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42년 7월 21일 ~ 11월 16일까지 뉴기니 섬에서 일본군과 미군, 호주군이 벌인 전투.과달카날 전투에 가려진 태평양 전쟁 초반부 일본군의 대표적 졸전. 임팔 전투의 선배이기도 하다.
2. 배경
남방작전으로 손쉽게 동남아시아를 석권한 일본은 남서태평양에서의 완벽한 우위를 차지하고 미국과 호주의 연결선을 끊기 위해, 뉴기니 섬 남단의 최대항구 포트모르즈비(Port Moresby)의 공략을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의 공략 시도는 산호해 해전에 의해 좌절되었으며, 이후 해군은 미 해군 항모세력 격멸로 목표를 바꾸고 다음 작전에 돌입하게 된다.해군이 이렇게 발을 빼자, 이번에 나선 것은 일본 육군이었다. 육군은 점령하고 있던 뉴기니섬 동남부 해안의 부나(Buna)에서 육로로 진격하여, 한줌에 불과한 규모에 전투력도 엉망인 연합군 지상부대를 격파하고 포트모르즈비를 점령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반대로 연합군은 어떻게든 포트모르즈비를 사수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포트모르즈비를 잃게 되면 호주 동해안이 고스란히 일본의 공격위협에 노출되어 사실상 미국과 호주간의 해상교통이 차단되며, 라바울 등 다른 거점들에 대한 역습 기회 자체를 잃게 된다. 무엇보다 포트모르즈비의 상실은 뉴기니 섬에서의 축출을 의미하며, 이는 일본의 침략에 맞선 최전선 반격 교두보의 상실이기도 했다.
3. 양측의 문제점
3.1. 연합군
연합군 모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태평양의 연합군들은 오합지졸에 별거 아니라는 일본군의 판단은 정확했다. 태평양 전선에서의 영국군 및 영연방군은 숫자로는 일본군을 압도했지만(특히 말레이 전역과 싱가포르 전투등에서) , 영연방의 일원인 호주는 태평양 전쟁 발발 이전인 1941년 초부터 북아프리카 전역에 참여하여 지상군 주력부대 대부분이 롬멜의 독일군 북아프리카 군단과 혈전을 치르고 있었다. 즉 주력부대는 전부 북아프리카, 유럽으로 건너가 있고 실질적으로 이 전투는 호주 민병대가 수행한 셈.미군도 사정은 비슷해서, 태평양전역에서 병력이 가장 많았던 필리핀을 상실한 이후 전투병력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진주만 공습 직후 징병제를 실시하고 대대적으로 병력 확충에 나서고 있었으나 본격적으로 전투에 투입할 병력은 상당히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나마 있는 병력은 동시기 벌어지고 있던 과달카날 전역으로 돌려지고 있었으며 해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외에도 당시 호주에는 미국에서 온 2개 육군 사단(32, 41보병사단)이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정글전 훈련을 하는 도중이었다. 기본훈련은 이수했으나 정글 전투에 필요한 훈련을 전혀 이수하지 않았다는 것. 애초 이들은 호주 본토의 방위를 담당하고 있던 부대였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사령관. 호주의 연합군 병력 전군은 필리핀에서 탈출한 맥아더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맥아더는 이 전투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 전투를 무시했으며, 지형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고, 주둔지와 전장의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있었음에도 현지 시찰도 제대로 없었다.
단적인 예가 초기 병력을 배치할 때 내린 명령이 뭐나면, "해당 지역으로 가면 작은 구렁텅이가 있으니까, 그곳에서 방어 하라"였는데, 문제의 작은 구렁텅이는 7마일(11.27km)이 넘는 계곡으로 밝혀져서 도착한 부대를 멘붕시켰다. 초기 파견병력이 버틴 것을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불러야 되는 것이, 병력 부족, 보급품 부족, 훈련부족, 군수품 개념없음, 장비 부족 등 모든 부분에서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연합군을 상대하던 일본군의 상태라고 이해하면 쉽다.[1]
무엇보다 맥아더는 '자군 병력이 훨씬 많아서[2] 전황이 유리한데 현장 병사들이 무능하고 패기가 없어서 진격을 하지 않는다'라는 착각에 빠져있어서 왜 진격하지 않는가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3.2. 일본군
문제는 일본군도 똑같이 과달카날 전역에 묶여있는 중이었고, 때문에 포트모르즈비 공략에 충분한 여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때문에 공격측에 당연히 필요한 해상작전이나 항공지원이 거의 없었다. 한 개 사단 병력인 13,500명[3] 가량으로 공격해야 되는 상황에서 말이다. 여기서 끝나면 다행이지만…일본군에겐 뉴기니 섬에 대한 지리, 지형정보가 전무했다. 애당초 일본군의 포트모르즈비 공략 시도가 지도로 보니 거리가 160km도[4] 채 안되니까 별 문제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한 짓이다. 물론, 일본군의 출발지인 부나에서 포트 모르즈비까지 90여 km에 불과한건 사실이었는데..
뉴기니 섬을 남북으로 분단하는 험준한, 해발고도가 2,000~3,000m에 달하는 오웬 스탠리 산맥을 그대로 관통해야 하는 이 막장코스를 일본군은 횡단하겠다고 덤빈 거다. 뉴기니의 고산지형과 정글이 합쳐진 결과가 얼마나 지독했나면 뉴기니 섬은 이 지역을 지배하던 영국과 독일[5]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해안가나 약간 개발했지 그외 내륙은 미개발 상태였다. 내륙으로 가면 제대로 된 도로는 커녕 시골길도 없고 끔찍한 늪지대[6]에 하늘을 뒤엎는 정글로 가득차 있었다.[7]
내륙 고산 지대는 현지 주민들도 왕래가 너무 힘들어서 마을마다 언어가 다를 지경으로 험준한데다가, 덤으로 식용이 가능한 동식물이 매우 부족해서 미리 양식을 마련해서 등짐으로 만들어서 휴대하지 않으면 현지인도 얼마 못가고 정글에서 굶어죽을 정도의 막장도를 자랑했다. 정글 지형인 뉴기니 특성상 일본군이 택한 통로로 가느니 해안가만 따라서 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더 빠르고 편했다. 원주민도 해안가 마을은 직선상 가까운 내륙과 교류하지 않고 카누로 해안을 항해하는게 더 편하고 합리적이었고, 그렇게 했다. 그래서 내륙 생활권과 해안 생활권이 완전히 분리된, 한마디로 내륙을 잇는 길이나 통로는 전무. 심지어 이 지역에서 금광이 발견되었을 때에도 도로개설을 포기하고 광부의 소모품이나 캐낸 금을 항공수송했다. 항공수송비용이 도로건설비용보다 훨씬 나았을 정도였던 것이다.[8]
저 위의 지도로 보면 그냥 산길을 통과하는 것처럼 보일수 있는데, 오웬 스탠리 산맥을 입체적으로 나타낸 바로 아래 지도를 보면 일본군이 얼마나 미친 작전을 채택한 것인지 좀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사진 오른쪽 해안이 일본군의 근거지이지 작전 출발점인 부나 고나, 그리고 사진 왼쪽이 일본군의 목표인 포트 모르즈비이다. 해발 3,000m의 저 산맥을, 당시에는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산악지형을 각종 포 등 중화기까지 끌고 변변한 차량도 없이 통과하려고 덤빈 것이다.
게대가 산맥 입구에서 포트모르즈비까지 거리도 직선으로 해도 100km이다. 이 정도면 서울 종로에서 세종시까지의 거리인데 거기에 평지도 아닌 산맥 그리고 정글과 늪지대가 깔린 곳을 아무 것도 없이 도보행군을 하라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현지 사령관이었던 55사단장 호리이 토미타로(堀井 富太郎)는 대본영에 보급이 부족해 정글을 지나가는 것은 무리라는 보고를 올렸지만 거기에 대한 답변은 보급은 귀관이 신경 쓸 분야가 아니다. 결국 호리이는 보급이 없다는 가정하에서 단기결전이라는 일본군에서 정말 흔하게 나오는 대전략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사실상 푸르기만 한 사막과 다름없는 곳으로 죽음의 진군이 시작되었다.
4. 전투진행
항명이라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 일본군 특성상, 호리이 소장은 별 수 없이 진군을 시작했다. 그리고 적도의 무더위가 작렬하며 일본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지치기 시작했다.연합군의 대응은 민병대 중심의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의 진을 빼놓겠단 거였고, 전면적인 대응은 후일로 미루고 있었다. 소규모 민병대가 일본군을 코코다 트랙 곳곳에서 습격했고, 안 그래도 지친 일본군은 더욱 더 피폐해졌다. 이게 가장 훌륭한 방침이었다고 하는데, 이건 정말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해당 민병대는 훈련도 장비도 부족한 480여명 정도였고, 이 전력으로 일본군을 30일 동안 지연시킨 것은 경이로운 전과였다. 전투개시 후 1개월이 경과하면서 정규군이 증원군으로 도착해서 병력이 다소 보충되지만, 방어전을 벌이던 시기의 병력은 일본군이 계속된 우위에 있었다. 무엇보다도, 게릴라전을 선택한 것은 현장의 어쩔 수 없는 판단[9]이었지, 맥아더 사령부의 판단이 아니었다. 맥아더는 전장에서 떨어져 있는 본부에 있으면서 호주군이 일본군보다 많다는 근거없는 판단 아래에서 끊임없이 공격작전을 지시했고, 워싱턴에는 호주 병력들이 투지가 없다고 무전을 보냈다.
결국 일본군은 경험해보지 못한 무더위와 늪지대, 정글과 전염병, 호우로 인한 급류 등으로 엄청난 비전투손실을 겪으며 출발한 지 50여일만인 9월 2일에 목표지점까지 절반 도착했다.
일본군이 막장이긴 했지만 그래도 포트모르즈비를 공략하는 중요한 작전이기에 나름 계획을 세워 보급을 해보려고 노력했으나 조지 케니 중장이 이끄는 미육군 제5 항공대라는 무서운 상대가 있었다. A-20과 B-25를 가진 이들은 10kg의 낙하산 폭탄 40발 이상을 떨굴 수 있었고, 이들의 직접 공격을 버텨낸다 해도, 코코다 산길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와이로피의 쿠무시 강의 교량에 10대 이상의 항공기가 하루에 2~3번씩 집중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일본군이 다리를 복구하기가 무섭게 파괴하였으며 그나마 강을 건넌 보급대 또한 끈질기게 추격하여 전멸시켰다.
거기에 대공방어를 맡던 47 야전대공포 대대에게도 큰 타격을 입혀서 9월 중순이 되어서는 보급품이 있어도 제5 항공대의 존재로 인해 강을 건너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여 최일선부대의 식량 배급량이 원래 하루에 쌀 3홉인데 1/3 수준인 쌀 1홉 밖에 받지 못하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고 결국엔 그것마저도 끊겼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55사단의 병력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 상태였다. 어쨌든 일본군은 9월 16일에 포트 모르즈비에서 50km 떨어진 이오리바이와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9월초에는 뉴기니에 도착한 호주군 25여단이 이미 강력한 방어선을 펼치고 있었다. 거기에 일본군은 상부의 지시로 연락선 확보를 위해 1개 연대를 9월 16일에 코코다로 퇴각시켰기에 공세에 나설 수 있는 부대가 3개 대대에 불과해 더 이상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 막장 상황이 돼서야 일본군은 포트 모르즈비 공략 포기를 결정했다. 그것도 공격부대의 막장 상황 때문이 아니라, 격화되는 과달카날 전투에 대한 전력 집중이 이유였다. 호리 소장은 극악한 어려움 끝에 포트모르즈비 근처까지 왔는데 부하들에게 돌아가자는 말을 차마 할 수는 없는지 며칠을 기다렸으나 17군 사령관인 하쿠다케 중장의 엄격한 명령에 결국 25일에 이오리바이와에서 철수하였다.
호리이 소장은 부하들을 이끌고 왔던 길 그대로 되돌아갔으나 이 와중에도 연합군의 추격을 받아, 간신히 부나에 도착했을 땐 잔존병력은 고작 500명에 불과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앞서 설명했던 지옥같은 지형에다가, 전진시 가도 인근의 마을을 약탈하면서 전진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퇴각길에는 매우 적대적인 원주민 천지였으므로 어디서도 식량을 구할 길이 없던 것이었다. 호리이 소장 자신은 저 생존자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11월 19일에 퇴각하던 중 쿠무시 강에서 자신의 부관이 한때 어부여서 카누를 몰 수 있는지라 부관과 참모장을 동행하여 부나 지역에 있는 부대들의 지휘를 위해 카누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카누가 뒤집히면서 결국 참모장과 함께 익사하였다.
추격에 들어간 연합군은 일본군이 정말 이 길을 행군해온 것이냐며 경악했고 일부는 그대로 따라 추격하고 다른 일부는 수송기로 강습에 들어갔다. 호주군의 주력인 7사단은 일본군이 온 길을 따라 그대로 추격을 했고 11월 10일부터 11일 사이에 오이비 고라리 지역에 있던 일본군 144연대 3대대와 낙오병들을 분쇄하면서 코코다 트랙의 전투가 끝났고 7사단은 11월 15일에 쿠무시강을 도하하였다. 또한 미군 32사단이 수송기를 이용해서 부나-고나지구 근처에 있는 급조된 비행장 여러 곳에 강습했다. 일단 미-호주군이 부나-고나지구에 배치되자 후속부대들은 전부 수송기로 증원되었다.
5. 결과
코코다 트랙 전투가 끝나고 호주군이 찍은 사진
일본군은 투입 병력 대부분을 상실했으며, 반대로 연합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전투결과가 나왔다. 사실 연합군의 승리도 아닌 대자연의 승리라고 봐야 정확하다. 기본적인 지형 정보도 없이, 보급까지 무시하다 일어난 참사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임팔 작전의 마이너 버전이다.[10]
그리고 몇 개월 후, 이 개고생이 반대로 진행된다. 미군, 호주군 연합군이 남쪽 해안의 포트 모르즈비로부터 북쪽 해안의 주요 항구인 '부나'와 '고나'까지 추격해 간 것. 즉 포트 모르즈비의 방어에 성공한 연합군은 일본군을 아예 섬멸하려고 후속단계에 들어가는데 그것이 이 전투이다. 문제는 코코다로 가는 길에 일본군이 후위부대로 떼어놓은 병력이 진지까지 가설한 다음에 죽기살기로 완강한 방어를 했으며, 간신히 철수를 완료한 일본군은 그들이 처음 7월에 상륙할 때부터 만들어진 진지들에 배치되어 방어를 한다. 병력상으로 연합군이 일본군의 배가 훨씬 넘었지만 여러가지 요소로 인해 고전을 하게 되고 결국 총 병력 20,000명중 2,000명에 달하는 사망자와 12,300명이 넘는 부상자와 병사자가 발생하게 된다.
그 덕에 이런 대참패는 묻혔다. 연합군은 연합군 대로 큰 피해를 입은 것과 더불어 또 뉴기니 섬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과달카날 전투가 그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본영 또한 늘 하던 대로 이런 대패는 함구했다.[11]
코코다 산길에서 부나-고나에 이르기까지의 전투를 부나-고나 전투라 부른다. 본 위키에는 현재 항목이 작성되어 있지 않은데, 이 전투를 상세히 알고 싶으면 http://blog.naver.com/imkcs0425/60087922762
현대에는 해당 루트를 여행하는 트래킹도 있다. 비정기적으로 해당 루트를 주파하는 레이스 행사(Kokoda Challenge Race)도 있다. 물론 현대에는 안전한 지역을 따라 길을 다듬고 휴식처도 마련되어 있지만, 그래도 가끔씩 조난 사고가 발생한다. 해외 사이트 소개
6. 미디어
2006년에 나온 동명의 호주 영화 KOKODA가 있다.
코코다 전투 및 뉴기니 전선을 가룬 책으로 권주혁씨의 '나잡비행장'이 있다.
백승만 경상국립대학교 약학대학 교수의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에서도 말라리아로 인간이 고생한 사례로서 언급된다.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에서도 등장. 맥아더의 추한 모습과 안잭군의 고생을 조명했다.
7. 참고 링크
본문 내용은 정말 빙산의 일각이다. 좀 더 자세한 내역을 보고 싶은 이들을 위한 링크.[1] 게다가 초기 병력은 영연방권 국가들의 표준적인 군복 색상인 카키색 전투복을 입고, 고전적인 형태의 쇠징이 박힌 홍창으로 된 군화를 신고 있었다. 하지만 정글에서 거의 모래색에 가까운 카키색은 다소 튀는 편이었고, 밑창이 가죽으로 된 군화는 거칠고 고온다습한 정글의 가혹한 환경에서 금세 손상을 입었다. 반면에 일본군은 보다 위장성이 높은 녹색톤의 전투복과 고무창을 댄 군화를 착용하고 있었고, 화력 면에서도 호주군은 거의 1차 대전 수준의 개인화기와 경기관총 정도로 무장하고 있었기에 평소의 일본군답지 않게 서구 연합군을 상대로 우세할 수 있었다.[2] 위에서 서술한 훈련 중인 32사단과 41사단에 호주 민병대원들을 전부 합하면 대략 3만명정도 되기는 했다.[3] 영문 위키 기준[4] 부나에서 포트모르즈비까지의 거리는 약 160km이며 이는 약 100마일이다. 1마일은 약 1.6km.[5] 독일은 북뉴기니를 1914년까지 지배했고, 제1차 세계 대전이후 영국에 넘겼다.[6] 일반적인 늪지대도 지나가기 어려운 건 매한가지지만 문제는 이 지역의 늪지대란 게 남태평양 특유의 화산재가 뻘을 형성한 것이라 유독가스를 뿜어대는 상당히 위험한 곳이었다.[7] 총, 균, 쇠 등의 저서로 유명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서들 대부분에서 뉴기니의 험준한 자연환경이 소개되어 있는데, 어찌나 험준한지 산골짜기 하나 넘어가면 원주민들이 쓰는 언어의 어족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 해안 지역 원주민들은 인도네시아 군도의 국가들과 꽤 자주 교류했고, 유럽이 남태평양에 진출했을 때 바로 백인들과 접촉할 수 있었던 반면, 내륙 산지의 원주민들은 항공기 개발 이전까지는 미접촉 부족이었다.[8] 이 금광이 훗날 비스마르크해 해전의 전초전이 되는 와우 공략전의 중심지, 와우이다.[9] 병력도 없고, 거점도 없고, 화기도 없는 상황이었다.[10] 그래도 임팔 작전과 비교는 미안할 정도인 것이, 임팔 작전은 아예 처음부터 보급을 도외시하고 노획할 생각으로 저지른 미친 짓이다.[11] 태평양 전쟁 항목과 구 일본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대본영의 이런 행동은 패망 내내 이어져왔다. 패전을 숨기는 건 귀여운 수준이고 패전을 승전으로 포장해 선전하는 일도 왕왕 일어났다. 결국 일본 국민들이 현실을 깨닫는 것은 본토 코앞까지 미군이 들이닥친 뒤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