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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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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사시대3. 식민지배 이전
3.1. 해양왕국들의 시대
3.1.1. 국가 분류3.1.2. 주요 국가들
3.1.2.1. 마닐라-톤도 왕국3.1.2.2. 술루 술탄국3.1.2.3. 부투안 왕국3.1.2.4. 마긴다나오 술탄국3.1.2.5. 세부 왕국3.1.2.6. 중국계 상인 공동체들3.1.2.7. 국가 이외의 지역
3.1.3. 정치구조3.1.4. 군사3.1.5. 경제 및 문화3.1.6. 이슬람의 팽창
4. 스페인령 동인도(스페인의 식민지배) (1565~1898)
4.1. 정복과정: 마젤란 원정대 파견(1521) ~ 마닐라 왕국 함락(1571)4.2. 식민 지배 초기 ~ 중반기(1565 ~ 1787)4.3. 식민지배 후반기(18세기 후반 ~ 1896년)4.4. 필리핀 독립전쟁(1896~1898): 필리핀 혁명4.5. 필리핀 제1공화국, 미국-스페인 전쟁(1898)
5. 미국의 식민지배6. 독립 이후
6.1. 필리핀 제3공화국(1946~1972)6.2. 필리핀 제4공화국: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독재정권(1972~1986)6.3. 필리핀 제5공화국: 마르코스 이후(1986~)
7. 출처

1. 개요



필리핀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2. 선사시대

1962년 팔라완 남서부 퀘손에 있는 타본 동굴에서 2만 2천 년에서 2만 4천 년 사이에 보르네오 섬에서 도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타본인 화석이 발견되었고, 2019년 루손 북부 칼라오 동굴에서 발견된 호모 루조넨시스 화석이 6만 년에서 6만 7천 년 사이로 추정됨에 따라 필리핀에 인류가 도착한 것은 필리핀 제도가 인도네시아 반도 및 보르네오 섬과 서로 육지로 연결되어 있던 플라이스토세 때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현생인류와는 다른 또다른 고인류인 데니소바인들 또한 도래하였다.

이후 네그리토라 불리는 선주민들이 오래 전부터(최소 5만년 이상) 살고 있었지만, 언제부터 살아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필리핀과 뉴기니의 네그리토들에게서 데니소바인 유전자가 5% 정도로 발견되었고 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네그리토는 동남아, 남아시아 전역에 존재했고 이후 제각기 현지 사회에 동화되었지만 데니소바인 비율이 높은 것은 다른 동남아 지역과 유전적으로 차이가 나는 점이다. 네그리토인[1], 데니소바인이 혼혈되어 최소 몇만년간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3. 식민지배 이전

그러다가 기원전 3000년 이전 중국 양쯔강 삼각주에서 발원하여 황하의 한족과는 별개의 독자적인 장강(양쯔강) 문명[2]을 이루고난 이후 벼농사에 훨씬 유리한 남쪽으로 대이동을 하여 대만을 거쳐 동남아, 남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간 아시아의 해양민족인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필리핀에 도래하였다. 오스트로네시아인은 오늘날 동남아시아의 대다수 민족의 유전자에 높은 비율로 존재한다.

일단 한족과는 뿌리부터가 다르다.[3]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뛰어난 항해술로 태평양, 동남아, 인도양, 마다가스카르 곳곳에 퍼져나갔으며 인류최초의 원양항해자들이다. 이들이 바다를 천연고속도로로 활용하여 퍼져나간 면적을 따지면 지구 반바퀴에 해당한다. 이들은 필리핀에 평화롭게 정착하였다. 오스트로네시아인은 일본 열도로 이동하기도 했는데 일본의 고대 민족집단으로는 구마소가 있다. 오늘날의 규슈 남부지역에 해당한다. 고고학적 증거들이 양쯔강 유역의 중국본토와 동남아시아 지역이 깊은 연결고리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스트로네시아인의 필리핀 정착을 시발점으로 여러 이민족이 오고 갔다. 고고학적 연구에 따라 을 화폐로 사용했던 흔적들이 필리핀 전역에서 발굴되고 있다.[4]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인 기원전 2000년경부터 귀금속인 비취(옥)을 화폐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기원후 1000년 전후까지 대략 3천년간 화폐로 사용하였다. 대체로 기원후 5세기부터는 은을, 기원후 9세기부터 금을 화폐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는 20세기 초까지 이어진다. 당시로써 귀금속 화폐의 사용은 상업의 촉진과 더불어 계통이 다양한 아시아의 유이민 집단 정착의 촉매제가 되었다. 필리핀인들은 그 출발부터가 혼혈이며 이러한 배경은 역사적으로 특유의 개방적인 문화를 형성하게되는 토대가 된다.

중국 역사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이들은 남만으로 분류된다.

7세기부터 일부 섬 지역은 근처의 스리위자야 왕국의 영향을 받았고, 힌두교 문화와 불교 문화가 필리핀으로 전파되었다. 그 영향으로 문자도 전파되어 인도계 문자와 아랍 문자를 개량한 바이바이인(Baybayin) 문자도 존재했지만 스페인 식민지배 시기에 로마자로 많이 대체되는 바람에 현재는 실생활에서 거의 쓰이지 않고, 거의 장식용으로나 쓰는 형편이다. 필리핀 내의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이나 필리핀 고유 문화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들은 이들 문자를 상용하기 위해서 노력한다고 한다. 유니코드에도 포함되어 있다.
파일:external/3.bp.blogspot.com/bayblopez_chart.jpg
남아있는 바이바이인 문자들, 16세기까지 사용되었다. 필리핀은 중국과 가까웠고 실제 베트남처럼 중국 화교들도 도시를 세우는 등 많이 존재했으나 필리핀은 베트남과 달리 중화 문화권이 아니었고 한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스페인이 오기 전까지 토착화된 인도아랍계 상업 왕국들의 우세속에 세력판도가 짜여져 있었고 또한 그들의 문자를 사용했다. 지역 내 중국 정부와의 공무역권 또한 화교들이 아닌 인도 아랍계 토착왕국이 쥐고 있었다.
기록물들이 종종 발굴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당시 역사적인 문자와 사료들이 패엽으로 기록된 탓에 보존성이 좋지 않았고, 다른 동남아국가들보다도 큰 지진, 태풍이 빈번했기 때문에 기록들이 소실되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것들도 태평양전쟁 때 파괴되었다. 스페인 측과 주변국들 기록으로 역사 연구를 의존하던 실정 때문에 자국 스스로에 대한 왜곡이 적어 문헌이 적은 대신 비교적 객관화된 기록 위주로 남아있다.
파일:실크로드2_Chrome.jpg
기원전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유라시아 대륙의 무역망인 육상 실크로드(Silk road)와 해상 향신료 루트(Spice route). 로마 제국에서 동아시아까지 이어지며, 필리핀에서는 중국과 가까운 루손섬에 다국적 상인들이 경유하며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한게 시초로 보고 있다.
그러다 라구나 동판이 발견되면서 필리핀 북부 루손 지역은 당나라 이전시대부터 중국과 교역을 했다는 기록이 교차검증되었다. 루손섬은 다양한 국가의 사신들이 중국에 조공 또는 무역을 하러 가는 와중에 경유한 경우도 많아서 자연스레 중계무역항이 된 경우이다. 또한 당시 남부 민다나오 지역에서 금이 많이 발견되어 특산품이 되었고, 이미 고대부터 필리핀 제도는 금화, 은화를 사용하기 시작했다.[5]

필리핀 북부와 남부를 망라해서 많은 다국적 상인들이 오갔고, 먼 바다를 건너 중동인도에서 온 상인들이 동남아시아, 동아시아 전역을 상대로 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때 중국인들이 필리핀 제도를 경유해 다른 동남아시아인도인, 아랍인들과 장사를 해서 이익을 얻길 원했기 때문에, 홀로섬과 마닐라에는 당시부터 차이나타운이 생겼다. 이렇게 필리핀 화교의 역사는 고대 7세기부터가 원조라 할 수 있다. 일본인들과의 교류는 문헌 기록으로는 8세기 헤이안 시대부터 발견되며 주로 나가사키 상인들과 오키나와인들이 자주 들렀고 루손섬 북부와 마닐라 등 곳곳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문명과 별로 접촉하지 못했던 대다수의 원주민 집단들도 이후 다양한 출신 국가 성분을 가진 상업집단들이 오가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9세기 이전에는 다국적 상인들이 그냥 지나다니던 길목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이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당시의 일을 잘 알 수가 없다. 지나다니던 상인들과 술루 지역의 통치자는 5세기부터 화폐를 발행하였고, 9세기 기록에서부터 정착된 상인자본에 의해 여러 나라들이 생겨나면서 상업으로 번성하였다.[6]

3.1. 해양왕국들의 시대

파일:Screenshot_20211121-224332_Google.jpg
금화 & 은화로 사용되었던 발터 링(Barter rings), 필론시토(Piloncitos). 필론시토에는 바이바이인 문자가 보인다. 필론시토는 자바섬의 양식으로 인도네시아의 영향을 받았지만 바이바이인 문자를 새긴 것은 필리핀만의 독자적인 화폐임을 증명한다. 필론시토는 스페인으로 편입된 이후에도 필리핀 지역 내에서 지역화폐로 계속 사용되었다. 이는 필리핀 왕국들이 제각기 스페인 제국 내에서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일:상업왕국_Google.jpg
민다나오섬 지방의 상업왕국 복장을 하고 있는 인디오들(indios)
파일:Screenshot_20211101-202859_Google.jpg
유럽인의 정복 이전에 존재했던 토착 국가들. 지도를 보면 인도 문화, 중국 문화, 이슬람 문화를 가진 여러 왕국들이 독자적으로 발전해왔음을 알 수 있으며, 후에 유럽 문명까지 들어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주요 문명권들 대부분이 필리핀에 영향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리핀은 섬나라이고 바다와 인연이 깊은 해양민족으로써의 역사가 나타난다.

16세기쯤 되면 활동 반경은 서쪽으로는 인도, 중동, 마다가스카르, 동쪽으로는 서부 미크로네시아, 북쪽으로는 일본 열도, 남쪽으로는 인도네시아 전역, 파푸아 뉴기니 까지 무역로를 형성하였다.
파일:필리핀배2.jpg

3.1.1. 국가 분류

9세기가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 곳곳에서 정착된 상인 자본을 바탕으로 여러 국가들이 나타난다.

크게 세가지 특징을 가진 세력들로 나뉘는데, 국제무역을 하던 상업왕국들, 바랑가이라 불리는 연맹체 형태의 여러 국가들, 중국과의 무역에 종사하던 중국인 거류지들로 분류된다.

바랑가이 왕국 중에서는 세부(Cebu), 이고롯(Igorot) 등과 같이 규모가 큰 곳들도 존재했다. 대체로 군장국가 형태이면서도 큰 곳들은 연맹왕국 또는 연맹체를 구성했다. 바랑가이들 또한 금, 은이 화폐로 보편화되었고 상업과 해적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바랑가이 보다 경제가 발달하여 국제무역로를 형성한게 상업왕국들이다. 다른 동남아 왕국들과의 통혼관계를 통해 동맹을 맺은 사례들도 발견된다. 대체로 인도와 아랍계 문화권이었다. 톤도(Tondo), 나마얀(Namayan) 마닐라(Manila), 술루(Sulu), 라나오(Lanao) 마긴다나오(Maguindanao), 부투안(Butuan) 등의 상업왕국들은 인도, 아랍 본토의 상인들과 여러 동남아 국가들과의 국제 무역로를 차지했다. 필리핀 제도에서 중국정부와의 조공무역 등 공무역도 이들이 담당했다.

팡가시난(Pangasinan,Fengcha-hsi-lan), 민도로(Mindiro,Ma-i)와 같은 거류 무역지에서는 많은 중국계 상인들이 정착촌을 형성해 중국 내륙과의 사무역과 밀무역에 종사했다.

3.1.2. 주요 국가들

3.1.2.1. 마닐라-톤도 왕국
북부 루손섬마닐라(톤도)왕국은 그 시작은 인도계 국가였으나 중국과의 많은 교류를 통해 중국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으며 오랜 전통을 가진 국제중계무역항이었다. 스페인인들이 도착했을 때 도시의 화려함에 감탄했던 기록이 있다. 필리핀 제도 지역 내에서 중국과의 정기무역(공무역)권을 오랜시간 독점하고 있었고 중국정부와의 무역이 2년에 1회로 허락되었다.[7] 이곳은 중국이 혼란스러웠던 당나라 이전시대부터,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등의 통일국가들이 들어서서도 무역권을 갖고 있었다. 이후에는 이슬람과의 무역을 확대하고자 브루나이의 영향을 받아 마닐라국왕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도 한다.[8] 톤도 왕국과 나마얀, 카인타 등 규모있는 공방들을 가진 부유한 바랑가이들이 영향권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9]

아시아 각국에서 명나라로 조공 무역을 할 때 마닐라-톤도는 유교 문화권이 아니여서 황실 알현 순위는 결코 높지 않았다. 1371년부터 1567년까지 명나라에서 조공무역 이외의 사무역을 금하는 해금령이 있었고 대부분의 다른 아시아의 상인들이 거대 시장인 중국과의 무역로가 차단되어 포기할 때 마닐라-톤도는 팡가시난과 함께 밀무역로를 개척했던 거의 유일한 세력이다. 마닐라-톤도는 팡가시난 즉, 오늘날의 일로코스 지역과 영향권이 겹쳤고 이들과 결탁하여 광동성, 취안저우, 푸젠성 등 남방 거대도시들과 교류한 전문 밀수업자들이였다. 그로 인해 스페인이 오기 전부터 중국동남아시아 시장, 스리랑카, 벵골 만까지를 잇는 이른바 '향신료 루트'의 무역 헤게모니를 장악하였다.

특히 이들은 해금령이 내려진 후 동남아, 남아시아 무역시장에서 중국 상품들을 대규모로 공급하고 남방의 무역품들을 중국에 밀수출하던 유일한 세력이였고 동남아 여러 도시들에서 얼굴은 다르지만 '중국인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실제 이들과 결탁한 일부 일로코스인들은 중국인과 외모가 흡사하거나 많은 이들이 혼혈이다. 포르투갈측 기록에 의하면 포르투갈인들과 필리핀의 루손인들이 왜구로써 동업을 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필요할 때는 일본 왜구들을 후원하였는데, 금이나 은을 주고 고용하여 사략함대를 보내거나 직접 일본계 갑옷으로 무장하고 '가왜'라 불리는, 일본 왜구인 척하는 해적이 되어 적은 병력으로 명나라 국토를 유린했던 대해적들이였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영락제 시대 정화의 필리핀 원정 이후에 있었던 일이다.

중국, 중동, 인도, 미얀마, 크메르, 말레이,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브루나이, 일본 등과 광범위한 무역루트를 형성했을 뿐 아니라 해외 각국에 상인들을 진출시켜 영주하게 하여 무역 카르텔을 형성시키고 동남아 전역의 왕실들 그리고 각국의 민간 상단들에서도 항해사, 관료, 용병, 상인, 해적, 선주, 지주로써 활동하였다. 특히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자 루손인들의 아지트인 루손섬을 주요 거점으로 하여 말라카 해협에 대규모 상단을 영주시키고 스리랑카와 깊이 교류하여 인도-중국 시장 사이를 잇는 중계무역에 종사하였다.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의 포르투갈 기록에 루손인(Luzones)들은 동남아시아 각국과 상업적 이해관계와 군사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나 많은 이익이 몰리는 길목인 말라카 해협의 대규모 무역업자이면서도 그곳의 정치 및 경제,군사 문제에 루손인들이 외국인으로써 깊숙히 개입하고 있었음을 목격하였다. 또한 당시 보고서 기록에 루손인들은 '가장 호전적이고 용감합니다.' 및 '선구적인 항해사들'이라는 묘사가 있고 실제 포르투갈 본국에 보고된 문서에도 기록되어있다. 포르투갈은 많은 루손인들을 고용하거나 동업을 하였다.

서양사 학자들은 루손인들이 대항해시대 때 동남아의 무역허브인 말레이 제도에 진출한 모든 동양 문화권의 상인들 중에 실력으로써 가장 높이 평가되는 용병이자 상인이었다고 여러 번 제안하였다. 고대 타갈로그어는 무역허브이자 당시 다문화 국가였던 말라카 술탄국에서 쓰이는 80여 개의 언어 중 하나였고 포르투갈은 루손인들로부터 가장 깊은 인상을 기록하고 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 도래 이전에 루손인들의 해양 활동상의 증인이자 직접적인 수혜자였다. 말라카 술탄국에 루손인(Luzones) 출신의 선구적인 항해사들과 상인, 관료, 지주들이 많이 존재했고 말라카(말레이시아)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고나서도 루손인들은 말레이에서 주요관직을 차지하고 행정을 담당하였다.[10] 루손인들은 많은 말레이 배들의 선주들이기도 했다. 또한 포르투갈 식민지인 말레이에서 땅을 임대하여 지주로 활동하기도 했다.[11] 포르투갈이 중국으로부터 마카오를 하사받고 일본과의 교역을 트는데 루손인들이 항해사와 상인, 교섭자로 도움을 주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여 포르투갈은 16세기 중반 마카오에 기반을 세우고 나서 루손인들에게 감사를 표한 기록이 남아있다.

용병활동 또한 광범위하여 미얀마, 태국이 서로 전쟁을 벌일 때 양측 왕실에서 이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포르투갈이 필리핀 해적 또는 이슬람 함대와 해전을 벌이고 패전했을 때 적선에 많은 루손인 용병들이 타고 있었다. 말레이시아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전 말레이 왕족이 루손인 용병단을 고용하여 함대를 이끌고 나타나 말레이를 탈환하려고 했다. 브루나이 함대를 이끌던 사령관도 루손인이었고 이집트 카이로 총독이 인도네시아 아체를 점령하려고 수에즈에서 출항시킨 함대로부터 아체를 방어할 때도 용병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대항해시대 이전부터 루손인들은 국제적으로 활동한 상인이자 용병단이었다. 활동 반경이 넓었으며, 실력으로 인정받아 일단 돈이 되면 진영과 종교, 국가를 가리지 않고 고용되었다.

스페인측 기록에는 이전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금을 정교하게 다루는 상인들이라 기록되어 있다. 말라카 해협, 남중국해, 필리핀 제도, 벵골 만, 스리랑카까지 주요활동 무대가 된다.
3.1.2.2. 술루 술탄국
남부 민다나오섬 서부지역에 위치했던 술루 술탄국남중국해 동남부 해역의 해상 패권을 가진 이슬람해적왕국이었다. 초기부터 고급진주를 채취하여 많은 부를 얻었다. 이 지역은 5세기부터 화폐활성화에 성공했고 이후엔 은화가 안정적으로 통용되었다. 동남아에서 인도, 파키스탄, 아라비아, 북아프리카, 튀르키예까지 이어지는 이슬람 네트워크에 속해있었다. 마닐라, 톤도, 부투안 등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화교 상인들과 연계해 중국시장과의 무역로를 개척하였고 이슬람-중국 세력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번성했다. 또한 특유의 호전적 기질로 해적 활동과 노예무역을 통해 큰 수익을 올렸다.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강화하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영국, 스페인령 동인도 소속 태평양 함대를 상대로 해전에서 승리한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나 스페인과는 300여 년간 전쟁을 하였다.[12] 동남아에 진출한 유럽인들뿐만 아니라 중국 세력들도 인정할 정도의 강병을 보유했던 국가로 알려져 있었다. 청나라 황실의 공식 기록에는 '그 땅의 기운은 더우며 사람의 성질이 강하고 사납다.', 명나라 또한 이 지역의 통치자를 천호장, 만호장, 족장, 호족, 왜구 등이 아닌 '왕'으로 표현해 놓았다.[13] 지정학적으로 필리핀 군도와 인도네시아 사이에 끼어있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의 토착 세력들은 물론 네덜란드, 스페인 등의 유럽 세력들과 전쟁을 하면서도 독립 국가로 존속하였다. 범선시대의 술루 제도는 해적 소굴이였다. 이곳에서 털린 유럽 상선들도 꽤 많았으며 범선시대까지는 유럽 정규함대와 전투를 해도 승리하였다. 역사에 실존했던 해적 왕국이였다.

다른 17여 개의 필리핀 토착 국가들과 달리 스페인의 제국 편입회유를 거부하고 전쟁을 선택하여 자주국가로 존속했던 3개의 이슬람 상업왕국 중 하나였다. 회유에 넘어가지 않은 것은 이슬람 국가였던 것도 한몫했는데 기독교와 상극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슬람-중국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꽤 부유했기 때문에 스페인의 회유에 넘어갈 필요가 없었다. 술루는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토착 상업 왕국이였다. 스페인이 오기 전에는 세부 왕국, 부투안 왕국 등 힌두교, 불교 계통의 세력들과 지속적으로 전쟁 중이였다.

술루왕가는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 핏줄이 흐르는 하심 가문의 방계 후손이며, 태국왕가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남아 봉건 왕국들이 유럽열강의 회유, 내부분열, 군사적 굴복으로 인해 식민지로 넘어갈 때, 거의 유일하게 서구열강들과 전쟁을 통해서 주권을 지켜낸 국가이다. 500여 년간 전통의 구 서구열강들 중에서는 아무도 정복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결국 20세기 초에 미국에 의해 멸망하여 필리핀 영토로 편입되었으나, 잔존세력이 명맥을 유지한 채로 있다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군, 필리핀군, 일본군을 상대로 또다시 전쟁을 하였다.

필리핀이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후에도 필리핀 정부군을 상대로 계속해서 몇십년간 전쟁을 하였고 미군이 철수를 하고나서는 활동이 더욱 활발하여 민다나오 서부지역은 현재도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 술루 술탄국을 추종하는 반군이 존재하는 내전지역이다.
3.1.2.3. 부투안 왕국
남부 민다나오 동쪽에 자리잡고 있던 부유했던 불교계 상업왕국인 부투안 왕국에서는 금광[14]이 발견되었고, 몇백 년간 쌓아올린 부는 고대와 중세를 거쳐서 이어졌다. 도자기 및 각종 귀금속공예가 매우 발달하였다. 마젤란 원정대 생존자인 안토니오 피가페타의 기록에 따르면, 식기를 포함한 각종 생필품, 무기들, 일반 백성들의 집도 공예된 금이 도배되었던 것으로 유명하며, 영토가 작은 해양도시국가 부투안 왕국의 금 보유량은 동남아시아 도서부 수마트라, 말레이 반도, 말라카 해협에 걸쳐 있던 말라카 술탄국보다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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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맨해튼 박물관에 전시되었던 부투안 왕국의 유물. 현대 기술로 복원이 불가능하다.
부투안은 필리핀 제도 전역의 지배층들과 동남아시아 왕실들, 중동, 동아시아에 걸쳐 국제무역로를 형성했으며 숙련된 장인들이 만든 귀금속공예품들을 판매하면서 부를 축적하였다. 부투안 장인들의 명성은 스페인 식민지시대까지도 이어진다.[15][16] 중국 송나라 황실에 사절을 보내 황제 진종에게 보물들을 조공하고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의 동등한 수준의 외교적 지위와 무역권을 요구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면서 중국 정부와 직접적인 공무역을 열었다. 송 진종은 아라비아 특산품인 많은 수의 정향, 장뇌와 인도 노예들에 주목하면서 부투안의 무역망을 놀라워 했다. 무역으로 이어진 외교관계는 원나라시기에 절정에 달했다. 이를로 통해 마닐라-톤도의 대 중국무역의 독점력을 약화시켰고 지역 내 경제 강국이 되었다.

이후 중부 비사야 지방의 맹주 격인 세부 왕국과의 혼인동맹으로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귀금속 뿐 아니라 16세기까지는 광동식 도자기를 일본 다이묘들에게 판매했고, 무기 제작기술도 발달하여 중부 비사야 지방의 바랑가이 부족국가들에 대규모로 공급하기도 했다. 스페인에 우호적이었고 세부 왕국과 함께 가톨릭으로 초창기부터 개종한다. 이후 필리핀 도독령의 무역로 확보 및 갤리온 무역에도 큰 도움을 준다.
3.1.2.4. 마긴다나오 술탄국
남부 민다나오 중부에 위치한 이슬람계 마긴다나오 술탄국은 술루, 라나오 술탄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고, 이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스페인과 전쟁을 하였다. 민다나오 북부와 남부 해안선을 따라 대규모 군대와 요새를 배치하고 방어선을 형성했다. 스페인과 식민지 군대는 300년 가까이 이들과 긴 전쟁을 했지만 이 방어선을 제대로 뚫지 못한다.[17] 마긴다나오 왕조는 민다나오 중부 대부분의 평야지역을 보유해 드넓은 알짜 대농장들을 가지고 있었다. 열대기후와 함께 인구부양력도 높은 편이라 엄청난 수의 노예를 보유했고 이들을 농업에 종사시켰다. 가톨릭계 세력들을 분열시키고 스페인을 몰아내기 위해 개신교계인 네덜란드, 영국과 손잡고 그들을 상대로 무역을 하는 등 유연한 외교를 보여주기도 한다. 농업중심의 국가라 보유 영토 크기와 인구, 군사력에 비해 , 등 국고 보유량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마찬가지로 무역로 또한 다른 국가들에 비해 협소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화교상인들의 거주와 정착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이슬람 문화와 중국문화가 평화롭게 공존했고 몇 백 년간의 역사 동안 중국화교들과의 갈등은 한 번도 발견이 되지 않는다. 중국인들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황색깃발을 국기로 사용하였다. 400년 가까운 체제유지, 중국화교들의 영향 등 다른 필리핀 제도 국가들에 비해 관료제에 입각한 징병제가 발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다. 이슬람 왕국답게 상무정신이 발달했다.[18]
3.1.2.5. 세부 왕국
중부 비사야 제도에 있던 힌두교세부 왕국은 북부 루손섬과 남부 민다나오섬 사이를 잇는 교차로에 위치했다. 특산품 제조가 루손과 민다나오에 비해 별로 발달하지 못했으나 필리핀 정중앙에 위치해 교통이 원활하여 여러 무역품들이 오가는 곳이라 각국의 상단들에게 통행료를 받았고 필리핀 제도 지역 내에서 물류의 중계지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인지 안토니오 피가페타의 기록에 비사야인들은 금 보유량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투안 왕국, 와라이 부족 바랑가이들과 함께 스페인에 초창기부터 우호적 관계를 형성했다. 하지만 그뿐이였고 50년간의 스페인의 필리핀 정복 또는 회유 시도들이 모두 실패하여 진척이 없다가 세부가 스페인에 충성맹세를 하자 세부보다 더 부유하고 강성하던 파나이, 부투안을 포함해 보홀, 네그로스, 레이테, 사마르 등의 비사야 제도의 지역들도 모두 스페인 제국에 편입되었다.

금보유량이 많았던 기록과 함께 중국 사서에 세부는 '속부'라 표기되어있다. 이는 화교 상인들과의 교류로 인지도 있던 도시였기 때문이다. 특히 부투안 왕국과는 혼인동맹으로 사촌관계에 있었다. 동남아 강국인 태국 시암 왕가에서 세부 왕가에 안부를 전했던 기록도 남아있어 세부왕국이 스페인 도래 이전에 국력이 약한 정글 부족국가에 불과했다는 인식이 바뀌었다. 무엇보다 유럽인, 중국인 시각에서도 군사력이 강했던 술루, 마긴다나오, 라나오 등 모로인들과 오랜 전면전을 치렀다는 것 자체는 육, 해군이 모두 건재했음을 뜻한다. 중부 비사야 지방은 최전방에 있어 스페인이 오기전부터 이슬람 왕국들과 오랜 전쟁을 치렀던 적이 많이 있었던 만큼 스페인이 도착했을 때 그들이 살던 항구도시와 궁궐 또한 불탄후 목책으로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마닐라, 부투안 등 화려한 도시들과 다르게 금 보유량만 많고 도시가 그에 알맞게 발전되지 못한것이 설명되기 어렵다.

세부 왕국은 50년간 스페인 원정대들을 관찰한 후 스페인의 국력이 강성함을 눈치채자 스스로 신하이길 원하였고, 그와 동시에 중부 비사야 지방의 다른 바랑가이들도 빠르게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의 맹주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막탄 섬의 라푸라푸 등 일부 비사야인들은 스페인 원정대와 전투를 해서 이긴 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식민통치 이전부터 스페인에 호감을 보이며 가톨릭으로 쉽게 개종하였고, 스페인의 북부 루손섬의 톤도왕국 회유를 성공시키고, 마닐라 왕국을 공격시 원정에 참여하는 등 필리핀 도독령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후 스페인이 남부 민다나오의 이슬람 술탄국들과 전쟁시 비사야인들과 함께 국경과 해안방어를 하였고, 침공해온 개신교계 유럽 함대 및 남중국해의 각종 해적들과 전투시 참여하는 등 뛰어난 선원들과 전사들이 많아 스페인에 의해 자주 고용되며, 이후 250년 가까이 이어지는 갈레온 무역 등 태평양 횡단에도 꾸준히 참여하였다. 또한 비사야 제도 귀족층들은 콩키스타도르의 딸들과 지속적으로 통혼하였다. 이외에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지도층들과도 사무역 등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식민 통치 후반 까지도 대부분은 스페인의 충성파 세력들이었다. 중부 비사야 제도는 스페인과의 혼혈 빈도가 다른 지역보다는 그나마 높은 지역이기도 하다.
3.1.2.6. 중국계 상인 공동체들
팡가시난(Pangasinan,Fengcha-hsi-lan), 마이(Ma-i,Mindiro), 산다오(Sandao,Palawan)와 같은 거류 무역지에서는 많은 중국계 상인들이 정착촌을 형성해 중국 내륙과의 사무역과 밀무역에 종사했다. 적지 않은 일본인들도 같이 거류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필리핀 경제의 큰 특징은 토착화된 다국적 자본들의 중동, 인도와 중국 사이의 교역에 있었으므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중개인들이라 볼 수 있지만 이들은 중국과의 공무역권을 가지지 못했다. 당, 송, 원, 명과의 공무역은 마닐라-톤도의 루손인들이 가지고 있었다.

왕은 따로 없었고 주민자치조직 형태로 존재했다. 16세기 팡가시난 지역의 성채 도시 주변에 등록된 화교 인구는 2만 5천명 가까이 되었고 중국식 비단옷을 입은 부유한 상인들이 많이 존재했다. 이외의 외곽 지역에도 중국인 마을과 정착촌들이 팡가시난 곳곳에 존재했다. 중국본토에서 온 비주류 계층들이 기회를 잡으러 온 경우가 많았다. 일본 왜구들과 함께 원나라, 명나라 시기에 해적활동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수많은 중국인 출신 왜구를 배출한 곳으로 보인다.
3.1.2.7. 국가 이외의 지역
16세기 유럽인들이 도래할 시점에 도합 20여 개의 국가들이 존재했다. 이외에도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수많은 , 오지, 수천 개의 , 정글 등에도 적지 않은 인구가 분포되어 있었다. 소속이 없던 사람들인데, 네그리토 원시 부족들 이외에도 외국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나 탈주자들이 소속없이 산과 정글, 섬을 떠돌며 생활을 하던 경우도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러한 곳에도 여러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단위를 형성하지 않았을 뿐 이런 지역들도 철제무기로 무장한 흩어져있는 네그리토 부족 마을들이 강성하여 국가들이 쉽게 이쪽으로 영토 확장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지역들은 인구도 적지 않아서 10만 단위를 넘어갔다. 이들은 문명과 접촉한적이 있으면서도 국가를 형성하지 않고 마을단위를 고집하며 무법지대에 흩어져 자유롭게 살아갔다. 콩키스타도르들도 이들 정글전사들의 전투력이 분명히 강하다고 묘사해놓았기 때문에 쉽게 정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구인들의 기록에도 헤드헌터(Head hunter)라 분명히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들 네그리토 부족들이 이방인에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오는 경우도 용인하며 자유롭게 함께 사는 경우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3.1.3. 정치구조

16세기 스페인 도래 당시 필리핀의 정치체제는 상업적 질서를 바탕으로한 금권정치가 이루어져 있었고, 거기에 아시아 특유의 봉건제노예제가 함께 가미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여러 서양사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당시의 필리핀이 '복잡한' 정치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평가가 빠지지 않는다. 실제로 유럽인들이 접촉한 그 어떤 아시아 국가들 보다도 정치구조가 복잡하였다. 화폐경제가 발달되었고 상업을 중요시하는 중상주의 사회였다. 이는 아시아의 계통이 다양한 상인들이 몇백년간 주기적으로 오고가며 정착한데에서 만들어진 질서에서 기인한다.

스페인측 기록에 평민층(상인)들은 유아기에서 소년기 때부터 각 무역품의 시세와 화폐의 가치를 배우는게 보편적 문화였고 바이바이인 문자를 무역 활동의 기록에 활용하고 있었다. 금, 은, 귀금속 이외에 다른 금속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다. 16세기 필리핀 전역 곳곳에 진출한 각기 다른 스페인 함대들의, 시대별로 기록된 서로 다른 자료들에 스페인인들이 지나가는 모든 지역마다 금과 은이 화폐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공통되게 기록하고 있다. 참조: Scott, William Henry. Barangay : Sixteenth-century Philippine culture and society.[19] 또한 15세기 이전부터 동남아에 상인, 왜구용병으로써 진출했던 일본인들 또한 필리핀에 자주 배를 타고 입항했던바, 전국시대쯤 되면 이미 많은 일본인들이 필리핀에 금이 많다고 알고 있었다.[20][21]

한 왕국 안에서도 지역마다 바랑가이(Balangay)라 불리는 기본단위의 정치체제가 무수하게 있었고 규모는 작게는 인구 몇백의 마을부터 크게는 몇천명의 소도시를 바랑가이라 불렀다. 바랑가이는 고대 필리핀 단어로 '배'라는 뜻이다. 한 바랑가이에 있다는 것은 한 배를 탔다는 뜻의 해적, 상인과 같은 해양 민족적 성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바랑가이들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별도로 건설한 항구도시를 공유하며 상업이 발달하고 국제무역으로 늘어난 외국 상인,선원,호위 무사 및 노예 등 이민자들과 외국문화의 유입, 경제호황 등으로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산악지역까지 영토가 포괄되어 몇 만명씩 인구가 늘면서 국가화 되어갔다. 이때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던 독립적인 바랑가이들도 많이 존재했다.

한 국가안에서도 지방분권적 성격이 강하여서 왕을 중심으로한 중앙집권화된 수도가 있다기보다는, 각 바랑가이들은 농업을 위한 지방이 있었고 흩어진 각 바랑가이들의 많은 인구 수가 무역을 위해 공유된 해안가 항구에 모여 살았다. 왕 또한 항구에서 한명의 전사이자 상인이었고 각 세력 사이의 중재자 또는 통치자의 역할을 했다.

확실한 것은 최근 필리핀 역사가 깊이 연구되기 이전에는 필리핀의 역사가 문명이 발달되지 못했던 정글 원주민 부족국가들의 이미지로 여겨지던 것과는 달리 명나라는 마닐라, 부투안, 술루 등의 필리핀 지역의 통치자들을 천호장, 만호장, 족장, 호족 등이 아니라 왕(王)으로 불렀다. 사무역을 제외한 공무역도 2년에 1번 있을 정도로 자주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인 라자, 라칸 외에도 그 밑에 다투(Datu)라 불리던 영주를 겸한 거상들이 통치하던 군주제 사회였으나 중앙집권화 되지 않아서 왕권은 중간 또는 낮았으며, 노예계층을 제외한 왕과 귀족, 일반백성들 모두 상인 및 해적이었고, 각 제각기 사유재산사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한 징병제는 발달되지 않았으나 고용과 직업군인 문화를 바탕으로 용병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징병이 아닌 고용이 보편개념이었다. 식민지 이전의 필리핀 해적 용병들은 동남아 전역과 중국남부 등지에서 활약했다. 또한 실무중심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측의 기록에 루손인들은 관료, 지주, 통역사, 항해사, 선주, 해군 사령관 등 루손 섬의 인재들이 그대로 동남아 전역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포르투갈도 직접 고용했다.

명분보다는 각자의 이익이 일치할 때 함께 움직이는 귀족공화제적 또는 과두정의 성격이 강했다. 경우에 따라 한 왕국 안에 왕이라 칭해지는 사람이 두 명이거나 네 명인 채로 몇 백년간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으며(술루 술탄국, 라나오 술탄국), 한 국가 안에서 상인들이 각자 보유한 무역로에 따라 가진 영향력이 중첩되어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 되어 왕국 전체를 돕는 형태였기 때문에 정치적 명분과 종교, 파벌로 인한 신학적 갈등이 존재하면서도 이익 앞에 협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닐라는 다양한 종교가 허용되던 곳이었다. 마닐라 왕국 또한 마닐라 항구를 중심으로 톤도, 카인타, 나마얀 등의 도시들과 외곽의 여러 문화적 계통의 바랑가이 귀족들의 연합체였다.

여러모로 스페인이 오기 이전부터 아시아 안에서 해양 자유도시의 성향이 강했는데, 실제로 본국에서 계급이 낮았던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필리핀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도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필리핀은 지속적으로 호황상태였다.[22]

왕은 돈이 매우 많고 영토에 상업적 이익을 가장 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져다 주는 상인이어야만 했다. 더군다나 그러한 사람이면 외부에서 왔을지언정 토착세력에 의해 상징적인 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다. 이는 필리핀 역사가 다른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역사와 크게 구별되는 특징이다. 외부에서 온 자가 왕으로 옹립될 요소는 매우 다양한데 다른 동남아 국가와의 혼맥이 되었던[23] 이슬람계의 고귀한 혈통이던, 스페인처럼 금광과 이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던, 말라카와 같은 무역중심지에서의 이름높던 상인이던 왕이 될 여러 요소들은 반드시 외교관계, 그리고 국제무역으로 연결되어 이익을 창출했다.

이외의 왕의 자질인 지역 내에서 1.돈이 많고, 2.군사력이 강하며 3.보유한 노예가 많고 4.정치능력이 뛰어나고 5.내정능력이 뛰어나고... 6.보유한 영지가 많다 7.기타 등등 이러한 요소들은 지역 내의 쟁쟁한 토착 귀족들도 가지고 있던 요소들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자들이 왕으로 추대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대표적인 첫번째 예로 술루 술탄국의 초대 왕은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이었다. 동남아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자신이 보유한 상단을 이끌고 말라카 해협을 지나 필리핀 제도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술루지역에 당도했는데 기존의 이슬람계 토착왕국과 귀족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규모 군대가 아닌 작은 상단을 이끌고온 무함마드의 방계후손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귀한 혈통이라는 이름값으로, 기존세력들은 이슬람 네트워크에 깊이 접근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컬버린, 화승총 같은 것도 아라비아로부터 일찍부터 도입했다. 청나라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술루 술탄국엔 몇백년간 왕이 2명이었다. 하나는 기존 토착세력들의 기존의 왕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함마드 후손인 명목상의 왕이었다.

두번째 예로는 필리핀 도독령, 바로 스페인이었다. 필리핀인들과 문화도, 인종도, 종교도 완전히 다른 스페인인들이었고 총 5번의 스페인의 공식적 정복시도들이 실패하였으나 결국 기존 절반 이상의 토착 왕국들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였다. 결국 스페인 기록에 이들이 스페인 국왕의 지구반대편에 있는 신하로써 표현된 것은 스페인인들이 당대 유럽 최고의 국력과 더불어 신대륙 영토와 그 광산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고 있었고 동서양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스페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있어 몇백명의 매우 적은 병사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왔기 때문에 라푸라푸의 사례와 이후 4번의 원정 실패에서 보듯 몇 백명의 스페인군을 제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토착왕국들은 스페인의 신하가 되길 원하여 그들로부터 높은 자치권을 받는 동시에 스페인에 중국 및 아시아와의 기존 무역로를 제공하고 스페인의 아시아 항해, 태평양 횡단, 아메리카 개척, 갤리온선 건조, 아시아 정복[24]에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며 협력하였다. 또한 그 자치도는 매우 높아서 심지어 초기 100년간은 마닐라에 살던 무슬림들도 이슬람교 복식과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여러 임금 이외에 필리핀 도독령은 주기적으로 250,000페소의 태평양을 건너온 금을 제공 받았다. 물론 이러한 상호 협력관계는 식민지 후반이 되면서 뒤집혀져 그때부터는 필리핀이 착취를 많이 당하게 되었다.

그 많던 세력 중에 19세기까지 살아남은 세력들은 필리핀 도독령, 술루 술탄국 둘 뿐이다. 기존 왕국들의 기록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다른 수많은 세력들의 연대기가 남아있지 않다.

3.1.4.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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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인들의 갑옷
7000여 개의 섬들 사이를 이어주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나라가 나오지 않고 각 지역별, 혹은 섬들별로 여러 국가들이 할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서로 해적질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스페인이 도래해서 가톨릭으로 종교적,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전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반면에, 필리핀 제도의 각 중소국가간 회의 또는 연합체를 구성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서로 교류 내지 동맹을 맺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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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대항해시대 해상전투에서는 크기가 큰 배들을 떠올리기 쉽지만 동남아 해역에서는 커다란 배는 물론이고 선회식 화포를 탑재한 작고 빠른 군선들로 복합적이고 유동적인 진형을 활용한 전술들이 매우 위협적이였기 때문에, 보물을 가득 실은 커다랗고 느린 범선들은 이들 작은 군선들의 하단부 공격을 피하기 위해 후방에 빠져 타이타닉처럼 몸을 사려야 했다. 높이가 낮은 어선수준의 작은 배에 화포를 탑재한 것인데, 당시로써는 고도의 목공기술이 필요하였다. 임진왜란 시기의 중형에 속하는 세키부네 또는 명나라 군선들이 화포를 장착하여 쏘면 충격에 못이겨 배가 갈라지기 시작한 연유로 화포를 사용하는 것을 꺼렸던 것에 비하면 인도네시아, 필리핀은 소형 어선들에도 화포를 탑재할 정도로 당시 꽤나 정교하고 발달된 선박 건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 배의 양식들은 중국식, 인도네시아식, 말레이식, 태평양 원주민 양식 등 매우 다양한 편이였고 지붕이 있고 화살을 막을 수 있는 것부터 없는 것, 소형 카누부터 대형 상선까지 크기 또한 천차만별이였다. 이후 스페인은 필리핀에 대규모로 갤리온선 건조를 수주하게 한다. 스페인의 하드웨어와 필리핀의 소프트웨어가 합쳐진 견고한 갤리온선들은 스페인 해군이 17세기 초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이전에 볼 수 없던 위용과 전적을 과시하며 몰락하던 스페인이 해상 안보를 안정화시키고 중흥을 마련하게 하는 발판이 된다.

일본과 같은 섬나라이고 지방분권체제라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은 열도라 4개의 큰 섬들이 붙어있는 반면, 필리핀 제도는 크고 작은 7000개의 각 섬이 떨어져 있고 제각기 문화권과 언어, 종교, 민족이 다르고, 일본은 신토천황이라는 정신적, 명목상의 하나된 구심점이 존재하였고 유교의 영향을 어느정도는 받아 때때로 정국이 안정되고 평화기가 도래했던 반면, 필리핀은 이슬람, 힌두교, 불교 등 아시아의 메이저 종교들에다 애니미즘까지 난립하여 서로 상업, 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경쟁하던 상태라 그러한 중앙 집권적인 정부가 들어설 요인이 부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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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오기전부터 16세기 초중반에는 이미 필리핀 전역에서 컬버린, 란타카 등을 포함한 크고 작은 화포사용이 보편화 되어 있었다. 화승총도 거래되고 있었고 일부는 화승총을 자체생산하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필리핀은 이슬람 네트워크, 포르투갈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러한 연유로 필리핀 제도 및 남중국해, 스플래틀리 군도, 인도네시아를 거쳐 말라카 해협까지 이어지는 이곳은 다국적 해적들 사이의 전쟁이 일상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필리핀 해적들로 인해 포르투갈 상선들도 털린 기록이 남아있으며, 한 스페인 관료는 필리핀인들이 아이언 우드로 만든, 좌우에 윙을 달고 화포를 탑재한 가볍고 견고한 군선들을 극찬한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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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 아웃리거 군선들의 스페인측 기록화. 원양 항해가 가능한 태평양 원주민 양식인 아웃리거를 포함하여 크고작은 다양한 양식의 배들이 존재하였다. 아이언우드 재질이었고, 길이는 10m~30m.[25] 속력은 시속 15노트(knot)에 달했다.[26] 화살을 막는 방어자재들을 달았고 승선인원은 40명~200명이었다. 속도가 빠르고, 선회력이 좋고, 높이가 매우 낮아 여러 척이 각자 변칙 각도로 빙빙 돌며 적선에 접근하기 시작하면 적선이 우왕좌왕하여 원거리에서 정밀타격은 매우 어려웠다. 각도 조절이 용이한 선회식 화포는 1~5문으로 달았는데, 빠르게 접근해 적선박 최하단부를 격발하면 침몰이 100%였기 때문에 네덜란드[27], 영국[28], 스페인[29], 포르투갈[30] 함대들도 모두 여기에 당했다. 스페인은 필리핀을 제국에 편입시킨 후 해안방어에 사용하였다. 단점은 추운 바다에서 사용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또한 필리핀 제도는 다국적 상단들의 다국적 용병들이 드나들던 곳이라 일본 열도에서 온 왜구들이 동남아로 갈 때 통과하던 경유지점이기도 했다. 지리상 필리핀은 동아시아에서 동남아로 가는 중간지점에 있고, 대만은 중국정부의 일본인에 대한 쇄국정책의 입김이 미치던 곳이라 접촉하기 용이하지 않을 때가 많았고, 상대적으로 무역등에 있어 자유롭고 여러 민족에 개방적이던 필리핀 제도에서 중국 화교들이 많이 거류하던 팡가시난에 옛날부터 일본인들도 거류하고 있었다. 실제 후기 왜구들은 중국인, 동남아인, 포르투갈인 등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활동무대가 동남아, 중국 해역, 한반도[31]까지 기록이 다양한 곳에 드러난다.[32][33] 왜구들과 활동을 같이 하기도 했으며 마닐라, 톤도 왕국 군대가 왜구들과 함께 태국 시암 왕가와 미얀마 사이에 전쟁이 있을 때 용병으로 고용된 기록도 있다. 일본 본토의 아시가루들의 월 봉급이 1칸 55유이었고 필리핀은 금, 은, 보석을 지급하고 이외의 다른 금속화폐는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당시 화폐차이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일본 무사계층들이 당시 목숨을 걸고 동남아에서 지속적으로 용병으로 활동한 것은 돈을 얻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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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개인의 검술 스타일에 따라, 전장에서의 포지션에 따라 선호도에 맞춰 검의 모양과 크기를 맞춤 제작하던 전통이 있었던 전문 칼잡이들이였다.

섬나라와 정글이라는 지형상 창술, 기마술보다는 검술이 극도로 발달하였다. 당시의 토착검술 중 이도류 검술의 흔적이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칼리 아르니스라고 불린다. 서구에서는 인기가 높은 무술이며, 현대에 와서도 필리핀군과 미군이 연합 훈련을 할 때 칼리 아르니스는 훈련 플랜에 자주 들어간다.[34] 사용되는 칼들은 인도와 동남아, 아랍식 등 다양하지만 검술 그 자체는 칼을 들고 싸우는 전통 무에타이크라비 크라봉과 비슷하다. 그 안에서도 실전적인 동작들만 가져온 것과 같다. 사실, 영연방에서는 구르카 용병이 꽤 유명하지만 필리핀군 또한 당대 슈퍼파워였던 스페인이 300년간 돈을 주고 독점고용을 할 정도로 인기 높던 해군이였다.

스페인이 오기 이전에는 각 국가들의 군대들은 말라카, 동티모르, 시암, 미얀마, 브루나이, 포르투갈 등에 금전을 지불받고 용병으로 고용된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대부분 동남아 역사에 기록된 왕실 단위의 고용이였고 각국의 민간 상단 또는 해적들과의 고용, 동업을 하는 형태라면 수 백년간 셀 수 없는 거래가 오고갔다. 군사 활동영역은 동남아 최서단, 최남단, 중국남부 등 동남아 전역과 동아시아 일부에 걸쳐 있었다. 스페인이 오고나서는 캄보디아 왕실에서 고용 의뢰가 들어온 기록이 남아있다.

각 왕국의 군사동원력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나 당시의 기록을 토대로 추정하면 막탄 섬의 소영주였던 라푸라푸마젤란의 200여 명의 스페인군을 상대로 막탄섬 방어에 동원한 병력이 대략 1000~1500명으로 추정된다.[35][36][37] 막탄섬은 매우 작은 섬인데, 세부 왕국 전체의 군사 동원력은 막탄 보다 최소 몇 배에서 십수 배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략 센코쿠 시대 다이묘들과 비슷한 병력동원력을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금전을 더 많이 사용시 정글에 사는 네그리토 궁수들 까지도 추가로 고용할 수 있었다. 각 왕국들의 용병활동 기록이 동남아 역사 전체에서 발견되지만 전면전 기록은 별로 드러나지 않는데, 국제 무역관계로 인해서인지 전면전은 지양하는 경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용병업, 해적 활동 이외의 방어전에서는 군사력이 온전히 발휘되는 병영국가의 모습이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상업왕국인 술루 술탄국의 군사동원력은 식민통치 말기 기준으로 15만명이었다. 330여 년간의 인구증감율을 감안하더라도 일개 지방으로써는 큰 수치이다.

1405년 영락제명나라가 군대를 파견해 침략을 시도한 적이 있다. 수군 도독 정화의 대규모 해상원정 시기와 일치한다. 확실한 것은 마닐라 지역이 일시적으로 함락되었고, 점령 후 얼마간은 지방관을 파견했다고 되어있다. 이후에 대한 역사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십수년 뒤의 기록을 살펴보면 힌두교 세부왕국과 마긴다나오 사이에 전쟁을 계속 하고 있는 등 건재한 모습을 보여준다. 바이바이인 문자는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었고 필리핀의 여러 왕국들의 해상활동도 꾸준하게 발견된다. 150여 년 후, 스페인 도래시기에도 상업으로 번성하여 건재함이 발견된다. 즉, 명나라의 필리핀 정복 시도는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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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바랑가이들은 무기 이외의 방어구는 각종 재료들을 가공한 갑옷들을 제작했다. 스페인 원정대 생존자인 안토니오 피가페타의 기록엔 다양한 재료[38]와 여러 방식으로 가공을 거친 갑옷들은 상상 외로 단단하고, 창이나 단검으로 찔러도 꿰뚫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유럽 최고의 스페인산 강철이 필리핀 갑옷에 통하지 않았단 얘기. 갑옷들은 철이 아닌 만큼, 뜨거운 햇빛에 거의 가열되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철이 아닌 가공한 재료들로 제작되어 비를 맞아도 녹슬지 않았다. 대부분은 경갑옷이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중갑옷은 팔꿈치와 무릎까지 내려온다고 되어있다. 현재 대부분 썩어서 남아있지 않으며, 경갑옷은 일부 몇개 남아있다. 스페인 마젤란 원정대가 왔을 때 모두 오지 원주민 마냥 헐벗은 채로 싸우는 것으로 묘사된 기록화들은 모두 허구이다. 다만, 실력 좋은 자신감있는 전사들은 더 큰 민첩성을 위해서 갑옷을 벗고 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시에는 금으로 만든 칼집이나 손잡이, 각종 장신구를 착용한 평상복 차림으로 외국 무역선들을 의전하였다. 금으로 장식된 필리핀 은 당시 필리핀과 무역을 하던 일본에서 골동품 유물로 발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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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다이 번다이묘다테 마사무네유품으로, 이 금 장식이 된 검들은 필리핀에서 센다이 사절단에게 판매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상단은 전형적인 토착양식이고 하단은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기본적으로 해적이였기 때문에 해군을 겸한 보병이 군대 그 자체였다. 대개 전투는 바다, 해안, 시가지, 정글 순으로 이루어졌다. 그 어떤 곳도 기병의 효용이 떨어지는 지형의 연속이라 기병이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베어내도 금세 우거져 버리는 열대 정글의 존재와 화산으로 형성된 산맥들이 균일하지 못하고 들쭉날쭉 복잡한 지형이였던 데다 그 안에 수천에서 수만 단위의 인구로 살고 있는 네그리토 전사들의 존재는 기병의 필요성을 없앴다. 그리고 섬과 섬이 이어져 있지 않고 수많은 섬으로 쪼개져 있는 군도 특성상 바다를 천연 교통로로 활용하는게 더 편했고 대부분은 전쟁도 육로가 아닌 바다로부터 상륙을 통해 공격해왔다.

타국 해안가나 항구를 약탈할 때도 군선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점령하여 약탈을 마치고 빠지는 전술을 사용했다. 기병이 없었기 때문에 목축 또한 양돈 이외에는 의미 있게 이루어지지 않았다.[39] 전면전은 방어전인 경우가 많았고 해외 원정을 가는 경우엔 대개 중소규모 용병단으로 참전하였다. 애초에 전투의 목적이 돈을 버는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농민 징집병이 대부분에다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이 목적이였던 주변국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점이다. 필리핀 각 중소국가들은 상인, 해적들이 모여 규모가 커져서 제각기 국가화된 것에 해당하기 때문에 농경 민족단위에 왕을 중심으로 중앙집권화된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과 그 시작이 다른 해양민족이였다.

3.1.5. 경제 및 문화

고대부터 필리핀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접경지역에 있어 다국적 자본의 교차로면서 중국으로 가는 주요한 길목에 위치했던 연유로 예로부터 중국인, 아랍인, 인도인, 페르시아인, 크메르인, 태국인, 말레이인, 베트남인, 참파인, 일본인, 대만인, 류큐인, 자바인, 바자우인등 다양한 이방인들이 오고갔으며 이들이 각 섬에 정착하기도 했는데 지배층과 피지배층, 노예 간의 인종 구분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지역별로 특정 인종, 문화권이 우세했던 인도차이나 반도와 다르게 필리핀 제도는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권의 인종들이 비교적 균일한 숫자로 거주하면서 상업, 전쟁 등으로 경쟁했고 그 결과는 대체로 인도 및 이슬람계 문화권 출신들이 전후반기 모두 우위를 점하였다.[40] 단적인 예로 크메르계 인구의 우세 속에 크메르계 문자를 쓰던 태국, 중국계 인구의 우세 속에 한자를 쓰던 베트남과 달리, 필리핀 제도는 인도, 아랍계의 바이바이인 문자를 사용했다.

상술했듯 스페인이 도래하기 이전부터 , , 귀금속 등의 화폐경제가 발달했으며 다른 금속화폐들은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당시 필리핀의 경제적 구조는 폐쇄성보다는 개방적 성격이 매우 짙은 자유로운 무역을 했던 것으로 분류된다. 일단 스페인 도래 이전 기준으로도 매우 부유하였고, 스페인의 기록상 마닐라, 부투안 등은 동남아시아 내에서도 가장 많은 금을 보유하고 있던 곳 중 하나였다.

중계무역지로 유명해서 이전부터 다국적 상인군인들의 잦은 왕래, 정착이 이루어졌다. 역사적으로도 그들 사이의 혼혈이 자주 이루어졌고, 필리핀인은 특정 민족계통의 한가지 뿌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필리핀 역사가 다른 동남아시아 지역들의 역사흐름과 구별되는 독특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한 비슷한 배경은 실크로드의 중앙아시아 다민족 국가들과도 유사하다.[41] 실로 혼혈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동남아시아 여러 남방계 민족들을 중심으로, 북방계[42], 중동, 남아시아[43], 이후에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유럽 혈통들도 조금씩 얹어져 많은 인구가 유럽인과 간접혼혈이 되는 등, 서양과 동양, 남방계와 북방계, 그리고 아메리카 인디언을 망라한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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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로 추정되는 유골들과 함께 발굴된 부장품들과 다량의 금화들이 측정 결과 순금에 가깝다고 한다. 이들은 매장시 자녀들의 상속분과는 별개로 금화를 함께 매장할 정도로 금이 매우 많았다. 특히, 부투안 지역은 금 보유량이 동남아 내에서도 가장 많던 곳 중 하나였고 안토니오 피가페타와 스페인측 기록에 일반 백성들도 금으로 만든 생필품들과 실내 장식품들을 사용하고 있었던 기록들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이 유물 발견, 발굴 등을 통해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더욱더 교차검증되고 있다.

필리핀제도는 주요 지진대인 불의고리에 속해있고 규모있는 태풍, 지진이 자주 일어난다. 따라서 다른 동남아 국가들이 화려한 궁궐과 건축물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반면, 당시 스페인인들의 기록에 남아있는 마닐라, 부투안 등의 화려한 궁궐이나 건축물, 그리고 도시들은 소실되면서 스페인 건축물들로 대체되었다. 그렇기에 건물의 양식이 정확히 어떠했는지는 현재로써는 찾아볼 수 없다. 당시 무역품들을 태풍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어떤 형태의 건축물을 세웠는지도 남아있지 않다. 스페인 식민통치기 지배층들의 건물은 스페인식으로 대체되어 명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현재 유물로 남아있는 건 도자기, 화포를 포함한 무기, 금화, 은화, 귀금속 장신구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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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미국 식민지 시대 루손섬 볼리나오 지역에서 발견된 두개골(Bolinao Skull), 귀족층 유골로 추정되는 67개의 두개골 모두 치아가 다양한 양식으로 금장식이 되어 있었다. 귀족층들이 이빨을 금으로 장식했던 것은 스페인 기록에서도 교차검증되며, 필리핀 최남단에서 루손섬 중부까지도 확인되는 공통된 문화였다. 흔히 매체에서 언급되는 보물섬이란 원래 대항해시대의 필리핀이였다.

상업 왕국들이 주변국들의 기록과 고고학적 발견으로 교차검증이 되는데, 주로 해적 활동을 동반한 국제 무역이 활발하게 나타난다. 주요 무역 상대국은 전반기엔 동남아시아 전역과 인도, 중국이었고 후기로 가면 이슬람포르투갈 상선들도 주요 대상이 된다. 전반기에 많은 인구집단이 문명이 발달되지 못한 원주민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았고, 후반기로 갈수록 번성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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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8년 스페인측의 기록화. 마닐라, 톤도의 루손인(Luzones) 귀족계층들. 소위 인도, 아랍, 말레이 등이 혼혈된 계통들이 중핵을 담당하던 지배구조는 식민통치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고 중국인들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식민통치 말기이다.

국제 무역구조는 루손 섬의 마닐라, 톤도 왕국이 독점적으로 중국 정부 및 민간상인들로부터 도자기, 비단, 벨벳, 철광석, 장뇌, 백단향, 각종 사치품 등 중국산 제품들을 대량으로 구입해 보유하면서, 필리핀 제도 지역 내 각 상업왕국 및 바랑가이 국가들에 판매 및 재분배하였다. 각 국가들은 이것을 보유하고 있다가 동남아, 중동, 인도에서 온 상인들에게 판매하면서 차익을 남겼다. 혹은 역으로, 인도, 아랍, 동남아의 상선들로부터 각종 향신료, 옥돌, 사치품들을 대량으로 구입한 후 필리핀 제도에 거류하고있는 화교들에게 판매하면서 차익을 남겼다.

이렇게 형성한 무역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이후에는 무역 허브였던 말레이 반도에 진출하였고 그곳에서 루손인들이 모든 아시아의 상인들 중에서 두각을 드러내면서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말레이의 정치, 군사, 상업 등 모든 분야의 내정에 깊숙히 관여하였다. 말레이 반도의 향신료 대농장, 선박, 무기 공방 들의 많은 수가 루손인들이 소유주였다. 당시 필리핀인들의 재산은 필리핀 제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말레이 반도에서도 내정간섭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기반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포르투갈의 말레이 반도의 수월한 식민지화는 포르투갈과의 무역로를 연결하여 말레이를 식민지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루손인들과 연결고리가 있다. 이후 필리핀 중부 비사야 제도에 있던 비사야인들은 스페인을 자발적으로 불러오고 별다른 큰 전투없이 쉽게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비사야인 귀족층들은 콩키스타도르들과 통혼하면서 스페인 제국의 신하가 된다. 그리고 포르투갈스페인은 유럽 내에서 같은 왕의 통치를 받는 동군연합이 되면서 이베리아 연합을 형성하여 60년간 한 국가가 된다. 이때 포르투갈은 루손인들의 도움을 받아 명나라로부터 중국 영토인 무역기지 마카오를 하사 받고 공무역 시장을 열어버린다. 필리핀인들은 대항해시대 내내 유럽-아시아-태평양-아메리카-대서양 사이를 연결하는 당시의 최초의 세계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또한 필리핀인들은 동남아, 남아시아 시장에서 중국산 물품들을 큰 규모로 밀수하던 공급자 세력이였다. 남중국해에 창궐한 해적들로 인하여 동남아 주요 국가들이 모여 형성한 국제함대의 사령관 또한 루손인들이 차지했고 그 선박들 또한 루손인들이 선주로 있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들의 이익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계통이 다양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루손인 용병단은 동남아 각국의 주요 전쟁마다 진영을 가리지 않고 용병으로써 참전하였다.

당시 루손 옹기 또는 항아리는 비간 지방의 A급 점토를 가지고 고온에서 구워졌는데 열대지방에서 보존식품이나 찻잎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더운 열대지방에서 식품을 장기보존이 가능한 항아리로 송나라시대부터 루손에서 일본에 팔리기 시작하여 천황, 다이묘들이 귀하게 여긴 기록이 남아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호평을 받은 기록도 남아있다. 필리핀 원주민과 중국식의 혼합 기술이기도 하다. 미학적으로 예쁘지 않지만 되려 일본 전통 미학인 와비사비(불완전 속의 완전함)와 기능성으로 당대 일본에서 인정을 받았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일본 가문들에서 가보로 내려오는 골동품이기도 하다. 몇 백년간 일본에 수출되었는데 특히 16세기까지 일본의 많은 은화가 루손으로 유입되었다. 스페인이 도착한 당시에 필리핀이 이것만으로도 많은 이익을 얻고 있었음이 기록되어있으므로 당시 필리핀의 부유함을 가늠할 수 있다. 루손인들의 도자기는 스리랑카에서도 상당히 많은 유물로 발굴되었으므로 주요 시장은 인도 문화권이였다. 예술품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동아시아의 도자기들보다 생긴건 영 떨어지지만 열대지방에서 장기보존이 가능한 기능성으로 유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열대기후 속에서 1년 내내 생산되는 말린 과일과 어육, 쌀, 면화, 설탕, 밀랍, 꿀 등 농어업 생산물을 규모있게 저장하고 있었고, 주변국에 기근이 들거나 할 때 외국 상선들에게 이것을 식량으로 판매하였다. 농사 방식은 대부분 정글 사이에서 화전(농업)으로 이루어 졌다. 산간 오지 지방에서는 계단식 쌀농사와 관개농업도 발견된다. 식량자원의 주요 거래대상은 광동성, 푸젠성을 비롯한 중국 남부 해안도시들이었다. 이 해안도시들은 중원과 달리 평야가 매우 적고 산지로 둘러싸인 지형이 많아 날씨가 더움에도 불구하고 예로부터 농업 수확량이 많지 않았고 특히 복건성(푸젠성)민들은 과거 급제만큼이나 상업에 종사하여 부유해지는 것을 중요시하여 해외 진출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푸젠성은 역사적으로 많은 수의 과거급제자와 해외 화교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고대로부터 20세기 초까지 필리핀에 진출한 화교들 80%이상이 복건성 출신이었던 것은 어떤 연결고리가 있었는지는 모르나 이러한 전통적인 무역 관행이 연관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외모상 차이가 있어 괴리감이 있을 수는 있지만, 유전자 연구분석에 따르면 필리핀인 유전인자의 30%가 동아시아계인데 이 유전인자들은 80%가 광동성도 아닌 푸젠성 지역과 일치한다고 한다. 고대로부터 푸젠성으로부터 필리핀으로의 꾸준한 교류와 이민이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또한 이것은 중국인들이 동남아시아에 이민할 정도로 당시 상업이 발달했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필리핀인들의 많은 수는 네그리토, 오스트로네시아인 뿐만 아니라 푸젠성민들의 혼혈된 후손이라고 보아도 손색이 없다. 유전인자에 높은 비율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외국 상단들은 항구에 정박 또는 통과 시 통행세를 냈다. 이것도 주요 수입 중 하나였다. 무역시 담보 대출을 해주기도 하였는데, 주요 사신단의 인질 및 각종 귀금속 장신구, 일부 선박 등을 담보로 하였다.

각 상업왕국들은 인장 문화가 발달했다. 외국 상단들이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각 상단들의 신분확인을 위해 도장이 찍힌 문서들을 보여주어 국적을 확인하였다. 부투안 왕국의 인장이 발견되어 남아있다.

필리핀 제도의 금과 은, 보석들은 많은 인구를 보유한 중국대륙에서 특히 희소 가치가 높아졌기 때문에 꽤나 쓸모있는 수출품이었다. 부투안 왕국은 금, 은 귀금속 공예품들을 세공하는 기술이 발달하여 동남아, 아랍, 인도 왕실들에 전문적으로 판매하기도 하였다. 남부 민다나오 이슬람 왕국들은 은을 도금한 도자기들을 다른 이슬람 네트워크에 속한 국가들에 판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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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8년 비사야인(Visayans) 귀족계층 및 평민들. 자세히 보면 평민들도 금 귀걸이 등을 하고 있다. 귀족층들은 100여 년간 백인 메스티소들과의 통혼을 통해 피부가 희다. 이는 비사야인 귀족층들이 콩키스타도르들의 딸들과 통혼했음을 뜻한다.

상업이 발달한 만큼, 자연스레 도적들이 형성되기 마련인 바. 스페인 기록에 이들은 일본 왜구들과 비슷하게 일종의 정기적인 계절적 행사처럼 함대를 구성하여 다른 동남아 국가들의 해안가 마을이나, 무역선을 털러 가는 등 습격(Raid)을 통해 약탈경제에도 종사했다. 또한 사로잡은 포로들로 노예무역이 크게 성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연스레 상무정신 또한 발달했고 이러한 활동들은 중부 비사야 제도나 남부 이슬람 왕국들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스페인은 필리핀 도독령을 구성하고 나서 노예제를 금지시키고 이러한 활동을 그만두게 했다. 이건 스페인이 착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광범위한 중계 무역로를 더욱 안정화시키기 위해서였다.

각 국가들의 복식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대개 노예를 제외하면 평민층부터 왕족까지는 비단벨벳, 면 등으로 옷을 만들었는데 어떤 국가는 긴바지, 긴팔인 반면, 어떤 국가는 반팔, 반바지이고 중국식, 이슬람식, 토착 원주민식 등 다양하고 독특한 양식이 드러나기 때문에 이 시기의 전통 복장이 일률화 되어있지 않다. 다만, 공통적으로 각 국가의 노예계층만 뺀, 평민층부터 왕족에 해당하는 계층들은 전투시를 제외하고 일상생활에서도 금 귀금속 공예품을 치장하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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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의 노예계층과 우측의 잠발레스 출신 사냥꾼들. 이들도 무릎에 금발찌를 차고 있다. 일본 전통의상이기도 한 훈도시를 착용하고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필리핀의 오스트로네시아인 문화이다. 일본 사쓰마 지역에 위치했던 고대의 구마소가 오스트로네시아인 집단으로 본다.

노예계층을 제외한 평민층부터 귀족층은 바이바이인 문자를 통해 글을 공부하는 문화가 보편적이었고, 주로 무역 활동의 장부기록과 타국에 문서전달 용도로 용이하게 사용하였다. 학문 발달은 어느정도인지 알 수가 없다. 베트남처럼 과거제도가 있었다는 기록도 존재하지 않으며, 이슬람, 힌두교, 남방 불교 서적을 학습했다는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글자 공부에 계층차별이 없었고 누구나 읽을 수 있게 했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당시 서적들이 보존성이 약한 패엽으로 기록되었고 식민통치기 유럽의 로마자로 대체된 후 시간이 지나면서 전부 소실되었다. 스페인이 가톨릭 국가인 특성상 타 종교에 관용적이지 않았던 점도 기록 소실에 한몫 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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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스페인인들이 이들이 어업에 종사하는 것을 보고는 모든 종류의 어업에 능숙한 어부들이라 되어 있다. 이 시대의 필리핀인들은 수영의 달인들이기도 했는데,[45] 오늘날에도 그들의 조상들처럼 태풍 속에서 바다수영이 가능한 사람들이 있으며, 최대 70m까지, 10분 넘게 아무런 잠수장비없이 잠수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바자우족이 있다. 이후 같은 스페인 제국 영토의 아메리카로 이주한 필리핀인들은 그곳에서도 대대로 어부로 유명했었다.

비사야 지역 사람들은 스페인 도래 당시 정교하고 세밀한 문신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몇몇 한국 사학자들(이도학 교수가 대표적.)과 재야사학자들은 백제의 담로중 한 곳인, 흑치상지의 출신국인 흑치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46] 사실, 백제와의 연관성은 보이지 않는다. 백제인들이 수많은 다국적 상인 중 하나로 왔을 가능성은 있으나 인도계와 중국계 만큼의 뚜렷한 족적은 커녕 흔적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일본과의 연관성은 어느정도 찾을 수 있으나 그것도 인도, 아랍 등의 주류가 아닌 비주류로써이다. 일본인들이 지배한 흔적은 하나도 없고 인도, 아랍 및 말레이 계통들이 모두 20개가 넘는 국가들의 지배계층으로 내내 있었다. 간간히 왜구들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금, 은 등을 노리고(…) 꾸준히 왔던건 분명히 맞는데, 알려진 명성에 비해 다른 세력들을 압도하거나 하진 못했다. 도요토미, 도쿠가와 정권 모두 필리핀을 정복하려 했으나 둘다 포기한다. 영락제는 필리핀에 출정했으나 결국 정복에는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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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인 네그리토들. 5~9만년 전부터 정착하기 시작했던 필리핀 흑인 계통의 선주민들이다. 오늘날 필리핀 사람들의 뿌리라고 볼 수 있다. 필리핀 네그리토는 현재까지 발견된 세계 여러 인구집단 안에서 멸종된 고인류인 데니소바인 유전인자 비율이 가장 높은 인종그룹이다. 몸집이 두터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데니소바인들이 섬에 정착하여 호모 사피엔스 중 피부가 검고 몸집이 작은 계통의 원주민들과 혼혈되고 섬환경에서 몸집이 작게 진화된 것으로 보인다. 데니소바 유전인자가 대략 5%로 매우 높은 편인데, 이는 증조, 고조, 현조부까지 올라가면 훨씬 높은 비율의 데니소바 필리핀인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스페인이 필리핀에 도착했을 500여 년전에는 오지 지역에 데니소바인 유전인자가 50%에 가까운 일부 집단들도 있었을지 모를 일.[47][48]
필리핀 도독령을 설립한 미겔 로페즈 데 레가스피 기록엔 네그리토들은 철제도구와 무기들을 사용했고 정글속에 매복에 능하고 특히 궁술이 매우 빠르고 정확한 기량이 뛰어난 '무시무시한 전사들'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중남미 대륙을 몇백명으로 무쌍을 찍고 정복한 콩키스타도르들이 인정한 강한 전사들인 셈이다. 네그리토들은 최소 언어가 다른 150개가 넘는 부족들이 있었고 같은 부족 안에서도 내부분열이 잦아 조직화 및 통합되지 못했다. 그래서 개개인은 뛰어난 전사였으나 전투시 진을 제대로 형성할줄 모른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들 부족장들 대부분은 스페인에 회유되어 엔코미엔다 자치제도에 장기적으로 편입된다. 이후 필리핀 도독령은 인도네시아 일부, 브루나이, 대만 등을 공격하고 점령하는데 콩키스타도르들은 갑옷도 입지 않는 네그리토 궁수들을 금을 지불하고 용병으로 많이 고용했다.

동남아시아의 도서부 지역들은 육로를 통한 내륙 간의 용이한 교류를 이어나갔지만, 필리핀 제도 지역은 이런 아시아 내륙의 무역 흐름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소외되어 있었으나 루손인들을 필두로 하여 해외에 관료, 상인, 지주, 용병업으로 많이 진출하여 이를 극복하였다. 한편으로는 해양 한가운데 섬으로 떨어져 있어 대륙에 속한 국가들의 사이의 지역 패권 경쟁에 대한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운 편이었다.

3.1.6. 이슬람의 팽창

그러다가 15세기부터 이전에 상인으로 자주 드나들던 아랍인들의 많은 수가 영구정착을 하는 등 이슬람교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홀로(Jolo)를 수도로 한 술루 술탄국은 20세기 초까지 명맥을 이어갔으며 전성기엔 말라카 술탄국, 브루나이를 위시한 말레이계 국가들과의 해상 교역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49] 비슷한 시기에 마긴다나오(Maguindanao) 술탄국, 마닐라 왕국 등의 개종한 이슬람 도시 국가들도 나타났다. 만일 이러한 이슬람화의 추세가 계속 이어졌다면 필리핀 역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와 함께 동남아 도서부처럼 이슬람 지역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필리핀 역사와 문화를 바꿀 중대한 변수가 나타난다.

4. 스페인령 동인도(스페인의 식민지배) (1565~1898)

4.1. 정복과정: 마젤란 원정대 파견(1521) ~ 마닐라 왕국 함락(1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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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슬람교를 믿는 국가들의 세가 확장되는 듯했다가, 16세기 중반 들어서 스페인이 나타났다.
이 나라 사람들은 단순하거나 어리석지 않으며, 어떤 것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퀴버스(화승총) 또는 금이나 은의 선물에 의해서만 처리 될 수 있습니다[50] ... 그들은 스페인 사람들을 너무나 대담하게 죽였기 때문에 화승총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 섬들의 발견자인 마가야네스(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죽임을 당한 이유였습니다. 빌라로보스와 사야베드라, 그리고 그 후에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온 사람들은 학대를 받았습니다.(포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미구엘 로페즈 데 레가스 피 (Miguel Lopez de Legazpi)가 온 이래로 전사한 모든 사람들은 아퀴버스의 부족함으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인디언들은 수천 개의 창, 단검, 방패 및 기타 갑옷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으로 매우 잘 싸웁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이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없습니다.[51] 아퀴버스가 일으킨 혼란과 그들 자신의 명예 결핍은 그들이 도망칠 피난처를 찾게 만들고 우리의 명령에 복종하게 만듭니다.
- 프란시스코 데 상드, "펠리페나스 제도의 관계와 설명" (1577)

1529년 스페인포르투갈과의 사라고사 조약에 의거하여 필리핀, 북마리아나 제도, 팔라우를 차지하고, 포르투갈은 서쪽의 마카오동티모르를 차지하는 걸로 정리되어 필리핀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동양 무역권을 확보하기 위해 포르투갈과의 조약을 성사시켰다. 상호 영유권만 인정했을 뿐, 아직 정복은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었다. 지구 반대편에 있던 필리핀 제도의 국가들은 이들이 조약을 맺은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쉬웠던 사라고사 조약 성사와는 달리 생각보다 필리핀 중소국가들은 콩키스타도르 몇 백명으로 무너진 중남미 원주민 문명들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521년의 마젤란의 첫번째 원정으로부터 1565년까지 스페인은 공식적으로만 6번의 원정대를 파견하였다. 앞선 5번의 원정은 모두 실패하였고 이러한 지속적인 원정대 파견 또한 신대륙 광산에서 나오는 막대한 황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명나라 또한 영락제 시절 필리핀 정복을 시도하여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도독부를 세우지만, 이것은 1세기 이내에 사라지면서 지방관 파견이 중지되고, 화교 거류지로 다시 바뀐다. 자세한 기록들은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다.

스페인은 먼저 아시아로 진출했던 포르투갈의 방식을 따라 상단으로 접근하여 지역 통치자와 우호관계를 형성한 후 그의 정적을 제거하여 지역의 호응을 얻고자 하였다. 스페인 정예로 편성된 마젤란 원정대[52][53]는 남부 민다나오섬의 부투안 왕국, 중부 비사야 제도의 와라이 부족들 그리고 세부왕국의 국왕인 라자 후마본과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부에 소속된 막탄섬의 촌장 라푸라푸는 무슬림이라 스페인에 적대적이었는데, 라푸라푸와의 몇 번의 전투 끝에 마젤란을 포함한 164명 이상이 죽거나 부상을 당한 후 나머지는 도주했고, 원정대가 스페인으로 귀환 했을 때 남은 배는 1척, 생존자 숫자는 18명이었다. 그 뒤에도 스페인은 계속해서 원정대를 보냈지만, 그 뒤 50여 년간 파견한 여러 원정대 또한 모두 실패 또는 패배로 돌아갔다.

그래서 한참을 지배하지 못하다가, 44년 만에 1565년 미겔 로페즈 데 레가스피 장군의 원정대에 다른 토착국가들의 지원군을 받아 막탄 섬 상륙과 전투에 승리하였다. 이로써 세부 섬에 영구정착지가 마련됨과 동시에, 스페인령 동인도가 설립되었다.

막탄 섬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스페인군은 여러지역에서 토착왕가 및 부족장 등 기득권층 회유에 성공하게 된다. 세부 왕국, 부투안 왕국은 이미 마젤란이 왔을 때부터 스페인에 우호관계였고 보홀, 파나이 등을 포함한 비사야 지방 대부분의 바랑가이들과 루손 섬의 톤도 왕국 등 다른 세력들도 대부분이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므로 쓸모있는 협상이 빠르게 진행되어갔다. 고작 몇백명에 불과한 스페인군이었으나 이들의 수준높은 전투력과 신대륙 광산에서 나온 압도적인 부유함, 드넓은 영토를 직간접적으로 감지하자 그들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들에게 이익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회유된 국가들은 스페인의 신하가 되었고 스페인군이 구심점이된 연합군은 나머지 지역의 정복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분열에서 통합으로 나아간다. 일단 세부가 충성맹세를 한 시점부터 필리핀의 절반 이상의 국가들이 스페인의 회유를 수락하고 식민 통치를 받기를 자발적으로 청하기 시작한 것은 스페인과 필리핀 역사학계 모두 인정하고 있다. 스페인은 회유와 정복활동을 병행하며 영토를 넓히다가 루손 섬의 톤도 왕국까지 회유에 성공하였고 결국 1571년, 마닐라 왕국을 방쿠사이 전투로 멸망시키면서 스페인이 필리핀 제도의 주도권을 거머쥔다. 이때 스페인과 비사야 제도 연합군이 모두 한 곳에 모여 대규모 함대가 출병하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고 한다.

한편, 민다나오 중서부에 위치한 라나오, 술루, 마긴다나오 등의 이슬람 왕국들은 회유를 거부하고 스페인을 경쟁자로 인식하여 이후 300여 년간 스페인과의 기나긴 전쟁이 시작되는데, 이를 모로전쟁(Spanish-Moro conflict)이라 한다. 이는 필리핀 제도가 오스만-합스부르크 같은 가톨릭 - 이슬람의 격전지였음을 의미한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통치한지 얼마 안된 시점, 60여명의 스페인군 소대가 카가얀 전투에서 필리핀에 해적질하러 온 1000여 일본 왜구들을, 화포와 유럽본토의 여러 전술들을 사용하며 거의 전멸시킨다.

국명은 당시 스페인 제국 최전성기를 열었던 국왕 펠리페 2세의 이름에서 유래되어 '펠리페 2세의 섬들'이란 뜻의 Las islas Filipinas(라스 이슬라스 필리피나스)'라고 명명되었으며 이를 줄여서 식민통치기에 '필리피나스'라고 불렸고 현재는 영어식으로 필리핀(philippines)이라 불린다.

4.2. 식민 지배 초기 ~ 중반기(1565 ~ 1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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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바에스파냐(New Spain/Nueva España) 최대강역. 대만,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일부 지역까지도 정복에 성공한다. 이때 대부분의 군대는 필리핀군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개신교 세력 등에 의해 영토를 상실한다. 필리핀 토착 이슬람계 상업왕국들이 건재했던 남부 민다나오섬 지역은 식민통치 말기에 가서야 회유에 성공하고 제국 영토로 편입한다. 마찬가지로 술루 제도 또한 식민 말기에 일시 함락에 그쳤으나 정복했다고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필리핀 도독령은 행정구역상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에 편입된다. 형식상 왕이 파견한 부왕이 통치하는 누에바 에스파냐의 간접지배를 받는 형태인 것은 스페인 본국과 필리핀의 거리가 지구 반대편에 위치했기에 지리적인 사정상 신대륙 루트로 서신을 경유해서 보내는 것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인들이 도독령을 구성했으나 기존의 토착왕가와 귀족계층, 부족장, 거류지 유력상인들을 바탕으로 그들의 지배권을 인정하면서 세금면제와 지역별로 자치권을 부여했다. 세금면제와 고도의 자치권을 주는 것은 중남미 원주민들과는 다른 대우를 의미했다. 이는 신흥세력을 제국으로 편입시켜 영토를 늘리되 기존 지배층들의 불만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써 스페인의 먼 조상인 고대 로마인들이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이를 '엔코미엔다 제도'라고 한다. 특히 식민통치 초반에 마닐라, 세부 등 중앙의 도독부는 각 지역의 내정에 간섭을 거의 하지 못했고 오로지 동서양 무역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필리핀 도독령은 각 지역 상업왕국들의 주요 인재풀들이 스페인인들과 함께 구성되어 그것을 도왔다.

오늘날 필리핀이 같은 식민지였던 중남미와 달리 각 지역별로 많은 언어가 남아있는 원인도 이러한 긴 자치권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식민지배 또한 스페인 본국에서 인력들을 대규모로 파견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지역은 토착 지배층들을 중심으로 행정이 돌아갔다. 이러한 부분은 스페인 본국은 물론, 광대한 아메리카에 본적을 두고있는 멕시코령이라 하더라도 건드리지 못하였다. 애초에 필리핀 정복과정 자체가 아메리카 인디언들보다도 훨씬 어려웠던데다 오랜시간을 소비했고 여러번에 걸쳐서 실패하였으며, 결국엔 토착세력과의 교섭 및 회유로 인한 정복이었던 만큼 확실히 스페인 제국에 편입되었지만 후반기를 제외한 식민지배 초기부터 중반 기간 동안은 스페인 본국이 필리핀의 이익을 해치는 형태의 내정간섭이 아닌, 간접적 지배를 받으면서도 토착 세력들이 실익을 확실히 거두는 형태의 독자적인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다.[54]

또한 필리핀 도독령이 설립된 후에도 스페인군과 식민지인들은 기록상 마닐라 전투(1574년)를 포함해 남중국해에서 온 여러 해적들,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토착 이슬람 왕국들, 개신교계 유럽 함대들과 군사적으로 맞닥뜨리는데, 여러차례의 전투에서 화승총을 포함해 무기와 방어구 무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바, 이는 식민지인으로서 무장해제를 당하지 않고 기존 지배층들이 각자의 사병을 그대로 보유했음을 뜻한다.[55] 비록 필리핀이 당대 슈퍼파워(초강대국)들의 식민지로써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도독부를 포함해 지방 지배층들의 사병들 또한 현지인들이 대다수로 구성되는 형태로 식민말기까지 계속 이어졌고 군대해산은 미국 식민시대를 포함하여 400년간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필리핀에서의 노예의 소유주는 대체로 토착 지배층들이였고 아메리카로 이주하는 경우는 스페인 상선들이 필리핀 노예(또는 사병, 선원)들을 필리핀 토착 지배층들로부터 돈을 주고 구입해가는 형태가 대부분이였다. 특히 필리핀인들의 아메리카로의 직접 이민인 경우에는 인디언들과 서열이 결코 비슷하거나 같지 않고 높았으며, 또한 칼을 차고 다니는게 허용되었다. 이는 무장이 허용되지 않던 인구집단이 존재했음을 의미하고 무장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과의 계층화가 존재했던 것을 의미한다. 토착 지배층들은 제각기 소유하고 있던 인도네시아 및 여러 아시아 출신 노예들을 스페인에 판매하였고 이들은 신대륙으로 강제이주되어 인디언들과 함께 아메리카에서 노역하였고 인디언들과 혼혈되었다.

콩키스타도르들은 필리핀에서는 중남미와 달리 제각기 각 지역을 점령하여 왕이나 귀족을 칭하며 현지인들을 노예화시키지 못하였고 현지의 자치권을 존중해야만 했다. 이것은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과 필리핀 토착 왕국들간의 '협약'인데다 토착 왕국들이 명나라조차 '왕'으로 부를 정도로 강성하였고 더군다나 이후 이어지는 태평양 갈레온 무역은 토착세력들의 협력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필리핀에서의 고강도 세율의 착취는 콩키스타도르 시대가 아닌 식민통치 후기에서 말기 쯤 일어난다. 이때도 노예제와는 개념 자체가 달라서, 최소한 사유재산은 보장되던 사회였다. 마찬가지로 저소득층 중에서도 부자나 지주, 지식인, 중산 계층이 인종에 상관없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중남미에서 흔하던 '스페인 혈통에 가까울수록 무조건 고위층'[56]이라는 공식 같은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비사야인 지배층 중에 스페인 혼혈이 많이 존재한건 사실이나, 다른 지역에선 스페인 혼혈이 아닌 지배층들도 많았고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저소득층 스페인 혈통들이 필리핀으로 이민을 오더라도 저소득층을 형성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이는 중남미와 달리 필리핀이 오랜시간 자치권을 지켜온 역사에서 비롯된다.[57]

폭넓은 자치권의 흔적들은 스페인 사서는 물론 명나라 기록에서도 동시에 확인되는데, 스페인 기록은 필리핀 도독령이 설립되고 나서도 지역의 군소 토착 세력들끼리의 영토 분쟁과 전투가 지속되고 있었고 이전에 중국에서 왕으로 지칭되던 필리핀 토착 왕족들은 스페인의 통치가 시작된 이후에는 명나라에서 왕자 등으로 한 단계 격하되어 불렸다. 이는 필리핀 토착 지배층들이 각 지역 내에서 귀족 지위와 사병 지휘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며, 명나라 또한 이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마닐라와 세부에 스페인이 세운 요새와 정착촌을 제외하면 그 바깥에는 통치력이 미치지 않았거나 제한된 형태였음을 뜻한다. 이 경우에는 식민통치라기보다는 지구 반대편에 무역소를 건설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만, 어쨌거나 스페인인들은 50년이 걸렸으나 필리핀을 끝내 무력으로 정복했다고 전과를 보고해 올렸다. 또한 당대 명나라의 중국인들이 유교도 믿지 않았던 필리핀 토착 지배자들을 왕, 왕자 등으로 지칭해 부른 것은 일본 다이묘들도 받아보지 못했던 파격적인 칭호였고, 그 당시의 명나라 고위관료들의 필리핀에 대한 인식이 현대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립된 미개 원시 부족으로 결코 평가절하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문단에 해당하는 당시의 필리핀과 스페인 본국 사이의 정치구조적인 상하관계의 형태는 로마 가톨릭 문화로 개종된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58] 애초에 필리핀은 지역별로 지배층들의 주류 종교, 언어, 문화, 민족 등 배경이 제각기 다른데다, 서로 분리된 시간이 길었던 관계로 상호 내정간섭을 배제하고 이러한 자치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통합적인 시스템을 구축한 것은 효율적으로 작용되었다.

이 시기의 자치도는 매우 높아서 마닐라 지역의 무슬림들은 필리핀 도독령에 협력하였고 스페인은 그들을 강제로 개종시키지 못하였다. 오히려 보안에 문제가 없는 이상 이들의 신앙을 유지하게 하였고 그로 인해 동남아 지역의 수니파 상인들과의 무역을 위한 접촉을 용이하게 했다.

초기 150여 년간 확인되는 부분은 스페인의 필리핀 통치의 양상이 정치적, 종교적 측면에서 스페인 본국이나 중남미보다도 훨씬 관용적이였다는 점이다. 필리핀이 제국 영향권 내에서 가장 관용적인 지역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필리핀 도독령의 공식 명칭이 '스페인령 동인도(Spanish East Indies)'였고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이 비사야인 군주들의 토지 일부와 군사적 지원을 받아 세부에서 설립한게 그 시작이였다. 애초에 상호 호혜적 입장에서 현지 세력들의 협조를 받아 '합작 무역회사'적인 성격을 띄면서 시작했기 때문에 현지 지배층들의 통치권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영토의 통치권이 전부 스페인으로 넘어가며 말그대로 정복을 당한 중남미의 경우와는 동일선상에서 보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도독의 현지 통제권 또한 중남미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형태였다.

중남미 식민지들의 공식 명칭은 부왕령(Viceroyalty)으로써, 다분히 중앙 정부의 권력을 종적으로 중심 잡은 정치체들이라는 색채가 짙다. 왕대신 파견된 부왕을 통해 스페인 정부를 중심잡고 직접 통치를 받거나 그게 아니라면 콩키스타도르들이 각 지역의 귀족으로 군림하면서 인디언과 메스티소들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반면, 필리핀 대부분 지역은 현지 지배층들이 중심이 되어 통치권을 행사했고 반란이 일어나는 경우에도 돈을 받고 일하는 현지인으로 구성된 군대의 협조에 의해 진압되었다. 현지세력의 지지로 유지되는 권력구조는 식민통치 말기까지도 이어진다. 비슷한 예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진출했던 인도네시아 식민지 또한 회사적 성격을 가진 정치체로써, 오늘날 인니가 이슬람 국가라는 점을 감안할 때, 종교적인 부분은 아예 건드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럽의 스페인은 스스로를 가톨릭이라는 프레임 안에 가두고 광적인 신앙에 빠지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였고 타종교를 보기만 하면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본국 영토에서 유대인, 무슬림, 모리스코들을 지속적으로 박해 또는 추방하였다. 또한 가톨릭에서 떨어져나온 개신교 국가들과는 이성을 잃고 허리가 휠 정도로 끊임없이 싸워댔다. 피비린내 나는 30년 전쟁, 네덜란드와의 80년 전쟁은 스스로의 패권을 몰락으로 밀어넣었다. 반면에, 필리핀은 이 시기에 현지 문화를 존중하고 융합적 자세를 취하는 예수회 활동의 아시아 거점이였고 현지의 종교, 문화, 관습, 의복 등이 최소 100년 이상 유지되었던 것이 발견된다. 또한 필리핀은 식민지 시대 개종한 세파르딤 유대인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물론 왕실이나 교황청에서 파견한 수도회들도 많았으나 훗날 필리핀 정부가 나서서 유대인 난민들에게 비자발급을 하는 것만 보아도 필리핀 가톨릭이 반유대주의적 흐름이 강했던 중세 유럽의 그러한 정서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타문화에 대해 개방적인 뿌리를 가진 가톨릭 문화는 필리핀 특유의 것이며, 또한 긴 자치권의 역사와 병존해온 전통이다.

주기적으로 멕시코 태생의 스페인인(크리오요)와 혼혈 메스티소들을 이주시켜 장기적으로 스페인 혈통이 많아지게 했다. 이 정책은 세부 섬을 중심으로 중부 비사야 제도에서 실시되었다.[59] 또한 필리핀 도독령이 현지 지배층의 자치권을 인정한 반면, 개간되지 않거나 딱히 주인이 없는 토지, 바랑가이 마을들은 몇백명의 콩키스타도르들에게 하사하였고 촌장이 되게 했던 기록도 남아있다. 이들은 필리핀 현지 유력가문 또는 화교들과 통혼한다. 이들은 또한 중남미와의 사무역과 밀무역에도 종사하였다. 이들은 대를 거듭하면서 필리핀인으로 동화되었다. 물론 모든 스페인군이 영토를 하사받은건 아니고 중남미에서 파견된 스페인군들의 대다수는 현지 군대와 함께 비사야 지방의 방어를 맡았다.

필리핀인들은 고대로부터 유라시아의 다양한 상업집단들이 다녀간 만큼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다르게 구대륙 전염병에 면역이 있어서 심각한 인구감소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1571년 마닐라에 인트라무로스, 세부에 산 페드로 등 스페인식 요새 및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1589년부터 필리핀에 아시아 최초의 유럽식 대학들이 설립되었다.[60] 20세기초까지도 아우구스티노, 도미니코, 예수회 등 여러 가톨릭 수도회에 의해 학교, 수도회, 병원, 대학들이 계속해서 설립되었을뿐 아니라 교황청, 왕실 주도로 설립된 대학들도 존재했다. 서양식 법전, 인쇄술, 그레고리력이 도입되었고 유럽음악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모든 기관에서 제공하는 교육과정에서는 단순한 종교적 강의가 아니라 법학, 의학, 약학, 신학, 철학, 인문학, 물리학, 수학, 자연사, 화학 등 고등교육도 포함시켰다. 고등교육기관 바깥에서의 서민층에 대한 선교사의 교육들 또한 지대하였고 이후 2세기쯤 지나면 필리핀은 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근대식으로 교육된 중산층인 일루스트라도스 계층을 형성한다.

이후 각 엔코미엔다 자치지역은 폴로(Polo)제도라는, 1년에 40일의 노동의무가 부과되었는데 기존 국가들의 귀족계층, 관리들은 여기서 자동면제되었다. 여러 주들은 돌아가며 노동자들을 중앙에 파견한다. 이외의 부유층과 중산계층의 상인들은 7페소 은화(1페소=8레알)를 지불해 면제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세간의 통념과 달리 필리핀 식민지인들은 가혹하게 부려진 아메리카 흑인 노예들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고 사유재산 또한 보장된 사회였다. 식민지배 후기에 이르러 열강들의 경쟁이 심화되고 스페인 본국의 국력이 약화되어 그것을 메꾸기 위해 세율이 올라가는 등의 일이 있지만 식민통치 중반까지는 유화적인 동화정책들을 취했다.

스페인은 애초엔 동남아시아에서 흔한 유럽의 사치품인 향신료를 기대했으나 필리핀에선 일부 향신료 밖에는 나지 않았다.

4.2.1. 태평양 갈레온 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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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년 펠리페 2세가 하사한 필리핀의 문장. 마닐라시의 깃발로도 사용되었다. 성은 스페인 왕실의 영토인 카스티야 왕국을, 검을 든 바다사자는 그를 수호하는 필리핀 제도를 의미했다.

이 시기에 스페인은 신대륙 광산에서 나오는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었고 여기서 파생된 유럽의 금과 은의 인플레 현상이 있었기 때문에 중남미와 달리 기존의 필리핀 토착 지배층들로부터 금을 빼앗을 필요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스페인이 관심 있었던 것은 원활하고 지속적인 아시아 무역이였기 때문이다.

필리핀인들 입장에서 스페인은 많은 사업 아이템을 지닌 부유하고 매력적인 고용주였다. 또한 기술, 문화, 군사력, 자금력, 영토 등 모든 면에서 이전에 만난 어떤 세력보다도 뛰어났기 때문에 이전에 믿던 종교였던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등보다 가톨릭을 우위에 두고 서서히 가톨릭으로 소속감을 느끼며 동화되어갔다. 물론 모두가 기존 종교를 처음부터 버린 것은 아니었고 마닐라에 거주하던 무슬림들은 그들의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이는 스페인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자치권 안에 포함된 것이였다. 이들은 가톨릭에 감화되었다기보다는 스페인이 가진 부유함에 관심이 있었다. 또한 정치 구조가 매우 복잡하였기 때문에 왕이 개종 했다고해서 그 밑의 귀족들, 일반 백성, 노예 계층 모두가 개종한 것은 아니었다.

필리핀은 지리적으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접경지이자 스페인 시각에서 아시아와 아메리카, 유럽 사이를 잇는 교차로에 위치했다. 더욱이 인도차이나 반도와 동아시아로부터 원거리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그 사이 중앙에 위치한 섬이라는 점은 충분히 아시아 유교적 중앙집권된 국가들로부터의 무역간섭이나 금지를 피할 수 있었고 해군만으로도 방어가 매우 용이했다. 더군다나 밀무역을 하기 쉬운 아시아 지역의 어촌이나 항구들이 도처에 널려있는 데다, 당시 포르투갈 령 무역기지 마카오와 매우 가까웠다. 마카오에서는 중국 내륙의 여러 상품들을 엄선할 수 있었고 내륙의 중국상인들과 접촉하기 쉬웠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으로 스페인은 필리핀 제도를 동서양 무역의 거점으로 활용했다. 필리핀 도독령 마닐라항에서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멕시코)의 아카풀코항, 그리고 스페인의 본국의 세비야항 까지 이어지는 무역루트는 300년 넘게 이어진다. 1453년, 이슬람 군대에 의해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스페인의 레반트 무역권 상실로 동방과의 무역이 차단된 이후 지구 한 바퀴를 돌아 100여 년에 걸쳐 이루어 낸 성과였다. 이것은 자본주의 발달사에 있어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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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리온 혹은 갈레온 무역이라 불리는 이것은 특히나 거대시장인 중국과의 교역에서 막대한 수입을 창출했다. 스페인은 애초에 인도와의 무역로를 열고자 지구 한 바퀴를 돌았지만 아메리카와 필리핀에 닿게 되면서 오히려 또다른 거대시장인 중국과의 무역로를 열게 된 것이었다.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유입된 금화는 대부분 필리핀 도독령에 머물렀고 은화는 중국 및 아시아 무역에 사용되며 아시아에 유출되었다.

푸젠성, 광둥성에서 온 100t에서 300t급 중국 정크선들로 마닐라항이 득실거렸고 정기적인 공무역만해도 해마다 두 번이상 비단과 도자기들을 가득싣고 이곳을 찾았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선박들도 이전보다 더욱 자주 찾아오기 시작한다. 스페인의 신대륙 광산에서 유발된 유럽전역의 금, 은 인플레이션 현상은 중국 및 아시아에서 도자기비단, 향신료 등으로 대량 거래하면서 해결되기 시작했다. 처음 250년만 계산해도 중국으로 유입된 은화만 최소 4000톤 이상이었다고 추정된다. 이는 스페인 제국 은 생산량의 3분의 1규모였다. 하지만 신대륙 모든 광산에서 채굴된 은의 양은 최소기준을 훨씬 웃도는 수치였을 것이라 추산되고 있다. 민간개발업자들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채굴된 광산의 생산량은 공식통계에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 상업왕국들의 무역루트를 그대로 이어받아 중국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인도, 일본, 자바섬, 수마트라, 캄보디아, 실론 섬, 벵골 만 등의 향료, 계피, 후추, 상아,카펫, 도자기, 향신료, 비단, 차 등을 포함했고 필리핀인 장인들이 생산한 귀금속 공예품들 또한 유럽 및 아메리카에서 인기높은 사치품에 속했다. 필리핀 도독령은 사실상 일부 수니파까지 포함하여 아시아 주요 문화권의 국가들과 그물망 같은 무역로를 형성하였다.

이후 350년간[61] 필리핀은 아시아-태평양 시장과 대서양 시장을 사이를 매개했고 또한 실크로드 (Silk Road), 향신료 루트 (Spice Route), 실버 플로우 (Silver Flow)의 거대 자본들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동서양 무역의 중심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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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부상은 모든 반구와 대륙이 세계 무역 네트워크에서 상호 연결된 최초의 사례로 마닐라는 세계 최초의 글로벌 도시가 되었다. 마닐라는 아시아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수많은 상품들이 하역되고 판매되던 곳이였다. 이 시기 필리핀 도독령 식민지인들의 구매력과 삶의 질은 높은 편이였다. 그리고 기회를 찾아 대항해시대에 참여한 다국적 다인종 선원, 상인, 군인, 선교사, 귀족, 노예들이 여러가지 사연을 가지고 마닐라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인, 포르투갈인, 이탈리아인, 개종한 세파르딤 유대인 등 남유럽인들을 중심으로 네덜란드인, 그리스인, 아프리카인, 아메리카 인디언, 일본인, 인도인, 파푸아인과 그 모든 숫자를 압도하는 중국 화교(중국 모든 지방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들이 존재했으며 그 사이의 세대의 걸친 혼혈이 이루어져 현재에 이르렀다. 시대를 앞서간 전세계 인종의 전시장이라 말할 수 있었다. 오늘날 필리핀인들 외모 속에서도 과거 다문화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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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아시아 진출의 의의는 단순한 스페인의 영토 확장이 아닌 스페인의 신대륙 자본을 구심점으로 필리핀 토착 세력들이 자발적으로 스페인에 편입되고 하나되어 협력함으로써 제각기 보유한 무역로들이 하나로 합쳐져 군사력과 인재풀 또한 하나가 된 것을 의미하였다. 또한 이는 필리핀 제도 내부의 통합, 스페인 제국과의 결합, 그리고 아시아-아메리카-유럽을 잇는 동서양 무역은 최초의 글로벌리즘, 자본주의의 서막이기도 했다.

제국법에 의하면 마닐라 갤리온선은 필리핀-멕시코 사이의 공무역만 허가되었으나 엄청난 수요와 수익성으로 인해 밀무역이 공공연히 이루어졌고(이 또한 마찬가지로 지구 반대편의 스페인의 통치력이 완전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과테말라, 페루 부왕령, 파나마, 에콰도르 또한 갤리온 무역로의 주요 지류가 되어 상품교환과 인적교류는 필리핀과 멕시코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제국 영토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또한 아시아의 상품들은 아메리카를 거쳐 스페인이 보유한 유럽내의 무역로를 통해 퍼져나갔다.

아메리카에서 필리핀으로 오는 상품들은 80%가 아메리카산 농산물들 이었고 20%는 북아프리카, 유럽에서 수송된 것들이었다. 와인 및 유럽산 화기들이 주된 상품이었다. 유럽산 무기들은 필리핀 해안국경에 배치되었다.

2010년부터 갤리온 무역은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 및 지명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으며 보다 활발한 역사 연구가 진행 중이다. 필리핀, 멕시코, 스페인을 포함한 국가들의 문헌 기록들을 연구 중이며 최소 32개국이 리셉션에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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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인 장인들이 생산한 귀금속 공예품들. 많은 유물들이 뉴욕 맨해튼 박물관과 아얄라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일부 유물은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특히 옛 부투안 왕국의 권역 안에 있던 수리가오주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그러하며 현재 아시아에서 발견된 귀금속 공예 유물들 중에 정교함의 측면에서 필리핀의 것을 뛰어넘는 유물들은 없다. 고대 그리스의 유물들만이 필리핀과 동등한 수준의 정교함을 보여준다. 필리핀 토착 귀족들이 가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신구 유물들은 명나라 황제의 익선관보다 정밀한 고급기술이 들어간다. 실제 부투안 왕국은 아시아 전역의 왕실들과 접촉하여 귀금속 공예품들을 팔았다는 기록들이 있다. 전근대 각 국가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은 왕과 귀족 영주들이므로 이들의 환심을 산후 타 국가 상단들과 차별화된 전략으로 무역을 선점해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부투안이 조공무역한 중국 국가만 , , 셋이다.

필리핀은 행정구역상 누에바에스파냐에 속해있었고 대부분의 시간동안 가장 부유한 주였다. 스페인은 식민지배 이전에 만났던 포르투갈 보다도 금 보유량이 넘치도록 많았기 때문인데 이 금과 은은 스페인 본국에서 보낸 것이 아닌 스페인령 아메리카 식민지의 개발된 광산들로부터 나왔다. 일단 스페인은 필리핀 식민지배가 시작된 후 여러 임금 이외에도 해마다 250,000페소의 금화를 필리핀에 예산 명목으로 주기적으로 보냈다. 그 대가로 필리핀은 스페인의 대 아시아 무역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물론 갈레온 무역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스페인이였고 그걸 돕는 필리핀 입장에서 충분히 이득이였다.

명나라 후기부터 멕시코의 광산, 일본의 이와미 은광의 은이 필리핀 도독령을 거쳐 거대시장인 중국에 지속적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중국은 청나라 옹정제 시기에 지정은제를 시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 많은 양의 은이 흘러 들어갔음에도 부의 양극화는 별로 해결되지 않았다. 스페인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400년여년간 중국의 가난한 하층민들은 오히려 이전보다 많은 숫자가 기회를 찾아서 혹은 전란을 피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필리핀에 이민하였다. 스페인은 이미 청나라 정부와의 공무역로를 열어 놓았음에도 민간 단위의 이민을 몇 만 단위로 거리낌 없이 받았는데, 이들은 중국 본토와의 용이한 접촉에 도움이 되었고 중국과의 사무역과 밀무역을 위해서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쇄국정책을 취했던 이유도 필리핀을 거쳐 막대한 양의 이와미 은이 중국으로 유출되었기 때문이다.

화폐는 식민지 시기 이전부터 안정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나 식민지배 시작 이후에는 식민경제 속에서 호황을 누리면서 보다 많은 양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는 필리핀에 왔던 조선인인 문순득의 기록에서도 확인되는 부분이다. 심지어 현지어에 완전히 능숙하지 않았던 표류 난민인 문순득 본인도 노가다를 뛰고 받은 임금으로 화폐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만큼 현지인들에게 화폐는 보편화되어 있었다. 문순득의 말을 전해 듣고 정약용이 화폐 개혁의 중요성을 깨닫고 경세유표에 문순득의 경험을 예로 들었다.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 지배를 당할 때 정복과 착취와 노예화만 있었다는 이미지로 왜곡하는 것은 긴 자치권의 역사가 있었다는 속사정을 모르는 편견에 해당한다. 만약 그랬다면 표류 난민인 문순득 본인도 필리핀 도독령에서 사유재산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노예처럼 노동 임금 한 푼 받지 못하고 착취당하며 살았을 것이다. 고세율 착취는 모두 스페인 식민통치 말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사실 필리핀은 서민층까지도 에스쿠도와 레알 등으로 불리던 금화와 은화를 안정적이게 화폐로 사용하였다. 16~18세기 사이에 화폐 고갈 상태인 전황을 겪지 않고 서민층까지 금화와 은화를 안정적으로 사용했던 아시아 국가는 필리핀 밖에 없었다. 다른 유럽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금과 은을 화폐로 사용하였으나 화폐가 부족해지는 전황 상태를 겪었고 이는 일본의 에도 막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페인의 경쟁자였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식민지가 되었던 인도네시아 또한 필리핀보다 전황 상태를 일찍 겪었고 금과 은 이외의 다른 금속으로 만든 화폐를 주조해야만 했던 시기와 그 양도 훨씬 많았고 빨랐다.[62][63] 반면에 필리핀의 전황상태는 식민통치 후기에 스페인과 필리핀 사이의 독점 무역이 약화되고 영국 및 다른 유럽과의 무역로가 열려 제2의 호황상태가 열리면서 19세기초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필리핀은 독립해나간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들과의 무역을 통해 금과 은화를 공급을 충당하거나 금과 은 이외의 다른 금속으로 만든 화폐들을 이전보다 규모 있게 주조하거나 또다른 고액 지폐 등을 발행하며 금과 은의 부족을 극복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이는 다른 국가들보다 훨씬 늦은 시기였다.

서구 열강들 중에서 중국과의 공무역을 몇 백년간 유지한 나라는 스페인과 마카오를 점유한 포르투갈이였다. 양쪽 모두 처음에 중국과의 교섭에 있어 필리핀인들의 도움을 받은게 그 시작이였다. 네덜란드의 경우 중국과의 의미있는 교류를 거의 하지 못했고 오히려 스페인과 예수회 수사들의 기술적 지원을 받은 중국, 필리핀 해안 포대들의 사격을 받던 입장이였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및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 일본과 교류를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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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아시아 로마 가톨릭 선교와 예수회 활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예수회는 현지의 문화를 존중하고 가톨릭과의 융합적 자세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회는 1581년부터 필리핀에서 활동하였으며, 필리핀 각지의 식민지인들은 물론, 일본에서의 선교 또한 부분적으로 성공하여 일부 다이묘(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외 다수.)들과 일본 피지배층들을 개종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이들은 열도 내에서 기리시탄 파벌을 형성한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선교 또한 할 수 있었고, 중국 황제인 강희제와 접촉하는데는 성공했으나 개종시키는데는 실패하였다. 천주실의와 같은 책은 이후 중국을 거쳐 조선에까지 전해진다. 이러한 예수회 신학은 아시아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고 그 본거지 또한 필리핀이였다.

스페인이 오기전부터 필리핀인들은 숙련된 상인,해적,어부,목수 등의 대항해시대에 있어 필수적인 인적자원이 많았고 스페인은 이들을 갈레온 무역에 적극적으로 참여시켰다. 오늘날 멕시코 인구의 30% 정도는 필리핀인 혈통을 조금씩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 유전인자들은 필리핀 및 인도네시아 지역과 일치한다고 한다. 당시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병으로 인해 사망하자 인구가 크게 부족하여 필리핀과 스페인 양쪽에서 아메리카로 꾸준히 이주하였다. 유전인자들은 아메리카로 이주한 필리핀인 이거나 필리핀 지배층들이 스페인에 판매하여 노예로 팔려간 이들이 인디언 및 스페인 혈통과 혼혈된 것, 이 비율은 스페인 왕실이 주도하는 공무역인 갈레온 무역 이외에도, 여러가지 비공식적 형태의 사무역, 밀무역으로 인해 멕시코지역과의 인구 전출입이 활발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고 당시 기록에도 남아있다. 16세기를 기점으로, 오늘날 멕시코 지역 이외에도 , 하와이, 루이지애나, 캘리포니아, 텍사스[64]에도 정착촌을 형성했고 아메리카 개척에 참여한다. 오늘날의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샌디에이고 등 태평양 방면의 거점 도시에 도달하였고 아메리카 대륙에 최초로 발딪고 정착한 아시아인들은 필리핀인들이다. 현재는 필리핀 혈통들은 히스패닉과의 혼혈로 인해 모두 그쪽으로 동화되었다. 그러므로 중미 지역의 히스패닉들과 유전자를 일부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포르투갈의 말라카 진출, 중국, 일본과의 접촉, 마카오 정착, 스페인의 아시아 무역로 확보 및 아시아-태평양 항해, 아메리카 개척 등 세계화의 시작은 유럽인들의 단독이 아닌 아시아의 해양민족인 필리핀인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스페인령 아메리카 전역에서 모집된 정착민들과 군인들은 멕시코페루에서 훈련되고 그 중 엄선된 자들이 아카풀코에 집결하여 필리핀에 있는 요새로 파견되었다. 갈레온 무역에 참가한 선원들은 세비야, 멕시코, 마닐라 등 제국 전역에서 모집되었고 3분의 2는 해양경험이 많은 필리핀인들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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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해마다 태풍에서 살아남고 고온다습한 기후에서 자라는, 염분과 습기에 강하면서도 질기고 가벼운 나무들을 눈여겨보고 이곳의 나무들이 유럽보다 배를 만들기에 적합하다고 판단, 마닐라에 대규모 조선소를 건설하고 아웃소싱을 시작한다. 기존의 500t~800t의 갈레온들은 물론이고 2~3배나 되는 1700~2000t 급의 마닐라 갤리온[65]들이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이는 당시까지 건조된 것으로 알려진 유럽 선박 중 가장 거대한 크기였다. 배의 크기에 맞게 거대 캐논들을 다수 실을 수 있었다. 필리핀인 목수들에게 임금을 지불하였으며 지불된 화폐는 스페인 제국의 기축통화였다. 밀무역으로 인해 비밀리에 건조된 많은 갤리온선들이 태평양을 횡단하였고 필리핀 해안에 공백이 생기기 시작하자, 80년 전쟁의 일환으로 네덜란드 함대가 필리핀을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총 5번의 해전이 있었으나 필리핀 선원들과 갤리온 및 토착군선으로 구성된 함대는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모든 전선에서 압도하며 승리하였고 네덜란드는 큰 손실을 입고 필리핀 침공은 포기된다.

스페인은 이곳을 통해 일본과는 상업으로 단기간에 친밀해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 필리핀 내 중계무역 담당자들인 이슬람 세력, 중국인(원조 화교)들과의 갈등이 심했던데다가 이후, 일본은 전국시대를 끝내고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서 쇄국정책을 취하면서 무역에 위기가 찾아온다. 토착 화교와의 문화적 쇼크와 갈등은 심해서 몇 번의 전투까지 겪고 일방적으로 승리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중국과의 교역에 있어서 상술, 통역 등으로 중요한 세력들이었고 훗날 필리핀에 정착한 화교들이 가톨릭을 믿게 되고 스페인계 및 토착 기득권층과 통혼을 하면서 완화된다.[66] 도쿠가와 막부가 쇄국정책을 실시한 이후엔 사쓰마 번, 센다이 번 등 지방 다이묘들과 밀무역을 하면서 어느 정도 해결된다.[67]

리마홍, 왜구 등의 침입사건 이후 내부첩자 방지를 위해서인지 이후 스페인은 안보상의 이유로 무역을 모두 필리핀 도독령 권한으로 귀속시킨다. 기존 지배층들의 지방항구들은 공식적으로 모두 닫아야만 했고 외국배가 입항할 때도 마닐라 등 정해진 항구에서만 무역을 할 수 있게했다. 이 정책으로 각 지방의 지배층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약화되긴 했지만 도독령 소속이 아닌 또다른 스페인 상단들의 사무역, 밀무역은 되려 널리 퍼졌다. 광대한 제국 영토 사이를 잇는 무역로들과 항구에 소속된 세관들의 화물양의 평가절하로 인해 지하경제 활성화는 가속화되어갔다.

펠리페 2세가 공식적으로 말년에 원주민 노예제를 폐지했다. 기존 토착지배층들의 사유재산인 노예들이 해방되면서 도독령 소속의 자유민이 되고 세금납부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 기존토착지배층들이 임금을 지불할 수밖에 없게 되자 권력이 약화되어 이에 대한 불만으로 지방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이런 무역규제와 노예해방 모두 도독령 내 중앙집권화를 위한 장기적인 정책들이였다.

이 시기 스페인 도독이 중심이 되어 필리핀 도독령명나라 정복을 구상한 적이 여러번 있다. 왜구 들과 여러 번 싸워 승리한 스페인군은 명나라 해안도시들이 소규모 왜구들에 의해 털리고 휘청대는 것을 보았고, 스페인 본국에 테르시오 1만명을 파병을 요청하고 식민지군과 왜구를 1만명 정도를 고용하여 명나라를 정복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는 펠리페 2세에 의해 묵살된다. 필리핀 도독령에서 스페인 제국 재정수입의 20%가 창출되었고 지하경제로 인한 경제 효과는 더욱 컸기 때문이다. 펠리페 2세는 명나라라는 거대시장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명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후 7년 전쟁의 결과 스페인은 필리핀에 대한 독점적 무역 체계를 상실한다.

1785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는 왕립 필리핀 회사를 설립하였다. 아시아 전역과 북미의 서부지역의 원자재, 대농장에서 생산된 상품작물들을 필리핀에 적재 및 집산하고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거쳐 영국을 포함한 유럽전역으로 수출하는 것이었다. 필리핀 53대 총독인 바스코 총독이 필리핀 대지주들의 여론 또한 수렴하여 본국에 요청하였고, 스페인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다.

4.3. 식민지배 후반기(18세기 후반 ~ 1896년)

1815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해 나왔다. 반면, 필리핀은 스페인 식민지로 남음으로써 정치외교적 문제로 인해 태평양으로의 바닷길이 적자가 나기 시작하였다. 250년 가까이 있었던 갈레온 무역이 쇠퇴해 가면서, 스페인은 이곳에서 아시엔다(Hacienda)라는 플랜테이션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이전시대의 엔코미엔다 제도보다도 조금 더 민주적인 모양새로 변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토착 왕국들은 모두 도독령에 흡수되었고,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 지배층들의 소규모 반란들이 모두 진압당하면서 기존 지배층들의 권력은 박탈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아시엔다 제도로 상품작물로의 전환으로 많은 소득을 얻게 되었다.

또한 7년 전쟁 이후 개편된 세계 무역구조와 독립해 나간 라틴아메리카 지역들로 인하여 스페인 왕실, 영국과의 무역접촉은 더욱 활발해졌다.

이전시대의 대농장들이 식량생산 위주였다면, 이때부터는 주로 설탕, 담배, 아바카, 직물 등 고수입 상품작물 위주의 대농장들이었다. 필리핀 식민지 초기와 달리 중후반이 되면서 세율이 올라가는 등 전형적인 착취가 강화되어가긴 했지만 당시 경제가 꽤 좋았고, 스페인 제국의 금화, 은화로 임금을 지불받았으며, 사유재산은 어느정도 보장된 사회였다.

이렇게 18세기 말 플랜테이션이 시작되면서 자영농들 중에서 신흥 지배층이 형성이 되는데, 스페인인[68], 현지 인디오들과 스페인 혼혈인 메스티소, 현지 인디오들과 중국 혼혈인 상글레이, 그리고 현지인들 중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적게는 수 만평, 많게는 수억 평을 가진 대농장을 경영하게 된다. 대체로 이들은 대지주층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그 경제적 기반은 대개 지방에 있었다. 경우에 따라 사모작까지 가능한 기후로 인해 그 농업 생산량은 엄청난 것이었다. 20세기 초반 시작된 공산주의 열풍으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대지주들이 토지개혁으로 모두 재산이 몰수된 반면, 이들은 스페인 제국 후기에 형성되어 21세기 초 현재까지도 명맥을 잘 이어나가고 있다. 또한 부패 수준이나 시대를 거치면서 쌓인 정치 비자금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일루스트라도스 지식인 계층을 겸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스페인 식민 말기에 다른 일루스트라도스들과 다르게 중남미나 스페인으로 떠나지 않았다.

또한 16세기부터 시작된 유럽식 대학설립의 결과, 여러대에 걸쳐 형성된 일루스트라도스(ilustrado. 스페인어로 "배운 자들", "지식인들")라고 부르는 엘리트 지식인계층이 생겨나게 됐다. 18세기말에 전근대 치고는 나름 두텁게 형성되었고 이들은 대체로 중산층에서 상류층을 포괄했고 지방 지주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기반은 도시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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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출된 일루스트라도스 대표들의 회의. 지주, 전문직, 상공업자, 자본가 등 다양한 직업군에 종사했고, 크리오요, 혼혈 및 인디오도 다수를 차지하는 등 인종적 다양성이 존재했지만 근대식 교육을 받은 대졸자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같은 제국 내의 라틴 아메리카 지역과 인구 전출입이 적지 않았고, 필리핀에서 대학 졸업 후 멕시코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역으로 이민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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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의 메스티소, 인디오 여성들
일부 일루스트라도스 계층은 자식들을 스페인으로 유학시켜가며 스페인에 대표를 보내 식민초기와 같은 폭넓은 자치권과 권한을 요구했으나, 식민지내 중앙집권화를 추구했던 스페인은 한결같이 그들의 의견을 무시할 뿐이었다.[69] 결국 일루스트라도스 계층은 분노하며 '필리피노스'라고 자칭했는데, 이것이 필리핀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단어로 쓰면서 민족주의가 생겼다.

한편으로는, 일루스트라도스들이 정치를 주도하던 필리핀은 19세기 초중반 특수를 누렸고 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된 국가에 속했다. 18세기 말, 스페인 제국이 세계적으로 힘을 점점 잃어가던 시점 대영제국산업혁명을 성공시키며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영국 및 유럽에서 원자재 수요가 급증하자, 당시 필리핀 53대 도독이었던 바스코 총독과 일루스트라도스들은 마닐라를 아시아 지역의 원자재 중계무역로 및 화물집산지로 영국과 연결시킨다. 대서양태평양 루트를 모두 열고자 했던 영국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의 광저우를 통한 중국과의 무역에 있어서 필리핀이란 중계무역로는 중요한 곳이었다. 1834년, 필리핀은 스페인에 의해 막혔던 나머지 필리핀 항구들 또한 모두 개항해 필리핀을 공식적인 자유무역 지대로 설정하면서 아시아, 유럽, 북미에 모두 개방한다.[70] 그렇게 유럽보다 값싼 아시아 전역의 원자재들이 통과하는 중계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필리핀은 여러 서구자본 및 서양기술들을 유치시키며 초기 산업화를 성공시켰고,

설탕, 커피, 섬유, 담배, 직물 등 고수익 상품작물들을 공업화된 플랜테이션에서 재배하여 유럽에 대량 수출하는 공급자 역할을 했다. 커피는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생산을 했고, 담배는 필리핀이 전매에 들어가 많은 수입을 얻었다. 필리핀은 유럽으로부터 생산된 여러 제품들을 수입했고 또는 이를 다른 동남아,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에 중계무역을 함으로써 차익을 남겼다.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가 열리며 아편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하여 중국시장의 각종 규제가 철폐되어 무역이 확대되고 곧이어 수에즈 운하가 완공되면서 무역거리와 시간이 단축되자 수출입이 더욱 촉진된다. 필리핀에 건축붐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철도, 증기선, 트램 등 여러 운송수단과 사회간접자본이 많이 확충되면서 당시 유럽언론으로부터 '동양의 파리' '아시아의 진주'라는 수식어구가 따라다녔다. 이 시기에 유럽, 미국, 스페인, 필리핀, 라틴 아메리카에서 발행한 다양한 종류의 금화, 은화가 필리핀에서 통용되었다. 1865년 설립된 영국계 다국적은행 HSBC은행은 1875년에 필리핀에 지점을 설립한 이후 지금까지 영업하고 있다. 1851년 필리핀 현지 자본에 의해 설립된 BPI은행 또한 당시 많은 자본을 운용하였고 필리핀이 몰락한 현재도 아얄라 가문[71]이 대주주인 필리핀 내 주요은행이다. 18세기 말부터 미국-스페인 전쟁까지 필리핀은 유럽동남아, 중국, 북미 사이에서 120여 년간 자본, 원자재, 소비재, 사치재와 여러 밀무역품의 중심적인 중계무역로였다.[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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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세기 필리핀에서 발행된 금화

식민지시대 중반을 넘어가며 필리핀은 치안을 위한 보병위주의 군대 이외에는 고급무기를 대량으로 보유할 수 없었던, 식민지로써 군사력이 엄격히 약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경제력에 비해 군사력이 비대칭 상태였다. 특히나 해군력은 이 시기까지도 스페인에 완전히 의존한 상태였고, 독자적인 해군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태는 미국 식민지를 거치면서 반세기 이후 태평양 전쟁 시기까지도 이어진다.[73]

세계패권이 스페인에서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넘어가고,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하게 되면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화된 필리핀이 무역로의 희소가치를 점점 잃어가게 되고, 또한 20세기가 가까워 지면서 미국-스페인 전쟁 등 세계 정국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등 외교적으로 여러 복잡한 과정을 겪게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 여러대에 걸친 아메리카 및 스페인으로의 일루스트라도스 고급인력과 자본유출은 뼈아픈 과정이었다. 현 스페인 왕비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또한, 외할머니가 스페인으로 이민 간 일루스트라도스 계층이었다.

4.4. 필리핀 독립전쟁(1896~1898): 필리핀 혁명

라틴아메리카에서 독립 전쟁을 주도한 현지 지주들의 식민지 자치권 확대에 대한 요구, 그에 대한 스페인의 거절로 식민지들이 반발해 독립해 나가면서 아시아-태평양-유럽 사이의 바닷길이 정치외교적 문제로 인하여 가치가 흐지부지되었고, 필리핀 또한 독립을 원하는 흐름을 타게 된다.

모든 문제의 직접적 원인은 누구의 잘잘못이라기보다는 스페인 본국의 국력약화에 있었다. 16세기부터 적국을 많이 만들어 씨앗이 뿌려진 유럽 내의 여러 문제들로 인해 스페인 본국의 힘이 서서히 빠지다가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침공한 이후 스페인이 휘청거리게 되자 식민지들로부터의 과세가 이전보다 가중되는 모양새가 되었고 그렇게 거둬진 세금은 스페인 본토의 내정 위주로 쓰이면서 정작 식민지들의 안보와 정치적 균형들이 위태로워져 각 지역의 토착 지배층들의 재산으로 현지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또한 재정의 본국으로 쏠림으로 인해 구심점이 약해지자, 식민지들 끼리도 이합집산하며 서로 뭉치지 못하고 각자 이익을 위해 분열하게 된다. 자연스레 차라리 독립하는게 낫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또한 이것은 예수회가 오래전부터 만들어 놓은 가톨릭 해방신학을 말미암아 촉진되어 갔다.

스페인은 전통적으로, 유럽 내에서도 독립해나가는 지역에 대해서는 군사적으로 매우 강경한 진압을 하였는데, 포르투갈, 네덜란드, 카탈루냐, 벨기에, 이탈리아 일부 지방 등 모두 스페인에게서 독립해 나가려 하면서 많은 유혈사태가 났던 지역들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라틴아메리카, 필리핀 또한 적용되었다. 이는 영미권 식민지들의 독립역사와는 다른 부분이다.

필리핀인 독립운동의 계기가 된 사건으로 곰부르자 사건[74]이 있다. 1872년 카비테의 산 펠리페 요새에 위치한 무기고에서 과중한 조세에 대해 노동자들이 집단 봉기를 일으키자, 스페인 당국이 당시 개혁적 성향의 가톨릭 신부들이었던 마리아노 고메즈, 호세 부르고스, 하신토 자모라에게 반란 사주라는 누명을 씌워 처형한 사건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당시 마닐라 대주교는 반란 혐의로 체포된 신부들의 사제직을 박탈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교회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았다'라는 이유에서였는데, 사주 혐의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독실한 가톨릭 문화가 지배하는 필리핀에서 스페인 지배에 대한 반란을 대주교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간접적으로 인증한 셈이 된 것이다. 이 사건을 이후로 필리핀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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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앙 밝은색 양복이 호세리잘. 마드리드

이 필리핀 민족주의의 대표적인 사람으론 호세 리살(Jose Rizal)이 있다. 그는 위에서 언급한 곰부르자 사건에 연루된 신부 부르고스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고 한다. 호세 리살은 지주 출신으로 온건파 단체 필리핀 민족동맹을 조직한 반면, 빈민 출신인 안드레스 보니파시오(1863~1897)는 1892년에 원주민 중심의 급진파 독립운동단체 '카티푸난'[75]을 결성하여 1896년에 봉기를 일으켰다. 같은 시기 쿠바 같은 스페인 식민지 곳곳에서 독립투쟁이 일어나자 놀란 스페인 정부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카티푸난 중심의 독립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심지어 온건주의자 리살까지 카티푸난과 엮어서 붙잡아 그해 12월 30일 아침에 총살해버렸다. 필리핀에 가면 리살이 사형당할 때를 생생하게 청동으로 만든 게 전시되어 있다. 같은 필리핀인(스페인군 소속 필리핀인들에게 총살)의 총에 죽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며 일부러 등을 돌려 뒤에서 총에 맞아 죽은 게 재현되어 있다.

4.5. 필리핀 제1공화국, 미국-스페인 전쟁(1898)

이미 리즈 시절이 끝나버린 스페인 해군은 옛날 처럼 압도적인 위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영국의 패권이 점차 미국으로 넘어가고 있던 시대였다. 마닐라 만 전투에서 스페인 해군은 미국 해군에게 크게 패배한다.

무장투쟁을 하던 에밀리오 아기날도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배하자[76] 1899년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하여 필리핀 제1공화국 초대 필리핀 대통령이 되었다. 지금 필리핀의 국기도 홍콩(당시에는 영국령)에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만들었다.

5. 미국의 식민지배

5.1. 미국의 군정기, 미국-필리핀 전쟁 (1898~1902)

그러나 필리핀 제1공화국의 운명은 허무하게 끝났다. 미국이 필리핀을 차지하고자 한 것이다. 독립국이 아닌 미군정이 실시되었고, 아기날도 대통령을 위시한 독립파벌들이 대중의 지지를 받고 미국에 저항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다나오 섬을 비롯한 이슬람 지역은 여전히 기독교계 국가인 미국을 상대로 독립투쟁을 벌였고, 온갖 시위와 여러 사회적 문제가 폭발하여 제대로 국정이 이뤄지지 못했다. 또한 카티푸난과 같은 무장독립투쟁 단체들의 아기날도에 대한 지지와 게릴라 및 반정부활동으로 필리핀 정국은 혼란일색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미국-필리핀 전쟁을 일으켜, 저항활동을 하는 필리핀을 차지했다. 전쟁, 학살과 기근, 질병까지 겹쳐 적어도 20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민간인들을 한꺼번에 함포 사격으로 학살하는 짓까지 저질렀다. 대부분의 공격은 남부 민다나오의 무슬림 지역과 무장독립 단체인 카티푸난, 과격 시위대를 향해 이루어 졌다. 이와는 별개로, 지방에 기반이 있던 대지주 계층들은 대부분 마지막엔 결국 미국의 지배를 옹호했는데, 이는 스페인이 들어주지 않았던 실질적인 자치권을 미국이 허락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지켜진다.[77]

미국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전근대적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스페인 식민지 때보다도 자치권이 확대되고 수출확대와 기술혁신, 시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기도 하는 등 여러 계층에게 긍정적인 측면 또한 많이 존재했다. 이는 개신교청교도 정신을 가진 미국사 전반적으로 드러나는 면인데, 서양에서 가장 혁신적으로 민주주의 발전을 추구해 가는 국가정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5.2. 필리핀 제도 도민정부 (1901~1935)

아기날도 체포를 기점으로 필리핀의 저항은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미국은 필리핀에서 실시하던 군정을 민정으로 전환하여 필리핀 제도 도민정부를 수립하였다.

도민정부가 수립된 이후 미국은 1907년 의회 선거를 실시하고 1914년 양원제 의회를 도입했으며 영어를 널리 보급했다. 그 의도에 관해서는 민족의식 희석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하여튼 현재 필리핀에서도 스페인어는 거의 안 쓰이는 편이라 한다. 스페인어의 잔재는 사람 이름과 숫자, 지명 정도이다.

1902년 미국-필리핀 전쟁이 끝난 후 필리핀은 신흥강자인 미국의 영향 아래 완전히 놓이게 되고 필리핀에 정국혼란이 찾아와 정치구조가 지방 대지주들 중심으로 개편되기 시작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유럽이 쑥대밭으로 변하고 영국을 위시한 유럽 또한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다가 2차 세계대전 또한 발발하면서 필리핀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었던 중요한 무역파트너를 잃어버린다.

1912년 우드로 윌슨미국 대통령에 당선되고 여러 이익 관계와 세계 정세가 변하면서 필리핀을 대하는 미국의 정책도 변화하게 되었다. 윌슨의 민주당 정권은 필리핀 독립에 긍정적이었다. 필리핀을 관할하는 공공업무를 빠르게 필리핀인들로 대체하는 한편, 필리핀 상원을 발족시켜 입법권한을 나누어주었다. 1918년에는 필리핀 독립위원회가 수립되어 필리핀인들이 미국을 상대로 로비를 벌일 수 있게 되었다. 1934년에 자치법안이 통과되었고, 1935년 필리핀 자치령이 수립되었다. 자치령 대통령 선거에서 첫 대통령인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케손이 맞붙는 구도였는데 선거에서 케손이 압승을 거두었다. 케손은 타갈로그어를 영어와 함께 공동 공용어를 지정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고, 1941년 대선에서 81.7%라는 압승을 거두어 재선에 성공했다.

이후 세계 대공황까지 발생되면서 중계무역로로써 기능하던 필리핀 경제도 영향을 받는다.

5.3. 필리핀 자치령필리핀 제2공화국 (1935~1946)

1935년 필리핀 자치령이 성립된 이후 필리핀은 미국으로부터 독립 준비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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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필리핀으로 구출된 유대인들
스페인에 속했던 필리핀 땅에 16세기말 부터 개종한 유대인들이 첫 발을 내딛기 시작하였고, 이후는 통계를 정확히 내기가 어렵다. 대항해시대에 참여했던 유대인들은 정체를 숨길 수밖에 없었던, 스페인의 종교적 박해로 인해 모두 기독교로 개종할 수밖에 없었던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부터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유럽에서 온 유대인들의 필리핀 왕래가 더욱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지역에 있는 필리핀과 유럽과의 지리상 거리는 여전히 멀었다.

20세기 전후로 시작해서 필리핀의 국운은 분명히 크게 저물기 시작하고 있었다.[78] 국가 내외의 커다란 악재들이 중첩되는 속에서도 세계적인 자유주의 기조가 대세가 됨에 따라 필리핀은 인권, 자유등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나치에게 홀로코스트를 겪던 유대인들에게 난민 비자 10,000개를 발급하였고, 그중 1300여명을 구출했다. 이는 구 스페인 제국 식민지였던 국가들 중 유일했고, 또한 아시아에서도 유일했다. 유럽에서도 나치에게 고통받던 유대인들을 도운 국가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특히나 당시 교황청은 나치가 벌이는 짓에 대해 정면 비판하지 못하고 수수방관 했었기 때문에 이후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크게 까였다. 이 공의회에서 1,2차 대전을 제대로 중재하지 못한 교황청은 유럽의 민심에 따라 권력을 내려놓고 유럽정치와 정교분리를 선언하게된다. 이미 필리핀은 1차 대전 전후로 유럽과의 무역로가 끊어져 하등 상관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필리핀이 유럽정세를 읽고 있었으며 선행을 한 사실 또한 놀라운 일.

5.3.1. 태평양 전쟁(1941~1945)

이 당시에도 필리핀은 식민지 상태로써 라이플 총기를 제외하면 고급무기를 대량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더글라스 맥아더 또한 이 점에 대해 매우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는 반란위협을 억제하기 위해서라 보이고 미국과 필리핀에서는 전쟁이 일어난다고 예상하지 못했기에 미국과 필리핀 양측 모두 큰 신경은 쓰고 있지 않았다. 이 무렵 미국은 비 개입주의 상태로, 어떤 국가와도 전쟁 중이 아닌 평화로운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예상치 못하게, 과거 메이지유신을 할 때 미국의 도움으로 서구기술을 전수받았던 그 일본이, 진주만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공습하면서 태평양 함대 미해군은 효과적인 반격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궤멸되고, 9시간 후에 미국의 식민지라는 구실로 필리핀을 기습 공습했다. 주둔 미군과 필리핀군 또한 막심한 피해를 입고 많은 무기와 장비들 또한 파괴되었으며 물자와 장비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조나단 웨인라이트의 지휘 아래 반격하며 버티지만 결국 많은 미군과 필리핀군이 포로가 되었다. 이때 바탄 죽음의 행진이 일어난다. 이때 필리핀의 많은 문화유산 또한 파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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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마닐라 일부 외곽지역. 파시그-산타루시아(Pasig-Santa lucia)
마닐라를 점령한 일본군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다가 1943년, 루손 섬 마닐라 지역의 주요인사들을 겁박해 강제적으로 수립한 괴뢰 정부필리핀 제2공화국이 세워졌다. 일본군은 필리핀을 확실히 점령하기 위해 병력들을 각 지역마다 배치하였다. 주력 미군이 괴멸되자 더글라스 맥아더는 다시 돌아온다는 약속을 남긴채 떠났다. 이러한 진행상황만 보면 일본의 필리핀 점령이 순조롭게 보였다.

하지만 미군이 철수한 후 실질적으로 섬들을 일본에 넘겨준 상태에서 미군은 필리핀에 교신을 시도하였고 필리핀 점령지에서 저항 운동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아냈다. 실제 필리핀 48개 주 전역에서 아주 강력한 군사적 저항이 일어났고 각 주에서 독립운동을 겸한 크고 작은 전투가 시작되었다. 필리핀은 예로부터 각 지방의 힘이 막강하고 중앙정부가 일본에 굴복한 것과 일본이 필리핀 전역을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많은 민병대가 초반에 미군의 도움없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었고 셀 수없는 크고작은 전투들을 수행하였다.

필리핀에 남아있던 외국인들, 유럽인 위안부나 미처 철수하지 못해 민병대와 같이 움직였던 미군 패잔병들의 증언들에 알려지지않은 비공식적인 전투가 전국적으로 공공연하게 많았으며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필리핀 탈환을 수월하게 만들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필리핀 전선 일본군 전사자는 50만명이 훌쩍 넘어가고 그중에서 미군과의 전투로 인한 사망자를 제외하면 나머지의 대부분과 많은 실종자 수는 일본군의 필리핀 민병대와의 게릴라 전투 또는 백병전으로 인한 사망 숫자이다.

일본 제국은 필리핀인들이 스스로 원하던 지배자가 아니었고, 독립을 준비 중이였던데가, 기습 공격을 통해 침략해 들어와 멋대로 정부를 수립했기 때문에 따라서 전쟁을 할 명분은 충분했다. 필리핀 역사에서 2차 대전은 사실상 한국사로 치면 3.1운동을 무장 투쟁으로 국내에서 한 것과 비슷한 포지션이다.

이것은 스페인,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배 전개 과정과 크게 다른 점이다. 스페인,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화할 때는 각 섬들 내부에서 호응 세력이 많았고 따라서 이러한 만장일치적인 전국적인 저항들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필리핀 역사에 기록된 일본의 짧막한 식민지배는 실질적으로 전쟁상황이나 다름이 없었고, 일본은 단 한 번도 절대다수의 필리핀 국민들의 지지를 받거나 통치를 안정화시킨 적도 없다.[79]

일본군의 강제 점령을 통해 필리핀에 공포를 심는 작전은 별로 통하지 않았는데, 게릴라들의 지속적인 활동으로 인해 행정이 마비되었고 48개 주 중에서 12개주만 일본의 행정이 돌아갔으며 심지어 이러한 주 들에서도 전투가 지속되었다. 행정망을 파악한 필리핀인들은 미군, 필리핀 첩보원들에게 정보를 넘겨주었다. 당시 필리핀인들 자체적으로 결성한 민병대 병력은 미군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부대만 277개에 26만 명이였고, 조직된 항일 지하 구성원들은 국민들의 대부분이였다. 명목상 일본의 식민지배로 기록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전면전이였던 셈이다. 누가 강제로 동원령을 내려 징병으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25만 명이 넘는 민병대를 구성하여 일제에 맞선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필리핀 민병대들은 미국으로부터 2차대전 참전세력으로 간주되었고 보훈대상으로 지정되었다..

대부분의 필리핀 게릴라 민병대는 총과 탄약이 부족하여 창칼, 자체 제작한 일회용 샷건 등을 들고 칼리 아르니스를 시전하며 신식 무기를 가진 일제를 상대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치렀다. 근데 생각보다 이게 잘 통했다. 소수의 소총수들의 엄호 사격을 받으면서 창칼,샷건 등을 들고 뛰어다니며 일본군을 어떻게 교란하는지 알고 있었다. 열받은 일본군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민병대에 내통했을 것이라는 명목으로 의심 비무장 주민집단 모두를 살해하였다. 마닐라 대학살 등 50~100만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러한 일은 주로 건물들이 많은 수도권 도시에서 일어났는데 이들은 모두 비무장한 민간인 집단들이였다. 그런데도 필리핀인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게릴라 활동을 지속했다.

루손섬에서도 많은 민병대가 들고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라몬 막사이사이 등이 명성을 얻고 나중에 대통령이 된다. 하지만 루손섬의 많은 도시권 지역들은 탈환되지 못하였고, 대부분 첩보전 위주로 돌아갔다. 민간인 인질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비사야 제도세부,파나이,네그로스 등 비사야의 주요 섬들 미군이 상륙작전을 하기도 전에 민병대들에 의해 이미 탈환된 상태였다. 특히, 비사야 제도의 레이테 섬에서는 보급품도 시원찮은 필리핀 민병대가 미군이 상륙하기 전에 일본군을 섬의 남부지역으로 전선을 완전히 밀어내렸고, 이후 레이테 만 해전 이후 미군이 레이테 섬 남부에 상륙하여 민병대가 북쪽, 미군이 남쪽에서 공격하여 일본군을 전멸시킨다. 보홀 섬에서는 고작 7명의 민병대원들이 일본군 전초기지를 파괴해 섬을 탈환했다.

민다나오 섬술루 술탄국, 라나오 술탄국의 토호들과 왕손들은 민병대 수만명을 소집하여 일본군, 미군, 필리핀군 셋 모두를 상대로 싸웠다. 이들은 미군이나 다른 필리핀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지원도 환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모로족이 전쟁 중에 거둔 성공을 존중하였다. 왜냐하면 민다나오 섬 대부분의 지역 미군이 재상륙을 하기 훨씬 전에 이미 모로족에 의해 탈환되었으며

이들은 매니 파퀴아오의 고향인 부키드논 주와 라나오 고원을 탈환했다. 일본군에 의해 잡힌 미군 포로들의 증언에 일본군은 총도 없는 민다나오의 모로족들을 매우 두려워하여 도망다녔다고 한다. 무슬림 모로인들은 반세기 전에 신식 무기로 무장한 미군과의 전투로 크게 사상을 당한 경험과 미국과의 접촉으로 신식 무기에 대한 이해도가 어느정도 있었다. 또한 술루 술탄국 본거지인 홀로(Jolo)에서 타우수그 족에 의해 1000여 명의 일본군 1개 대대가 학살당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물론 대부분의 타우수그 족들은 총 없이, 창, 칼 등으로 무장하고 일본군의 사정거리 안팎에서 지속적으로 어그로를 끌면서 매복, 기습하여 게릴라 전을 펼쳤다. 그리고 이것은 미군, 필리핀군 상대로도 지속하였다.

게다가 일본군의 반자이 어택은 필리핀 민병대들에겐 거의 통하지 않았고 되려 역관광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미군과 필리핀군이 연합훈련을 할 시에 전통 검술인 칼리 아르니스가 훈련 플랜에 자주 들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실전성이 검증되었고, 미군 또한 그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칼리 아르니스의 명맥이 가장 오래 남아있던 곳도 술루, 라나오, 마긴다나오 술탄국이 있던 민다나오섬이였다. 그 검술 훈련을 술루 술탄국 수도였던 홀로 섬에서 미군과 필리핀군이 기념삼아 하기도 하는 유튜브 비디오도 있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미국에서 그린베레가 창설될 때 웬델 퍼티그, 러셀 볼크먼, 도널드 블랙번은 필리핀 민병대와 함께 게릴라 활동을 하며 배운 경험들은 미국 특수부대 그린베레 교육과정에 추가, 통합하였다. 오늘날 미군이 사용하는 일부 보병/생존 전술들은 실제로 2차 대전 때 필리핀 민병대들로부터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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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부족으로 인하여 일본침략을 단기간 내에 물리칠 수 없는 일진일퇴의 전선교착 상태에 직면하다가 마침내 맥아더장군과 군사장비를 다량 보유한 미군 본대가 중부 비사야 제도 레이테 섬 남부에 상륙하면서 전황이 크게 뒤집힌다. 이후 필리핀 탈환전이 이어지다가, 도쿄 대공습 및 미국산 핵폭탄인 원자폭탄 두 대를 투하 하자, 전쟁기간 동안 일본인 300만 명이 사망하였고, 막바지에 이르게 된 태평양전쟁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무조건 항복 선언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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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점령한 마닐라 도심가. 폐허가 된 우체국 건물
미국-필리핀 연합군이 마닐라를 재점령했고 태평양 전쟁이 종결된다, 이로써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명실상부한 패권국가로 발돋움한다. 1년 후, 1946년. 오랜기간 독립을 준비해왔던 필리핀 자치령은 미국의 승인 아래 완전한 독립에 성공해 4세기간의 외세 지배가 끝남과 동시에 역사 이래 처음으로 필리핀 제도 전 지역을 통합한 주권국가가 된다.

한편, 일제에 투쟁해오던 필리핀의 공산주의 단체인 후크발라합(Hukbalahap)은 이 독립은 독립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토지개혁 등을 요구하고 반미 무장투쟁을 개시해 1950년에는 단원이 무려 7만에 이르렀으나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에 의해 거의 진압되었다.

6. 독립 이후

6.1. 필리핀 제3공화국(1946~1972)

1945년 10월 24일에 유엔에 가입한 후, 1946년 7월 4일에 독립하여 제3공화국이 수립됐으나 정관계 유착이 심해지면서 민중들이 공산당에 등을 돌렸다. 같은 시기 공산군도 좌익 무장투쟁을 개시하는가 하면 군부세력도 같이 대두해 정치상황은 혼란 일색이었다. 이는 세계적 흐름으로, 전 냉전기 좌우익 투쟁은 당시 많은 국가들이 가지고 있던 공통된 문제 상황에 처해있었다. 이와는 별개로 필리핀만이 가지고 있던 여러 잠재적 악재 요인(산업 구조, 지주 세력, 분열 위험 등)도 많았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UN 안전보장이사회가 개최되고 국운이 저물어가던 필리핀은 국가 사정이 좋지 않았음에도 UN의 정신적 가치에 부합하여 파병을 결정하게 된다. 파병국들은 미국을 위시한 개신교 뿌리를 가진 자유진영 국가들이 다수였는데, 구 스페인 식민지였던 가톨릭 국가들 중에는 유럽을 제외하고는 콜롬비아, 필리핀만이 이 전쟁에 참전한다. 기독교국가인 동시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키 위해 참전한 유일한 아시아 국가라는 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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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미군과 사진을 찍고있는 필리핀군, 전통 칼 중 하나인 Bolo를 들고 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에 파병된 필리핀군 900여 명은 율동 전투에서 4만명의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되려 격퇴시켰다. 다른 모든 UN군이 후퇴할 때 필리핀군은 남아서 중대 단위로 흩어져서 최대한 많은 중공군의 발을 최전방에 붙잡아 두었는데 간간히 백병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필리핀군은 12명 밖에 전사하지 않았다. 되려 중공군 공세가 잦아들자 이튿날 미군 전차 2대의 지원만 받은채로 잃어버린 지역을 되찾기 위해 북쪽으로 진격하려고 했다. 아마도 중공군 본부를 치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남쪽으로 내려가려는 중공군들이 발을 되돌려 본부를 방어할 것이라는 필리핀군의 판단이였을 수 있다. 하지만 유엔군사령부는 이를 인지하고 다른 명령을 내렸는데, 남쪽에 포위될 위기에 처한 미 1군단, 9군단의 부대들을 도우라는 명령을 받고 필리핀군도 퇴각하였다. 이때 필리핀군은 전장 한복판에서 몇 키로씩 이동하여 아군 시신수습까지 확실히하고 내려왔다.

이 시기는 당시 필리핀계 미국인들이 본인 재산을 가지고 정상적 방법으로 미국에 이민을 가던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필리핀계의 본격적인 대규모 미국이민 시기는 20세기 초반에 시작되었으므로 1965년 아시아인 이민 금지가 개정된 것과 별개로 이전부터 이민을 가고 있었다.

이 시기 정도가 되면 필리핀을 한국과 비교해 당시 잘 살았었는지 따져보는 것은 무의미할 정도로 국운이 내리막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필리핀 혁명(독립전쟁), 미국-스페인 전쟁미국-필리핀 전쟁, 태평양전쟁 등 반세기 동안 총 4번의 외교관계가 걸린 전쟁이 발생하였고 잇따른 전쟁 속에서 정치와 외교 노선의 혼란, 그에 따른 내전상황이 얽히며 혼란이 발생하였다. 미국-스페인 전쟁 전후로 라틴 아메리카와 스페인과의 무역로는 이미 오래전 없어졌고, 1,2차 대전을 거치며 혼란스런 세계 흐름 속에서 영국 및 유럽과의 무역로 또한 끊어졌으며, 당시 중국 또한 청나라 말기의 혼란부터 국공내전을 거치며 공산정권이 들어서게 되면서 필리핀의 중국과의 중계무역로로써의 기능 또한 상실된 상태였다. 즉, 몇백년간 이어지던 무역로들이 20세기 중반쯤 되면 전부 상실된 상태였다.

더욱이 전후 복구 및 혼란한 정국을 바로 세워야 했던 시기에 대부분의 일루스트라도스(지식인층) 필리핀인들은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미국, 중남미, 스페인으로 이민을 가거나 또는 스페인, 미국을 상대로한 독립전쟁, 그리고 태평양 전쟁 때 전쟁터에서 전사한 일루스트라도스들도 많았다. 도시권 중산층, 자본가, 지식인 및 전문직 계층이 붕괴되면서 지방 대지주를 제외하면 많이 남지 않게 된다. 세계적으로 문맹률이 높던 시절 전통적으로 필리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중산계층의 붕괴는 타격이 컸고 전후복구 및 정국수습과 이후 필리핀 민주주의의 악화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후 필리핀 정치의 공백을 지방 대지주들이 차지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면서 필리핀은 과두정형태로 이들 중심으로 돌아간다. 대지주층들을 중심으로 반공을 확실히 하면서 확실히 친미국가가 되는 기반이 되긴 하지만, 토지개혁과 멀어지면서 전근대 스페인 제국 시절부터 존재하던 대지주들의 권력이 유지되는 형태로 정치구조가 개편되고 민주주의와도 멀어지면서 20세기의 주요 키워드인 민주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 활성화란 이미 떠나버리고 없는 기차와 같은 것이 되고 만다.[80][81]

19세기초부터 시작된 중국인들의 이민행렬 또한 이 시기(1930~50년대)가 끝물이다. 헨리 시, 루치오 탄, 존 고콩웨이 등 중국에서 가난했던 청년층들이 이 시기에 혼란일색이었던 필리핀에 와서 정착한 이후 극소수가 정경유착을 통해 재벌이 되기도 했다. 미국이 필리핀을 독립하고 떠난 이후 지방부동산과 농업, 관료 및 정치계는 토착 대지주들이, 서비스업, 관광업, 여러기업들은 이 시기에 이민왔던 신흥화교계 필리핀인들이 현재도 양분하고 있다.

한국의 기성세대가 보아왔던, 잘살았다고 생각했던 필리핀 이미지의 실상은 이미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 상태의 필리핀이었다. 사실상 한국또한 전근대 조선일본 제국이 강제로 점령하면서 식민통치 35년간 착취를 겪었던 반면, 개화기부터 서구식 공업과 근대화가 시작되었던건 마찬가지였고 1960년쯤 되면 한국과 필리핀은 어떤 통계를 사용하던 별로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82] 1970년대부터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게 되면서 필리핀을 크게 추월하게된다.

탈 많던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이 시기를 거쳐 완전히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은 GDP 규모 34위로 세계평균 이상은 유지하고 있는 등 준수한 편이다. 외교 또한 미국의 비 나토 동맹국이면서 미국-필리핀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으며 호주와도 군사협정을 맺고있다. 영어권인 영연방 국가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문화적으로 친밀하며 일본 자민당, 이스라엘[83]과도 매우 우호적인 관계이다.

초대 필리핀 대통령은 로하스이나 재임 2년만에 사망했다. 그 다음 대통령인 키리노는 원래 필리핀의 정치인으로 항일운동을 지도한 사람이었으며, 대미협조를 근본정책으로 삼고 장제스와 유대하려 했다. 이후 1953년 역시 항일 게릴라 투쟁을 했던 라몬 막사이사이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는 공산주의 게릴라인 후크발라합을 진압하였으나, 195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그 다음엔 카를로스 P. 가르시아가 잠깐 집권했다가 1961년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이 뒤를 이었다. 그 역시 반일 운동을 지원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반공을 표방하며 미국과 친하게 지내려 했으나, 그도 1965년 선거에서 패배한다. 그리고 그 때 당선된 사람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이다. 이 시기쯤 되면 필리핀은 여러 악재요인으로 인해 거의 끝물인데다 회생불능 상태에 놓이게 되고, 늘 과두정 형태로 역사를 견인해오던 필리핀의 마지막 끝물을, 필리핀 역사에 단 한번도 없던 독재자가 화려한 부정부패로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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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중국 계통(화교) 필리핀인이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중국(화교) 계통의 필리핀 유력가문 출신으로 전쟁 전에는 정적을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도 받았었다. 그러다가 최종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으며 석방되었고, 항일 게릴라 활동을 거친 후[84]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지냈고, 이후에 필리핀 자유당원 소속으로 하원의원을 지내고, 마닐라 시장직에도 당선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는 196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경선에서 패배한 후에 자유당을 탈당하고 국민당으로 당소속을 바꾸고 1965년 대선에서 51.9%의 득표율을 얻어 대통령이 되는데 성공했다. 재임 초기에는 친미반공 일변도였던 필리핀의 외교노선을 바꾸어서 소련 등 공산 국가들과 수교를 맺었고[85], 동시에 중소 경공업을 육성하면서 경제도 호황을 누리면서 사회문제들도 어느정도 해결되는 듯 보였다. 때문에 1969년 대선에서 61.5%의 득표율을 얻어 압승을 거두면서 전후 최초의 재선 대통령이 되었는데, 재선 이후부터가 본격적으로 문제였다.

6.2. 필리핀 제4공화국: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독재정권(1972~1986)

마르코스는 재임 2기 중반부터 점차 막장이 되어 결국 1972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했으며[86] 여기에 반공을 내세워 야당인사들과 만디나오 섬의 무슬림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또 정부 요직에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와 장남 봉봉 등 친인척들에게 요직을 맡기고 개인재산 수억 달러를 국외로 빼돌렸다.

같은 시기 필리핀 곳곳에서 무장세력이 들고일어나 반 마르코스 투쟁을 전개하자, 정부군이 총동원되면서 실질적인 전시체제로 접어들었다. 특히 1968년에 필리핀 공산당이 조직한 신인민군(NPA)과 1969년에 소수민족인 모로족들이 만든 무장 독립투쟁 단체 '모로민족해방전선(MNLF)'이 각각 열대우림 같은 곳에 숨어서 게릴라 작전을 벌여 마르코스를 세게 압박했다. 이에 여론이 악화되자 마르코스는 1981년에 계엄령을 풀지만 부정선거로 3선에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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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이 아키노. 스페인 메스티소상글레이 혼혈 계통의 필리핀인이다.
그러나 1983년에 그의 정적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Benigno Simeon "Ninoy" Aquino Jr.)가 미국 망명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필리핀 마닐라 국제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암살당한 사건을 계기로 국내외로부터 반마르코스 여론이 거세지면서 국민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그는 1986년 초에 대통령 선거를 앞당겨 치러, 이 대선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연장할 생각이었는데 제대로 치르면 낙선할 게 뻔하므로 부정선거를 저질러 상대인 니노이 아키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 후보를 이겼다. 그러나 코라손 아키노는 물론 필리핀 국민들도 이에 불복하면서 2월에 전국에서 노란 머리띠를 매고 반마르코스 투쟁을 벌이자, 마르코스는 대통령직을 내놓고 가족들과 하와이로 망명했다.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의 2006년 저서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 따르면 마르코스 시절 필리핀의 경제가 나빠졌다고 언급됐지만, 실제로는 꾸준히 성장했다. 집권 초기와 비교하면 확실히 성장했다.# 이는 동시기 수하르토 치하 인도네시아의 경제 성장 과정과 비슷한 속도였다. 다만 베니그노 아키노 암살 사건 등으로 입지가 명백하게 불안해진 1983~1986년에는 경제 성장이 하락세로 돌아섰으며, 이는 마르코스가 정권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든 큰 원인이었다.

6.3. 필리핀 제5공화국: 마르코스 이후(1986~)

독재자 마르코스가 망명한 후 베니그노 아키노의 아내인 코라손 아키노가 6년을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반정부 인사들을 대거 사면하고 대통령의 임기를 6년 단임제로 제한하였으며 지방분권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으나, 임기 중반인 1989년에 군부 쿠데타가 터지는 등 정치적으로 불안했고 90년대 이후 민족주의 정치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1992년에 전 국방장관 피델 라모스가 수십년 만에 공정한 자유선거로 당선되어 '필리핀 2000'이라는 산업화 및 경제성장 정책을 추진하여 망가진 경제복구에 주력했고, 집권 초기부터 미군을 철수시키고 NPA 지도자급 인사들을 석방시켜 공산당을 사실상 합법화시킨 후, 1996년에는 MNLF와 평화협정을 맺어 평화정착에도 힘을 썼다.

1998년에 영화배우 출신 조지프 에스트라다가 서민대통령임을 내세워 서민의 지지를 받아 당선됐고, 농업개혁 같은 친서민 정책을 추진하려 했으나 2000년에 도박단 뇌물수수에 연루돼 이듬해 초 탄핵 직전에 사임했다. 이후 글로리아 아로요, 베니그노 아키노 3세 등이 대통령직을 거치며 절차적 민주주의가 점차 정착됐고, 경제성장도 차차 진행됐다. 그러나 마르코스 시절부터 악화된 치안, 내전 문제나 정치계에 만연한 부패, 몇몇 가문의 정치 독점 등은 필리핀의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으며, 같은 시기 민다나오를 기점으로 한 '아부 사야프'란 이슬람 무장단체가 분리독립을 외치며 납치, 유괴 등 온갖 테러를 벌여 필리핀 정부를 위협했다.

2013년 7월 27일에 민다나오섬에서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방사모로 공화국을 건립하였다. 다만 이 미승인국은 동년 9월 28일에 지속적인 전투에서 패배를 기록한 영향으로 멸망해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2014년 4월 28일 미국과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을 맺어 미군 주둔을 다시 허용시켰다.

2016년 5월 대선에서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당선되어 과격한 방법으로 필리핀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해서 전 세계에서 우려를 나타냈으며, 2021년에 필리핀 탄생 500주년 기념일이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2022년 대선에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봉봉 PFP 후보[87]가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자유당)을 꺾고 당선되었다.

7. 출처



[1] 이전에 오스트로네시아계열 네그리토라 써있었는데, 엄연히 오스트로네시아는 하플로그룹상 아시아열대지역 사람들과 갈린다. proto오스트로네시아는 차라리 사하라이남 니제르콩고어족과 가깝다.[2] 도자기, 비취, 청동기 등[3] 다만, 중국에 남은 이들은 한족과 통혼하고 흡수되었다.[4] 이는 비슷한 시기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도 마찬가지다.[5] 이후 스페인 제국 식민지 시기 300여 년간 임금을 지불받을 때 금, 은화를 지급받았고 미국 식민지 때도 금, 은화에 기반한 화폐로 쓴다. 그러다가 2차대전 이후 미국이 패권국이 된 후 달러가 기축통화가 되고 세계적 흐름으로 금본위제가 폐지되면서 필리핀도 종이화폐를 사용하게 된다.[6] 비슷한 시기 태국은 5세기부터, 베트남은 8세기부터 화폐 유통을 하기 시작한다.[7] 일본 막부가 대략 11년에 1회였던 것에 비하면 꽤나 준수한 편이다.[8] 마닐라는 남중국해의 여러 상업, 해적 세력들 중 베트남 등과 함께 중국과의 정기무역권을 가진 몇 안되는 세력이었다.[9] 왕도 아닌 일개 바랑가이 지도자들로 추정되는 유골들이 각종 귀금속 공예품들과 함께 발견된다.[10] 많은 루손인들이 포르투갈의 항해사 또는 선원으로 활동했고 포르투갈이 중국에 최초로 사절단을 보낼 때 루손인들과 그들의 배도 동행하였다. 또한 이것은 현지에 파견된 포르투갈인들이 직접 본국에 루손인들을 추천한 결과였다.[11] 단적인 예로 Surya Diraja라는 한 루손인 상인은 포르투갈에게서 임대한 땅으로 경영을 하여 중국에 매년 175톤의 후추를 수출했고 포르투갈에 9000 cruzados 금화를 지불했다. 즉, 포르투갈 영토의 식민지 경영자로 고용된 셈이다.[12] 유럽 최강의 육군 스페인 테르시오 중대를 상대로 게릴라 혹은 야전에서도 승리한 기록도 꽤나 남아 있다. 스페인 육군은 왜구, 리마홍 등의 일본계, 중국계 군벌, 해적들과의 전투에서 적은 병력으로 손쉽게 승리하였고, 중남미 인디언 문명들을 각각 몇백 명으로 멸망시킨 군대이다.[13] 왕으로 표현된 것은 마닐라, 톤도, 부투안 등의 상업왕국도 마찬가지였다.[14] 민다나오섬은 현재도 금을 포함하여 가치가 높은 지하자원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15] 정교한 기술들이 필요한 제품들과 간단하고 단순해 보이는 제품들이 동시에 발견되는데 전자는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등의 동남아 여러 왕실들과 페르시아, 인도, 중국, 일본 상인들에게 판매했고, 후자는 필리핀 제도 내부의 서민, 노예들에게 수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6] 몇 백년에 걸친 식민지시기 동안 고급 귀금속공예품들의 일부는 아메리카, 유럽 등으로 판매 또는 유출된것으로 추정된다. 남아있던 것들은 2차대전 때 일본군이 일부는 약탈 시도를 하지만 실패하고 현재는 행방이 묘연하다가 일부 유물이 아얄라 가문의 박물관에서 전시되었다. 현재 유물로 남아있는 금속공예품들은 극히 일부이다.[17] 하지만 식민통치 후기~말기 사이에 이들도 스페인의 회유에 의해 정복당한다.[18] 복싱선수 매니 파퀴아오가 이쪽 지역 출신이다.[19] 호주 대학들과 하버드 대학교에서도 필리핀사 연구에 인용되고 있는 기록이며, 스페인측 문헌자료에도 교차검증되어 나타난다.[20] 일본 게임 제작사 코에이에서 발매한 대항해시대4에도 필리핀의 대표적인 특산물이 으로 표현되어 있다.[21]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만난 스페인 측 사절단은 필리핀을 정복하겠다는 히데요시의 말을 전달해 들었고 필리핀 도독령에 보고하였다. -정작 3000명이 동원된 일본 정규해군은 1610년 안드레 페소아의 포르투갈 갤리온선 한 척을 상대하는 것도 꽤나 오랜 시간 애를 먹었다.- 이후, 1637년 도쿠가와 정권 또한 필리핀을 정복하려 했고, 네덜란드에 설득을 시도했지만, 네덜란드가 요새인 필리핀은 현실성이 없다며 거절했다는 기록이 있다.[22] 실제 DNA 검사 결과 평균적으로 필리핀인들의 DNA의 30%는 동아시아계로 나온다.[23] 실제 마닐라, 톤도의 왕족 및 몇몇 귀족계층들은 브루나이 왕의 딸들과 통혼하였고 이러한 혼맥을 바탕으로 브루나이, 말레이 등 무역허브들과 무역을 하였다.[24] 브루나이, 대만, 인도네시아 일부까지 정복하고 필리핀 도독령으로 편입했으나 이후 영토를 상실한다.[25] 길이가 30m, 폭이 6m 이상인 것들은 주앙가(Juanga)라 불렸다. 이런 것들은 첨저선으로 원양항해와 소규모 무역선으로도 많이 이용되었으며, 중동까지 갔다고 추정되지만 마다가스카르까지만 문헌으로 발견되었다.[26] 높이가 낮아 군선이 가벼운데다 노가 많이 달려있고 큰 돛까지 달아 일본의 세키부네보다 1.5배~2.5배까지 빨랐다.[27] 술루 술탄국을 공략하다가 해전에서 패배. 80년 전쟁때도 필리핀 도독령과 해전을 벌이다 토착 군선들에 호되게 당하고 5번 패배했다.[28] 술루 술탄국을 공략하다가 해전에서 패배.[29] 이슬람계 토착 상업왕국들과의 대규모 해전에서 패배, 필리핀 도독령 설립이전 5번의 원정 실패, 그 중 몇 번은 해전으로 추정.[30] 필리핀 도독령 설립이전 루손인 용병단의 지원을 받은 남중국해 이슬람 함대와의 전투에서 격퇴당함.[31] 한반도 왜구들은 열도와 가깝기 때문에 대체로 일본인들로만 구성되어 대마도를 경유해 왔었다.[32] 다만, 일본 왜구들또한 개방항구인 필리핀 마닐라를 경유해 동남아에 진출한 아시아의 여러 용병집단 중 하나였을뿐 유럽의 바이킹, 카탈루냐 용병 마냥 압도적인 위용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어느 지역을 점령하여 영토로 삼지도 못하였고 동남아산 보물들을 악명높게 잘 약탈하고 다니는 집단들도 아니었다. 유럽 또는 동남아시아 기준으로 특출날 정도로 우수한 검객집단들도 아니었다. 일본 왜구들은 베트남, 마카오, 필리핀 등에서 쉽게 제압 당한 바 있고 말라카, 마닐라등 개방 무역항에서 아시아의 다른 다국적 용병들을 누르고 호위병으로 발탁된다거나 하는, 알려진것 보다는 강한 포스가 발견되지 않는다. 시암 왕가에서 고용한 바 있는데 이 또한 왕실에 고용된 여러 아시아의 다국적 용병들 중 하나였을 뿐이고 바랑기안 가드 마냥 독점 고용의 형태는 아니었다.[33] 당시 기록에 성질은 대체로 모난 편이라 물불 안가리고 다른 다국적 용병들과 매번 부딪히는 경우가 많아 매번 항구에 입장할 때 카타나를 미리 압수해두면 얌전해 졌다고 한다.[34] 2010년작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사용하는 무술이다.[35] 참고로 중근세 스페인 군인들은 유럽 최강이라 불렸고 최소 100여 년간은 패배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때때로 두 배에서 10배에 가까운 적을 상대로도 승리하였다. 800여 년간 이슬람군을 상대로 레콩키스타 전쟁을 수행하여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전략, 전술 뿐 아니라 병사들 개개인의 전투능력도 유럽 최강의 기량을 드러냈다. 테르시오, 카탈루냐 용병, 카가얀 전투, 안드레 페소아(Andrea Pessoa) 선장의 해전 등 당시의 군사적 활약상을 엿볼 수 있는 기록들이 많다.[36] 무엇보다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은 필리핀에 오기전에 신대륙에서 고작 몇백명으로 무쌍을 찍고 인디언 문명 3개를 정복, 멸망시킨 군인들이었다. 이는 단순히 전투력이 뛰어난 것을 넘어선 것이다.[37] 스페인은 마젤란의 첫번째 원정 실패를 포함하여 50년간 공식적으로만 6번의 필리핀 원정대를 파견하였다. 포르투갈도 필리핀 지역의 이슬람 함대에 격퇴당한 적이 있는 것을 보아 이는 신대륙과 달리 필리핀 정복과정이 꽤나 어려웠음을 뜻한다.[38] 상어가죽, 코끼리 가죽, 흑단, 대나무, 밧줄, 아이언우드 껍데기 등등[39] 반면에 바다에서 그물을 활용한 양식어업은 선구적인 기술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스페인의 기록이 있다.[40] 메소포타미아, 인더스계 문화가 모든 시기동안 우세하였다. 지배층들의 혈통을 살펴봐도 아랍이나 인도계 인물들이 말레이인 세력을 이끌고와서 정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41] 여러 문화와 인종이 만나는 교차로라는 점, 오랜 옛날 상업으로 번성했지만 세계무역의 지리적 구조가 바뀌며 오늘날 가난하단 점에서 유사하다. GDP 규모는 필리핀이 34위로 중앙아시아 국가들보다 월등히 높다.[42] 동남아 유전인자 다음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43] 중국 유전자 다음으로 높은 비율로 존재한다.[44] 유전자 검사결과 유럽인 혈통은 대체로 5% 이하이다.[45] 양식, 작살, 그물, 낚시에 능했고 민물과 해양을 가리지 않고 잠수와 수영의 달인들이라 되어 있다. 민물어업은 빠른 시간 안에 씨가 마를 정도로 잡아내서 스페인인들이 그만 잡으라고 말려야될 정도였다고 한다.[46] 참고로 이도학 교수는 환단고기는 부정하기 때문에 재야사학자와 따로 구분해서 쓴 것이다.[47] 필리핀 역사에서 타인종과의 혼혈이 그나마 적게되면서 토착민 문화집단으로써 유지된 그룹이 필리핀 네그리토들이기도 하다.[48] 필리핀 네그리토들은 흑인으로 분류되나 아프리카 흑인들에서는 데니소바인 유전자가 나타나지 않는 차이가 있다.[49] 게다가 한때 브루네오 섬 일부 지역과 팔라완 남부, 민다나오 섬 일부를 점유할 정도로 영토를 확장해나갔다.[50] 신대륙에서의 무력 정복과 달리 필리핀에서는 충성을 사기 위해 돈을 써야하는 사정이였다. 실제 스페인은 필리핀 6차 원정에서 다수의 화승총을 실어온 것으로 추정되며 회유된 현지군대를 화승총으로 무장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필리핀은 열대 기후에 습한 날이 많고 숲이 많아 화승총의 신뢰가 떨어지는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승총이 그나마 효율을 발휘 했다는건 현지군대들의 검술이 스페인이 인정할 정도로 뛰어났단 이야기. 그리고 화승총 자체가 각 지역 내 비주류 부족들에게는 큰 뇌물이 되었을 수도 있다.[51] 일본이나 중국역사의 천황,황제 등 지도자들의 신격화 요소들이 존재하지 않았고, 다른 동남아 국가들에 비해서도 중앙집권화 되지도 않았었다. 한 바랑가이 안에서 종교도 제각각인 경우가 많아 제정일치 사회도 아니였고, 각 상업왕국들의 왕권이 낮았고 명분보다는 국제무역질서를 바탕으로한 철저한 이익중심으로 정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중국,일본에 비해 금,은에 의한 뇌물이 꽤 잘 통했던 사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필리핀 식민지화는 스페인이 필리핀 토착세력들을 돈으로 사는 형태였다.[52] 지구 한 바퀴를 세계 최초로 일주한 것으로 알려진 그 원정대이다. 스페인 국왕이자 이탈리아 군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의 지원을 받은 세계일주인 만큼, 최정예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53] 다만, 스페인 원정대가 필리핀의 존재를 몰랐던건 아니다. 포르투갈인들은 인도양 루트를 통해 말라카 해협을 지나 이곳을 지나간 적이 이전에도 많이 있었고 동남아, 남중국해 탐험 및 여러지역과의 무역 활동도 하고 있었다. 필리핀도 정복 이전에는 그러한 지역 중 하나였다.[54] 흔히 식민지배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착취 일변도의 식민지배는 후기~말기에 이르러 세계의 무기와 기술체계가 바뀌고 열강들의 경쟁이 심화되는 시기이지 본 문단에 해당하는 시기가 아니다. 애초에 이후의 태평양 갈레온 무역로 형성 또한 현지에 무역로를 형성하고 있었고 아시아 무역의 지리에 훤했던 토착 상업왕국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55] 또한 마닐라 전투에서 중국 해적들을 격퇴시킨 식민지 민병대는 임금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56] 아르헨티나의 경우 같은 제국에 속했지만 필리핀이나 멕시코와 다른 양상을 보였는데, 토착 인디언들을 학살하며 몰아냈다.[57] 필리핀은 고대부터 상업이 발달하여 보다 실용주의, 실력주의가 발달하였고 식민시대에도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긴 시간 지켜내어 인종서열, 계급의 고착화는 다른 중남미 또는 대부분의 아시아 사회보다 상대적으로 적었다.[58] 더군다나 필리핀은 다른 가톨릭 수도회들보다도 개혁 성향을 보이고 스페인 본국에서도 독자적이라고 욕을 많이 먹었던 수도회인 예수회 활동의 거점인 곳이었다.[59] 이는 스페인 혈통을 중심으로 장기적인 중앙집권화를 도모하기 위함이었다.[60] 현재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서구식 대학은 산토토마스 대학교이다.[61] 7년 전쟁이후 영국과의 무역관계 포함.[62] 일본의 은화는 스페인이 오기 이전부터 시작하여 17세기 초반까지 필리핀과 중국으로 엄청난 양이 빨려들어가 이미 명나라 말기부터 전황을 겪었다.[63] 중국은 상술했듯 지정은제를 실시하였으나 특유의 유교식 관료제의 영향으로 지배층들의 관료적 수탈과 매점매석 이후 화폐의 독점으로 빈부격차가 심했고 마찬가지로 전황 상태가 존재했다. 애초에 화폐개혁인 지정은제 자체는 지배층들이 지하경제로 숨겨놓은 고액가치 은화를 국가 조세로 포함시키려는 의미도 있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화폐 양에 비해 중국 본토의 인구가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하층민들은 형성될 수밖에 없었고 가난한 계층의 중국인들은 16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지속적으로 필리핀에 이민하였다.[64] 텍사스주는 한때 그 이름이 누에바 필리피나스(Nueva Filipinas)였다.[65] 1646년에 네덜란드 해군과의 전투 때 단 3척의 마닐라 갤리온으로 19척의 네덜란드 함대에 맞서 승리한다. 이때 마닐라 갤리온은 단 한 척도 침몰되지 않았다. 사실, 두 번의 태풍으로 침몰한 무적함대를 포함해서 스페인 해군의 명성은 여러모로 재수 없는 해전들을 했던 16세기보다는,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100여 년간 가장 전력이 강했고 명성과 승률 또한 높았다.[66] 오늘날 필리핀 대부분의 정치가문들이 이들과 스페인 혈통의 혼혈들이다.[67] 임진왜란 때 사쓰마로 끌려간 조선인 도공들이 제작한 사쓰마 도자기 또한 중국도자기와 다른 색채를 유럽에서 인정 받았다. 또한 중남미 원산인 고추고구마가 필리핀 도독령과 밀무역을 하던 사쓰마를 통해 조선으로 유입되었고, 김치가 빨간색, 매운맛으로 변하는 계기가 된다.[68] 스페인인도 두 종류가 있는데, 본토 출신은 '페닌술라레스', 식민지 출신은 '인술라레스'나 '크리오요'라고 각각 불렸다.[69] 스페인의 세계패권은 오래 전에 끝났고 바다에서의 해군력은 이전만 하지 못해서 영국 해군에게 마닐라가 몇 년간 점령당한 일도 있었다. 애초에 영국의 마닐라 점령 의도는 아시아 태평양 무역로 장악이었다. 라틴 아메리카 또한 그들의 독립 움직임들이 노골화된 상태에서 지구 한 바퀴를 돌아야 하는 갈레온 무역로 또한 필리핀인들 입장에선 매우 불안해 보이는 상황인데다 적자가 나는 등 이익이 시들해진 상황이었다. 더이상 다른 열강으로부터 필리핀을 제대로 지켜주지도 못하는 데다, 다음시대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채 고세율과 충성맹세만 강요하는 스페인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길을 열어야만 하는 필리핀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70] 19세기 초부터 많은 청나라 사람들이 이민을 오기 시작한다.[71] 메스티소 계통이다.[72] 당시 중국은 혼란스러웠고, 조선은 쇄국상태였으며 일본은 이제막 메이지유신에 접어들어 아시아 경제의 중심축은 아직 서구자본이 많이 미치지 않은 내륙보다는 대륙에 가까우면서도 해양 한가운데 있던 필리핀이었다. 이 당시의 지하경제와 밀무역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고 어떤 물품들이 세세하게 오갔는지도 전부 파악할 수 없다. 지금처럼 투명한 세관도 아니었고 금융실명제, 실시간 시스템 전산화를 바탕으로한 자유무역, 시장경제체제가 이루어진 시대도 아니기 때문에 얼마만큼의 자본이 거쳐 갔는지도 알기 어렵다.[73] 진주만미군들이 선전포고도 하지않은 일본 제국에게 기습공격당해 궤멸당한 후, 미국 식민지라는 구실로 9시간 후에 필리핀도 공격 당한다.[74] Gomburza. 스페인에 의해 희생된 3명의 가톨릭 신부인 Gomez, Burgos, Zamora를 합친 약어다. 문서 첫머리의 동영상 38초쯤에 나온다. 16세기 사람인 라푸라푸 다음으로 나온다는 점에 주목하자. 곰부르자 사건은 필리핀 근세사와 근대사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다.[75] 약칭 KKK. 미국의 KKK와는 전혀 연관 없다. 지금도 필리핀에서는 국가기념일에 빨간 바탕에 하얀 글씨로 KKK가 박혀있는 카티푸난기가 걸린다.[76] 아기날도는 필리핀 독립군을 이끌다가 홍콩으로 망명했었다.[77] 이러한 일 때문에 미국이 튀르키예에 오스만 제국 시절 튀르키예가 자행한 아르메니아 학살을 인정하라고 하자 서구 국가에게 욕먹는 튀르키예는 늘 하던 방식대로 외국의 학살을 들먹였는데, 그게 미국의 필리핀인 학살이었다. 결국 미국이 주도하던 미 상원의 아르메니아 학살 결의안 통과는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 사건은 미국에서도 말이 많아서, 마크 트웨인은 처음엔 이 전쟁을 지지하다 나중에 돌아가는 꼴에 경악하여 미국 정부를 비판하는 책을 썼다가 출판금지를 당한 전력이 있다.[78] 외교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시작된 전쟁과 내부의 정국불안을 가중 시키는 좌우익 대립, 공산주의 반군들, 정치권의 분열, 이슬람 반군들 등등.[79] 1564년, 레가스피의 6차 스페인군 원정대가 왔을 때는 콩키스타도르 380명이 왔고, 1899년,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화 하려고 왔을 때는 미군 12만 6천명이 왔다. 반면에, 1941년 최소 일본군 32만명과 당대 신식 군함과 무기를 가지고 왔으나 스페인 또는 미국의 식민지배가 시작되었을 때는 이 정도의 전국적인 저항이 일어나지 않았다.[80] 기존의 대지주층의 권력유지를 위해서 경제성장을 통한 새로운 자본가의 형성과 대중에 기반한 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자유무역의 혜택, 시장개방으로 인한 해외자본유입, 공산주의, 그 어느것도 원하지 않게 된다.[81] 현 필리핀의 정치구조는 현대, 근대, 근세, 중세 중에서 중세와 가장 가깝다.[82] 1950, 60년대 당시 웬만한 아시아 국가들은 한국보다 잘 살았다. 일본과 석유사업을 일찍 시작한 일부 중동국가, 브루나이, 싱가포르, 홍콩 등의 소국들을 제외하면 그 외 국가들은 한국보다 잘살았다는 북한도 그렇고 사실상 같은 후진국이자 개발도상국들이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당시 대부분이 후진국이었던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비교해 잘 살았다는 건 의미가 없다. 이미 1960년대면 필리핀은 경제적으로 후퇴를 이루는 등 막장의 길을 가고 있던 중이었다.[83] 필리핀에 군사적인 부분에서 가장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84] 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항목 참조.[85] 물론 그러면서도 베트남필리핀군을 보내거나 필리핀 내의 공산반군을 때려잡는 행위는 계속했다.[86] 이 때 대표적인 민영방송인 ABS-CBN이 폐국 상태로 놓이게 되고 그 자리를 국영방송인 바나와우 방송(Banahaw Broadcasting Corporation)이 매우기 시작했으며 수많은 방송국과 신문사들이 폐업된다.[87] 두테르테의 딸 사라 두테르테가 러닝메이트를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