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의 일부 | |
▲ 맥심 기관총으로 경계 중인 중화민국 육군 병사 | |
날짜 | |
1939년 11월 15일 ~ 1940년 1월 30일 | |
장소 | |
남광시, 쿤룬 산맥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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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장파쿠이| ]] | ]][[틀:깃발| ]][[바이충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세이이치 쿠노 | ]][[틀:깃발| ]][[틀:깃발| ]] 리키치 안도
전력 | |
병사 15만 명 항공기 100여 기 | 병사 10만 명 항공기 100여 기 |
결과 | |
중화민국의 승리 | |
피해규모 | |
5,600명 전사 1만 1,000명 부상 800명 실종 기타 이유로 6,416명 전투 불능 | 4,000명 이상 전사 4,000명 이상 부상 100명 포로 |
민간인 11,147명 사망 6,147명 부상 및 실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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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9년말부터 1940년초까지 벌어진 중일전쟁 당시의 전투.2. 배경
1939년 10월, 일본군이 제1차 창사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일본 대본영은 해군의 요구에 따라 중국의 국제 보급로를 철저히 차단하기 위해 화남 방면군에 하이난섬을 점령하고, 향후 남진을 준비시켰다. 당시 중국군은 전투 이후 1939년 동계공세작전을 준비하며 주력 병력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 지역에는 방어 병력이 약화된 상황이었다.3. 진행
3.1. 난닝 함락
1939년 11월, 일본군은 안도 리키치가 지휘하는 제21집단군 소속의 제5사단, 대만혼성여단, 해군 제2파견함대 및 제3연합항공대를 동원하여 친저우만에 상륙했다. 이들은 11월 15일 룽먼항에서 상륙한 뒤 급속히 북상하여 24일 난닝을 점령한다.이후 일본군은 곤륜관과 룽저우 등의 전략적 요충지를 차례로 장악하며 광시성을 거의 통제하게 되었고, 하노이 루트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3.2. 곤륜관 전투
12월 18일, 장제스는 바이충시가 지휘하는 14개 사단과 제한적인 공군 병력을 동원하여 동·서·북 방향에서 일본군을 포위하는 형태로 공격을 시작했다. 북부의 제5군은 두위밍의 지휘 하에 제200사단의 전차를 앞세워 보병사단인 명예 제1사단을 지원하는 전술을 통해 곤륜관 정면을 공격했고, 동시에 일부 병력으로 일본군을 우회하여 곤륜관 전초 기지를 점령했다. 우탕과 류탕 등 지역도 차례로 탈환했다. 동·서방 병력은 친현, 룽저우, 가오펑아이 등을 공격하며 일본군의 보급선을 위협했다.일본군은 곤륜관을 사수하기 위해 제5사단의 제21여단을 긴급 파견했으나, 12월 24일 구타오링에서 중국군의 매복 공격에 크게 패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제21여단장 나카무라 마사오 소장이 박격포 공격으로 전사했다.
12월 29일, 중국군은 전면 총공격을 개시했으며, 일본군은 약 4,000명의 사상자를 내며 후퇴했고. 31일에는 곤륜관을 완전히 탈환하며 곤륜관 대첩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