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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A1942><colcolor=#fff> 러시아 연방 초대 총리 | |||
본명 |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옐친[1]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Е́льцин Boris Nikolayevich Yeltsin | ||
출생 | 1931년 2월 1일 | ||
소련 러시아 SFSR 우랄주 붓카군 붓카 (現 러시아 우랄 연방관구 스베르들롭스크주 탈리차군 붓카) | |||
사망 | 2007년 4월 23일 (향년 76세) | ||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 | |||
묘소 |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지 | ||
재임기간 | 초대 대통령 | ||
1991년 7월 10일[2] ~ 1996년 8월 9일 | |||
제2대 대통령 | |||
1996년 8월 9일 ~ 1999년 12월 31일 | |||
초대 총리 | |||
1991년 12월 25일 ~ 1992년 6월 15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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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남동생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옐친 | ||
배우자 | 나이나 이오시포브나 옐치나[5] | ||
자녀 | 장녀 옐레나 보리소브나 오쿨로바[6] 차녀 타티야나 보리소브나 유마셰바[7] | ||
학력 | 우랄 기술대학교 (석사)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
신체 | 187cm[8][9] | ||
최종 당적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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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대 러시아 대통령 취임 선서 |
러시아 연방의 제1·2대 대통령.
1987년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선출된 이후에 급진 개혁파 정치인으로 명성을 얻었고, 1990년에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회의 주석으로 취임했으며, 1991년에 최초의 직선제를 통해 러시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91년에는 8월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저지하면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실권자로 떠올랐다. 옐친은 국내외적으로 소련 해체의 주역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옐친은 우크라이나가 국민투표로 독립하자 인구 비중에서 중앙아시아 무슬림이 지나치게 높은 것에 불만을 품고 소련 해체를 강행하고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옐친은 개혁파 정치인으로 처음 등장하여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는 러시아 시민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1991년 독립 이후 경제개혁 실패, 최고회의 해산(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등 무능한 모습을 보이며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10] 특히 충격 요법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을 추진하였는데, 국가주도의 소련의 경제의 절반이 러시아 정부에서 민영화되었다. 기업들은 줄줄이 몰락했으며, 예금 자산의 휴지화로 인해 대다수 일반인들은 빈민층으로 전락해버렸으며, 경제가 특정 산업에 편중되었기에 이로 인해 러시아는 1990년대를 통틀어 기나긴 불황을 겪어야 했다.[11] 이후 1996년 제1차 체첸 전쟁 패배,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움 위기 및 탄핵 시도로 정치적 입지가 땅에 떨어졌다. 이후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완전히 끝났음을 직감했고, 건강 문제까지 겹쳐 1999년 12월 31일 당시 총리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넘기고 정계에서 은퇴, 2007년에 사망했다.
시기적절하게 후임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넘겨 주었고,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이 일당독재라는 비판을 들을지언정 지속적으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을 거두면서 말년에도 존중받는 삶을 살았다. 대중들의 평이 어떻든간에 러시아 연방정부로부터 국부 수준으로 대접받아 왔기 때문에 퇴임 후에 러시아 연방정부나 통합 러시아당, 러시아 연방 공산당, 러시아 자유민주당 가릴 거 없이 최강국 소련을 망하게 만든 원수 취급에 푸대접하는 미하일 고르바초프보다는 나은 삶이기는 했다. 러시아인들이 옐친을 어떻게 생각하든간에 푸틴은 공석에서 옐친을 비하한 적이 없고 되려 옐친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옐친의 이름을 붙인 문화센터가 개장되는 것을 보면 현재 러시아 연방정부 차원에서 옐친을 존중하는 기조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2]
대한민국 입장에서 보자면 최고의 소련/러시아 지도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옐친은 북한 정권을 비판하고 1996년에는 조소동맹조약을 파기하는 등[13] 북한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였으며, 대한민국과의 역사를 바로잡고 관계를 개선하여 6.25 전쟁 기록물 전달,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당시의 블랙박스 및 유품을 전달하며 사과했다. 다만 소련 시절 차관을 계승해 제대로 갚았다면 한국의 외환위기가 없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쪽은 결과적으로 불곰사업으로 이어져 한국의 방위산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14] 또 옐친 시기 경제 몰락으로 인해 어부지리로 1994년 러시아의 GDP를 추월한 것은 물론 1999~2000년에는 한국의 GDP가 러시아의 2배를 넘기기도 했다.
에티오피아에서 멜레스 제나위가 정권을 잡는 데 본의 아니게 영향을 끼쳤는데, 바로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에 대한 지원을 끊어버렸다는 거다. 그야 당연하지만 당시 나라 사정상 저 멀리 아프리카 대륙까지 신경쓸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멜레스 제나위가 이끄는 반군에 의해 수도 아디스아바바가 함락되고, 멩기스투는 짐바브웨로 망명했다.
2. 약력
- 1991.7. 러시아 연방 초대 대통령[15] (1991년 7월 10일 ~ 1996년 8월 9일)
- 1991.12. 초대 총리 (1991.12.25. ~ 1992.6.15.)
- 1996.8. 제2대 러시아 연방 대통령 (1996년 8월 9일 ~ 1999년 12월 31일)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보리스 옐친/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4. 평가
자세한 내용은 보리스 옐친/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5. 대한민국과의 관계
19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당시 |
스탈린과 김일성의 회담 내용 등을 포함한 6.25 전쟁 관련 문서를 대거 공개해 6.25 전쟁의 원인이 북한의 남침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못박았고, 남-북한간 전쟁시 러시아가 북한 편으로 개입하는 조소동맹조약[19]을 파기한 것도 옐친이다. 옐친 개인의 반북 경향과 더불어 한국과 교류를 늘리려던 러시아의 외교 정책, 그것을 파악한 한국 정부의 적절한 외교 전략이 성공한 결과이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였고, 블랙박스 및 유품 등을 전달해준 것도 옐친이다.
그런데 간접적으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소련의 해체에 이은 90년대 러시아의 국가 파탄상황에서 북한은 이를 역으로 이용하여 자국의 핵무기, 탄도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옐친 치하에서 러시아군은 무기를 제대로 관리를 안 해서 소련 시절 개발한 여러 전략무기들과 기술력들이 북한의 손에 넘어갔고 구소련 전략 미사일 설계국은 돈도 제대로 못 받아 엔지니어들이 거리에 나앉게 되자 북한은 이들을 거금을 줘서 고용을 했다.[20] 북한은 입수한 로켓과 공학자들의 노하우를 적극 이용하여 2000년대 들어 여러가지 전략무기를 제조해내고 있다. 기껏해야 500~700km 단거리 탄도미사일이나 간신히 만들던 나라가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에 갑자기 로켓 개발 능력이 향상된 건 이러한 이유이다.
물론 미사일이라는 것이 한 두명의 과학자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전자, 재료, 기계 여러 방면의 전문가들이 만들어내는 만큼, 이들을 모두 데려온 게 아닐 뿐더러 생산 시설이 없는 이상 이렇게 영입한 과학자들만으로 완벽한 로켓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체개발에서 마주칠 수 있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이들의 경험으로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정도면 적어도 최소 10년에 달하는 시간과 수십억 달러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지금도 이 러시아 구소련출신 연구자들은 한달에 8천달러의 봉급을 받으며 북한 고급 아파트에서 경호를 받으며 살고 있으며 푸틴이나 동유럽국가들이 줄기차게 이들의 소환을 요구하고 있으나 북한은 거절하고 있다고 한다.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이들이 가진 대부분의 지식과 기술력은 북한 과학자들에게 전수되어 송환해봤자 별 소용도 없겠지만.
한편으로 옐친 시절 외채에 시달리던 러시아는 갚을 돈이 없자 채권국인 한국에 채무 상환 대신 군사기술 이전과 군사장비를 통한 상환을 제안했고 그렇게 추진된 사업들 중 하나가 바로 불곰사업이다. 국산 대공미사일 기술의 상당 부분이 러시아의 기술 이전을 통해 완성된 것이다.[21] 또한 이 사업을 통해 들여온 T-80U 주력 전차, BMP-3 병력수송장갑차, 메티스-M 대전차미사일 등 다양한 군사장비를 연구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실제로 대한민국 육군에서 운용하기도 하는 등 제법 높은 활용율을 보여주었다.[22]사정이 급해서 기술을 이전해줬던 만큼, 러시아가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온 푸틴 정부 이후부터는 러시아의 국방 기술 이전이 어려워졌다.[23]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1993년 당시 옐친이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대한 사과문을 발표하고 고려인의 연해주[24] 재이주 정착을 유도하면서 중앙아시아 지역에 살던 많은 고려인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지역으로 돌아왔다. 종합적으로 보면 역사를 바로잡고 대한민국과의 관계를 개선한 옐친은 한국인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만한 점이 여럿 보인다.
6.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1차 득표수 (득표율) | 2차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89 | 인민대표대회 선거 | 모스크바 1 선거구 | [[소련 공산당|]] | (91.53%) | - | 당선 (1위) | 초선 |
1990 | 러시아 SFSR 최고회의 주석 선거 | 러시아 SFSR | 535 (53.9%) | 초선 | |||
1991 | 러시아 연방 대통령 선거 | 러시아 연방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45,552,041 (58.6%) | 초선 | ||
1996 | 러시아 연방 대통령 선거 | 26,665,495 (35.8%) | 40,203,948 (54.4%) | 재선 |
7.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소련 공산당|]] | 1961 - 1990 |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0 - 2007 | 탈당 정계 은퇴 사망 |
8. 기타
- 대조국공훈훈장 1급 수훈자다.
- 10살에 독소전이 일어났는데 너무 어려서 군대에 가긴 어려웠다고 한다. 대신 여러 군사무기들을 제조하는 일을 했는데 수류탄 내부에 대해 좀 알아보려고 몰래 RGD-33 수류탄 2개를 창고에서 훔쳐서 망치로 분해해 보다가 폭발하는 바람에 왼쪽 손가락 두개를 잃었다.#
- 한국에서는 1987년 11월 초순까지 옐트신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영어로 표기된 Yeltsin을 잘못 읽었기 때문. 일단 당시 소련은 적성 국가였던 탓에 수교도 안되어 있었고, 노어노문학과도 한국외국어대학교[25]/고려대학교[26]/서울대학교[27] 단 3곳만 있던 시기라서 제대로 된 발음이 잘 안 알려졌던 것. 경향신문/조선일보/동아일보 3곳을 기준으로 1987년 11월 12일부터 옐친이라는 표기가 보도되었고, 기존의 옐트신 표기는 1987년 11월 14일이 마지막이다.
- 인디펜던스 데이: 리써전스에서는 외계인을 무찌른 후 각국과 정상회담을 한다.
- 서독의 총리와 훗날 통일 독일의 총리를 역임했던 헬무트 콜은 자신의 토속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각국의 정상들과 만찬을 가질 때 고급 레스토랑이 아닌 자기가 살던 지방의 특색있는 요리를 만드는 식당에서 만찬을 가지곤 했는데, 문제는 이 요리들이 내장을 사용한 특이한 소시지 요리들이 많아서 각국 정상들을 곤혹스럽게 하곤 했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아주 기겁을 했고, 다른 국가 정상들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지만 옐친은 매일 시도때도 없이 먹던 게 소금에 절인 돼지비계인 쌀로와 소금에 쩔은 오이라는 더 막나가는 조합이었던지라 함박웃음을 띄우며 극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 한국 게임 강철제국에 그의 이름을 따 온 것으로 보이는 총포상 주인 영감인 보리스라는 인물이 나온다. 세르비아 대통령이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에서 따 온, 밀로셰비치 육군 대령에게 딸을 인질로 잡히는 굴욕을 겪는다. 제대로 망조가 들었던 러시아의 실상을 반영한 것이지만, 고작 세르비아 따위의 학살자한테까지 빌빌대는 굴욕을 당한 셈이다.
메르세데스-벤츠 마이바흐 S500 W220을 소유했다.- 자국을 망하기 일보직전으로 만들었지만 이상하게 한국 측에서는 이득을 매우 많이 줬다는 점이 명나라의 만력제와도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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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아버지 니콜라이 이그나티예비치 옐친 · 어머니 클라브디야 바실리예브나 옐치나 · 아내 나이나 이오시포브나 옐치나 · 장녀 옐레나 보리소브나 오쿨로바 · 차녀 타티야나 보리소브나 유마셰바 | ||
역대 선거 | 1991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 ||
관련 정치인 | 빌 클린턴 · 블라디미르 푸틴 | ||
사건 · 사고 |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 8월 쿠데타 | ||
관련 전쟁 | 제1차 체첸 전쟁(1994~1995) · 트란스니스트리아 전쟁 | ||
기타 | 전략무기감축협정 | ||
평가 | 평가 | ||
보수주의 |
[1] 강세를 적용한 러시아어 발음은 '[bɐˈrʲis nʲɪkɐˈlaɪvʲɪtɕ ˈjelʲtsɨn\](바리스 니칼라이비치 옐친)'에 가깝다.[2] 91년 12월 25일 까지는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대통령[3] Николай Игнатьевич Ельцин[4] Клавдия Васильевна Ельцина, 혼전성은 '스타리기나(Старыгина)'.[5] Наина Иосифовна Ельцина, 혼전성은 '기리나(Гирина)'.[6] Елена Борисовна Окулова[7] Татьяна Борисовна Юмашева[8] 출처[9] 역대 러시아 지도자 중 4위 장신.[10] 본문에도 설명되어 있듯이 러시아는 소련 말기부터 점차 민주화 작업에 착수해 1991년에는 최초의 직선제 대선을 치르었다. 옐친은 1993년 12월 국민투표를 통해 새로운 헌법을 채택, 이원집정부제 국가로 개혁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러시아 의회를 포격하는 등 헌정위기를 초래하고 사상자가 나왔으며 러시아를 독재국가로 탈바꿈시켰다.[11] 소련 때문에 물려받은 빚만 무려 1,300억 달러였고, 이러한 금액도 이자와 경제 개혁 과정 속에서 2,000억달러가 넘도록 계속 불어나게 되었다. 러시아는 유가가 오른 2000년대에 겨우 경제가 회복된다.[12] 많은 러시아인들은 옐친을 증오하기는 하지만 그와 별개로 푸틴이 옐친으로부터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인물이고 옐친으로부터 이런저런 조언을 들으면서 대통령직 수업을 받았다. 또한 푸틴이 대통령직에 오른 이후로 옐친에게 면책 특권을 부여해 옐친이 감옥에 가지 않고 말년을 별장에서 편하게 보낼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격하를 시킨다면 정통성에 타격을 입을 게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13] 이 조약의 파기로 러시아는 중국과 다르게 급변사태 시 북한에 개입할 명분이 많이 사라졌다.[14] 물론 불곰사업 자체가 대책 마련식으로 나온 결과물이니 비판이 없진 않다는 점을 유의하자.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15] 91년 12월 25일 까지는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대통령[16] 어느 정도였냐면, 옐친 집권 시기에는 북한에서 탈출한 탈북민들을 북송하지 않은 것은 물론, 탈북자들이 원하면 한국으로 보내줄 정도였다. 그런데 그 당시에도 러시아는 탈북 루트로 그다지 인기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1990년대의 탈북민들은 남한에 정착하려는 사람보다 오로지 생계를 위해 탈북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북한으로 재입북까지 했다. 게다가 러시아는 중국과 다르게 북중국경 주변에 살고 있는 조선족도 없어 언어가 통하지도 않고, 인종도 완전히 다르다 보니 탈북자라는 것이 금방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중국으로 도강하는 난이도가 지금에 비해 매우 쉬웠기도 하고.[17] 소련 공산당 수뇌부들의 회고와 인터뷰를 보면 소련은 8월 종파사건 이후부터 북한 정권에 대한 신뢰를 반쯤 내다버렸으며 냉전이 끝날 때쯤에는 완충지대고 뭐고 당장 내다버려야 할 폐급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고르바초프가 남한과 한소수교를 발표하자 북한은 당시 방북중이던 소련 외무상 셰바르드나제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고, 세바르드나제는 북한은 세습 왕국이라고 응수하면서 북소관계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소련 시절에도 이런 분위기였을 정도니 옐친의 강력한 반북 성향은 러시아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18] 한편 당시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었던 대한민국에서도 김일성의 사망에 조전을 보내는 것을 검토 했었지만 최종적으로 무산 되었다.[19] 1961년 북한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군사동맹조약으로, 한국으로 치면 한미상호방위조약 급의 위상을 가졌었다고 보면 된다.[20] 이런 식으로 러시아인 기술자들을 영입한 것은 북한만이 아니다. 미국도 그렇고, 한국 역시도 러시아인 기술자들을 여럿 데려온 바 있다. 데려간 숫자로 치면 북한보다 대한민국이 더 많기도 하고.[21] 현무나 천궁 미사일의 초기형도 모두 러시아에서 이전받은 기술이 들어간 것이다. 특히 러시아가 한국의 콜드런칭 기술 개발에도 상당수 기여했다고 전해진다.[22] 현재 T-80U와 BMP-3는 전량 전문대항군연대로 인계되었다.[23] 아예 안 주는 건 아니고, 지금도 줄 때는 준다. 전에 비해 단가가 많이 올랐을 뿐.[24] 발해 기준으로는 솔빈부 행정 구역이다.[25] 1954년 창설[26] 1974년 창설[27] 1984년 창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