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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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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인
玄仁 | Hyun In
파일:현인선생님.jpg
<colbgcolor=#808080><colcolor=#fff> 본명 현동주
창씨명 고토 진(後藤 仁)
아호 구암(舊岩)
본관 연주 현씨[1]
출생 1919년 12월 14일[2]
경상남도 부산부 사중면 영선리
(현 부산광역시 영도구 영선동1가 183번지)
사망 2002년 4월 13일 (향년 82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3]
학력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졸업)
우에노음악학교 (성악과 / 졸업)
부모 아버지 현명근[4], 어머니 오봉식(吳鳳植)[5]
형제자매 남동생 현필주(玄弼柱), 여동생 현애숙(玄愛淑)
배우자 첫째 부인 조창길
둘째 부인 박정혜(朴貞惠)[6]
셋째 부인 김미정[7]
자녀 아들 현재헌[8], 장녀 현혜정(玄惠靜)
차녀 현수정(玄水靜), 3녀 현희봉(玄喜鳳), 4녀 현지원(玄智媛)
종교 개신교(장로회)
데뷔 1940년 '신태양 극단'[9]

1. 개요2. 생애 및 가수 활동3. 대표곡4. 여담5. 현인가요제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독특한 창법의 트로트 거성[10]
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

대한민국 최초의 대중가수.[11] 해방과 더불어 가요계에 선풍을 일으킨[12] 대한민국 가요계에 한 획을 그은 가수다.

본명은 현동주(玄東柱)이다. 당시의 대중 가수들 중 가장 학력이 높은데 도쿄 우에노음악학교(現 도쿄예술대학) 성악과 출신이다. 특유의 떠는 창법으로 인기를 끌었다. 당시에는 정말 획기적인 창법이었다.

소설가이자 독립유공자인 현진건은 그의 5촌 당숙(堂叔)이며, 독립유공자 현정건은 그의 7촌 재종숙(再從叔)이다.

2. 생애 및 가수 활동

1919년 12월 14일 경상남도 부산부 사중면 영선리(현 부산광역시 영도구 영선동1가) 183번지의 유복한 집안에서 스탠다드 석유회사 부산 사무소 직원이던 아버지 현명근과 신교육을 받은 어머니 해주 오씨 오봉식(吳鳳植)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3]

1938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에는 현 도쿄예술대학의 전신인 우에노 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했다. 원래 그의 아버지는 현인이 사관학교에 가기를 원했지만, 현인 본인은 음대에 진학하여 교수가 되기를 희망했다. 이에 화가 난 아버지는 그의 대학 학비를 끊어버렸다고 한다. 일제의 강제 징용이 시작되자 중국 상하이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악단 '신태양'을 조직해서 활동한다. 해방 이후, 귀국하여 악단을 다시 조직하여 극장 무대에서 연주하며 다닌다. 그 후 당시의 유명한 작곡가박시춘이 찾아와서 자신의 곡을 불러달라고 한다.

현인은 "성악도가 유행가 따위를 부를 수는 없다"며 거절했지만, 박시춘이 거듭 권유하자 며칠 생각해본다고 하고, 집에서 며칠 동안 고민을 한 뒤, 결국 대중가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박시춘은 현인에게 곡을 주었고, 이 곡이 바로 신라의 달밤이다. 이 곡은 발표 당시에 정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현인을 가요계의 정상에 등극하게 했다. 이후 현인은 <비 나리는 고모령[14]>, <고향만리> 등을 연달아 히트시킨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슬픈 정서를 잘 보여주는 <굳세어라 금순아>[15]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들으며 울기도 했다. 시대를 대변하는 듯한 가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후 대한가수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74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을 가서 '가스라이트'라는 레스토랑을 운영했지만, 한국에서의 무대가 그리워서 1981년에 귀국한다. 1991년에는 <노래하는 나그네>, <길> 등의 신곡들을 발표한다. 1999년까지는 KBS 가요무대와 악극 등에 출연하여 왕성한 활동을 했었지만, 지병인 당뇨병의 악화로 2002년 4월 13일, 82세로 사망하였다.
현인 가요무대 스페셜

3. 대표곡

4. 여담

현인 '베사메 무쵸'

KBS 가요무대에 출연하여 베사메 무쵸를 부른 영상. 본인의 번안가사와 원곡 가사를 섞어서 부르는데, 'Como si fuera esta noche la ultima vez' 부분이 요즘 가수들과 같이 매우 매끄럽다.
현인 '꿈속의 사랑'

KBS 빅쇼에 출연하여 꿈속의 사랑을 부른 영상. 1절은 한국어 가사, 2절은 중국어 가사로 부르는데 중국어가 아주 매끄럽다. 해방되기 전에 중국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현인 '굳세어라 금순아'

5. 현인가요제

매년 8월초 그를 기리기 위한 현인가요제가 송도해수욕장에서 개최된다. 2005년 1회를 시작으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EXO 등 유명 가수들도 초청되어 꽤나 많은 인파가 몰려든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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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부 현명근 · 모 오봉식 · 남동생 현필주 · 여동생 현애숙 · 5촌 당숙 현진건
첫째 부인 조창길 · 둘째 부인 박정혜 · 셋째 부인 김미정
장남 현재헌 · 장녀 현혜정 · 차녀 현수정 · 3녀 현희봉 · 4녀 현지원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 · 꿈속의 사랑 · 럭키서울 · 베사메 무쵸 · 비나리는 고모령 · 서울야곡 · 신라의 달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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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관문화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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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손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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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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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정윤주
작곡가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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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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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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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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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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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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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1988 서울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 잡고》를 부름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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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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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나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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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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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강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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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김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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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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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민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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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장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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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황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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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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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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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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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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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흥[7]
무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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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찬성공파(구 천녕 현씨) 26세 주(柱) 항렬.[2] 음력 10월 22일.[3] #[4] 족보명 현명건(玄命健).[5] 해주 오씨이다.[6] 밀양 박씨이다.[7] 초명 김영자(金泳子). 김해 김씨이다. 1955년 미스코리아 진[8] 족보명 현정일(玄正一).[9] 노래로써의 데뷔는 1947년의 신라의 달밤이 취입곡이나 그가 데뷔한 것은 1940년 상해에서 조직한 신태양이 맞다. 이를 방증하듯 1990년에 가요무대에서 현인 데뷔 50주년 특집을 마련해주었다.[10] 사실 엄밀히 말하면 현인은 사실 순수 트로트 가수는 아니다. 굳세어라 금순아의 이미지가 강하다보니 생긴 이미지지, 애초에 성악가 출신이기도 하며 데뷔곡 신라의 달밤부터가 펜타토닉 스케일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전통 트로트가 아닌데다, 베사메무쵸 같은 라틴 음악부터 장미 꽃 인생 같은 상송까지 소화하며 트로트 일변도이던 가요계를 흔들었다. 이 때문에 오히려 현인을 트로트 거성에 가두는 것에 비판적인 이들도 있다. 음악 자체가 트로트랑 근본이 아예 다른 화성과 리듬으로 구성되어 있다 굳이 정의를 하면 동양식으로 해석 한 프랭크 시나트라 풍의 스탠다드 팝이나 재즈 편곡을 활용한 고전가요 위주로 부른 가수이다.[11] 일반적으로 한국사에서 최초의 대중가수라 말해지는 가수는 1920년대부터 활동한 윤심덕, 이애리수, 이정숙, 채규엽 등이 있지만, 이들은 활동했던 시기가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이들도 일본 제국의 가수일 뿐 대한민국의 가수가 아니므로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 최초의 대중가수는 현인이 맞다.[12] 1960년에 현인이 TV에 나와 <신라의 달밤>을 부를 때, 앞부분에서 MC가 소개해주던 멘트.[13] 유복한 가정 형편 덕분에 현인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유학 생활을 하며 졸업하였고,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14] 지금은 '내리는'이 올바른 발음 표기고, '나리는'은 잘못된 표기지만, 당시에는 '나리는'으로 발음했다.[15] 흥남 철수가 배경이다.[16] 음반에서는 본명인 "현동주"로 표기되어 있다.[17] "과거를 묻지 마세요", "백치아다다(이후 가수 문주란이 리메이크 하였다.)" 등을 부른 가수이자, 디디디라는 노래로 유명한 가수 김혜림의 모친이다.[18] 참고로 '현인 불멸의 힛송앨범'에 수록된 "세월은 가고"의 원제는 "그대는 가고"이다. 이후 왜 이 제목으로 음반이 나왔는지에 대한 이유는 불명이다.[19] 회갑 기념에서는 "노래의 나그네"로 방송되었다.[20] 남일해의 '빨간 구두 아가씨', 김상희의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 등을 작사한 작사가로 2004년 별세했다.[21] 작곡가이자, 전 KBS 관현악단장으로 가요무대에서 20년 동안 지휘를 하기도 하였다. 이후 2022년에 별세했다.[22] 결혼기념일도 알고 있었다![23] KBS 예능 프로그램 노래가 좋아에서 특집 프로그램으로 6주간 방송된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이다.[24] 그외에도 김정구가 지나갈땐 "눈물젖은 두만강 지나간다.", 고운봉이 지나갈땐 "선창 지나간다."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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