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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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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colcolor=#fff> 파울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Paul Nikolaus Von Falkenhorst
파일:팔켄호르스트.jpg
출생 1885년 1월 17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브레슬라우
사망 1968년 6월 18일 (향년 83세)
동독 니더작센 홀츠민덴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학력 독일 제국 육군사관학교
직업 군인
최종 계급 상급대장
주요 서훈 기사십자 철십자장
핀란드 백장미 훈장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생애
2.1. 제1차 세계 대전2.2. 전간기2.3. 제2차 세계 대전2.4.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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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군인이다. 최종 계급은 상급대장이다.

2. 생애

팔켄호르스트는 1885년 독일 제국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1]

성장 후 독일 제국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한 팔켄호르스트는 1903년 소위로 임관함과 동시에 서프로이센 제2군 (일명 빌헬름 1세 연대)에 배치되었다. 1913년 중순 그는 중위로 진급했고 마침내 1914년 12월에는 대위를 달았다.

2.1.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도중이었던 1918년 팔켄호르스트는 참모장교 신분으로 핀란드로 파견되었고 이후 종전까지 거기서 복무했다.

2.2. 전간기

전쟁이 끝났지만 팔켄호르스트는 계속 군에 남는 것을 택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는 신생군 바이마르 공화국군 소속이 되었다. 또한 그는 착실히 진급하여 1925년에는 소령으로, 1930년에는 중령으로, 그리고 1932년에는 대령까지 진급했다.

이후 1933년부터 1935년까지 팔켄호르스트는 프라하에서 복무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삼국의 주독 주재무관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2년간 제3군의 참모장직과 제32보병사단 사단장을 거친 팔켄호르스트는 최종적으로 1939년, 육군 제21군단의 군단장이 되었다.

2.3.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을 끊은 폴란드 침공에서 팔켄호르스트는 제21군단을 지휘하였고 여기서 보여준 공적으로 1939년 10월 1일 병과대장(보병대장)으로 진급, 별을 달았다.

폴란드를 무너뜨린 독일은 이제 노르웨이와 덴마크로 눈을 돌렸다. 문제는, 노르웨이를 침공한다면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지대고 날씨가 매우 추운 나라 특성상 산악전과 혹한지에서 전투가 벌어질 것이 필연적이었는데, 당시 독일 국방군에는 그런 종류의 전투에 익숙한 장성들이 많지 않았다.[2]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1차 세계 대전 당시 참모장교로 핀란드에서 근무한 팔켄호르스트의 존재는 독일군으로서는 실로 행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0년 2월 20일, 히틀러는 팔켄호르스트를 호출해 두 가지 사항을 전달했다. 첫째는 그가 곧 노르웨이 침공을 지휘할 사령관으로 임명될 것이라는 소식이었고, 둘째는 따라서 금일 오후 5시까지 기초적인 작전 계획을 수립해 오라는 지시였다. 팔켄호르스트는 고민에 빠졌는데, 시간이 너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총통의 명령이니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그는 급한 대로 인근 상점에서 노르웨이 여행 가이드북을 한 권 구매한 다음 거기 나온 지도와 지리정보를 바탕으로 노르웨이 침공 계획을 수립하고 제출했는데, 놀라운 건 히틀러는 이 계획을 승인했다.

그리고 며칠 뒤인 1940년 3월 1일, 팔켄호르스트는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으로 노르웨이 침공에 투입될 지상군 전체를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윽고 1940년 4월부터 6월까지 벌어진 일련의 침공 작전에서 팔켄호르스트는 노르웨이 육군을 성공적으로 제압,[3] 독일의 노르웨이 점령에 크게 공헌했다. 이 공적으로 그는 1940년 4월 기사철십자상을 수여받은 뒤 동년 7월에 상급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팔켄호르스트는 그 해 연말 즈음에 새로 편성된 노르웨이 주둔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1년에는 같이 노르웨이에서 활약한 동료 에두아르트 디틀과 더불어 소련의 무르만스크를 공격하는, 일명 은색 여우 작전의 총책임자 중 하나가 되었다. 1941년 6월 소련 침공이 게시됨과 동시에 은색 여우 작전이 게시되었으나, 팔켄호르스트가 상대한 소련군은 노르웨이군과는 질적으로 다른 강군이었다. 게다가 무르만스크 인근의 거친 지형과 살인적인 추위는 독일군의 진격을 심각하게 방해했고, 결국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팔켄호르스트는 쭉 노르웨이 주둔군으로 사령관으로 제직하면서 북극 지역에서 복무하였는데, 북극 지역은 특성상 독일과 소련 모두 주 전선으로 두지 않았기에 그가 제직하던 3년 동안 은색 여우 작전을 제외하면 대규모 전투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1944년 6월, 에두아르트 디틀이 항공사고로 사망하면서 로타르 렌둘릭이 제20 산악군 사령관직을 승계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팔켄호르스트의 노르웨이 주둔군 사령관직 역시 렌둘릭에게로 넘어갔다. 이렇게 일선에서 물러난 팔켄호르스트는 1944년 12월 예비역 장교 신분으로 전환되었으며 이후 종전 때까지 다시는 일선에 배치되지 않았다.

2.4. 전후

전후 팔켄호르스트는 전쟁범죄 혐의로 영국군에게 기소되었다. 그가 기소된 것은 그가 노르웨이 주둔군 사령관으로 제직하던 당시, 포로로 잡힌 영국 특수부대 코만도 대원들을 총살하라는 명령인 일명 "코만도 명령"에 협조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재판이 진행되면서, 팔켄호르스트가 "포로로 잡힌 코만도 대원들을 심문할 경우 그들을 24시간 이상 살려두면 안 된다"와 "붙잡힌 코만도 대원들을 방첩대(SD)에 넘겨 총살하라"라는 명령을 내린 사실이 밝혀졌고, 결국 그는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이대로라면 그는 죽은 목숨이었으나 뜬끔없이 스웨덴 탐험가 스벤 헤딘이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헤딘은 팔켄호르스트가 1941년 포로로 잡힌 뒤 처형될 예정이었던 노르웨이 저항군 대원 10명을 살려줄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히틀러에게 제출해 최종적으로 저들의 처형을 막았다고 주장했고, 이를 근거로 그의 죄를 참착해달라고 요청했다. 스벤의 주장은 받아들여졌고, 팔켄호르스트에게 내려진 판결은 사형 대신 징역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팔켄호르스트는 복역 중이던 1953년 7월, 건강이 악화되어 가석방되었다. 그의 고향 브레슬라우는 오데르-나이세 선으로 폴란드령이 되어버렸던 관계로, 그는 브레슬라우에서 추방된 자신의 가족이 정착한 작센 남부의 홀츠민덴으로 돌아갔다. 팔켄호르스트는 이후 그곳에서 조용히 남은 여생을 보내다 1968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 출생 당시 이름은 니콜라우스 폰 야스트젬브스키(Nikolaus von Jastrzembski)였으나 이후 1911년 아버지의 귀족 작위를 승계받으면서 "폰 팔켄호르스트"로 이름이 바뀌었다.[2] 이유는 간단한데, 서유럽과 동유럽의 숲과 평원이 주축이 된 1차 세계대전의 특성상 저런 곳에서는 전투가 많이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3] 노르웨이 침공에서 독일군의 손실 중 상당수는 해군에서 나왔고 육군 쪽은 상대적으로 경미한 피해만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