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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08:21:01

프란츠 뵈메

파일:나치 독일 국장(화이트).svg 독일 국방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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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undesarchiv_Bild_183-J21813,_Franz_Böhme.jpg
이름 Franz Friedrich Böhme
프란츠 프리드리히 뵈메
생몰년도 1885. 04. 15. ~ 1947. 05. 29.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 오스트리아 연방군
{{{-1 연방군 정보국장
연방군 신호국장
연방군 육군참모총장}}}
독일국방군 육군
{{{-1 30보병사단장
32보병사단장
18산악군단장
세르비아 전권사령관
2기갑군 사령관
20산악군 및 노르웨이 주둔군 사령관}}}
최종계급 파일:Si_4b.png 보병대장 → 산악대장
주요참전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서훈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금십자훈장
헝가리 오더 오브 메리트
오스트리아 군사십자훈장

1. 개요2. 생애
2.1. 제1차 세계 대전2.2. 전간기, 안슐루스2.3. 제2차 세계 대전
2.3.1. 폴란드·프랑스 침공2.3.2. 남동부 전선2.3.3. 노르웨이 주둔군
2.4. 종전과 재판
3. 주요 진급 내역4. 주요보직5. 대중매체


파일:vmfkscmqhlgmap_1.jpg
▲ 1941년 9월 1일. 소장시절의 페르디난트 쇠르너와 이탈리아 베라르디 소장과 뵈메. 그리스 전역에서의 승리 후 아테네아크로폴리스에서의 사진.
[clearfix]

1. 개요

오스트리아 출신[1]독일 국방군 장성. 최종계급은 산악대장.

18산악군단(XVIII Mountain Corps) 사령관, 세르비아 전권사령관(Bevollmächtigter Kommandierender General), 22 산악군으로 구성된 노르웨이 주둔군 사령부의 사령관 직을 수행하였다.

발칸 반도 및 노르웨이에서의 파르티잔에 대한 잔혹한 토벌 및 그 포로들에 대한 불법적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에 뉘른베르크 인질 재판에 기소되었으나 재판 정식 재판이 이루어지기 전에 구치소 4층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

2. 생애

2.1. 제1차 세계 대전

프란츠 뵈메는 188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슈타이어마르크 공국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사망하고 2년 뒤 1904년에는 모친을 여의고 그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사관학교에 입교하여 95보병연대에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하였다가 1905년에 소위로 임관한다. 이후 1914년부터 1916년 동안 대위까지 진급하였으며 1차대전기 동안 갈리치아, 볼히니아, 쿠를란트, 뒤나부르크 등지의 전선에서 활약하였으며 1917년부터 1918년 동안은 이손초 전선에 배치되었었다.

2.2. 전간기, 안슐루스

1차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하면서 제국은 해체되고 뵈메는 자연스럽게 오스트리아에서 군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20년대부터는 여단급 제대의 참모장교, 참모장, 부여단장직 등을 수행하였으며 1933년에는 오스트리아 연방 국방부의 정보국장, 신호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5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였으며 1936년에는 동아프리카의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의 감찰관으로 발령되어 폭격기에 탑승하여 북부, 남부전선 등을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감찰관 임무를 마치고 복귀한 뒤 1938년 2월부터는 나치 독일의 압력으로 독일의 오스트리아 연방국에 대한 보호국 명분의 압박이 시작되었으며, 1936년에 참모총장을 맡았던 중장 알프레트 얀자(Alfred Jansa)[2] 장군이 반나치 인사라는 점 때문에 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후임 참모총장으로 뵈메가 1938년 3월 2일부로 지명되었고 안슐루스가 완전히 이루어지고 난 3일 뒤인 3월 16일 독일 국방군과 오스트리아 연방군의 통합을 수락하였다. 이후 연방 국방부 3국장 및 23사단에 배속되었다가 그 해 8월에는 독일 국방군 특별인사참모로 독일 국방군에서의 본격적인 군 생활을 이어나가게 된다.

2.3. 제2차 세계 대전

2.3.1. 폴란드·프랑스 침공

1939년 7월, 뵈메는 30보병사단 사단장직을 한 달여간 수행하다가 1939년 7월 말부터는 32보병사단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이후 폴란드 침공에서 북부집단군(페도어 폰 보크 원수) - 4군(귄터 폰 클루게 포병대장) - 2군단(아돌프 슈트라우스 중장) 아래에 편제된 30사단은 단치히의 남쪽, 비스툴라 강의 중류역으로 진공하여 3군(게오르크 폰 퀴힐러 포병대장)의 21군단 휘하 제대와 협공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때의 전공으로 철십자훈장 1등급, 2등급을 차례로 수여받는다.

1939년 말 프랑스 침공에서도 다시 A집단군(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상급대장) - 4군(클루게 상급대장) - 2군단(아돌프 슈트라우스 보병대장)에 편제되어 베네룩스의 저지대 돌파 임무를 맡았으며 벨기에 국경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종국에는 솜강까지 돌파하는 전공을 거두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코탕탱 반도에서 다시 사단 병력을 재편성하여 영국 해협을 건너야했으나... 영국 본토 항공전의 패배로 상륙이 사실상 좌절되면서 실행되지는 않았다. 뵈메는 프랑스 침공에서의 활약으로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1940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18산악군단(XVIII Gebrig Corp) 군단장으로 승진하여 이탈리아군이 크게 판벌여놓은 남동부전선으로 배치된다.

2.3.2. 남동부 전선

파일:vmfkscmqhlgmap_3.jpg
▲ 1943년. 18산악군단 사령관 시절.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은 실패하였으나 뵈메가 이끄는 18산악군단이 가세한 두번째 공격에서는 당시 그리스 총리였던 요안니스 메탁사스의 이름을 딴 메탁사스 방어선을 돌파하여 올림푸스를 넘는데 성공하였으며, 그리스를 원조하였던 영국군을 테살로니키 협곡에서 철퇴시키는 전공을 거두었다.

1941년 11월 16일, 아돌프 히틀러는 남동부전선 사령관이었던 빌헬름 리스트 원수에게 파르티잔에 대한 진압명령 내린다. 하지만 리스트가 1941년 10월경에 병으로 쓰러지면서 리스트는 주둔지 저항 진압작전 수행에 대한 후임으로 뵈메를 지목한다.[3] 뵈메는 발칸 반도의 전권사령관으로 위임받게 되었으며 사실상 히틀러의 파르티잔 진압명령을 뵈메가 진행하게 된다. 1941년 9월 25일부터 10월 10일 사이에 기습적으로 세르비아의 인구 전체를 뒤져서라도 파르티잔을 찾아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대인, 민족주의 운동, 공산주의자, 파르티잔과 관련된 세르비아의 모든 남성을 대상으로 한다. 그들은 이러한 기습적인 색출작전으로써 모두 체포되어야 한다. 만약 독일군이나 독일군 장교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다면 아래의 규정에 의거하여 포로들을 처형하도록 한다.
1. 살해되거나 샐해된 병사 1인당 각 100명의 죄수 또는 포로
1. 부상당한 독일군 병사 1인당 각 50명의 죄수 또는 포로
딱보면 알겠지만 명백한 전쟁범죄 명령이었고 이 전쟁범죄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다만 이는 리스트나 뵈메에게만 해당한 것은 아니고 발칸 반도 일대의 대부분의 주둔군에 이러한 명령이 내려졌던 것으로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출신의 독일군 상급대장 로타르 렌둘릭유고슬라비아 왕국에서 이러한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였었던 바 있다. 후술하겠지만 이와 관련된 인물들은 모두 인질 재판에 기소되어 유죄를 선고받는다.[4]

이후 18산악군단장은 카를 에글제어로 교체되었고, 1944년에 로타르 렌둘릭 상급대장의 후임으로 2기갑군(2nd Panzer Army) 사령관에 보임되었다. 2기갑군은 1943년부터 요시프 브로즈 티토로 대표되는 무수한 파르티잔 활동의 무대였던 발칸 반도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파르티잔을 진압하는 임무를 주 임무로 삼았다. 때문에 보병대장 에리히하인리히 클뢰스너 사령관[5] 이래로 뵈메가 사령관이던 시절까지는 주된 병력 구성도 점차 보병사단 위주로 꾸려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뵈메는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항공기 사고로 직무수행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을 입게 되어 부사령관이었던 막시밀리안 데 앙헬리스 포병대장에게 군을 위임하고 한동안 고위장교 예비군으로 예속되게 된다. 부임한지 23일만의 일이었다.
[clearfix]

2.3.3. 노르웨이 주둔군

1945년 초에 복귀한 뵈메는 또 다시 렌둘릭의 후임으로 노르웨이 주둔군 사령관 겸 20산악군 사령관으로 노르웨이에서 직무를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나치 독일은 항복하게 되고 뵈메는 노르웨이에 상륙한 영국군에 노르웨이에서 포로가 되어 대전기 동안의 포로 학살의 죄목으로 법정에 서게된다.

2.4. 종전과 재판

파일:vmfkscmqhlgmap_2.jpg
▲ 1945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의 머그샷
노르웨이에서 영국군에 포로가 된 뵈메는 연합군 점령하 독일 뉘른베르크로 옮겨져 계속 재판의 하나인 인질재판에 기소된다. 구금되어 있는 동안 미군 재판부에 보낸 편지가 남아있는데, 뵈메는 편지에서 자신이 독일인이 아닌 독일에 강제로 병합되었던 오스트리아인임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다른 인물들의 재판결과를 고려하면 4가지 기소 기준에 모두 해당하는 사실상의 전범 이었으나 재판 전 구치소 4층의 창문에서 투신하여 자살하였고 때문에 판결이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동부전선[6], 동남부 전선에서 히틀러의 동일한 파르티잔 진압명령을 수행하였던 다른 인물들은 15~2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대부분 1950년대에 병이나 보석 등으로 석방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clearfix]

3. 주요 진급 내역

4. 주요보직

35. 01. 01. ~ 36. 01. 14. : 오스트리아 연방군 국방부 정보국장, 신호국장
36. 01. 14. ~ 38. 03. 02. : 이탈리아-에디오피아 전쟁 감찰관
38. 03. 02. ~ 38. 03. 16. : 육군참모총장
39. 07. 01. ~ 39. 07. 19. : 독일국방군 30보병사단 사단장
39. 07. 19. ~ 40. 06. 15. : 32보병사단 사단장[7]
40. 06. 15. ~ 44. 06. 24. : 18산악군단 군단장(1941. 09. ~ 1941. 12. 세르비아 전권사령관)
44. 06. 24. ~ 44. 07. 17. : 2기갑군 사령관
44. 07. 17. ~ 45. 01. 08. : 항공기 사고로 인한 중상, 예비군 예속
45. 01. 08. ~ 45. 05. 07. : 20산악군 사령관 겸 노르웨이 주둔군 사령관

5. 대중매체

하츠 오브 아이언 4의 유명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장군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율리우스 링겔, 로타르 렌둘릭과 함께 제국의 다민족 체제에 반대하고 있어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1]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인해서 오스트리아 연방군에서 복무하다가 독일 국방군 소속으로 군생활을 이어갔다. 이와 같은 케이스로는 로타르 렌둘릭 장군이 유사하며, 산악병과에 산악부대 지휘한 경력 및 주둔지 내 파르티잔 진압 활동 그리고 그로 인한 뉘른베르크 인질 재판에의 기소과정이 거의 동일하다.[2] 풀네임은 '알프레트 요한 테오필 얀자 폰 타네나우(Alfred Johann Theophil Jansa von Tannenau)'. 오헝제국 해체 후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법적으로 귀족 접두어를 이름에 쓰지 못하게 되자 이름을 줄인 것이다.[3] 그 외에 리스트의 사령관 직책은 발터 쿤체 공병대장이 대리 사령관으로 대행하게 된다.[4] 뵈메를 제외하면 모두 징역형을 살았다.[5] 발터 모델 당시 상급대장도 8일 간 사령관을 맡았던 바 있었다.[6] 동부전선에서는 전쟁범죄로는 정치장교 명령(Commissar Order)이라는 소련군 정치장교의 무조건적 사형 명령으로써 인질재판에서 이 명령을 수행한 것에 대한 기소기준이 있었다.[7] 39년 8월 1일부터 39년 12월 1일까지는 잠시 사단장 직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복귀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