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ff7700> 페루 민중의 힘 초대 당대표 게이코 후지모리 Keiko Fujimori | |
본명 | Keiko Sofía Fujimori Higuchi 케이코 소피아 후지모리 히구치[1] |
일본명 | [ruby(藤森, ruby=ふじもり)][ruby(恵子, ruby= けいこ)] (후지모리 케이코) |
출생 | 1975년 5월 25일 ([age(1975-05-25)]세) |
페루 리마 | |
국적 | [[페루| ]][[틀:국기| ]][[틀:국기| ]][2] |
학력 | 보스턴 대학교 (B.A) 컬럼비아 대학교 (MBA) |
부모님 | 부 알베르토 후지모리 모 수사나 히구치 |
형제 | 남동생 히로 후지모리, 겐지 후지모리 여동생 사치 후지모리 |
배우자 | 마크 빌레넬라(2004년~2022년 / 이혼) |
자녀 | 장녀 키아라 빌레넬라 차녀 카오리 빌레넬라 |
의원 선수 | 1 |
의원 대수 | 4 |
지역구 | 리마 광역구 |
소속 정당 | [[민중의 힘| 민중의 힘 ]] |
약력 | 페루 국회의원 (초선) 2011년 페루 대통령 선거 후보 2016년 페루 대통령 선거 후보 2021년 페루 대통령 선거 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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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루의 정치인.일본계 페루인으로, 10년 3개월 간 제54대 페루 대통령으로 재임한 알베르토 후지모리의 장녀이며 부친의 정치적 후계자다. 보수정당 '민중의 힘' 당대표를 맡고 있다. 대통령 선거에 3번이나 도전했으나 모두 근소한 표차로 낙선한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1975년 5월 25일 리마에서 일본계 출신이자 페루의 전 대통령 알베르토 후지모리와 역시 일본계인 수사나 히구치[3]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페인어식 작명법에 따라 어머니 성과 아버지 성을 모두 붙여 풀네임이 게이코 소피아 후지모리 히구치(Keiko Sofía Fujimori Higuchi)가 되었다.당초에는 그냥 특별할 이유가 없는, 그저 페루로 이민간 일본계 집안의 딸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면서 단숨에 인지도가 높아졌고, 거기다가 부친이 독재자로 타락하면서 마치 왕국의 공주에 가까운 이미지로 굳어졌다. 1994년 부친이 이혼하면서 어머니를 대신해 영부인 역할을 맡게 되었고[4], 2000년까지 그 직을 지냈다. 이 사이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유학 중이던 2004년 마크 빌라넬라라는 현지인을 만나 교제하다가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는 컬럼비아 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수학 중이었지만, 이듬해 졸업도 하지 않은 상태로 귀국한다.
3. 정치 활동
2005년 일본으로 도주한 부친이 대선을 1년 앞두고 귀국 후 대통령직 복귀를 시도하면서 잠시 또 주목을 받았지만, 상황이 곤란했던 나머지 칠레로 우회입국하다가 잡히는 바람에, 대권은커녕 코렁탕 신세가 되었다. 이 때 분노한 후지모리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미래동맹을 창당했는데, 게이코는 이 당에 입당해 본격적인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비록 당의 대선 후보였던 마르타 차베스가 낙선하면서 여당이 되지는 못했으나, 게이코 본인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덕분에 후지모리의 향수가 남아 있는 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우상으로 급부상했다.이를 바탕으로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차기 초강력 대권주자로 급부상했고, 2010년 미래동맹이 해산된 이후 게이코는 '힘 2011'을 창당했다. 참고로 지금의 민중의 힘과는 100% 똑같은 정당으로 당명만 바꾼 것이다.
4. 대선 도전
3번을 도전했으나 3번 모두 매우 근소한 차이로 낙선했다.4.1. 첫 번째 도전 (2011년)
Seguridad y oportunidades para todos
모두에게 안전과 기회를
모두에게 안전과 기회를
힘 2011의 창당과 함께 돌풍을 일으킨 게이코는, 곧바로 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각계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면서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시되었다. 이 무렵부터는 후지모리 시대의 향수가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점은 게이코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당시에는 나이가 36세로 다른 주자들보다 젊었다는 점이 강점이었다.[5]
그러나 과거사 청산 문제 등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던 상태였고, 이것이 역으로 악재로 적용했으며, 이념적으로도 젊은 대통령이라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강성 우파인지라, 좌파와 온건층의 어그로를 끌었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기에 곧바로 부친 시대에 있었던 인권 침해 전적에 대해 사과했으나, 당장 피해자들은 진심어린 보상을 원했지 말뿐인 사과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초반에도 리마의 시장을 지낸 루이스 카스타녜다 와의 접전 속에서 2위를 기록한 경우가 많았고, 도중에 알레한드로 톨레도 전 대통령이 도로 급부상하면서 2위 신세를 피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뭐 톨레도의 지지율이 급격히 빠지기 시작했으나, 대신에 알란 가르시아 당시 대통령의 바로 지난 경쟁자였던 오얀타 우말라가 지지율을 불려나가기 시작했고, 이 앞에서는 격차가 벌어지면서 눈앞이 깜깜해졌다.
어쨌거나 2위를 유지한 덕택에 1차 투표에서 23.56%를 얻어 우말라와 함께 결선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결선에 가서도 별다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채, 48.55%를 얻어 돌풍을 일으켰음에도 끝내 떨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시에 치러진 총선 또한 37석밖에 못 얻어, 47석을 얻은 페루 승리 연대[6]에 밀려 원내 2당으로 그쳤다. 뭐 그래도 이 때만 해도 "처음이니까 그럴 수 있다", "다음에는 꼭 된다"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그게 생각보다 어려울 줄은...
4.2. 두 번째 도전 (2016년)
La fuerza se siente
힘을 느껴 보자
힘을 느껴 보자
비록 대선에서 낙선했지만, 원내 2당의 대표로서 우말라 정권을 견제할 힘을 얻기 시작했고, 2012년 민중의 힘으로 당명까지 교체한 뒤 대대적인 쇄신 작업을 거쳤다. 그리고 전직 대통령들이 으레 그랬듯이 우말라 또한 지지율이 떨어지고 레임덕에 접어들면서, 이번에는 차기 대통령으로 거의 확정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2016년 대선의 해가 접어들면서 게이코는 어김없이 당의 대선 후보로 다시 선출되었다. 5년 전만 해도 다른 후보들과 접전을 벌이면서도 주로 2위를 기록했던 게이코였지만, 이번에는 30% 이상의 지지율로 다른 주자들을 큰 표차로 따돌리면서 여유롭게 나아갔다. 참고로 여당인 국민당이 사실상 대선 도전에 실패하면서,[7][8] 범여권 후보로는 광역전선[9]의 베로니카 멘도사와 변화를 위한 페루인들의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10] 2명으로 압축되었는데, 그래봤자 멘도사의 지지율은 10%도 될까 말까 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야말로 답이 없었고 게이코의 실질적인 상대는 쿠친스키였지만 지지율이 20%에도 달하지 못하는 지라... 덕분에 30% 이상의 압도적인 지지율을 기록한 게이코에게는 당연히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예상했던대로 1차에서 39.87%를 기록해 21.05%를 득표한 쿠친스키를 약 20% 차이로 크게 따돌리고 1위를 기록했으며, 결선에서도 처음에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기록하면서 무난히 정권을 잡으리라는 분위기가 확고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악재를 피하지 못했다. 바로 과거사 청산 문제였다. 비록 지난 대선 때 사죄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피해자들과 그의 유족들은 그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고, 전국적으로 게이코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무엇보다도 조금의 보상 따위 하나도 없었는데, 그냥 말뿐인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할까? 아닐 것이다. 더욱 더 황당한 것은, 1차 때는 크게 이슈화되지 않았다가 2차에 가서야 이슈가 되면서, 본인으로서도 도저히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1차 선거운동 당시 군소 후보에 가까웠던 멘도사가 좌파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데 성공하면서 지지율을 급격하게 불렸고, 당초 3위로 기록되었던 인민행동의 알프레도 바르네체아를 누르고 3위 자리를 탈환하는데 성공하면서, 2차의 캐스팅 보트 자리를 쥐게 되었다. 그런데 멘도사가 후지모리 집권 저지를 명분으로 쿠친스키 지지 선언을 하는 바람에 그간 알 수 없었던 좌파 표심이 쿠친스키로 이동하는 원인이 되었고, 비록 쿠친스키가 78세로 41세의 게이코와는 정반대의 고령 of 고령이었다지만 역으로 젊은층의 표심이 쿠친스키로 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악재에도 게이코는 각종 여론 조사에서 1위 자리를 꾸준히 차지하면서 차기 대통령으로서 확실하다는 분위기 자체에는 변함이 없었고, 여당의 실책이 컸던 탓에 "미워도 한번" 보다는 "정권 교체" 쪽에 힘이 실리면서 제아무리 범여권/좌파 지지자들이 죄다 쿠친스키로 결집해도 뒤집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선거를 단 며칠 앞두고 쿠친스키가 아슬아슬하게 추월하면서 제대로 먹구름이 끼고야 말았다.
결국 2차 투표에서 49.88%를 얻어, 50.12%를 득표한 쿠친스키에 밀려 떨어졌다. 매우 초접전이었는데 소수점 첫 번째 자리 수로 반올림하면 50.1%대 49.9%로 단 0.2% 차이였다. 그리고 아예 정수로 반올림하면 50:50이라는 점에서 더욱 더 충격적인 결과. 게다가 이것도 출구조사보다 더 접전이었는데, 출구조사에서는 50.4%대 49.6%였다.
이로서 두 번째 도전 또한 실패로 끝났다.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민중의 힘이 총선에서 단독 과반을 차지한 원내 1당이 되었고, 그간 여론조사에서는 줄곧 1위를 해서 비교적 탄탄한 기반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여하튼 선거 결과에 승복했다.
4.3. 세 번째 도전 (2021년)
Por el Peru
페루를 위하여
페루를 위하여
비록 2번이나 낙선했지만, 여전히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고 있으며, 쿠친스키도 결국 전임자들의 전철을 밟기 시작하면서 차기 대통령으로서의 입지가 더욱 더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진짜로 도전한다면 3수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쿠친스키 정권 수립 이후로는 원내 과반 의석을 차지한 1당의 대표로서 쿠친스키 정권의 국정 운영에 각종 발목을 잡고 있다. 게다가 쿠친스키가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게이코는 탄핵을 주도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정국이 발칵 뒤집힐 줄 알았으나... 아슬아슬하게 모면했다. 그런데 원인이 민중의 힘 소속 의원들 일부가 반대해서라고. 하필 그 주동자가 게이코의 동생인 겐지 후지모리다. 결국 게이코는 동생을 출당시켰다. 동생에게 동조한 의원들도 덩달아 출당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과반 의석의 원내 1당인지라 앞으로 쿠친스키 정권에 발목을 잡는 것은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
2017년 12월, 쿠친스키가 부친 알베르토를 석방했다.
쿠친스키의 레임덕에도 불구하고 게이코의 상황은 마냥 좋지 않았는데, 여론조사에서 4위를 기록하는 등 초기 지지율이 영 나오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출당된 겐지가 쿠친스키를 위해 일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여론조사 1위를 기록하면서 당장부터 앞에 먹구름이 가득 낀 상황. 설상 쿠친스키가 아주 폭망해서 게이코에게 철저히 유리한 구도가 형성되더라도, 부친 시절의 인권 침해 문제 등이 재조명되면 이것이 또 악재로 적용하게 될 가능성은 크다. 실제로 이 문제가 게이코에게 제대로 역린이 되었다.
결국은 의회해산으로 인해 치러진 2020년 총선에서 그가 이끄는 당이 무려 63석을 잃는 역대급 대패를 당함에 따라 당분간 대선 출마조차 장담하지 못하게 됐다.# 그렇게 대선 꿈이 멀어지는 것 같았으나... 막상 2021년 대선, 총선이 다가오자 1차 선거에서 1위를 차지할 것이라 점쳐졌다.
하지만 선거 결과, 시골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급진좌파 성향의 페드로 카스티요 후보가 깜작 1위로 올라서면서 2위를 차지해 함께 결선 투표로 가게 됐다. 결선투표는 2021년 6월 6일에 열린 예정이다. 결선 투표를 앞둔 여론조사에서도 페드로 카스티요 후보에게 두 자릿수 이상 지지율 차이로 밀리고 있어 당선을 점치기 쉽지 않아졌다. 그러나 이후 좌·우파가 서로 결집하면서 지지율이 거의 50대 50으로 수렴하고 있어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5월 10일, TV 인터뷰 도중 상대편 카스티요 후보와 함께 페루 내 여러 시민·종교 단체들이 작성한 '민주주의 선서'에 서명했다. 대통령 취임 후 사법기관과 중앙은행 등의 독립성과 국민의 기본 인권 등을 존중하고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며 부패와 싸우겠다는 등의 11가지 약속이 담겨 있다. 선서를 지킨다면 헌법을 넘어서 연임 시도를 하지도 않을 것이다.#
19시 발표된 출구조사 결과 게이코 후지모리는 50.3%를 득표해 페드로 카스티요 후보(49.7%)를 미미한 차이로 앞섰으나 오차범위 내 결과로 실제 대선 결과는 개표가 진행되어야 알 수 있게 되었다.#
개표가 시작된 이래 후지모리는 개표가 90%를 넘긴 시점에서도 여전히 페드로 카스티요 후보를 앞서고 있었지만,1 페드로 카스티요 후보가 우세한 지방 표가 점점 개표되면서 두 후보의 득표율 차이가 0.25%p까지 줄어들었다. 결국 개표 94.059% 상황에서 페드로 카스티요 후보 50.076%, 게이코 후지모리 후보 49.924%로 역전되었고, 역전 이후에는 개표가 지속될수록 후보 간 득표율 차이가 오히려 벌어지고 있어 후지모리의 세번째 대선 패배가 가시화되었다.2
개표 96% 이후로는 페드로 카스티요 후보 50.3% / 게이코 후지모리 후보 49.7% 득표율이 계속 유지되고 있지만, 후지모리는 아직 패배 수용을 거부하고 있다. 그것을 넘어 이번 대선이 선거 사기라고 주장한 상태이다.1 더 가디언 지는 후지모리의 이런 무리수에 대해 복수의 국제 참관인들이 "선거 절차가 국제 기준에 따라 진행됐다"고 반박했다고 전하면서, 동시에 다수의 정치 분석가들이 후지모리의 발언이 10년 만에 세 번째 대권행보에서 패배한 후 자포자기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며 비판을 쏟아냈다고 전했다.2
개표 완료 결과 49.875%를 최종 득표하여, 50.125%를 득표한 카스티요 후보에게 밀려 낙선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선거 불복에 대한 비판 여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약 20만 표를 무효로 하고 30만 표를 재검표해야된다고 주장을 이어갔으며, 지지자들과 시위를 벌이고 있다. # 과거와 달리 끈질기게 선거 불복을 이어가고 있는 이유가, 대선을 앞두고 부패 혐의로 기소되면서 당선으로 면책 특권을 얻지 못하면 최고 30년 형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
선거 불복과 재검표 주장으로 두 후보 지지층 간의 시위가 격화되면서 대선 개표 종료 이후 6주 동안 당선인 확정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2021년 7월 19일, 국가선거심판원(JNE)의 공식 발표로 카스티요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면서 세 번째 도전에도 불구하고 낙선했다. 결국 국가선거심판원의 당선인 확정 공고를 수용하겠다고 선언하며 대선 결과에 승복했다. #
5.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1차 득표수 (득표율) | 2차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2006 | 페루 총선 | 리마 | 602,869 | - | 당선 (1위) | ||
2011 | 제58대 페루 대통령 선거 | 페루 | 3,449,595 (23.55%) | 7,490,647 (48.55%) | 낙선 (2위) | ||
2016 | 제59대 페루 대통령 선거 | 6,115,073 (39.86%) | 8,555,880 (49.88%) | [11] | |||
2021 | 제63대 페루 대통령 선거 | 1,930,762 (13.41%) | 8,792,117 (49.87%) |
6. 여담
-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근혜와 공통점이 많아서 국내에서도 종종 비교된다. 일단 둘 다 부친이 재임하던 시절 영부인이었던 모친의 궐위가 발생해 그 자리를 대행했다는 점이 같다.[12] 그리고 부친의 후광에 힘업어 정계에 입문하고 탄탄한 콘크리트 기반을 형성해 당 대표에서 차기 초강력 대권주자로 부상했다는 점도 같다. 또한 동생들(박근혜-박근령, 게이코 후지모리-켄지 후지모리 등)과 심각한 마찰까지 빚은 것도 비슷하다.
- 또는 필리핀의 제9대 대통령인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의 딸로 제14대 대통령을 역임한 글로리아 아로요와 비슷한 면이 많다.
- 상술한대로 현재 부패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으며 잘못하다간 최대 징역 30년을 선고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바람에 2026년에 치루어지는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에 완전히 사면받은 그녀의 부친인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이 2024년 민중의 힘에 입당하여 딸 대신에 2026년에 치루어지는 대통령 선거에 나설 전망이지만 아버지 쪽도 변수가 있는데 알다시피 고령인 점과 건강상의 이유가 있다고 했는데 결국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오랜 암 투병 끝에 2024년 9월 11일에 사망하면서 민중의 힘은 마땅한 대권 주자가 없어지게 되면서 당의 앞날도 불투명해졌다.
- 현재 페루 국민의 65%가 게이코 후지모리를 정계에서 은퇴해야 할 사람이라는 여론이 있으며 이러한 여론은 2019년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 현재 본인의 일가족과 본인의 작은 남동생 겐지 후지모리 부부가 페루에 거주하고 있으며 큰 남동생 히로 후지모리 일가는 일본에 여동생 사치 후지모리 일가는 독일에 거주하고 있다.
- 스페인어, 영어를 구사할 수 있다.
[1] 다만 스페인어권에서는 후지모리(Fujimori)에 스페인어 독음법을 곧이곧대로 적용해 '푸히모리'/fuxiˈmoɾi/라고 읽는 경우가 대다수이다.[2] 페루, 일본 복수국적자인 아버지와 달리 페루 단독 국적자이며 본인도 페루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하다.[3] 현지 풀네임은 수사나 시즈코 히구치 미야가와(Susana Shizuko Higuchi Miyagawa). 일본식 이름 히구치 시즈코(樋口 静子)[4] 이때 아직 학생 신분으로 겨우 만 19세였다.[5] 36세라면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 최소 40세여야 하기 때문.[6] 우말라가 소속된 정당연합으로, 우말라는 정확히 이 중에서 국민당 소속이다.[7] 페루에서 집권당이 차기 대권 창출에 실패하는 것은 고질적인 질병 중 하나이다.[8] 당초 국민당에서는 다니엘 우레스티를 후보로 선출했는데, 최종 등록에는 실패했다.[9] 과거 페루 승리 소속 의원들 일부가 여기로 이탈했다.[10] 2011년 당시 게이코의 뒤를 이어 3위했다.[11] 1차 투표 1위, 2차 투표 2위[12] 다만 박근혜는 어머니가 아버지 재임 중 사망했고 게이코는 부모가 이혼했다는 게 차이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