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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01:44:12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파일:나치 독일 국장(화이트).svg 독일 국방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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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jpg
이름 Alexander Ernst Alfred Hermann von Falkenhausen
알렉산더 에른스트 알프레트 헤르만 폰 팔켄하우젠[1]
출생 1878년 10월 29일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국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주 나이세군 구트블루멘탈[2]
(現 폴란드 오폴스키에 주 크비아트코프)
사망 1966년 7월 31일 (향년 87세)
파일:독일 국기.svg 서독 나사우
복무 독일 제국군 (1897년 ~ 1918년)
독일 국가방위군(Reichswehr) (1921년 ~ 1930년)
국민혁명군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 (1935년 ~ 1938년)
독일 국방군 (1938년 ~ 1944년)
최종 계급 파일:Si_4b.png 육군 보병대장
주요 서훈 푸르 르 메리트
중화민국 보정훈장(寶鼎)
정당 독일 국가인민당
1. 개요2. 생애
2.1. 1차대전~전간기2.2.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 단장 시절2.3. 2차대전과 말년
3. 여담4. 각종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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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R27580,_Freiherr_Alexander_von_Falkenhausen,_SA-F%C3%BChrer.jpg
▲ 1933년 현역 일선에서 물러났을 때의 모습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은 독일장군이다. 제2차 세계 대전벨기에의 독일군 군정사령관을 지내기도 했다.

군인으로서 특이한 경력을 가졌는데, 커리어 내내 이렇다할 군공이 없다. 지휘한 부대도 없다. 그렇다고 정치군인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라 명장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허구헌날 지는 군대를 현대화하여 제대로된 전투를 펼칠 수 있도록 하는것이 전문이기 때문이다.

서구가 군사적인 확장을 거듭하면서 비서구 국가들에서는 수많은 군사고문들을 초빙하였는데 그 커리어의 끝판대장과 같은 사람이다. 이 사람이 초빙된 중국, 오스만 양국으로부터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고 갈리폴리 전투, 난징 공방전 전후로 이 사람의 교육을 받은 군대가 역사에 남을만한 선전을 펼쳐서, 제대로된 현대적인 군대경험이 없는 오합지졸을 열강의 군대와 맞서서 대등하게 싸울 수 있도록 훈련하고 조직하는 기술에 대해서는 비할 사람이 없는 전문가였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2. 생애

2.1. 1차대전~전간기

1897년 19세로 소위로 임관해,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일본 제국에서 주재무관을 지냈다. 그 동안(1909~1911) 일본과 화북, 한국과 인도차이나에 유학을 하기도 했다. 그 후 1차대전시에 오스만 제국군 소속으로 팔레스타인으로 파견, 푸르 르 메리트를 받았다. 전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복무하여, 1927년에 드레스덴 보병학교 교장으로 재직했다. 그리고 1930년에 퇴역했다.

2.2.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 단장 시절

1935년 건강상의 이유로 퇴임한 전대 재중 독일 군사고문단장 젝트의 후임으로 중화민국에 파견되어 1935년부터 1938년까지 3년간 4대 주중독일 군사고문단장을 지냈다. 이후 그는 국민혁명군을 독일식으로 훈련시키고 독일제 대포(88 mm 등), 소총(중정中正 소총 등)을 전달하였다. 그는 상하이에서부터 난징까지의 길목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도록 중국군을 지도하며 우쑹 전투 등을 참관, 일선에 나가 진두지휘했다. 이로 인해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중국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전에 없는 뛰어난 전과를 올렸지만 결국 국민당 장교진과 장제스의 역량 및 경험 부족 그리고 화력과 장비 열세 등의 무지막지한 군사수행능력의 차이로 상하이를 내주어야 했고 상하이를 점령하는데 개고생을 했던 일본군이 빡치면서 일어난 결과가 난징대학살이었다.

1937년부터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을 중재하려던 독일의 트라우트만 공작이 실패로 돌아가고 일본 제국이 독일 측에 팔켄하우젠을 비롯한 독일 고문들을 중국에서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자 송환이 결정되었다. 팔켄하우젠은 중국에 남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으나 오지 않으면 가족들에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위협에 어쩔 수 없이 장제스가 베푸는 고별 만찬에 참여한 다음에 주중 독일 대사인 오스카 트라우트만과 함께 1938년 6월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중국이 결국 승리를 거둘 것이라 확신한다. 일본은 전쟁평화, 모두 짊어지게 될 것이다." 라는 말[3]을 남겼다.[4]

2.3. 2차대전과 말년

1938년 팔켄하우젠은 재복무하여 1940년 벨기에 군정사령관이 될 때까지 서부국경에서 복무하였으며 보병대장까지 진급한다. 1940년에서 1944년까지 벨기에 군정사령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유대인에 대한 법령을 시행하여, 유태인 28,900명을 추방했다. 또한 반유대정책으로 일자리를 잃은 유태인 2,250여 명을 지크프리트 선 건설에 투입했다. 또한 점령기간 동안 레지스탕스 수백 명이 독일군에게 총살당했고, 벨기에 사람 약 43,000명 역시 수용소로 추방되어 13,000명이 죽었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직후 에르빈 폰 비츨레벤과의 친분 때문에 부헨발트의 수용소에 투옥되었고, 이후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51년 브뤼셀에서 열린 재판에서 첸쉬링[5], 레옹 블룸 등이 팔켄하우젠이 어느 정도 유대인들을 보호하려 했다는 증언을 하였으나, 유대인 25,000명을 추방하고 레지스탕스에 대한 보복으로 인질을 처형한 것이 유죄로 인정되어 중노동형 12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콘라트 아데나워에게 도움받아 3주 후 석방된다. 1950년, 팔켄하우젠의 72번째 생일에 장제스가 '중국의 친구'라는 이름으로 12,000달러를 보냈으며 1958년 11월 28일, 중화민국 정부는 팔켄하우젠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

파일:팔켄하우젠서훈.jpg

1966년에 87세로 사망했다.

3. 여담

1차대전 때 벨기에 군정 사령관이었던 루트비히 폰 팔켄하우젠의 조카다.

4. 각종 매체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팔켄하우젠'으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Gut Blumenthal, Landkreis Neisse[3] 미국 주간지 타임, 1938년 7월 18일[4] 그리고 그의 말 대로 7년 후 중국은 일본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팔켄하우젠 또한 생존한 상태로 이 소식을 접할 수 있었지만 정작 이 시점에서 그의 고국인 독일은 이미 유럽에서의 전쟁에서 패전해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 당한 상태였으며 그 또한 패전과 함께 기존에 독일 국방군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직위에서 해직이 된 뒤였다.[5] 钱秀玲, '중국판 쉰들러'라고 불리는 할머니로 벨기에의 유대인들을 구출했다.[6] 근데 정작 사진은 히틀러와 담화하는 쿵샹시의 사진이 뜬다. 히틀러와 쿵샹시의 만남이 중독합작의 나름 상징적인 사진이긴 하지만 대놓고 팔켄하우젠을 소환하겠냐는 선택지에서 굳이 쿵샹시의 얼굴만 찍은 사진을 보여줄 이유가 있을까? 당연히 패독사의 고증오류다.[7] 군벌의 경우 공산당과 국민정부 둘 다에 반대하는 반대파 루트를 탈 경우 공산당과 국민당 중점 중 하나를 복붙받는데 비동맹 및 공산당 지지도에 따라 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