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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19:03:17

심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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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봉
沈守峰|Shim Soo Bong
'''
파일:심수봉.jpg
본명 심민경 (沈玟卿)[1]
출생 1955년 8월 28일 ([age(1955-08-28)]세)[2]
충청남도 서산시[3]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청송 심씨[4]
신체 O형
부모 아버지 심재덕, 어머니 장형복
형제자매 언니[5], 이부 남동생 1명, 이부 여동생 1명[6]
배우자 김호경[7]
자녀 2남 1녀
학력 인화여자고등학교 (졸업)
명지대학교 (경영학 / 학사)
종교 불교개신교(침례회)[8]
직업 가수, 아티스트
소속사 라이트웨이브 엔터테인먼트, 루체 엔터테인먼트
데뷔 1978년 MBC 대학가요제 '그때 그 사람'
팬클럽 심비로
SNS 파일:네이버카페 아이콘.png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부터 가수로 데뷔하기까지2.2. 10.26 사건과 그 이후
3. 음악성4. 팬5. 활동6. 매체7. 대표곡8. 기타

[clearfix]

1. 개요

"최고의 여성 트로트 싱어송라이터"
서정적인 가사에 더해진 애절한 단조의 창법. 흔들림 없이 선율을 장악하는 비음 섞인 떨림. 구슬픔이 담겨있는 애진한 음색. 한국적인 한이 깊이 담겨있는 목소리, 최고의 여성 트로트 싱어송라이터, Legend 심수봉
대한민국가수. 트로트발라드, 그 중간의 간극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메운 이른바 트롯발라드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9] 그리고 현재까지 활동 중인 원조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하다. 또한 후술되었듯, 정치적 사건에 원치 않게 엮여 활동기를 많이 날린, 한동안 불운했던 가수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어린 시절부터 가수로 데뷔하기까지

1955년 8월 28일충청남도 서산군(現 서산시)에서 태어났다. 평양에 살던 심수봉의 모친이 1.4 후퇴 시기쯤 진남포항에서 월남하여 이후 충남에서 부친인 심재덕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부친은 심수봉이 3살 무렵 헤어졌고, 직후 사망하여 심수봉의 기억엔 없다고 한다. 당시에도 심재덕의 나이가 환갑이 다 되었다는거 보면, 26살이던 모친과의 결혼이 일반적인 결혼은 아니었던 듯하다. 당시 외삼촌은 집안 사정 때문인지 심수봉을 고아원에 넘기려고 했다고. 2023년 두시탈출 컬투쇼에서 심수봉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 아버지 없이 자라고 삼촌은 저를 너무 학대하고, 하여튼 요즘 가만히 전체를 정리하면서 보니까 정말 한 번도 남자에게 사랑받아본 적이 없더라. 우리 남편이 처음으로 그래도 남자로서 (사랑을 줬다). 남편 만난 지 올해가 30년 됐다. 너무나 남자의 사랑을 받아본 적 없어 '사랑밖엔 난 몰라'라고 했던 것 같다"고 밝혔다. 심수봉은 사랑밖엔 난 몰라 속 사랑은 대상이 있기보다는 이상이라고 전했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음악을 했던 집안이었고, 아버지, 큰아버지, 고모 등도 모두 음악을 했을 정도로 음악과 연이 깊은 음악가 집안이라 민속악의 바흐 집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고 5촌 당숙 심상건(1889~ 1965)은 가야금 명인으로 황병기의 가야금 스승이다. 이런 집안 환경의 영향으로 그도 음악인의 삶을 걷게 된다. 또한 포르테 디 콰트로 소속 손태진이모할머니로, 손태진의 할머니가 심수봉의 언니다.

주 전공은 재즈였으며, 당시 최고의 음악가들만 설 수 있다는 미8군 무대에 로큰롤 밴드 "논스톱"의 드러머로 서기도 했었다. 그를 트로트 가수로만 아는 사람들은 그가 드럼을 치는 모습에 깜놀하기도 했는데 이런 뒷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드럼을 치는 여성 보컬리스트'로 카펜터즈의 캐런 카펜터와 함께 이야기되기도 한다. 이때 김수희친분이 생겼다.[10]

심수봉은 당초 서산초등학교를 다녔으나, 그의 어머니가 이혼[11] 후 이사하게 되자, 어머니를 따라 2학년 때 서울 은로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 후, 영등포에 있던 여중에 입학했으나 당시 원인을 알 수 없으며 사람 목소리 같은 미세한 소리에도 뇌에 치명적인 자극을 줄 수 있는 '뇌신경인플레'라는 희귀병에 걸려 입원 치료를 위해 다시 2년 휴학을 했다. 중학교 때의 첫사랑인 가정교사로부터 받은 일본 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레코드로 엔카에 대해 알게 되었다. 뒷날 인천 인화여자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여 만 19세인 1974년에 고교 졸업을 하였다.

심수봉은 같은 해 만 20세의 나이로 대입준비를 시작했다. 레스토랑에서 피아노 치고 노래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1960년대에 유명했던 밴드 마스터 엄토미의 부탁으로 1973년 보광동의 한 개인 파티에서 대타로 피아노 반주를 하고 미소라 히바리 노래를 하나 불렀는데 그 연회가 마침 1974년 자신이 실각하기 전 박정희 대통령의 술 시중 돕는 여성들을 섭외하는 역할을 하던,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이 주최했기 때문에 그의 눈에 띄어 박종규가 여는 비밀 사교 파티에 자주 불려갔다가 1975년 대통령 만찬 자리에 불려가기 시작했다. 1975년 처음 봤을 때 박정희는 의외로 늙어보였다고 한다. 이 부분은 2006년 일본 아사히 신문인터뷰에서 밝혀졌는데, 이때 일본 관련 나쁜 말이 있어서 그런지 특정 내용의 사실관계가 뒤바뀌었다며 나중에 보도에 반박했다. 원래는 자신이 미소라 히바리의 곡 슬픈 술(가나시이 사케)을 부르자 박정희는 엔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어디서 왜년을 데리고 왔나면서 화를 냈고, 이에 눈물젖은 두만강황성옛터를 부르자 이제야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부분은 심수봉이 쓴 여러 서적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이후 국무총리의 집이 리모델링됐을 때의 연회에서 여러 가수들과 함께 갔을 때 박정희를 만났다.

사실 심수봉은 〈MBC 대학가요제〉로 데뷔하기 이전 프로가수로 먼저 데뷔할 뻔도 했는데, 2023년 두시탈출 컬투쇼에 나온 심수봉이 "제가 도큐호텔[12]이라고 호텔에서 피아노 치고 노래하는 알바를 했다. 그런데 나훈아 선배님이 누구랑 같이 찾아 오셨다.", "어쨌든 저는 서비스로 그 분 노래를 하나 불러드렸는데 그게 인연이 되고 저를 알아봐 주셨다. 저 사람이 가수 안 하면 안 된다면서 레코드 회사 사장님 두 분을 모셔오셨고, 나훈아 선배님이 〈여자이니까〉라는 곡까지 만들어주셨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결국 나훈아의 주선으로 1976년 신세기 레코드와 50만원에 음반 취입 계약을 맺고 녹음에 들어갔지만, 음반사와의 분쟁으로 음반 발매가 취소되었고, 심수봉은 같은 해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이후 1978년 〈대학가요제〉로 정식 데뷔한 심수봉에게 나훈아는 "이 바닥이 어떤 곳인줄 알고 왔느냐? 이 험한 곳에서 잘 버텨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라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재수 끝에 1976년 명지대학교경영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도중 3학년 때인 1978년 〈MBC 대학가요제〉에 참가했다. 당시 영상 보기.[13] 당시 대부분의 〈대학가요제〉에 참여하는 대학생들의 음악적 성향이 포크이었던 시절에 심수봉은 자신의 주 전공인 재즈가 아닌 트로트로 도전장을 던졌으나 상을 받지는 못했다. 심사위원이 좋은 점수를 안 준 이유는 '너무 프로스러워서'였다. 지금이야 이해하기 힘든 평이지만 당시 〈대학가요제〉의 심사 기준은 대학생의 풋풋함이었기 때문에 심수봉의 세련된 음악과는 상당히 간극이 컸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1회 대상 수상자 자격으로 게스트 출연을 했던 여병섭(샌드페블즈의 보컬리스트)이 수상 발표 때에 대기실에서 심수봉 옆에 있었기에 표정을 볼 수 있었는데, 금상까지 자신의 이름이 발표되지 않자, 대상이라고 확신해서 오히려 더 기뻐했다고 한다.[출처]

음악을 들어보면 피아노와 보컬만으로 빅밴드를 압도할 뿐 아니라 악단은 화성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굴욕을 보인다. 여병섭에 따르면, 악단의 연주 실력 때문에 생긴 사고가 아니라 편곡 과정에서 생긴 불상사였다. 악단이 준비한 편곡이 불만이었던 심수봉이 공연 시작 전까지 악단장과 말싸움을 했다고 한다. 결국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하고 각자 알아서 공연에 임하다 보니 불협화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출처]

그러나 그는 이 대학가요제에서 부른 〈그때 그 사람〉이 히트하면서 가수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이때 그와 겨뤘던 출연자들이 후덜덜한데 임백천, 노사연, 배철수 등이다. 이들은 대상은 못 탔으나 다들 이후에 가수로 데뷔했다. 후일 노사연 등이 밝히기로는 1회에 샌드페블즈가 대상을 덜컥 수상하자 "뭐야, 저 정도면 우리도 할 수 있겠는데?"라고 여겨서 2회 때 실력자들이 대거 참가했던 것이라고 한다. 대상은 부산대학교 중창단 썰물이 수상했고, 노사연이 금상, 배철수가 소속된 한국항공대학교 대표 활주로가 은상을 받았다.
1978년 〈MBC 대학가요제〉 참가 장면
1979년 10월 8일 TBC 〈쇼는 즐거워〉 1위 장면
1979년 12월 MBC 〈10대가수가요제〉 10대가수상 수상 무대 장면

2.2. 10.26 사건과 그 이후

심수봉이 〈그때 그 사람〉을 통해 인기를 모으던 중, 당시 24세였던 1979년 10월 26일, 모델 신재순[16]과 함께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대통령 술자리에 불려갔다.[17]

민주화된 현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의 술자리에 여가수를 불러 노래를 시킨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만[18] 당시엔 그런 시절이었다. 어쨌든 그 날도 평소대로라면 조용히 지나가 옛 일 정도로 회자되었을 것이지만[* 이미 세 번째 자리였다는 등의 인터뷰에 따르면 처음이 아니었고, 다른 가수들도 몇 번 불려간 전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심수봉이 어쩌다보니 그 날 재수없게 휘말린 셈. 이 날 심수봉은 TBC 쇼쇼쇼에 출연하는 방송 스케줄이 있었음에도 박선호에 의해 죄다 캔슬당하고 만나기로 한 내자호텔로 갔다고 한다. 이때 연예인들 공연인 줄 알고 흑석동에서 기타를 사느라 약속시간이던 5시 30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이때 김재규와는 구면이었으나 김계원과는 처음 만났다.] 공교롭게도 이 날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측근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하고 유신정권을 무너뜨리는 10.26 사건을 터트린다.

자세한 것은 10.26 사건 문서에도 있지만 여기에는 심수봉 시점만 따로 설명한다. 수봉은 종로구 내자동 내자호텔에서 중정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의 차를 타고 저녁 6시가 조금 지나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다. 이때 신재순을 처음 만났다. 안가 대기실에서 간략한 예절교육과 기밀유지서약을 받고 실내화로 갈아 신은 후 기다리고 있다가 6시 40분 쯤 남효주가 둘을 연회장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박정희 왼쪽에 앉았다. 취기가 오른 박정희는 둘에게 "김(재규) 부장은 술이 아주 세니까 많이 권해주게."라며 농담을 던졌다. 박정희가 "노래나 한 곡 들어볼까" 라고 제의하자 대기실에 있던 기타를 연주하며 그때 그 사람[19]을 불렀고 앙코르를 요청하자 추가로 눈물젖은 두만강을 부른 후 다음 노래 부를 사람으로 차지철을 지명했다.[20] 차지철은 "도라지 타령"과 "나그네 설움"을 부르고 신재순을 지명했다. 신재순은 심수봉의 기타 반주로 혼성 듀오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21]를 부르고 있었고 박정희는 간간이 흥얼거리며 신재순의 가락에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김재규는 신재순이 1절 후렴을 막 시작하려는 차에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고성을 지르고 발포하며 끊겼다. 김재규가 총을 쏘기 직전에 한 발언은 "너 건방져!"가 아니라는 설이 존재했다.[22] 반면 심수봉은 꾸준히 당시의 소수설을 밀어서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직접 자문을 맡을 때도 김재규의 대사를 "이 새끼! 너 건방져!"로 정했다. 이 증언 차이는 의자매까지 맺으며 친밀했던 신재순과 심수봉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 저격 전에 박정희가 김영삼을 구속기소해야 한다는 질책에 김재규는 "이미 제명당한 김영삼을 구속시키면 국민들은 그를 두 번 죽이는 거라고 인식할 겁니다.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셔야지요."라는 말을 했다는 설도 있으나 심수봉은 자신의 회고록 '사랑밖에 난 몰라'를 출간하면서 김재규는 대국적으로 하라는 말은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심수봉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나 "버러지 같은 놈" 같은 김재규가 했다고 알려진 발언들에 대해서 김재규가 그런 말을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총 쏘는 데 급했지 여유를 부리면서 말을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것.[23] 둘은 쓰러진 박정희를 부축했고,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마지막 탄을 발사하러 들어오는 순간 박정희의 등 뒤에서 나오는 피를 막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 김재규가 들어오자 심수봉은 부속실로 피했다. 자세한 건 박정희의 최후를 가장 잘 알고 있던 사람은 끝까지 옆에 있었던 신재순과 심수봉이었는데 심수봉은 그 순간을 이렇게 진술했다.
파일:external/dimg.donga.com/41340816.1.jpg
왼쪽 모자를 쓴 사람이 심수봉이고, 오른쪽은 신재순이다. 자료
파일:심수봉과신재순.jpg
위의 사진과 같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의 뒷모습 사진. 신재순이 키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암살 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합동수사본부가 10.26 사건을 강도 높게 조사하면서 심수봉도 조사를 받았다. 합동수사본부는 처음에 대통령의 만찬에 참석한 여성들이 1979년 12월 16일 육본계엄군법회의에 출두할 때 언론에 두 여인의 사진을 뒷모습[24]만 게재하게 했고 손금자(孫錦子)(심수봉)와 정혜선(鄭惠善)(신재순)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도록 지시했는데 실명이 유비통신으로 돌아다녔고 결국 나중에 사실로 밝혀졌다. 심수봉은 현장에 있던 것뿐이었던지라 최종적으론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시대는 그녀를 파란으로 몰고 갔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되어 한창 활동해야 될 시기에 방송 활동이 금지되고,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하는 수모[25]를 겪어야 했던 그녀는 이후 잠시 영화계로 진출하여 〈아낌없이 바쳤는데〉라는 영화의 주연으로 캐스팅되기도 했지만, 가수로서는 활동할 수 없었다. 이때 쯤 박 대통령의 묘소에 찾아간 적이 있다. 이때 지방 밤업소 사장과 결혼을 하나 인생의 쓴맛을 본다.

1984년이 돼서야 방송 활동 금지가 풀리면서 또 다른 대표곡인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26]가 히트 치면서 다시 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첫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이 아이가 행복할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무궁화가 떠올라 만들어 이듬해 발표한 〈무궁화〉가 국민을 선동한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방송된 지 단 하룻 만에 금지곡이 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27] 1987년에는 〈사랑밖엔 난 몰라〉가 히트했고 이후 꾸준히 콘서트와 음반 발매를 하면서 현재까지도 가수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족들 중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서운했는데 1992년 박근영(현 박근령)이 도울 일이 없냐면서 사람을 보내면서 오랜 앙금을 풀게 되었다.

1993년 SBS주병진쇼〉에 출연해 암살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본인은 "자신이 가수인데 엉뚱한 사건에 휘말려 대중들이 자신을 가수보다는 그 이야기 쪽으로만 연관짓는다."라며 힘든 심정을 밝히고, 당시 상황에 관해 비교적 담담하게 진술하였다. 본인이 갔을 때는 이미 정치적 얘기가 한창 진행되고 이제부턴 여흥을 즐길 막바지 타임이라[28] 많은 얘길 들을 수는 없었지만, 박정희가 7시 뉴스를 보다 주한 미 대사와 만난 김영삼 총재를 보고 이미 총재도 아닌 사람을 왜 만나냐고 화를 냈고, 이에 자신은 속으로 '강제로 밀려난거지.'라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얼마 안 가 일이 터지고 놀란 심수봉은 박정희가 이미 죽은지도 모르고 머리에 확인 사살하려는 김재규에게 그러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고 이후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한 방으로 피신한 이후부턴 신재순과 문을 걸어잠그고 죽을지 살지 몰라 두려워하며 쥐 죽은듯 있었다고. 이후 체포되어 같이 조사받는 김재규를 보고 인생사 참 허망했다고 한다.
심수봉 〈주병진쇼〉 출연

1995년 MBC 드라마 제4공화국을 만들 때 10.26 사건 당시 상황을 직접 감수했다. 당시 심수봉의 현 남편이 MBC에 재직하고 있어서 가능했다고. 촬영 당시 처음에 금테 안경을 쓰던 박근형(김재규 역)은 조언을 들은 뒤 검은 안경으로 바꿔 썼고, 이 밖에도 문갑의 위치나 높이, 대통령의 의자 모양까지 설명해 제작진이 소품을 다시 준비했다고 한다.

1999년 힐튼호텔에서 데뷔 20주년 콘서트를 열었다.

2004년 연말 자신의 콘서트에 박근혜초청한 적이 있는데, 공연기획사에서 멋대로 한 것이다. 이때문에 공연기획사가 콘서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작 박근혜는 이 생겨 참석하지 않고 꽃 선물로 대신해서 이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같이 초청된 민주당 한화갑 대표는 콘서트에 참석했다.

2006년 5월 20일 박근혜 커터칼 피습 사건이 일어나자 마음 속으로 박근혜에게 이제 정치는 그만하라는 생각을 했는데, 과거의 악몽을 보는 것 같아 좀 더 편안한 생활을 하는 게 나아보여서 그렇다고 한다.

3. 음악성

주 장르가 트로트지만 드물게 싱어송라이터의 면모도 가지고 있는 가수로 그의 히트곡들은 거의 대부분 그가 직접 작사·작곡하였다. 보통 유명한 트로트 가수더라도 자기 스스로가 곡을 써서 부르기 보다는 유명 작곡가의 곡을 받아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심수봉은 상술됐다시피 이미 악기를 다루는 능력부터 먼치킨스러우니 자기 스스로가 곡을 쓸 수 있는 능력이 된다. 그러다보니 심수봉의 곡은 단순 트로트 곡이 아닌 것이다. 여타 트로트 가수를 뛰어넘는 그야말로 '아티스트'다.

심수봉의 대표곡으로는 〈그때 그 사람〉,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사랑밖엔 난 몰라〉, 〈여자이니까〉[29], 〈백만송이 장미[30], 〈미워요〉, 〈비나리〉, 〈무궁화〉, 〈나의 사계절〉, 〈나의 신부여〉 등이 있다. 후배 가수들도 심수봉의 곡을 많이 커버한다.

백만송이 장미〉는 러시아 가요[31]번안하여 히트를 쳤다.

4.

2000년대 초반 심수봉의 팬카페 '심수봉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시작으로 해서 팬들이 직접 홈페이지를 만들고, 심수봉도 팬들과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라고 한다. '심.수.봉'이라는 이름으로 된 팬들이 만든 홈페이지 공간은 어찌된 일인지 현재는 관리가 안 된다고 한다.

심지어 북한에도 팬이 있다. 물론 김씨 일가인 김정일, 고용희, 김정은이 좋아한다. 이 때문에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의 1992년 제10부 홍영자 편에서 나온 10.26 사건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그때 그 사람 같은 노래가 나왔다. 이게 북한의 공식 매체에서 처음 공개적으로 나온 남한 노래이다. 그 민족과 운명 영화에서 박정희 역을 맡은 김윤홍이 술에 취해서 이 노래와 근대 가요 낙화유수를 불렀다가 걸리는 바람에 혁명화를 다녀오고 찍혀서 몰락했단 얘기가 있다.

5. 활동

2011년〈 불후의 명곡 2〉 첫방송에서 첫번째 전설로 등장했다. 불후의 명곡/심수봉 편 참고. 이후 2013년 97회, 2023년 600회에 다시 출연했다.

2019년 12월 20일에 〈유희열의 스케치북성탄절 특집에 출연하였고, 명불허전의 공연을 보여주어 '역시 심수봉'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2021 한가위 대기획 피어나라 대한민국 심수봉〉

2021 한가위 대기획 피어나라 대한민국 심수봉〉을 2021년 9월 19일 오후 8시에 KBS2에서 선보였다.[32]

MBN불타는 트롯맨〉 준결승전에서 남진, 주현미와 함께 전설의 심사위원으로 출연하였다. 그리고 해당 프로그램에서 신곡 부부 행진곡을 발표하였다.

불타는 트롯맨〉의 후속인 〈불타는 장미단〉 방송에 2023년 5월 2일에 첫 출연하였다. 당시에 조카손자인 손태진과 〈그때 그 사람〉을 듀엣으로 불러 많은 사람들에게 화제를 모았다.

6. 매체

본업인 가수로 매체에 출연하는 경우가 압도적이지만, 현대사를 다룬 영화드라마에서 하나의 배역으로서 종종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 중 하나인 10.26 사건의 증인이기 때문이다. 다만 비중상 단역 배우들이 주로 맡는다.

7. 대표곡

8. 기타



[1] 가수로서 성공하려면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권유로 어릴 때 스님이 지어준 법명인 심수봉으로 예명을 정했다. 관련기사대학가요제〉 때에는 심민경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므로 데뷔 후에 예명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개종 이후 인터뷰에서 본인이 개신교적인 이름으로 바꾸고 싶다고 밝힌 적이 있다.[2] 음력 7월 11일. 1950년 8월 24일 출생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성립되기 어렵다. 이 설이 맞다면 적어도 1949년 이전에 심수봉의 부모가 만났다는 결론이 나온다. 인터뷰에 따르면, 심수봉의 모친이 평양에 살다가 1.4 후퇴 당시 즉, 1951년 쯤에야 월남했다고 나온다. 월남하자마자 남편을 만나서 임신했더라도 최소한 1952년 생이다. 또한 2011년에 85세이던 모친이 26세 때 부친을 처음 만났다고 증언했다. 이것을 계산하면 첫 만남 시기가 빨라도 1952년이다. 그리고 심수봉은 재수를 하긴 했지만 1978년 〈MBC 대학가요제〉와 1979년 10.26 사건 당시에 대학생이었다.[3] 출생 당시 충청남도 서산군[4] 관련 기사.[5] 이 언니의 손자가 포르테 디 콰트로손태진이다.[6] 아버지는 심수봉 출생 직후에 사망했고, 어머니가 재혼을 해 이부 남동생과 이부 여동생이 각각 하나씩 있다.[7] MBC 라디오 PD. 심수봉에겐 2번째 남편이며, 남편 또한 이혼 경험이 있었다. 인터뷰에 따르면, 어머니도 과부고 본인도 어릴 적 삼촌한테 학대받아 사랑받은 기억이 적던 심수봉이 짝사랑하다 먼저 고백했다고 한다.# 다만 남편이 군사정권 시절 감옥도 갔다온 운동권 출신이라 그런지 사랑 표현에 서툴러 지금도 사랑에 목 마르다고 한다.[8] 1985년부터 개신교 신자가 되었고, 강남중앙침례교회에 다닌다. 현재의 직분은 집사이다.[9] 물론 한국에서 정석적인 발라드라는 장르 자체는 유재하가 등장하는 1980년대 후반에야 태동했다는게 정설이긴 하다. 일종의 트롯 버전 발라드 프로토타입격인 셈.[10]KBS 빅쇼-심수봉, 김수희 두 여자가 사는 법〉에도 나온다.[11] 심수봉의 생부 사망 후 어머니는 다른 사람과 재혼을 하였다. 이것은 새로 한 결혼의 파경.[12] 도쿄호텔로 알려져 있는데 도큐호텔이다. 둘 다 일본과 관련이 있어 오해가 있는 듯하다. 도큐호텔은 1970년대 때 일본의 도큐 전철에서 운영을 했다가 11년만인 1982년에 폐업하고 이후에는 그 건물 그대로 단암빌딩이라는 이름의 오피스 빌딩(주한 스웨덴 대사관이 세들어 있다)이 되었다. 1970년대 당시에는 '도뀨호텔'이라고도 불렸다.[13] 단, 이 동영상의 음향은 왼쪽만 재생되니 감상시 참고 바람. 좋은 음질은 여기에서. 그러나 동영상은 나오지 않음. 사족으로, 이 동영상의 MC는 이수만임예진이다.[출처] 〈노사연·이성미쇼〉 2013년 8월 6일 방송.[출처] [16] 심수봉은 신재순을 언론에서 언급할때 'Ms.신'이라고 한다. 그 사건 이후로도 둘이 한동안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17]검정 고무신과 함께 하는 기영이의 5.18 여행》에 나온 장면에서는 심수봉이 기타를 치며 〈그때 그 사람〉을 부르는데, 현실과는 달리 각색이 되어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부분에서 김재규가 진땀을 흘리며 밖으로 슬그머니 빠져나갔고, 떠난 사람 못 잊어서 부분에서 김재규가 한 손에 권총을 들고 궁정동 안가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본래는 차지철이 도라지 타령을 부를 때 빠져나갔다.[18] 박근혜 전 대통령이 1952년생인데 10.26 사태 당시 술자리에 나왔던 심수봉이 1955년생, 신재순이 1957년생이다. 쉽게 말해 자신의 딸보다 더 어린 여자들과 함께 술자리를 함께 했다는 것이다.[19] 이 때문에 이 노래는 후대에 10.26 사건을 상징하는 노래로 회자되며 훗날 10.26을 소재로 한 한석규, 백윤식 주연의 영화 제목(그때 그 사람들)으로도 쓰였다. 다만 박정희 대통령이 이 곡을 마지막으로 들었다는 설이 있는데 후술하듯이 사실이 아니고 정말 마지막으로 들은 노래는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다. 그런데 정작 노래가 다 끝나지 않았을 때 이 사건이 일어나서 그런지 박정희가 곡을 끝까지 다 들은데다가 심수봉이 노래를 원래 부른 사람이고, 심수봉의 데뷔곡이기도 한 그때 그 사람이 10.26 사건 관련해서는 더 유명하다.[20] 이때 김재규를 지명하려 했지만 기분이 아주 안좋아 보여서 차지철을 찍었다고 한다.[21] 2015년 당시 한화 이글스의 감독이었던 김성근의 응원가 한화의 김성근 감독님 사랑해의 원곡이다. 그 응원가 관련으로는 인터넷 방송인 케인의 밈이 되기도 했다.[22] 이 발언은 신재순의 진술에 의거한 것인데 이는 이 사건을 우발적이거나 개인적 원한에 의한 살인으로 둔갑시키려는 목적이었던 듯하다. 2011년 중앙일보의 기사에서 신재순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측의 강압에 못 이겨 위증한 것이라고 밝혔다.[23]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는 말을 김재규가 했다는 것은 총쏘기 전의 대화에서였고, 심수봉은 당시 노래를 부르는 상황이었기에 총을 쏘기 전 대화는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2020년 5월 20일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공개한 김재규의 음성을 들어보면 직접 '버러지'라고 했다지만 그 증언마저도 당시 재판을 녹음한 테이프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는데 당시 재판장 뒤에 신군부가 있다는 걸로 보아서 신빙성이 없다. 양쪽 발언이 어긋나는 상황이므로 판단은 알아서. 실제로 그 당시 계엄사령부 합수부가 어느 정도 신군부에게 유리하게 사건을 조작했을 거라는 의견은 당대부터 꾸준히 있었는데, 그렇다고 정말 조작된 것인지 역시 명확한 근거는 없다.[24] 동아일보 황종건 기자가 사진을 찍었다.[25] 10.26 사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던 전두환은 이때만 해도 조사받던 심수봉에게 "당신 대단하다. 남자들은 다 도망갔는데, 용기를 내서 현장에 남아 있었다"고 칭찬하면서, "이걸로 영양제라도 사먹어라"면서 수고가 많다며 당시 100만 원 위로금을 건네주기도 했을 정도로 나름 자상했다고 한다. 이때 심수봉은 사건 충격으로 인해 허약한 심신을 달래기 위해 60만 원을 보약을 지어 먹는 데에 썼다. 허나 전두환은 대통령이 된 이후 속내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이 돌변한듯 이런 고충을 겪으면서 심수봉 본인은 전두환 정부 시절 심적·금전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고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고 한다.[26] 심수봉이 알고 지내던 꽃꽂이 선생을 보고 만든 곡이다. 몇 년만에 돌아왔다 며칠만에 가버리는 선원 신세인 남자친구를 항구에서 떠나보내고 울던 꽃꽂이 선생의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27] 심수봉 본인은 "대중가요란 건 원래 많은 대중들이 좋아하는 함축성 있는 가사를 써야되다 보니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이 되는데 그걸 데모곡이라고 단정지어 금지곡을 때려버렸다."라고 아쉬워했다. 사족으로 영화 아낌없이 바쳤는데의 OST에 들어갈 〈순자의 가을〉이란 곡도 금지곡이었는데, 이유는 노래 제목이 당시 영부인의 이름과 같아서였다(...). 그 영화의 등장인물 이름이 순자였다. 이 때문에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로 제목을 바꾸었다.[28] 다만 이때도 김재규김계원은 표정이 로봇처럼 굳어있어 본인도 뭔 일 있나하고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29] 나훈아 작사, 작곡.[30] 외국곡 번안곡, 심수봉 작사.[31] 사실 라트비아 가요 〈마라가 준 삶〉이다. 그게 러시아에서 알라 보리소브나 푸가초바의 가요로 번안되고, 심수봉이 다시 리메이크한 것.[32] 다만 다시보기 및 VOD 서비스는 제공되지 않는다.[33] 부모가 운영하는 라이브카페에서 처음으로 부른 트로트 노래가 바로 그때 그 사람이어서 그렇다.[34] 선술했듯이 전두환 대통령의 부인 이름이 언급됐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고 심수봉은 이후 4년 동안 방송금지를 당한 안타까운 곡이다.[35] 선술했듯이 심수봉의 가슴아팠던 시절을 노래로 만든 곡이다.[36] 심수봉의 남편에게 사랑한다고 프로포즈를 할때 만든 곡이라고 하였다. 이때 심수봉은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된다.[37] 조성모가 원곡이지만 심수봉이 새롭게 리메이크했다.[38] 정미조 원곡이다.[39] 어머니가 실향민이라 어머니의 통일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이 곡을 만들었다. 이 곡을 듣고 어머니가 몇날몇일을 대성통곡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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