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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 }}} }}}}}}}}} |
<colbgcolor=#005ba6><colcolor=#ffc224> | |||
출생 | 1897년 8월 26일 | ||
충청남도 천안군 모산면 새말[1] (現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해위길52번길 29)[2][3] | |||
사망 | 1990년 7월 18일 (향년 92세)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8-1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윤보선길 62) | |||
묘소 |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산28-2[4] | ||
재임기간 | 제4대 대통령 | ||
1960년 8월 12일 ~ 1962년 3월 24일 | |||
서명 | [5]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5ba6><colcolor=#ffc224> 본관 | 해평 윤씨[6][7] | |
부모 | 아버지 윤치소, 어머니 이범숙(李範淑)[8][9] | ||
형제자매 | |||
배우자 | 민경숙[18] (사별) 공덕귀[19] (재혼) | ||
자녀 | 장녀 윤완구(尹琓求, 1915 ~ 2007)[20] 차녀 윤완희(尹完姬, 1918 ~ 2020)[21] 장남 윤상구(尹商求, 1949 ~ 현, [age(1949-01-01)]세) 차남 윤동구(尹同求, 1952 ~ 현, [age(1952-01-01)]세) | ||
학력 | 관립교동보통학교 (졸업) 게이오 중학교 (졸업) 세이소쿠 고등학교 (졸업)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 / 학사) 에든버러 대학교 대학원 (고고학 / 석사) | ||
병역 | 해당사항 없음 | ||
종교 | 개신교 (예장통합)[22] | ||
신체 | 키 169cm / 체중 70kg / O형 | ||
의원 선수 | 4 | ||
의원 대수 | 3, 4, 5(민), 6 | ||
약칭 | 尹[23] | ||
자 | 경천(敬天) | ||
호 | 해위(海葦)[24] | }}}}}}}}} |
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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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취임 선서 |
2. 약력
- 1910. 교동보통소학교 졸업
- 1910. 충무로 일출소학교(현 서울일신초등학교) 5학년 편입
- 1912. 일출소학교 졸업
- 1913. 일본 정칙 영어 학교(現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 입학
- 1915. 게이오기주쿠 고등학교 중퇴 (2학년)
- 1917. 신아동제사 회원[25]
- 1919.3.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경기도 지역구, 21세, 최연소)
- 1919.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재선 의원
- 1922. 영국 우드블록 대학 영문학 과정 중퇴
- 1922. 영국 글래스고 스캘리쉬 학교 입학
- 1923. 영국 버밍엄 퀘이커 학교 입학
- 1924.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입학
- 1930.12.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과 졸업
- 1945.8. 한국국민당 창당발기위원
- 1945.9.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위원
- 1945.9. 한국민주당 창당발기위원, 중앙집행위원, 서울시지구당 위원장
- 1945.10.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 겸 행정자문위원 겸 금융경제위원회 고문
- 1946. 《민중신문》 사장
- 1946. 미군정청 경기도지사 고문
- 1946.6. 민족통일총본부 위원, 협의원
- 1947.2. 남조선과도정부 농림부, 상공부 고문
- 1947. 우남이승만기념사업회 회장
- 1947.10. 한영협회 회장
- 1948.5. 제헌 국회의원 선거 후보 (충남 아산, 한국민주당, 낙선)
- 1948.5. 이승만 초대 국회의장 비서실장
- 1948.12. 충무공 이순신 기념사업회 창립발기인
- 1948.12.15.~1949.6.5. 제2대 서울특별자유시장
- 1949.2. 민주국민당 창당발기인, 서울시지구당 위원장
- 1949.3. 제9대 대한축구협회 회장
- 1949.3. 고려역도구락부 고문
- 1949.6.6.~1950.5.9. 제2대 상공부장관
- 1950.5. 민주국민당 원내총무
- 1950.5. 제2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 (충남 아산, 민주국민당, 낙선)
- 1950.6.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 1950.11. 한국은행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위원
- 1950.12. 대한적십자사 총재, 피난민구조대책협의회 부회장
- 1951. 상이군인신생회 회장
- 1952. 한정협회 회장
- 1952. 한국-덴마크 문화협회 이사장
- 1954.5.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민의원 후보 (서울 종로 갑, 민주국민당)
- 1954.5. 제3대 민의원 (초선)
- 1955.9. 민주당 중앙위원, 중앙당 의원부장
- 1955.11. 민주당 서울시지구당 위원장
- 1956.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 1958.5. 제4대 국회의원 선거 민의원 후보 (서울 종로 갑, 민주당)
- 1958.5. 제4대 민의원 (재선)
- 1959. 민주당 상임위원
- 1959.9. 민의원 외교위원회 상임위원
- 1959.11.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최고위원
- 1959.12. 민주당 원내최고위원
- 1960.7. 제5대 국회의원 선거 민의원 후보 (서울 종로 갑, 민주당)
- 1960.8. 제5대 민의원 (3선)
- 1960.8.13.~1962.3.24. 제4대 대한민국 대통령
- 1960.8. 무궁화대훈장 수훈
- 1963.7. 제5대 대통령 선거 후보 (민정당, 낙선)
- 1963.11. 제6대 국회의원 (민정당, 전국구)
- 1966.2. 신한당 창당발기인, 운영위원회 위원장
- 1966.3. 신한당 총재
- 1967.2. 제6대 대통령 선거 후보 (신민당, 낙선)
- 1971. 국민당 창당발기인, 총재
- 1971.2. 제7대 대통령 선거 후보 (사퇴)
- 1980. 국정자문회의 위원 (전두환 정부)
- 1981.4. 국정자문회의 위원 (재선)
- 1985. 사회복지협회 명예회장
- 1985.3. 경희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 1985.12. 미국 US 국제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 1986.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 의장
- 1988. 윤관장군기념사업회 명예회장
- 1989. 석오 이동녕 기념사업회 회장
- 1990.7. 인촌문화상 수상 (사후)
3. 일생
자세한 내용은 윤보선/일생 문서 참고하십시오.1897년(광무 원년) 조선 충청남도 천안군 모산면 새말에서 태어났다. 3·1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최연소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신규식 등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권유로 영국 유학을 떠나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고고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26]
1932년 귀국한 후 조선총독부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칩거하다가, 광복 후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고 신문사를 운영하며 언론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지명으로 서울특별시장 및 상공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행정을 맡았다.
1952년 발췌 개헌을 계기로 이승만 전 대통령과 결별하고 야당의 지도자로 떠올랐으며, 4.19 혁명 후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헌정 사상 유일한 의원내각제 정부의 대통령을 역임하였다.[27]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내각이 사실상 무력화된 후에도 1년간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28]
이후 1963년 민정이양을 위한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제1야당 후보로 출마해 박정희와 정면 대결하여 1.5%p 가량 차이로 석패하였고, 전직 대통령이었음에도 같은 해 제6대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다시 야당을 이끌었다.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를 상대로 다시 대결하였으나 2위에 그친 뒤, 유신정권하에서 김대중, 함석헌 등 재야지도자들과 함께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등 민주화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1980년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1990년 7월 18일 사망하였다.
3.1. 장면 내각
자세한 내용은 장면 내각 문서 참고하십시오.4. 평가
제2공화국이 채 2년도 유지되지 못하고 무너졌기에 대중에게는 보통 최규하 전 대통령과 함께 존재감이 미약한 대통령으로 인식되는 편이다. 의원내각제 체제 속에서 윤보선 본인은 상징적 국가원수로 옹립된 것이기에 제2공화국의 실권자인 장면 전 총리에게 인지도도 밀린다. 이 때문에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도 윤보선 전 대통령을 빼고 장면 전 국무총리를 넣는 경우가 많다.[29]윤보선 전 대통령은 도덕성, 민주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며, 박정희 정부에 맞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는 등, 활발하게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런 활동에도 불구하고 5.16 당시 진압을 명령하지 않고 오히려 박정희의 쿠데타를 승인해서 합법적으로 군정체제가 들어설 수 있게 했다.[30] 5.16 군사정변 직후 이어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들어 매카시즘 공세를 펼치다가 역풍을 맞는 모습을 보였으며 그의 말년에 집권한 전두환 정부에는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줘서 일각에서는 변절자라고 혹평한다.[31]
기념비적인 최초의 민주당계 정당 출신[32]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내각책임제 하에서 국가원수로서 실질적 권력이 적었던 점, 4.19 혁명 직후의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군부 쿠데타를 야기한 무능한 정부였다는 세간의 이미지, 보수적인 성향, 신군부에 호의적이었던 태도 등 복합적인 이유로 민주당계 정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33]
현 민주당(더불어민주당)의 경우 윤보선과 윤보선의 민주당 역시도 더불어민주당이 지나온 역사로 규정하고 있으며 당사에도 민주당계 전직 대통령인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과 마찬가지로 윤보선의 사진도 걸어놓으며 상징성에 걸맞은 예우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5.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5ba6><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c1d1f><rowbgcolor=#005ba6>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width=10%> 비고 ||
1948 | 제헌 국회의원 선거 | 충남 18[34] |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 | 7,069 (14.2%) | 낙선 (4위) | |
1954 | 제3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3[35] | | 9,485 (32.4%) | 당선 (1위) | 초선 |
1958 | 제4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1(민의원) | | 22,780 (63.2%) | 재선 |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 31,924 (81.9%) | 3선[36] | |||
제4대 대통령 선거 | 대한민국 | 208 (79.09%) | [37] | |||
1963 | 제5대 대통령 선거 | [[민정당|]] | 4,546,614 (45.09%) | 낙선 (2위) | [38] | |
제6대 국회의원 선거 | 전국구 | 1,870,976 (20.1%) | 당선 (1번) | 4선[39] | ||
1967 | 제6대 대통령 선거 | 대한민국 | [[신민당(1967년)|]] | 4,526,541 (40.93%) | 낙선 (2위) |
역대 선거 벽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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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 | 제5대 대통령 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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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후보 이력 | |||||||||||||||||||||||||||||||||||||||||||||||||||||||||||||||||||||||||||||||||||||||||||||||||||||||||||||||
|
6.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신아동제사 | 1917 - 1918 |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18 | 탈당 |
[[신한청년당| 신한청년당 ]] | 1918 - 1922 | 입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22 - 1945 | 탈당 |
[[한국국민당| 한국국민당 ]] | 1945 | 창당 |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 | 1945 - 1949 | 합당[40] |
| 1949 - 1955 | 합당[41] |
| 1955 - 1960 | 합당[42]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60 - 1963 | 탈당[43] |
[[민정당|]] | 1963 - 1965 | 창당 |
[[민중당(1965년)|]] | 1965 - 1966 | 합당[44]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66 | 탈당[45] |
[[신한당|]] | 1966 - 1967 | 창당 |
[[신민당(1967년)|]] | 1967 - 1969 | 합당[46]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69 | 자진 정당 해산 |
[[신민당(1967년)|]] | 1969 - 1970 | 정당 재등록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70 - 1971 | 탈당[47] |
[[국민당(1971년)|]] | 1971 - 1972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72 - 1990 | 정당 해산 정계 은퇴 사망 |
7. 어록
7.1. 제4대 대통령 취임사
제2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영예의 당선을 얻은 이제 나의 감격이 선서식을 거행하는 오늘에는 영광된 의무감과 무거운 책임감으로 변해졌읍니다.
비록 엄숙해야 할 선서식 전이기는 하나 감격과 책임감이 교착되는 이 순간에 있어 벅차오르는 소회의 일단을 간단히 말씀드리려는 것을 허물치 마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첫째, 나같이 부덕하고 무능한 사람을 제2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뽑아주신 국회의원 제공에게 송구하면서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아울러 올리는 바입니다.
둘째, 내가 사랑하여 마지않는 국민제위에게 방금 정중하게 선서한 바와 같이 국민의 복리를 위해서는 내 신명을 걸기로 했거니와 이제부터는 국민을 위한 정부라기보다도 진실로 국민의 정부이오니 현명하신 국민의 건설적인 비판과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오늘의 난국을 타개할 도리가 없는가 합니다. 오늘날 정치의 책임이 행정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피치자인 국민에게도 분담되어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여 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셋째, 앞으로 구성되는 정부는 적극적이고 강력한 정책을 수행해야만하겠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파를 초월해서라도 먼저 적재적소의 인물본위로 내각의 자세를 갖추고 슬기로운 지혜와 향기로운 인화로써 혼연일체의 행정의 미를 거두어야 하겠읍니다.
거룩한 4월 혁명이 1개 정당의 집권의 전리품이 아니요 다대수 국민의 민권탈환의 금자탑이요 빈곤해방의 기점이라 할 것인데 오고가는 집권보다는 하나는 둘로 그리고 셋도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정당이나 단체보다도 오직 하나밖에 다시 없는 국민과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 국가를 위해서 그 모두를 다 바치는 것이 젊은 학도들이 흘린 고귀한 피값을 보상하는 길인가 합니다.
4월 혁명으로부터 정치적 자유의 견산을 물려받은 제2공화국의 견산을 물려받은 제2공화국 정부는 이제는 국민이 다 먹고 살 수 있는 경제적 자유를 마령하지 않으면 안되겠읍니다.
경제적 자유에 뿌리를 박지 않는 정치적 자유는 마치 꽃병에 XX꽃 힌 같이 곧 시들어지는 것입니다. 피를 무서워했던 독재는 정명코 물러났기에 오늘 우리의 정치활동은 자유로웠읍니다. 그러나 독재에 따라다니던 경제부패는 아직도 그대로 남았어야 소탕작업도 노정이 요원하고도 험준한 데다가 어제는 탕진될대로 탕진된 나라살림에 누란의 위기에 봉착하고 있읍니다. 이 경제적 위기를 극복 못하는 날에는 한날 내각의 수명만이 아니라 실로 국가의 운명이 또한 여기에 달려있다 하겠읍니다.
정부의 시책은 무엇보다도 경제제일주의로 나가야하겠고 현명한 국민에게는 인핍과 절제 그리고 창의와 노력이 요청되는 바입니다. 행정부는 족재가 뿌렸던 반민주성과 부패독소를 조속히 제거하고 민주주의 원치학에서 과감한 혁신행정을 수행해야 하겠읍니다.
자유 진영의 두통거리라는 낙인까지 찍힌 이 정권 외교는 무정견·무정책의 연속이었고 마침내 세계 우방으로부터 고아취급을 받아왔던 것은 가슴 아팠던 사실입니다.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보아 항상 주변 강대국 사이의 세력관계에 따라 국가 운명이 좌우되게 마령인 처지에다가 설상가상격으로 국내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하여 힘의 진공상태를 빚어낸 까닭에 대외관계에 있어서의 올바른 한국의 자태는 우리의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동북아 국제평화에도 중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을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국민경제에 직결되는 외교행정면에 까지 이승만 전 대통령의 개인적 특징을 발휘하여 국가적 손실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결국은 그 독재적 정책을 합리화하고 국내의 불평불만을 외우로 돌려 국내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는 낡은 방법만을 상요했던 기만적 외교로 일관하여 왔읍니다.
외교란 원래 협상과 거래를 사명으로 하여 어디까지나 한 국가의 실질적 이익을 중심으로 타국과의 대립되는 이익을 평화적인 수단으로 조정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민주주의적인 외교라 하겠읍니다. 우리는 새로운 외교정책과 새로운 외교체제를 갖추어 새로운 외교활동으로 재출발해야 하겠읍니다. 이외에도 드리고 싶은 말씀 너무도 많습니다만, 오늘은 간단히 인사 말씀으로 대신하겠읍니다.
1960년 8월 13일 대한민국 대통령 윤보선
비록 엄숙해야 할 선서식 전이기는 하나 감격과 책임감이 교착되는 이 순간에 있어 벅차오르는 소회의 일단을 간단히 말씀드리려는 것을 허물치 마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첫째, 나같이 부덕하고 무능한 사람을 제2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뽑아주신 국회의원 제공에게 송구하면서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아울러 올리는 바입니다.
둘째, 내가 사랑하여 마지않는 국민제위에게 방금 정중하게 선서한 바와 같이 국민의 복리를 위해서는 내 신명을 걸기로 했거니와 이제부터는 국민을 위한 정부라기보다도 진실로 국민의 정부이오니 현명하신 국민의 건설적인 비판과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오늘의 난국을 타개할 도리가 없는가 합니다. 오늘날 정치의 책임이 행정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피치자인 국민에게도 분담되어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여 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셋째, 앞으로 구성되는 정부는 적극적이고 강력한 정책을 수행해야만하겠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파를 초월해서라도 먼저 적재적소의 인물본위로 내각의 자세를 갖추고 슬기로운 지혜와 향기로운 인화로써 혼연일체의 행정의 미를 거두어야 하겠읍니다.
거룩한 4월 혁명이 1개 정당의 집권의 전리품이 아니요 다대수 국민의 민권탈환의 금자탑이요 빈곤해방의 기점이라 할 것인데 오고가는 집권보다는 하나는 둘로 그리고 셋도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정당이나 단체보다도 오직 하나밖에 다시 없는 국민과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 국가를 위해서 그 모두를 다 바치는 것이 젊은 학도들이 흘린 고귀한 피값을 보상하는 길인가 합니다.
4월 혁명으로부터 정치적 자유의 견산을 물려받은 제2공화국의 견산을 물려받은 제2공화국 정부는 이제는 국민이 다 먹고 살 수 있는 경제적 자유를 마령하지 않으면 안되겠읍니다.
경제적 자유에 뿌리를 박지 않는 정치적 자유는 마치 꽃병에 XX꽃 힌 같이 곧 시들어지는 것입니다. 피를 무서워했던 독재는 정명코 물러났기에 오늘 우리의 정치활동은 자유로웠읍니다. 그러나 독재에 따라다니던 경제부패는 아직도 그대로 남았어야 소탕작업도 노정이 요원하고도 험준한 데다가 어제는 탕진될대로 탕진된 나라살림에 누란의 위기에 봉착하고 있읍니다. 이 경제적 위기를 극복 못하는 날에는 한날 내각의 수명만이 아니라 실로 국가의 운명이 또한 여기에 달려있다 하겠읍니다.
정부의 시책은 무엇보다도 경제제일주의로 나가야하겠고 현명한 국민에게는 인핍과 절제 그리고 창의와 노력이 요청되는 바입니다. 행정부는 족재가 뿌렸던 반민주성과 부패독소를 조속히 제거하고 민주주의 원치학에서 과감한 혁신행정을 수행해야 하겠읍니다.
자유 진영의 두통거리라는 낙인까지 찍힌 이 정권 외교는 무정견·무정책의 연속이었고 마침내 세계 우방으로부터 고아취급을 받아왔던 것은 가슴 아팠던 사실입니다.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보아 항상 주변 강대국 사이의 세력관계에 따라 국가 운명이 좌우되게 마령인 처지에다가 설상가상격으로 국내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하여 힘의 진공상태를 빚어낸 까닭에 대외관계에 있어서의 올바른 한국의 자태는 우리의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동북아 국제평화에도 중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을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국민경제에 직결되는 외교행정면에 까지 이승만 전 대통령의 개인적 특징을 발휘하여 국가적 손실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결국은 그 독재적 정책을 합리화하고 국내의 불평불만을 외우로 돌려 국내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는 낡은 방법만을 상요했던 기만적 외교로 일관하여 왔읍니다.
외교란 원래 협상과 거래를 사명으로 하여 어디까지나 한 국가의 실질적 이익을 중심으로 타국과의 대립되는 이익을 평화적인 수단으로 조정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민주주의적인 외교라 하겠읍니다. 우리는 새로운 외교정책과 새로운 외교체제를 갖추어 새로운 외교활동으로 재출발해야 하겠읍니다. 이외에도 드리고 싶은 말씀 너무도 많습니다만, 오늘은 간단히 인사 말씀으로 대신하겠읍니다.
1960년 8월 13일 대한민국 대통령 윤보선
8. 각종 타이틀
- 최장수 대통령, 연령이 검증이 되는 한국사 지도자들 중 두번째로 장수한 인물(향년 92세)[48][49]
- 유일하게 기념우표에 새겨지지 않은 대통령.[50]
- 유일한 충청도 출신 대통령.
- 유일한 상징적 국가원수 대통령.[51]
- 유일한 의원내각제 대통령
-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한 영국 대학교 출신.
- 역대 대통령 중 최고 순위의 대학교 학사 출신. (에든버러 대학교[52][53])
- 최초의 광역자치단체장(서울특별시장)[54] 출신 대통령
- 최초의 국무위원(상공부장관) 출신 대통령
- 유일하게 대통령 퇴임 후에도 현역 정치인으로 계속 활동한 대통령[55][56][57]
- 최초이자 김대중과 함께 둘뿐인, 사별 이후 재혼 경험이 있는 대통령[58]
- 유일하게 조선시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미군정기, 해방, 6.25 전쟁, 임시정부, 제1공화국~제6공화국을 모두 체험한 대통령[59]
- 이승만과 함께 둘 뿐인 19세기에 출생한 대통령
- 이승만과 함께 둘 뿐인 독립운동가 출신 대통령
- 최초로 사후 국립현충원에 안장하지 않은 대통령.[60]
- 최초로 후임 대통령보다 나중에 사망한 대통령.
- 연임을 하지 않은 대통령 중 최초로 임기를 마치지 못한 대통령.
9. 여담
- 서예에 능해 서예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가 쓴 글씨 중에서 "落山雲表(낙산운표)"는 단아한 기품이 느껴지고 꾸밈없고 소박하다는 평이며 정확하게 정사각형을 이룬 것과 선이 다소 약한 것은 매우 신중하고 바른 사람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한다. #
또 다른 휘호 중 하나인 민주구국 |
- 정치적으로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부분적인 영향을 주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대결 구도는 사실상 윤보선과 장면[61] 세력, 즉 신구파의 갈등에서 기원한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많다. 다만, 김영삼이 정계에 뛰어들게 한 '정치적 아버지'는 6.25 전쟁 때 국회부의장과 국무총리를 지냈던 장택상이며, 이후 조병옥을 거쳐 유진산의 정치적 적자가 되었다. 윤보선과 친해져 민주당 구파의 후계자가 된 것은 그 뒤의 일이나, 윤보선보다는 유진산에 가까웠던 것이 사실. 김영삼이 장면과는 초면부터 확실히 선을 그은 것은 맞다.
- 1980년대 들어서 민주화운동에서 멀어지고, 군사정권에 협조적인 태도로 돌아서면서 시대의 변절자 윤천지강[62]의 일원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다른 3명과 마찬가지로 고령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반공 성향이 큰 영향을 끼쳤을 꺼라는 추측이 많다.
- 음악인 겸 방송인인 남궁연이 윤보선의 외손자라는 설이 한때 나돌았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남궁연은 윤보선의 동생인 윤완선의 외손자이다. 고로 남궁연에게는 윤보선이 외종조부(外從祖父)가 된다.
- 사망 5개월 전인 1990년 2월 9일 집에 도둑이 들어 골동품 9000만원어치를 도난당하는 일을 겪었다.#
- 윤보선 전 대통령은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기 전에 태어난 인물이다.[64] 그리고 조선시대부터 지금의 제6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65]를 경험한 유일한 대통령이다.[66]
- 동안으로 보인다. 1950년도 초반에서 1970년도 초반의 정치 인생 중 그의 얼굴을 보면 절대 60대 ~ 70대로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 당시엔 지금과 비교하면 나이에 비해 훨씬 들어보였다는 걸 가정하면 대단하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 출생년도가 19세기인 마지막 대통령이다.
- 그의 퇴임 이후 60년 만에 윤씨 대통령이 두번째로 나오게 됐다. 따라서 각종 정치 커뮤니티에서는 노태우를 원조 노짱 혹은 1대 노짱이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 처럼 윤보선을 원조 윤카, 1대 윤카라는 식으로 간혹 부르기도 한다.[67]
또한 쿠데타와도 인연이 깊다. 1대 윤카는 당했고 2대 윤카는 시도하다 당했다.
- 귀족적인 성격에 걸맞게 식단은 비교적 화려하게 먹었으며 한식과 양식을 골고루 즐기는 편이었다. 그런데 정작 밥은 항상 잡곡밥을 먹었다고 한다. 당시엔 백미로 만든 흰쌀밥이 부의 상징이었을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의외의 모습. 또한 술을 멀리하는 집안 내력 때문에 거의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 윤보선의 식사에 대한 에피소드,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허정 과도내각을 거쳐서 윤보선이 대통령에 취임해서 경무대에 들어왔는데, 수개월 동안 주인 없이 방치된 탓에 당시 경무대의 상태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대통령 관저 주방에는 그릇은 고사하고 숟가락 하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관저를 정비하는 동안 중앙청 구내식당 요리사가 출장을 와서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고 한다.
- 그는 1969년부터 1974년까지 가족이 7명이 1년마다 1~2명씩 별세했는데 1969년에는 어머니[68], 큰고모[69]가 별세, 1970년에는 큰동생[70]이 별세, 1971년에는 작은동생[71]이 별세, 1972년에는 셋째동생[72]이 별세, 1973년에는 이복큰고모[73][74], 막내당숙[75]이 별세, 1974년에는 작은고모[76]가 별세했다. 이후로 1982년부터 1987년까지 1983년과 1986년을 제외하고 잠깐 또 이 상황이 오는데 1982년에는 작은당숙[77]이 1984년에는 작은여동생[78]이 별세, 1985년에는 이복작은삼촌[79]이 별세, 1987년에는 사촌형[80], 막내남동생[81]이 별세했다.
10. 저서
- 구국의 가시밭길: 나의 회고록 - 한국정경사. 1967.
- 외로운 선택의 나날: 윤보선 회고록 - 동아일보사. 1991. 2012년 해위윤보선대통령기념사업회가 복간했다.
11. 참고/관련 문헌
- 해위 윤보선: 생애와 사상 - 김명구 저. 고려대학교 출판부. 2011.
12. 관련 단체
13. 대중매체에서
- 1989년 KBS 미니시리즈 무풍지대에선 배우 원근희가 연기했다.
- 1989년 MBC 드라마 제2공화국과 1993년 제3공화국, 1995년 SBS 창사 5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코리아게이트, 1998년 정치 대하드라마 삼김시대에서 배우 이순재가 윤보선 역할을 4번 소화하였다. 특히 제2공화국의 경우 윤보선의 생전에 방영되고 있었는데, 당시 인터뷰에서 소감을 물으니 '연기를 점잖게 잘 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 하였다고.
- 1994년 4월 17일자 KBS1 <다큐멘터리극장>에서는 배우 최명수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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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대훈장 수훈자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한국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상훈 연도 | 결정일 | 수여일 | 이름 | 직책 | 국적 | 비고 |
1949년 | 8월 15일 | 이승만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0년 | 8월 13일 | 윤보선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3년 | 12월 5일 | 12월 17일 | 박정희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7년 | 6월 23일 | 육영수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79년 | 12월 7일 | 최규하 | 대통령 | 대한민국 | 12.12 군사반란으로 하야 | ||
1979년 | 12월 7일 | 홍기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80년 | 8월 29일 | 8월 29일 | 전두환 | 대통령 | 대한민국 |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 |
1980년 | 8월 29일 | 8월 29일 | 이순자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88년 | 2월 24일 | 2월 25일 | 노태우 | 대통령 | 대한민국 |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 |
1988년 | 2월 24일 | 2월 25일 | 김옥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93년 | 2월 11일 | 2월 23일 | 김영삼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93년 | 2월 11일 | 2월 23일 | 손명순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98년 | 2월 17일 | 2월 25일 | 김대중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98년 | 2월 17일 | 2월 25일 | 이희호 | 영부인 | 대한민국 | ||
2008년 | 1월 28일 | 노무현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08년 | 1월 28일 | 권양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2013년 | 2월 12일 | 이명박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13년 | 2월 12일 | 김윤옥 | 영부인 | 대한민국 | |||
2013년 | 2월 19일 | 박근혜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22년 | 5월 3일 | 문재인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22년 | 5월 3일 | 김정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외국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상훈 연도 | 결정일 | 수여일 | 이름 | 직책 | 국적 | 비고 |
1964년 | 12월 3일 | 12월 8일 | 하인리히 뤼프케 | 대통령 | 서독 | 외국인 최초 상훈자 | |
1964년 | 12월 3일 | 12월 8일 | 빌헬미네 뤼브케 | 영부인 | 서독 | 외국인 최초 상훈자 | |
1966년 | 2월 1일 | 2월 7일 | 이스마일 나시루딘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66년 | 2월 1일 | 2월 7일 | 틍쿠 인탄 자하라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66년 | 2월 1일 | 2월 10일 | 푸미폰 아둔야뎃 | 국왕 | 태국 | ||
1966년 | 2월 1일 | 2월 10일 | 시리낏 끼띠야콘 | 왕비 | 태국 | ||
1966년 | 2월 1일 | 2월 15일 | 장제스 | 총통 | 중화민국 | ||
1968년 | 5월 10일 | 5월 18일 | 하일레 셀라시에 | 황제 | 에티오피아 | ||
1969년 | 5월 23일 | 5월 27일 | 응우옌반티에우 | 총통 | 남베트남 | ||
1969년 | 5월 23일 | 5월 27일 | 응우옌티마이아인 | 제1부인 | 남베트남 | ||
1969년 | 10월 28일 | 10월 28일 | 하마니 디오리 | 대통령 | 니제르 | ||
1969년 | 10월 28일 | 10월 28일 | 아이샤 디오리 | 영부인 | 니제르 | ||
1970년 | 9월 25일 | 9월 28일 |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 대통령 | 엘살바도르 | ||
1970년 | 9월 25일 | 9월 28일 | 마리나데 산체스 에르난데스 | 영부인 | 엘살바도르 | ||
1975년 | 6월 27일 | 7월 5일 | 오마르 봉고 | 대통령 | 가봉 | ||
1975년 | 6월 27일 | 7월 5일 | 조세핀 봉고 | 영부인 | 가봉 | ||
1979년 | 4월 17일 | 4월 23일 |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 대통령 | 세네갈 | ||
1979년 | 4월 17일 | 4월 23일 | 콜레테 위베르트 상고르 | 영부인 | 세네갈 | ||
1980년 | 5월 11일 | 할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드 | 국왕 | 사우디아라비아 | |||
1980년 | 5월 14일 |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 국왕 | 쿠웨이트 | |||
1981년 | 6월 25일 | 수하르토 | 대통령 | 인도네시아 | |||
1981년 | 6월 25일 | 시티 하티나 | 영부인 | 인도네시아 | |||
1981년 | 6월 29일 | 아마드 샤 이브니 아부 바카르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81년 | 6월 29일 | 틍쿠 아프잔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81년 | 7월 6일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 대통령 | 필리핀 | |||
1981년 | 7월 6일 | 이멜다 마르코스 | 영부인 | 필리핀 | |||
1981년 | 10월 13일 | 로드리고 카라소 | 대통령 | 코스타리카 | |||
1981년 | 10월 13일 | 에스트레야 셀레돈 리사노 | 영부인 | 코스타리카 | |||
1982년 | 5월 10일 | 사무엘 도 | 대통령 | 라이베리아 | |||
1982년 | 6월 7일 | 모부투 세세 세코 | 대통령 | 자이르 | |||
1982년 | 6월 7일 | 보비 라다와 | 영부인 | 자이르 | |||
1982년 | 8월 25일 | 압두 디우프 | 대통령 | 세네갈 | |||
1982년 | 12월 21일 | 케난 에브렌 | 대통령 | 튀르키예 | |||
1983년 | 3월 10일 | 3월 15일 | 자파르 모하메드 니메이리 | 대통령 | 수단 | ||
1983년 | 3월 10일 | 3월 15일 | 부띠나 칼릴 압불핫산 | 영부인 | 수단 | ||
1983년 | 9월 10일 | 후세인 1세 | 국왕 | 요르단 | |||
1983년 | 9월 10일 | 누르 | 왕비 | 요르단 | |||
1984년 | 4월 9일 | 하사날 볼키아 | 국왕 | 브루나이 | |||
1984년 | 4월 21일 | 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 | 국왕 | 카타르 | |||
1984년 | 8월 30일 | 9월 13일 | 다우다 자와라 | 대통령 | 감비아 | ||
1984년 | 8월 30일 | 9월 13일 | 치렐 자와라 | 영부인 | 감비아 | ||
1985년 | 5월 17일 |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 대통령 | 파키스탄 | |||
1985년 | 5월 20일 |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 | 대통령 | 코스타리카 | |||
1986년 | 9월 4일 | 4월 10일 | 엘리자베스 2세 | 국왕 | 영국 | ||
1986년 | 9월 4일 | 4월 16일 | 보두앵 | 국왕 | 벨기에 | ||
1987년 | 4월 7일 | 아메드 압달라 | 대통령 | 코모로 | |||
1988년 | 11월 3일 | 이스칸다르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88년 | 11월 3일 | 자나리아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20일 |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 대통령 | 서독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30일 | 프랑수아 미테랑 | 대통령 | 프랑스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30일 | 다니엘 미테랑 | 영부인 | 프랑스 | ||
1990년 | 6월 21일 |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 대통령 | 파라과이 | |||
1990년 | 11월 5일 | 괸츠 아르파드 | 대통령 | 헝가리 | |||
1991년 | 9월 13일 | 아즐란 샤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91년 | 9월 13일 | 투안쿠 바이눈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91년 | 9월 25일 |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 대통령 | 멕시코 | |||
1992년 | 8월 13일 | 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 | 대통령 | 과테말라 | |||
1993년 | 5월 20일 | 5월 25일 | 피델 라모스 | 대통령 | 필리핀 | ||
1993년 | 5월 20일 | 5월 25일 | 이멜리타 마르티네스 라모스 | 영부인 | 필리핀 | ||
1994년 | 11월 7일 | 11월 21일 |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 | 대통령 | 칠레 | ||
1994년 | 12월 5일 | 12월 9일 | 레흐 바웬사 | 대통령 | 폴란드 | ||
1995년 | 2월 7일 | 2월 16일 | 이슬람 카리모프 | 대통령 | 우즈베키스탄 | ||
1995년 | 2월 21일 | 3월 6일 | 로만 헤어초크 | 대통령 | 독일 | ||
1995년 | 3월 28일 | 4월 3일 | 젤류 젤레프 | 대통령 | 불가리아 | ||
1995년 | 6월 26일 | 7월 7일 | 넬슨 만델라 | 대통령 | 남아프리카 공화국 | ||
1995년 | 9월 26일 | 9월 29일 | 카를로스 메넴 | 대통령 | 아르헨티나 | ||
1996년 | 7월 23일 | 9월 4일 | 알바로 아르수 | 대통령 | 과테말라 | ||
1996년 | 7월 23일 | 페르난두 카르도주 | 대통령 | 브라질 | |||
1996년 | 10월 8일 | 10월 20일 | 후안 카를로스 1세 | 국왕 | 스페인 | ||
1996년 | 10월 8일 | 10월 20일 | 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프리데리키 | 왕비 | 스페인 | ||
1996년 | 11월 26일 | 자파 이브니 압둘 라만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96년 | 12월 10일 | 12월 15일 | 레오니드 쿠치마 | 대통령 | 우크라이나 | ||
2000년 | 2월 22일 | 3월 3일 |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 대통령 | 이탈리아 | ||
2000년 | 2월 22일 | 3월 6일 | 자크 시라크 | 대통령 | 프랑스 | ||
2006년 | 3월 12일 |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 대통령 | 알제리 | |||
2007년 | 3월 26일 | 사마 알아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 국왕 | 쿠웨이트 | |||
2007년 | 3월 28일 | 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 | 국왕 | 카타르 | |||
2009년 | 5월 13일 |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 대통령 | 카자흐스탄 | |||
2009년 | 11월 12일 | 알란 가르시아 | 대통령 | 페루 | |||
2012년 | 5월 30일 | 칼 16세 구스타프 | 국왕 | 스웨덴 | |||
2012년 | 11월 21일 | 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 | 대통령 | 아랍에미리트 | |||
2018년 | 10월 8일 | 에마뉘엘 마크롱 | 대통령 | 프랑스 | |||
2019년 | 하랄 5세 | 국왕 | 노르웨이 | ||||
2021년 | 6월 14일 |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 대통령 | 오스트리아 | |||
2021년 | 6월 16일 | 펠리페 6세 | 국왕 | 스페인 | |||
2021년 | 6월 16일 |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 왕비 | 스페인 | |||
2021년 | 8월 25일 | 이반 두케 | 대통령 | 콜롬비아 | |||
2021년 | 9월 21일 | 보루트 파호르 | 대통령 | 슬로베니아 | |||
2023년 | 7월 13일 | 안제이 두다 | 대통령 | 폴란드 | |||
2023년 | 11월 21일 | 찰스 3세 | 국왕 | 영국 | |||
2024년 | 11월 16일 | 디나 볼루아르테 | 대통령 | 페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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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동 을 조병옥 사망 (1960.2.15.) * 용산 갑 엄상섭 사망 (1960.5.3.) * 서대문 을 최규남 사퇴 (1960.7.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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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원 | |||||
* 종로 갑 윤보선 사퇴 (1960.8.12.) * 마포 김상돈 사퇴 (1960.1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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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 김선민(대행)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집권정부 | 장면 내각(윤보선 정부) · 국민의 정부 · 참여정부 · 문재인 정부 | ||||||||
정치인 | 대통령 | 윤보선 · 김대중 · 노무현 · 문재인 | ||||||||||
부통령 | 김성수 · 장면 | |||||||||||
대통령 후보 | 신익희 · 조병옥 · 김창숙 · 송요찬 · 유치송 · 김영삼 · 정동영 · 이재명 | |||||||||||
국무총리(내각제) | 장면 | |||||||||||
국무총리 | 김석수 · 고건 · 이해찬 · 한명숙 · 한덕수 · 이낙연 · 정세균 · 김부겸 | |||||||||||
국무위원 | 장면 내각 · 국민의 정부 · 참여정부 · 문재인 정부 | |||||||||||
소속 정치인 | 국회의원 · 광역자치단체장 · 기초자치단체장ㆍ당대표 | |||||||||||
정파 | 친노/친문 | 친문 (비문) · 친노 (비노) · 친낙 · 정세균계 · 안희정계 · 양승조계 · 조국계 | ||||||||||
친명 | 친명 (비명) · 박주민계 · 정동영계 | |||||||||||
동교동계 | 동교동계 · 박지원계 · 호남계 | |||||||||||
보수파 | 김한길계 · 친안 · 손학규계 | |||||||||||
진보파 | 민평련 · 박원순계 | |||||||||||
정당연대 | 더불어시민당 · 더불어민주연합 · 중도민주 인터내셔널 · 진보동맹(진보) · DJP연합(보수) · 평화와 정의의 의원 모임(진보) | |||||||||||
역사 | 제1공-제4공 · 제5공-문민 · 국민-참여 · 이명박 · 박근혜 · 문재인-윤석열 · 계파 역사 | |||||||||||
관련 정당 | 기후민생당 · K정치혁신연합당 · 소나무당 · 열린민주당 · 새미래민주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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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에는 아산만에 접한 천안의 월경지였다. 위키문헌의 광무 10년(1906년) 칙령 제49호, 지방 구역 정리 건.[2] 여기에 해평 윤씨 집성촌이 있다.[3] 아산시 둔포면에서는 그의 생가가 복원되었고, 길도 "해위길"이라고 명명되었다.[4] 도로명주소 미발급.[5] 평소에는 한글이나 한자 서명이 아닌 영어 서명을 썼는데, Po Sun Yun의 앞글자만 따서 P.S.Y라고 사인을 했다. 19세기에 태어난 인물임을 감안하면 특이한 점. 다만 법안공포문서 서명에는 尹潽善으로 서명하였다.[6] 도제공파(陶齊公派) 22세손 ○선(○善) 항렬이다.(족보)[7] # #[8] 1876년 10월 15일 ~ 1969년 6월 18일 (향년 92세)[9] 아들 윤보선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재임하고 퇴임하는 것까지 보았다.[10] 향년 69세[11] 향년 96세[12] 향년 61세[13] 향년 60세[14] 향년 72세[15] 향년 84세[16] 향년 70세[17] 향년 93세[18] 1894년 ~ 1937년. 민영환의 6촌 관계인 민영철의 딸이라고 한다. 윤보선과의 사이에서 2명의 딸을 낳았다.[19] 후처이자 영부인인 공덕귀와의 사이에서는 아들을 2명 낳았다.[20] 향년 92세[21] 향년 102세[22] 집 바로 앞에 있는 안동교회(安洞敎會)에 다녔다.[23] 다만 해당 약칭은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이 당선된 이후로는 윤석열을 주로 칭한다.[24] 바다 갈대라는 뜻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사돈인 신규식이 상하이에서 지어준 호다.[25] 신규식이 1912년 설립.[26] 참고로 스코틀랜드 대학의 MA 학위는 학사 학위이다.[27] 내각제 특성상 실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무게가 실려 있었다.[28] 처음에는 헌법기관이 사라진다는 이유로 군부 세력과 미군을 막론하고 모두가 하야를 말렸지만, 실권을 잃고 허수아비처럼 되다가 기성 정치인의 출마를 금지한 민정이양 계획 발표에 따라 1년 뒤 하야를 사실상 강요 당했다.[29] 하지만 민주당 구파, 신파의 대립 속에서 민주당 구파의 대표격이였던 윤보선이 정치적 영향력이 없을 리가 없었으며, 윤보선 본인도 상징적 국가원수에 머물지 않도록 하려 했기 때문에 흔하게 생각하는 얼굴마담격 허수아비 수준의 위치는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30] 5.16. 당시 주력군을 이끌고 있던 제1야전군 사령관 이한림 전 대장이 미국의 동의하에 쿠데타 진압을 위한 출동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윤보선은 끝내 진압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측의 진압요구를 거부하고 쿠데타를 승인해줬다.[31] 박정희 정부에서 민주화투쟁의 선두에 섰다가, 전두환 정부에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인물로 윤보선과 천관우, 강원용 목사, 지학순 주교가 있다. 이들 모두 강력한 친미, 반공 성향으로 제5공화국에선 운동권에 퍼져가던 반미주의, 사회주의 이념 때문에 민주화운동과 멀어진 것으로 많은 이들이 추측한다. 단 그렇다고 독재를 옹호하는게 옳은 행동은 아니다.[32] 다만, 이 시기의 민주당은 현재의 중도진보적 성향의 민주당이 아닌 반독재, 빅텐트 유형의 보수 정당임을 감안하여야 한다.[33] 같은 민주당 구파인 신익희가 민주당계 정당의 아버지 대우를 받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평가가 박한 편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민주당계 정치인이나 민주당계 지지층은 현 민주당의 중시조를 일평생 군사정권에 맞섰던 민주화 운동가이자 새정치국민회의의 당수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보는 편이다.[34] 현재의 충남 아산시 일대.[35] 서울 종로구 갑[36] 1960.8.12. 사퇴.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37] 의원 내각제 의회에서의 간접 선거.
1962.3.24. 대통령 하야.[38] 역대 직선제 대선 중 1위 후보와의 득표수 최저 격차. (15만 6026표)[39] 1965.8.5.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40] 조선민족당과 신설 합당.[41] 대한국민당과 신설 합당.[42] 민주당에 흡수 합당.[43] 대통령 취임으로 인한 탈당.[44] 민주당과 신설 합당.[45] 당내 노선 차이.[46] 민중당과 신설 합당.[47] 당내 노선 차이.[48] 연령이 확실히 검증되는 인물 중 윤보선보다 장수한 한국사의 지도자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유일하다.[49] 만약 이명박이 2034년 11월까지 생존한다면 이 기록을 깬다.[50] 본인이 "살아있는 사람이 어떻게 우표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며 취임기념우표에 쓸 사진을 제공하지 않았고 결국 4대 대통령 취임기념우표 대신에 새정부수립기념우표가 발행되었다.[51] 다만 윤보선 직전에 곽상훈 전 민의원의장, 허정 전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 백낙준 전 참의원의장이 잠시나마 의원내각제 하 상징적 국가원수로서의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적은 있다. 이때는 허정 전 총리가 실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 권한대행도 상징적 국가원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곽상훈 전 의장과 백낙준 전 의장 사이에 잠시 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낼 허정 전 총리는 상징적 국가원수이면서도 동시에 실질적 정부수반으로서의 지위도 동시에 갖고 있어 두 권력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을 국가로 본다면 한반도 최초로는 북한이 먼저 김두봉, 최용건을 상징적 국가원수로 둔 적이 있다. 김일성이 국가주석이 되어 폐지되었으나, 김일성 사후 다시 김영남을 상징적 국가원수로 두다가 현재는 완전 폐지된 상태다. 더 앞서서는 대한제국 시기에 입헌군주제의 틀을 마련한 바 있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52] 에든버러 대학교는 옥스브리지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는 학교이다. 또한 옥스퍼드대학교에도 입학한 기록이 있으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옥스퍼드대에서 에든버러대학교로 학적을 옮겼다. 당대든 지금이든 옥스퍼드대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의아한 일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특별한 계기가 있던 듯 하다.[53] 조지 워싱턴 대학교 학사 출신인 이승만과 서울대학교 학사 출신인 김영삼, 윤석열 등 또한 후보이다.[54] 윤보선이 서울특별시장을 할 때는 관선이었고, 최초의 민선 서울특별시장 출신은 이명박이다.[55] 대통령 사퇴 후 박정희 정부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제5대 대통령 선거, 제6대 대통령 선거에도 도전했다.[56] 사실 어떻게 보면 윤보선이 유일한 게 당연하다. 윤보선은 역대 대통령들 중 유일하게 상징적 대통령이었고 임기도 짧았기 때문에 하야 후에도 정치를 계속할 틈이 있었다. 전임자 이승만은 4.19로 하야하고 하와이에서 은둔하다가 죽어서야 고국에 돌아왔고 하야할 당시 85세의 고령이라 더 하기도 힘든 나이었으며, 후임자 박정희는 소원대로 종신 대통령을 했다. 최규하는 원래부터 정치와 거리가 멀었던 평범한 외교관 출신이었으나 국무총리 재임기와 10.26이 겹치면서 우연히 대통령이 된 케이스라 임기기간동안 대통령보다는 대통령 권한대행에 가까운 이미지를 갖고있었으며 5.17 내란으로 하야한 후에도 정치판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전두환은 퇴임 이후 권력행사를 시도했다가 노태우에 의해 백담사로 유배를 가고 이후 노태우가 퇴임한 이후 김영삼에 의해 사이좋게 손잡고 감방에 들어갔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각 69세, 79세의 고령인데다 아들들의 구속으로 인한 이미지 악화로 퇴임 후에도 정치를 할 여력이 없었다. 노무현, 이명박은 임기 말에 레임덕에 걸려 퇴임 후 말로가 좋지 않았던 탓에 노무현은 실제로 국회의원 선거 재출마를 고려했으나 끝내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이명박은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박근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며 문재인 역시 70세를 넘긴 고령인데다가 본인부터 남은 생을 조용히 살겠다고 했기 때문에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지언정 다시 직접적으로 정치판에 뛰어들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윤석열의 경우 퇴임 후에는 60대 후반밖에 안 되므로 퇴임 후 정치활동을 할 여지는 있으나 현재의 낮은 지지율로 볼 때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57] 반면 영국과 일본 같은 의원내각제 국가의 경우 총리 임기를 마치고서도 계속 현역 의원직을 유지하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으로 아베 신조, 스가 요시히데, 보리스 존슨의 경우가 있다.[58] 이승만과 박정희는 이혼 이후 재혼이다.[59] 윤보선은 1897년 8월생이고 대한제국 선포는 1897년 10월이기 때문. 만약 윤보선이 두달 늦게 태어났다면 이승만이 유일한 조선 출신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1894년 갑오개혁 때부터 1897년 10월 대한제국 선포 때까지는 조선 왕국도 대한제국도 아닌 어정쩡한 대조선국 상태였기에 온전한(?) 조선시대를 경험한 이는 이승만이 유일하다.[60] 윤보선보다 먼저 사망한 이승만, 박정희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으며 윤보선 이후 사망한 대통령 중 최규하는 국립대전현충원에, 김대중, 김영삼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였으며 노무현은 수원시연화장에서 화장되었고, 경상남도 김해시 봉하마을의 사저 인근에 안장했다. 노태우는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되어 경기도 파주시 동화공원묘역에 안장하였으며 전두환은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되어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 안치하고 있다.[61]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톨릭 대부이기도 하다.[62] 윤보선, 천관우, 지학순, 강원용.[63] 여흥 민씨 민영철(閔泳喆)의 딸이다. 여담으로 7촌 숙부가 민영환이라고 한다.[64] 그가 태어난지 50일도 되지 않아 대한제국이 성립했다.[65]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미군정기, 1공, 2공, 3공, 4공, 5공, 6공.[66]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낸 허정 전 총리도 조선시대에 태어나 6공까지 생존했다. 그래서 허 총리의 별명이 國老일 정도.[67] 이 외에 특이한 점이 있다면 윤석열의 부친이 충청남도 공주시 출신이라, 본인이 충청권 출신인 윤보선과 함께 둘 다 충청권에 연고가 있다는 점이다.[68] 이범숙, 향년 93세.[69] 윤활란, 향년 85세.[70] 윤완선, 향년 69세.[71] 윤원선, 향년 61세.[72] 윤한선, 향년 60세.[73] 원래는 이복작은고모이나 이복큰고모가 일찍 죽어서 사실상 이복큰고모가 됬다.[74] 윤길희, 향년 49세.[75] 윤치창, 향년 74세.[76] 윤노덕, 향년 85세.[77] 윤치왕, 향년 88세.[78] 윤의경, 향년 72세.[79] 윤치일, 향년 50세.[80] 윤일선, 향년 91세.[81] 윤형선, 향년 70세.[82] 5대 임기 중 대통령 당선으로 의원직 사퇴.[83] 전임자 윤보선의 대통령 당선으로 사퇴하면서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당선.[84]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종로구 을과 합구되었다.
1962.3.24. 대통령 하야.[38] 역대 직선제 대선 중 1위 후보와의 득표수 최저 격차. (15만 6026표)[39] 1965.8.5.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40] 조선민족당과 신설 합당.[41] 대한국민당과 신설 합당.[42] 민주당에 흡수 합당.[43] 대통령 취임으로 인한 탈당.[44] 민주당과 신설 합당.[45] 당내 노선 차이.[46] 민중당과 신설 합당.[47] 당내 노선 차이.[48] 연령이 확실히 검증되는 인물 중 윤보선보다 장수한 한국사의 지도자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유일하다.[49] 만약 이명박이 2034년 11월까지 생존한다면 이 기록을 깬다.[50] 본인이 "살아있는 사람이 어떻게 우표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며 취임기념우표에 쓸 사진을 제공하지 않았고 결국 4대 대통령 취임기념우표 대신에 새정부수립기념우표가 발행되었다.[51] 다만 윤보선 직전에 곽상훈 전 민의원의장, 허정 전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 백낙준 전 참의원의장이 잠시나마 의원내각제 하 상징적 국가원수로서의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적은 있다. 이때는 허정 전 총리가 실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 권한대행도 상징적 국가원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곽상훈 전 의장과 백낙준 전 의장 사이에 잠시 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낼 허정 전 총리는 상징적 국가원수이면서도 동시에 실질적 정부수반으로서의 지위도 동시에 갖고 있어 두 권력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을 국가로 본다면 한반도 최초로는 북한이 먼저 김두봉, 최용건을 상징적 국가원수로 둔 적이 있다. 김일성이 국가주석이 되어 폐지되었으나, 김일성 사후 다시 김영남을 상징적 국가원수로 두다가 현재는 완전 폐지된 상태다. 더 앞서서는 대한제국 시기에 입헌군주제의 틀을 마련한 바 있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52] 에든버러 대학교는 옥스브리지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는 학교이다. 또한 옥스퍼드대학교에도 입학한 기록이 있으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옥스퍼드대에서 에든버러대학교로 학적을 옮겼다. 당대든 지금이든 옥스퍼드대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의아한 일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특별한 계기가 있던 듯 하다.[53] 조지 워싱턴 대학교 학사 출신인 이승만과 서울대학교 학사 출신인 김영삼, 윤석열 등 또한 후보이다.[54] 윤보선이 서울특별시장을 할 때는 관선이었고, 최초의 민선 서울특별시장 출신은 이명박이다.[55] 대통령 사퇴 후 박정희 정부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제5대 대통령 선거, 제6대 대통령 선거에도 도전했다.[56] 사실 어떻게 보면 윤보선이 유일한 게 당연하다. 윤보선은 역대 대통령들 중 유일하게 상징적 대통령이었고 임기도 짧았기 때문에 하야 후에도 정치를 계속할 틈이 있었다. 전임자 이승만은 4.19로 하야하고 하와이에서 은둔하다가 죽어서야 고국에 돌아왔고 하야할 당시 85세의 고령이라 더 하기도 힘든 나이었으며, 후임자 박정희는 소원대로 종신 대통령을 했다. 최규하는 원래부터 정치와 거리가 멀었던 평범한 외교관 출신이었으나 국무총리 재임기와 10.26이 겹치면서 우연히 대통령이 된 케이스라 임기기간동안 대통령보다는 대통령 권한대행에 가까운 이미지를 갖고있었으며 5.17 내란으로 하야한 후에도 정치판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전두환은 퇴임 이후 권력행사를 시도했다가 노태우에 의해 백담사로 유배를 가고 이후 노태우가 퇴임한 이후 김영삼에 의해 사이좋게 손잡고 감방에 들어갔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각 69세, 79세의 고령인데다 아들들의 구속으로 인한 이미지 악화로 퇴임 후에도 정치를 할 여력이 없었다. 노무현, 이명박은 임기 말에 레임덕에 걸려 퇴임 후 말로가 좋지 않았던 탓에 노무현은 실제로 국회의원 선거 재출마를 고려했으나 끝내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이명박은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박근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며 문재인 역시 70세를 넘긴 고령인데다가 본인부터 남은 생을 조용히 살겠다고 했기 때문에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지언정 다시 직접적으로 정치판에 뛰어들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윤석열의 경우 퇴임 후에는 60대 후반밖에 안 되므로 퇴임 후 정치활동을 할 여지는 있으나 현재의 낮은 지지율로 볼 때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57] 반면 영국과 일본 같은 의원내각제 국가의 경우 총리 임기를 마치고서도 계속 현역 의원직을 유지하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으로 아베 신조, 스가 요시히데, 보리스 존슨의 경우가 있다.[58] 이승만과 박정희는 이혼 이후 재혼이다.[59] 윤보선은 1897년 8월생이고 대한제국 선포는 1897년 10월이기 때문. 만약 윤보선이 두달 늦게 태어났다면 이승만이 유일한 조선 출신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1894년 갑오개혁 때부터 1897년 10월 대한제국 선포 때까지는 조선 왕국도 대한제국도 아닌 어정쩡한 대조선국 상태였기에 온전한(?) 조선시대를 경험한 이는 이승만이 유일하다.[60] 윤보선보다 먼저 사망한 이승만, 박정희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으며 윤보선 이후 사망한 대통령 중 최규하는 국립대전현충원에, 김대중, 김영삼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였으며 노무현은 수원시연화장에서 화장되었고, 경상남도 김해시 봉하마을의 사저 인근에 안장했다. 노태우는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되어 경기도 파주시 동화공원묘역에 안장하였으며 전두환은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되어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 안치하고 있다.[61]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톨릭 대부이기도 하다.[62] 윤보선, 천관우, 지학순, 강원용.[63] 여흥 민씨 민영철(閔泳喆)의 딸이다. 여담으로 7촌 숙부가 민영환이라고 한다.[64] 그가 태어난지 50일도 되지 않아 대한제국이 성립했다.[65]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미군정기, 1공, 2공, 3공, 4공, 5공, 6공.[66]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낸 허정 전 총리도 조선시대에 태어나 6공까지 생존했다. 그래서 허 총리의 별명이 國老일 정도.[67] 이 외에 특이한 점이 있다면 윤석열의 부친이 충청남도 공주시 출신이라, 본인이 충청권 출신인 윤보선과 함께 둘 다 충청권에 연고가 있다는 점이다.[68] 이범숙, 향년 93세.[69] 윤활란, 향년 85세.[70] 윤완선, 향년 69세.[71] 윤원선, 향년 61세.[72] 윤한선, 향년 60세.[73] 원래는 이복작은고모이나 이복큰고모가 일찍 죽어서 사실상 이복큰고모가 됬다.[74] 윤길희, 향년 49세.[75] 윤치창, 향년 74세.[76] 윤노덕, 향년 85세.[77] 윤치왕, 향년 88세.[78] 윤의경, 향년 72세.[79] 윤치일, 향년 50세.[80] 윤일선, 향년 91세.[81] 윤형선, 향년 70세.[82] 5대 임기 중 대통령 당선으로 의원직 사퇴.[83] 전임자 윤보선의 대통령 당선으로 사퇴하면서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당선.[84]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종로구 을과 합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