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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란 가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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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연도 결정일 수여일 이름 직책 국적 비고
1949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 대한민국
1960년 8월 13일 윤보선 대통령 대한민국
1963년 12월 5일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대한민국
1967년 6월 23일 육영수 영부인 대한민국
1979년 12월 7일 최규하 대통령 대한민국 12.12 군사반란으로 하야
1979년 12월 7일 홍기 영부인 대한민국
1980년 8월 29일 8월 29일 전두환 대통령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0년 8월 29일 8월 29일 이순자 영부인 대한민국
1988년 2월 24일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8년 2월 24일 2월 25일 김옥숙 영부인 대한민국
1993년 2월 11일 2월 23일 김영삼 대통령 대한민국
1993년 2월 11일 2월 23일 손명순 영부인 대한민국
1998년 2월 17일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 대한민국
1998년 2월 17일 2월 25일 이희호 영부인 대한민국
2008년 1월 28일 노무현 대통령 대한민국
2008년 1월 28일 권양숙 영부인 대한민국
2013년 2월 12일 이명박 대통령 대한민국
2013년 2월 12일 김윤옥 영부인 대한민국
2013년 2월 19일 박근혜 대통령 대한민국
2022년 5월 3일 문재인 대통령 대한민국
2022년 5월 3일 김정숙 영부인 대한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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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외국인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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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연도 결정일 수여일 이름 직책 국적 비고
1964년 12월 3일 12월 8일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 서독 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4년 12월 3일 12월 8일 빌헬미네 뤼브케 영부인 서독 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6년 2월 1일 2월 7일 이스마일 나시루딘 국왕 말레이시아
1966년 2월 1일 2월 7일 틍쿠 인탄 자하라 왕비 말레이시아
1966년 2월 1일 2월 10일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태국
1966년 2월 1일 2월 10일 시리낏 끼띠야콘 왕비 태국
1966년 2월 1일 2월 15일 장제스 총통 중화민국
1968년 5월 10일 5월 18일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에티오피아
1969년 5월 23일 5월 27일 응우옌반티에우 총통 남베트남
1969년 5월 23일 5월 27일 응우옌티마이아인 제1부인 남베트남
1969년 10월 28일 10월 28일 하마니 디오리 대통령 니제르
1969년 10월 28일 10월 28일 아이샤 디오리 영부인 니제르
1970년 9월 25일 9월 28일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대통령 엘살바도르
1970년 9월 25일 9월 28일 마리나데 산체스 에르난데스 영부인 엘살바도르
1975년 6월 27일 7월 5일 오마르 봉고 대통령 가봉
1975년 6월 27일 7월 5일 조세핀 봉고 영부인 가봉
1979년 4월 17일 4월 23일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대통령 세네갈
1979년 4월 17일 4월 23일 콜레테 위베르트 상고르 영부인 세네갈
1980년 5월 11일 할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드 국왕 사우디아라비아
1980년 5월 14일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국왕 쿠웨이트
1981년 6월 25일 수하르토 대통령 인도네시아
1981년 6월 25일 시티 하티나 영부인 인도네시아
1981년 6월 29일 아마드 샤 이브니 아부 바카르 국왕 말레이시아
1981년 6월 29일 틍쿠 아프잔 왕비 말레이시아
1981년 7월 6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 필리핀
1981년 7월 6일 이멜다 마르코스 영부인 필리핀
1981년 10월 13일 로드리고 카라소 대통령 코스타리카
1981년 10월 13일 에스트레야 셀레돈 리사노 영부인 코스타리카
1982년 5월 10일 사무엘 도 대통령 라이베리아
1982년 6월 7일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 자이르
1982년 6월 7일 보비 라다와 영부인 자이르
1982년 8월 25일 압두 디우프 대통령 세네갈
1982년 12월 21일 케난 에브렌 대통령 튀르키예
1983년 3월 10일 3월 15일 자파르 모하메드 니메이리 대통령 수단
1983년 3월 10일 3월 15일 부띠나 칼릴 압불핫산 영부인 수단
1983년 9월 10일 후세인 1세 국왕 요르단
1983년 9월 10일 누르 왕비 요르단
1984년 4월 9일 하사날 볼키아 국왕 브루나이
1984년 4월 21일 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 국왕 카타르
1984년 8월 30일 9월 13일 다우다 자와라 대통령 감비아
1984년 8월 30일 9월 13일 치렐 자와라 영부인 감비아
1985년 5월 17일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대통령 파키스탄
1985년 5월 20일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 대통령 코스타리카
1986년 9월 4일 4월 10일 엘리자베스 2세 국왕 영국
1986년 9월 4일 4월 16일 보두앵 국왕 벨기에
1987년 4월 7일 아메드 압달라 대통령 코모로
1988년 11월 3일 이스칸다르 국왕 말레이시아
1988년 11월 3일 자나리아 왕비 말레이시아
1989년 11월 3일 11월 20일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 서독
1989년 11월 3일 11월 30일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프랑스
1989년 11월 3일 11월 30일 다니엘 미테랑 영부인 프랑스
1990년 6월 21일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대통령 파라과이
1990년 11월 5일 괸츠 아르파드 대통령 헝가리
1991년 9월 13일 아즐란 샤 국왕 말레이시아
1991년 9월 13일 투안쿠 바이눈 왕비 말레이시아
1991년 9월 25일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대통령 멕시코
1992년 8월 13일 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 대통령 과테말라
1993년 5월 20일 5월 25일 피델 라모스 대통령 필리핀
1993년 5월 20일 5월 25일 이멜리타 마르티네스 라모스 영부인 필리핀
1994년 11월 7일 11월 21일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 대통령 칠레
1994년 12월 5일 12월 9일 레흐 바웬사 대통령 폴란드
1995년 2월 7일 2월 16일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 우즈베키스탄
1995년 2월 21일 3월 6일 로만 헤어초크 대통령 독일
1995년 3월 28일 4월 3일 젤류 젤레프 대통령 불가리아
1995년 6월 26일 7월 7일 넬슨 만델라 대통령 남아프리카 공화국
1995년 9월 26일 9월 29일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아르헨티나
1996년 7월 23일 9월 4일 알바로 아르수 대통령 과테말라
1996년 7월 23일 페르난두 카르도주 대통령 브라질
1996년 10월 8일 10월 20일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 스페인
1996년 10월 8일 10월 20일 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프리데리키 왕비 스페인
1996년 11월 26일 자파 이브니 압둘 라만 국왕 말레이시아
1996년 12월 10일 12월 15일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 우크라이나
2000년 2월 22일 3월 3일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대통령 이탈리아
2000년 2월 22일 3월 6일 자크 시라크 대통령 프랑스
2006년 3월 12일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 알제리
2007년 3월 26일 사마 알아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국왕 쿠웨이트
2007년 3월 28일 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 국왕 카타르
2009년 5월 13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카자흐스탄
2009년 11월 12일 알란 가르시아 대통령 페루
2012년 5월 30일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 스웨덴
2012년 11월 21일 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 대통령 아랍에미리트
2018년 10월 8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프랑스
2019년 하랄 5세 국왕 노르웨이
2021년 6월 14일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대통령 오스트리아
2021년 6월 16일 펠리페 6세 국왕 스페인
2021년 6월 16일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왕비 스페인
2021년 8월 25일 이반 두케 대통령 콜롬비아
2021년 9월 21일 보루트 파호르 대통령 슬로베니아
2023년 7월 13일 안제이 두다 대통령 폴란드
2023년 11월 21일 찰스 3세 국왕 영국
2024년 11월 16일 디나 볼루아르테 대통령 페루 }}}}}}}}}
페루 공화국 제53·57대 대통령
알란 가브리엘 루드위그 가르시아 페레스
Alan Gabriel Ludwig García Pérez
파일:Alan_García_presidente_del_Perú.jpg
출생 <colcolor=#000000,#ececec>1949년 5월 23일
페루 리마
사망 2019년 4월 17일 (향년 69세)
페루 리마
국적 페루 파일:페루 국기.svg
재임기간 제53대 대통령
1985년 7월 28일 ~ 1990년 7월 28일
제57대 대통령
2006년 7월 28일 ~ 2011년 7월 28일
정당 미주혁명인민동맹
서명
파일:Firmaalangarcia.jpg

1. 개요2. 생애
2.1. 대통령 취임 전2.2. 1차 대통령 집권기2.3. 과도기2.4. 2차 대통령 집권기2.5. 말년과 비극적인 최후

[clearfix]

1. 개요

페루의 53대, 57대 대통령. 가히 정치인이 경험할 수 있는 천국지옥을 모두, 그것도 여러 번 경험한 사람일 정도로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을 보냈다.[1] 일단 정치력만큼은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인 중에서도 가장 발군이었다.[2]

2. 생애

2.1. 대통령 취임 전

1949년 5월 23일 리마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알란 가르시아는 아버지가 미주혁명인민동맹(APRA)[3] 당원이었으며, 그 영향으로 청소년 시절부터 APRA의 당원이 되었고[4] 페루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딴 후 스페인[5], 프랑스에서 몇 년간 유학을 다녀왔다가 1978년 군부가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며 총선을 재개했고 페루 의회선거에서 당선되어 고작 만 29세라는 매우 젊은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었다.[6] 1982년에 APRA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티토주의펠리페 곤살레스 스페인 총리에게 영감을 얻은 정책들을 선보였는데 당시 페루는 민주화 이후로도 구리와 은 가격 폭락[7]엘니뇨 현상으로 인한 어업 경제 파괴, 리마에 불어닥친 파괴적인 홍수와 가뭄으로 경제 기반이 무너진 데다가 폴 볼커의 금리 인상이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야기한 외채난으로 인한 극심한 물가 상승[8]과 치안 공백으로 인한 치안 불안에 허덕이고 있었고 민주화 직후에 집권한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가 이에 대해 무능한 대처로 일관하면서[9][10] 이를 강력하게 비판했고, 잘생긴 얼굴[11]과 뛰어난 연설실력을 발군 삼아서 지지율을 급속히 끌어올렸다. 이윽고 1985년 대선에서 53.1%의 득표율로[12] 결선투표도 없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취임 당시 가르시아의 나이는 고작 만 36세에 불과했다.[13][14] 당연히 대선과 동시에 치러진 총선에서도 승리해 1956년 이래 페루에서 얻기 힘든 여대야소까지 차지했다.[15][16]

2.2. 1차 대통령 집권기

재임 초기에는 외환보유고의 감소를 막기 위해 외채동결 조치[17]를 취하고 동시에 환율 안정화 및 물가통제와 임금인상 정책 등을 폈는데 이러한 조치는 초기에는 큰 효과를 내서 1986년에 경제성장률은 9%대까지 치솟았다. 또한 당시 페루군이 반군을 척결하겠다면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광범휘한 인권침해를 저지르는 문제도 있었는데 초기에는 인권침해를 저지른 군인이나 부패한 경찰관을 해고시키는 개혁정치를 펼쳤다. 지지율 최고치가 무려 96%(!!!)[18]에 달해서 페루의 케네디라고 불릴 정도였다. 여기서 끝났다면 페루를 안정화시킨 인기있고 유능한 대통령으로 남았을 것이다.

허나 이러한 경제정책은 탄탄한 경제적 기반이 뒷받침되지 않고 진행되었기 때문에 오래 지나지 않아 삐그덕거리기 시작했고,[19] 1987년도부터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고 잡힐듯 보였던 물가상승률도 다시금 오를 기미를 보이자 경제를 부양하려고 은행국유화 법안을 통과시켰다가 우익진영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은행국유화 법안은 논란 끝에 의회에서 부결되며 이후로 알란 가르시아는 급속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은행국유화 법안 파동 이후로 기업들의 투자는 급속히 위축되고, IMF로부터 투자부적격국으로 지정되면서 물가상승률은 1987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다시 급속히 치솟기 시작하여 1987년에도 86%였던 게[20] 1988년에 667%, 1989년에 3,399%, 1990년에는 무려 7,481%까지 치솟았다.[21] 그의 집권기 누적 인플레이션율은 무려 220만 200%에 달했다![22] 때문에 페루 통화였던 인티[23]는 1991년 7월에 누에 보 솔로 대체되었는데, 당시 새로운 솔의 누적 가치는 10억 구(舊) 솔이었다. 당연히 페루 주민들은 결재를 위해 미국 달러를 대체제로 써야 했으며, 중산층들은 진작에 집안에 있는 거의 모든 현금 비축금을 달러로 환전함으로써 초인플레이션을 견뎌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률도 1988년 -9.3%, 1989년 -12.4%를 찍었으며, 1990년에도 -5.0%를 찍으며 3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24][25] 실업률은 1987년부터 1990년까지 4.8%에서 8.6%로 기존의 80% 가까이 폭등했고[26], 빈곤층 비율은 55%[27], GDP 대비 정부 부채는 190%, GDP 대비 외채는 77%[28]를 찍으며 국가경제는 마비 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총 GDP는 365억 달러에서 154억 달러로, 1인당 GDP는 1767달러에서 730달러로 단 1년 만에 절반 미만으로 폭락해 하루아침에 중진국 일보직전 수준[29]50%를 넘겼다.]에서 최빈국을 겨우 면하는 수준으로 작살이 났다. 물론 당시 페루의 실질 임금은 기존 대비 50% 미만으로 삭감되었다.[30] 빈곤율도 1985년 41.6%에서 1991년 55%로 기존의 1/3 가량 증가했다. 이 와중에 광부들의 장기 파업까지 겹치며 수출이 감소함과 동시에 무역 적자는 증가했으며, 빛나는 길은 시골에서 리마를 목졸라 죽이려는 장기 전략 차원으로 태평양 연안의 리마까지 3개의 안데스 지방에서 모든 식량, 전력, 수출 광물 공급을 차단해 페루를 암흑으로 몰아넣었다. 1988년 기준 국민 52%가 하루빨리 페루를 떠나고 싶다고 답했고, 3년 동안 12만 명의 페루인이 해외로 이주해 해외에 거주하는 페루인 수가 기존의 2배 이상으로 늘었다. #

심지어 당시 페루인들은 만성적인 식량부족에까지 사달렸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1988년 기준 국민 40% 이상이 만성 영양실조에 시달렸으며[31], 빈곤층들[32]은 과장이 아니라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서 겨우 연명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 한 끼도 아무것도 얹지 않은 빵[33]과 당근, 콜리플라워 등의 야채 찌꺼기를 넣어 만든 수프 정도가 전부였고, 우유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그야말로 '기본적인 영양분 보충과 생존을 위해 먹는' 수준이었다. 또 공동급식소[34]에서 나눠주는 8센트[35]짜리 점심[36]돈이 없어서 못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 또 1970년 당시 페루 인구의 7%인 100만 명이 영양실조를 겪고 있었지만, 1989년에는 2,100만 명의 페루 인구의 23%인 500만 명이 영양실조를 겪고 있게 되었다.[37] # 1989년 유엔식량농업기구는 '예외적 또는 긴급 지원'이 필요한 15개국 중 하나에 페루를 넣기도 했다. #

이 틈을 타서 지방에서 빛나는 길이 페루 전역에 위세를 떨치며 리마 근교지역까지 진출했고, 이들은 정부 관리들과 외국인[38]들을 암살하거나[39] 페루의 인프라 시설[40]대사관에 폭탄 테러를 가하며 치안은 다시금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당시 테러리스트들의 폭력이 얼마나 심했는지 정부는 외진 시골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페루의 모든 지방에서 유엔에 도움을 요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1989년 10월 기준 페루 인구 2162만 명 중 약 절반이 군대가 반군과 싸울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받은 비상 구역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 1990년 1월 시점에는 아예 국토의 2/3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 설상가상으로 반군의 존재감은 가난한 농촌 지역과 리마의 판잣집 마을에서 가장 강했으며, 이들 지역에서는 경찰의 보호가 미비하거나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빛나는 길도 빛나는 길이지만 인권을 중시했던 초기 행보와는 다르게 반군을 진압할 대책으로 강경책을 쓰면서 페루군이 일반 민간인을 임의적으로 살해하는 등의 인권침해적인 작전을 벌여도 이를 방조하거나 조장하기 시작했고, 그의 집권기에 강제실종된 사람만 1600명에 달할 정도였으며, 1986년 6월 18~19일에는 교도소 수감자들의 폭동과 진압 과정에서 300명의 수감자가 사망한 페루 교도소 학살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그리고 가르시아는 민간인 살상을 저지른 준군사조직인 로드리고 프랑코 사령부와도 연줄이 있었고[41], APRA와 정부 고위 관리들은 아예 직접적으로 준군사조직을 운영한 데다가, 심지어는 조직원 중 일부를 북한에 보내 훈련시키기까지 했다고 한다. 또 1988년에는 아야쿠초시에서 정부의 급식 중단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시위에 경찰이 발포해 학생 50명이 부상을 입고 500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 이런 상황에서 페루의 세계의 자유 지수는 가르시아 집권 직후인 1985~1986년 지표에서는 정치적 권리(PR) 2등급, 시민 자유(CL) 3등급의 '자유' 등급이었으나 그가 퇴임한 1990년 지표가 반영된 1990~1991년 지표엣는 PR 3등급, CL 4등급의 '부분 자유'로 전락했다.[42]

또한 경제가 최악의 상황에 빠져들던 상황속에서 가르시아의 측근들이 부패스캔들에 연루되면서 지지율은 최암흑기(1989년 초반)에는 9%[43]로 추락, 심지어 7%를 찍었다는 기록까지 있다.[44] # 이미지는 만신창이가 되기에 이른다. 취임 3주년이던 1988년 기준 국민 79%가 가르시아의 사임을 원했으며,(#) 가르시아 본인도 취임 3주년 기념 연설에서 "이제 아무도 그 첫 2년을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한탄했고,(#) 이런 혼란상을 틈타 군부는 가르시아의 무능을 핑계로 '녹색 계획'(Plan Verde)이라는 쿠데타를 계획하기도 했으며[45][46], 페루에서 1980년대는 잃어버린 10년(Década perdida)으로 불리고 있다. 당시 가르시아에 대한 민심이 얼마나 안 좋았냐고 하면 가르시아가 1989년 5월 중순 빛나는 길의 '무장파업'[47] 기간 동안 국내 순방을 나섰을 때 분노한 국민들에게 폭행을 당할 정도였다. #

1989년 지방선거에서는 쌓아놓은 조직력을 통해 세를 확보해나갔지만 그럼에도 당세의 쇠락은 막을수 없었고, 1990년 대통령 선거에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당선될것으로 예측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알란 가르시아는 여기서 머리를 잘 써서 TV방송 진행자이자 농업전문가 정도로 알려졌던 알베르토 후지모리의 지지율이 올라가며 결선에 진출하자 적극적으로 밀어주었고[48], 일본이 한창 경제적으로 호경기를 누렸던 시절인지라 일본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 될것이라는 예측이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난무했었던 점을 이용한것인데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1차 투표에서는 요사 VS 후지모리가 32.6% VS 29.1%로 요사가 3%p 앞섰는데 2차 투표에서는 37.6% VS 62.4%로 후지모리가 2/3배 수준으로 앞서며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을 정도였다. 사실 이는 요사가 신자유주의 성향 공약들을 펼친 것이 페루 국민들에게 반감을 줬던 것의 영향도 크긴 하지만, 가르시아가 이미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놓은 수준이라고 봐도 정치적 흐름을 파악하는 능력이 매우 탁월했다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는다.[49] 참고로 APRA 소속 후보였던 루이스 알바 카스트로는[50] 22.5% 표를 얻으며 3위를 기록, 결선투표에도 올라가지 못하며 정권연장에 처참히 실패했다.[51] 그나마 대선과 같이 치러진 총선에서 요사의 민주전선이 하원 180석 중 63석을 차지한 것에 뒤이어 가르시아의 APRA는 53석을 얻으며 원내 2당이 되었고, 후지모리의 캄비오 90(32석)[52]2배 가량 앞섰다.

그가 임기를 마치던 1990년 7월 28일 생중계 고별 연설을 하던 가르시아는 반대 세력 전체의 야유를 받거나 서류철을 책상에 내리치는 소리 속에서 연설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일부 반대파 의원들은 연설 중 의회를 떠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날 페루 하원 위원회는 가르시아 대통령 시기를 조사하기 위한 특별 위원회를 구성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가르시아를 대규모 부패와 불법적 횡령 혐의로 고발했는데, 특별 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가르시아는 BCCI 등의 외국 은행에서 수백만 달러를 불법적으로 취득했다고 한다. 이 비리 혐의는 미국에도 알려져 1991년에는 뉴욕의 전설적인 검사 로버트 모겐소에게 기소를 당했으며, 1992년 존 케리 상원의원이 주재한 보고서에 따르면 가르시아는 부패 혐의에 있어서 유죄일 뿐만 아니라 마약과 무기 밀매를 포함한 활동을 하는 국제적 공갈 네트워크에 직접적으로 연루됐다고 한다.

참고자료(페루는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 싸운다 - 1989년 5월 14일 뉴욕타임즈 기사) 기사 처음에 언급된 내용부터가 충격적인데, 가르시아는 국민들의 분노와 경멸을 피해 대통령궁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은 기본에 1988년에는 2번이나 사임을 시도했으며, 심지어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축출되는 것을 바란다고 여러 번 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권력의 위험성을 고려하면 가르시아가 페루의 열악한 상황에 얼마나 자포자기했는지는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2.3. 과도기

퇴임한 가르시아는 종신 상원의원으로 재직했지만, 1991년 10월 18일 상원에서 가르시아의 직무정지&재판회부안이 38:17로 가결되었지만 대법원의 무죄 판결로 인해 1992년 3월 상원으로 복귀했다. 덤으로 집권 후 오래가지 않아 알베르토 후지모리와의 관계는 나빠졌고, 1992년 4월 5일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페루 의회를 해산하고[53] 알란 가르시아의 비리를 조사하려고 하자, 1992년 5월 말 알란 가르시아는 콜롬비아로 망명을 갔고, 반 후지모리 활동을 벌이거나 직접 쓴 소설을 출판하기도 했다.[54]

2001년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추문끝에 탄핵되고, 페루 대법원에서 알란 가르시아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며 페루로 귀국했다. 당초 대통령 선거에서 알베르토 후지모리에게 적극적으로 맞서던 알레한드로 톨레도가 대통령에 당선될것이 확실시 되었던 상황이었고 알란 가르시아는 이전의 반군이 판치고 물가상승률은 극도로 높아지고 국민 4명 중 1명이 영양실조이던 악몽 같던 시절을 대표하던 대통령으로 잡룡으로 취급되었지만 뛰어난 선거운동 능력을 선보이면서 결선투표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고 2001년 대선에서 석패했지만 그럼에도 46%라는 무시할수 없는 득표율을 확보하며 선전했다는 평을 들었다. 이후로 톨레도가 지지율에서 지속적으로 죽을 쓰면서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가 되었다.

하지만 알란 가르시아가 약점이 적지 않은 인물이었는데 이 와중에 오얀타 우말라가 경제성장에도 빈부격차는 여전히 컸던 페루의 상황을 비판하며 급속히 치고 올라오자, 보수파의 표를 얻기 위해 골몰했고, 이를 위해 노선을 온건화했다. 2006년 대선에서 우고 차베스와 오얀타 우말라를 연계해 실컷 까대면서 언론사들의 지원을 얻었고 우파의 표를 획득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55]

2.4. 2차 대통령 집권기

2기 집권기 때는 페루의 경제는 보수적인 재정운영을 하며 우려를 불식시키고, 미국과도 어느 정도 친해졌으며 매년 연 7~8%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여 라틴아메리카 최고치를 기록하고 빈곤율도 48%에서 28%로 감소시켜 금융위기에 휘말린 2009년도를 제외하면 평온하게 경제관리를 잘했다는 평을 들었지만 사회운동에 대해서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고 그렇다고 복지를 획기적으로 늘린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집권기간 동안 사회정책에 대한 평은 영 꽝이었고 그 때문에 지지율은 낮았다. 1기 집권기보다는 성과가 낫다는 평을 듣기는 했지만 2011년 퇴임한 이후로는 퇴물로 전락했다.

2.5. 말년과 비극적인 최후

이후로 오데브레시 뇌물수수 사건[56]에 연루되었고, 또 2015~2016년에는 가르시아 시절 총리와 최주요 장관 4명이 부패 혐의로 체포되었다. 물론 2016년 대선에서 5.83%의 득표를 확보하며 10명 중 5위로 낙선했다.

이 와중에 우루과이망명을 가려고 했지만 우루과이 정부에서 거부하고 페루 정부에서도 가르시아의 출국금지 조치를 내리면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2018년 기준 전직 대통령이었던 그의 지지율은 박근혜의 최저 지지율과 완전히 판박이인 긍정평가 4%, 부정평가 93%였다고 한다.[57][58] 이후 2019년 4월 17일에 뇌물 혐의를 조사하던 경찰이 가르시아 전 대통령의 집에 들어오자 총을 들고 스스로 총을 쐈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마침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가 건강이 썩 좋지 않은데다가 한때의 정적이었지만 동병상련의 처지인 톨레도와 우얀타 우말라도 알란 가르시아의 죽음에 대해서 애도했다. 사실 알란 가르시아의 자살이 가져올 파장이 페루 정치권에서 만만한 것이기 아니기 때문에[59][60] 마르틴 비스카라 대통령이 이끌던 페루 정부에서 3일간의 애도기간을 가졌다.


[1] 특히 지지율 면에서는 최대 96%, 최소 4%(심지어 후자는 부정평가가 93%였다. 다만 후자는 퇴임 후에 기록했다)라는 최고치, 최저치 모두 사상 초유의 대기록을 보유했는데, 과장 한 마디도 안 보태고 나이브 부켈레탄핵박근혜를 모두, 그것도 판박이로 경험한 수준이다! 그리고 그의 집권기가 페루 역사에서 안 좋게 기억됨에도 불구하고 퇴임 16년 후 재선에 성공하는 영광을 누렸지만, 퇴임 후 뇌물수수 혐의가 제기되면서 모든 명예를 잃고 권총자살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2] 지지율이 100%를 목전에 둔 수준에서 한자릿수로 떨어져서 정권교체가 불가피한 상황에서도 대선 과정에서 자신이 밀어준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결선 투표에서 극적인 역전승으로 당선되며 간접적으로 정권연장에 성공했으며, 전술했듯 그의 집권기가 페루 역사에서 매우 안 좋게 기억됨에도 불구하고 정계에서 완전히 매장당하기는커녕 퇴임 16년 후 재선에 성공했다.[3] 당 자체는 중도좌익을 표방했지만, 극좌, 좌익, 우익, 심지어 극우까지 포함된 빅텐트 정당이었다고 한다. #[4] 14살에 APRA 창립자를 기리기 위한 연설을 했다.[5] 가르시아는 과거 스페인에서 헌법학 박사 학위를 땄다고 주장했지만(때문에 가르시아는 페루 내에서 종종 '가르시아 박사'로 불렸다) 2014년 대학교 문서를 검토한 결과 박사 과정을 이수한 것은 맞지만 박사 학위를 취득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6]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처음 국회의원이 된 나이(만 26세, 이하 만 나이 기준)보다도 고작 3살 많다. 지도자 중에서도 가르시아가 국회의원이 된 나이보다 더 어린 나이에 집권한 지도자는 새뮤얼 케니언 도(28세), 김정은무아마르 카다피(각각 27세), 장클로드 뒤발리에(18세. 참고로 이쪽은 퇴임 당시 나이도 겨우 34세였다.)밖에 없고, 그 중에서도 김정은과 뒤발리에는 아버지의 권력을 세습받은 케이스라 논외로 봐야 한다.[7] 4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1980년부터 1982년까지 구리 가격은 톤당 3000달러에서 1300달러로 폭락했다.[8] 1983~1984년에는 물가 상승률이 110%를 넘겼고, 1985년에는 163%였다. 1985년 수치도 1920년 페루가 물가상승률 집계를 시작한 이래 당시까지는 가장 높은 수치였다.[9] 이미 1기 집권기 때에도 토재개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미국기업과 이면합의를 했다며 군부에게 쫓겨났던 경력이 있었다.[10] 벨라운테는 좌익 반군 운동에 대해 '페루 영토의 4%, 페루 인구의 3%, 페루 국민총생산의 2%를 차지하는 지역에 국한된 운동'이라고 일상적으로 일축해왔다. #[11] 대통령 당선 당시 사진[12] 상대 후보인 알폰소 바란테스(Alfonso Barrantes, 1927~2000. 당시 여당이던 연합좌파 소속이었으며, 1984~1986년 페루 시장을 역임했다. 1990년 대선에 출마했지만 5위를 기록했다.)은 가르시아의 절반 미만인 겨우 24.7%만 얻었다.[13] 피델 카스트로가 32세, 훈 센이 33세, 토마 상카라바샤르 알 아사드가 34세, 리콴유가 만 35세에 집권했다.[14] 당시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젊은 대통령이었으며, 1842년 34세의 후안 크리소스토모 토리코 이래 페루 역사상 가장 젊은 대통령이었다.[15] 상원 61석 중 32석, 하원 180석 중 107석[16] 이후 페루 의회에서 여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적은 알베르토 후지모리친위 쿠데타를 벌인 후 80석 중 44석을 얻어낸 1992년 조기총선과 후지모리가 경제난을 해결해 인기를 얻던 시절 치러져 120석 중 67석(페루 의회는 1993년 양원제에서 단원제로 개편되었다) 1995년 총선이 마지막이었고, 이후 페루는 특정 "야당"이 의회의 절반을 차지한 적도 있는 극단적인 여소야대 국가가 되었다. 사실 12년 군사정권(이때 페루에서는 총선이 치러지지 않았다) 종식 후 치러진 1980년 총선에서도 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했지만 이는 하원 한정이고 상원 과반은 차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훗날 2016년 게이코 후지모리민중의 힘도 야당으로서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17] 외채상환액을 GNP의 1%에 제한한다고 선언했다.[18] 9.11 테러 직후 조지 W. 부시의 지지율이 90%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가르시아가 임기 초반에 얼마나 인기가 높았는지 알 수 있다. 이 정도면 나이브 부켈레와 비교해야 하는 수준. 비공식적으로는 김영삼 전 대통령 지지율 최고치가 98%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최저 지지율도 비공식적으로는 3%였으니(#), 가르시아와 김영삼은 세계에서 90%대 지지율과 한자릿수 지지율을 모두 기록한 몇 안 되는 지도자들이기도 하며, 그 중에서도 김영삼은 세계 정치사에서 가장 지지율 최고점과 최저점의 격차가 큰 대통령이기도 하다.[19] 특히 국제통화기금의 큰 빽이 미국이었는데 미국과의 관계가 급속히 나빠지면서 페루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쳤다.[20] 이것도 1983~1985년 100%였던 거에서 꽤나 낮춘 것이다.[21] 1991년에도 410%였다.[22] 대충잡아 5년 만에 물가가 무려 22,000배나 올랐다고 보면 된다.[23] 사실 인티도 그의 대통령 임기가 시작되기 전인 1985년 2월에 솔이 벨라운테 시기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대체된 것이다.[24] 페루 역사상 이 정도로 대규모 마이너스 성장을 찍어본 적은 1983년(-10.4%)와 2020년(-10.9%)밖에 없다. 대침체 시기인 2009년에도 1.1% 성장으로 플러스 성장이나마 기록한 게 칠레 경제다.[25] 1991년 2.2%를 찍었으나 바로 다음 해인 1992년 -0.5%를 찍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4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인 셈이다.[26] 1988년과 1989년 페루의 실업률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27] 수도의 빈곤율도 1985년 17%에서 1990년 54%로 3배 이상 폭등했다. 1인당 소비는 평균 50% 감소했고 가장 가난한 계층의 1인당 소비는 60% 이상 감소했다. #[28] 사실 1983년에도 GDP 대비 외채 비율은 81%에 달했다.[29] 1986년 1인당 GDP는 1078달러로 세계 평균의 35% 미만이었는데 1987년 1인당 GDP는 1767달러로 세계 평균의[30] 페루의 전체 GDP와 1인당 GDP는 모두 가르시아의 퇴임으로부터 4년이나 지난 1994년에야 1987년 수준을 회복했다.[31] 그나마 이는 빈곤층 위주로 조사해(리마에서 5000가구 조사) 실제보다 높게 평가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난의 행군 당시 사망자가 200~300만이란 것도 탈북자 대다수가 나온 북부 지역이 고난의 행군 당시 피해가 유난히 컸던 곳이었기에 과대평가된 사망률이 반영되었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32] 참고로 당시 리마 인구 700만 명 중 절반 가량이 판자촌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 판자촌의 수준은 60년대 초 서울의 변두리 달동네보다도 나을 바가 없는 수준으로 열악했다. # 덤으로 안데스 산맥의 외딴 시골 마을들은 아예 "페루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버려지고, 가장 잊혀진 지역으로, 경제 및 사회 지표가 페루와 라틴 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최악 수준이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열악했고, 당연히 이런 열악한 환경은 시골 마을들을 좌익 게릴라의 거점지로 만들어 게릴라의 준동을 더욱 활성화했다.[33] '고독한 빵'이라는 뜻의 '판 콘 솔레다드(pan con soledad)'로 불렸다.[34] 참고자료[35] 2025년 가치로는 21.4달러, 원화로는 고작 256.3원에 불과하다.[36] 이걸 하루 세 끼 365일 먹는다 가정하면 1년에 약 88달러, 점심으로 한정하면 1년에 약 29달러만 소모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조차 페루 빈곤층들에게는 너무나 큰 돈이었다.[37] 덤으로 도시 운전자들은 꺼진 신호등을 뚫고 달리는 법을 배웠고 촛불을 켜고 저녁을 먹는 것이 이제 흔한 일이 되었다.[38] 자원봉사자, 관광객, 기자 가리지 않았다. 때문에 구호단체 직원들은 대부분 리마에 상주하면서 시골은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짧은 시간만 있었고, 고고학자들도 잉카 제국 유적지들을 피하게 되었다. #[39] 실제로 그의 임기 말에는 리마 중심부 거리에서 전직 국방부장관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에게 암살되었을 정도였다. 또 1989년 지방선거에서는 무려 123명의 정계 인사들(현직 정치인, 후보자 가리지 않고)이 반군에게 살해당해 4500명 중 400명 이상의 입후보자가 두려움에 떨며 사임할 정도였다. 263개 시장직에는 아예 입후보한 사람도 없었고 리마 북부 주닌 지역에서는 절반 이상 시장직이 공석인 상태였으며, 빛나는 길은 투표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1 #2 1989년 5월 중순의 한 주 동안 캐나다 외교관이 집 밖에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페루 외신기자협회 회장인 알베르토 쿠 킹은 살해 위협으로 인해 잠시 나라를 떠났으며, 신문 조사에 따르면 페루 의원 40명이 살해 위협을 받았고, 4월 27일 이후로 의원 2명이 살해되었다. # 때문에 미국 정부는 11월 3일부터 선거가 열리는 12일까지 미국인들에게 선거가 끝날 때까지 페루를 여행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였고, 반군이 수도에 올 것을 두려워한 정부는 기갑부대로 하여금 리마를 순찰하게 했으며, 고속도로는 군인들이 장악했다. #[40] 수도 리마의 인프라조차 예외는 아니었다.[41] 심지어 가르시아가 처형을 지시했다는 암시도 있다고 한다.[42] 1988년 말~1989년 지표가 반영된 1989~1990년 지표에서 CL이 4등급이 된 후 1990~1991년 지표에서 PR도 3등급이 되었다.[43] 참고자료 가르시아 1차 집권기 지지율이 나오는데, 여기 따르면 역대 최고 지지율은 90%다.[44] 저 정도면 박근혜디나 볼루아르테마냥 부정평가 90%대도 찍어봤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특히 후술하듯 대통령이 국민들의 증오를 접하는 게 두려워서 숨어 살았다는 것을 감안하면...[45] 당시 계획된 내용들은 후에 집권한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1992년 일으킨 친위 쿠데타 후 펼친 정책들에도 반영되었다.[46] 당시 페루인 중 28%가 가르시아 임기 내에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 실제로 가르시아는 경제위기를 이유로 군 예산을 삭감하고 군축을 시도했으며(취임하던 날 가르시아는 페루 공군이 7억 달러의 비용으로 의뢰한 프랑스산 미라주 2000 제트 전투기 24대 중 절반에 대한 주문을 갑자기 취소했다), 1987년 4월에는 공군 사령관이던 루이스 아브람 카발레리노 중장을 해임하자 분노한 공군이 제트기를 끌고 대통령궁 위로 저공비행을 하며 쿠데타의 기운이 맴돌기도 했다. 그나마 이 사태는 36시간 만에 수습되었다. #[47] 페루의 광업과 농업 중심지에서 일하던 100만 명의 사람들이 3일간 작업을 중단했다.[48] 당시 APRA의 한 일파가 공개적으로 후지모리 지지선언을 했을 정도였다.[49] 애초에 후술하듯 APRA가 총선에서 정권의 실책 대비 크게 선방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가르시아 정부의 지지가 결선투표에서 후지모리의 역전승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50] 페루 대통령은 중임은 가능하지만 연임은 금지되어 있기에 가르시아는 재선에 출마하지 않았다.[51] 그나마 경제문제와 반군 문제는 전 정부 시절부터 쌓여왔던 게 가르시아 때 악화되었다는 참작 사유라도 있고 전임 정부이던 연합좌파 소속 후보에게 다시 정권을 교체당한 것도 아니기에 살리 베리샤보다는 덜 굴욕적인 편이다.(...) 오히려 가르시아의 재선 실패는 김영삼과도 유사하며, 이쪽은 아예 대선에서 여당 소속 후보당선된 야당 소속 후보를 1.6%p 차로 앞서며 대선 직전 일어난 사건을 감안하면 굉장히 선방했다.[52] 의석의 1/6을 겨우 넘기는 수준으로 세계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여소야대 중 하나였고,(레흐 바웬사가 겪은 1993년 폴란드 중간선거(여당 의석이 전체 의석의 1/10 미만이었다)를 제외하면 적수가 전무한 수준이다) 결국 이는 1992년 후지모리의 친위 쿠데타의 빌미가 되었다.[53] 2008년 폭로된 바에 따르면 후지모리는 이때 가르시아의 암살을 지시했다고 한다. 가르시아는 군용 탱크가 그가 살고 있는 블록을 점령하는 동안 집에서 탈출했다고...[54] 자기의 도움으로 대선에서 역전승을 거둔 사람이 자신을 범죄자 취급하고 죽이려 하기까지 했으니 크나큰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긴 했다.[55] 임기 초반에 엄청난 범국민적 인기를 누렸으나 내전을 악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인기가 밑바닥으로 떨어지며 초라하게 자리에서 물러났음에도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는 점에서는 알바니아살리 베리샤와도 유사하다. 알바니아/경제 문서에도 나오듯 베리샤 집권 직전~초반 알바니아의 경제 상황은 (지리적 위치까지 감안하면) 가르시아 1차 집권기 페루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56] 퇴임 후인 2012년 5월 가르시아가 상파울루에서 브라질 기업 지도자들에게 연설을 하기 위해 10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 심지어 이 스캔들에는 당시 페루의 또 다른 전직 대통령 3명과 민중의 힘 대표인 게이코 후지모리(알베르토 후지모리의 딸이다)도 연루되었다.[57] # 이후 후배인 디나 볼루아르테롤렉스 게이트에 연루되어 2024년 12월 기준 가르시아와 박근혜마저 기록하지 못한 긍정평가 3%, 부정평가 95%를 기록하게 된다.[58] 2018년 페루 경제성장률이 가르시아 지지율과 판박이인 4.0%였다. 물론 경제성장률보다도 지지율이 낮았던 임기 말 김영삼보리스 옐친, 지지율 1%(...)를 기록한 미셰우 테메르보다는 양반이다.[59] 한국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 사건이 일으킨 파장을 생각하면 된다. 이쪽은 페루와 한국의 경제력, 국제적 위상 차이가 있어서(노무현 시기 한국은 김대중 정부 말기(2002년) 진입한 선진국, 지역강국 지위를 확고히 했다) 국제적으로도 주요 뉴스로 다뤄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르시아의 생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기일이기도 하며, 가르시아의 지지자들도 무리한 검찰 수사가 가르시아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며 검찰을 비난했다. #[60] 국제적으로도 노무현대한민국 대통령 이후 10년 만에 자살한 국가원수 출신 인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