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그노 시메온 아키노 2세 Benigno Simeon Aquino, Jr. | ||
본명 | <colbgcolor=#ffffff,#191919>베니그노 시미온 니노이 아키노 주니어 | |
국적 | [[필리핀| ]][[틀:국기| ]][[틀:국기| ]] | |
출생 | 1932년 11월 27일 | |
<colbgcolor=#ffffff,#191919>필리핀 군도 도민정청 타를라크주 (現 필리핀 중앙루손 지방 타를라크주) | ||
사망 | 1983년 8월 21일 (향년 50세) | |
필리핀 마닐라 국제공항 | ||
학력 | De La Salle College Joseph's College of Quezon City San Beda College | |
가족 | 아내 코라손 아키노 아들 베니그노 아키노 3세 딸 크리스 아키노 | |
정당 | [[필리핀 민주당| 민주당 ]] |
[clearfix]
1. 개요
필리핀의 정치가. 필리핀 국민들에겐 애칭으로 "니노이"라 불렸다.아내 코라손 아키노와 함께 있는 모습 |
2. 일생
2.1. 전도유망한 젊은 정치가
1932년, 타를라크 주 콘셉시온에서 태어났다. 스페인 메스티소와 상글레이 혈통의 혼혈이였다. 아키노 가문은 필리핀의 명문가 중 하나로, 스페인에 대항한 독립운동부터 시작해서 대대로 필리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 가문이다. 참고로 아내인 코라손 여사 역시 명문가인 코후앙코 가문 출신.베니그노의 조부는 필리핀 초대 대통령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측근이었고 부친인 베니그노 아키노 시니어(베니그노 아키노 1세)[1]도 정치가였으나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했을 때 세운 괴뢰 정권인 호세 라우렐 정권에서 활약했다. 일본이 물러간 후 베니그노 아키노 시니어는 일본 협력자로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이는 필리핀-미국 전쟁에서 필리핀 독립군을 이끌었던 아기날도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본 침략군에 매우 적극적으로 협조했기 때문이다.[2] 일제 치하 괴뢰정부 수반이었던 라우렐 등은 전후에 정치적 몰락은 커녕 대선후보로 나서는 등 정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일본군의 점령 전 필리핀은 필리핀 자치령(Commonwealth of the Philippines)이라는 미국의 보호령/보호국이었고, 일본군의 점령하에 세워진 괴뢰국은 필리핀 제2공화국이라고 불리는데(필리핀 제1공화국은 미국-스페인 전쟁 직후에 세워진 혁명 정부.) 오늘날 필리핀 정부는 두 정부 모두 정통성이 있다고 본다. 양 쪽 모두 외세의 지원을 받아 세워진 괴뢰정부라 그렇다. 한편 니노이 본인도 일본의 극우 문학가/정치인인 이시하라 신타로와 매우 친하게 지냈으며, 니노이가 암살당했다는 흉보를 그 유가족에게 전한 것도 이시하라였고, 이 인연으로 이시하라는 니노이 아들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아키노는 학교를 떠나 한국 전쟁 종군기자로 활약하는 등 언론계에 투신했다가, 라몬 막사이사이 필리핀 대통령 밑에서 일하게 된다. 그런데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아키노에게 아주 어려운 임무를 맡겼는데 반정부 단체의 지도자인 루이스 타룩을 설득해서 투항시키라는 것이었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아키노는 4개월 여간 타룩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타룩과 그의 반정부 단체의 무조건 투항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아키노의 명성은 높아지게 된다.
이 일로 불과 22살 나이인 1954년에 고향 콘셉시온 시의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한편 이 해에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과 열애 끝에 결혼했는데 그가 바로 코라손 코후앙코, 후일의 코라손 아키노가 되는 여인이었다.
아키노는 전도유망한 정치가로 성장해 나가 1961년에는 타를라크 주의 주지사에 당선되었고 1966년에는 자유당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65년에는 35세의 나이에 상원의원이 되어 국회에 입성했다. 이는 필리핀 최연소 상원의원의 기록으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2.2. 반마르코스 투쟁의 구심점
그러나 1972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독재권력을 강화하면서 아키노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게 된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젊고 명문가인 아키노 가문 출신인 그를 최대의 정적으로 여기고 그를 정부 전복혐의와 불법무기 소지라는 이유로 체포해 투옥했다. 아키노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국민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던 그를 마르코스는 차마 사형까진 시키지 못하고 있었다.사실 이전까지 아키노는 마르코스의 가장 강력한 대항마로 꼽혔으나 이는 어느 정도 아키노의 개인적인 배경의 원인도 있었고 아키노 자신도 딱히 마르코스에게 대항하려는 생각보다는 쉽게 말하자면 현재의 위치를 유지하면서 살자는 부잣집 도련님 스타일의 소유자에 불과했다. 이전까지의 인생행로도 그다지 큰 어려움 없이 순탄하게 살아왔기도 했고...
그러나 감옥생활을 거치면서 아키노는 부잣집 도련님 스타일에서 벗어났고 가톨릭 신앙이 깊어지면서 마르코스 독재정권에 전면적으로 맞서면서 동시에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반독재 투쟁을 해야함을 역설하기 시작했고 아키노는 반마르코스 투쟁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침 2차 오일 쇼크로 필리핀의 경기침체가 가속화되자 마르코스 정권에 대한 비난여론이 더욱 거세졌고, 아키노 전 상원의원을 석방하라는 야당의 정치적 공세 또한 강력해졌다. 결국 야당의 정치적 공세에 떠밀려 마르코스는 1980년 5월에 아키노를 석방하고 미국과의 합의 끝에 아키노를 미국에 수술차 보낸다는 명분으로 사실상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3년 여간 미국 망명생활을 하던 아키노는 마르코스에게 고통받는 필리핀 국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귀국을 선택했다. 그의 친구들이나 그를 지지하는 미국 정치인들은 귀국을 만류했으나 아키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2.3. 암살
1983년 8월 21일, 아키노는 중화항공의 보잉 767기에 탑승하여 타이베이를 경유해 마닐라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아키노가 비행기에서 지상으로 연결된 계단을 통해 내려온 순간, 계단 뒤에 숨어 있던 괴한이 그의 바로 뒤로 접근해 후두부에 총격을 가했고, 니노이 아키노는 즉사했다. 향년 50세. 범인은 롤란도 가르만이라는 자로 아키노를 암살한 직후,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아키노는 이미 자신이 죽을 것임을 직감이라도 했는지 비행기 안에서 "좀 위험할지도 모르겠네요. 내 조국에선 암살이 서비스처럼 제공되니까요."라는 말을 했고 내리기 직전에는 자신과 동행한 카메라맨에게 "뭔가 일어날테니 카메라를 멈추지 말고 계속 촬영하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범인인 가르만이 죽어버린 탓에 아키노 암살의 배후를 두고 온갖 논란이 일었다. 사람들의 눈초리는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쏠렸으나 당시 마르코스 대통령은 신부전으로 투석 중이었기 때문에 아키노 암살을 지시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는 지적이 있다. 그 외에 CIA의 제거설, 아키노의 입국시 반마르코스 투쟁의 주도권 상실을 우려한 필리핀 공산당이 배후라는 설, 마르코스를 대신해 부인 이멜다가 배후라는 설이 돌았다.
후에 가르만의 권총 음향을 분석해 본 결과 민간인들이 흔히 입수할 수 있는 리볼버가 아닌 자동권총에 가깝다는 분석이 나왔다. 즉, 정권 내의 누군가가 배후일 가능성이 큰 것. 당시 경호를 책임지던 한 병사도 암살 배후로 마르코스의 친구이자 코라손 아키노의 사촌인 에두아르도 코후앙코라고 지목하기도 했다. 대체적인 분석은 마르코스가 투석으로 정무를 보지 못하는 사이에 마르코스의 측근 세력이 독단적으로 아키노를 암살한 것이라는 추정이 지배적이다. 당시 아키노가 입국할 때, 이미 마르코스 정부가 비행기 안으로 군인과 경찰을 경호 인력으로 파견해놓은 상태였기 때문. 그렇게 해놓고 정작 공항에서 바로 암살하면 당연히 정부가 의심받을 것은 뻔한 일이다. 만약 마르코스 본인이 아키노를 제거할 생각이었다면, 일단 아무 일 없이 귀국하도록 한 뒤 교통사고 등의 교묘한 방법을 쓰는 게 상대적으로 의심을 덜 받는 방법이다. 이 점에서 마르코스가 직접적으로 지시를 내렸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2.4. 암살 이후
자세한 내용은 에드사 혁명 문서 참고하십시오.8월 31일, 아키노의 장례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무려 200만 명의 인파가 몰려 아키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으며 아키노의 시신을 한 번이라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아침 9시에 시작한 장례식은 오후 9시가 되어서야 아키노의 시신을 관에 안장하고 묘역으로 운구할 수 있었다.
필리핀 언론들은 모두 마르코스 정권을 두려워하여 아키노의 장례식 중계를 포기했으나 가톨릭 교회의 후원을 받는 라디오 베리타스라는 방송만이 유일하게 장례식을 생중계했다. 마르코스 정권은 몰려든 시민들이 봉기라도 하지 않을까 두려워했으나 필리핀 시민들은 오히려 차분하게 아키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다만 아키노의 관이 필리핀의 국민영웅인 호세 리살을 기리는 호세 리살 공원에 이르렀을 때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호세 리살 공원의 필리핀 국기가 모두 조기 게양으로 바뀌었다.
시민들의 분노는 아키노의 장례식 이후 폭발했다. 수도 마닐라는 물론 전국에서 반마르코스 시위가 불 일듯이 일어났고 부유층부터 슬럼가의 빈민들까지 모두 시위에 가세했다. 심지어 기업가들조차도 시위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마르코스 정권은 끝났다는 데 동의했을 정도다. 여기에는 아키노 암살을 다룬 해외 언론의 다큐멘터리가 필리핀 내에서 몰래 상영된 것도 큰 역할을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아키노 암살은 마르코스가 정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근거가 되었다. 후폭풍을 알면서도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해외의 여론도 마르코스에게 비판적으로 돌아섰다. 해외 언론들은 연일 마르코스와 이멜다의 사치와 부패상을 보도했고 이는 그대로 필리핀에 유입되어서 반마르코스 여론을 더욱 키웠다.
엄청난 역풍에 마르코스는 결국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대통령 선거를 통해 재선에 성공해 역풍을 잠재우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아키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가 반마르코스 운동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코라손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한 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반마르코스 운동을 벌였고 국민들은 코라손을 적극 지지했다.
1986년 2월 7일, 필리핀 선관위는 마르코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국민적인 여론과는 배치되는 것이었고 다시금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르코스는 군을 동원해서 이를 진압하려 했으나 민중들의 격렬한 분노를 접한 군부는 마르코스에게 등을 돌렸다. 후안 엔릴레 국방장관과 피델 라모스 부참모총장 등은 마르코스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아기날도 공군기지에서 농성을 시작했고 시민들이 이에 가세했고, 필리핀 현대사의 큰 빛줄기로 남은 피플 파워로 발전했다.
결국 마르코스와 이멜다는 하와이로 도망쳤고, 코라손 아키노는 필리핀의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종식시켰다.
3. 평가
오늘날에도 아키노는 독재정권을 종식시킨 순교자로서 필리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필리핀 500페소 지폐에는 아키노를 모델로 삼고 있고, 그가 암살당한 마닐라 국제공항은 그를 기리기 위해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으로 개명되었다.아키노의 아들인 베니그노 아키노 3세[3]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후광에 힘입어 주 의원을 거쳐 2010년 필리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비록 부모에 비해서는 지도자로서의 평가가 낮지만 필리핀군의 현대화에 기여한 공로가 있다.
4. 김대중과의 인연
베니그노 아키노가 미국 망명 시절 김대중에게 선물한 타자기.[4] |
정치 행보가 아키노와 거의 비슷했던 대한민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아키노와 같은 이유(군사독재정권에 의한 사형선고)로 인해 미국에 망명했었다. 김대중과 아키노는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했기 때문에 실제로 교류하였고, 동병상련을 느끼며 친하게 지냈다. 부부가 서로를 왕래하였다. 이후 이때의 인연을 계기로 이후 베니그노 아키노의 부인인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은 김대중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바 있고, 마찬가지로 코라손 아키노가 사망하자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전 영부인은 조화를[5] 보낸 바 있다.
아키노가 암살당하고 2년 뒤인 1985년 2월 8일,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를 지원하기 위해 귀국을 결정하는데 주변의 미국 지인들은 김대중의 귀국을 뜯어말렸지만 2월 국회의원 선거는 민주세력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 "더 이상 조국을 외면할 수 없다"면서 2월에 귀국을 강행했고, 아키노처럼 김대중을 희생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김대중을 보호하기 시작한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나 폰 바이츠제커 서독 대통령, 빌리 브란트 전 총리 등은 김대중 귀국 축하 메세지를 보내 전두환을 압박했고, 당시 로날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리처드 워커 주한미국대사를 통해서 방미 일정을 취소할 수 있다며 전두환을 압박했다.
귀국길에도 아키노 암살 같은 사건을 막기 위해 미국의 현직 연방하원의원을 중심으로 크리스토퍼 히친스[6] 등 미국의 명사들이 인간방패가 되어 김대중을 직접 에워싸고 김포국제공항까지 보호했고, 이런 노력 덕분이었는지 다행히도 김대중은 아키노와 같은 참변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연행되어 가택연금당했다. 심지어 김대중이 귀국하던 때, 가택연금 상태였던 김영삼 역시 직접 김대중을 마중 나가고자 시도했으나, 군경의 제지로 실패했다. 이 때 김영삼이 해당 군경들에게 일갈한 명언이 다름아닌 "날 힘으로 감금할 수는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내 마음은 전두환이 절대 뺏지 못한다!" "미국에서는 (우리나라가) 소련보다도 더 한 나라라고 한다.[7] 그래도 좋은 것이냐?"[8] 였다.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참조.
굳이 따지자면 '아키노 덕에 김대중이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뒤집어 생각하면, 만약 김대중이 아키노보다 먼저 귀국했더라면 두 사람의 운명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9]
여담으로 아키노가 피살되고 그 때문에 1986년에 필리핀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김대중은 마르코스 퇴진 1주일 전에 필리핀의 독재 종식을 예견하며 필리핀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1980년대 말에 민주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5. 기타
이시하라 히로타카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라고 한다.1986년부터 발행을 시작한 필리핀 500페소 지폐에 본래 계획되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신 도안으로 등장해 지금까지 쓰이고 있으며, 2010년부턴 아내 코라손 아키노와 같이 등장하고 있다.
[1] 이그노(Igno)라는 애칭으로 불린다.[2] 일제강점기를 겪은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던 여러 아시아의 나라들은 아시아에서 그나마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을 전개했었다. 일본의 지원에는 본인들의 영향력 확대라는 숨은 목적도 있었으나 어찌됐든 아시아의 피식민지들 입장에서는 지원이 절실했다. 물론 이후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군이 점령하여 직접 지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오히려 일본에 대해 저항하였다.[3] 1960년~2021년. 이쪽은 노이노이(Noynoy)라는 애칭으로 불린다.[4] 과거 필리핀 500페소 지폐 뒷면에도 그려졌으며, 현재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전시 중이다.[5] 김대중 대통령도 사망하기 1달 전이라 건강이 매우 안 좋았다.[6] 훗날 "김대중 씨가 서울의 공항에서 다시 붙잡혀 가던 순간에 그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술회했다.[7] 즉, 소련보다 더 폭압적인 정권이라는 뜻.[8] 이 때 소련은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집권하기 전이었다. 즉, 체르넨코 시절.[9] 실제로 남편과 민주화 운동을 함께한 부인 코라손 아키노는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