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축구 선수에 대한 내용은 윤형주(축구선수) 문서 참고하십시오.
윤형주 尹亨柱 | Yoon Hyung-joo | |
<colbgcolor=#283593><colcolor=#FFFFFF> 출생 | 1947년 11월 19일 ([age(1947-11-19)]세) |
서울특별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파평 윤씨 (坡平 尹氏) |
신체 | 174cm |
가족 | 할아버지 윤덕현 아버지 윤영춘, 어머니 김귀순 동생 윤병주, 윤정주, 윤응주 슬하 1남 2녀 |
학력 | 대광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예과 66 / 수료·명예학사) 경희대학교 의과대학[1] (의학 / 중퇴) 고신대학교 (선교학 / 명예박사) |
현직 | 한국해비타트(이사장) |
종교 | 개신교(예장통합)[2] |
데뷔 | 1971년 동아방송 라디오 ‘0시의 다이얼 DJ’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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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성의 포크 뮤지션.
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
1960~1970년대에 송창식, 조영남, 김세환과 같이 세시봉에서 활약한 것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포크 가수이자 작곡가, 작사가. 시인 윤동주의 6촌 동생[3]이기도 하다.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
2. 활동
젊은 시절의 윤형주 |
동아방송의 0시의 다이얼의 DJ를 시작으로 방송 활동도 많이 했는데, KBS 2TV의 연예가중계 MC, SBS "콘서트 음악세상"의 진행자,[4] KBS 라디오 프로그램인 음악앨범의 DJ[5]로 활약한 적도 있다.
1993년부터 대한민국 음악쇼를 이끌어 온 대한민국 대표 음악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시도를 통해 색다른 무대를 선사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KBS 1TV 열린 음악회 초대 진행자이기도 하다. 그밖에도 CBS RADIO 찬양의 꽃다발, MBC-FM 한밤의 데이트 DJ로도 활약했다. 이처럼 가수 활동 못 지 않게 방송 기획과 진행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잘생긴 얼굴, 좋은 학벌, 집안, 뛰어난 작곡 능력, 부드럽고 가녀린 미성 덕에 쎄시봉 멤버 4인 중에서 김세환과 함께 여성팬이 가장 많은 가수였다.
한국해비타트 이사장 윤형주 |
3. CM송
CM송 분야에서 윤형주는 김도향처럼 매우 유명하다. 윤형주가 만든 CM송은 무려 1,400여 개나 되는데, 유명한 상품은 다음과 같다.- 오란씨, 새우깡, 롯데껌(쥬시후레쉬,스피아민트) - 듣기[6]
- 롯데월드 어드벤처 - 메인 테마송[7]: 듣기
- 신세계 - 생활속의 백화점 신세계: 듣기
- 농심라면 : 형님 먼저 아우 먼저 #
- 영플레이모빌: 뛰고 달리고 구부리고 앉고...(맨마지막 "영실업"은 윤형주 본인 음성)#
- 베지밀: 어린이의 건강은 축복된 내일 엄마들의 지혜로운 영양간식 베지밀...
- 베비라[8]: 사랑을 입자 베비라. 엄마의 사랑 까꿍 베비라.듣기
부산교통공사 부산 도시철도 출발 방송에서 나오는 CM송도 윤형주의 작품.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듣기
그 외에도 2008년부터 법무부 로고송 <지킬수록 기분좋은 기본>을 작곡한 바 있다. 검찰청 전화 시나 퇴근할 때, 심지어 교도소 내에도 로고송이 나오며, 한때 교정본부 웹사이트에도 해당 로고송이 흘러나왔다.
특히, 이 곡은 2017년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도 삽입곡으로 자주 흘러나왔다.
2017년경에는 청호나이스의 로고송을 만들었는데, 주로 콜센터 및 임직원들의 통화연결음으로 사용중이다.
4. 논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2018년, 2020년에 사기혐의로 피소된 적이 있다. # #5. 여담
- 경기고등학교[9]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예과에 진학한 수재이다. 의대에 진학한 이유는 부친인 윤영춘 교수가 윤형주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연세대에 입학한 후 음악에 심취한 나머지 예과 과정만 수료하고 중퇴하였으며, 이후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본과) 1학년으로 편입했지만 결국 경희대에서도 중퇴하게 된다. 그래서 윤형주는 학력상으로 엄밀히 말하면 고졸이지만, 대학교 입학을 중요시 여기는 대한민국의 특성상 졸업하지 않았더라도 연세대학교, 경희대학교 두 학교로부터 모두 동문으로 대접받고 있으며 동문 행사에도 나가곤 한다.[10] 참고로 정대철 더불어민주당 고문과 절친이다.
- 쎄시봉에서 조영남, 송창식 등과 활동하다가 송창식, 이익균과 함께 트리오 세시봉을 결성하였지만 이익균이 방송 2일 전에 입대하는 바람에 송창식과 듀오로 데뷔하게 되는게, 이가 바로 전설적인 포크 듀오 트윈폴리오. 이 트윈폴리오로 대한민국 포크계를 휩쓸었지만, 부친의 압력으로 해산되었다. 그들의 그때 당시 청춘 시절을 다룬 영화 쎄시봉 에선 강하늘이 그의 젊은 시절을 연기했다.
- 양희은과도 인연이 깊은데, 양희은이 쎄시봉 콘서트에서 언급하길, 난소암으로 인해 수술을 할 돈이 없는 양희은을 위해서 열심히 뛰어다니며 치료비를 마련해서 줬다고 한다. "무뚝뚝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마음이 따뜻한 분"이라고 이야기했다.[11]
- 1975년 12월, 연예계를 대상으로 이루어진 대마초 단속에서 윤형주는 대마초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다.[12] 윤형주는 재판결과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에 따라 방송 출연이 금지되었다가 3년만인 1979년에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이 때 실형을 살던 다른 연예인들은 한참 뒤에야 활동을 재개하거나 아예 연예계를 떠나야 했다는 점에서 윤형주의 사례는 매우 석연치않다. 이는 소위 '잘사는 집안'에 대한 정권 및 방송가의 특혜, 혹은 부유한 집안 배경에 따라 방송사와 쇼부를 친 것으로 간주된다. 또한 윤형주가 상습적으로 대마초를 사용했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13]
- 6촌형인 윤동주의 시에 곡을 붙여서 노래를 만들려고 했으나, 아버지 윤영춘 교수가 시도 노래[14]라는 말을 하면서 그걸로 노래를 만들지 말라[15]고 하는 바람에 윤형주 본인은 윤동주의 시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16]
- 20대 시절엔 굉장한 미성의 소유자였다. 한때 미성으로 이름을 날렸던 후배 윤종신, 유영석, 박학기를 연상케 할 정도로 맑은 미성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드문 목소리였기에 당시 윤형주하면 미성의 목소리를 떠올릴 정도로 굉장히 유명했었다고 한다.[17]
- 잰틀한 외모와 미성으로 유명한 가수지만 개그맨 서승만과 조형기에 의하면 의외로 윤형주는 쎄시봉에서 활동하던 시절 신상사의 명동파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정도의 절륜한 주먹이였다고 한다.[18] 조영남이 교제하던 여자가[19] 희롱을 당하자 3명을 한번에 제압하고 십수명을 상대로 분투했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쎄시봉에서 활동하는 가수들의 가드 역할도 종종 해줬다는듯.
- 동아방송의 0시의 다이얼을 진행하던 시절, 푸른집의 그 분 외아들인 박지만 씨가 그 분의 당선을 축하한다고 바비 셔먼의 '리틀 우먼(little woman)'을 신청곡으로 엽서를 보낸적이 있다. 당시 동아방송이나 윤형주는 이 엽서가 장난인지 진짜인지 여부를 파악하느라고 진땀을 뺐다 카더라.
- 전유성과 함께 라디오 방송 '0시의 다이얼'을 하다가 전유성이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부부싸움을 하면 육박전'이란 개그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를 들은 윤형주의 지인인 누나가 대통령 전용기의 스튜어디스여서 이 개그를 박정희에게 직접 했단다. 박정희 부부도 이를 듣고 박장대소했다고. 그런데 정작 그 밑의 높으신 분이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며 해당 방송의 PD를 혼쭐내고 전유성 본인도 3달간 출연 정지를 먹었다고 한다. 출처(윤형주의 회고)
- 마찬가지로 0시의 다이얼 DJ 자리를 이장희(세시봉 프랜즈의 이장희다)에게 넘겨 줬다. 그런데 이장희가 윤형주의 '비의 나그네'를 호우 주의보, 호우 경보가 터진 날 밤에 틀었는데 가사가 문제되었다. 특히 볼드체 친 부분이 문제가 되었는데...
님이 오시나 보다 밤 비 내리는 소리
님 발자욱 소리 밤 비 내리는 소리
님이 가시나 보다 밤 비 그치는 소리
님 발자욱 소리 밤 비 그치는 소리
밤 비 따라 왔다가 밤 비 따라 돌아가는
내 님은 비의 나그네
내려라 밤비야 내 님 오시게 내려라
주룩 주룩 내려라 끝없이 내려라
님이 가시나 보다 밤 비 그치는 소리
님 발자욱 소리 밤 비 그치는 소리
온 나라가 호우로 물 난리가 났는데 이걸 트니 그야말로 조롱이 따로 없었고 덕분에 담당 PD, 작가 등 0시의 다이얼 제작진들은 날 밝고 불려가서 죄다 경위서 쓰고 비 오는 날에는 금지곡이 되었다 한다. 이 이야기는 공감토크쇼 놀러와에서 진행한 세시봉 콘서트 특집 때 소개되었으며 MC들 패널들 관객들 할 것 없이 너무 황당해서 모두 빵빵 터졌다.
- 전두환의 군인 시절 열린 진급 축하 파티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두 개의 작은 별'이었다. 노래를 부르고 나서 전두환 측 사람들에게 장군님 앞에서 "재수없게 별 떨어지는 노래를 불렀다"며 엄청 까였다.
- 1980년대에 해태와 롯데는 껌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을 했었는데 이 때 윤형주는 두 경쟁회사에게 모두 CM송을 만들어주면서 양다리를 걸친 적이 있다. 그 정도로 윤형주의 CM송은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해태제과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최종 승자는 롯데제과가 되었다.
- 아직까지도 불리는 유명한 곡인 '조개껍질 묶어'는 대학시절 해수욕장에서 미팅을 하다 떠나려는 여학생들을 붙잡기 위해 30분 만에 작사 작곡을 했다고 한다.
- 술자리나 신고식에서 노래를 시키기위해 부르는 '노래를 못하면 장가를 못가지'는 윤형주의 '미운사람'이다. 물론 아~ 미운사람 부분과 멜로디만 따왔으며 가사는 완전히 다르다.
- 전주기전대학의 이사 중 한 명이다.
- CCM도 작곡하였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를 작곡하여 널리 불렸다.
[1] 연세대 의대에서 예과 수료 후 경희대 의대 본과로 편입했다.[2] 모태신앙이다. 동대문 동신교회 출신이며, 현재는 온누리교회 양재성전(구 횃불교회) 장로이다.[3] 6촌 재종형제뻘이지만 나이 차는 30살이라 부자(父子) 수준이다. 윤형주의 아버지인 윤영춘 교수가 오촌 조카 윤동주 시인보다 겨우 5살 많다. 윤동주 시인 작고 후에 태어나서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순국하자 윤영춘 교수가 그 유해를 직접 안고 고국에 돌아왔다고 한다.[4] 현재 뉴욕에서 디자이너로 활동 중인 임상아와 함께 진행했다. 1996년에 종영.[5] 참고로 현재의 음악앨범의 DJ는 그랜드현우 그래서 현재의 프로그램 이름은 이현우의 음악앨범이다.[6] 최근 롯데껌 CM 송이 반주 리메이크로 다시 나오는중 주로 음악 FM(경북 포항기준 97.9Mhz)의 광고 타임때 나온다 특히 오전때.[7]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재편곡 없이 그대로 사용 중일 정도로 완성도가 매우 높은 곡이다. 이 노래를 부른 주인공은 윤형주의 딸들이다. 풀버전을 들어본 사람은 많이 없을지 몰라도 '여기는~롯데월드~'라는 부분만큼은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을 듯.[8] 1980~1990년대에 유명했던 유아복 브랜드[9] 62회 졸업생이다. 특수목적고등학교가 존재하지 않았고 고입 시험이 있었던 당시로서는 국내 최고의 명문 고등학교였다. 경기고등학교/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일명 'KS 마크'라고 불렀다.[10] 윤형주는 이장희와 함께 2014년 5월 연세대학교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여담으로 세시봉으로 함께한 김세환이 경희대학교를 나왔다.[11] 보험 문제도 해결해주시며 열심히 도와줬던 듯 하며, 양희은이 이에 대해 "윤형주 선배는 어려운 일도 간단하게 해결해주는 능력이 있으셨다며 고마워하셨다."#[12] 참고로 사이키델릭 록 이후에 뮤지션들이 약물에 손을 대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또한, 이때 이루어진 마약단속은 박정희 정권이 직면했던 각종 논란들로부터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방책이었다. 1975년 한해에만, 베트남 전쟁 패전 (남베트남 정권 붕괴), 유신헌법 강행 통과, 인혁당 사형집행, 긴급조치 9호발동 등 정권 말기의 실책들이 연달아 터졌고, 이에 따라 소위 '깨어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정권비판이 이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포크송 가수들은 미국의 히피운동에 힘입어 이러한 정권비판에 앞장서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대마초 단속의 첫 대상으로 포크송 가수들이 지목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13] 윤형주의 사례가 매우 석연치않다는 점은 조용필과 신중현의 유사사례를 살펴보면 더 분명해진다. 신중현은 과거 재판과 벌을 받은 대마초 흡연에 대해 법을 소급적용하여 형을 받았으며, 박정희 사망 전까지 복권되지 않았다. 이는 형벌불소급의 원칙과 일사부재리의 원칙 등 형법의 대원칙들을 위배해가면서도 처벌을 받은 사례이다. 조용필의 경우 아예 대마초를 흡연하지 않았다 애초에 기관지 알레르기가 있어 대마초를 필 수 없는데도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만으로 유죄선고를 받았으며 마찬가지로 박정희 정권이 끝날 때까지 복권되지 않았다.[14] 시(詩)의 본래 의미가 노래이다.[15] 구체적으로는 "시도 노래다. (중략)절대 네 잘난 작곡으로 시의 본래 의미를 해치지 말라"고 하셨다고.[16] 하필 이 얘기를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 쎄시봉 특집에서 조영남이 서시를 부른 뒤에 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조영남을 디스하게 된다.[17] 현재에는 목소리가 20대 시절보다 많이 굵어졌다.[18] 물론 건달 출신이라는게 아니고 일신의 무력이 굉장했다는 말[19] 영화 시나리오 작가 유한철의 딸인 유영희라고 한다.[20] 양재동 온누리교회 신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