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7월, 충칭 장강 남안 |
영어: The Bombing of Chongqing
일본어: 重慶爆撃 (じゅうけいばくげき)
1. 개요
중일전쟁 중 중국 대륙에 대한 일본 제국의 무차별 폭격의 일환으로 1938년 2월 18일부터 1943년 8월 23일까지, 일본군이 충칭의 민간인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벌인 폭격이다.당시 충칭에는 대규모의 군수공장 등 각종 군사시설들이 밀집해 있었고, 특히 민간인들의 거주지에도 군사시설을 설치하여 주민들을 인간방패로 삼고 공습에 대한 방어책도 부실하여 일본군에게 무차별 폭격을 가할 구실을 본의 아니게 제공해 준 사건이었으며[1] 이 폭격으로 충칭은 역사상 최장 기간 동안 전략 폭격을 당한 도시가 되었다. 또 충칭에 있었던 1,200년 된 종루와 고건축물들이 모조리 파괴되거나 불타 사라져 버렸다.
2. 상세
1938년 2월부터 일본 육군 항공대가 충칭을 급습했으나 1938년 겨울에서 1939년 봄까지는 구름과 안개가 도시를 보호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5월부터 기후가 좋아지면서 충칭은 고스란히 노출되었고, 이것이 일본군에게 폭격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게다가 더운 날씨와 월식을 기념하여 사람들이 거주지 밖으로 몰려나왔으며, 이로 인해 민간인 대상 공습의 살상률은 증대되었다.
다음날 충칭의 절반은 칠흑과 같은 어둠에 휩싸였고, 수많은 집들이 불탔으며 타지 않고 남은 집들에서는 사람이 죽었음을 알리는 초들이 타올랐다. 폭탄을 피하기 위해 충칭 시민들은 유일하게 공습이 이루어지지 않은 외교 공관 지역으로 뛰쳐나갔다.
중화민국과 같은 연합국이었던 영국 대사관은 문을 열고 피난민들을 들였지만 영국 대사관도 폭탄에 직격당해 수십 명이 죽었다. 영국 대사는 격노하여 길거리로 뛰쳐나가 일본군 전투기들을 향해 지팡이를 휘두르며 격한 욕설을 퍼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의적이었던[2] 독일 대사관은 아예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고 독일 대사관 담벼락 밑에서 여자와 아이 수백 명이 살아남으려고 했지만 민간인도 죽이는 일본군에게는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피할 수 있는 자리마다 피난민이 가득했고, 피난민이 가득한 자리마다 일본군 폭격이 덮쳤다. 충칭은 가는 곳마다 시체와 폐허만이 있었고, 어줍잖은 지위나 재산이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지는 못했다. 어느 장군은 결혼식 도중에 공습을 피해 하객들과 함께 방공호로 피했지만 불붙은 기름이 방공호로 흘러들면서 모두 불에 타서 사망했고, 250명이나 되는 충칭의 부자들이 중국은행 지하실에 피신했지만 건물이 통째로 무너지면서 압사당했다. 주인 잃은 저택엔 피난민들이 들어와 구경도 해 보지 못한 외국 술과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비단 이불에서 잠을 잤다.
현재 충칭은 중국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지만 당시만 해도 중국의 대도시들 중에서 낙후된 도시였고, 효과적인 방공 화력 같은 건 당연히 없었다. 5월 공습으로만 6,000~8,000명이 죽었고 도시의 25%가 타 버렸다. 시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모든 차량이 총동원되었고, 장제스의 리무진도 징발되었다.
당시 충칭에는 이론적으로 20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방공호가 있었는데 방공호 시설은 제각각이었다. 소련인들과 독일인들은 매우 튼튼하고 바(bar)와 침실, 부엌, 전화까지 제공하는 벙커를 쓸 수 있었던 반면, 많은 시민들은 모기가 넘치고 통풍도 되지 않는 방공호를 써야 했다. 6월 5일 공습 당시에는 수천 명의 시민들이 한 방공호에서 한꺼번에 질식하는 대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일상은 계속되었다. 충칭의 상점들은 폭탄을 투하하는 폭격기가 그려진 ‘도쿄 직송 계란’을 팔았고 은행도 폭격 다음날에 영업을 재개했다. 많은 식당들은 ‘공습 후 식사’라는 의미의 '공후반'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전기가 다시 들어온 다음엔 다시 유람선들이 강 위에 떴다.
김명호 저 《중국인 이야기》에 따르면, 1938년부터 1943년 8월까지 계속된 일본 폭격기의 충칭 공습은 무지막지했는데, 일본군은 5년 동안 218차례, 총 9,513대가 출격해 폭탄 21,593발을 쏟아부었다고 한다.[6]
그러나 1939년 이후 폭격이 장기화되면서 점차 방공포 등의 대응수단이 강화되었고, 방공호와 같은 대피수단의 확보 역시 효율적으로 진행되어 희생자 수도 줄어들게 되었다. 결국 인구는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고 사람이 하나 죽을 때마다 새로운 생명이 2명 생기게 되었다.
이 학살로 11,889명이 사망하고, 10,000여 채의 가옥과 시가지의 대다수가 파괴되었다.
3. 사건의 영향
미국은 이 사건을 이유로 비행기 부품에 대한 무역을 봉쇄했다.[7] 사건의 잔인함으로 보면 무역 봉쇄를 할 만하다. 물론 석유까지 수출 금지시킨 것도 이 사건의 영향이라 보면 된다.이후 일본 제국은 석유와 비행기 부품을 교역해 달라고 졸랐지만 미국은 단호하게 거절했고(헐 노트)[8] 이에 열받은 일본이 도조 히데키 내각을 출범시키고,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을 공격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의 패색이 짙어진 후 일본은 도쿄 대공습으로부터 시작된 일본 본토 공습으로, 자신들이 중국에서 잔혹하게 행했던 폭격을 미국에 의해 그대로 돌려받았다. 일부에서는 일본이 중국에서 행한 소이탄 대공습에서 미군이 영감을 얻어 일본 대공습 때 똑같이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이다.[9]
4. 사건 이후
2012년 9월 10일 오후, 피해자 유족과 생존자들이 일본 정부 관계자를 고소했다.[10] 그러나 일본 재판부는 대공습에 대한 배상 책임을 부정했다. 원고 측은 이 판결에 불복해 상고할 방침이라고 했다. 日고법 "충칭 대폭격에 정부 배상책임 없다"…폭격 사실은 인정인터넷에는 충칭 대공습 시절 희생자들의 사진을 일본군의 조선인 학살 사진으로 왜곡해서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차피 가해자가 일본군이라는 똑같다는 점 때문에 왜곡되어 사용되기 쉽지만 이러면 오히려 사실확인의 어려움 때문에 가해자 쪽을 돕는 꼴이 된다. 왜곡된 자료들 때문에 실제 증거들까지 신뢰성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5. 참고 문헌
- 바이두 백과 문서의 사진자료 #
- 네이버 블로거의 현지 방문 포스팅 #
- 한국어 위키백과 중경 대공습 문서
- 《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 -중국, 버마, 인도- 편.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1] 이는 이후 미국의 도쿄 대공습 등 일본 본토를 폭격할 때도 똑같이 적용되었으며, 여기서 적용된 것이 바로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는 논리였다.[2] 중일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독일과 중화민국은 군사적 교류를 많이 했다.[3] 그럼에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난징 대학살 당시 기록사진과 함께 "간도 참변 당시 사진"(?!)이라고 소개했다.[4] 때문에 종종 인터넷 등지에서 난징 대학살 자료사진으로 사용되는 오류가 벌어지곤 한다.[5] # 한국어 위키백과 문서에는 1,200여 명, 《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에는 무려 4,000여 명이 사망했다고 나온다.[6]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6》, 한길사, 2017, 27쪽.[7] 헐버트 빅스(Herbert Bix) (2001). 《Hirohito and the Making of Modern Japan》, 364쪽[8] 어이없을 수 있겠지만 미국은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에 전시물자 등을 무지막지하게 팔아치우고 있었다. 중국도 있긴 했지만 자금력의 차이와 주요 항구도시의 함락으로 규모 차이가 어마어마했다.[9] 일단 영향 자체는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충칭 대공습이 이루어졌을 당시 커티스 르메이는 중국 전선에서 근무 중이었고, 폭격을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 밀집된 목조 건축물을 대상으로 한 폭격에 어떤 공격이 효과적인지 영감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0] 충칭 폭격 피해자가 고소를 하다. <일본 타임즈>. 2006년 3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