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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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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채, 제명, 고인†
(a): 29기 중에서 유일하게 개그콘서트에 출연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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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유성
全裕成 | Jeon Yoo Sung
파일:2019_전유성.jpg
<colbgcolor=#878787> 출생 1949년 1월 28일 ([age(1949-01-28)]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1]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천안 전씨 (天安 全氏)
거주지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신체 175cm[2], 75kg
데뷔 1969년 MBC 방송작가
학력 서울청운국민학교 (졸업)
선린중학교 (졸업)
서라벌예술고등학교 (졸업)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 / 학사)
가족 아버지, 어머니
딸 전제비, 손녀 김래인
종교 불교
소속 랄랄라온
소속사 가족엔터테인먼트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활동3. 개인사4. 출연 작품
4.1. 방송4.2. 영화4.3. 광고
5. 어록6. 저서7. 가족오락관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코미디언작가・공연기획자.[3]

2. 활동

서라벌예대 졸업 후 정극 배우를 지망했다가 여러 번 물먹었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MC코미디언인 "후라이보이" 곽규석의 방송이나 공연용 원고를 써주는 일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일종의 코미디 작가로 데뷔한 셈이다. 전유성은 곽규석이 MC를 보던 쇼쇼쇼 녹화장에 구경을 갔다가 곽규석이 화장실에 가자 따라가서 "이거 원고는 누가 써요?" 라고 물어봤다고 한다. 곽규석이 "내가 쓴다. 왜?" 라고 하자 "저... 다음부터는 제가 써오면 안 될까요?" 라고 말하고 원고를 써서 다음회 녹화장에서 원고를 건넸고 그가 만든 유머와 아이디어들이 방송에 채택되면서 방송작가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구미권의 코미디언 데뷔와 매우 흡사하다. 미국을 비롯한 구미권 코미디언들의 데뷔 루트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뛰어난 콩트 연기력으로 극장에서 입지를 얻고 SNL같은 콩트 스케치에 출연하여 입지를 얻는 부류,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지역 단위에서 입소문이 퍼지다가 데뷔하는 부류, 또는 코미디나 애니메이션 작가로 데뷔하여 유머 감각과 아이디어를 인정받고 TV에서 쇼 호스트를 하는 부류로 나뉜다. 작가 출신 미국 코미디언 중에서는 대표적인 인물은 코난 오브라이언이 있는데 전유성과 비슷하게 데뷔한 케이스다.

1920년대, 1930년대, 1940년대에 태어난 악극단 출신 구세대 코미디언들이 여전히 활약하던 시절에, 1950년 전후에 태어나 개그맨이라는 이름 하에 새로운 코미디를 하던 1세대 개그맨, 신세대 코미디언 군단의 한 명이었다. 전유성, 고영수, 김병조, 임성훈(가수 겸업) 등이 이 부류에 해당한다. 최양락이 방송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전유성은 개그맨 생활 초기에는 영화사에서 카피라이터로도 근무했었고 업계에서 실력이 좋기로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연예계와 그 외 분야에서 여러가지 일을 했지만, 연예인의 인기 지표라고 할 수 있는 텔레비전에서의 활약은 별로 없다. 즉 TV에 주연급으로 나온 적이 없다는 이야기. 그 이유는 본인이 TV에 나오는 걸 꺼리기도 했고,[4] 또한 말보다는 글로 웃기는 데 더욱 재주가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전유성은 '슬로우 개그'를 구사하기 때문에 한번쯤은 더 생각해 봐야 이해되고 웃긴데, TV 방송이라면 진행이 워낙 빠르니 그런 생각을 할 시간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 개그콘서트 초창기 때 스탠드업 코미디 형식인 '전유성의 개그클리닉'이라는 코너를 만들었지만, 이것 역시 얼마 못 가서 끝났다.

게다가 1980년대 개그맨 전성 시절은 김형곤, 심형래, 이경규[5], 이봉원, 임하룡, 최양락, 김미화, 주병진 등 그야말로 전국구 스타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때라 상대적으로 안 웃긴 것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기도 하고... 그래도 한때 임하룡이나 최양락 등과 같이 나오면서 2인자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 시절 대표 유행어로 네로 25시에서 "얘는 무슨 말을 못하게 해!"가 있었다. 전유성은 정확히 이들보다 연령대든 데뷔 시기든 한참 선배뻘이어서 노련한 실력과 각종 아이디어로 이들을 뒤에서 받쳐주던 중견 개그맨이었다.

한편 1991년 내일은 챔피언을 통해 영화 감독에 데뷔했다가 흥행에 실패하자 비디오용 어린이 영화로 발길을 돌렸다.[6]

대한민국 최초로 희극인들을 부를 때 개그맨이라는 호칭을 쓴 사람이다. PC통신 시절에도 아이디가 gagman1이었다. 당시에는 코미디언이라는 말을 놔두고 개그맨이라는 이상한 말을 쓴다고 선배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단, 최양락이 각종 TV프로그램에서 "전유성씨가 개그맨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개그맨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사람은 전유성이 윤형주의 라디오 프로그램 '0시의 다이얼'로 데뷔할 당시 라디오에 같이 출연했던 함께 출연했던 팝 전문가 겸 영어교육자 신동운이다. 당시 '0시의 다이얼' 공개방송에서 사회자가 '개그 스테이지'라는 코너에 출연했던 전유성을 소개하면서 코너 명칭을 고려해 '개그스타 전유성씨를 모시겠습니다'라고 부르곤 했는데, 전유성은 스스로를 '개그스타'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는 쑥스럽다고 하니 신동운씨가 '그럼 개그맨이라고 하면 되지'라고 제안해서 그 때부터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7] 사실 Gag, Gagman이라는 단어와 그 사용방식은 영어사전에도 있는 정상적인 단어와 사용방식이지만 영어권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이 아니다보니 한국 사람들까지 알만한 단어는 아니라서 콩글리시로 오해받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보면 굉장히 선구자적인 사업들을 많이 고안해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심야 볼링장과 심야 극장[8]이 있다. 1999년 나온 책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만 봐도 "신선한 공기를 캔에 담아 팔기" "생일 신문"[9], "읽던 책 산골 아이들에게 기증하기", "가로수 분양"[10], "요리 시설/재료를 제공하는 가게"[11], "맥주 주유소"[12] 등 일상이나 현실이 된 아이디어들이 많다. 광고 카피라이터로도 꽤 이름을 날려서 '하늘에서 콜라병 하나가 떨어지며 영화가 시작됩니다.'라는 영화 '부시맨'의 카피를 쓰기도 했다. 그밖에도 호러영화 헬 나이트라든지 여러 영화 광고 카피도 그가 썼다.

또한 수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연예계에서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는 SM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이수만의 "컴퓨터를 모르면 안 되는 세상이 온다."라는 조언을 계기로 컴퓨터에 심취해 쓴 저서 '컴퓨터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는 정보통신부에서 상까지 받았다.[13] 책의 서술에 따르면 '초보자용이랍시고 나온 책들 중에 정말 쉬운 게 하나도 없어서' 직접 썼다고...

이렇듯 대중들 사이에서는 TV에 출연하여 선보인 개그보다 다른 업적으로 더 유명한 인물이고, 아이디어맨으로 기억된다.

그렇지만 전유성은 개그 쪽으로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많은 아이디어로 후배 개그맨들의 개그에 조언을 많이 해주었고 코너의 틀까지도 잡아주기도 했다는 공로자. 쉽게 말하자면 개그계의 아이디어 뱅크. '아이디어가 막히면 전유성 선배를 찾아가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았을 정도였다. 실상 1980년대 KBS 개그 전성기와 1990년대 개그콘서트를 개국시킨 시기까지 그가 배후에서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당장 최양락은 까불거리는 성격으로 전유성을 골려먹기도 했지만 반농담식으로 전유성의 제자 내지는 그에 영향받은 후배라고 공공연하게 밝힐 정도였다.[14] 최양락은 자신이 타인의 개그에 리액션이 좋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전유성의 ‘개그맨은 웃기는 사람이지 웃는 사람이 아니다’ 라는 가치관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70년대, 본인이 20대이던 시절에 이미 이문세, 주병진 등을 발굴했었을 만큼 연예인들 보는 눈이 뛰어났다. 실제로 이문세와 주병진은 전유성을 은인으로 생각한다.

또한 전유성은 가수 김현식을 알아보고 가수로 나가길 권유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전유성이 김현식 20주기 추모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1971년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신촌에서 유명한 음악 다방 DJ로 일하던 20대 초반의 전유성은 김현식에게 통기타를 가르쳐준 사촌형 양국정과 알던 사이였는데 당시 양국정이 사촌아우라고 하면서 데려와 다방에서 노래를 부른 13살인 어린 김현식을 보고 전유성이 기겁했다. 전유성은 "너는 음악다방 같은 곳에서 노래부를 재능이 아니야, 정말 가수로 나가면 대박일거다!"라고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그외에 여러 음악인들에게 김현식을 소개해주기도 하였는데, 단적으로 후일 김현식과 함께 신촌블루스를 결성하게 되는 엄인호도 전유성의 소개로 김현식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는 인터뷰를 한 바 있다.

코미디 시장 이라는 코미디 극단을 운영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발굴된 희극인들이 박휘순, 신봉선, 안상태, 김대범, 황현희, 김민경 등으로, 이 멤버들을 선착순으로 뽑아서 키웠다고 한다. "오디션을 봐서 뽑으면 어차피 될 놈을 뽑는거지, 내가 키우는게 아니지 않느냐?"라고 한다.

시카고에서 살다가 대한민국에 놀러와서 인사동에서 운영하던 자신의 가게에 손님으로 왔던 한채영을 알아보고 (전화번호를 받아) 데뷔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이수만SM엔터테인먼트 소속 아이돌 중 예능에 뜻이 있는 사람은 전유성에게 보내서 개그 특훈을 시킨다고 한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희철, 이특, 신동이 있다.

그 실력은 지금도 건재하다. 실제로 2020년까지 KBS의 간판 개그 프로그램이었던 개그콘서트의 원안자이다. 대학로에서 간간히 이루어지던 소극장 개그를 방송으로 끌고 들어온 당사자로 방송 3사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의 창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그콘서트에서는 초창기 멤버로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다만 개그 콘서트라는 '타이틀'은 컬트삼총사의 개그콘서트에서 따온 것으로, 개콘을 방송으로 올릴 때 이들의 허락을 받았다. 단, 컬투가 제공한 것은 '이름 뿐'으로 포맷은 KBS의 개그 콘서트 측이 오리지널인 것이 맞다.[15][16]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화면을 가득 채우던 자막을 '자막 공해'라 부르며 비판하고 '적어도 공개 코미디에는 자막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 이때문에 개그 콘서트에서는 초창기부터 2019년 여름 개편 이전까지 자막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후발 주자로 등장한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코너 이름과 멤버 소개를 제외하면 예능을 제외한 한국의 정통 코미디 프로그램들은 자막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소설가 이외수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 이외수만큼은 아니지만 개그맨들 중에선 '기인' 소리를 듣는 인물이라 서로 죽이 잘 맞는지도. 카페 이름이나 책 이름을 보면 확실히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이를테면 전유성 이름이 전제비인데 이 이유가 딸이 만들어진 곳 이름이 '제비 여관'이라서...참고로 딸은 첫번째 아내 슬하에서 난 외동딸로[17] 결혼도 했고 자식도 있다.

가수 진미령과 15년 넘게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다가 헤어져서 독신 생활 중이다.

또한 예전에 SBS '좋은 친구들'이란 쇼 프로그램에서 "전유성을 웃겨라"라는 코너를 맡았었는데(일반 시민들이 참가해 개인기나 개그를 선보이며 전유성을 웃기는데 성공하면 상품을 받는 코너) 어지간해선 결코 웃지 않는 초강 내공을 선보이며 시청자들을 감탄하게 했었던 적도 있다. 본인 말에 의하면 원래 잘 웃지 않는 성격이 아니라 코너의 성격상, 신선한 개그가 아니면 일부러 웃음을 참았다고 한다.[18] 갈갈이 박준형도 일반인 신분으로 전유성을 웃겨라에서 우승하며 처음으로 TV에 나왔다.

사실 이 코너는 전유성이 밤무대 공연시 주로 했던 레퍼토리였다. 이 때는 그를 웃기면 상금으로 5만원을 주게 되어 있었는데, 그 5만원이 당시 그의 밤무대 출연료와 같은 금액이라, 상금을 주는 경우가 생기면 자기 출연료를 받을 수가 없게 되기 때문에 생계 개그 억지로라도 웃음을 참아야만 했던 것이었다. 당연히 이때도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가, 나중에 엘리베이터 같은 한데서 빵터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김학래에 의하면 밤무대에 전유성이 출연했을 때 뒷 출연자가 안 와서 시간을 끌어야 했었는데, 워낙 애드립이 생각이 안 나다 보니까 "저... 계속해서, 제 옆모습을 보시겠습니다!"라고 하다가 계속 안 오자 "이번에는 제 뒷모습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에피소드는 여기를 참고.

군기와는 담을 쌓은 개그맨으로도 유명하다.[19] 알다시피 그가 한창 활동하던 시절은 개그계의 똥군기가 엄청나게 쩔어주던 시대였던 것을 고려하면 특별한 케이스인 셈. 특히 개그맨이란 용어를 밀면서 원로 코미디언들에게 미운털이 박혀 대기실에 못 들어간 적도 있다고... 하지만 본인은 '폭력은 딱 내 선에서 끝내고 대물림은 하지말자'는 생각에 후배들을 일절 터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수많은 개그맨 후배들이 많이 따르는 듯 하다. 이와 관련된 일화 중 하나로 개그계 최강 깐족 대마왕 최양락이 어느 날 전유성에게 뜬금없이 "형님은 너무 싸가지가 없어요!"라며 내뱉고 줄행랑을 놓았는데 화가 난 전유성은 최양락의 뒤를 쫓았지만 결국 잡지 못했다. 다음 날 최양락을 만난 전유성이 "양락아, 너 어제 어디로 갔냐?" 라고 묻자 최양락은 "형님한테 맞을까봐 뒷문으로 도망갔지요."라며 천연덕스럽게 답했고 전유성은 "그래 잘했어! 너 어제 나한테 잡혔으면 맞아 죽었을거야."라며 조용히 넘어갔다고 한다.[20] 나름대로 카리스마도 있는 편인데, 주병진이 밝히길 술집에 앉자마자 술을 먼저 두잔 마시더니 주정부리기 싫다며 먼저 자리를 나갔다고 한다.

영화배우 박중훈과도 묘하게 악연이 있는 사람이다. 박중훈이 영화배우 데뷔 전 KBS 젊음의 행진 통기타 오디션을 보려고 당시 심사위원이던 전유성 앞에서 준비해간 노래[21] 한 소절 부르기도 전에 "나가."라고 대답해서 박중훈을 잘라버렸다.[22] 박중훈을 영화 데뷔시킨 감독과의 만남에서 마침 전유성과 안면이 있었던 감독이 박중훈을 전유성에게 소개하며 "이 친구 어떠냐"라고 묻자 그 자리에서 "별론데요"라고 대답하지를 않나... 훗날 박중훈이 영화배우로 대성한 뒤에 전유성에게 "그때 정말로 제가 별로라고 생각하셨어요?"라고 묻자 그때 전유성이 대답하기를 "나는 아직도 니가 왜 떴는지 모르겠다"고... # 다만 이와는 별개로 서로 사이는 원만한 것인지 2019년 5월 11일 앞서 tvN 토크쇼 택시에 출연하고 자신의 SNS에 “전유성 선배님은 제가 영화배우를 처음 할 때부터 정말 오랜 시간 격려해 주시고 많이 도와주신 분”이라며 “오늘 데뷔 50주년 기념 ‘전유성의 쇼쇼쇼’ 공연에서 ‘비와 당신’부르면서 축해드렸어요. 사회는 영자가”라는 글을 올린 뒤 전유성의 무대에 함께 섰던 이영자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진을 게시했다. #

취미는 독서로, 방송가 최고의 다독가로 유명하다. 또한 방송 활동을 거의 쉬는 기간에도 후배 개그맨들의 방송을 꼼꼼하게 챙겨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3. 개인사

그 당시 사람치고는 장신으로[23] 키가 175cm다.[24]

2009년경부터는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양원리에서 '니가 쏘다쩨'라는 카페를 운영했다. 특이하게도 메뉴가 피자짬뽕, 둘 밖에 없었다.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는 메뉴 선정. 또한 명함에 '사장'이라는 말은 뺐다. 대신에 배후세력 전유성이라고 적었다. 전유성 본인이 직접 운영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아이디어를 전유성이 제공하고 지인을 통해 운영하는 곳이라 그렇다고.[25]

그나마 가장 가까운 철도역으로 경부선 남성현역이 있는데, 일단 열차가 대구발 무궁화호 1회 밖에 정차하지 않는다. 그 근처 도로를 따라가면 무려 고개를 넘어 8km, 즉 3시간을 걸어야 나온다. 직선거리라 쳐도 대략 30분 이상. 굳이 여기를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겠다면 청도역에서 내려 0-1번, 2번 시내버스를 타고 칠곡리에 내리면 된다. 버스 시간이 드물기 때문에 시간을 꼭 알아둘 것. 자동차로 가면 그나마 나은데, 대구광역시청도군에서 30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된다.

또한 초복날 반려동물들을 위한 개나소나 콘서트를 청도에서 열었다. 초복에 콘서트를 연 이유도 복날을 무사히 넘기라는 의미라고 한다. 개나 소를 데려오면 공짜로 볼 수 있다. 이후에도 종종 했는데 2016년 4월 29일 개밥 주는 남자에 출연한 이성미의 말에 따르자면 공연 끝나면 사람들이 그렇게 버리고 간다고. 좋은 의도로 열었는데 일부 몰상식한 관객들 인성 보소. 설마 소까지도?

2011년부터는 카페를 처남에게 넘기고 풍각면 성곡리에 코미디철가방극장을 운영했다. 특이하게도 건물 외벽이 철가방 모양으로 되어있는 독특한 모양새다. 벽에 붙어있는 짜장면단무지 그리고 소주병 조형물은 덤 음식점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콩트 형식의 코미디 단막극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공연하는 소극장이다. 전유성이 직접 운영하는 '코미디 시장' 극단 단원들이 4~5분씩 돌아가면서 90분 간 공연했다. 기사. 2014년에는 입소문이 났는지 평일에 오려면 2, 3주 전에, 주말에 오려면 한 달 전에는 예약이 필요했다. 인터뷰. 그러나 2018년 정식 단원 5명 중 2명이 떠나고, 관객이 감소해 4월 29일 공연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

2012년 7월 1일 개그 콘서트의 감수성 코너에서 깜짝 출연해서 후배들인 감수성 팀에게 따끔한 충고를 했다. 그러나 그 뒤에 자신이 주최하는 콘서트를 홍보했지만 넘어가자.

2013년에는 제1회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에 명예위원장으로 참여했다. 집행위원장은 개그맨 김준호.

2014년 6월 15일자 MBC 코미디의 길 6회에 출연했는데, 이홍렬과 김용재가 청도에 찾아가 전유성을 만났다. 이홍렬의 환갑 때 축하 전화를 걸어 "환갑선물로 친구가 돼줄게. 이제 말 놔."라고 했다고. 둘의 나이차이는 5살, 이홍렬이 연하이다. 하지만 여전히 선배 앞에서는 쩔쩔매는 이홍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016년 7월 2일, 홍대 윤형빈 소극장에서 열린 이경규 콘서트에 참석해서 관객석에 앉아 쇼를 구경했고, 후에 쇼가 끝날 때 쯤 이경규의 소개로 관객들도 알게 되었다.

2018년 9월말 기사에 따르면 청도군과 '청도세계코미디아트페스티벌' 축제 관련 갈등으로 사이가 틀어져 청도군을 떠나 전북 남원시 지리산 자락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자세히 말하면 축제조직위원장을 맡은 전유성에게 말도 없이 그를 배제하고 날치기로 다른 기획사에 운영을 맡겼다고 하며 10월 열릴 예정인 청도 코아페 축제 역시 말도 안하고 다른 업체에게 맡겼다고. 인터뷰를 보면 모욕감을 느꼈다고 하니 큰 배신감을 느끼는 듯 하다.[26] 결국, 전유성을 빼고 열리던 청도 코아페 축제는 대폭망해버렸다. 그래도 철가방 극장엔 큰 애정이 있어 재개관하면 개그 컨텐츠 등을 제공해 도움을 주겠다고 했지만 상황이 나빠 언제 재개장할지 미지수.[27]

개콘의 할아버지인 만큼 1000회 특집 때도 초대를 받았다. 본인이 코너를 진행하지는 않았지만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또 중간중간 방청객들 틈에서 후배들을 지켜보는 모습이 비춰지기도 했다. 2부 오프닝 무대로 꾸며진 개콘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서는 김미화와 함께 첫 줄부터 개콘의 터를 잡은 선조님으로서 그 이름이 언급된다.

김대범, 황현희, 안상태, 졸탄, 박휘순, 신봉선 등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인 희극인들 중 대다수가 그의 코미디 시장을 거쳐간 탓에 생일 파티 역시 대규모 콘서트처럼 진행되기도 한다.

2020년 3월 2일 채널A 아이콘택트에 출연해 몰타로 영어 유학을 떠날 계획을 밝혔다. 20년 지기 이연복이 함께 출연해 몰타 유학을 극구 만류했지만 그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방송 시점에 몰타로 출국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로 인해 몰타 측에서 유학 취소를 통보했고, 주변에서 계속 유학을 말리는 중이라고 한다.

친하게 지내던 가수 이동원이 늘그막일 때, 같이 지내기도 했다. '향수' '이별노래' '가을편지'로 1980~1990년대 사랑받은 가수 이동원은 2021년 11월 14일 오전 4시 10분 지병인 식도암으로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곁을 지키던 게 바로 전유성이었다. 이동원은 전유성이 사는 전북 남원 지리산 자락으로 옮겨 투병 생활을 했는데 전유성이 젊은 시절에 이동원 집에서 함께 산 인연이 있어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2022년 8월부터 남원시 인월면 중군마을에 '국수교과서'라는 국수 가게를 개업하여 운영하고 있다. 비빔생면국수 단일 메뉴로 하루 50그릇 한정 판매. 청도에서 운영했던 카페도 그랬듯 여기도 남원 시내와는 한참 떨어진 시골 마을에 위치해있으나, 인월 자체가 국내 네임드 명산인 지리산의 초입과도 같은 곳이기에 광주대구고속도로 지리산IC인월지리산공용터미널을 통해 타지에서 남원 시내를 안 거치고 인월로 바로 올 수 있어 시외 교통은 비교적 편리하다. 인월터미널에서 하루 7번 있는 141,142번 시내버스를 타도 되고, 아니면 그냥 산책하듯 남천을 따라 30분 정도만 걸어가면 중군마을 초입이므로 접근성 자체는 시골 마을 치고는 나쁘지 않다.[28]

4. 출연 작품

4.1. 방송

4.2. 영화

4.3. 광고

5. 어록


6. 저서

7. 가족오락관

※ 손미나 아나운서가 진행한 회차는 굵게 표시.

[1] 윤보선 대통령 생가 근처에서 태어났다.[2] 프로필 상 182cm. 나이대에 비해 장신인이다.[3] 청도군에서 개나소나콘서트를 기획한 것이 대표적[4] 다만 80년대에는 꽤나 나왔다. KBS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조연, 큰형님, 농담 등의 역할을 많이 맡았다.[5] 이경규는 현재 2024년 기준으로, '예능대부' 같은 평가를 들을 정도로 대선배의 위치지만, 실제로 연예계에 데뷔한 시기와 나이 모두 전유성(1969)이 이경규(1981)보다 12년이나 선배다. 그래서, 이경규가 전유성에게 '유성이 형' 이라고 부른다.[6] 1989년 신사동 제비로 영화 감독에 도전했으나 흥행에 실패한 적이 있었던 박세민은 전유성과 달리 비디오용 성인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7] 송승환의 원더풀라이프 - 개그맨 전유성 2화[8] 심야통행금지가 사라질 무렵에 떠올린 아이디어들이라고 한다.[9] 이건 도쿄 스카이트리 가보면 아사히 신문 자판기에서 판다. 네이버 뉴스아카이브도 비슷한 서비스.[10] 유명인 이름으로 기부하는 숲으로 이루어지고 있다.[11] 두끼떡볶이 등 즉석떡볶이 뷔페부터 시작해 공유 주방 플랫폼 서비스로 현실화되었다.[12] 2023년 SK에너지 팝업스토어로 실현되었다.[13] 덤으로 이 책에서 금연에 관해 쓴 내용이 상당히 많았던 덕분에 금연 관련 강연에 여러번 초청받기도 했다고 한다(…). 금연 계기는 고스톱을 치다 많이 잃어서 줄담배를 태웠는데 상대방이 이죽거리길래 이까짓게 뭐길래 그러냐면서 끊었다고...[14] 최양락이 MBC 1회 개그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고 정식으로 개그맨이 된 후 선배 개그맨들이 최양락에게 당시 영화배급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전유성에게 개그를 배우라고 추천했다고 한다. 그래서 최양락은 전유성이 일하는 영화배급사에 찾아가서 전유성을 처음 만났고 대상을 탄 자신의 개그를 보여줬는데 전유성이 엄청난 혹평을 했다고... 그래도 이후 최양락이 대학교 수업이 끝나면 서울예전과 가까운 곳에 있던 전유성의 직장에 그를 만나려고 매일 찾아오는 바람에 영화사 사장이 나중에 최양락도 직원인줄 오해하고 같이 부산으로 출장을 보낸 썰이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은 절친한 사이가 됐다. 전유성은 최양락이 서울로 상경해서 처음으로 친해진 연예인이었다고 한다.[15] 컬투 본인들이 밝힌 이야기. 개콘에서 하는 식의 옴니버스 개그공연 포맷은 백재현이 주축으로 속해있던 공연 '포유'가 원조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간간이 이루어지던 소극장 개그'가 바로 이쪽. 컬투의 '개그콘서트'는 말 그대로 '개그'와 '콘서트(음악)'를 접목한 형식의 공연이었다. 즉 개그콘서트가 컬투의 공연 형식을 빌려갔다는 것은 오해다.[16] 컬트삼총사는 개그 콘서트에 대한 저작권등록을 하려고 했으나 명사인 개그와 콘서트를 합친 단어는 저작권으로 인정될수 없다하여 쿨하게 쓰게 했다.[17] 딸이 9살 때 이혼하고 따로 살기 시작했다.[18] 가장 역대급으로 신선했던(?) 개그는 권투선수 출신인 짧은 머리의 일반인이 전유성의 앞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자장면을 들고와서 그냥 정상적으로 비벼 먹었던 일인데, 전유성은 단 10초만에 그가 방송에서 10년에 한번 보여줄까말까한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의 차례가 끝난 직후에 프로그램 MC였던 최양락과의 인터뷰 중에도 전유성 본인도 왜 웃었는지 설명을 못하고 계속 웃음을 못 참기도 했다. 그냥 웃겼다고만 했다. 아마 그 일반인의 치아가 권투선수하던 시절에 다쳐서 깨진 상태였는데 그 치아로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웃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게 신선한게 맞는 거..겠지? 그 사람은 나중에 1차 통과자끼리 모여서 한 대회에서 비슷한 음식먹기를 했고 전유성이 웃지 않아 탈락했다.전유성: 한번 하신 거 또 하시면 안 웃어줍니다.[19] 같은 케이스들로 임하룡강석, 이홍렬, 이경규, 심현섭, 유민상, 임혁필, 권진영, 양종철, 유재석 등을 꼽을 수 있다.[20] 나중에 팽현숙에게 쪽파 맞은 에피소드에서 이 사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밝혀졌는데, 당시 코너가 끝나고 선배들의 소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약속이 잡혀 있던 최양락이 빨리 정리하기 위해 전유성에게 세 번이나 남은 소품이 없냐고 물어봤으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중에 못 챙긴 소품이 있는 걸 깨달은 전유성이 뒤늦게 최양락에게 이걸 말하는 바람에 최양락이 다시 소품을 갖다 놓느라 약속에 늦었고 그래서 열받은 최양락이 "선후배를 떠나서 이건 형님이 싸가지가 없는 거예요!"고 말한 것.[21] 1979년 대학가요제 대상곡이었던 '내가'였다.[22] 나중에 박중훈이 물어보니 전유성이 밝히기를 당시 워낙 많은 신청자가 있다 보니 조금이라도 안 되겠다 싶은 사람은 잘라버려야 해서 그랬다고[23] 당시 1940년대 성인 남성의 평균키는 163cm이긴 한데, 그때 성인인 사람은 전유성의 부모삼촌 세대고 1949년생인 전유성 세대 평균키는 168cm여서 엄청난 키라고 하기에는 과한 감이 있다. 6.25 이후 한국 평균키는 상당히 커졌고 산업화 이후에 170을 넘으며 성장하긴 했으나, 21세기 초에 173~174cm를 찍은 이후로는 그 다음 세대부터 커지지 않고 있다. 소위 X세대 시절 171 정도에서 밀레니얼 세대의 평균 173이 성장변화의 끝으로 본다.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만 해도 평균키 차이가 전혀 나지 않으며, 이후 세대인 알파세대가 성인이 되어도 별차이가 없을 거라는 게 중론이다. 전유성보다 띠동갑 이상 훨씬 윗세대인 정치인 이명박의 친형 이상득, 이상은 형제는 키가 182~3cm로 1950년대에도 180cm가 넘는 일반인은 있었다.[24] 본인이 원래 178이었다는데 3cm 줄었다한다.[25] 2008년 촛불집회 당시에 이명박 대통령의 초기 대응이 배후세력을 조사하라는 식이어서 당시 유행하던 표현이기도 하다.[26] 기사내용에서는 "왜 설명해야 하느냐."라고 적혀있지만 이는 순화된 내용으로 실제로는 "민간인인 당신에게"라는 말이 앞에 더 붙어있었다. '청도세계코미디아트페스티벌'의 경우 청도군이 주체로 만들어진 축제가 아니고 전유성 개인이 기획, 섭외 등을 하여 만들어 낸 것임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후안무치한 태도.[27]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술한 지인인 이외수도 자기의 일처럼 관심을 가졌다. 기본적으로 서로 아는 관계이기도 하거니와, 이외수 역시 당시 상주하고 있는 지자체와 감성마을을 둘러싼 알력(다만 이 과정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때문에 어쩌면 저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28] 여담으로 딸 가족들도 같이 사는데, 2023년 2월 14일 방송된 손없는 날(JTBC)에 딸 전제비, 손녀 김래인과 함께 나왔다. 사실 손녀 래인이가 남원에서 차로 30분 걸리는 함양군 함양읍 내 미술학원에 다니고 있어서 2년 넘게 데러다주고 있는데, 마침 촬영하는 날에 방문한 것. MC 신동엽이 놀란 건 덤.[29] 현 코오롱제약. 1958년 삼영화학연구소라는 사명으로 설립되었으며 1979년 삼영신약을 거쳐 1990년에 현재의 사명으로 변경하였다.[30] 현재는 판매권이 휴온스로 넘어갔다.[31] 20년 전에 친 드립이다. 오오... 하지만 성시경은 마녀사냥(JTBC)에서 "한국 같았으면 생식기를 성형했을 것"이라고 했다(...)[32]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육영수 본인의 유머로 재현되었다.[33] 출처[34] MBC 코미디의 길 2014년 6월 15일 방송[35] 전유성은 영화배급사 카피라이터 근무 경력이 있어 대략적인 규모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36] 지인이 많아 빚보증을 많이 서다보니 잘 벌 때도 날린 돈이 많았다고 한다.[37] 일제강점기국민학교로 개교한, 청와대에서 가장 가까운 공립 초등학교이다. 덕분에 박정희 대통령의 자식인 박근령, 박지만 두 남매가 다니고 졸업했다. 그러나 장녀인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나이가 더 있어서 해당 학교 학생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