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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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장진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1992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MVP |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
2002 |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
2002 |
{{{#ffffff [[빙그레 이글스|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28번}}} | ||||
김대중 (1989~1992) | → | 노장진 (1993) | → | 신재웅 (1995~2003) |
{{{#ffffff [[한화 이글스|한화 이글스]] 등번호 30번}}} | ||||
김일혁 (1992~1993) | → | 노장진 (1997~1998) | → | 예상효 (1999~2000)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4번 | ||||
성준 (1986~1998) | → | 노장진 (1999) | → | 프랑코 (2000)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8번 | ||||
변대수 (1997~1999) | → | 노장진 (2000~2004.7.12.) | → | 박석진 (2004.7.13.~2004) |
{{{#ffffff [[롯데 자이언츠|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39번}}} | ||||
박석진 (1997.6.27.~2004.7.12.) | → | 노장진 (2004.7.13.~2004) | → | 이왕기 (2005~2006) |
{{{#ffffff [[롯데 자이언츠|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18번}}} | ||||
박현승 (1999~2004) | → | 노장진 (2005~2006) | → | 옥기윤 (2007) |
A대표팀 참가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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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진 盧長震 | Jang-Jin Noh | |
출생 | 1974년 8월 10일 ([age(1974-08-10)]세) |
충청남도 공주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공주고등학교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93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빙그레) |
소속팀 | 빙그레-한화 이글스 (1993, 1997~1998) 삼성 라이온즈 (1999~2004) 롯데 자이언츠 (2004~2006) |
지도자 | 세한대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신정중학교 야구부 코치 |
병역 | 현역 (1994~1996) [1] |
가족 | 부인 김태백[2],아들 노학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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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KBO 리그 선수. 현역 시절 등번호는 28번 - 14번 - 18번.임선동과 함께 프로야구계의 풍운아로 더 유명한데, 그 사람 좋다는 류중일이 노장진의 행패를 보다 못해 손을 댄 적도 있었다. 자세한건 류중일의 기타 문단 참고.
박찬호의 공주고등학교 1년 후배이다.
2. 선수 경력
2.1. 빙그레-한화 이글스 시절
그의 프로 데뷔이자 빙그레 이글스의 마지막 해였던 1993년 시즌[3]의 모습. (출처 : 포토로) |
임의탈퇴 이후 4년만에 다시 돌아온 한화 이글스의 현역 선수 시절 (출처 : 포토로)[4] |
공주고등학교 3학년 재학 시절인 1992년 청룡기 결승전에서 선린상고를 상대로 승리투수(4:0 승), 그것도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여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5] 이듬해인 1993년 1월 원광대학교 합숙훈련 도중 뛰쳐나와 계약금 4천만원의 조건으로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한 것도 이러한 활약에 따른 기대를 반영했던 것이었다.
1993년 빙그레 이글스에서 데뷔하여 그 해 100이닝 3승 10패 평균자책점 4.41로 공주고 시절보다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6]
하지만 놀기 좋아하는 성격과 지속적으로 선수단을 이탈하는 등 불성실한 생활 태도로 인해 1994년 초 임의탈퇴 공시되었고, 현역으로 입대하여 유격 조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군 복무를 마친 1997년 임의탈퇴가 해제되어 한화 이글스에 복귀했지만 이 시즌 35경기(선발 22경기) 출장하여 133⅓이닝 동안 6승 10패 평균자책점 5.47로 그리 나은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고, 1998년 역시 35경기(선발 26경기) 출장하여 149⅓이닝 동안 7승 10패 평균자책점 5.24를 기록, 터질 듯 터지지 않는 유망주의 전철을 밟다 결국 트레이드로 고향 팀 한화를 떠나게 되었다.
여담으로 노장진 트레이드는 현장에서 반대했음에도 프런트의 독단으로 이루어졌다. 이남헌 사장이 최익성을 좋아해서 현장의 반대를 물리치고 강행한 것. 당시엔 프런트의 힘이 강했던지라[7] 이희수 감독은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애를 왜 트레이드시키냐고 반발했지만 막지 못했다.[8]
2.2. 삼성 라이온즈 시절
(출처 : 포토로) |
1998년 11월 14일 부로 노장진은 최익성과 박태순[9]과 트레이드가 되면서 삼성 라이온즈로 오게 되었고 여기에서 프로 생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1999시즌 33경기(선발 30경기) 출장하여 188⅓이닝 소화하면서 15승 9패 평균자책점 4.35를 기록했다. 1999시즌은 KBO리그 사상 극심한 타고투저의 해였음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삼성의 선발 에이스로 쏠쏠히 활약하며 잠재력을 대폭발, 한화 시절 사고뭉치 만년 유망주 이미지를 벗어나며 환골탈태하였고, 1999년의 노장진은 그야말로 구위 더 좋은 우완 차우찬. 사사구로 주자는 열심히 쌓지만 구위의 힘으로 실점은 최소화하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당시 삼성은 이승엽, 찰스 스미스, 김기태 셋이 합쳐서 122홈런을 치는 클린업 트리오를 보유하고 있었고, 1루 이승엽 - 2루 정경배 - 3루 김한수 - 유격 김태균으로 구성된 철벽 내야진이 있었기에 118사사구라는 기록 속에서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2000시즌 역시 전업 선발로써 28경기(선발 25경기) 출장하여 138⅓이닝 동안 11승 8패 평균자책점 4.29로 솔리드한 토종 선발로 삼성 선발 마운드를 지키다가, 2001시즌 초반에는 이제껏 누적된 혹사로 개점휴업하며 재활을 한 후 5월 말부터 1군에 제대로 합류했다. 해당 시즌도 선발로 마운드를 책임지긴 했으나, 이전 두 시즌 처럼 전업 선발이라기 보다는 스윙맨 역할도 간간히 해내면서 22경기(선발 15경기) 출장하여 85⅔이닝 소화하면서 7승 2패 1세이브 1홀드 평균자책점 4.62를 기록했다.
한편, 임창용이 2001년 선발로 전향한 후 2002년 역시 선발로 고정되면서 2001시즌 임시로 마무리를 맡긴 것 치고는 선방했던 김진웅을 당초 계속해서 마무리 투수로 쓰려 했으나, 2001 한국시리즈에서 심상치 않은 부진투를 결국 완벽히 극복하지 못하고 시즌 3번째 등판부터[10] 마무리로 상당히 어려운 모습을 보이자 구위가 그래도 제일 좋았던 노장진을 마무리로 임시 투입하면서 안정감을 찾았고, 이후 시즌 내내 마무리로 자리잡으면서, 63경기에 출장해 127⅓이닝 11승 4패 23세이브 평균자책점 2.54로 활약하였고,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멤버와 삼성 라이온즈의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로 활약하며 프로 데뷔 처음이자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았다.
그러나 2002년 중무리 투수로 2천구 투구라는 무지막지한 혹사를 당했던 탓인지[11], 이듬해인 2003년에는 9승 10패 21세이브 평균자책점 4.12로 구원투수로 시즌 10패를 찍는 등 전년도에 비해 상당히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12][13] 결국 마무리에서 부진을 보이자, 이듬해 임창용에게 마무리 자리를 넘겨주고 다시 선발로 전향하게 된다.
그러나 마무리에서 선발로 전환하였던 2004년에는 시즌 초부터 다시 잡음에 휘말렸다. 그 해 4월 7일 고지행과 함께 음주 사건으로 원정 숙소에서 무단이탈하여 크게 물의를 빚었다. 김응용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밤새 술 마시고 새벽 6시에 들어오다가 산책 중이던 김응용 감독에게 걸렸다고 한다. 당시 자체벌금 300만 원으로 비공개로 결정했는데, 노장진이 1주일 동안 무단이탈하면서 기자들도 알게 되어 파문이 커졌다고 한다. 그때 신인시절의 안지만도 옆에 있었는데 다행히 도망가서 징계를 면했다고 스스로 박명환야구TV에서 밝혔다.
결국 또 무단이탈이 원인이 되어 2004년 7월 12일 김승관과 함께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어 삼성과의 마지막을 좋지 못하게 끝내고 말았다. 이 때 그와 같이 이탈하였던 고지행은 2004 시즌 후 방출당했고 한화 이글스로 갔다. 그의 트레이드 상대는 김대익과 박석진이었다. 여러가지로 보면, 양쪽 모두 손해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다.[14][15][16]
2.3. 롯데 자이언츠 시절
말년을 보냈던 롯데 자이언츠의 현역 선수시절
트레이드 이후엔 잠시나마 정신차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롯데의 쏠쏠한 마무리로 활약한다. 팀 창단 이래 현재까지도 마무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롯데는 그가 활약했던 2004년 말~2005년 초까지 잠시나마 마무리 걱정을 잊을 수 있었다. 김사율과 손승락 이전에 롯데에서 가장 뛰어났던 마무리 투수. 그러나 2005년 시즌 도중에 부인이 사망했고[17] 2006년 시즌 개막 전 윤학길 당시 롯데 자이언츠 투수코치에게 문자 메시지를 남긴 후 또 다시 팀을 무단이탈하여 징계를 받고 복귀했다. 2006 시즌을 마치고 FA를 선언했으나 그가 무단이탈한 전력 등 강하게 이미지가 남은 사생활 문제 때문에 롯데를 포함하여 다른 팀들과 계약하지 못해 FA 미아가 되어 은퇴하고 만다.[18][19]
3. 은퇴 후
빙그레 입단 시절 한솥밥을 먹은 바 있는 장정순 세한대학교 감독의 부름을 받아 세한대 투수코치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장정순 감독이 청주고 감독으로 옮길 때 따라가지 않았다. 2016년에는 부산에서 노장진의 야구교실을 운영했다가, 한때 야구 외에 거제도 조선소인 삼성중공업 사내 협력사 공구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지금은 부산 신정중학교 야구부 코치로 야구인으로서의 인생을 다시 살고 있는 중이다.[20]4. 플레이 스타일
묵직한 패스트볼을 던지는 파워피처였다. 평균 140km/h 중반대, 최고 153km/h의 엄청난 속구를 던졌다. 슬라이더도 준수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내구성도 대단해서 사생활 문제, 현역 군복무 등 기량이 떨어질 만한 사태가 계속 벌어졌음에도 강제 은퇴 직전까지도 140km/h대의 패스트볼을 계속 뿌려대었고 수술도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다. 물론 선수 생활 말기에 제구력이 많이 떨어진 모습을 보였는데 훈련 부족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21]요약하자면, 오른손으로 투구하는 차우찬이라고 보면 편하다. 노장진의 프로 시절 첫 번째 팀인 한화 이글스와 전성기를 보낸 삼성 라이온즈 모두 홈 구장이 타자 친화적이었지만 강속구와 강력한 구위를 앞세워 전성기 시절엔 리그 상위권 투수로 활약해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병역특례를 받았고(2002 부산 아시안게임) 차우찬 역시 강속구와 강력한 구위라는 장점을 살려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병역특례를 받았다.[22]
5. 기타
- 사생활 문제로 말썽이 많았던 선수로 이와 같은 일이 없었으면 흑역사가 아니라 한 시대를 풍미한 투수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로라는 건 결국 자기 관리와 절제가 필요한 것이라 결국 그 사적 문제를 참지 못하고 잦은 무단이탈을 한 것이 결국 그 재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잡음 많았던 선수로 기억된 것이다. 이 문서에서도 노장진의 투구 이야기보단 사생활로 인한 무단이탈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오는 걸 보면...
- 덕장의 대표주자인 류중일이 야구 인생을 통틀어 체벌을 한 딱 세 명 중 한 명이다. 노감독 김응용 앞에서 쓰레기통을 걷어차는 등 팀케미를 해치는 난동을 피운 덕에 분노한 류중일이 직접 나서서 체벌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FA 미아로 은퇴하는 등 선수 생활 결말도 좋지 못했다.
- FA 미아로 은퇴한 뒤인 2008년에는 어느 팀과 계약을 앞두고 있다, 롯데와 계약한 뒤 싸인 앤 트레이드가 이뤄질 것이다라는 복귀설이 돈 적 있었다. 실제로 FA 미아 신세가 된 2007년 이후에도 틈틈이 사직 야구장을 찾아 관중석에서 롯데 홈 경기를 보고 가는 게 목격됐던 데다 2008년 초 롯데 선수단이 개최하는 임수혁 돕기 일일호프에 모습을 드러냈다 보니 여차저차 복귀설이 나온 듯 하다. 물론 이후 롯데 측에서 노장진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보도를 내면서 흐지부지됐다.
- 2011년 1월 24일 200km/h로 광란의 폭주를 한 혐의로 입건되었다.
- 야갤 등에서 불리는 별명은 노잦이다. 은퇴 후 한 번씩 언급될 때마다 역시 불린다.
- KIA 타이거즈 투수 김진우가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무단이탈 사건을 터뜨렸을 당시, 노장진과 함께 술을 마시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이야기가 돌며 후배를 버려놨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이는 루머로, 김진우와 안면이 있긴 하지만 두어번 정도 만난 게 전부라고 한다. 여담으로 이 둘을 소개시켜준 사람이 전 LG, 기아 투수였던 장문석.
- 아들인 노학준도 야구선수다. 2016년 새로 창단한 물금고등학교 야구부에 진학해 외야수 겸 투수로 뛰었다. 경주중학교를 나왔기에 NC 다이노스의 2019년 1차 지명 대상은 아니었으며, 결국 KBO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되지 못하고 질롱 코리아 창단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대학도 못 붙은 듯. 질롱 코리아에서 나쁘지 않은 활약을 하자 메이저리그 팀의 러브콜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나왔지만 이것이 정말로 관심이 있어서인지 단순한 립서비스일 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교 졸업 예정 선수들의 육성선수 입단이 막힌데다가 뒤늦게 대학으로 발을 돌린다고 해도 하위권 대학이나 2년제 대학 정도만 가능할 것으로 보이기에 그나마 가능한 선택지는 국내 독립리그행 아니면 마이너리그행 정도다. 결국 연천 미라클을 거쳐, 2019년 8월 29일 NC 다이노스 육성선수로 입단했으나 2020시즌 정규시즌 종료 직후 방출되었다.
- 은퇴 후에도 사직 야구장에 가끔 모습을 비추거나, 부산에서 야구교실 운영 및 신정중학교 야구부 코치로 일하는데다 2020년 이후에도 부산지역 사회인야구 리그에서 뛴다는 제보가 있는 걸 봐서는 여전히 부산광역시에 거주하는 듯 하다.
- 박명환야구TV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름이다. 나오는 게스트들이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보니 더 그렇다. 강병철 감독한테 찍혀 호주에서 이탈한 노장진 찾으러 다닌 정수근이나, 아예 노장진과 술친구였던 오상민, 노장진한테 억지로 어울려 다니다가 운좋게 빠져나간 안지만 등등. 박명환도 신인 때 노장진한테 붙잡혀 강제로 술자리에 합석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인지 일부 시청자들은 노장진이 한번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해 줬으면 하는 의견을 보이고 있다.
-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한 동갑내기 오상민에 의하면 삼성에서 같이 뛰던 시절 잦은 무단이탈로 인해 코칭스태프들에게 맞은 벌금 액수만 상당하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2004년 초 새벽 내내 술마시고 들어오던 중 김응용 감독에게 걸린 뒤 무단이탈한 것 말고도 알려지지 않은 이탈이 꽤 많은 듯 하다. 앞선 2001년 초에도 선수단을 무단이탈했다가 팀 내 징계를 받았다는 기사가 재발굴되기도 했다.
- 동갑내기 농구 출신인 서장훈과 닮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6. 연도별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93 | 빙그레 | 26 | 100 | 3 | 10 | 3 | - | 0.231 | 4.41 | 88 | 4 | 62 | 93 | 57 | 49 | 1.47 |
1994 | 임의탈퇴 및 군복무(유격 조교) | |||||||||||||||
1995 | ||||||||||||||||
1996 | ||||||||||||||||
1997 | 한화 | 35 | 133⅓ | 6 | 10 | 0 | - | 0.375 | 5.47 | 124 | 21 (2위) | 91 | 81 | 84 (5위) | 81 (공동 3위) | 1.60 |
1998 | 35 | 149⅓ | 7 | 10 | 0 | - | 0.412 | 5.24 | 150 | 20 (공동 2위) | 84 | 104 | 91 (3위) | 87 (공동 2위) | 1.55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99 | 삼성 | 33 | 188⅓ (5위) | 15 (5위) | 9 | 0 | - | 0.625 | 4.35 | 180 | 17 | 116 | 173 (4위) | 100 (5위) | 91 (5위) | 1.50 |
2000 | 28 | 138⅓ | 11 | 8 | 0 | 0 | 0.579 | 4.29 | 142 | 15 | 89 | 103 | 72 | 66 | 1.65 | |
2001 | 22 | 85⅔ | 7 | 2 | 1 | 1 | 0.778 | 4.62 | 88 | 10 | 67 | 57 | 47 | 44 | 1.74 | |
2002 | 63 | 127⅓ | 11 | 4 | 23 (3위) | 1 | 0.688 | 2.54 | 98 | 15 | 54 | 146 | 38 | 36 | 1.19 | |
2003 | 53 | 83 | 9 | 10 | 21 (4위) | 1 | 0.474 | 4.12 | 73 | 8 | 53 | 87 | 40 | 38 | 1.46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04 | 삼성 / 롯데 | 34 | 46 | 1 | 0 | 17 (4위) | 1 | 1.000 | 4.11 | 51 | 7 | 30 | 55 | 22 | 21 | 1.72 |
2005 | 롯데 | 35 | 33 | 1 | 2 | 18 (4위) | 0 | 0.333 | 2.45 | 19 | 3 | 9 | 52 | 9 | 9 | 0.79 |
2006 | 42 | 48⅓ | 3 | 4 | 6 | 5 | 0.429 | 4.66 | 44 | 5 | 39 | 32 | 25 | 25 | 1.66 | |
KBO 통산 (11시즌) | 406 | 1132⅔ | 74 | 70 | 89 | 9 | 0.514 | 4.35 | 1057 | 125 | 694 | 983 | 585 | 547 | 1.51 |
완투, 완봉기록 | ||
연도 | 완투 | 완봉 |
1993년 | 1완투 | 0완봉 |
1998년 | 1완투 | 0완봉 |
1999년 | 2완투 | 1완봉 |
2000년 | 1완투 | 0완봉 |
KBO 통산 | 5완투 | 1완봉 |
7. 관련 문서
[1] #[2] 1974년생으로 2005년에 세상을 떠났다.[3] 같은 해에 이글스의 레전드 구대성도 데뷔를 했다.[4] 보다 보면 문성주가 조금 보인다.[5] 공주고의 전국대회 3회 우승 중 유일한 청룡기 우승이다. 1977년과 2013년에는 대통령배를 제패했다.[6] 이 해는 리그 역사에 남을 투고타저 시즌이기에 ERA+는 75.3이긴 하나, FIP+는 114.8로 수비 도움을 유독 못받은 시즌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100이닝 동안 57실점을 하긴 했어도 자책점이 49점인 것을 보면 수비 불운도 따랐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스탯티즈에서 제공하는 WAR도 클래식 스탯에 비해서는 제법 높은 1.10으로 고교 시절의 임팩트에 비해서는 못했을 지라도 향후 충분히 프로에서 먹힐 것으로 기대되던 유망주였다.[7] 당장 강병철 감독 중도해임이 바로 그해 일이었다.[8]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이희수 감독은 최익성이 준수한 활약을 보였음에도 그의 역할을 대타 혹은 2군에만 박아두는 것으로 제한하며 최익성의 선수 생활이 꼬이는 원인을 제공했다.[9] 1996년 드래프트 2차 1라운드 투수, 당시 1군 통산 성적은 1승 3패.[10] 놀랍게도 시즌 두번째 등판까지는 작년 정규시즌 때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더니, 때아닌 그 유명한 02롯데 타선에게 ⅔이닝 5실점의 믿기 힘든 투구내용을 보인 뒤 급격히 무너지면서 4월 한 때 평균자책점이 19.29까지 치솟기도 했다.[11] 2002년 등판 일자별 기록을 보면 마무리 투수가 4이닝 이상 던진 경기만 6경기였으며 심지어 시즌 초반에는 한 번 선발로 등판하여 4⅓이닝을 던진 적도 있고, 7월 7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한화전의 경우 DH 2차전 4:4로 비기고 있던 4회 1사 1루 상황에서 김진웅을 구원하여 아예 5⅔이닝 4피안타 1실점이라는 사실상 선발투수 급의 투구 내용을 보인 적도 있다. 더 엽기적인 것은 7월 7일 경기 직후 31경기 등판하여 63이닝(!)을 소화해 구단 마무리 중 최다이닝을 소화하고 있는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놀라운 스탯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8월 말까지 시즌 평균자책점은 무려 1.99를 마크했었고, 무려 12경기에서 2승 1패 8세이브를 올린 9월이 마무리 되었을 때 시즌 평균자책점은 2.20이었다. 다만 너무 지친 나머지 10월에 3경기 동안 8⅔이닝 소화하면서 7실점을 해버리는 탓에 시즌 최종 평균자책점은 2.54였다. 그러나 이 시즌 노장진은 연투 속에서도 최고 152km/h의 돌직구를 뿌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팀의 마무리로써 대활약했다.[12] 이러한 부진은 아무리 젊은 나이였다지만 관리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굴린 당시의 시대상이 원인이었다. 심지어 시즌 내내 부진했다기 보다도 전반기까지는 전년도 못지않게 제법 준수한 편이었다가 7월 이후부터 기어코 퍼지면서 이닝 소화력도 급감했고 구위마저 떨어지면서 사달이 나버린 것이다.[13] 당장 전반기도 다 소화하지 않은 6월 17일 기준으로 24경기 44⅓이닝을 던지며 웬만한 마무리 투수에 비해 많은 이닝을 소화 중이었고, 8월 13일 한화전에서는 옆구리 부상을 안고 있던 상태에서 경기가 연장까지 이어지는 바람에 무려 3⅓이닝 71구를 던졌고 실책으로 패전 투수가 되기도 했다.[14] 박석진은 2006년 다시 롯데로 돌아갔고, 김대익 역시 2007년에 은퇴했다. 노장진은 2006년 FA미아가 되어서, 김승관은 리빌딩 차원에서 2007년 방출됐다.[15] 엄밀히 따지면 노장진이 무단이탈만 하지 않았다면 양 팀 모두 단기적으로 괜찮았다. 고질적으로 마무리 투수가 안 좋았던 롯데는 묵직한 구위파 마무리 노장진이 불펜의 중심을 잡아주었고 2005년 박석진은 삼성의 불펜에 뎁스를 더해주었으며 김대익은 2005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맹활약을 한다. 오히려 선수의 고질적이던 야구 외 사생활 문제로 롯데가 손해를 본 형국이고 삼성의 손해는 없었다. 그리고 이 트레이드는 노장진이 사고만 안 쳤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다. 관리만 하며 등판시키면 언제나 든든한 주전 마무리가 가능하며 제구력 기복은 있어도 혹사에도 불구하고 강속구 구사가 언제든 가능한 투수를 혹사 후유증으로 인한 장기간 부상에서 회복한지 얼마 안 되며 몇 년 더 활약할지 의심이 제기될 투수와 성장세에 한계를 뚜렷하게 드러낸 30대의 외야수와 바꿀 팀은 없다. 노장진의 남다른 사고경력이 이런 트레이드를 가능하게 했을 뿐이다.[16] 다만 시즌 성적이 아닌 한국 시리즈까지 확대하면 삼성이 압도적으로 이득이었다. 박석진이 트레이드된 해에 병풍사건으로 필승조가 대거 이탈한 삼성의 불펜진을 받쳐준데 이어 2005년 한국시리즈에서도 활약했고, 김대익은 백업으로 출장하다 2005년 한국시리즈에서 팀이 1점차로 지고 있을때 홈런을 날리며 삼성의 우승에 기여했다. 마지막 우승은 92년에, 99년 이래로 한국시리즈도 못가본 롯데에 비하면 차라리 박석진-김대익이 힘을 보태서 05년 우승을 차지한 삼성이 훨씬 더 나았던 셈.[17] 향년 31세, 부부싸움 이후 부인이 음독하여 병원 입원 치료 중 사망했다. 그러나 음독 이전 부부싸움에서의 폭력의 강도에 대한 의문도 있으며, 이는 KBO 홈페이지에 부인 김씨의 가족을 주장하는 자의 글에서 비롯된 것이다.[18] 당시 롯데측에서는 FA신청을 말렸으나, 본인이 강력하게 신청을 했고 결국은 어느팀에도 지명받지 못했다.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SK에서 원한다는 썰이 있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19] 당시 롯데는 2005년 4년 연속 최하위에서 중위권으로 도약한 팀성적에 고무되어 연봉을 후히 책정하는 등 전향적 행보를 보였으나 시즌 초반 노장진의 일탈로 인한 주전 마무리 공백이라는 전력공백 뿐 아니라 당시 상기 주에 있는 글로 인해 팀 분위기 저하가 심각했다. 때문에 대다수의 야구팬들은 2006년 시즌 무단이탈 기간 중 밸런스가 안 잡혀 제구는 불안해도 그 와중 패스트볼 구위는 살아있었던 노장진이라 선수 본인이 FA를 선언한다고 해도 체계적 훈련을 받고서 다음해 제대로 활약해 FA를 기약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기에 노장진이 본인의 신체능력을 믿고 FA 재수를 할 거라고 예상했고 노장진 본인의 고과가 절대 좋지 못하게 만들 큰 사고를 친 시즌이 종료된 직후 FA를 선언할 것이라고는 거의 상상하지 못했다.[20] 신정중학교 감독이 전 롯데 투수 박지철이다.[21] 단 밑의 통산 성적을 보면 알겠지만 제구가 그렇게 좋은 선수는 아니었다. 선수 생활 초반과 후반의 방황을 감안하더라도, 좋지 않은 제구력을 구위로 버티는 투수인 차우찬보다 적은 이닝을 소화했음에도 볼넷은 더 많이 내줬다.[22] 다만, 국대 차출 횟수는 차우찬이 압도적으로 많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