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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벵크


파일:나치 독일 국장(화이트).svg 독일 국방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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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발터 뱅크.jpg
이름 Walther Wenck
발터 벵크
출생 1900년 9월 18일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작센주 비텐베르크
사망 1982년 5월 1일 (향년 81세)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오스트리아 리트 임 인크라이스
복무 국가방위군(1921년 ~ 1933년)
독일 국방군(1933년 ~ 1945년)
최종
계급
파일:Si_4b.png 육군 기갑대장(General der Panzertruppe)
주요
참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겨울폭풍 작전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베를린 공방전
주요
서훈
기사 철십자 훈장
독일 십자훈장
서명 파일:벵크서명(수정).png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5. 도서 및 매체에서6. 보직 내역7. 진급 내역8. 서훈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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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국방군의 장성이다. 최종계급은 육군 병과대장(기갑) 이다. 1900년생으로 독일 국방군의 가장 어린 병과대장 중 하나였으며[1] 동안인 외모 덕에 '소년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2] 전쟁 말기 서부전선을 방어하는 유일한 독일군세였던 제12군의 사령관이었으며, 히틀러의 요구대로 베를린의 포위를 해제하기보다는 베를린에 갇힌 민간인을 빼내 미군 점령지로 대피시키는 데에 집중했다. 그런 이유로 양심적인 군인이라고도 평가된다. 동시에 유능한 지휘관으로도 평가받는데, 스타르가르드 전투 당시 한물간 자신의 병력으로 소련군을 돌파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2. 생애

2.1. 초기 군생활

1900년 비텐베르크에서 장교 막시밀리안 벵크 중위(1867-1943)와 헬레네 기벨러(1871-1934)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 발터 벵크는 1911년에 나움부르크 사관학교에 생도로 입학한다.[3] 1918년에는 베를린의 그로스 리히터펠데 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정식으로 임관하지 못하고 1919년 2월 자유군단에 합류한다. 당시 그는 라인하르트 자유군단에 속해 스파르타쿠스 봉기의 진압에 참여했다. 진압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하사로 진급한 그는 빌헬름 폰 오펜의 군단으로 옮겨 가서 활동을 계속한다.

2.2. 전간기

1921년 1월 벵크는 바이마르 공화국 국가방위군에 정식으로 입대한다. 1923년 2월까지 뮌헨의 중앙 보병학교[4]에서 교육받은 그는 졸업과 함께 제9보병연대에 소위로 임관하고 중위를 달 때까지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다.

1928년 가을, 차량수송 전술교관으로 있던 하인츠 구데리안은 차량수송부대 교육참모부 소속 슈토트마이스터 대령의 부탁으로 전차 전술 수업을 진행한다. 차량수송부대와 진행한 모형전차훈련에 부슈 중령은 자신이 대대장으로 있던 제9보병연대의 3대대를 참여시켰다. 당시 부슈의 부관이었던 벵크와 구데리안의 첫만남이었다.

1928년 10월 3일에는 1905년생 이름가르트 베넬트와 결혼하고 1930년 8월 1일에 쌍둥이 남매 헬무트와 지그리트의 아버지가 된다.[5] 얼마 후에는 차량화전투부대에서 근무한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정식 기갑부대를 창설할 수 없었던 군부에서 이름만 바꿔 만든 부대였다. 1933년 5월 1일에는 제3차량수송대대에 배치된다. 당시 차량수송총감부 참모장이었던 하인츠 구데리안 중령의 입김이 작용한 인사였다.[6] 그는 곧 대위로 진급하고, 1935년부터 1936년까지 베를린 전쟁대학에서 참모교육과정을 듣는다.[7]

전쟁대학 교육을 마친 벵크는 베를린 총참모본부에서 기갑부대 관련 업무를 수행하고 한스 폰 젝트의 부관을 지내기도 한다. 1938년 11월 10일에는 아이제나흐에 주둔한 제2기갑연대 1대대장이 되고, 이듬해 3월 1일에 소령으로 진급한 뒤 8월 18일부터는 제1기갑사단 참모로 근무를 시작한다.

2.3. 폴란드 전역

제1기갑사단은 구데리안의 제19기갑군단에 속해 폴란드 전역에서 크게 활약했다. 그 덕분에 벵크는 9월 18일에 2급 철십자 훈장을, 2주 뒤인 10월 4일에는 1급 철십자 훈장을 받는다. 이때 사단 부관으로 근무하던 베른트 프라이탁 폰 로링호펜과 친분을 쌓는다.[8]

2.4. 프랑스 전역

벵크는 프랑스 전역에도 제1기갑사단 참모장교로 참전해 활약한다. 작전 개시 명령이 급하게 떨어진 1940년 5월 9일에는 휴가를 나가 있던 탓에 로링호펜이 그를 급하게 불러들여야 했다.

5월 14일, 사단장 키르히너 장군과 함께 있는데 구데리안이 앞으로의 사단 이동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찾아왔다. 전 사단을 서쪽으로 돌릴지, 측면 방어를 위해 일부 병력을 아르덴 운하 동쪽에 배치할지를 고민하는 그와 사단장의 대화 벵크는 대뜸 끼어들어 한 마디를 던진다. "분산하지 말고 집중하라!" 평소 구데리안이 기갑장교들에게 말하던 시그니처 대사를 던진 것이다. 구데리안은 그의 발언을 듣더니 전 사단을 동시에 움직이기로 결정한다. 이후 제1기갑사단은 구데리안의 명령에 따라 신속하게 진격하며 여러 지역을 점령한다.

5월 28일, 히틀러가 구데리안에게 1개 기갑집단을 편성하라고 명령하면서 편제가 바뀌었다. 구데리안이 군단장으로 있던 제19기갑군단에 직접 속했던 제1기갑사단은 루돌프 슈미트 중장의 제39군단 휘하로 제2기갑사단, 제29차량화보병사단과 함께 들어왔다.

제1기갑사단은 6월 18일 자정쯤에 제39군단에서 지시한 목적지였던 몽벨리아르에 도착한다. 전차에 연료가 남아서 진군을 계속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군단장과 연락이 되지 않아 곤란하던 찰나, 벵크는 기갑집단장이 된 구데리안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벨포르로 계속 진격해도 되냐고 묻는다. 구데리안은 당연히 허락했고, 제1기갑사단은 몇 시간 후 벨포르 요새를 점령한다.[9] 드 파리 호텔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대기하던 벵크는 새벽부터 찾아온 구데리안에게 왜 이렇게 빨리 오셨냐며 놀라서 인사했고, 두 사람은 목욕을 하러 사라진 사단장을 기다리며 준비되어 있던 고급진 아침 식사를 즐긴다. 이 식사의 원 주인은 독일군이 벌써부터 쳐들어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던 요새의 프랑스 장교들이었다. 이후 그는 벨포르 점령 공로로 중령으로 진급한다.

2.5. 스탈린그라드 전투

바르바로사 작전까지 제1기갑사단에서 같은 보직을 맡고 일하던 벵크는 1942년 1월 26일 독일 십자훈장을 수훈하고 대령으로 진급한다. 같은 해 6월 1일부터는 베를린에서 3개월간 참모교육과정 교관을 맡아 장교 교육을 담당하고, 9월 3일에는 제57기갑군단 참모장으로 부임한다.

11월에 그는 제3루마니아 왕국군 사령관 두미트레스쿠의 참모장이 된다. 말이 참모장이었지 사실상 천왕성 작전으로 와해되어 패주 중이던 루마니아군을 수습하라는 의미였다. 벵크는 병력을 긁어모으기 위해 각종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한다. 한 번은 제6군에 소속되어 있던 선전부대를 발견하자 주요 합류점에 그들을 배치하고 촬영한 영상을 상영하도록 한다. 지나가던 군인들이 멈춰 서서 상영물을 보고 있으면 그들을 그 자리에서 거둬들여 무기를 들려주고는 전선으로 보내는 식이었다. 또 그렇게 긁어모은 장병들을 수송할 차량이 모자라자, 부하들을 시켜 '연료 보급 지점'이라는 팻말을 꽂아 놓고 보급을 위해 다가오는 군용 트럭과 지휘차량을 빼앗아 활용한다. 그렇게 수습한 부대를 활용해 A집단군과 돈집단군의 간극을 메우고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된 제6군의 상황을 이용하는 것을 저지했다. 얼마 후 벵크는 12월 26일에는 홀리트 파견군 참모장으로 부임하고, 12월 28일에는 기사 철십자장을 수훈한다.

1943년 3월 1일에 소장으로 진급한 벵크는 3월 15일에 제1기갑군 참모장으로 부임한다. 당시 사령관은 에버하르트 폰 마켄젠이었다.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도 참전하며, 이후 1944년 3월 24일 A집단군 참모장이 되고 4월 1일에 중장으로 진급한다.

2.6. 1944년 7월 20일 이후

1944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신경쇠약으로 일을 내려놓은 차이츨러와 그의 대리로 근무하다 폭발에 휘말려 부상을 입은 호이징거 대신 육군 참모총장이 된 구데리안은 벵크를 작전과장으로 불러들였다가 이내 참모차장으로 삼는다. 작전과장 보기슬라프 폰 보닌 대령과 업무 스타일이 잘 맞아서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했다. 또한 이때 작전과 외에도 훗날 '겔렌 조직'으로 알려질 라인하르트 겔렌 소장의 '동부전선 해외군' 정보과 지휘권을 인수한다.

엉망진창이 된 전황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일하던 벵크는 직속 상관인 구데리안과 히틀러의 기싸움에 휘말리고 만다. 구데리안은 히틀러와 회의에서 허구한 날 싸워댔고, 히틀러가 그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면 반항의 의미로 회의에 직접 출석하지 않고 벵크를 대신 보냈다. 벵크는 매번 성실하게 회의에 참석해 구데리안이 시킨 대로 일을 처리했다. 또한 OKW와 OKH가 경쟁 관계에 있다는 인식과 달리 구데리안은 OKW 참모총장 알프레트 요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기 때문에[10] 벵크 역시 요들의 보좌관 빈터 장군과 잘 지내려고 노력했다.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이후 구데리안의 명령에 따라 고트하르트 하인리치가 지휘하는 비스툴라 집단군의 참모장으로 부임했다. 그가 참모장으로 지휘하던 퀴스트린 해방 작전이 2월 15일부터 17일까지 순조롭게 진척되었다.

2월 17일 저녁에 히틀러가 벵크를 호출한다. 그러나 그를 불러 놓고 만나 주지 않았던 탓에 새벽 4시까지 히틀러 사령부에서 밤을 지새우다 겨우 면담을 마치고 집단군 사령부로 향한다. 그러나 과로 중인 운전병을 보고는 피곤해 보이니 뒷좌석에 타라며 운전대를 잡는다. 문제는 벵크 역시 과로에 시달려온 데다 밤까지 꼴딱 샌 상태였고, 졸음운전을 하다가 교각 난간에 들이박고 만다. 동승했던 운전병은 두개골과 늑골에 골절상을 입은 장군을 급히 병원으로 옮겨야 했다.사서 일을 만드는 타입 결국 전치 6주의 부상을 입은 벵크는 참모차장 및 참모장 업무에서 손을 떼야 했고, 한스 크렙스가 그의 후임 참모차장이 된다.

2.7. 제12군과 베를린 공방전

베를린 서쪽에 주둔해 서부전선을 담당하던 벵크의 제12군은 루르에서 포위당한 발터 모델의 B집단군을 구원하는 임무를 맡고 서쪽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4월 22일, 급작스럽게 부세의 제9군과 합류해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소련군을 격파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전일 이미 펠릭스 슈타이너의 분견군에 게오르기 주코프의 부대를 공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지만, 슈타이너의 부대는 제대로 된 전력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사실상 제12군이 유일하게 남은 제대로 된 부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도 상대적인 수준이었다. 4월 23일 오전, 육군 참모총장 크렙스는 명령 전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제12군을 방문한다. 열성적인 히틀러유겐트 단원들로 구성된 3개 사단이 있었지만 그 밖에는 여기저기서 긁어 모아 간신히 재편성한 부대가 전부였다. 어쨌든 벵크는 명령에 따라 공세를 개시하지만 극심한 전력 격차로 베를린 서쪽의 포츠담 외곽 지역에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한다. 같은 시각 홀스테 장군과 부세 장군도 베를린으로 향하는 데에 실패한다.

그럼에도 벵크는 브란덴부르크에서 부대를 정비한 후 진격을 다시 시도한다. 3개 사단을 가지고 베를린에서 2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페르크까지 진격하는 데에 성공한 벵크는 히틀러에게 희망을 안겨 준다.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보란 듯이 고함을 치는 히틀러에게 크렙스는 '페르크는 베를린이 아니지 않냐'며 일갈한다. 4월 27일에 소련군이 베를린을 포위하자, 히틀러는 카이텔을 통해 벵크에게 재차 베를린으로 진입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벵크는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다. 대신 제12군과 제20군단은 퇴각할 것이며, 제9군의 지원도 기대하지 말라고 통보한다.

애초에 벵크는 베를린으로 진격해 히틀러를 구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대신 그는 베를린을 포위한 소련군과 계속해서 교전하며 포위망을 느슨하게 만들어 베를린에 갇힌 민간인들이 도망칠 틈을 만든다. 당시 그가 무전으로 방송한 발언이 인상적이다. "제군들, 마지막 전투를 벌여야 하네. 이젠 베를린이나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야."

이후 벵크는 할베에서 포위당한 3만여 명의 제9군 병사들과 민간인을 흡수해 엘베 강에 주둔한 미군에게 닿을 때까지 후퇴한다. 얼마 남지 않은 전력이 엘베 강에서 전선을 유지하는 동안, 5월 3일 정오부터 막시밀리안 폰 에델스하임 장군이 벵크를 대신해 슈텐달에 주둔한 미군 9군 사령부 참모들과 협상을 시작한다. 항복할 테니 군인들을 미군에 인도하고 민간인들이 미군 점령지로 피난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미군 측에서는 독일 민간인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잘라 거절했다. 하지만 탕거뮌데 인근의 엘베 교와 보트를 이용할 것을 허락해주고, 5월 5일부터 독일인들은 엘베 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교각은 반쯤 파괴되었고 보트도 몇 척 없었기 때문에 민간인들은 교각 잔해에 매달리거나 직접 헤엄을 쳐서, 또는 잔해로 배를 만들어 강을 건너야 했다. 벵크와 그의 참모들은 맨 마지막에 건너갔는데, 강을 건너던 도중 그가 타고 있던 보트가 소련 육군의 기관총 사격을 받아 벵크 본인은 무사했으나 동승한 장교 몇 명이 총상을 입었을 만큼 급박하게 진행된 철수였다.

이후인 미군은 강을 건너 온 독일 포로 1만여 명을 다시 엘베 강 건너로 수송해 소련군에게 넘긴다.

2.8. 전후

항복 후 미군 수용소에 갇혀 있었으나, 전후 처리 과정에서 미군이 해당 지역을 영국군에게 넘기고 철수하며 영국군 포로 신분이 되었다. 다른 참모장교들과 함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파데르보른 인근의 에젤하이데 수용소로 옮겨졌고, 이후 벨기에 오스텐드의 수용소로 호송되었다. 오랫동안 함께 일해왔던 로링호펜 소령도 그와 같은 수용소에서 포로로 생활했다.[11]

1947년 크리스마스에 출소한 벵크는 1948년 9월부터 파이프관 설치 회사인 후베르트 슐테 유한회사의 상무직원으로 근무한다. 이 회사는 Dr. C. Otto & Comp.의 계열사로, 벵크는 1954년에 본사로 이동해 집행위원회에 임명되고 1955년에는 위원회장이 된다.

새로 창설된 서독 연방군은 회사 일에 집중하던 벵크에게 수뇌부 직책을 주기 위해 연락을 취한다. 하지만 정부에서 제안한 연방군 총감찰관의 보직명을 총사령관으로 바꿔 달라고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연방군이 정책상의 마찰로 퇴역한 보닌 대령을 정식으로 다시 쓴다는 조건을 달았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결국 초대 연방군 총감찰관은 아돌프 호이징거에게 돌아간다.

1960년부터는 딜 디펜스의 뉘른베르크 지부 본부장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해외 각국 정부를 상대로 주요 계약을 따 내기도 했으며, 대부분의 구 국방군 장성들과 달리 군부에서 독립한 몇 안 되는 사람이다.

1966년에 은퇴한 그는 서독 니더작센 주의 바트 로텐펠데에 거주한다. 전쟁 때 친분을 쌓은 테오도어 부세, 지크프리트 베스트팔과 함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을 자주 만났다.

파일:만슈와시녀들(1).png 파일:만슈와시녀들(2).jpg
▲ (좌) 만슈타인과 벵크, 부세
▲ (우) 만슈타인과 벵크, 부세, 베스트팔

1982년 5월 1일, 벵크는 오스트리아에 휴가차 방문했다 잘츠부르크 북부 리트 인근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8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운전하던 차량이 젖은 도로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나무에 들이박아 즉사했다고 한다. 묘지는 바트 로텐펠데의 공동묘지에 아내와 함께 자리한다.

3. 평가

여러 유명한 장성들 휘하에서 근무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어지간한 주요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대체로 전면에 나설 일이 드문 참모장교 신분이었기 때문에 선전 매체를 통해 유명세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와 함께 일한 모든 장교가 그를 칭찬하며 좋아했다. 수년간 여러 상관들에게 받은 장교 성과 평가서에는 '유능하며 논리적이고 성실한 데다 전쟁의 흐름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다'라는 평가가 가득하다. 장교의 4가지 유형 분류 기준과 함께 놓고 보면 그야말로 참모장교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인 셈이다.

벵크의 업무상의 능력도 능력이었지만, 그의 성격 또한 수많은 장교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장교 평가서에는 '유쾌하고 긍정적이며 부하들을 잘 다룰 줄 알아 인기가 좋은 장교'라는 표현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젝트, 클라이스트, 만슈타인, 구데리안과 같이 계급이 어마무시하게 높거나 성격이 까다로운 상관들과도 마찰하지 않고 부관이나 참모로 근무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음을 생각하면 그의 붙임성과 친화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하급장교 시절부터 안면이 있었던 구데리안은 그를 아들처럼 아끼다시피 했고, 만슈타인은 전후에도 그와 꾸준히 교류를 이어 나갔다.

또한 벵크는 베를린 공방전 당시 민간인 구출에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당시 벵크가 제12군으로 소련군을 제대로 공격했더라면 나치 독일의 패망이 약간 늦춰졌을지도 모른다.

4. 여담

5. 도서 및 매체에서

6. 보직 내역

7. 진급 내역

8. 서훈 내역


[1] 최연소 병과대장이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마찬가지로 종전 직전에 대장을 달았던 지크프리트 베스트팔이 1902년생으로 벵크보다 어리다.[2] 프로필 란의 사진은 1943년 2월에 촬영되었다.[3] 벵크의 두 형도 모두 군인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1896년생 큰형 헬무트는 1915년 러시아에서, 1898년생 작은형 한스울리히는 1918년 프랑스에서 전사했다.[4] 같은 해 11월 뮌헨에서 일어난 맥주홀 반란에 동원된 그 보병학교다.[5] 이름가르트의 아버지는 베를린 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하던 아르투르 베넬트였다. 상관들에게 신부 측 집안이 적절한지 검토와 승인을 받아야 했던 당대 장교들의 결혼 관습대로 벵크가 적어서 제출한 서류를 보면, 그는 군인 월급에 더해 본가와 처가에서 매달 200제국마르크의 용돈을 받았다. 1928년 당시 1제국마르크는 4.21달러였으니 약 840달러, 2024년 돈으로는 15,000달러가 된다….[6] 구데리안은 1930년 2월부터 1931년 10월까지 해당 부대의 대대장을 지냈었다.[7] 베를린 전쟁대학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폐교했다가 1934년에 재개교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3년짜리 교육과정이었지만, 재개교 후에는 1년 과정으로 운영되었다.[8] 기갑장교 로링호펜(1914~2007)은 꾸준히 야전에서 근무하다가 1944년 7월 20일 이후 구데리안의 제의로 육군 참모총장 보좌관을 맡는다. 1945년 3월에 해임당한 구데리안의 후임으로 들어온 한스 크렙스의 보좌관까지 맡았으며 최후의 순간까지 히틀러의 벙커에서 지냈다. 전후에는 서독 연방군에서 군인 생활을 계속하며 죽기 직전 회고록 '히틀러와 벙커에서'를 출판한다.[9] 구데리안은 훗날 회고록에 당시의 일을 두고 제1기갑사단은 '기갑부대는 '종착역까지 가는 차표로 무장해야 한다'는 자신의 원칙에 충실했다'며 뿌듯해 한다.[10] 두 사람이 의견 차이로 언쟁을 벌인 적은 몇 차례 있지만 구데리안치고는 예의를 갖춰 대하려고 노력한 편이다.[11] 마지막까지 히틀러의 벙커에 크렙스의 부관으로 머무르던 로링호펜은 5월 초에 베를린을 탈출해 제12군에 합류했다.[12] 단일 총사령관 후보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었다. 구데리안이 만슈타인의 군사적 재능을 얼마나 높이 사며 그를 아꼈는지가 보이는 지점.[13] 00:08:47, 00:30:14 지점. 한글 자막본[14] 벵크의 제12군이 진격 중이며 부세의 제9군과 합류해 러시아군에게 마지막 한 방을 날릴 수 있을 거라고 행복회로를 돌린다. 해당 부분 영상[스포일러] 전쟁을 끝내기 위해 베를린에서 내려오던 교전 명령을 무시하고 있었지만, 강화인간들이 교전해 전쟁을 기어코 연장시키는 모습을 보더니 절망하면서 권총을 물고 자살한다.[16] 서류상 진급일자 1943.08.01[17] 서류상 진급일자 1944.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