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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8:34:05

더글러스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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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점령하 일본 최고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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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육군참모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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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프랭클린 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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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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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월레스 워더스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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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L. 스콧
태스커 H. 블리스 페이턴 C. 마치 존 조지프 퍼싱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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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L. 하인즈
찰스 펠럿 서머올 더글러스 맥아더 말린 크레이그 조지 C. 마셜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오마 브래들리 J. 로턴 콜린스 매튜 B. 리지웨이 맥스웰 테일러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리먼 렘니처 조지 데커 얼 휠러 해럴드 K. 존슨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제26대 제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크레이튼 에이브럼스 프레드릭 웨이안드 버나드 W. 로저스 에드워드 마이어 존 위컴
제31대 제32대 제33대 제34대 제35대
칼 E. 부오노 고든 R. 설리번 데니스 라이머 에릭 신세키 피터 슈메이커
제36대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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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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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국 최고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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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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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더글라스 맥아더
제2대
매튜 B. 리지웨이
제3대
마크 클라크
제4대
존 헐
제5대
맥스웰 테일러
제6대
리먼 렘니처
제7대
조지 데커
제8대
카터 매그루더
제9대
가이 S. 멜로이
제10대
해밀턴 하우즈
제11대
드와이트 E. 비치
제12대
찰스 H. 본스틸 3세
제13대
존 H. 마이켈리스
제14대
도널드 V. 베넷
제15대
리처드 G. 스틸웰
제16대
존 베시
제17대
존 위컴
제18대
로버트 W. 세네월드
제19대
윌리엄 J. 리브시
제20대
루이스 C. 메네트리
제21대
로버트 W. 리스카시
제22대
게리 E. 럭
제23대
존 H. 틸럴리
제24대
토머스 A. 슈워츠
제25대
리언 러포트
제26대
버웰 B. 벨 3세
제27대
월터 L. 샤프
제28대
제임스 서먼
제29대
커티스 스캐퍼로티
제30대
빈센트 브룩스
제31대
로버트 에이브럼스
제32대
폴 라캐머라
제33대
제이비어 T. 브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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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군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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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수
General of the Armies / Admiral of the Navy
육군
Army
조지 워싱턴
율리시스 S. 그랜트
존 조지프 퍼싱
해군
Navy
조지 듀이
원수
General of the Army / Fleet Admiral
General of the Air Force
육군
Army
윌리엄 테쿰세 셔먼
필립 셰리든
조지 C. 마셜
더글러스 맥아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헨리 아놀드
오마 브래들리
해군
Navy
윌리엄 리히
어니스트 킹
체스터 니미츠
윌리엄 홀시
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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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아놀드
* 헨리 아놀드의 원수 진급 당시 공군은 육군 항공대였다. }}}}}}}}}

파일:us_army_ww2.png 제2차 세계 대전 미군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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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General of the Army / Fleet Admiral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 더글러스 맥아더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헨리 아놀드AAF
해군
원수
윌리엄 리히 | 어니스트 킹 | 체스터 니미츠 | 윌리엄 홀시
대장
General / Admiral
육군
대장
오마 브래들리 | 조지 S. 패튼 | 칼 스파츠AAF | 조나단 웨인라이트 | 조지프 스틸웰 | 월터 크루거 | 조지 케니AAF | 코트니 호지스 | 마크 클라크 | 레너드 T. 게로 | 말린 크레이그 | 브레혼 소머벨 | 존 헐
해군
대장
마크 미처 | 토머스 킨케이드 |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 로열 잉거솔 | 홀랜드 스미스M |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M | 리치먼드 K. 터너 | 제임스 O. 리처드슨 | 해럴드 스타크 | 헨리 켄트 휴이트 | 토머스 홀컴M | 조나스 H. 잉그램 | 러셀 R. 웨이시C 전
중장
Lieutenant general / Vice Admiral
육군
중장
레슬리 맥네어 | 존 리드 하지 | 앨버트 웨드마이어 | 매튜 B. 리지웨이 | 사이먼 B. 버크너 | 월튼 워커 | 로버트 리처드슨 | 루시안 트러스콧 | 호이트 반덴버그AAF | 루이스 H. 브레레턴AAF | 존 C. H. 리 | 윌리엄 H. 심슨 | 알렉산더 패치 | 제이콥 데버스 | 프랭크 맥스웰 앤드루스AAF| 로이드 프레덴달 | 밀러드 하먼AAF†| 델로스 에먼스AAF | 월터 베델 스미스 | 리처드 서덜랜드 | 조지 H. 브렛AAF | 트로이 H. 미들턴 | 아이라 이커AAF | 에니스 화이트헤드AAF |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AAF | 존 드위트 | 휴 알로이시우스 드럼 | 해럴드 L. 조지AAF | 바니 M. 자일스AAF | 휴버트 R. 하먼AAF | 토머스 D. 화이트AAF | 네이선 트와이닝AAF | 웨이드 H. 헤이즐립 | 윌리스 D. 크리텐버거 | 제프리 키스 | 에드먼드 B. 그레고리 | 존 K. 캐넌AAF | 오스카 그리스월드 | 벤 리어 | 찰스 P. 홀 | 레이먼드 S. 매클레인 N 전
해군
중장
프랭크 잭 플레처 | 제시 올덴도르프 | 윌리스 리 | 존 매케인 시니어 | 존 H. 타워스 | 줄리안 C. 스미스M| 로이 가이거M | 앨런 H. 터니지M | 드위트 클린턴 램지 | 프레더릭 C. 셔먼 | 찰스 록우드 | 로버트 C. 기펜 | 로버트 곰리 | 루이스 덴펠드 | 찰스 M. 쿠크 주니어
소장
Major General / Rear Admiral
육군
소장
제임스 밴 플리트 | 모리스 로즈 | 커티스 르메이AAF | 맥스웰 테일러 | 레슬리 그로브스 | 윌리엄 F. 딘 | 클레어 셰놀트AAF·전 | 랄프 스미스 | 월터 쇼트 | J. 로턴 콜린스 | 로버트 올즈AAF | 리먼 렘니처 | 호바트 R. 게이 | 로스코 B. 우드러프 | 에드윈 F. 하딩 | 스태퍼드 리로이 어윈 | 윌리엄 J. 도너번 | 존 P. 루카스 | 에드윈 D. 패트릭| 클래런스 L. 팅커AAF† | 로버트 아이첼버거 | 찰스 윌로비 | 윌리엄 B. 킨 | 핸퍼드 맥나이더 | 폴 뉴가든 | 프랭크 캐들 마힌 | 폴 J. 뮐러 | 노먼 코타 | 어니스트 N. 하먼 | 찰스 H. 게르하르트 | 앤드루 데이비스 브루스 | 로버트 W. 해즈브룩 | 제임스 로턴 콜린스 | 존 B. 콜터 | 패트릭 헐리 | 프랭크 W. 밀번 | 앨버트 W. 월드론 | 클로비스 E. 바이어스 | 윌리엄 W. 이글스 | 윌리엄 F. 샤프 | 프랭클린 C. 시버트 | 아이작 D. 화이트 | 조지 데커 | 카터 매그루더 | 로버트 B. 매클러 | 클라크 L. 러프너 | 앤서니 맥콜리프 | 레이먼드 바턴 | 로버트 N. 영 | 윌리엄 M. 호그 | 제임스 L. 브래들리 | 클래런스 R. 휴브너 | 윌러드 G. 와이먼 | 루이스 A. 크레이그 | 찰스 H. 콜렛 | 에드워드 H. 브룩스 | 가이 V. 헨리 주니어 | 앨버트 E. 브라운 | 월터 M. 로버트슨 | 새뮤얼 E. 앤더슨 AAF | 도널드 윌슨 AAF | 테리 앨런 | 도일 히키 | 길버트 R. 쿡 | 제임스 E. 채니 | 데이비드 바 | 에드워드 알몬드 | 에드워드 P. 킹 | 조지 M. 파커 | 조지 F. 무어 | 토머스 B. 라킨 | 러셀 P. 하틀 | 프랭크 오드리스콜 헌터 AAF 전 | 헨리 오랜드 | 찰스 W. 라이더 | 아처 L. 러치 | 찰스 L. 볼트 | 알프레드 그루엔터 | 로리스 노스타드 | 아치볼드 빈센트 아널드 | 레이 바커 | 에드윈 P. 파커 주니어 | 해리 J. 맬로니 | 찰스 L. 스콧 | 브루스 매그루더 | 올랜도 워드 | 존 밀리킨 | 존 W. 레너드 | 제임스 개러시 오드 | 제이 L. 베네딕트 | 로버트 S. 바이틀러N | 레너드 F. 윙N | 존 달퀴스트 | 프레드 L. 워커 | 어니스트 J. 돌리 | 유진 M. 랜드럼
해군
소장
허즈번드 킴멜 | 아이작 C. 키드 | 노먼 스콧 | 대니얼 J. 캘러헌 | 해리 슈미트M | 윌리엄 H. P. 블랜디 | 존 W. 윌콕스 주니어 | 찰스 P. 세실 | 로버트 H. 잉글리시 | 그레이브스 B. 어스킨M| 돈 P. 문 | 클리프턴 스프레이그 | 시어도어 E. 챈들러| 리틀턴 월러 주니어M | 찰스 D. 바렛M | 아서 D. 스트러블 | 르무엘 셰퍼드M | 시어도어 스타크 윌킨슨 | 윌리엄 P. 업셔M | 패트릭 N. L. 벨린저 | 제임스 H. 도일 | 헨리 M. 뮬리닉스 | 포레스트 셔먼 | 윌리엄 H. 루퍼터스M | 칼튼 H. 라이트 | 말론 티스데일 | 클리프턴 B. 케이츠M | 칼 헨리 존스 | 프랜시스 W. 록웰 | C. 터너 조이 | 윌리엄 페치텔러 | 올리버 스미스 M | 새뮤얼 L. 하워드M | 아서 래드포드 | 로버트 웹스터 캐리 | 클로드 A. 존스 | 로버트 카니
준장
Brigadier general / Rear admiral (lower half)
육군
준장
마크 클라크 | 돈 프랫 | 케네스 N. 워커 | 프레더릭 워커 캐슬AAF† |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 3세AAF†| 제임스 돌턴 2세 | 스톤월 잭슨 | 가이 포트| 클로디어스 이즐리 | 허버트 다그AAF| 제임스 둘리틀AAF | 찰스 키런스 주니어 | 앨런 C. 맥브라이드 | 제임스 로이 앤더슨AAF | 브라이언트 무어 |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 | 제임스 에드워드 워튼 | 로렌스 B. 카이저 | 노먼 슈워츠코프 시니어 | 리 S. 게로 | 찰스 H. 바스 주니어 | 하워드 녹스 래미AAF† | 헤이우드 핸셀AAF | 로버트 싱크 | 조지 A. 테일러 | 존 H. 처치 | 찰스 D. 파머 | 윌리스턴 B. 파머 | 윌리엄 H. 윌버 | 에드윈 L. 시버트 | 해럴드 휴스턴 조지AAF† | 에밋 오도넬 주니어 AAF | 윌리엄 켈리 해리슨 주니어 | 앨버트 M. 존스 | 프랜시스 윌리엄 패럴 | 윌리엄 E. 브라우어 | 루서 R. 스티븐스 | 클리퍼드 블루멀 | 클린턴 A. 피어스 | 루이스 C. 비비 | 브래드퍼드 G. 시노웨스 | 찰스 C. 드레이크 | 칼 H. 실즈 | 제임스 R. N. 위버 | 케네스 로열 | 벤저민 O. 데이비스 시니어 | 러셀 A. 윌슨AAF 전 † | 넬슨 메이시 워커 | 에드먼드 윌슨 서비전 † | 데이비스 던바 그레이브스AAF 전 † | 클라이드 D. 에들먼 | 브루스 C. 클라크 | 제이 W. 매켈비 | 아서 트루도
해군
준장
알레이 버크 | 해리 W. 힐 | 로렌스 A. 애버크롬비 | 메리트 에드슨M | 레이 A. 로빈슨M
AAF:육군 항공대, M: 해병대, N: 주방위군 C: 해안경비대
※ 문서가 있는 인물만 종전 당시 계급으로 서술
※ 윗 첨자 : 전사
※ 윗 첨자 : 전시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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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명예 훈장 수훈자
파일:미합중국 육군 명예훈장.png
<colbgcolor=#00518f><colcolor=white> 날짜 1941년
이름 더글러스 맥아더

United States Congressional Gold Medal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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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1777년 1779년 1781년
조지 워싱턴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 앤서니 웨인 사령관 헨리 리 3세 준장 대니얼 모건
1781년 1787년 1800년 1805년 1813년
소장 너새니얼 그린 존 폴 존스 대령 토머스 트럭스턴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1813년 1814년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스 2세
대위 에드워드 매콜
대령 제임스 로렌스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1814년 1814년, 1848년 1814년
대령 루이스 워링턴 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 소장 제이콥 브라운 소장 윈필드 스콧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1814년 1815년 1816년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스 소장 알렉산더 마콤 소장 앤드루 잭슨 대령 찰스 스튜어트 대령 제임스 비들
1818년 1835년 1846년, 1847년, 1848년 1847년 1854년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대령 조지 크로간 소장 재커리 테일러 소머스 호
장교 및 승무원 구출
중령 덩컨 잉그함
1858년 1863년 1864년 1866년 1867년
프레더릭 로즈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
조지 C. 스투퍼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1867년 1871년 1873년 1874년, 1904년 1883년
조지 피바디 조지 F. 로빈슨 대령 재러드 크랜달 그 외 존 혼 주니어 존 폭스 슬레이터
1888년 1890년 1900년 1902년 1909년
조셉 프랜시스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중위 프랭크 H. 뉴컴 중위 데이비드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새뮤얼 J. 콜 박사
라이트 형제
1912년 1914년 1915년 1928년
선장 아서 로스트론 폴 H. 크라이봄 그 외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스 무히카
찰스 린드버그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1928년 1929년 1930년 1936년
토머스 에디슨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 소령 월터 리드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링컨 엘즈워스
1936년 1938년 1939년 1940년
조지 M. 코핸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하워드 휴즈 목사 프랜시스 퀸 윌리엄 시넛
1942년 1945년 1946년
롤런드 바우처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준장 빌리 미첼
1949년 1954년 1955년 1956년 1958년
앨번 W. 바클리 어빙 벌린 조너스 소크 박사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 준장 하이먼 리코버
1959년 1960년 1961년 1962년
로버트 고다드 로버트 프로스트 토머스 앤서니 둘리 3세 밥 호프 샘 레이번
1962년 1968년 1969년 1973년 1977년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월트 디즈니 윈스턴 처칠 로베르토 클레멘테 매리언 앤더슨
1978년 1979년
중장 아이라 이커 로버트 F. 케네디 존 웨인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휴버트 험프리
1979년 1980년 1982년
미국 적십자 케네스 테일러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팀 베아트릭스 여왕 대장 하이먼 리코버
1982년 1983년
프레드 워링 조 루이스 루이스 라머 레오 라이언 대니 토머스
1984년 1985년
해리 S. 트루먼 레이디 버드 존슨 엘리 비젤 로이 윌킨스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1986년 1987년 1988년
네이선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해리 차핀 에런 코플런드 메리 래스커 제시 오언스
1988년 1990년 1991년
앤드루 와이어스 로런스 록펠러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 콜린 파월
1994년 1996년 1997년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프랭크 시나트라 마더 테레사 바르톨로메오스 1세
1998년 1999년
넬슨 만델라 리틀록 9인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로자 파크스 시어도어 헤스버그
2000년
존 오코너 찰스 M. 슐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나바호족 코드 토커
2002년 2003년
대장 휴 셸턴 토니 블레어 재키 로빈슨 도러시 하이트 박사 조셉 디레인
해리 & 일라이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2004년 2006년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터스키기 에어맨 달라이 라마 14세 바이런 넬슨 노먼 볼로그 박사
2007년 2008년
마이클 데바키 박사 아웅 산 수 치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에드워드 윌리엄 브룩 3세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2009년 2010년
여성 공군 군무원 조종사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아널드 파머 무함마드 유누스 제100 보병대대
제442 보병연대 전투단
군사정보국
2011년 2012년 2013년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전우회 9.11 테러 참사 사망자 라울 발렌베리 애디 메이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럴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제1 특수임무단
2014년
둘리틀 특공대 멤버 미국의 공군 에이스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
시몬 페레스 모뉴먼츠 맨
2014년 2015년 2016년
제65 보병연대 잭 니클라우스 셀마 몽고메리 행진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 OSS
2017년 2018년
밥 돌 래리 도비 제2차 세계 대전
중국계 미국인 참전 용사
USS 인디애나폴리스 승무원 안와르 사다트
2019년
스티브 글리슨 캐서린 존슨 크리스틴 다든 도로시 본 메리 잭슨
2019년 2020년 2021년
무명의 수여자들 그렉 르몬드 미국 국회의사당 경찰
컬럼비아구 경찰청 소속 경찰관
제369 보병연대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전사한 13명의 장병
2022년 2023년
미 육군 제23부대 본부 특수부대
제3133 신호 복무 중대
제6888 중앙우편대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상선 선원
에밋 틸
메이미 틸모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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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IFE_LOGO.png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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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미국의 시사잡지인 라이프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100인을 선정했다. 순위는 없으며, 만장일치로 선정된 인물은 헨리 포드라이트 형제뿐이다.
제인 애덤스
<사회 개혁가>
무하마드 알리
<권투선수, 인권 운동가>
엘리자베스 아덴
<사업가>
룬 알레지
<방송 경영자>
루이 암스트롱
<재즈 뮤지션>
조지 발란신
<안무가>
존 바딘
<물리학자>
어빙 벌린
<작곡가>
에드워드 버네이스
<홍보 책임자>
레너드 번스타인
<작곡가, 지휘자>
말론 브란도
<배우>
베르너 폰 브라운
<로켓 공학자>
데일 카네기
<작가>
월리스 캐러더스
<발명가, 화학자>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
<에어컨 발명가>
레이첼 카슨
<작가, 해양생물학자>
빙 크로스비
<가수, 배우>
클래런스 대로
<변호사>
유진 데브스
<노동운동가, 사회주의자>
로버트 더그래프
<포켓북 창업자>
존 듀이
<철학자>
월트 디즈니
<기업가, 애니메이션 제작자>
W. E. B. 듀보이스
<NAACP 설립자>
앨런 덜레스
<CIA 국장>
밥 딜런
<포크 뮤지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물리학자>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시인>
윌리엄 포크너
<소설가>
에이브러햄 플렉스너
<교육자>
헨리 포드
<기업가>
존 포드
<영화감독>
베티 프리댄
<페미니스트 여성 작가>
밀턴 프리드먼
<경제학자>
조지 갤럽
<여론 분석가>
아마데오 지아니니
<은행가>
빌리 그레이엄
<목사>
마사 그레이엄
<댄서, 안무가>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영화감독>
조이스 홀
<사업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가>
올리버 홈스 주니어
<법학자>
존 에드거 후버
<FBI 초대 국장>
로버트 허친스
<교육자>
헬렌 켈러
<인권 운동가>
잭 케루악
<시인, 작가>
빌리 진 킹
<인권 운동가, 테니스 선수>
마틴 루터 킹
<목사, 인권 운동가>
알프레드 킨제이
<성과학자, 생물학자>
빌렘 콜프
<생명과학자>
레이 크록
<맥도날드 창업자>
에드윈 랜드
<과학자, 발명가>
윌리엄 레빗
<부동산 개발업자>
존 L. 루이스
<노동당 지도자>
찰스 린드버그
<비행기 조종사>
레이먼드 로이
<산업 디자이너>
헨리 루스
<편집자>
더글러스 맥아더
<군인, 정치인>
조지 C. 마셜
<군인, 정치인>
루이스 B. 메이어
<영화 제작자>
클레어 매카델
<패션 디자이너>
조지프 매카시
<변호사, 정치인>
프랭크 맥너마라
<신용카드 발명가>
마거릿 미드
<인류학자>
칼 메닝거
<정신과 의사>
찰스 E. 메릴
<주식 중개인>
미스 반 데어 로에
<건축가>
로버트 모세
<공무원>
윌리엄 멀홀랜드
<토목 기사>
에드워드 R. 머로
<종군기자>
랠프 네이더
<소비자 보호가, 환경보호가>
라인홀드 니부어
<윤리학자>
존 폰 노이만
<물리학자, 수학자>
유진 오닐
<극작가, 작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물리학자>
윌리엄 S. 페일리
<방송 경영자>
잭슨 폴록
<화가>
에밀리 포스트
<소설가, 작가>
엘비스 프레슬리
<가수>
재키 로빈슨
<야구선수>
존 데이비슨 록펠러 주니어
<기업가>
리처드 로저스
(로저스 앤 해머스타인)
<뮤지컬 작곡가, 작사가>
윌 로저스
<배우, 작가>
엘리너 루스벨트
<FDR의 아내, 사회운동가>
베이브 루스
<야구선수>
조너스 소크
<소아마비 백신 개발자>
마거릿 생어
<사회운동가>
앨프리드 P. 슬론
<사업가, 산업가>
벤자민 스팍
<소아과 의사>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사진작가>
로이 스트라이커
<공무원, 사진작가>
빌 윌슨
<AA 창립자>
앤디 워홀
<화가>
얼 워런
<대법원장>
제임스 듀이 왓슨
<생물학자, 유전학자>
토머스 왓슨 주니어
<사업가, 정치인>
테네시 윌리엄스
<극작가>
월터 윈첼
<신문기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건축가>
라이트 형제
<최초의 비행기 제작자>
말콤 엑스
<인권 운동가>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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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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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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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이시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53
제임스 A. 밴 플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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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장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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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하일레 셀라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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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응오딘지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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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아드난 멘데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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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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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김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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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오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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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조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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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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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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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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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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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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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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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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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손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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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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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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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이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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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민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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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더글러스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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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해리 S. 트루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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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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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프랑수아 톰발바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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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다비드 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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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수루-미강 아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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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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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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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레옹 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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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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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하마니 디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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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조모 케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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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무테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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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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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툰쿠 압둘 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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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타놈 키티카초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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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쑹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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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천궈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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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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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천치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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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피델 산체스 아르난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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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조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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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임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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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필립 제이슨
(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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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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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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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시리낏 끼띠야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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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푸미폰 아둔야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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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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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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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무공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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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 bgcolor=#fff,#191919><tablecolor=#373a3c,#ddd><width=20%> 1950
더글라스 맥아더
미 육군원수 ||<width=20%> 1951
이근석
공군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백선엽
육군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정일권
육군대장 ||<width=20%> 1951
심일
육군소령 ||
1951
이명수
육군일등상사
1951
김용식
육군일병
1951
홍재근
육군일병
1951
홍재근
육군일병
1951
김용배
육군준장
1951
박노규
육군준장
1951
김백일
육군중장
1951
김홍일
육군중장
1951
함준호
육군중장
1951 1953중복수훈
손원일
해군중장
1951
최용남
해병소장
1951
김성은
해병중장
1951 1952중복수훈
김정렬
공군중장
1952
이형근
육군대장
1951
권동찬
육군준장
1952
김종오
육군중장
1952 1953중복수훈
신현준
해병중장
1953
장덕창
공군중장
1953
최용덕
공군중장
1953
마크 클라크
미 육군대장
1953
김교수
육군대위
1953
김한준
육군대위
1953
김용배
육군대장
1953
민기식
육군대장
1953
임충식
육군대장
1953
한신
육군대장
1953
김점곤
육군소장
1953
이성가
육군소장
1953
이용문
육군소장
1953 1954중복수훈
임부택
육군소장
1953 1954중복수훈
강문봉
육군중장
1953
김동빈
육군중장
1953
김종갑
육군중장
1953
백인엽
육군중장
1953 1954중복수훈
송요찬
육군중장
1953
유재흥
육군중장
1953
최영희
육군중장
1953
함병선
육군중장
1953
최치환
총경
1954
김만술
육군대위
1954
허봉익
육군대위
1954
김경진
육군소령
1954
김웅수
육군소장
1954
송석하
육군소장
1954
엄홍섭
육군소장
1954
임선하
육군소장
1954
백재덕
육군이등상사
1954
최득수
육군이등상사
1954
김옥상
육군일병
1954
조재미
육군준장
1954
안낙규
육군중사
1954
박병권
육군중장
1954
이응준
육군중장
1954
이준식
육군중장
1954
장도영
육군중장
1954
최석
육군중장
1954
최창언
육군중장
1954
박옥규
해군중장
1954
김석범
해병중장
1955
김창룡
육군소장
1955
정긍모
해군중장
1956
서정학
이사관(치안국장)
1960
미군무명용사
-
1961
김금성
공군준장
1961
국군무명용사
-
1964
박정희
대통령
1966
이종세
육군상사
1966
강재구
육군소령
1966
이인호
해병소령
1967
송서규
육군대령
1967
채명신
육군중장
1967
지덕칠
해군중사
1967
정경진
해병대위
1967
신원배
해병소위
1968
최규식
경무관
1968
이익수
육군준장
1968
최범섭
육군중령
1970
이세호
육군중장
1972
이무표
육군대위
1972
임동춘
육군대위
1975
찰스 B. 스미스
미육군중령
1980
전두환(취소)
육군대장
2002
장철부
육군중령
2006
김영옥
미 육군대령
2011
조달진
육군소위
2015
윌리엄 스피크먼
영 육군병장
2021
에밀 카폰
미 육군대위
2023
랄프 퍼켓
미 육군대령
}}}}}}}}} ||

1983년 국방부 선정 6.25 전쟁 4대 영웅
월튼 워커 더글라스 맥아더 김홍일 김종오 }}}
<colbgcolor=#002868><colcolor=#fff> 연합군 점령하 일본 초대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파일:mcarthur fashion 2.jpg
본명 더글러스 매카서[1]
Douglas MacArthur
출생 1880년 1월 26일
아칸소 리틀록
사망 1964년 4월 5일 (향년 84세)
워싱턴 D.C.
묘소 노퍽 맥아더 기념관
재임기간 초대 최고사령관
1950년 12월 15일 ~ 1951년 4월 11일
서명
파일:DMacarthur_Signature.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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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868><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아서 맥아더 주니어[2]
어머니 메리 핑크니 하디 맥아더
형제자매 큰형 아서 맥아더 3세[3]
작은형 말콤 맥아더[4]
배우자 헨리에타 루이즈 크롬웰 브룩스 맥아더 애트윌 하이버그 (이혼)[5]
진 마리 페어클로스 맥아더[6]
자녀 아들 아서 더글러스 맥아더[7]
신체 183cm, O형
학력 미국육군사관학교 (학사)
정당

종교 개신교 (장로회)
복무 미합중국 육군
필리핀 자치령 육군
1903년 ~ 1937년
1941년 ~ 1964년[8]
병과 공병 → 보병
최종 계급 원수 (미합중국 육군)
원수 (필리핀 자치령 육군)
주요 보직 제13대 육군참모총장
초대 연합국 최고사령관
초대 국방부 직할 극동사령관
초대 유엔군사령관
주요 참전 멕시코 혁명(1914[9])
제1차 세계 대전(1917 ~ 1918)
제2차 세계 대전(1941 ~ 1945)
6.25 전쟁(1950 ~ 1951)
주요 서훈 명예 훈장, 수훈 십자 훈장, 육군 수훈 복무 훈장, 해군 수훈 복무 훈장, 공군(전) 수훈 십자 훈장, 은성 훈장, 청동성장, 공군 수훈장, 퍼플 하트 훈장[10]
훈장 내역 정리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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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4. 어록5. 후손6. 기타7. 대중매체8. 둘러보기9.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미국군인이자 정치가. 한국 통칭 맥아더 장군.[11] 미국 역사상 매우 유명한 장성 중 한 명이다.

일찍이 군인이 되어서 제1차 세계 대전용장, 제2차 세계 대전명장 등 20세기에 벌어진 주요한 전쟁에 모두 참전한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집안 역시 명문 군인 가문이어서 아버지 아서 맥아더는 육군 장성으로서 필리핀의 군정 총독이기도 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이미 1910년~1920년대에 국가적 영웅이었는데,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최연소 육군 사관학교 교장, 최연소 육군 소장, 최연소 육군 대장이자 육군 참모총장, 육군 원수까지 군의 주요지위를 거쳤으며, 태평양 전쟁과 일본의 전후처리에서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였다. 또한, 한국6.25 전쟁에서도 인천 상륙 작전을 세우고, 총지휘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에서 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 육군 원수로서 지휘[12]했으며, 우스갯소리기는 하지만 푸른 눈의 쇼군 내지는 백인 천황, 일본 대통령으로 불렸을 정도로 종전 이후 연합군 점령하 일본에서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13] 그렇기에 전후 일본 사회의 구조에는 그의 입김이 많이 남아 있다. 그 때문인지 2006년 타임지가 선정한 60년 동안의 아시아의 영웅들 리스트에 포함되기도 하였다.[14][15]

6.25 전쟁에서도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북한군이 우세한 상황을 인천 상륙 작전으로 성공적으로 반격하였으며, 한국인들 사이에서 높은 인지도와 명성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들도 맥아더를 고평가하는데, 점령군의 사령관인데도 일본인들이 맥아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일본에 가혹한 벌을 내리지 않고 최대한 선처해주었으며, 은퇴 이후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핵 공격을 "잔인했다"며 간접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16][17]

수여받은 약장은 매우 비범하다. 약장 목록을 보면 알겠지만 명예 훈장부터 시작해서 하나 받아도 가문의 영광인 수훈십자장 3회 수훈[18], 하나 받아도 베테랑 병사 취급받는 은성훈장 6회 수훈, V기장[19]이 달린 동성훈장 수훈, 육군 수훈복무훈장 4회 수훈, 대통령 부대 표창 6회 수훈, 대한민국 정부의 무공훈장 중 최고 등급인 태극무공훈장 수훈[20], 그 외에도 육군항공 조종사 마스터 기장, 소총, 권총 특등 사격기장까지 약장만 봐도 어마어마한 명장(名將)이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문제가 있기도 하였다. 현역군인이 퇴역군인을 쏴죽인 보너스 군대 사건으로 엄청난 오명을 얻었으며, 6.25 전쟁 당시 핵무기 사용과 중국으로의 확전(擴戰)을 반대한 군 통수권자인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다가 해임되는 등, 미군 역사에서 문민통제(文民統制)에 역행했던 대표적 장성이기도 하다. 이렇게 굵직한 사건들이 있었기에 미국 본토에서는 맥아더를 비판하는 다양한 의견 역시 있다.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더글러스 맥아더/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평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더글러스 맥아더/평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어록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유효한 수단을 동원해 신속히 그 전쟁을 끝내는 것 말고 달리 대안이 없다. 전쟁의 최고의 목표는 우유부단하게 끄는 것이 아니라 승리이다. 노병은 결코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21] 이제 나는 군인으로서 생애를 마치고 사라진다.[22]
나는 항상 웨스트포인트로 돌아옵니다. 의무(Duty), 명예(Honor), 국가(Country)[23]가 항상 울려 퍼집니다. 오늘은 당신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합니다. 강을 건널 때 마지막으로 남은 인식 있는 생각은 생도대, 생도대, 그리고 생도대(The corps, and the corps, and the corps)가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작별을 고합니다.[24]
마지막까지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용기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용기, 확신을 갖는 용기, 꿰뚫어 보는 용기이고, 세상은 항상 용기있는 사람을 모함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군중의 고함에 맞서는 양심의 목소리가 있다. 그것은 역사만큼 오랜 싸움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용기는 역사를 이끌어 간다.
실제로 나는 아무리 피곤해도 성경을 읽지 않고 밤을 보내거나 잠을 잔 적이 없다.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In war, there is no substitute for victory.)[25]
우리는 이제 실업자가 되겠군.[26]
나는 돌아올 것이다. (I shall return.)[27]
자유의 목소리인, 맥아더 장군이 말합니다. 필리핀의 국민들께: 제가 돌아왔습니다. (People of the Philippines: I have returned.)[28]
일본은 12살의 소년이다.[29]
"조종사라는 고급 인력을 무의미하게 소비하다니. 나였으면 그런 명령을 내린 놈을 그 자리에서 쏴 죽였을 것이다."
― 전후의 더글러스 맥아더, 자신의 자서전에서 카미카제에 대한 감상[30]
일본인은 쇼군에게 칼을 대지 않는다.[31]
군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32]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자는 아마 자동화기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Whoever said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obviously never encountered automatic weapons.)
우리는 돈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싸웠고, 대공황의 해법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지 손을 벌리는 것이 아니다.
일본 사회는 철학을 잊어버리고, 윤리를 등한히 여기며 미학을 멀리한 사회이다.
우리는 모든 전력을 다하여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
인천상륙작전은 5000대 1의 도박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만 나는 그런 모험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며 적을 분쇄할 것이다.
공산주의는 사상이 아니라 강도짓을 정당화 하는 것이다. 성실히 일해서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기업을 만들고 기업을 운영해서 이윤을 남기고 정당하게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된 사람들을 부르주아라고 부르며 전제군주제의 세습 신분인 거마냥 선동해서 그들의 사유 재산을 강탈해서 공유하자고 하는 강도질을 정당화 하는 것이다. 우리 미국은 칼 마르크스 라는 악마가 만든 공산주의에 맞서 신성한 사유재산을 수호해야하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지켜야 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한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나긋나긋한 무릎이 아니라 씩씩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정열을 가리킨다. 그것은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이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선호하는 마음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20세 청춘보다 60세 인간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더하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영감이 끊기고, 정신이 아이러니의 눈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20대라도 인간은 늙지만 머리를 높이 치켜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80세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33]
나는 조국의 안녕에 대해 걱정을 금할 수가 없다. 미국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은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끊임없이 미국을 전복시키려는 내부의 적이다.
러시아군의 노력은 규모나 장엄함에 있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적 업적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34]
미국인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Americans never quit.)
군인들은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평화를 바란다. 전쟁에서 고통받고 가장 아픈 상처까지 견뎌내야 하는 사람이 군인이기 때문이다. (The soldier above all others prays for peace, for it is the soldier who must suffer and bear the deepest wounds and scars of war.)
이 나라가 다시 재건하는데는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 하지만, 맥아더의 예상과 다르게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해내면서 세계적인 부국으로 도약했다. 한국의 수호를 위해 누구보다도 분투했을 맥아더 본인이 알았다면 매우 기뻐했을 일이다.[35]

달변가답게 유명한 어록들을 많이 남겼지만 잘못 알려진 부분들도 있다. 그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지만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
이 문장은 맥아더가 했던 말로 국군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맥아더는 이 말을 한 적이 없다. 영어권의 어떤 자료에도 비슷한 문구가 검색되지 않고 중국어와 일본어에서도 유사 문구조차 찾을 수 없다. 오로지 한국에서만 맥아더의 어록으로 사용되고 있다. #

심지어 맥아더는 이런 말을 할 처지도 못된다는게 해당 어록이 허위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나온 공통된 의견으로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의 필리핀 공격에서의 경계작전 실패, 6.25 전쟁 당시 중국군의 개입도 무시하다 1개 대대가 전멸하는 치욕[36]을 경험했고 1.4후퇴라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

이처럼 해당 어록 자체가 본인의 과오를 돌출하는 내용이기에 본인의 군생활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앞뒤가 안맞는 발언이 된다.#

육군의 한 장교가 일전에 미국의 맥아더 기념관에 이메일을 보내 맥아더 장군이 언제 어떤 맥락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물어보자, 맥아더 기념관으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맥아더 장군이 그런 발언을 한 기록은 없다 였다.#

오히려 저 경계의 실패한 군인 예를 들수 있는 것은 맥아더가 아니라 아이젠하워이다. 아이젠하워 역시도 미군 원수이자 2차세계대전과 6.25 전쟁의 영웅이며, 오히려 이쪽이 더 경계에 신경을 썼다.
오마 브래들리 항목에도 나온 당시 아이젠하워 원수 시절 미군 경계 암구호 일화를 보면 더 확실하다.
아르덴 대공세 당시 브래들리의 재미있는 일화 한 가지. 당시 독일의 오토 스코르체니 SS대령의 특수부대가 미군으로 위장해 교란작전을 벌이는 것이 발각되자, 미군은 이들을 색출하기 위해 검문을 하면서 미국인만 알 법한 질문, 예를 들자면 "미키 마우스의 여자친구는 누구냐?", "시카고에 있는 야구팀은 어느 리그 소속이냐"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브래들리는 전선 이동 중에 헌병의 검문에 걸렸는데 일리노이의 주도가 어디냐는 헌병의 질문에 브래들리는 자기 살던 미주리 근처라서 그런지 스프링필드라고 정확히 대답했다. 문제는 미국에서도 시카고의 인지도 때문에 '일리노이의 주도는 시카고'라고 알려졌다는 것. 결국 이 무식한 헌병은 "아니야! 이 멍청아! 정답은 시카고야!" 라면서 브래들리를 즉시 체포했다. 브래들리 말고도 상식이 부족한 병사들끼리 서로서로 많이 체포되어서 애를 먹었다고도 한다. 실제로 위의 시카고 컵스 문제를 못맞춰서 잡혀온 장군도 있었다고 한다. 반면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몽고메리는 운전병에게 미국놈들의 바보짓은 무시하고 지나가라고 지시했다가, 열받은 미군 헌병들이 타이어를 사격해 터뜨리고 그를 끌어내려 몇 시간 동안 구금한 흑역사가 있다. 몽고메리는 네놈들을 모두 군법회의에 세우겠다고 펄펄 날뛰었지만, 아이젠하워는 슈코르체니가 최고의 선물을 줬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물론, 몽고메리가 아무리 원수인들 올바른 행동을 한 동맹군 병사를 징계할 근거는 만들 수 없었다고 한다.

이걸 보면 경계의 중요성을 말한 장군은 맥아더가 아니라 아이젠하워가 더 가깝다.

5. 후손

명성과 경력을 비롯한 스케일에 비해 의외로 자녀는 아들인 아서 더글러스 맥아더 4세 외에는 없었다. 맥아더가 지은 시인 "아들을 위한 기도"는 한국에서 꽤 유명한데, 이 시의 주인공인 아서는 아버지의 소망과 달리 군인이 되지 않았고,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아예 자신의 성까지 바꾸며 집안과 연을 끊다시피 잠적했다. 친한 친척들하고만 연락을 하고 있고, 뉴욕시에 거주한다는 것 외의 다른 행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2000년에 어머니인 진이 사망했을 때도 언론에는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들이 햄버거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허구이다. 오죽했으면 2000년대 중반쯤에 죽었다는 소문까지 돌았었다. 하지만 연락 하고 있는 친척들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는 어릴 때부터 너무나 유명한 아버지 때문에 세간의 관심을 지나치게 받았다. 아버지가 원수 계급장을 달 정도가 되면 대개 그 아들은 이미 장성해서 사회의 중견이 되어 있지만[37], 그는 맥아더가 58세가 되어서야 본 늦둥이라 태어났을 때 이미 맥아더는 미군 최고위 장성이었고, 맥아더가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을 때도 고작 7살 소년에 불과했다. 맥아더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자 세간의 관심도 높아져서 어렸을 때부터 라이프 지의 표지 모델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커가며 이런 관심을 점점 견디지 못했고 결국 아버지가 죽자 성을 바꾸고 은거하게 된다. 친척들도 이런 그의 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절대 그에 대해서 노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형인 아서 맥아더 3세와 사이가 매우 좋았는지, 아들에게 서로의 이름을 붙여줬다. 그래서 미국의 외교관으로 주일 미국대사를 지낸 더글러스 맥아더 2세(1909~1997)는 실제로 더글러스 맥아더의 조카이고 더글러스 맥아더의 아들 이름은 개명 전까지 아서 맥아더 4세였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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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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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25 전쟁 전반 · 인천 상륙 작전 · 원산 상륙작전
기타
복무 미합중국 육군 (연합군 최고사령부 ·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 필리핀 자치령 육군
관련 인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기타 인천상륙작전(영화) · 인천상륙작전(웹툰)
참전한 전쟁에 대한 내용은 더글러스 맥아더/생애4·5·6·8번 문단 참고
6.25 전쟁에 관련된 문서는 틀:6.25 전쟁 참고
파일:파란색 깃발.svg 보수주의 }}}}}}}}}

9. 외부 링크


[1] 이름의 한글 표기에 대해서는 이하의 '기타' 항목 참고.[2] 예비역 미국 육군 중장 출신. 1845년 6월 2일 ~ 1912년 9월 5일 (향년 67세)[3] 1876년 6월 1일 ~ 1923년 12월 2일 (향년 47세)[4] 1878년 ~ 1883년 (향년 5세)[5] 1890년 ~ 1965년 5월 30일 (향년 75세)[6] 1898년 12월 ~ 2000년 1월 (향년 101세)[7] 1938년 2월 21일 ~ (85세)[8] 원수는 정년 없이 종신 복무토록 규정되어 있어, 비록 은퇴하여 실제 근무는 안 하고 그냥 집에서 놀더라도 군에서 받은 의전 예우 그대로 받으면서 지내는 게 가능하다. 원수 개인이 "전역"을 희망하면 예비역으로 신분 전환되는데, 이를 이용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잠시 전역 신청한 뒤 대통령 임기 만료하고 나서 육군의 예비역 소집 명령을 받는 식으로 다시 육군 원수 자리를 유지했다.[9] 베라크루즈 점령[10] 후술하듯이 맥아더는 명예훈장을 비롯한 미군 소속 군인이 받을 수 있는 대부분의 훈장을 받았지만 그는 보통 Army Distinguished Service Medal(DSM, 수훈복무훈장)만을 근무복등에 정장으로 차고 다녔다. 후줄근한 근무복에 더 상위의 훈장을 많이 수훈받았음에도 약장을 니미츠처럼 줄여서 달고 다닌 것도 아니고 유독 수훈복무훈장만, 그것도 약장도 아닌 정장으로 차고 다닌 부분은 맥아더의 아이덴티티인 담배 파이프, 필리핀 원수모와 함께 그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다.[11] 또는 맥아더 원수.[12] 반대로 아이젠하워는 유럽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 육군 원수로서 연합군을 지휘했다.[13] 사실 연합군 점령하 일본 시기 당시 맥아더의 권위와 권력은 쇼군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적어도 쇼군은 최고 권력자였지만 천황의 신하인 것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는데, 맥아더는 쇼와 천황과 같이 찍은 사진에서 알 수 있듯 자신이 천황 아래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당시 덴노건 쇼군이건 결국에는 일본 내에서 일본 내의 무언가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지만, 맥아더는 미국이라는 엄청난 대국을 뒤에 둔 미국의 고위인사인 데다가 2차 세계대전 승전으로 미국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 직접적 패전국인 일본에서 절대자일 수 밖에 없었다.[1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현대사의 위대한 아시아인들을 선정한 것인데, 이 리스트에서 맥아더는 마하트마 간디, 덩샤오핑, 아웅 산 수 치, 리콴유, 코라손 아키노 등과 함께 정치인으로 분류되었으며 정작 일본 태생의 정치인은 리스트에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15] 전후 일본의 경제적 재건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LA 타임즈가 선정한 '20세기 경제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 리스트에도 포함되었으며, 정치인 중에서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다음으로 높은 순위를 기록하였다. #[16] 다만 이 비판이 무색하게 맥아더 본인도 6.25 전쟁 당시 만주 지역에 핵공격을 주장했다가 결국엔 해임당했다. 하지만 평가 항목의 핵공격 주장을 보면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보면 공개적으로 핵 얘기를 꺼내서 겁만 주는 것으로 끝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해임건도 이것만으로 해임사유는 아니지만 말기에 정치군인의 길을 걷다가 트루먼과 사이가 나빠져 이것으로 해임시킬 마지막 명분이 됐을 뿐이다.[17] 애초에 중국의 기반을 박살내려면 만주보다는 충칭이나 상해에 핵공격을 하는게 적절했다. 인구밀도가 낮은 만주를 굳이 언급한건 전면전이 아니라 겁만 주려는 의도가 크다고 봐야한다.[18] 천만에 가까운 미육군 누적 참전 병력 중 현재까지 겨우 13,000명만 수훈받았다.[19] 영웅적인 행동을 한 군인에게 수여[20] 초대 수훈자[21] 본래 옛 군가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인데, 오늘날에는 맥아더가 한 말로 기억되고 있다.[22] 퇴역식의 연설 중 나온 어록이다.[23] 위에 소개된 '노병은 죽지 않는다'와는 달리, 이 말은 맥아더의 오리지널 어록이다.[24] 1962년 5월 모교인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하여 후배 생도들에게 '군인이 명심해야 할 가치'로 역설한 말이다.[25]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에도 쓰여 있는 말이다.[26] 핵무기의 위력을 보고 한 말이다.[27] 일본군의 침공으로 필리핀을 탈출하면서 한 말로, 그는 결국 이 약속을 지켰다.[28] 위 연설과 연결되는 내용으로, 필리핀 수복 직후의 연설이다.[29] 일본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한 말이다. 보통 일본을 놀릴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고 당시 일본인들도 격분했으나 전체적인 내용은 독일과 일본을 비교하면서 독일이 45세의 지능범이라면 일본은 12세 소년이니 벌을 주기보다는 이끌어 줘야한다고 일본을 쉴드쳐준 것이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30] 전투기 1대를 만들고 관리하는 것보다 비싼 돈을 쏟아부어 양성한 여러 엘리트 조종사들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비인간적인 측면과, 정작 성공했다고 쳐도 카미카제에 당한 미군의 군함에는 별 피해가 없는, 그야말로 인명 경시와 전력 낭비의 끝판왕이기 때문.[31] 6.25 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에 주둔한 미군이 한국으로 가면 일본군이 반란을 하지 않겠냐는 미국 기자의 질문에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고 한다. 과연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종전 후 맥아더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수많은 일본인들이 울면서 환송식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칼 맞아 죽은 쇼군들은 몇 명 있다.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아시카가 요시노리, 아시카가 요시테루 등이 있다.[32] 혹은 "전쟁에는 민주주의가 통하지 않는다."[33] 사무엘 울만(Samuel Ulman․1840~1924)의 시로 맥아더 장군이 일본 점령군 사령관 시절 집무실 벽에 걸어 놓고 늘 읽었다.[34]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했던 말이다. 사실 독소전 초기 더글라스 맥아더 뿐만 아니라 니미츠와 아이젠하워를 포함하여 소련군의 군사 업적을 높게 평가하는 발언을 많이 했다.[35] 한국은 맥아더의 늦둥이 아들이 노인이 되기도 전에 선진국에 진입했다.[36] 미군 역사상 처음으로 대대급 부대를 버려둔 채 후퇴하며 버려진 8기병연대 3대대는 전멸하여 800명중 600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37] 체스터 니미츠 원수의 아들인 체스터 니미츠 주니어는 일찍이 아버지와 같은 전장에서 잠수함 함장으로 활약했으며, 1957년에 해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Texas Instruments에 입사했다. 미 해군사관학교 엘머 B. 포터 교수의 저술로 1977년에 나온 니미츠 전기에 따르면, 니미츠 주니어는 부친의 후광과 그 자신이 전쟁에서 세운 공적으로써 충분히 4성 제독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해군 장교에 대한 가치관에 혼란이 생겨 결국 전역을 결심하게 되었고 니미츠 원수는 아들이 해군을 떠나는 것을 달가워하지는 않았으나 따뜻한 지지를 보냈다고 한다.[38] 비슷한 예시: Thatcher (새처→대처) , throw in (스로인→드로인), Nathan (네이선→나단), Ethan (이선→에단) Heathrow (히스로→히드로)[39] 영국식 영어 발음으로 'MacArthur'를 읽으면 'マッカーサー'와 거의 차이가 없다.[40] "애비에이터" 라고 부르는 모델로, 탑건매버릭이 썼던 모델이었다.[41] 탈모가 있어서 전쟁 중에 사진에 모자를 벗은 것이 없다. 그나마 모자를 쓰지 않고 찍은 대표적인 것은 히로히토와 나란히 서서 같이 찍은 사진이다. 독일군 마냥 정모를 찌그려 놓은 게 특징인데 이런 정모를 크러셔 캡이라고 부른다.[42] 비슷한 사례로 윈스턴 처칠이 있다. 괴벨스 때문에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마피아 두목과 같은 이미지를 얻게 되었으며 당사자는 무척이나 싫어했지만 정작 국민들은 엄청 좋아했다고 한다. 나치를 정말 마피아 처럼 모조리 소탕해버릴 듯한 강인한 지도자의 모습이 연상 되어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이러한 우연을 겪은 또 다른 주인공으로는 KFC의 창업자인 할랜드 샌더스를 꼽을 수 있다. 겨울용 검은 정장을 세탁한 바람에 여름용 흰색 양복밖에 고를 수 없는 상황에 별 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입고 나갔었는데, 오히려 긍정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아예 그의 상징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축구계에서도 체흐가 큰 부상을 입음으로 인해 헤드기어를 착용했지만, 오히려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잡은 바 있다.[43] 참고로 인천 상륙 작전에서 맥아더가 직접 바닷물을 헤치며 육지로 걸어 올라오는 유명한 사진 역시, 미군의 강인함과 의지를 드러낼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려고 의도적으로 연출한 사진이다. 심지어 이 사진의 원조는 2차대전 당시 맥아더가 일본군에게 빼앗긴 필리핀에 재상륙하면서 종군기자에게 찍혔던 사진으로, 인천에서는 대놓고 언론플레이를 하려고(북한도 결국 일본군 꼴이 날 것이란 심리전) 필리핀처럼 연출한 것이었으며 사진만 봐도 뒤에 병사들이 상륙정에서 편하게 쉬고 있는데 바다로 뛰어들어 걸어온 것이 연출임을 알 수 있다.[44] 근데 이 말은 반대로 말하면 맥아더가 콘콥을 호불호와는 별개로 실제로 자주 썼다는 뜻이다. 콘콥이 소모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젓가락으로 비유하자면 은젓가락이나 자개로 장식된 젓가락과 같은 명품을 애장품으로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바깥에서 식사할 일이 많으면 1회용 나무 젓가락을 자주 쓰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현대에도 여행이나 출장을 자주 다니는 파이프 흡연자라면 훼손되거나 분실되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콘콥 1~2개를 가지고 다닌다. 맥아더는 아버지가 고종 황제에게 선물받은 향로를 전쟁터에까지 가지고 다니며 전시했다고 할 정도로 호사를 즐기는 성격이었지만 전쟁터를 돌아다니는 군인에게 파이프와 같은 쉽게 버릴 수 있는 사소한 소모품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45] 대통령 후보 출마 시에 맥아더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은 보수적인 농촌 주민들에게 콘콥은 몇 번씩 직접 만들어서 써 본 소박하고 익숙한 물건이다.[46] 아직 파이프를 피우는 흡연자들이 많았기 때문도 있지만, 궐련의 경우 야간작전 때 담뱃불 때문에 적에게 위치를 노출당할 수 있어 파이프를 피우는 병사들이 많았다. 흡연자인 병사들은 이중으로 뚜껑을 달아 담뱃불이나 연기를 완전히 차단한 파이프를 주로 사용하였다.[47] 제1차 세계대전 시기까지만 해도 궐련이 대중화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담뱃잎만 제공했다.[48] 林炳稷, 《臨政에서 印度까지 : 林炳稷外交回顧錄》, 1964, 女苑社, p. 389[49] 이승만은 4.19 혁명으로 쫓겨난 뒤 미국 하와이로 이민을 가 현지 요양원에서 마지막을 보냈다. 원래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으나, 건강 문제와 박정희 정부의 귀국 반대로 끝내 국내에 못 돌아오고 현지에서 죽었다.[50] 다만 맥아더는 종전 이후 731부대의 생체실험 등에 가담한 전범 상당수를 기소하지 않고 사면시켜주었다.[51] 이 일화는 1985년 KBS 드라마 - 오성장군 김홍일 3부 (1:40:28초 장면) 그리고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도 재현되었다.[52] 맥아더 장군을 감동시킨 국군 병사 일화가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맥아더 장군과 달리 다른 대부분의 미군 장교들은 한국군의 군기와 전투력을 매우 회의적으로 보았다. 문제는 미군 선발대로 투입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군기와 전투력 역시 한국군과 크게 다를바 없었다는 점.[53] 원문에는 제8연대로 오타 실수가 있는데 신동수 일병의 소속부대는 제18보병연대가 정확하다.[54]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한 시기는 2002년이며, IMF 외환위기를 논외로 하면 1994년이다.[55] 사실 식민지에서 해방된지 10년도 되지않아 나라가 두동강난데 이어 전쟁으로 낙동강 바깥 지역의 국토는 모조리 황폐화되고 수십만의 청년들이 전투에서 죽거나 다치고 심지어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들 역시 폭격, 학살 등으로 엄청난 사상자들이 발생해서 국가 역량을 책임질 청년층의 감소까지 겪었으며 서독과 일본, 스페인마냥 전쟁 후 수월하게 경제를 복구할 수 있을 정도의 산업 인프라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한미상호방위협정으로 어찌어찌 미국이 한국을 지킨다 하더라도 북한은 기본에 공산권 국가 중 큰형님들인 소련과 중국까지 근처에 있어 시시탐탐 한국의 안보를 위협했으니 일반적인 생각으론 나라가 멸망하지 않는 걸 기적으로 여겨야할 판이었다.[56] "한국의 전후 발전상을 본다면 무덤에서 맥아더 사령관이 일어나 춤을 출겁니다. 오늘날 한국의 모습은 맥아더 사령관이 모든 것을 바쳐 지키고자 한 자유와 번영의 상징입니다" 라는 맥아더재단 사무총장 윌리엄 데이비스의 언급이 전쟁기념관에 기록되어 있다.[57] 최영장군이 대표적이다. 당대의 폭군인 연산군도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나 어느정도 재평가되어 강화군 교동도에 부군으로 모신 신당이 있다.[58] 실제로 맥아더 해임 당시 보수만이 아닌 다수 한국인들이 맥아더가 억울하게 해임되었다며 맥아더에 동정적이었다.[59]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코코다 트랙 전투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실제로 맥아더는 트롤링만 일삼았고 제대로 싸운 이는 현지의 호주군 지휘관이었다.[60] 동티모르 사태에서도 호주와 인도네시아는 대립하는 관계였다.[61] 물론 이 때는 아직 대통령이라는 직책 자체가 완전히 정의되지 않았던 시기였던 탓이 컸다.[62] 이와 동시에 카이사르처럼 공화정부의 군대를 가지고 당시 정치체제가 자신에게 가하던 견제에 반하는 행동을 한 인물이었단 조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카이사르와 맥아더의 차이는 이런 행보가 성공해서 임기 없는 독재관이 됐냐, 실패해서 정치적 입지와 군사적인 존경을 잃었느냐로 볼 수도 있다.[63] 싱가포르 전투에서 패배하고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64] 단 이는 의외로 흔한 사례로, 버락 오바마 미합중국 대통령도 한 번의 서명에 20여 개에 달하는 만년필을 사용하기도 했다.[65] 여기서도 맥아더는 잠시 눈을 붙였다고 하고, 트루먼 회고록에서는 쿨쿨 잤다고 깠다.[66] 트루먼이 말년에 쓴 회고록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이 회고록은 맥아더를 사정없이 까는 걸로 꽤 유명하다. 트루먼이 맥아더를 철저하게 미워하게 된 이후의 증언이라 좀 가려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70대의 원수가 19살 소위처럼 군다. 운운하는 이야기도 여기서 나온다.[67] 미국 측도 휴전을 굉장히 하고 싶었다는 점은 여러 모로 알 수 있는데, 우선 회담장을 개성으로 정한 점, 전쟁 중이지만 개성만큼은 절대 점령하지 않겠다는 언질을 공산군 측에 말했었다.[68] 대표적인 예로 MBC 주간드라마 <아버지와 아들>과 <야망의 25시> 등지에 나왔던 크리스티나 한과 KBS 대하드라마 <독립문>에서 손탁 역을 맡았던 게일 제닝스 등이 있다.(참고)[69] 김남주 옥중시집 <저 창살에 햇살이(1992)> 2탄 수록.[70] 부산예술고등학교 및 중앙대학교 음악대학 출신.#[71] 1979년 TBC 전국 대학가요 경연대회 출신이며, 양평군의원 재직 경력도 있다. 2017년 초에 박근혜 대통령 찬양가를 제작해 파문을 일으켰다.[72] 육군 원수 아이젠하워의 이름은 니미츠급 항공모함 2번함(CVN-69)에 붙어있다.[73] LA 한인타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나 이미 오래 전부터 노숙자들의 천국으로 보통 사람들은 잘 찾지 않는다.[74] 2019년 6월 22일 방송[75] 13:00 쯤부터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맥아더와 시간 순서에 따라 한국 전쟁 당시의 모습까지 간략히 다루고 있다[76] 역사를 움직인 운명의 순간과 전장의 삶과 죽음의 모습에서 펼쳐진 극한의 이야기를 20세기 영상 매체 발명 후 기록된 영상을 수집하여 대표적인 전투로 바라본 다큐멘터리[77] 추산치가 사망자 5만에 체포된 사람이 50만 명, 200만 명이 부상당했다. 물론 연방군이 직접 죽인 건 10분의 일이라서 그 정도만 발표하고 나머지는 누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