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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3:11:01

카탈루냐 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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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 앞에서 사열식을 하는 카탈루냐 용병 부대를 묘사한 그림. 스페인 화가 호세 모렌노 칼보네로(Jose Moreno Carbonero)[1]의 작품.

1. 개요2. 연혁
2.1. 창설2.2. 자립2.3. 몰락
3. 참조

1. 개요

¡Aragó, Aragó, desperta ferro!
아라곤, 아라곤, 강철이여 깨어나라!
아라곤-카탈루냐 알무가바르 척후병들의 전투 함성
중세 유럽에서 가장 전설적인 활약을 보였던 용병들로, 카탈루냐 용병 부대(Catalan Company) 혹은 카탈루냐 전우회라고도 부른다.

2. 연혁

2.1. 창설

원래 이들은 1281년 이탈리아 남부의 섬인 시칠리아를 다스리던 아라곤 왕국[2]의 왕실이 북아프리카를 원정하기 위해, 그들의 고향인 카탈루냐에서 데려온 사람들로 만든 용병부대였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선 800여년 동안 이어진 레콘키스타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이후 실질적으로 기독교 세력의 승리로 끝나고,[3] 아라곤 왕국에선 정복왕 하이메 1세의 치세때 발레아레스 제도, 발렌시아, 무르시아 일대까지 확장한 이후 더이상 팽창할 방향이 없어서 싸움 잘하는 인간흉기 실업자들이 넘쳐나서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라곤-카탈루냐 왕국의 이탈리아 반도 진출과 더불어 제4차 십자군 이후 거대한 권력 공백이 생긴 동지중해에 일감이 생기자 수많은 병사들이 용병단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1302년 8월 31일, 아라곤 왕실은 북아프리카 원정을 포기했고,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카탈루냐 용병들과의 계약을 취소했다.

졸지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카탈루냐 용병들은 먹고 살기 위해, 성전기사단해적에서 용병대장을 지내며 명성이 높았던 군인인 루지에로 데 플로르[4]를 새로운 지도자로 삼았고, 그를 따라 동로마 제국으로 가서 이슬람 세력과 싸우는 용병으로 복무하기로 결정했다.

1302년 9월, 39척의 배에 탄 2500명의 카탈루냐 용병들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하지만 실제로 온 사람들의 숫자는 훨씬 많았는데, 용병들은 대부분 결혼을 한 몸이라 아내와[5] 자녀들이 있었고, 그들도 모두 함께 데려온 터라 카탈루냐 용병 부대에 포함된 인원들은 거의 6,500명에 이르렀다.

동로마 제국은 일단 카탈루냐 용병들을 환영하는 뜻으로 루지에로를 동로마 황제인 안드로니코스 2세의 조카딸인 마리아와 결혼을 시켜주었고, 그를 제국에서 5번째로 높은 관직인 메가스 둑스(Megas Doux)에 임명했다. 아울러 이미 동로마 제국에 복무하고 있던 다른 용병들보다 카탈루냐 용병들에게 2배나 더 많은 월급을 주었다.

그리고 카탈루냐 용병들은 1303년 소아시아로 건너가 투르크족들과 싸웠다. 과연 그들은 뛰어난 용맹함을 보였다. 필라델피아 전투에서만 무려 1만 8천 명의 투르크족들이 카탈루냐 용병들에게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승리를 거둔 카탈루냐 용병들은 동쪽으로 전진하여 타우르스에서 매복하고 있던 투르크족들을 공격하여 또 한 번의 승리를 올렸다.[6]

하지만 너무 동쪽으로 들어가면 보급선이 끊어질 것을 우려한 루지에로가 철수를 결정했고, 때마침 불가리아 제2제국이 동로마 제국에 위협을 가해오면서 카탈루냐 용병들은 불가리아를 견제하는데 투입되었다. 여하튼 카탈루냐 용병들은 동로마 제국을 압박하던 투르크족들을 물리쳐 주었고, 그렇게 해서 당분간 동로마 제국은 동쪽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2.2. 자립

그러나 이 카탈루냐 용병들에게는 심각한 결점이 몇 가지 있었다. 우선 이들은 전투에선 용감했으나, 그 대신 돈을 너무 욕심냈다. 실제로 카탈루냐 용병들은 필라델피아와 마그네시아 같은 동로마의 도시들에 들어가면, 주민들을 고문하면서 “너희가 돈을 숨겨 놓은 곳이 어디인지 말해라!”고 협박을 했다. 또한 카탈루냐 용병들은 자신들이 주둔한 지역의 처녀, 소녀, 유부녀, 수녀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아내나 첩으로 삼았다. 그래서 카탈루냐 용병들을 겪어 본 동로마 백성들은 “카탈루냐인들의 친구가 되느니, 차라리 튀르크인들의 적이 되는 게 낫다!”라고 원성을 터뜨렸다.[7]

심지어 용병 대장인 루지에로는 동로마 황제가 가난한 국고 사정에 비해서 그들에게 지급하는 금화가 너무 많아져서 부담을 느끼고 금화에 넣은 금의 양을 줄이자, 황제를 향해 “나는 일단 40걸음 앞에서는 당신에게 엎드려 절을 하겠지만, 일어선 후에는 내가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오!”라고 협박을 퍼부었다.

그 말에 두려움을 느낀 황제는 국고를 털어서 루지에로를 포함한 카탈루냐 용병들에게 무려 100만 개의 금화를 주었다. 하지만 그 금화를 마련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은 모든 관리들에게 주는 월급의 3분의 1을 줄이고 농민들에게 특별 세금까지 물려야 했다. 문제는 그렇게까지 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루지에로는 “보수가 너무 적다!”라며 계속 불평을 늘어놓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카탈루냐 용병들은 그들의 오만함으로 인해, 얼마 못가 동로마 제국 안에서 고립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은 모든 전투 계획을 자기들 마음대로 짰으며, 전투에서 얻은 노획물들도 전부 자기들끼리만 독차지했다. 심지어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동로마의 관리나 군인들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한 예로 정교 기독교를 믿었던 알란[8]들은 오랫동안 동로마 제국에 용병으로 복무했는데, 카탈루냐 용병들이 자기들보다 월급을 2배나 더 많이 받는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그들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그만 알란족 족장인 기르콘의 아들을 포함한 3백 명의 알란족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한 루지에로의 요구는 끊이지 않았다. 그는 “당신네들이 더 이상 돈이 없어서 못주겠다면, 차라리 나한테 땅을 주시오. 이왕이면 날씨가 따뜻하고 땅이 비옥한 아나톨리아 지역이 좋겠소.”라고 대담한 요구를 해왔다. 문제는 아나톨리아가 소아시아에 있는 엄연한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다는 사실이다. 막대한 국고에 이어 이제는 땅까지 빼앗기게 될 동로마 제국으로서는 매우 불쾌하고 또 위험한 일이었다. 만약 루지에로가 아나톨리아를 차지하게 되면, 더 큰 욕심을 부려 아예 동로마 제국 전체를 빼앗으려 할지도 모르니까.[9]

하지만 거부했다가는 루지에로와 카탈루냐 용병들이 행패를 부릴지 몰라서 일단 동로마 황제인 안드로니코스 2세는 루지에로에게 아나톨리아 전체를 주겠다고 승인했다. 그런 다음, 루지에로는 1305년 4월 5일 안드로니쿠스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인 미하일 9세가 개최한 파티에 참가했는데, 이는 평소 루지에로를 도적떼의 두목이라고 미워하던 미하일 9세가 그를 방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연 죽음의 파티였다. 결국 그는 기르콘의 지휘를 받는 알란족 용병들에게 살해되었다.

루지에로는 죽었으나, 더 큰 참사는 그때부터였다. 지휘관의 죽음을 안 카탈루냐 용병들은 겁을 먹고 도망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를 배신한 동로마에 복수를 하겠다!”라고 외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적이었던 투르크족들에게 “우리와 함께 동로마를 상대로 실컷 약탈을 하자.”고 제안을 하여, 1천 명의 투르크족들이 카탈루냐 전우회에 합류하였다.

1305년 7월, 오늘날 그리스터키의 국경 지대인 아프로스에서 2,500명의 카탈루냐 용병들과 미하일 9세가 지휘하는 1만 4천 명의 동로마 군대가 전투를 벌였다. 결과는 놀랍게도 카탈루냐 용병들의 승리였다. 군대가 전멸당한 미하일 9세는 서둘러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아났고, 병력이 너무 적어 요새와 성벽을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카탈루냐 용병들은 서쪽으로 군대를 돌려 현재 그리스 북부 트라키아 지역에서 무자비한 학살약탈을 무려 2년 동안이나 저지르고 다녔다. 이때 그들이 저지른 학살과 약탈 및 방화와 파괴가 얼마나 잔혹했는지, 비잔티움 연대기 6권에서는 역사상 동로마 제국트라키아 지역을 침입한 어떤 외적들도 이들보다 잔인하지는 않았다고 묘사했다.

그런 후에 카탈루냐 용병들은 진로를 남쪽으로 정하고 트라키아에서 했던 것처럼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면서[10], 아테네를 향해 내려왔다. 1204년 4차 십자군의 참가자들 중 한 명인 오토 드 라로슈가 아테네를 점령하고 세운 나라인 아테네 공국은 그무렵 프랑스인 기사인 고티에 5세 드 브리엔이 공작의 지위에 올라 다스리고 있었다. 고티에는 카탈루냐 용병들의 용맹함을 들어왔던 터라, 그들을 고용하여 주변 지역의 성 30개를 점령했다. 하지만 카탈루냐 용병들이 지나치게 많은 급료를 요구하자 고티에는 그들을 해고시켰다.

그러나 고티에의 조치는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었다. 해고당한 카탈루냐 용병들은 분노하여 고티에를 상대로 전쟁을 선언했고, 1311년 3월 15일 케피수스 강가에서 고티에가 지휘하던 1만 5천 명의 군대를 습격해 전멸시켰다. 승리의 비결은 카탈루냐 용병들이 미리 강의 둑을 허물고 넘쳐나는 강물로 강 주위를 늪으로 만든 다음, 고티에 군대의 말들이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사이에 기습을 했던 것이었다. 이때 고티에 본인도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승리한 카탈루냐 용병들은 곧바로 아테네로 진격하여 고티에의 가족들을 쫓아내고, 자신들이 아테네 공국의 지배권을 잡았다. 그리고 죽은 고티에군 병사들의 아내자신들의 아내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일개 용병집단들인 카탈루냐인들은 아테네 공국을 1390년까지 지배하였다.

2.3. 몰락

그후 1360년대부터 카탈루냐인들은 자기들끼리의 심각한 내분에 휘말려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런 카탈루냐인들에게 치명타를 입힌 상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과 같은 스페인 용병 출신인 나바라 용병들이었다[11]. 오늘날 스페인 북부 나바라(Navarra) 출신들로 구성된 나바라 용병들은 1366년부터 스페인을 떠나 알바니아로 가서 용병일을 하다가 피렌체 출신의 공작인 네리오 1세(Nerio I)[12]와 함께 1386년 아테네로 진격했다.

용맹한 카탈루냐인들도 세월이 흐르면서 약해진 탓인지, 2년 동안의 전쟁 끝에 결국 아테네의 카탈루냐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1390년 그리스 남부의 도시인 네오파트라(Neopatras)에 남아있던 카탈루냐인들도 네리오 1세에게 굴복하면서 비로소 카탈루냐인들의 지배는 끝났다. 아테네 공국에서 쫓겨난 카탈루냐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 세르비아 같은 주변의 나라들로 도망쳐서 용병으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13]

이리하여 1388년부터 아테네 공국의 지배권은 카탈루냐인들에게서 피렌체인들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1395년에 아테네 공국은 베네치아인들의 공격을 받아 굴복하고,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최후의 아테네 공작인 프란시스코 2세(Francesco II)는 1458년 오늘날의 터키인 오스만 제국에 항복하면서 주권을 넘겨주었고, 그것으로 아테네 공국은 드디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14]

오늘날 동로마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인들은 카탈루냐 용병에 대해 매우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다. 특히 카탈루냐 용병들의 잔혹함이 남긴 기억 탓에 "카탈루냐인들도 그런 일은 안 한다."는 속담이 지금까지도 그리스에 남아있다.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출신 지역은 좀 많이 달랐지만[15] 이 시대, 중세 후기 이후 근세에 들어가면서 또 다른 스페인 출신 군인들이 전유럽에서 맹활약하면서 주름잡자 후대에 와선 테르시오 보병들이 상징하는 근세 스페인 황금기 패권 이전 중세 후기의 알파버전 쯤 스페인 사람들의 상무정신을 상징하는 병사들로 인식되었다.

3. 참조


[1] 생몰년도: 1860년 ~ 1942년[2] 현재 스페인 동부 지역인 카탈루냐[3] 코르도바세비야 등 알안달루스 전통의 양대 도시를 잃은 이슬람의 나스르 왕조는 반도의 남쪽 구석에서 목숨만 연장 받아, 이따금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도와주러 오는 마린 왕조의 지원을 받으며, 내부의 유력한 귀족 가문들 사이의 권력투쟁이 팽배한 카스티야에게 막대한 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겨우 살아남는 신세로 전락했다.[4] Ruggiero da Fiore, 1267년~1305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 휘하의 독일 출신 매잡이가 아버지였는데, 아버지가 죽자 한 때는 매춘부로 전락했던 어머니와 함께 사창가에서 자랐고, 어른이 되자 성전기사단에 들어갔다. 1291년 레반트에 있었던 최후의 십자군 국가의 근거지인 아크레가 함락될 때 자신이 가진 배에 많은 피난민들을 태웠으나, 그들한테 비싼 돈을 받아낸 것이 문제가 되어 성전기사단에서 쫓겨났고, 그후 지중해 동부를 무대로 강도질을 일삼는 해적이 되었다가 용병으로 전업하는 등 무척이나 화려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었다.[5]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 제국 쇠망사 6권에 의하면, 이 여자들도 남편들의 사나운 성질을 본받아서 전쟁터로 나가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6] 로마제국 쇠망사 6권에 의하면 이들 카탈루냐 용병들이 한 번 칼을 휘둘러서 사람과 말을 두 토막으로 낸다는 묘사가 실려 있을 만큼, 용맹함이 자자했다. 또한 카탈루냐 용병들이 입은 갑옷이 워낙 두꺼워서 투르크족들이 자랑하던 기마궁수들의 화살이 뚫지를 못했다.[7] 이와 비슷한 말로 4차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나서 동로마 백성들 사이에서 "교황의 면류관을 보느니, 술탄터번을 보겠다."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아이러니하지만 동로마를 도우러왔던 서유럽 세력이 오히려 그들에게 큰 피해를 끼치는 바람에 동로마가 원래의 적인 이슬람 세력에 친근함을 느끼게 된것이다.[8] 알란 족들은 사르마티아, 스키타이의 후예 일파 중 하나로 추정되는 이란유목민들이다.[9] 이러한 우려를 할 수밖에 없는게 2백여년 전 루셀 드 바이욀이라는 노르만 용병이 비슷한 짓거리를 했기 때문이었다. 반쯤 성공했던 로베르 기스카르의 사례도 있고.[10] 아토스 산 수도원들도 이때 약탈당해 큰 피해를 입어 2005년까지 카탈루냐인의 출입을 금지했다.[11] 다만, 나바라 용병들은 인도유럽어족 계통인 카탈루냐인들로 구성된 카탈루냐 용병들과는 달리, 비 인도유럽어족 계통인 바스크인으로 구성되어있어서, 같은 스페인인이라는 동류 의식은 없었다. 그런 의식이 생긴 건 빨라도 레콩키스타가 끝난 16세기 이후의 일이고, 늦으면 무려 20세기 후반에나 같은 스페인인이라는 의식이 생겼다.[12] 집권: 1388년 ~ 1394년[13] 실제로 세르비아의 기병들은 대부분 독일인들이나 이들 카탈루냐인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래서 대단히 사납고 용맹스러웠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의하면 세르비아가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을 도와 군대를 보낸 앙카라 전투에서 세르비아 기병들은 오스만 제국의 정규군보다 더 용맹스럽게 적군인 티무르 제국의 군대에 맞서 싸워 티무르 본인조차 감탄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들 중 상당수가 이들 카탈루냐 용병 출신일 수도 있다.[14] 프란시스코 2세는 2년 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15] 이 사람들은 이름 그대로 카탈루냐, 발렌시아, 아라곤 등 동이베리아 출신이었던 반면 16-17세기의 테르시오 보병들은 대부분 신구 카스티야에서 모집한 병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