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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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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환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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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83 1986 1987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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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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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인한 한국시리즈 미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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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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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찬안치홍[5] 양현종 나지완 김선빈 나성범
[1]: 김일권 이후 장기간 주장직 폐지 출처
[2]: 이종범의 부진으로 인한 주장 교체
[3]: 마무리 캠프 직전 조범현 감독의 지시로 인한 주장 교체
[4]: 스프링 캠프 후 주장 교체
[5]: 2019년 5월 15일, 김주찬의 재활과 부진으로 인한 주장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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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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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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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992)
신용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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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한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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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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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대행
김우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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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김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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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999)
감독 대행
김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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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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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0번
팀 창단 김준환
(1982~1989)
이광우
(1990~1991)
SK 와이번스 등번호 77번
팀 창단 김준환
(2000)
이충순
(2001)
}}} ||
파일:김준환 2022716.jpg
김준환
金準桓 | Kim Jun-hwan
출생 1955년 5월 9일 ([age(1955-05-09)]세)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1]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전주동초등학교 (졸업)
군산남중학교 (졸업)
군산상업고등학교 (졸업)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소속팀 상업은행 야구단 (1973~1975, 1979~1981)
해태 타이거즈 (1982~1989)
지도자 해태 타이거즈 플레잉코치 (1988~1989)
쌍방울 레이더스 1군 타격코치 (1990~1992, 1994~1999)[2][3]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대행 (1999)[4]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2000)[5]
SK 와이번스 1군 수석코치 (2000)[6]
SK 와이번스 감독대행 (2000)[7]
SK 와이번스 1군 수석코치 (2000)[8]
원광대학교 야구부 감독 (2003~2016)
전주고등학교 야구부 타격 인스트럭터 (2018~2019)
병역 육군 경리단 (1976~1978)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여담5. 연도별 성적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해태 타이거즈의 우투우타 외야수.

동기인 김봉연, 후배인 김일권, 김성한과 함께 초기 해태를 이끈 군산상고 야구부 출신의 스타 플레이어로 KBO 리그 원년에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던 선수. 원년 이후로는 성적에 기복이 있긴했지만 준수한 활약을 해주었으며, 정규시즌에선 부진했던 1987년엔 한국시리즈에서 활약하며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남성적인 외모로 80년대 KBO 리그의 대표적인 미남 선수로 꼽히며, 대표적인 애처가 야구선수로도 꼽혀왔다.

은퇴 직후엔 고향팀인 쌍방울 레이더스가 창단하였고, 부름을 받아 지도자로 오랜기간 몸담았으며 감독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9] 이후 원광대학교 야구부에서 감독을 역임하고 정년퇴임했다.[10]

2. 선수 경력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82)
1972년 군산상고의 극적인 제26회 황금사자기 결승전 대역전극의 주인공 중 한 명이 김준환이었다. 당시 김봉연, 김일권 등과 함께 결승전에서 1-4 3점차로 뒤지던 경기를 9회말에 4점을 뽑으면서 역전할 때 주역이었다. 1사 만루에서 1번 김일권이 몸에 맞는 공으로 1타점, 2번 양기탁이 2타점 중전안타, 그리고 3번 김준환이 끝내기 역전 좌전안타를 쳤다.

고교 시절에는 말썽도 많이 부렸다고 한다. 당시 술먹고 싸우다가 걸려서 혼났다고. 그런데 당시 감독인 최관수씨가 "너희를 잘못 가르쳐서 일어난 일이니, 나를 때려라." 라고 한 말에 정신을 차리고 야구에 전념했다고 한다.[11]

김봉연과 함께 연세대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김봉연만 입학하고 본인은 1973년부터 상업은행에서 8년 동안 실업팀 선수로서 활약하다가 해태 타이거즈 창단 당시에 창단 멤버로 합류했다. [12] 원래 포지션은 2루수였지만, 그 시점에서는 외야수로 전향한 상태였다. 그러나 수비 위치와 상관없이 이미 타격에 있어서는 궤도에 오른 선수였다. 초기 해태의 김씨 핵타선(김일권-김성한-김봉연-김준환-김종모)의 한 축이었다. 1982년 프로 원년시즌 그는 김봉연에 이어 백인천과 더불어 홈런 공동 2위에 오른다.[13] 나머지 시즌은 성적이 아주 돋보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1985년을 제외하면 다소 평범한 수준.

특히 1987년은 완전히 실패한 시즌이었다. 아내의 갑작스러운 중병으로 간호를 하면서 시즌을 치르다 보니 결국 타율 0.204로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14] 이때 그의 나이는 33세로, 당시 기준으로는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던 시즌. 그러나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 3차전과 4차전에서 잇따라 역전 홈런을 쳐내면서 맹활약, 정규시즌에서의 부진을 완전히 만회하며 1987년 한국시리즈 MVP에 오른다. 역대 KBO 단일 한국시리즈 OPS 1위 기록은 덤. (타/출/장 .500/.625/1.083 OPS 1.708)[15][16]

그 뒤 1988~1989년 해태에서 플레잉코치로 선수 생활을 더 하다가[17] 고향인 전라북도에 생기는 쌍방울 레이더스에 합류한다.[18][19] 선수로서 뛴 것은 아니고 플레잉코치로 첫 해 전지훈련에 합류했다가 그 뒤 그대로 코치로 남게 된다.

3. 지도자 경력

파일:/image/295/2010/01/10/2.jpg
쌍방울 감독대행 시절

새롭게 창단한 고향팀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주로 타격코치를 담당하면서 팀에 계속 있게 되었다. 워낙 프런트와 코치진, 코치진 내부의 갈등이 심해 자주 코치진이 바뀌는 쌍방울이었지만 창단 당시부터 있었던 선수단 구성원 중 전라북도 출신으로는 가장 유명했던 스타였기에[20] 그 와중에서도 팀에 꾸준히 남을 수 있었다. 신용균 감독 시기에 잠깐 나갔다가 한동화로 감독으로 교체되면서 다시 복귀했고, 김성근 감독 체제에서도 여전히 타격코치를 맡았다.

1999 시즌 이미 주전 선수를 다 팔아먹은[21] 쌍방울 수뇌부는 자존심이라고 성적 부진의 책임을 물어 7월 15일에 김성근 감독을 중도 해임하고 감독대행으로 김준환을 앉혔다.[22] 그러나 이미 쌍방울은 쇠락하는 팀이었기에 쉽게 바뀌기는 어려웠다. 11승 38패를 기록했으며 해도 해도 안 되는 전력으로 분투하며 승과 패를 반복하지만 결국 시즌 말기 전력이 완전히 동이 남으로써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두번째 최다 연패인 17연패로 내몰렸다. 그나마 시즌 마지막 경기는 승리함으로써 18연패는 피하고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

시즌이 끝난 1999년 10월 23일부로 쌍방울 레이더스의 5대 감독으로 정식 임명된다.[23] 그러나 2000년 1월부로 쌍방울은 해체라는 비운을 맞고, 그 해 3월 3일 쌍방울의 선수들을 주축으로 신생팀 SK 와이번스가 창단된다. 일단 쌍방울 선수단과 함께 김준환 감독을 비롯한 쌍방울의 코칭스태프도 SK로 넘어왔다. 이 때 고용승계 형식으로 보직을 모두 유지하는 조건 하에 SK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면 정식으로 게임을 치뤘겠지만 당시 쌍방울과의 연계를 강하게 부정하며 흔적 지우기에 열심이던 SK는 김준환에게 지휘봉을 맡기지 않고, 2000년 3월 20일, 창단 감독으로 강병철한화 이글스 감독을[24] 선임하면서 감독이 되지 못하고 대신 수석코치로 발령이 났다. 그래서 한국프로야구 감독 중에 유일하게 정식으로 임명되고서도 게임을 치르지 못한 감독이 되었다.

한편 이 때 SK 구단 측의 대응이 상당히 미숙했는데 창단 감독으로 강병철을 선임하는 과정이 너무 늦어지다 보니 김준환 수석코치를 비롯한 쌍방울에서 넘어온 코칭스태프와 강병철 감독을 비롯한 외부 출신 코칭스태프가 2000년 한 시즌 동안 불편한 동거를 해야만 했다. 결국 시즌이 끝난 2000년 10월 19일부로 SK가 쌍방울의 색을 지우기 위해 대거 선수들을 방출하고, 코치진 역시 과거 쌍방울에서 넘어온 코치진 대다수에게 재계약 불가 통보를 내리며 그도 한 시즌만에 팀을 떠났다.[25] 더군다나 해임 통보를 받기 전 SK 구단에서 김준환 수석코치를 구단 사장 험담을 했다는 누명을 씌워서 잘라버렸고, 수석코치직에서 경질되면서 현장 복귀가 어려울 것임을 예상했다고 한다.[26] 그래도 강병철 감독이 6월 즈음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 코치진에 선임되어 준비하는 과정에서 잠시 팀을 비운 동안 감독대행을 몇 경기 동안 맡기도 했다.[27]

그 뒤 한동안 야인으로 있다가 2003년 말 원광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아 2005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 우승, 2006년 전국종합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 2006년과 2008년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 2010년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 우승, 2013년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하계리그 우승을 거뒀고, 2016년까지 지휘한 뒤 손동일 코치[28]에게 감독직을 이양하고 정년퇴임으로 물러났다.

원광대학교 감독 퇴임 후 아마추어 경기의 경기감독관으로 활동함과 동시에 SPOTV에서 퓨처스리그 해설을 맡았다. 또 전주고등학교 야구부의 인스트럭터를 맡는 등 고향인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야구계 재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원광대 야구부에 2,700만원 상당의 야구장 외야펜스와 배팅케이지를 기증했다.

4. 여담

5.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해태 80 306 .301 92 13 3 19 45 50 10 22 .549 .347
1983 90 326 .248 81 5 1 10 43 35 11 30 .362 .308
1984 91 307 .267 82 10 0 6 29 29 5 23 .358 .314
1985 99 336 .301 101 20 0 5 38 45 7 31 .405 .355
1986 42 84 .274 23 0 0 4 15 11 2 8 .417 .326
1987 63 167 .204 34 7 0 2 23 17 2 15 .281 .265
1988 100 314 .293 92 11 1 11 48 41 3 30 .439 .348
1989 103 330 .252 83 10 2 4 44 27 1 29 .330 .310
KBO 통산
(8시즌)
668 2170 .271 588 76 7 61 285 255 41 188 .330 .310

6. 관련 문서


[분류:외야수
[1] 초등학교 5학년 시기에 전라북도 전주시이사했다고 한다.[2] ~1999년 7월 15일[3] 1992년 시즌 후 당시 쌍방울 감독이던 김인식의 해임 때 같이 해임되어 1년간 야인으로 있다가 1994년에 다시 복귀했다.[4] 7월 16일~[5] 1999년 7월 15일부터 잔여 시즌 동안 쌍방울의 감독대행을 맡고 시즌 종료 후 정식 감독으로 승격됐으나, 2000년 1월 구단이 해체되면서 감독으로서 한 경기도 지휘해보지 못했다. 한 경기도 지휘해보지 못했고 취소선이 쳐져 있지만 해체 당시 감독은 김준환이었으므로 정식 감독이 맞다. 이후 쌍방울의 선수단을 인수해 재창단된 SK가 강병철을 초대 감독으로 임명하면서 감독을 하지 못하고 수석 코치로 계약했다.[6] ~6월 26일[7] 6월 27일~7월 1일[8] 7월 2일~[9] 다만 선임 직후 그동안 지속되어 온 모기업의 재정 악화로 결국 선수단이 SK로 승계되고, SK에선 새로 감독을 선임하고 싶어하여 감독으로 활동하진 못하였다.[10] 후임 감독으로는 손동일 코치가 감독으로 승격했다.[11] 실제로 감독이라 못 때리겠다고 하면, 때릴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스승이 자기를 때리라고 하니 진짜 때린 삼성의 스타 포수도 있긴 한데...[12] 상업은행에서 뛰던 도중 육군에 입대하여 육군 경리단 야구부에서도 뛰었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봉연이 술회하길 프로야구 출범을 앞두고 김봉연과 김준환이 장충단공원 포장마차에서 술을 기울이면서 '프로야구에 합류할 것인가, 아니면 실업야구에 남을 것인가?' 같이 고민하다가 '그래 프로야구 한 번 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고 한다.[13]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봉연이 덧붙이길 백인천이 한국프로야구 개막 전 인터뷰에서 홈런-타점-타율 타격 3관왕을 차지하겠다고 선언하자 김성한을 불러 3관왕을 저지하자고 했고 결국 백인천은 타격왕, 김봉연은 홈런왕, 김성한은 타점왕을 각각 차지했다고 했다.[14] 혈소판 감소증이었으며 비장을 절제하였다. 지금도 꾸준히 관리하고 있지만 다행히 건강을 되찾았다고 한다. 김준환은 집, 아내가 입원한 전남대학교병원, 야구장을 왔다갔다 하느라 제대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15] 2위는 2010년 SK의 최정, 3위는 2015년 두산의 정수빈.[16] 1987년 한국시리즈는 해태가 유일하게 우승 트로피를 광주광역시 홈경기에서 들어올린 시리즈다. 나머지 한국시리즈는 중립경기 개최지인 잠실 야구장 또는 원정경기에서 모두 마무리지었다.[17] 말이 플레잉코치이지 300타수 이상을 넘겼으며 특히 88년 2할9푼에 11홈런(...)을 때렸다.[18] 해태 선수단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넘어 온 전북 출신 스타였다. 군산상고가 배출한 불세출의 슈퍼스타들이 해태에 많았지만 김준환을 빼면 모두 쌍방울로 넘어올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 위에 언급된 김씨 타선 5명 중에 광주상고 출신인 김종모를 빼면 모두 군산상고 출신이었는데 김일권은 1988년 초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됐고 김성한은 이 당시 해태 타선의 핵심 멤버였으며 김봉연은 은퇴 후 해태에서 코치를 맡고 있었다. 그나마 상황이 자유로웠던 김준환이 해태를 떠나 고향팀에 오게 됐다.[19] 해태 시절 수석코치인 김인식과 투수코치였던 임신근도 같이 옮겨갔다. 김인식은 쌍방울 초대 감독이 됐고 임신근은 수석코치로 갔다.[20] 쌍방울의 창단식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면 선수단 소개 때 가장 많은 환호를 받은 사람이 김준환이었다. 전북 출신이었고 쌍방울 이전의 전북 연고팀이던 해태 타이거즈 시절에 출중한 활약을 펼쳤기에 쌍방울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았던 스타였다.[21] 조규제박경완현대 유니콘스로, 김기태김현욱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됐다. 선수 4명을 부자 구단에 넘기는 조건으로 쌍방울이 받은 현금 총액은 32억원이었다.[22]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준환은 이 당시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는 말만 하고 사건의 내막은 이 자리에서 밝힐 수 없다고 했다. 다만 김성근 감독의 심판 폭행사건이 터진 시기를 감안하면 이 사건이 김성근 감독 경질의 원인에 가깝다.[23] 이 과정에서 함학수가 수석코치, 박철우이건열이 타격코치로 합류했다.[24] 1998 시즌 중에 한화 감독직에서 경질된 강병철은 1999년 한 해를 쉬다가 SK 와이번스가 창단되면서 창단 감독으로 취임했다.[25] 같이 쌍방울에 몸 담았던 함학수, 박상열, 김성현, 박철우, 이건열 코치는 전부 재계약에 실패했고 그 빈 자리는 이충순, 백기성, 성준, 최계훈, 양승관 코치와 은퇴한 김성래가 새 코치로 기용되었다.[26] 억울했는지 구단 사장에게 가서 따졌을 정도였다고.[27] 이 때 시드니 대표팀 감독은 해태 시절 인연이 있던 김응용이었다.[28] 1994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던 선수이다. 등번호가 8번이었고, 입단 당시에는 잠깐 ‘작은 거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적이 있었다. 이후에는 활약이 미미하여 외야수 백업을 전전하다가 1998시즌 이후 방출된다.[29] 김준환, 김성한, 조충렬이 주인공이다. 김성한이 술회하기를 호랑이와의 눈싸움은 동계훈련이 아니었고 취재기자들의 요청으로 선수들을 광주 사직동물원으로 데리고 간 다음 눈싸움 장면을 연출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