10월 19일 새 단장으로 차명석 해설이 임명됨과 동시에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2019년 한 해 동안 상무 피닉스 야구단의 수비코치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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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28일 롯데 자이언츠에 새로 부임한 허문회 감독을 보좌할 롯데의 수석코치를 맡게 되었다.[41] # 동시에 1군 수비코치도 겸직한다.

팬들의 평가는 나름 괜찮은 편. 당겨치는 타자들에 대해서는 3루수 한동희가 1-2루간에 위치하는 극단적인 시프트를 사용하며 재미를 보는 경우가 많은 등 시프트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편이라는 평을 듣는다. 감독이 각종 발언들로 어그로를 끌던 것과 달리 박종호 수석코치는 별 탈이 없었다는 후문.

2021 시즌이 끝나자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고 2021년 11월 1일 백송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이 나왔다.

4. 연도별 성적

역대 성적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2 LG 45 73 .192 14 0 1 1 7 10 0 8 .260 .272
1993 91 316 .263 83 15 4 6 33 42 8 33 .392 .331
1994 105 335 .260 87 14 6
(1위)
6 56 59 21 58 .391 .366
1995 61 207 .251 52 5 3 0 22 26 12 28 .304 .331
1996 군복무(공익근무요원)
1997 65 160 .219 35 4 2 0 11 16 2 29 .269 .337
<rowcolor=#fab93d>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8 LG / 현대 103 218 .229 50 8 2 2 18 38 8 45 .312 .358
1999 현대 119 396 .301 119 29 4 10 55 79 13 59 .470 .388
2000 121 441 .340
(1위)
150 30 3 10 48 89 9 73 .490 .428
(2위)
2001 123 456 .241 110 12 3 9 65 67 5 64 .340 .331
2002 108 402 .266 107 15 2 7 53 58 4 36 .366 .326
2003 131 502 .293 147 26 4 6 61 90 6 65 .396 .371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4 삼성 132 514 .282 145 25 0 8 59 78 7 56 .377 .350
2005 119 392 .268 105 21 0 4 36 63 5 64 .352 .368
2006 104 273 .238 65 13 0 1 30 22 3 37 .297 .325
2007 17 27 .185 5 3 0 0 4 0 0 1 .296 .214
2008 33 82 .232 19 2 0 0 5 8 0 9 .256 .304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9 LG 62 161 .267 43 5 1 1 11 16 0 23 .329 .357
2010 1군 미출장
KBO 통산
(17시즌)
1539 4955 .270 1336 227 35 71 584 761 103 686 .373 .356

5. 여담

6. 관련 문서


[1] 음력 1973년 7월 27일.[2] 네이버 프로필 기준[3] 현대 유니콘스 이적 초기에는 이명수가 주전 2루수였기 때문에 3루수로 나섰다.[4] 신인 시절에도 유격수로 몇 경기 출장했고 실제로 LG도 유지현이 입단하기 전까지는 유격수로 키우려고 시도했다. 현대로 트레이드된 초기에도 박진만이 프로 2~4년차때 타격의 부진을 겪어서 자주 대타로 갈렸는데 그땐 박종호의 포지션을 유격수로 옮겼다.[5] ~6월 14일[6] 6월 15일~[7] ~5월 10일[8] 5월 11일~[9]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박종호~ ×4[10] LG의 박종호! LG의 박종호! 안타 한방 날려줘요 LG의 박종호! 랄라랄라 랄라 랄라랄라랄라 랄라랄라랄라랄라 LG의 박종호![11] 이 응원가는 박종호의 은퇴 후 김태완이 물려받는다. 김태완의 삼성 이적 후에는 물려받은 선수가 없으며 사실상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12] 외국인 선수로는 펠릭스 호세멜 로하스 주니어가 있다. 이 중 로하스는 정규리그 MVP도 수상하였다.[13] 각각 '92, '93, '95 골든글러브 수상자이기도 하다.[14] 1995년까지만 해도 방위병은 홈 경기에 한해 출장이 가능했다. 실제로 90년대 프로야구 대표 스타였던 양준혁, 이종범, 김기태도 이렇게 경기에 출장한 바 있다.[15] 그러나 셋 다 기대치만큼 못 터져서 결국 시즌이 끝날 때쯤 주전 2루수는 이종열이었다. 이후 2003년 박경수를 거액을 들여 데려오는 등 온갖 노력을 다 했지만 박경수도 미완의 유망주로 남아버렸고, 결과적으로는 손주인이 오기 전까지 LG의 2루는 15년 넘게 구멍이나 다름없었다. 중간에 유지현을 2루수로 보냈지만 이건 부상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이뤄진 포지션 변동이었다. 박종호가 떠나기 전에 해태에서 1억 5천만원 주고 영입한 안상준은 99년 반짝 활약하고 거품이 빠져 두산으로 트레이드되었으며 신국환도 97년에 잠깐 반짝했을 뿐, 주전은 커녕 백업을 전전하다가 한화로 트레이드 되었다. 그나마 권용관이 꾸준하게 선수 생활을 하였으나 주 포지션이 유격수이기도 하였고, 어디까지나 수비형 내야수라 공격에서는 멘도사 라인 근처에서 노는 수준이었다.[16] 박종호가 오기 전까지 삼청태현의 2루수 자리는 매우 오랫동안 구멍에 가까웠다. 삼미 시절에는 3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받았던 정구선이 있었지만 이후에는 이렇다 할 2루수가 나타나지 않았다. 오죽하면 태평양으로 넘어와서까지 이 문제가 아킬레스 건으로 지적됐을 정도였는데 이 때 이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영입했던 선수가 염경엽, 이근엽 등이었는데 공격력에서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고 말았다. 박종호 이전에는 OB에서 방출된 이명수도 데려왔지만 30대 중반으로, 나이가 많기는 매한가지였고 결국 태평양에서 에이스 노릇까지 했지만 전성기가 지난 최창호를 내주고 박종호를 데려온 뒤에야 오랜 구멍을 메우게 된다.[17] 원래는 기존의 2루수 이명수가 따로 있어 1999년까지만 해도 박종호는 2루와 3루를 번갈아 봤고, 후에 철벽수비와 한방을 자랑하던 톰 퀸란이 오고 김경기가 SK로 이적, 이명수가 1루로 가면서 2루수로 완전히 안착했다.[18] 1994년 LG 시절과 2005년, 2006년 삼성에서의 우승을 포함한다면 총 6회의 우승을 경험했다. 같은 팀에서 뛰었던 키스톤 콤비 박진만과 타이 기록. 단 박진만은 SK에서는 우승을 못했지만 박종호는 가는 팀마다 우승을 했다는 점에서 더 무섭다. 박종호 말에 따르면 별개로 우승 보너스는 적었다고 한다.[19] 다만 박종호 본인은 5차전 8회 1사 만루 역전 찬스에서 병살타를 쳐 찬스를 날려버리는 등 한국시리즈에서는 부진했다.[20] 우연의 일치로 당시 박종호는 등번호 31번을 달고 있었다.[21] 그래서 타격왕 출신임에도 통산 번트가 215개로 상당히 많아 전체 3위에 위치해있다. 2위는 같은 팀에 있던 전준호로 216개. 사실 전준호는 통산 2000경기 넘게 선수생활을 하면서 216개의 번트를 댄거고, 박종호는 그보다 못 미치는 1500경기를 뛰면서 번트를 댄거니 실질적으로는 박종호가 번트를 더 많이 댔다고 볼 수 있다.[22] 또는 밀레니엄 4박이라고 불렀다.[23] 역대 최초 스위치 히터 타격왕. 그리고 타격왕에 오르는 타자는 그 해 우승을 못한다는 징크스를 완벽하게 깼다.[24] 여담으로 이당시 최다안타 타이틀 홀더도 같은 스위치 히터인 두산의 장원진이 따냈다. 다만 이쪽은 LG 이병규와 공동 수상.[25] 이 기록은 이듬해 펠릭스 호세가 63경기 연속 출루 기록을 세우며 경신했다.[26] 다만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된 현대 소속 투수들 정민태, 임선동, 김수경은 모두 부진했다.[27] 직전 년도 타격왕이 당해 타격 꼴찌를 한 기록은 당연히 지금까지 유일하다. 큰 부상 없이 이러기도 힘들다...[28] 2002년 0.266, 2003년 0.293[29] 현대의 자율 훈련에 본인도 너무 만족한 나머지 훈련을 제때 하지않고 노는 것에 정신없었다고... 박동희 칼럼 참고[30] 게다가 이숭용을 빼면 마땅한 주전 1루수 감이 없었다. 당시 전근표는 2할 5푼 치는 수준이었고 강병식은 수비가 별로인데다가 한 술 더 떠서 1할대를 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숭용은 1루수 말고도 외야수로도 출장이 가능했으니 향후 심정수의 이적을 대비할 명분이라도 있었다. 반면 2루수는 박종호가 실력이 가장 우위에 있어 주전이었지만 타격이 별로였어도 채종국, 서한규, 김일경, 김민우등 대체자원이 많았다.[31] 그나마 롯데 자이언츠가 오퍼를 하긴 했는데 그냥 전화 한 통 오고 끝난 수준이었다고 한다.[32] 당시 삼성에는 젊은 리드오프 박한이가 있었으나 박한이와 함께 외야의 한 축을 맡아줄 선수가 필요했는데 정수근이 그 대안으로 선택됐다.[33] 2003년 당시 삼성에는 준수한 2루수로 재일 한국인 출신 고지행이 있었지만 박종호의 영입으로 인해 한순간에 자리를 잃고 말았다. 여기에 2004년 초 노장진과 원정 숙소를 무단이탈하는 등 사생활 문제에 잡음을 보이며 삼성 구단에 단단히 찍혔고 2군에만 박혀 있다가 결국 방출당한다.[34] 2003년 8월 29일 수원 두산전~2004년 4월 21일 수원 현대전.[35] 종전 국내 기록은 1999년 박정태의 31경기 연속 안타, 아시아 기록은 1979년 히로시마의 다카하시 요시히코의 33경기 연속 안타. 다만 박종호의 기록은 2년 연속으로 이어진 것이기 때문에 아시아 신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한 시즌 연속안타 신기록은 여전히 박정태가 가지고 있다.[36] 하지만 나중에 밝혀진 결과,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걸리고 링거 주사를 맞고 진통제를 먹으면서 경기에 출장했다고 한다.[37] 2004년 4월 18일 대구 홈경기에서 두산 선발 게리 레스에게 1~3번째 타석에서 범타로 막히며 37연속경기 안타기록 달성 실패 위기에 몰렸고 4번째 타석에서도 평범한 플라이볼을 날렸으나 좌익수가 잡지 않아 안타로 기록되면서 기록행진을 이어 나갔다. 마운드에 있던 레스가 화를 냈던 건 덤.[38] 당시 강영식도 선동열과 맞지 않던 선수였다.[39] 당시 현대 유니콘스 감독.[40] 6월 2일과 3일, 잠실에서 한화에 연이틀 11:10으로 질 때 박종호의 좁은 수비 범위가 실점의 빌미로 작용했고 이 때문에 2군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이미 35세의 나이로 2루수를 볼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던 상황이었다.[41] 박종호와 허문회는 1994년부터 1998년까지 LG 트윈스에서 같이 한솥밥을 먹었던 바 있다. 정황상 이 때의 인연으로 영입된 듯.[42] 다만 당시 현대 감독이던 김재박의 밀어주기도 있었다. 12경기에 일부로 출전시키지 않은 데다가 SK의 틸슨 브리또와 막판까지 타격왕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시즌 막판 SK와의 더블헤더에서 박종호를 고의적으로 출장시키지 않은 것도 모자라 브리또에게 빈볼을 지시하기까지 했다. 이에 화가 난 브리또는 "더러워서 타격왕 안해먹고 만다"라고 한 뒤# 마지막 1경기를 출장하지 않고 출국해 버렸다. 그리고 김재박은 9년 뒤인 2009년에도 또 한 번 이 짓을 했다.[43] 2000년 .340 2001년 .241[44] 그 싸움 잘하기로 악명높은 강병규조차도 만만히 보지 않았다고 했다. 참고로 박종호가 야구를 하게 된 계기도 강병규랑 상당히 친해서라고. 강병규가 야구를 하는 것을 보고 하게 된 것이다. 헌데 과거 박종호의 인터뷰를 보면 강병규에게 엄청 맞아가면서 배웠다는 언급을 한적도 있다.[45] 결국 7차전에서 박종호는 지명타자로 출장했고, 베테랑 이명수가 2루수를 봤다.[46] 세 팀 이상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해 본 선수는 박종호와 심정수(OB, 현대, 삼성), 최훈재(LG, 해태, 두산), 허도환(SK, kt, LG) 네 명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