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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19:22:24

이멜다 마르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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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연도 결정일 수여일 이름 직책 국적 비고
1949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 대한민국
1960년 8월 13일 윤보선 대통령 대한민국
1963년 12월 5일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대한민국
1967년 6월 23일 육영수 영부인 대한민국
1979년 12월 7일 최규하 대통령 대한민국 12.12 군사반란으로 하야
1979년 12월 7일 홍기 영부인 대한민국
1980년 8월 29일 8월 29일 전두환 대통령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0년 8월 29일 8월 29일 이순자 영부인 대한민국
1988년 2월 24일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8년 2월 24일 2월 25일 김옥숙 영부인 대한민국
1993년 2월 11일 2월 23일 김영삼 대통령 대한민국
1993년 2월 11일 2월 23일 손명순 영부인 대한민국
1998년 2월 17일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 대한민국
1998년 2월 17일 2월 25일 이희호 영부인 대한민국
2008년 1월 28일 노무현 대통령 대한민국
2008년 1월 28일 권양숙 영부인 대한민국
2013년 2월 12일 이명박 대통령 대한민국
2013년 2월 12일 김윤옥 영부인 대한민국
2013년 2월 19일 박근혜 대통령 대한민국
2022년 5월 3일 문재인 대통령 대한민국
2022년 5월 3일 김정숙 영부인 대한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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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외국인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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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연도 결정일 수여일 이름 직책 국적 비고
1964년 12월 3일 12월 8일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 서독 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4년 12월 3일 12월 8일 빌헬미네 뤼브케 영부인 서독 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6년 2월 1일 2월 7일 이스마일 나시루딘 국왕 말레이시아
1966년 2월 1일 2월 7일 틍쿠 인탄 자하라 왕비 말레이시아
1966년 2월 1일 2월 10일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태국
1966년 2월 1일 2월 10일 시리낏 끼띠야콘 왕비 태국
1966년 2월 1일 2월 15일 장제스 총통 중화민국
1968년 5월 10일 5월 18일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에티오피아
1969년 5월 23일 5월 27일 응우옌반티에우 총통 남베트남
1969년 5월 23일 5월 27일 응우옌티마이아인 제1부인 남베트남
1969년 10월 28일 10월 28일 하마니 디오리 대통령 니제르
1969년 10월 28일 10월 28일 아이샤 디오리 영부인 니제르
1970년 9월 25일 9월 28일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대통령 엘살바도르
1970년 9월 25일 9월 28일 마리나데 산체스 에르난데스 영부인 엘살바도르
1975년 6월 27일 7월 5일 오마르 봉고 대통령 가봉
1975년 6월 27일 7월 5일 조세핀 봉고 영부인 가봉
1979년 4월 17일 4월 23일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대통령 세네갈
1979년 4월 17일 4월 23일 콜레테 위베르트 상고르 영부인 세네갈
1980년 5월 11일 할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드 국왕 사우디아라비아
1980년 5월 14일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국왕 쿠웨이트
1981년 6월 25일 수하르토 대통령 인도네시아
1981년 6월 25일 시티 하티나 영부인 인도네시아
1981년 6월 29일 아마드 샤 이브니 아부 바카르 국왕 말레이시아
1981년 6월 29일 틍쿠 아프잔 왕비 말레이시아
1981년 7월 6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 필리핀
1981년 7월 6일 이멜다 마르코스 영부인 필리핀
1981년 10월 13일 로드리고 카라소 대통령 코스타리카
1981년 10월 13일 에스트레야 셀레돈 리사노 영부인 코스타리카
1982년 5월 10일 사무엘 도 대통령 라이베리아
1982년 6월 7일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 자이르
1982년 6월 7일 보비 라다와 영부인 자이르
1982년 8월 25일 압두 디우프 대통령 세네갈
1982년 12월 21일 케난 에브렌 대통령 터키
1983년 3월 10일 3월 15일 자파르 모하메드 니메이리 대통령 수단
1983년 3월 10일 3월 15일 부띠나 칼릴 압불핫산 영부인 수단
1983년 9월 10일 후세인 1세 국왕 요르단
1983년 9월 10일 누르 왕비 요르단
1984년 4월 9일 하사날 볼키아 국왕 브루나이
1984년 4월 21일 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 국왕 카타르
1984년 8월 30일 9월 13일 다우다 자와라 대통령 감비아
1984년 8월 30일 9월 13일 치렐 자와라 영부인 감비아
1985년 5월 17일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대통령 파키스탄
1985년 5월 20일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 대통령 코스타리카
1986년 9월 4일 4월 10일 엘리자베스 2세 국왕 영국
1986년 9월 4일 4월 16일 보두앵 국왕 벨기에
1987년 4월 7일 아메드 압달라 대통령 코모로
1988년 11월 3일 이스칸다르 국왕 말레이시아
1988년 11월 3일 자나리아 왕비 말레이시아
1989년 11월 3일 11월 20일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 서독
1989년 11월 3일 11월 30일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프랑스
1989년 11월 3일 11월 30일 다니엘 미테랑 영부인 프랑스
1990년 6월 21일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대통령 파라과이
1990년 11월 5일 괸츠 아르파드 대통령 헝가리
1991년 9월 13일 아즐란 샤 국왕 말레이시아
1991년 9월 13일 투안쿠 바이눈 왕비 말레이시아
1991년 9월 25일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대통령 멕시코
1992년 8월 13일 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 대통령 과테말라
1993년 5월 20일 5월 25일 피델 라모스 대통령 필리핀
1993년 5월 20일 5월 25일 이멜리타 마르티네스 라모스 영부인 필리핀
1994년 11월 7일 11월 21일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 대통령 칠레
1994년 12월 5일 12월 9일 레흐 바웬사 대통령 폴란드
1995년 2월 7일 2월 16일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 우즈베키스탄
1995년 2월 21일 3월 6일 로만 헤어초크 대통령 독일
1995년 3월 28일 4월 3일 젤류 미테프 젤레프 대통령 불가리아
1995년 6월 26일 7월 7일 넬슨 만델라 대통령 남아프리카 공화국
1995년 9월 26일 9월 29일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아르헨티나
1996년 7월 23일 9월 4일 알바로 아르수 대통령 과테말라
1996년 7월 23일 페르난두 카르도주 대통령 브라질
1996년 10월 8일 10월 20일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 스페인
1996년 10월 8일 10월 20일 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프리데리키 왕비 스페인
1996년 11월 26일 자파 이브니 압둘 라만 국왕 말레이시아
1996년 12월 10일 12월 15일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 우크라이나
2000년 2월 22일 3월 3일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대통령 이탈리아
2000년 2월 22일 3월 6일 자크 시라크 대통령 프랑스
2006년 3월 12일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 알제리
2007년 3월 26일 사마 알아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국왕 쿠웨이트
2007년 3월 28일 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 국왕 카타르
2009년 5월 13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카자흐스탄
2009년 11월 12일 알란 가르시아 대통령 페루
2012년 5월 30일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 스웨덴
2012년 11월 21일 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 대통령 아랍에미리트
2018년 10월 8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프랑스
2019년 하랄 5세 국왕 노르웨이
2021년 6월 14일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대통령 오스트리아
2021년 6월 16일 펠리페 6세 국왕 스페인
2021년 6월 16일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왕비 스페인
2021년 8월 25일 이반 두케 대통령 콜롬비아
2021년 9월 21일 보루트 파호르 대통령 슬로베니아
2023년 7월 13일 안제이 두다 대통령 폴란드
2023년 11월 21일 찰스 3세 국왕 영국 }}}}}}}}}
이멜다 마르코스
Imelda Marcos
파일:이멜다마르코스.jpg
이름 Imelda Romualdez Marcos
이멜다 로무알데스 마르코스
출생 1929년 7월 2일 ([age(1929-07-02)]세)
필리핀 군도 도민정청 산 미겔
(現 필리핀 메트로 마닐라 산 미겔)
국적
[[필리핀|]][[틀:국기|]][[틀:국기|]]
직업 정치인, 기업인
배우자 남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자녀 장녀 아이미 마르코스
장남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차녀 에이미 마르코스
삼녀 아이린 마르코스
신체 172㎝[1]
경력 제 10대 필리핀 영부인(1965~1986)
초대 메트로 마닐라 주지사(1975~1986)
메트로 마닐라 6구 국회의원(1978~1984)
북일로코스 주 2구 하원의원(2010~2019)
파일:75d20bc26ccd460ccda1f6b6c9800df589fa2570.webp
남편》과 함께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의 만남2.3. 필리핀 대통령 선거 당시의 활약2.4. 인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전설의 사치
2.4.1. 이멜다의 방에서 발견된 물품2.4.2. 사치 행각
2.5. 이후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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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녀는 8년 간 매일 구두를 갈아 신었다고 한다. 하루도 같은 구두를 신은 적이 없다.”
그녀의 전기 영화 <이멜다(Imelda)>의 도입부

필리핀의 현직 하원의원이자 기업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필리핀 대통령의 부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필리핀 대통령의 어머니.

'인류 역사상 가장 사치스러운 인물'이라는 평가까지 받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사치 행각으로 유명했으며, 한때 장관직과 마닐라 시장직을 역임하면서 횡령도 엄청나게 저질러 필리핀 경제를 말아먹는데 일조했다. 그래서 필리핀인들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용서할 수 있어도, 이멜다 마르코스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그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2018년 11월 9일 필리핀 법원에 의해 최고 77년형 선고가 확정되어 따르면 공직이 박탈당해야 했지만, 당연하게도 이멜다 측에서 항소할 것이기에 현재 공직은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2022년 5월 그의 아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가 기어코 필리핀 대선에서 승리해서 36년만에 마르코스 일가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2. 생애

2.1. 초기

결혼 전 이름은 이멜다 트리니다드 로무알데스(Imelda Trinidad Romualdez). 서양인인 스페인 혼혈 혈통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2] 그러나 이멜다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가세가 점점 기울어졌고, 이런 상황에 그녀의 아버지는 자식을 11명이나 두었기 때문에 빈번한 가정불화 속에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파일:external/cfs7.blog.daum.net/download.blog?fhandle=MDZucnFAZnM3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MjUuanBnLnRodW1i&filename=25.jpg

이멜다는 성인이 되면서 미인에 말솜씨도 좋은 편이라 인기가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마닐라에 유학할 당시 늘 곁에 남자들이 졸졸 따라다녔을 정도였다고. 1953년엔 미스 마닐라에 도전하기도 했는데, 1등은 못했지만 뮤즈 오브 마닐라로 선발되었다. 이멜다는 그것을 바탕으로 상류 사회에 진입해 사교계에서 상당한 유명인사가 되었다.

2.2.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의 만남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이멜다는 파티장에서 처음 만났는데,[3] 페르디난드는 이멜다에게 한눈에 반해 버렸다고 한다. 문제는 170㎝였던 페르디난드[4]가 172㎝였던 이멜다에 비해 키도 작고 외모도 별로였을 뿐더러, 나이도 무려 12살 가까이 많아 처음 이멜다는 페르디난드에게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도서 <이멜다 마르코스>에 따르자면 페르디난드는 이 당시 이멜다와 결혼하기 위해서 기이한 행동을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매일매일 이멜다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내는 것이였다. 하루에 1개씩, 총 11일 동안 다이아몬드 반지를 하루도 빠짐없이 보냈음에도 이멜다는 페르디난드에게 넘어오지 않았다. 허나 여차저차하여 페르디난드는 "이멜다, 언젠가 영부인이 될 생각은 없어요?"라고 간신히 프러포즈를 한 끝에 이멜다와 결혼했다고 한다,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의하면, 사교계에서 연애하던 상류층 부자 남자에게 버림받고 크게 낙심하여 실의에 빠진 이멜다를, 한결같이 옆에서 위로해주고 함께 해준 것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멜다는 자신을 사랑하는 일편단심에, 전도유망한 젊은 정치인인데다 가문도 끝내주는 페르디난드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한다.

2.3. 필리핀 대통령 선거 당시의 활약

이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필리핀 대통령을 목표로 하자, 이멜다도 이를 위해서 열심히 뛰어 다녔다. 특히 놀랍게도 필리핀 대통령 선거 당시 이멜다의 행적은, 이후의 엄청난 사치 행각을 생각하면 경악스러울 정도로 완전무결한 내조의 여신이자 현숙한 귀부인이었다고 한다. 우선 선거 유세현장에서 연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남편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그리고 저명인사들의 부인들의 모임을 조직해서 선거 자금을 마련했고, 성대한 연회를 열어 그녀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면서 페르디난드의 지지율을 높여 나갔다.

게다가 미스 마닐라에도 도전했던 사람이 남편의 당선을 위해서 필리핀 전국을 누비고 다니기까지 했다. 비행기를 타고 여러 지방들을 두루두루 방문하거나, 고무보트까지 타면서 지방으로 내려갔고, 거기서도 흙을 다 묻혀가면서 모내기를 하거나 농사를 도왔다. 이런 일들을 수천 개의 섬들을 왔다갔다하면서 할 정도로 열심히 했다. 1965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페르디난드는 이멜다에게 "내가 얻은 표의 3분의 1은 당신의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계엄령 선포 전까지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퍼스트레이디 직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성실한 양처이자 품위있는 영부인이었다. 하지만…

2.4. 인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전설의 사치

남편의 2기 재임기부터 점차 사치향락에 맛을 들이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그녀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게 된다. 이멜다는 계엄령 선포기간 동안 보건복지부 장관직과 마닐라 시장직을 지내게 되는데 그 기간 동안 남편과 함께 필리핀의 국가재정을 횡령하거나 과시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쓸모없는 사치성 사업을 벌여서 필리핀의 경제를 망쳤다. 특히 남편의 계엄령 선포 이후로는 누가 신경쓰든 말든 대놓고 명품들을 쓸어 담아갔다. 당연히 이멜다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데 쓰이는 돈은 모두 국가재정에서 지출되었다.[5]

언제 쿠데타가 발생할지도 모를 상황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었던 남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을 대신해 이멜다가 해외 정상들을 만나며 외교 사절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 페르디난드는 불륜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한 충격으로 이멜다가 사치향락에 집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후술하겠지만, 당시 이멜다가 즐겼던 사치의 정도는 보카사 1세의 대관식[6]약 1300억 원에 달했다고 한다.]을 매일매일 행했다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2.4.1. 이멜다의 방에서 발견된 물품

흔히 이멜다 마르코스가 사치스러운 사실은 알지만 얼마나 사치스러운지는 잘 모른다. 그래서 풍문으로 나도는 이야기나 그것들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이야기들은 모두 사실이며, 심지어 대중적으로 알려진 정보가 진실보다 훨씬 축소된 내용일 정도다.

훗날 이멜다가 남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함께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을 때 이멜다가 살던 말라카냥궁 지하에는 가로 21m, 세로 21m나 되는 커다란 방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이멜다의 사치품이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당시 대통령궁을 방문한 영국의 사진기자 알렉스 보위는 대통령궁 지하에 있는 이멜다 마르코스의 옷장 속에 쌓여있는 세계 최일류 유명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최고급 의상과 구두, 핸드백, 그리고 장신구들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었다고 한다.

아래는 마르코스 부부가 1986년 하와이로 망명했을 당시에 발견된 이멜다의 사치품 목록이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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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i.dailymail.co.uk/article-2207353-1527EDEB000005DC-859_634x42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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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static.rappler.com/jewels4.jpg 파일:external/www.djl.net/appraiserWdmdnecklace.jpg 파일:external/www.djl.net/appraisershands_pearl.jpg

서랍 속에 보관되어 있는 청구서들을 조사한 결과, 이멜다는 오전에 100만 달러, 오후에는 200만 달러어치의 골동품을 사들였다고 하는 충격적인 사실도 드러났으며, 이멜다는 10만 7천 달러의 이브닝 가운을 구입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고 이탈리아의 유명 디자이너 발렌티노에게는 실크 드레스 6벌을 한꺼번에 주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멜다의 옷장에는 세계 각국의 드레스와 갖가지 색상의 의상들이 가득 차 있었으며,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가격표가 그대로 붙어있는 구찌 핸드백들이 선반 위에 가득 쌓여 있었다.

이멜다의 침대 옆에는 선반 가득하게 비디오 테이프들이 있었는데, 마닐라 영화제에 초청되어서 이멜다와 만난 적이 있던 미국의 배우 조지 해밀턴 주연의 <무적의 사나이 조>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것들이 고작 한 방에서만 발견된 사치품들인데, 심지어 이것들은 망명지에 다 가져가는 것이 불가능해서 진짜 귀한 건 챙기고 남은 것들이었다.

2.4.2. 사치 행각

2.5. 이후

어쨌든 이렇게 필리핀을 말아먹었으니, 1986년 민주화 혁명 이후로 필리핀에서 하와이로 사실상 쫓겨나다시피 했다. 당연히 위에 해먹은 것만으로도 돌아올 자격이 없었지만, 1991년 필리핀 대법원의 사면을 받았고 이때를 기점으로 필리핀에 귀국한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234만표의 득표하여 건재함을 과시하였고, 1993년에 부패혐의로 기소되었다가 1998년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이멜다 컬랙션이라는 패션 브랜드를 차렸는데, 기업가로도 대성공하여 영부인 시절 못지않게 돈을 무진장 끌어모았다. 거기에다가 딸을 일로코스 노르테 주지사로 당선시킨 덕택에, 현재까지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그래도 다행히 2010년에 베니그노 아키노 3세[19]가 대통령이 되면서 부정축재한 재산에 대한 환수작업이 진행되었기에 재산이 어느 정도는 줄어들었다.

그렇게 정의구현을 어느 정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축재 혐의로 환수당한 재산을 제외한 마르코스 일가의 남은 재산 역시 어마어마하다. 어느 정도인가 하니, 필리핀의 부촌에 마르코스 일가 소유의 고급 저택을 3채나 가지고 있을 정도다. 앞서 전술했듯 과거에 재산을 물쓰듯 써댄 이멜다가 사업을 하면서 전보다 재산을 더욱 불리고 있기도 하고, 마르코스 일가가 원래부터 필리핀의 오래된 명문가 중 하나로, 국회의원과 공무원으로 잘 나가고 있는 명문가이기 때문. 그리고 상술했듯이 이멜다는 해외 부동산이나 여러 사치품들을 사들이며 축재를 했을텐데, 이렇게 본국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재산들은 사실상 환수하기도 어렵다. 물론 이를 아는 필리핀 국민들은 아주 뒷목 잡을 지경이다.

2016년 총선에서도 일로코스 노르테 2구에 출마해서 99.0%의 득표율로 재선되었다. 뿐만 아니라 딸도 노르테 주지사에 여전히 당선되었고, 그녀의 아들도 부통령에 출마해서 선거직전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기록해서 무난하게 부통령에 당선될듯 했지만 개표 중후반들어 여당인 자유당 레니 로브레도 후보에게 역전당하는 바람에 낙선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은 증명했다.

그러다가 체포영장이 나와 정의가 구현되었다고 한다.# 다만 당장 구속되지도 않을 것이고 항소를 할 것으로 보여, 정의가 어떻게 구현될지는 오리무중이다.

2019년 7월 3일 이멜다의 구순 잔치에 참석한 일반 하객들 261명이 식중독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사고가 생겼다. 일반인에게 제공된 음식은 VIP 손님의 것과 달랐다고 한다.# ## 또한 환자들이 실려 가고 있는데도 공연이 계속됐다고 알려졌다.#

2022년 5월 9일 아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쫓겨난 영부인에서 대통령의 어머니로 돌아왔다.# 미국 변호사 출신 며느리와 함께 봉봉 정권의 실세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아들이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다시 사치 행각을 이어가고 있는데, 93세 생일잔치를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대통령궁에서 열어버렸다. 이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

폐렴으로 입원하다가 호전되기도 했다.#

3. 기타



[1] 스페인인 혼혈 집안여서 그런지 필리핀인 치고는 키가 굉장히 크다. 지금도 동남아인이나 중국인 남성 평균키(전부 160대)보다 훨씬 더 크며, 싱가포르인 남성(171㎝), 일본인 남성 평균키(172㎝)와 비슷하고 한국인 남성 평균키(174㎝)보다는 조금 작은 수준이다. 그치만 이제 90대 넘는 고령이 되고 나서 172㎝보다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2] 이멜다는 동양인외모처럼 생겼으나 일본계+스페인계이다.또한 수정 전에는 중국계가 아니라고 되어있으나 실제로 이멜다의 아버지는 스페인계지만 중국계의 피도 섞여있다.[3] 이들의 만남을 중재해준 사람은 호세 게바라(Jose Guevara, 1917~2002)라는 언론인인데, 게바라는 1938년부터 2002년(정확히는 사망일)까지 무려 64년간 필리핀 최대 신문 '마닐라 불틴'에 칼럼을 개재한 필리핀의 유명 언론인이다. 마르코스의 '꾸준한 조수' 취급받을 정도로 친마르코스 성향이었다.[4] 근데 페르디난드도 필리핀인 치고는 키가 큰 편에 속한다. 지금도 필리핀인 평균키보다 크다.[5]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처럼 주변의 견제를 받지 않자 그녀의 욕망도 폭주한 것으로 보인다.[6] 여기에 든 돈이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무려[7] 1986년 3월 11일 동아일보 기사 중 일부.[8] 사실상 이멜다의 사치를 상징하는 물품이다.[9] 당시가 1980년대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에 1만 달러는 엄청난 금액이며, 지금도 필리핀인들에게는 4년제 대졸 신입사원들의 3년치 급여이기도 하다. 특히 필리핀 명문대 졸업자의 경우 연봉이 한화로 310만원 정도로, 한국의 8분의 1쯤 된다.[A] 2013년 2월 3일 the Asian지 뉴스 중 일부[A] [A] [13] 참고로 마르코스 부부의 장녀인 아이미 마르코스는 이보다 한술 더 떴는데, 아이미 마르코스는 자녀를 필리핀에 두고 유럽을 여행할 때에 자녀들에게 모유를 수유하기 위해 아버지가 보낸 필리핀 항공의 특별 항공편을 모유 택배로 썼고, 이 때문에 필리핀 항공의 많은 비행이 지연되거나 취소되어 유럽에 살고 있거나 유럽을 여행하던 많은 필리핀인들이 불평을 했다고 한다.[14] 당시 필리핀의 국제적 지위는 상당히 높은 편에 속했다.[15] https://news.v.daum.net/v/20181118060046559?f=m[16] 사실 이런 사례는 정치 후진국에서 매우 흔하다. 한국에서도 특정 정치인들 소유의 토지나 건물이 '단지 소유주가 권력자라는 이유로 재개발된 것이 아니냐'는 강한 의혹을 받는 논란이 여러 차례 있어 왔고, (특히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그 정점)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런데 필리핀은 오죽할까?[17] 1980년 7월 3일 경향신문 중 일부.[18] 1986년 4월 14일 동아일보 보도 중.[19] 마르코스 정권 하에서 살해당한 야당 정치인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끝장낸 여성 대통령 사이의 장남이다. 바꿔 말해 아키노 가문 자체가 마르코스 가문과 제대로 원수를 진 것.[20] 이 사실을 뒤늦게 안 폴 매카트니는 "국민들을 괴롭힌 독재자를 빡치게 했다는 게 너무 고소하다"라면서 이멜다를 조롱했다. 직설적인 성격의 존 레논은 아예 "그런 정신병동 같은 나라에는 다시는 가지 않을 거다"라고 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