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66><colcolor=#fff> 한스 슈파이델 Hans Speidel | |
출생 | 1897년 10월 28일 |
뷔르템베르크 왕국 메칭엔 (現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튀링겐 주 메칭엔) | |
사망 | 1984년 11월 28일 (향년 87세) |
서독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바트혼네프 | |
복무 | 독일 제국군 |
1914년 ~ 1919년 | |
국가방위군 | |
1919년 ~ 1935년 | |
독일 국방군 | |
1935년 ~ 1945년 | |
독일 연방군 | |
1955년 ~ 1963년 | |
최종 계급 | 중장 (나치 독일 육군) 대장 (독일 연방 육군) |
주요 참전 | 프랑스 침공 서부전선 |
주요 서훈 |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
[clearfix]
1. 개요
한스 슈파이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육군 중장으로 참모직을 수행했다. 파시즘에 동조했지만 인종정책에는 반대하는 성향의 인물로써 반 히틀러 조직에 가담하여 롬멜을 포섭하는 역할을 맡았다가 암살이 실패하면서 게슈타포에 의해 수감되었다. 종전 이후 사면되었다가 독일 연방군의 창설에 기여했고, 냉전 시기 나토 지상군 중유럽 연합합동군 사령관을 지냈다.칭송받는 지휘관이었던 에르빈 롬멜을 군사법원에서 불었다는 점으로 롬멜의 배신자라는 논란이 있다.
이력적인 면을 보면 독일 제국 예하 뷔르템베르크 왕국군에서 임관하여 독일 연방군에서 전역한, 근현대 독일군을 모두 체험한 인물이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부터 냉전 중후반까지 군인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2. 생애
슈파이델은 1897년 메팅겐에서 태어나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참전했고 중위로 진급했다. 솜 전투 등에서 중대 지휘관이자 부관으로써 참여했고, 전간기에도 계속 군에 남아있으면서 한편으로는 대학을 다녀 경제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1926년에는 박사 학위를 수료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냉전기간 동안 지역사 및 롬멜과 관련된 전사(戰史)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면서 슈파이델은 1940년 프랑스 침공시 참모장으로써 활약했고, 1942년에는 동부전선으로 파견되어 5군단 및 8군단의 참모장을 맡았다.
▲ 서부전선에서 에르빈 롬멜의 참모였던 슈파이델
1944년에는 에르빈 롬멜 원수가 사령관으로 있는 B집단군의 참모장으로 배속되면서 프랑스의 대서양 해안 수비를 수행했다. 당시 슈파이델은 분명 파시즘에 찬동하는 독일인으로써 독일이 세계의 중심에 서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보았으나 점차 인종차별주의적인 양상으로 흘러가는 히틀러의 정책에는 반대했다. 이때문에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중심으로 결성된 반 히틀러 조직에 가담하여 에르빈 롬멜을 회유하고자 했다. 롬멜이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부상을 당해 사령관 자리를 내려놓을 시점에 롬멜의 참모장이 교체되는 일이 생기면서 그 자리를 꿰차게 된다.[1] 에르빈 롬멜이 잠시 휴식을 보내게 되면서 B집단군은 서부전선 총사령관이었던 귄터 폰 클루게가 겸임하게 되었다.
▲ 서부전선 사령부의 해임 전의 사령관이었던 클루게와 참모진. 왼쪽 2번째가 한스 슈파이델.
1944년 8월에는 귄터 폰 클루게 마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2] 해임되면서 새롭게 B집단군 사령관을 겸임하는 서부전선의 총사령관[3]으로 발터 모델이 지명되면서 B집단군을 이끌게 된다. 그해 말에는 국방군 총사령부의 참모장인 알프레트 요들로부터 히틀러가 파리에 대해 V1 · V2로 폭격할 것을 지시했음을 전달했으나 슈파이델은 자신이 이 명령을 상관인 모델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1944년 10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여파로 게슈타포는 군 지휘부의 장군들마저도 조사하기 시작했고 결국 7일에 슈파이델도 체포되었다. 당시 롬멜이 자신의 부관이었던 슈파이델을 구명하고자 히틀러에게 서신을 보냈으나 효과는 없었다. 슈파이델은 군사법원으로 회부되었고 하인츠 구데리안 등의 심문관으로써 조사한 진술서에 따르면 슈파이델은 애매하게 롬멜이 가담하였음을 언급하였었다고 되어 있다. 다만 슈파이델의 증이전에 이미 지휘부 및 사법부에서는 롬멜이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고 어느 정도 묵인하였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당시 국방군 총사령부 수뇌부의 수장이었던 빌헬름 카이텔, 장군참모장 하인츠 구데리안, 서부전선 총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는 한스 슈파이델을 군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결정하였고 게슈타포에 의해서 투옥되었다. 이후 1945년에 연합군이 진격해오는 틈을 타서 슈파이델은 탈옥하여 도피생활을 하다가 종전이 되면서 사면되었다.
▲ 아돌프 호이징거와 함께 독일 연방군의 첫번째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1950년,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나치에 협조하였더라도 목적의식이 없었던 자는 재기용하는 노선을 택했던 터라 독일 연방군의 창설을 연합국에 승인받는 데에 군사 고문관으로 슈파이델을 초빙하게 되었다. 이후 독일 연방군을 창설하고 지휘부로 재기용되어 이후 아돌프 호이징거 육군 대장과 함께 최초의 독일연방군 육군 대장에 오른다.
이후 NATO군 중부유럽연합군 사령관 직을 1957년부터 1963년까지 맡은 후 전역하였다. 여기에는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의 입김이 상당히 작용했다. 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를 이끌었던 드골은 점령군으로써 독일령 프랑스에서 복무한 바 있던 슈파이델이 전후에도 나토와 프랑스군을 이끄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드골은 1959년 집권한 직후부터 슈파이델을 정치적으로 공격하여 그를 결국 나토 사령관직에서 끌어내렸다.
전역 후에는 독일 국제안보문제 연구소(Germa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and Security Affairs) 소장 직을 지냈다. 그리고 호이징어 장군과 마찬가지로 종전 이후 불법적인 준군사조직인 슈네츠 부대에 관여한 것에 대해서 논란에 오른다. 또 동독에서 자신을 롬멜의 배신자로 묘사한 영화에 대한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승소한 일도 있었다.
정작 롬멜의 아내는 '뷔르템부르크의 아들은 결코 반란을 하지 않는다'며 롬멜의 히틀러 암살 음모 연루를 부인했고, 한스 슈파이델을 배신자라 칭하며 평생 만나지 않았다.[4]
이후 1984년에 8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