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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6 13:51:44

나훈아

나훈아의 주요 수상 및 설문조사 기록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동양방송 로고_White.svg 방송가요대상 대상[1]
남진
김상희
마음이 고와야지
참사랑

(1971년)
나훈아
하춘화
고향역
물새 한 마리
(1972년)
남진
하춘화
그대여 변치마오
영암 아리랑

(1973년)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2004년 한국갤럽이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보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조사 시리즈를 기획해 2004년부터 5년 주기로 발표하고 있다.
2004년
※ 200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이미자 나훈아 조용필 현철
6위 7위 8위 9위 10위
태진아 신승훈 송대관 김건모 설운도
2009년
※ 2009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장윤정 BIGBANG 태진아 이미자 소녀시대
6위 7위 8위 9위 10위
나훈아 조용필 현철
손담비
MC몽 이승철
송대관
2014년
※ 201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조용필 이선희 장윤정 아이유 태진아
6위 7위 8위 9위 10위
EXO 이승철 이미자 나훈아 소녀시대
2019년
※ 2019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방탄소년단 장윤정 나훈아 아이유 조용필
6위 7위 8위 9위 10위
이선희 태진아 이미자 이승철 김연자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이문세 홍진영 TWICE 박효신 남진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임창정 송가인 김건모 설운도 진성
같이 보기: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좋아하는 스포츠선수, 좋아하는 소설가, 좋아하는 탤런트, 좋아하는 영화배우, 좋아하는 가수, 좋아하는 노래, 좋아하는 예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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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스포츠한국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선정한다.
본 틀에는 5위까지만 기록하며 그보다 낮은 순위는 데일리 스포츠한국 선정 한국인이 좋아하는 연예인 문서에만 기재한다.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2018년~2020년
연도 클릭 시 그 해의 여론 조사 관련 링크로 이동합니다.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2018 2020
1위 유재석 (5.9%)
2위 아이유 (4.2%)
3위 방탄소년단 (2.6%)
4위 박보검 (2.0%)
5위 소지섭 (1.3%)
1위 유재석 (7.6%)
2위 아이유 (4.3%)
3위 공유 (2.7%)
4위 박보검 (1.9%)
5위 수지 (1.7%)
1위 유재석 (8.6%)
2위 방탄소년단 (3.9%)
3위 아이유 (3.5%)
4위 나훈아 (2.5%)
5위 공유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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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2021년~2023년
연도 클릭 시 그 해의 여론 조사 관련 링크로 이동합니다.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2021 2023
1위 유재석 (8.8%)
2위 아이유 (5.1%)
3위 방탄소년단 (3.3%)
4위 전지현 (2.1%)
5위 공유 (2.0%)
1위 유재석 (7.6%)
2위 아이유 (5.0%)
3위 방탄소년단 (2.3%)
3위 김혜수 (2.3%)
5위 최불암 (2.2%)
1위 유재석 (8.8%)
2위 아이유 (2.9%)
3위 방탄소년단 (1.9%)
4위 남궁민 (1.5%)
5위 임영웅 (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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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bs를 빛낸 50인 세로.png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BTS 강하늘 강형욱 강호동 고두심
공효진 김강섭[A] 김동건 김병만 김수현
김숙 김신영 김영철 김은숙 김종민
김혜수 김혜자 나문희 나영석 나훈아
노희경 문세윤 박명수 배용준 소녀시대
손범수 송은이 송중기 송해 송혜교
신구 신동엽 아이유 안국정[B] 유동근
유재석 윤석호 이경규 이금희 이병헌
이순재 이영자 임성훈 전현무 조용필
최경영 최불암 최수종 허참 황수경
한국방송공사가 공영방송 50주년을 맞이하여 선정한 50인의 인물들로, 순서는 가나다순으로 정렬하였다.

선정을 위해 KBS와 여론조사기관 칸타퍼블릭이 공동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사내외 전문가그룹 100명과 인구통계학적 분포에 따라 성별, 연령별로 구성된 KBS 국민패널 1,800여 명이 참여한 1차 설문조사로 100명의 후보군을 우선 선정하였다. 이어 3주간 KBS 공영방송 50주년 홈페이지(kbs50.kbs.co.kr)를 통해 일반 시청자들 7만여 명을 대상으로 최종 투표를 실시하였다. 시청자 투표로 선정된 최종 50인은 한국언론학회와 한국방송학회, 한국언론정보학회의 추천을 받아 미디어 학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KBS를 빛낸 50인 선정자문위원회’에서 적격성 검토를 거쳐 확정되었다.

[A]: 가요무대 음악 감독을 맡은 KBS 악단장으로, 2022년 사망하였다.
[B]: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생방송을 기획, 연출한 PD.
}}}}}}}}}
<colbgcolor=#283593><colcolor=#FFFFFF> 나훈아
羅勳兒 ㅣ Na Hoon-A
파일:나훈아선생님.jpg
본명 최홍기 (崔弘基, Choi Hongki)
출생 1947년 2월 11일 ([age(1947-02-11)]세)[2]
경상남도 부산부 초량정
(現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중로[3])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경주 최씨 (慶州 崔氏)[4]
신체 175cm[5], 71kg
가족 어머니, 사촌동생 나진기[6]
슬하 1남 1녀
학력 초량초등학교 (졸업)
대동중학교 (졸업)
서라벌예술고등학교 (졸업)
병역 대한민국 공군 병장 만기전역 (231기)[7]
데뷔 1968년 노래 《내 사랑[8]

1. 개요2. 위상 및 평가3. 나이를 둘러싼 논란4. 특징5. 대표곡6. 활동7. 라이벌 남진과의 비교8. 개인사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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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

트로트 보컬로 주로 유명세를 탔지만, 수많은 히트곡을 직접 작곡해서 히트시킨 싱어송라이터이며,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노래방 반주기에 수록된 곡이 가장 많은 가수다.

1966년에 '천리길'을 발표하며 데뷔하였다는데 데뷔년도를 빨리 올리기 위한 이야기로 추정된다. 실물 음반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가장 오래된 실물 레코딩 노래는 1968년 8월 16일 내 사랑이 확인된다. 천리길은 1969년 5월 29일 발표되었다. 2020년 KBS에서 진행한 콘서트 준비를 하며 본인이 데뷔 54년 가수 생활이라고 언급 한 것을 보아 본인은 1966년 데뷔를 확실시 하는 듯하다.

2024년 2월 27일, 2024년 4월과 7월 사이에 열리는 마지막 콘서트를 예고하며 은퇴를 시사했다. # 적어도 데뷔년도와 출생연도에는 논란이 많지만 은퇴연도는 2024년으로 확정된 셈이다.

2. 위상 및 평가

트로트의 전설적인 카리스마
'엠넷 레전드 100 아티스트'에서의 소개문구
자타공인 1970년대 한국 가요계의 아이콘이자 라이벌인 남진과 함께 한 시대를 양분했던 슈퍼스타로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상 최고의 가수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9]

히트곡만 무려 120곡이 넘어 나훈아는 히트곡의 숫자에서도 국내 최다는 물론이고, 앨범 발표수만 해도 무려 200장 이상, 800곡 이상의 자작곡을 포함해서 2,600곡 정도의 취입곡을 자랑한다. 이처럼 나훈아는 트롯의 황제, 가황(歌皇)이라는 별명이 정말 잘 어울리는 가수다.

3. 나이를 둘러싼 논란

1947년생으로 익히 알려져 있으나 어린 시절에 데뷔한 것으로 인해 험한 연예계에서 얕잡아 보일까봐 나이를 올린 것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1947년생이 아니라고 한다. 45년생인 남진도 조용필을 통해 나훈아의 나이를 전해들은 바를 이야기 한 적이 있으며 자신보다 5~6살 어리다고 했다. 1960~1970년대 LP들에서 나이를 소개할 때 1950년, 1951년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4. 특징

묵직하고 중후함이 느껴지는 저음과 특유의 절묘한 고음, 이를 활용하면서 나오는 전매특허인 꺾기로 대표되는 나훈아 특유의 창법은 가요계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으며, 수많은 가짜 나훈아를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유달리 나훈아의 노래는 가수가 자기만의 색을 입혀서 노래하는 것이 엄청나게 부담되는 노래로 유명한데, 나훈아의 노래를 소화하다 보면 자칫하면 어설픈 모창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이나 나훈아의 창법은 엄청나게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10]

대부분의 히트곡이 본인이 작사하고 작곡한 곡이다. 물론 다른 사람에 의해 작곡된 히트곡도 꽤 많다. 일례로 2005년에 발표한 "고장난 벽시계(윤중민 작사, 박성훈 작곡)" 같은 곡은 의외로 나훈아가 작사 작곡을 하지 않았다. "행운", "남자라 울지 못했다" 등. 자작곡 중 다른 가수에게 준 곡도 있는데 이중에서 유명한 노래로는 <땡벌>(강진이 부름)이 있다. 사실 "땡벌"은 나훈아가 1987년에 이미 직접 불러서 발표했었다. (당시 땡벌을 부르는 나훈아 방송 영상). 또한 1991년에 원로가수 정원이 "인생은 본전"이라는 이름으로 가사만 바꿔서 불렀다. 나훈아는 다른 가수들에게 곡을 잘 주는 편은 아니다. 땡벌 외에는 이자연이 부른 "당신의 의미", 심수봉의 "여자이니까" 등이 대표적인 곡이다. 자작곡 전반을 보면 평생에 걸쳐 블루스와 민요를 트로트에 접목한 형태의 음악적 시도를 해온 것을 알 수 있다.

가창력 만큼이나 자타가 공인하는 장점은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한 무대 장악력과 무대 연출능력을 꼽을 수 있다.

콘서트에서 한 팔만 들면 자기가 작사 또는 작곡한 노래이고 작사와 작곡을 다 한 노래를 부를 때는 양 팔을 위로 올리는 퍼포먼스를 취한다.

5. 대표곡

6. 활동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나훈아/활동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7. 라이벌 남진과의 비교

파일:나훈아 남진.jpg

남진과 나훈아는 1970년대부터 라이벌로 경쟁했고, 두 사람의 팬덤도 갈라져 있었다. 마침 언론 및 대중들이 두 사람을 라이벌 구도로 만들기 딱 좋은 차이점들이 여럿 있었다. 남진은 수려한 외모에 호방한 목소리로 대중성이 강했고, 나훈아는 상대적으로 외모가 투박했으나 싱어송라이터로 음악성을 어필하는 느낌이 강했다. 노래의 성격 역시 남진은 도시의 세련된 이미지를 담은 가사를 주로 사용한[20] 반면 나훈아는 고향에 대한 향수나 시골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담은 가사를 주로 사용했다. 두 사람의 집안 배경조차 대조적이어서 나훈아는 부산 출신의 서민 집안이지만 남진은 전남 목포 출신의 매우 부유한 집안이었다. 출신 지역도 각각 영남과 호남으로 나뉜 건 덤.

사실 나훈아 집안도 이미지만큼 가난한 집안은 아니었고, 아버지가 무역선 선원이어서 외국에서 사온 축음기도 가지고 있는 등 제법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안이었다. 그래도 금수저 중의 금수저였던 남진 집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남진의 아버지인 김문옥씨는 곡물 정미회사, 언론사 등을 경영한 기업인이자 제5대 국회의원도 지냈던 인사였다. 남진의 회고에 따르면 한 때 전라남도 전체에 개인 자가용이 두 대 있었는데 하나는 전남도지사를 위한 전남도청 것, 하나는 아버지 김문옥(정치인)씨 것이었다고.

두 사람의 상반된 외모 차이와 분위기 탓에 양쪽 팬덤에서도 라이벌 대립각이 만들어져서, 당시 공연장에 가면 남진 팬들은 나훈아에게 '소도둑놈 저리가라'고 외치고, 나훈아 팬들은 남진에게 '돼지 멱따는 소리 치워라'라 외치며 공방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80년대 칼럼 두 사람은 '어머님 생전에(1973년)'같은 영화에 나란히 출연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남진이 인기가 좀 더 많았지만 나훈아가 후에 부각되며 라이벌로 불리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예술적인 곡을 많이 작곡, 작사를 한 나훈아는 가수, 예술가로서 확실한 자리를 잡는다.

남진 콘서트도 매번 매진되지만 나훈아 콘서트는 티켓은 발매를 개시하자마자 10초도 안 되어서 동나기 때문에 콘서트 가기가 하늘의 별따기에 가깝다[21]. 방탄소년단, 이승환, 한국시리즈 7차전, 빅뱅, 명절 전 일반 열차, LCK 결승전 급으로 티켓 예매하기 어려우며, 아들 딸 전부 동원해서 예매를 해도 성공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22]

다만 이것은 활동노선의 차이도 있다. 나훈아는 극도의 신비주의로 신곡을 발표하는 텀도 길게 두고,[23] 신곡도 오직 콘서트에서만 들을 수 있다. 방송 출연도 거의 하지 않는다. 반면 남진은 가요 프로그램이나 예능 출연도 잦고 후배들과 자주 협업하는 등 트로트 가수치고는 다작하는 편이다. 남진의 팬 입장에서는 '반드시 콘서트에 가야 할'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이는 가수로서의 각자의 철학에 따른 것이기도 한데, 나훈아는 '저 하늘 위의 별'로서 본인을 포지셔닝한 반면 남진은 어디까지나 '대중의 친구'를 지향했다. 외모와 같은 외적 이미지조차도 이를 따라갔는데 남진은 친근하고 편안한 아저씨의 이미지로 바뀐 반면 나훈아는 카리스마 있는 미중년의 이미지로 바뀌었다.

아이돌 가요계에 비유하면 코어팬덤형 아이돌과 대중형 아이돌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맞고 틀린게 아니라 두 사람이 가진 가수로서의 가치관이 다른 것.

8. 개인사

9. 기타



[1] 1981년부터 KBS 가요대상으로 승계[2] 프로필상 나이이다. 자세한 내용은 나이 논란 문단 참고. 데뷔 당시에 그는 미성년자(만 17~18세) 였던 점이 데뷔에 지장을 주었기 때문에 나이를 올린 것으로 추측된다.[3] KBS부산방송총국의 별도채널인 "부캐부캐"에서의 취재에서 밝혀졌으며 현재 국민삼겹이 있는 건물이다. #[4] 밤으로 가는 쇼 에서 밝힌 바 있다. https://youtu.be/UiTjbTo5uos 영상 16분 13초쯤에서 언급.[5] 1982년 동아일보 신상명세서. 어떤 데서는 178cm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6] 가수로, 본명은 최진기다.[7] 공군본부 직할 군악대에서 복무했다.[8] 나이와 마찬가지로 1966년 '천리길' 데뷔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역시 아니다. 역시 후술.[9] 20세기말에 실시한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훈아는 이미자, 조용필, 서태지와 더불어 최상위권에 위치해있다.[10] 그리고 이 창법은 가수 본인의 동작도 한몫 하는데, 특정 동작에서 꺾기가 가장 잘 나오기 때문이라고 한다.[11] 손석우 작사, 유현석 작곡.[12] 손석우 작사, 유현석 작곡.[13] 지금은 남국인 작사·김영광 작곡으로 돼있지만 발표당시는 손석 작사·작곡이었다.[14] 나훈아의 모친은 2021년 현재 100세에 가까운 연세로 정정하시다고 밝혔다.[15] UDT/SEAL65기의 기수가로 사용되었다.[16] 최근 자신이 부른 노래 중 테스형의 후렴구 부분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테스형의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이 부분은 가라지의 후렴구인 "너 괴롭고 나 괴로운 것을! 넌 넌 왜 모르니" 이라 하는 부분과 유사하다.[17] 유튜브 채널 허세스코에서 전직 조폭 출신 출연자가 말하길 이 노래가 건달들 노래방 18번이라고 한다(...)[18] 이 노래 역시 가라지처럼 신곡 테스형과 비슷한 면이 있는데 테스형의 "어쩌다가 한번쯤 턱빠지게 웃었다" 로 시작하는 도입부는 고향으로 가는 배의 도입부인 "고향으로 가는 배 꿈을 실은 작은 배" 와 비슷하다.[19] '진기'와 '오서방'을 보디가드로 불렀는데, 진기는 사촌동생 나진기, 오서방은 오재미이다.[20] 이는 남진의 대표곡인 님과 함께가 도시보다 님과 함께하는 농촌이 더 좋다는 내용이라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기도 하다.[21] 남진이 콘서트 동원력이 딸린다는게 아니다. 상대적인 볼 기회가 나훈아가 압도적으로 적기때문에 생기는 현상일뿐[22] 최근에는 나훈아콘서트보다 더 성공하기 힘든 가수가 바로 임영웅 이다.[23] 물론 나훈아가 2020년 KBS 공연에서도 밝혔지만, 무작정 고의적으로 그렇게 가기보다는 신곡 하나 만드는데 상당한 공을 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24] 당시에는 LP판을 취입하는 데에 당시 돈으로 6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야 했다. 국민주택이 20만원 정도 하던 시절이니 지금으로 치면 수천만원에 달하는 거액인 셈이다.[25] KBS 아나운서 출신 프리랜서 방송인 이지연의 부친이자 원로 방송인인 그 이상벽 맞다. 원래 직업은 기자였지만, 나중에 방송인으로 전업했다.[26] 일부 기레기들은 소문의 진위도 정확히 확인하지도 않고 김혜수 혹은 김선아라는 식으로 언질을 줬다. 이 때문에 나훈아는 후술할 기자회견에서 이 둘의 성명을 직접 언급하며 자살을 안 한 게 천만다행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일갈로써 기자들의 보도 작태를 강하게 질타했다.[27] 백은하, 차우진의 발언이 인용된 기사에서 나오듯 아이비도 이런 식으로 무대응하는 바람에 장기 활동 중단이 되기도 했다.[28] 조용필은 1991년 13집의 '꿈'을 끝으로 방송 출연을 하지 않아 신비주의 이미지가 있었지만, # 2018년 50주년 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세대와 소통하는 여러 이벤트를 열었다. 세대통합 조용필 VS 신비주의 나훈아 이런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그나마 서태지는 나머지 둘에 비하면 아직 젊은 사람이어서 예능 출연도 종종 하는데다 SNS로 근황도 종종 알리는 편이다.[29] "삼성을 생각한다"에 따르면 보통 가수들은 이건희의 생일 때 초청되어 노래를 2~3곡 정도 부르고 3,000만 원 정도 받아간다고 한다. 액수를 떠나서 이건희의 위상을 봤을 때 오히려 불러준 연예인이 영광이라고 생각할 법도 한 점을 감안하면 나훈아는 엄청나게 대단한 거다.[30]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온나'는 '나와라'의 동남 방언이다.[31] 첫 번째는 내 방까지 융단을 깔아 달라, 두 번째는 방은 100평 이상이 되어야 한다, 세 번째는 전용 헬기를 준비해 달라, 네 번째는 스텝 50명의 리무진을 대절해 달라, 다섯 번째는 식사는 한 상 가득 준비해야 한다, 마지막은 보디가드 40명을 붙여라.[32] 의외로 후배 강진의 열정과 선배 나훈아의 따뜻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땡벌은 몇년 동안은 히트곡이 아니었다. 그런데 비열한 거리에 출연한 조인성이 차에서 따라부르고, 당시 시청률이 40퍼를 상회하던 소문난 칠공주에서도 노주현이승기가 부르면서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서 당시 아이돌들이 지배하던 음원차트를 강타했고, 따라부르기 쉬운 멜로디로 인해 노래방차트까지 휩쓸었다. 뿐만 아니라 트롯 가수들의 로망인 단독 디너쇼까지 성공시키는 원동력이 되어 강진의 꿈을 이뤄낸 메가 히트곡에 등극한다.[33] 공동 출연자 장홍제장태지, 임준혁조영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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