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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0 20:14:53

전영록

전영록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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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100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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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colbgcolor=#FFFFA1,#5D5E00> 전영록
정수라
내 사랑 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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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전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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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록
정수라
내 사랑 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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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전영록
하얀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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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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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86673><colcolor=#fff> 전영록
全永錄[1]|Jeon Young-rok
파일:가수전영록.jpg
출생 1954년 3월 26일 ([age(1954-03-26)]세)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천안 전씨 (天安 全氏)
신체 168cm, 60kg, B형
가족 아버지 황해, 어머니 백설희
아내 임주연[2]
전보람, 전우람[3]
아들 전유빈(2002년생), 전효빈(2006년생)[4]
학력 서울동신초등학교 (졸업)
한양중학교 (졸업)
영락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 / 중퇴)
병역 대한민국 육군 제15보병사단 병장 제대
종교 불교
데뷔 1973년 '나그네 길'
(데뷔일로부터 [dday(1973-07-10)]일, [age(1973-07-10)]주년)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 및 가수 활동3. 가족4. 대표곡5. 수상 내역6. 음악 방송 1위7. 그 외

[clearfix]

1. 개요

돌아이라 불린 슈퍼스타[5]
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 문구
대한민국배우가수.

2. 생애 및 가수 활동

전영록 노래 모음

당시 충무로 대배우였던 ‘황해’와 인기가수였던 백설희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과 친분이 있던 이예춘의 아들 이덕화, 독고성의 아들 독고영재, 조항의 아들 조형기, 최무룡의 아들 최민수, 허장강의 아들 허준호, 박노식의 아들 박준규 등과 어릴 때부터 호형호제하며 성장했다.

1971년 기독교방송 영 페스티벌로 첫 방송을 탔으며 본격적인 활동은 1973년 MBC 드라마 '제3교실'에 출연하면서부터다. 그리고 저 드라마에서 삽입곡 '편지'를 부른 것을 계기로 1975년 가수로 본격 데뷔한다. 이후 임예진, 김보연 등과 짝을 이뤄 청춘 영화의 주인공으로 단골 출연한다.[6]

1980년대엔 남자 가수 중 조용필의 뒤를 이어 이용, 송골매, 김수철, 김범룡 등과 함께 2인자 그룹으로 인기를 누렸다. 다른 2인자 그룹들이 상대적으로 전성기가 짧은데 비해 전영록은 80년대 내내 꾸준히 인기를 모으며 롱런했다. 이 시기 전영록은 '종이학',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불티',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 등을 히트시키면서 청소년들, 특히 여중고생들에게 우상으로 군림했으니 여러 모로 한국 가요계에 아이돌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80년대 중반 중에서도 앞 쪽의 히트곡이며, 86~88년에는 '그대 우나봐', '내 사랑 울보', '하얀 밤에', '저녁놀'로 가수로서는 최절정기를 맞았고 특히 86년과 87년 2년 연속으로 'KBS 가요 대상' 대상을 차지했다. (86년까지는 남녀가 나뉘어져 있어서 남자 대상, 87년은 통합 대상.)

연기, 노래, 작곡, 라디오 DJ 등 그야말로 다방면에서 활약한 만능 엔터테이너라고 할 수 있다. 중년 이상이 아니면 그의 80년대 위상이 잘 와닿지 못할 수 있는데, 2000년대를 기준으로 비교하자면 댄스 솔로 아이돌이자 연기자로도 인기를 얻었던 와 상당히 유사한 행보를 구축했고,[7][8] 가요계와 영화계 둘 다 평정한 몇 안되는 스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80년대 인기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MBC 황금어장 - 라디오 스타2008년 '박상민, 민경훈' 출연 에피소드에서는 1980년대와 2000년대 가요계를 비교하면서 두 사람을 직접 비교하는 시간도 가졌을 정도. 원래 80년대 초반까지 포크 음악을 주류로 선보했던 시절에는 젊은층의 팬층이 크지 않았으나 80년대 중반부터 '불티' 등 락풍의 음악을 선보일 때부터 젊은층의 팬층이 증가하였다.

특종 TV연예에 등장한 신인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곡 난 알아요를 평가했던 4명 중 한 명. 나머지 세 명은 작곡가 하광훈, 작사가 양인자, 연예평론가 이상벽. 전영록 본인은 해당 방송에서 "새롭고 다 좋은데... 나쁜 말은 안 하겠다. 평가는 시청자의 몫이다." 라고 했는데[9] 그날 이후 한국 가요계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통에, 뉴 키즈 온 더 블록에 비유하며 두루뭉술 호의적으로 평가한 데다가 팬심으로 먹고 살지 않는 이상벽을 제외한 나머지 2명은 방송상 보여준 서태지를 대놓고 깎아내리는 평가에 대한 후유증을 크게 겪었다고 한다.

파일:전영록.png
군대에서 보직은 통신병이었다고 한다. 연예계 대마초 파동이 일기 시작하자, 아버지 황해가 1976년에 군대로 보냈다. 그것도 빽써서 전방으로 보내버렸다고 한다.[10]

한편 당랑권 유단자[11][12]로서의 능력을 살려 액션영화 돌아이 시리즈[13]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연기를 선보였다. 전영록 본인의 너스레에 의하면 자기처럼 키 작은 스턴트 배우가 없어서 본인이 모든 액션 장면을 연기[14]했다고 한다. 다만 이두용 감독이 이 영화는 막싸움이야.라고 해서 실제 액션장면에서 당랑권은 흔적도 없으니까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고 했으며 그 뒤 한국판 람보를 만들겠다면서 나온 1987년작 전쟁 액션물 독불장군은 흑역사가 되었다. 서울 관객 5천 명조차 보질 않을 정도.

1987년 진유영이 악역으로 나온 영화 대야망을 마지막으로 액션영화는 은퇴하고, 영화 몇 편에 더 나온 그는 최진실정보석 주연 액션영화 '꼭지딴'(1990) 음악을 맡기도 했다. 30년 가까이 영화 활동을 그만두던 그는 2019년 독립영화 '애월'에서 카메오로 잠깐 나온 바 있다.

한편 전영록은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일면도 있었으며 자신의 노래만이 아니라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작사, 작곡해 히트곡을 만들어내면서 한때는 가수보다는 작사/작곡에 더 몰두하면서 역시나 정상에 섰다. 김지애 '얄미운 사람'[15], 이지연의 '바람아 멈추어다오', 양수경의 '사랑은 창밖에 빗물같아요' 등이 작곡한 히트곡 중 일부. 위 노래들과 가수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보자면, 이지연의 경우 데뷔 2년차에 발표한 2집에 담긴 해당 노래로 가요톱10 골든컵MBC 가요대제전에서 10대 가수가 되었으며, 양수경 역시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로 가요톱10 1위와 10대 가수로 올라섰는데 두 곡 모두 1989년 한 해에 발표된 곡이였다. 앞의 둘이 젊은 층에서 인기를 쌓아가다 전영록의 곡을 만나 정상에 오른 것인데 비해서, 김지애의 경우 86년에 발표해서 고만고만하게 히트한 '물레야'만 불러야 했던 트로트 가수로 젊은 층에는 큰 인기가 없던지라, 당시 작곡가로 잘 나가던 전영록이 김지애에게 곡을 줬다는 소식에, 과연 전영록이 김지애로 흥행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호사가들의 입방아가 있었다. 그리고 결과는 가요톱10 골든컵과 10대 가수 수상이었으며, 전영록의 곡은 누구라도 히트시켜줄 거라는 얘기까지 들었다. 그 외 인기 탤런트이면서 당시 라디오 DJ였던 김희애가 불렀던 '나를 잊지 말아요'도 전영록이 만든 곡[16]이다.[17]

1990년대 들어선 후 서태지와 아이들로 대변되는 가요계 대격변의 흐름과 세월을 이기지 못해 가수로서도 예전의 인기, 작사/작곡자로서도 흥행을 누리지 못하지만 간간이 콘서트와 뮤지컬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세월에 역행하는 초동안[18]으로 유명하다. 1990년대에도 소개 멘트가 '만년 소년'이었고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이경규와 함께 형제 무술인으로 출연했을 때 이경규가 전영록을 '형님'[19]이라고 불렀는데 상당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최근 유튜버로 전영록 TV를 오픈, 왕성한 음악 활동을 진행 중이다. 그의 최근 음악은 네이키드 뮤직이라는 장르로 통기타 두대로 락 음악의 기본 요소인 리드기타. 베이스기타. 드럼의 역할을 편곡을 통해 완벽히 구사하고 있다. 한편으로 자신의 히트곡은 물론 당대 국내 대중 음악으로 기억에 남는 곡들을 영어로 개사해 발표하고 있다.

3. 가족

연예계에서도 매우 유명한 예술인 집안이다. 부친은 충무로를 대표했던 배우 황해, 모친은 '봄날은 간다'로 유명한 원로가수 백설희[20]였고 남동생인 전진영은 작곡가로 활동했다. 전처는 배우 이미영이었으며 전 손위처남은 '맹구'로 유명했던 연극배우 겸 개그맨 이창훈. 장녀 전보람은 아이돌 그룹 티아라의 전 멤버이며, 차녀 전우람은 아이돌 그룹 디유닛으로 데뷔했고 현재는 작곡가로 활동중이다. 이미영과 이혼한 뒤에 재혼을 했고 전유빈, 전효빈이라는 늦둥이 아들 둘이 있는데 나이가 아직 누나들에 비해서는 너무 어려서 그런지 잘 안 드러난다.

EBS 프로그램 싱어즈 2020.11.16 방송분에서 원로가수 나애심(본명 전봉선)이 고모임을 밝혔다. 그녀의 딸인 가수 김혜림과는 사촌 남매간이 된다.

4. 대표곡

종이학 (1982) (1982년 12월 30일, 1982년 KBS 가요대상)
그대가 미워요 (1983) (1983년 12월 30일, 1983년 KBS 가요대상)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 (1984) (1985년 MBC 쇼2000)
불티 (1984) (1985년 12월 30일, 1985년 KBS 가요대상)
내 사랑 울보 (1986) (1986년 12월 30일, 1986년 KBS 가요대상)[21]
이제 자야하나봐 (1987) (1987년 8월 8일, KBS 쇼특급)
하얀 밤에 (1987) (1987년 7월 11일, KBS 쇼특급)[22][23]
저녁놀 (1988) (1988년 3월 19일, KBS 쇼특급)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 (1988) (1988년 12월 31일, 1988년 MBC 가요대제전)
바람에 실려간 사랑 (1989) (1989년 12월 30일, 1989년 KBS 가요대상)[24]
창가에 흐르는 세월 (1990) (1990년 7월 28일, KBS 쇼 토요특급)
이별은 싫어 (1991) (1991년 3월 30일, KBS 쇼 토요특급)

5. 수상 내역

6. 음악 방송 1위

총 17회 1위
<rowcolor=#FFFFFF> 날짜 방송명 곡명 비고
1984년
6월 10일 KBS 가요톱텐 그대가 미워요
(2회)
6월 17일 2주 연속
1985년
4월 7일 KBS 가요톱텐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
(5회)
4월 14일
4월 21일
4월 24일
5월 1일 5주 연속
(골든컵)
1986년
4월 23일 KBS 가요톱텐 그대 우나봐
(2회)
4월 30일 2주 연속
1987년
1월 14일 KBS 가요톱텐 내 사랑 울보
(2회)
1월 21일 2주 연속
1988년
6월 15일 KBS 가요톱텐 저녁놀
(6회)
6월 22일
7월 6일 3주 연속
7월 20일
7월 27일
8월 6일 3주 연속

대중적인 히트곡 몇곡은 1위에 들지 못했는데, '종이학'의 경우 1위를 많이 하면 물러날수도 있기 때문에 1위를 못했고, 최고 2위까지 올라 상위권에 너무 오래 머물러있다가 '가요 활성화'를 명분으로 강제 하차당했다.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의 경우 한창 방송 활동을 해야할 시기에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방송 금지 조치를 당해서 명성에 비해 1위를 한번도 못했다.

가요대상을 수상한 '하얀 밤에', '이제 자야하나봐'는 최고 2위까지 올랐다.

7. 그 외



[1] 1987년 앨범 표지에는 신자체인 録으로 표기되어 있다.[2] 1985년 이미영과 결혼했다가 1997년 이혼하고, 1999년 현재의 부인과 재혼했다.[3] 두 딸은 전 부인 이미영 소생.[4] 두 아들은 현 부인 임주연 소생.[5] 다채로운 음악과 박력 있는 무대 퍼포먼스 그리고 <돌아이>라는 액션 영화를 통해 조용필과 함께 오빠부대를 몰고 다닌 슈퍼스타였다.[6] 김보연과는 1979년에 개봉된 ‘꽃밭에 나비’에서 호흡을 맞췄다. 전영록은 주인공 역할인 ‘최병걸’을 연기하였다. 손창호, 김영철, 여주인공인 박영귀(극중 이름은 정미.)도 출연하였다. 이듬해에 '달려라 풍선'에서 다시 호흡을 맞췄다.[7] 순전히 '가수'로서의 위상만 놓고 본다면 비와 비교한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될 정도로 전영록은 폭넓은 세대에게 사랑받은 히트곡이 많았다.[8] 전영록은 1979년부터 1989년까지 한번도 빠짐 없이 가수의 인기를 측정하는 대표적 지표였던 MBC 10대 가수에 선정되었다. 이미자나 조용필 등 전설적인 가수들도 이렇게 변함없이 10년간 10대 가수에 선정되지는 못했으니 그만큼 오랜 기간동안 10대를 비롯한 다양한 세대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것이다.[9] 시나위로 록 밴드 활동을 했던 서태지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해주었지만 새로운 장르를 들고 나온 것에 대한 평은 팬들에게 맡기겠다는 뉘앙스다.[10] 15사단에서 복무하였다고 한다.[11] MC 임성훈이 사형이라고 한다. 전영록의 말로는 임성훈은 창술, 자신은 봉술과 권법을 배웠다고...[12] 국내 당랑권의 초기 계보는 화교로 태극당랑권의 임풍장, 태극매화당랑권의 강경방으로 시작되고, 임풍장의 제자가 홍문탁이다. 임성훈과 전영록은 이 홍문탁에게서 당랑권을 배웠다고 하니 정통무술을 제대로 배운 것이다. 2010년대 기준에서도 한국내 당랑권 최고수하면 홍문탁과 화교로 한국에 들어온 이덕강이 손꼽힌다.[13] 전영록은 이 영화 시놉시스를 군대에서 썼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적도 있다. 군대에서 자기 별명이 돌아이였다고.[14] 액션씬 중 최고는 남산 케이블카 장면이였는데 상, 하행 케이블카가 교차 될때 반대쪽으로 뛰어 넘어가는 장면이였고 성공하면서 손을 들고 포효하는 장면이 영화 예고편에서 나오면서 언론에서 대서 특필 하였다.[15] 그런데 이게 김일병송에서 음색을 따왔다고 본인이 밝혔다.[16] 사실은, 전영록이 1976년 10월에 현역 입대 후 휴가기간에 틈틈히 녹음했던 곡을 모아 군복무 도중에 발매된 앨범에 수록한 잊지 말아요가 원곡이다.[17] 참고로 전영록은 자신이 만든 노래를 다른 가수들(특히 여가수)에게 주는 경우 노래 중간에 화음을 넣어주는 역할을 종종 했다.[18] 코미디언 이홍렬과 동갑이자 중학교 동창으로 친한 사이다. 근데 전영록이 워낙 동안이라서 친구인 이홍렬에게 "야~ 야~" 거리는 거 보고 주위에서 기겁하며 "윗 사람을 왜 그렇게 함부로 부르냐?" 놀라면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티비에 나와서 말한 적 있다.[19] 실제로 전영록이 6살 더 많다.[20] 데뷔 초창기인 1970년대만 하더라도 멀티 엔터테이너에 대한 개념이 희미했던 시기였기에 배우와 가수 사이에서 상당한 혼란을 겪었다고 한다. 연기를 하겠다고 하면 어머니 백설희가 '연기는 무슨 연기냐. 노래를 해야지'라고 하고, 노래를 하겠다고 하면 아버지 황해가 '노래는 무슨 노래냐. 연기를 해야지'라고 했다고. 부모가 당대 최고의 연예인이었기에 데뷔 당시에는 가족들 유명세 후광 덕을 보기도 했다.[21] 1986년 KBS 가요대상 남자가수상 수상[22] 1987년 KBS 가요대상, MBC 가요대제전 최고 인기 가수상 수상[23] 이 해에 최고 인기 가수상, 가요상 수상자로 조용필이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하여 형식적으로 수상[24] 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MBC 10대 가수상을 마지막으로 수상한 시기를 장식한 노래.[25] 1987년은 제외[26] 현재는 DVD 4만장을 소장하고있다고 ‘송승환의 원더풀 라이프’ 유튜브 채널에 출연하여 직접 말했다[27] 리즈시절에 본인보다 5~6살 어린 배우와 친구 연기를 한 적도 꽤 있고, 아예 어린 후배 여배우의 남동생 역할도 해봤었다. 돌아이 시리즈도 돌아이가 등장인물 여성들보다 어린 역할인데, 막상 실제 연기한 여배우들 중에서는 전영록보다 어린 사람이 꽤 있었다.[28] 체격이 큰 헐리웃 배우들과 연기를 많이 해서 체격이 작다는 이미지가 있는 성룡이지만, 실제로는 1950년대생 동양인 치고 체격이 큰 편이기에 전영록보다 훨씬 컸다. 170대 중반이고, 젊을 때 이소룡과 찍었던 사진을 보면 키와 체격이 유사하다. 오히려 성룡을 따거로 모시는 이연걸이 성룡보다 체격이 많이 작다. 이연걸이 전영록 체격에 가깝다.[29] 성룡이 21세기에 직접 밝힌 바로 70년대까지는 서바이벌 코리안을 필사적으로 익혀, 한국어를 상당히 잘했다고 한다. 한국여성과 교제를 했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며, 한국식당에 가서 혼자 식사를 하는 것도 자주 했고 시장에서 쇼핑도 자유자재로 했을 정도. 훗날 대스타가 되어 한국활동이 없어지면서 쉬운 말 말고는 다 잊어버렸다고 한다. 단, 중년 이후에도 촬영 스태프 중 한국인이 있을 때는 본인보다 어려도 장난으로 "오빠오빠"라고 부르면서 종종 한국말을 건다고 한다.[30] 지금은 디지털 시대라 개인신상보호가 세계적으로 민감해서 한국은 물론, 해외조차도 신분증을 사적으로 보여달란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70~80년대 당시나 그보다 이후인 90년대까지 이런 식의 상황은 일반인들에게 너무나 흔했고 2000년대 초반에도 많이 있던 일이었다. "민증 까봐"가 유행어처럼 쓰였다.[31] 과거 연예인 윤다훈김정균을 폭행한 사건도, 나이로 말다툼하다가 주민등록증 까보라고 요구하면서 폭행이 일어난 것이다. 심지어 두 사람 다 주민등록상 생일이 2년씩 잘못된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초유의 사태였다. 실제 나이와 주민등록 나이 모두 윤다훈(64년생, 66년)이 1살 많지만, 김정균(65년생, 67년)은 윤다훈의 주민등록 나이만 보고 "내가 가정사정으로 주민등록 나이가 2년 늦었으니 당신보다 1살 많다"고 주장했고, 윤다훈이 "나도 가정사정으로 2년 늦었으니 내가 1살 많은거"라고 주장했지만 김정균이 믿지 않는다고 무시하자, 윤다훈이 똑같이 늦었으면서 내 이야기만 무시한다며 얼굴을 폭행했고, 먼저 폭행당한 김정균도 윤다훈을 폭행해서 재판까지 간 사건이다. 심지어 두 사람 1심 다 유죄가 나왔다가, 김정균만 2심에서 정당방위로 1심의 집행유예가 없어지고 무죄가 나왔다. 이후 코뼈에 문제가 생겨서 수술을 했을만큼 폭행 정도가 심각해서(실제 판결도 윤다훈이 더 큰 죄인 징역 10월의 집행유예, 김정균이 무죄다. 심각한 폭행에 대한 정당방위권을 인정받았다.) 큰 문제가 되었다. 언론보도를 두려워하는 스타 연예인들끼리도 이런 일이 가능한 상황인데, 일반인들끼리는 답도 없이 별일이 다 일어나는게 당연할 수 밖에 없었다. 조폭끼리 나이 문제로 싸워서 한명씩 죽거나 중상을 입는 바람에 TV 뉴스에 나온 적도 엄청나게 많았다.[32] 연필로 쓰세요 부분의 음정을 틀리게 불러서 둘리가 옆에서 제대로 된 음정으로 불렀지만 또 다시 틀린 음정으로 불렀다.[33] 그리고, 조용필친구여를 따라부르는 장면도 나온다.[34] 일례로, 배우 김용건정혜선에게 '혜선 언니' 라고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60년대까지는 꽤나 흔했던 모양. 70~80년대로 넘어가면서 반대로 여자가 손위 남자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현상도 일어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