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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01:38:50

송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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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식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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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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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2년
이름 송창식
분야 가수
보관문화훈장(3등급)

파일:KMAlogoblack1.jpg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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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송창식
宋昌植 | Song Chang Sik
파일:송창식 선생님.jpg
<colbgcolor=#fff> 출생 1947년 2월 22일[1] ([age(1947-02-22)]세)
경기도 인천부 신흥정
(現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
거주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싱어송라이터
소속 트윈폴리오 (1967 – 1969)
본관 진천 송씨(鎭川 宋氏)[2]
데뷔 1968년 트윈폴리오
서명
파일:송창식 선생님 싸인.png
링크 파일:다음 카페 아이콘.png 파일:티스토리 아이콘.svg 파일:네이버 블로그 아이콘.svg[3]파일:유튜브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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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0> 신체 164cm
학력 인천신흥국민학교 (졸업)
인천중학교 (졸업)
서울예술고등학교 (성악과 / 졸업[4])
가족관계 아버지 전혁림
아내 한성숙
딸 송무늬
장남 송결
차남 송빛터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방위병)
별명 기인(奇人)
}}}}}}}}} ||

1. 개요2. 생애3. 위대함과 천재성4. 활동
4.1. 방송4.2. 인터뷰
5. 수상6. 이야깃거리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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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997B7B3A5AA3B6DB20.png
파일:송창식 앨범.jpg
▲ 젊은 시절의 그의 모습이 담긴 앨범
포크를 대중화한 영원한 가객
엠넷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

대한민국가수, 싱어송라이터이다.

한국적 정서를 살린 음악과 개성 있는 가창력으로 인기를 모았다. 전성기 시절 엄청난 퀄리티의 시대를 앞서간 곡들을 뽑아 냈는데, 매우 많은 그의 노래들 대부분이 송창식 본인의 작사, 작곡이다. 당시 60~90년대 한국 가요사에서 단 한 명의 천재를 꼽는다면 작사, 작곡은 '송창식'이라고 말할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은근히 서로 자존심이 센 세시봉 멤버들조차 송창식의 천재성은 입을모아 칭송할정도.

대중에게 어필하는 호소력이나 심미성과 작품성 모두를 만족시키고, 시적인 감수성을 담아낸 품격있는 가사와 가락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작곡가이며, 더불어 빼어난 가창력을 가진 가수다. 듣는 음악에서 보고 듣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중요시되는 음악으로 변모한 현대음악에서도, 한 시대를 풍미한 가객으로서만 남지 않고 한국 가요사에 굵은 획을 그은 천재로 남을 가수이자 예술가다.

2. 생애

1947년 2월 22일, 경기도 인천부 신흥동(現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에서 경찰공무원이었던 아버지 송영숙(宋泳璹, 1922. 6. 17 ~ 1951)과 어머니 안동 김씨(1928. 8. 10 ~ )[5]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백령도로 출전했던 아버지가 전사하고, 9살 되던 1955년에는 행상을 다니던 어머니 안동 김씨도 가출해 행방불명된 뒤 조부 송태진(宋台鎭, 1901. 6. 7 ~ 1969. 11. 22), 조모 밀양 박씨(1915. 4. 29 ~ 1995)[6] 슬하에서 불우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인천신흥국민학교와 인천중학교를 거쳐 서울예술고등학교 성악과에 수석 입학하였다.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던지, 인천중학교 재학 때 "남들도 날 모차르트라고 불렀고, 나도 스스로 모차르트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때에는 경기음악콩쿠르 성악부문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공부도 잘 해 늘 우등생 집단에 속했지만, 그는 음악에 인생 목표를 정하고 제물포고등학교를 가라는 집안 어른들의 말[7]을 거역한 채, 서울예고 성악과에 입학하게 된다. 군경 유자녀 장학금과 심부름 아르바이트로 학업을 겨우 이어가긴 했으나, 지독한 가난으로 인해 실기시험을 치르지 못해 결국 유급 통지서를 받아 그는 학교를 중도에 포기하기로 하고, 결국 1년을 다닌 후 중퇴하였다. 서류상으로는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전몰 상이군경 자녀는 퇴학시킬 수 없는 법령이 시행 중에 있어 서울예고에서 서류상으로만 특별히 졸업 처리해 준 것이라고 한다. 서울예고 동창으로는 금난새가 있다. 금난새가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음악에 정말 천재였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가난해서 매일 수돗물로 배를 채우던 기억이 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친구가 바로 송창식.

EBS 《싱어즈-시대와 함께 울고 웃다》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우리 어른들 말씀을 들어보면 내가 어렸을 때 나를 잃어버리면 어디 소리 나는 곳을 찾아보면 내가 있었다. 라디오 방이라든지 약 장사들이 들고 다니는 음악책을 펼쳐 보니까 콩나물 대가리들이 있었는데 음정 이름들이 쓰여 있었다. 가사로 부르는 게 너무 지루하니까 그걸로 부르다 음계를 알았다"라고 말했다.

8~9살 때 곡을 쓸 줄 알게 되면서 주변으로부터 '모차르트'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알렸다. "사람들이 모차르트라고 했다. 나는 모차르트가 누구인지도 몰랐는데. 그래서 내가 모차르트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모차르트가 누군지 알고 나니까 엄청난 사람이었다"라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예술고교 성악과에 진학했지만 가난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포기한 게 아니라 포기시킨 거다. 왜냐하면 낙제됐으니까. 나는 선생님이 없어 실기시험을 못 봐 0점을 받았다. 그때는 죽을 만큼 괴로웠는데" 라고 말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세시봉 출신으로 1970-80년대 포크송계를 주름잡았던 가수로 윤형주와 함께 듀엣 트윈폴리오로 데뷔했다가 윤형주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1970년에 솔로로 전향했다. 금전 관리가 철저했고 사업수완이 있었던 윤형주는 많은 재산을 축적해 재산가가 된 반면에[8] 사람이 너무 좋아서 보증도 서 주고 돈도 꿔 달라는 대로 꿔 주던 송창식은 많은 재산을 잃었다. 물론, 송창식이 돈을 잘 벌던 시절에 알랑대며 돈을 꿔 간 사람들 중 제대로 갚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빈털터리인 것은 아니며,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저작권료로만 매해 7,500만원의 고정 수입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냥 쓸 만큼 있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이라 그 시절 돈을 꿔가고 보증을 서준 사람들을 원망하는 것도 없다고 한다. 윤형주와는 트윈 폴리오를 하기 전 부터 절친한 사이였고 지금까지도 그 관계는 이어지고 있다.

예전에 세시봉 멤버들이 나와서 토크할 때 송창식의 가난하던 시절을 회상하는 부분에서는 찢어지게 가난한 것을 넘어서 달랑 기타 하나를 들고 노숙하면서 지내고 노래 불러주면서 밥을 얻어먹고 이 집에서 며칠 저 집에서 며칠 하는 식으로 생활했을 정도로 매우 가난했다고 한다.

이후 방황하다가 어느날 AFKN 흑인 아마추어들이 블루스 경연대회를 보고 크게 충격받는다. 아마추어라고 비웃다가 자신보다 월등한 실력을 보고 20년간 음악을 해왔는데 아마추어만도 못한실력이였다고 눈물을 흘리며 절망했다. 이후 그는 피나는 연습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더욱 갈고 닦아 클래식 창법으로 대중가요계에 등장한 조영남을 만나면서 가수로 데뷔했다. 이후 세시봉과 오비스 캐빈에서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 김민기, 양희은 등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을 만났고 특히 윤형주와 트윈폴리오를 하면서 재능이 만개했다.

3. 위대함과 천재성

음악평론가 강헌이 말하길, 가왕 조용필의 맞은편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단 한 명의 가수라 부를 수 있겠다고 했다. 수많은 히트곡과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며 그것을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맑고도 힘 있는 가창력으로 양희은, 어니언스 등과 함께 1970년대 한국 포크락을 주도한 한국 가요사에 남을 위대한 가수다. 세시봉-청개구리로 대표되는 초창기 포크음악에서, 싱어로는 아마추어를 완벽히 탈피했다는 평을 받는다.

송창식 특유의 감성과 노래 가사에 나타나는 주인공 행동을 연상케 하는 독특한 애드립부터 클래식 전공자답게 엄청난 성량까지 지닌 대단한 가창력의 소유자이다. 원래는 정확한 음정, 발음을 구사하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부르는 미성이었는데, 트윈폴리오 끝무렵부터 창법이 변하였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가사를 발음하는 것이 아니라 어울리는 소리를 내고 여기에 가사를 맞추는' 것이라 하며, 특유의 웅얼거리는 느낌이 완성되었다.

대충 부르는 듯 하지만 절대로 따라부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창법이 특징이다. 마치 해탈한 도인이 너털웃음을 짓는 듯 한 가창을 하는데, 다른 사람이 따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흉내만 내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다. 아닌게 아니라 음악으로 득도한 천재라고 할 수 있다. 막말도 잘 하고 노래에 자부심이 상당한 조영남도 노래에 대해 전혀 태클을 걸지 못했다 할 정도다. 실제 윤형주에게는 염소 목소리 같다고 가수를 하지 말라고 디스를 한 적이 있지만, 송창식을 향해서는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단 한번도 디스한 적이 없다. 놀러와 세시봉 특집에 출연했을 당시 조영남의 증언에 따르면 노숙자도 아니고, 아주 남루한 사람이 다 뜯어진 기타를 가지고 들어와서는 클래식 가곡을 환상적으로 소화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윤형주는 경기고 출신 연세대 의대생[9]의 엘리트 이미지라면, 송창식은 서민적인 이미지로 대변된다. 윤형주가 미성과 수백곡의 CM송을 작곡한 데서 알 수 있듯 대중친화적인 작곡 능력을 바탕으로 '팝(popular)' 음악을 선보였다면. 송창식은 유니크한 톤의 보컬과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작곡을 통해 창조적인 예술세계를 담은 음악을 선보였다.

사실, 보컬로서 노래실력뿐만 아니라 기타리스트로서도 상당한 스킬을 가지고 있다. 세시봉 중에서는 독보적인 수준이고 전문가 중에서도 보컬보다 기타 실력을 더욱 부각해서 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송창식의 예술성의 깊이를 좀 더 느껴보고 싶다면, 월간 객석에서 클래식 신예 바이올리니스트인 조진주가 인터뷰(객석 2015년 8월호)한 내용이 있다. 음악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에서 그가 음악에 대해 어느 정도로 연구하고, 어떤 철학을 가지며 연습하고 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게 된다. 월간 객석은 클래식이나 연극, 무용, 뮤지컬 등 순수 공연예술을 다루는 잡지이다. 대중음악 기사도 극히 드물게 실리기는 하지만, 그 역시도 단순한 인기보다 음악사적으로 볼 때 충분한 가치를 매길 수 있는 수준의 가수들이 등장한다.

4. 활동


1967년 윤형주와 함께 트윈폴리오를 결성하여 이듬해 1968년 《트윈폴리오 1집》 앨범과 함께 하얀 손수건이라는 곡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였다. 또 이듬해 1969년 영화 《푸른 사과》의 조연을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하기도 하였다. 1971년에는 창밖에는 비 오고요를 발표하며 솔로 가수로 전향했다. 그러다가 1974년에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곡으로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다음 해인 1975년에도 한 번쯤[10], 고래사냥, 왜 불러[11]라는 곡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어 가요 부문의 여러 가지 상을 받으면서 한동안 가요계를 장악했다. 1978년 한일 문화교류협회 초청으로 일본 공연을 갖기도 했으며 또 같은 해부터 연속 3년 동안 계속해서 MBC 10대 가수상을 받았다. 이때 발표된 곡으로는 사랑이야, 토함산, 나의 기타 이야기 등이 있다. 1980년에는 가나다라로 가요에 국악을 접목하는 시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며, 1986년 발표된 참새의 하루담배가게 아가씨를 더블 타이틀로 한 앨범 이후에는 신곡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위에 언급된 곡 이외에도 상아의 노래, 내 나라 내 겨레, 밤눈, 맨 처음 고백, 딩동댕 지난 여름, 우리는 등의 히트곡이 있으며, 가위 바위 보, 병사의 향수[12], 새는[13], 푸르른 날[14] 등 명곡들이 즐비하다. 2015년 제12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다.

놀러와 세시봉 특집에 나와서 변치 않는 가창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유재석이 진심으로 감격하는 것이 보일 정도. 프로그램에서 CM송을 딱 하나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게 빙그레 투게더 (엄마, 아빠도 함께~♪) 이후에 참붕어빵도 만들었다.

항상 기타 한 대 둘러메고 평소 생활한복을 입고 밝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낙천적인 인상으로 노래한다. 그래서 왠지 기인이나 도인 같은 분위기도 풍긴다. 실제 1970년대부터 친분이 있던 조영남의 회고로는 같이 술 마시다가 뜬금없이 '형 지금 어깨에 귀신이 붙어있어' 같은 소리도 하곤 했다고. 조영남-송창식은 희한한 놈

오페라 아리아인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의 짤막한 피로. 오페라 창법이라기보다 평소 하던 송창식의 발성 그대로인데 기막히게 어울린다. 현장에서의 감탄이 괜한 것이 아니다.

4.1. 방송

4.2. 인터뷰

5. 수상

6. 이야깃거리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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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2월 2일.[2] #. 전서공파(典書公派)-현실공(玄室公) 종중-안산 문중(安山門中) 32세 식(植) 항렬.[3] 쏭아 카페[4] 서류상으로만 졸업이고 실제로는 1년 중퇴. 자세한 내용은 후술.[5] 김천손(金千孫)의 딸이다.[6] 박경병(朴敬秉)의 딸이다.[7] 당시의 제물포고등학교인천고등학교와 함께 인천 최고의 명문고로 꼽혔다.[8] 윤형주가 돈을 많이 번 이유는 CM송 때문이기도 했다. 약 1400곡을 작곡했다고.[9] 음악활동을 하느라 의예과까지만 마치고 중퇴, 나중에 경희대로 편입한다.[10] 이 곡으로 동양방송의 가요대상을 타기도 했다.[11] 고래사냥과 함께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의 OST이기도 했는데, 영화에서 장발의 청년들이 장발 단속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에서 쓰였다. 그러니까 청년들이 달아나면서 경찰들에게 "왜 불러"라고 놀리는 의도로 삽입된 것이 이 바로 노래였는데, 덕분에 당시 공권력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금지곡명단에 오른 곡이다.[12] '고향의 향수'라는 이름으로 군부대에서 비공식적으로 군가로 불리고 있다.[13] 이 곡은 송창식의 프로그레시브한 음악의 정점을 맛볼 수 있는 곡으로 후반부에 펼쳐지는 백업밴드 동방의 빛(기타의 강근식, 키보드의 이호준, 베이스의 조원익, 드럼의 유영수)의 연주도 일품이다. 유튜브에 찾아보면 두 가지 훌륭한 버전으로 존재하니 꼭 들어보자.[14] 서정주의 시에 곡을 붙였다.[15] '편지에 손수건 넣은건 우편법 위반이다.', '뭐 언덕에 올라가서 손수건 흔들고 그래. 전화 한통이면 되지.'이라고 가사를 깎아내렸다.[16] 만 1세 때 작곡한 곡이 하나 있다는데 사실은 그냥 아들 탄생 기념으로 송창식이 작곡자 부분에 자기 이름 대신 올린 것이다.[17] 한석동(韓錫東)의 딸이다.[18] 현존하는 전라북도 완주군 소재 대학 우석대학교가 아닌 고려대학교에 흡수된 서울 소재 대학이었다.[19] 2013년 KBS2 이야기 쇼 〈두드림〉 제67회, 2019년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 제178회 등을 통해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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