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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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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에티오피아 국장.svg 에티오피아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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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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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1942 ~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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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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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전간기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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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935년 10월 3일 ~ 1936년 5월 5일
장소 에티오피아 전역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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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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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이탈리아의 승리,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수립
에티오피아 망명 정부 설립
영향이탈리아의 외교적 고립 및 국제연맹 탈퇴
스트레사 전선 붕괴
전력 총 500,000명
전차 795대
항공기 595기
800,000명
피해규모 전사 20,000여 명
부상/질병 180,000여 명
전사 275,000여 명
부상 500,000여 명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

[clearfix]

1. 개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의 전개

이탈리아에티오피아 간의 두 번째 전쟁이다. 에티오피아는 이 전쟁에서 패전하여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 편입되었다.[6]

2. 배경

전체적인 배경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활력을 찾지 못한 이탈리아의 경제와 산업, 그리고 이를 만회하고자 하는 베니토 무솔리니파시스트 정권의 대외 확장정책에 있다. 동시에 이탈리아는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패배에 따른 굴욕을 만회하고자 하는 심정이 강했고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와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를 육로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의지도 강했다.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는 1928년에 이미 양국간 평화중립조약을 체결한 상태였지만 1934년 11월~12월에 발생한 아비시니아 위기의 주요 원인은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 식민지 간 경계의 불분명함과 이탈리아의 영토 확장 야욕에 있었다. 이탈리아령 식민지 정부는 경계가 불분명한 지역을 자국 영토로 해석하고 군을 보내 진지를 구축했는데 당연히 이를 용납하지 않은 에티오피아군이 응전하여 상호간의 대규모 교전이 발생하여 양측 합쳐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양국은 서로 상대방을 맹비난하고 국경에 군사력을 증원하였으나 이 위기가 바로 전쟁으로 번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학자들은 이 때를 기점으로 이탈리아가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고 본다.

한편 당시 무솔리니는 영국, 프랑스와 함께 3국이 공동으로 나치 독일의 재군비와 팽창정책에 맞서며 대응한다는 스트레사 체제를 구축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속셈은 독일을 막자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영국, 프랑스와 동맹 맺고 독일을 견제한다고 하면 우리가 에티오피아를 공격해도 영국, 프랑스가 못 본척 해 주겠지?"라는 것이었다. 국제연맹은 1935년 초부터 양국간 중재에 나섰고 영국과 프랑스도 당시에는 우호국이었던 이탈리아의 편을 들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위기가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할 만반의 전쟁 준비를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 1935년 1월에는 프랑스와 조약을 맺어 에티오피아를 고립시키고 이탈리아군은 스트레사 조약이 맺어지는 1935년 4월 이전에 병력 68만과 기관총 3,300정, 야포 275문, 전차 200대(탱켓 위주)과 항공기 205기를 에리트레아소말릴란드에 배치했다. 스트레사 조약이 맺어진 1935년 4월에는 추가로 8개 사단과 장비가 증원되어 기관총 6,000정, 야포 2,000문, 전차 600대, 항공기 400기가 배치되었다. 이 전력은 이탈리아가 투입 가능한 거의 대부분의 전력이었다.

이게 영국-독일 해군조약이 맺어지기 두 달 전의 일이다. 한마디로 무솔리니는 독일을 견제하는 척하며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외교전을 벌여 에티오피아를 고립시켜 놓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서 에티오피아를 침공할 준비를 이미 끝내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영국에게 뒤통수를 맞고 스트레사 전선이 붕괴되자 이탈리아는 영프의 노력을 무시하며 에티오피아 침공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여담으로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이나 각종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글에서는 고작 에티오피아를 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탈리아라며 비웃지만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우선 공격자가 방어자에 비해 더 강한 전력을 갖춰야 한다는 건 전쟁에선 기본 상식이다. 일단 저만한 전력을 가진 상대에게 싸움을 거는 것부터가 문제 있는 행동인건 넘어가자. 당시 에티오피아는 최대 80만명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더해 기본적으로 고원지대였다. 1차 전쟁 때 이를 무시하고 2만 5천여명으로 침공에 나섰다가 아드와 전투에서 참패한 적도 있다. 그렇기에 저 정도 전력 투입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3. 전개

에티오피아로서는 4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여러 면에서 상황이 불리했다.

제일 먼저 40년 전과 달리 이탈리아가 방심하지 않고 제대로 된 전력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는 것은 아드와 전투의 승리와 같은 한타 싸움을 통한 일발 역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국지적인 승리를 여러 차례 거두더라도 이탈리아군이 계속해서 쏟아져나오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또 40년 전에는 전군을 에리트레아 지역에 투입할 수 있었지만 새 전쟁에서는 이탈리아가 그동안 확보한 식민지인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와 접하게 되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북부와 남동부에서 동시에 방어전을 펼쳐야 했다.

군대의 기술력 격차도 40년 전에 비하면 더욱 현격하게 벌어졌다. 이탈리아군은 비록 탱켓이 주력이지만 전차를 600대나 보유했고 항공기도 400기를 보유한 반면에, 에티오피아군은 전차 4대[7], 장갑차 7대, 항공기 13기에 불과했다. 야포도 이탈리아군은 2,000문이나 준비한 반면 에티오피아군의 야포는 234문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구식이었다. 기관총은 총 1,050정으로 그 중 800정은 경기관총, 250정은 중기관총이었다. 소총은 약 40만 정에 달했지만 종류와 상태가 다양했고 당연히 이탈리아군이 보유한 것에 비해 구식이었다. 외국 무기를 수입하려는 노력마저 영국과 프랑스가 금수조치를 내려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즉 전차의 전력비는 최소 1:150, 항공기의 전력비는 1:30, 야포의 전력비는 최소 1:9, 기관총의 전력비는 1:6으로 도저히 이기기 힘든 수준이었다.

게다가 에티오피아는 외국 군사고문단이 조언한 게릴라전과 달리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무리하게 전면전을 벌여 부족한 전력을 깎아먹었다. 이 문제는 에티오피아의 복잡한 부족 문제 때문에 더욱 치명적이었다. 본래 에티오피아 고원 서부 일대에 세력이 한정된 에티오피아는 19세기 말 주변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다수의 부족들을 제국의 국경 내로 편입했다. 그러나 이들이 에티오피아 국가에 완전히 통합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은 부족들이 줄줄이 이탈하거나 심지어 제국에 반란을 일으켜 또다른 문제를 초래한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에티오피아군은 이탈리아군의 대규모 공세에 맞서 성공적으로 지연전을 펼쳤고 오히려 1935년 12월에는 북부 전선에서 크리스마스 공세라 불리는 대규모 반격을 감행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에 에리트레아 방면에서 진격하던 이탈리아군은 크게 후퇴해야만 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군도 깊숙하게 진격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고 남동부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이 깊숙히 진격해 오는 데다 이탈리아군이 독가스[8]를 대대적으로 사용하는 등의 문제로 반격에 의한 전과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군의 1936년 1월 공세로 에티오피아 남동부 전선은 크게 위축되었고 2월에는 북부 전선에서도 이탈리아군이 독가스를 대대적으로 이용한 반격에 나서며 전선을 돌파했다.

1936년 3월 말이 되면 북부 전선 에티오피아군 주력 부대는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수도 아디스아바바로 가는 통로가 활짝 열리게 되었다. 에티오피아군은 소부대 단위로 지연전과 게릴라전에 나설 수 밖에 없었고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는 망명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정작 저 두 나라는 이탈리아의 독일 측 진영 참가를 방지하기 위해 에티오피아에 특별히 도움을 주지 않았다. 다만 영프 양국은 에티오피아 점령 뒤에도 이탈리아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에티오피아 황제 겸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점령 인정도 철회했다.

결국 1936년 5월 5일, 이탈리아군이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고 에티오피아 합병을 선언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같은 해 연말까지 잔여 부대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강점 기간 내내 게릴라들이 일부 지역을 장악한 채 이탈리아군과 게릴라전을 벌였다.

4. 결과

종전 후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를 합쳐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식민지를 건설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에티오피아 황제를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에티오피아 각 지방에선 부족 단위로 또는 에티오피아군 잔당 출신 게릴라들이 이탈리아 통치에 반발하여 이탈리아는 강점 기간 내내 이들을 진압하느라 상당한 군사력을 소모해야 했고 끝내 완전히 진압하지 못했다. 이렇게 남은 에티오피아 저항세력은 파시스트 점령군에 맞서 외로운 게릴라전을 벌이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영국령 수단을 통해 영국군 주도 연합군 지원을 대거 받아서 오르드 윙게이트 장군 지휘 아래 성경의 기데온에서 이름을 딴 기데온 군단이란 이름으로 참전해 1941년 5월 5일 아디스아바바를 해방시키고 같은 해 말 에티오피아 전역을 해방시켰다.

이 전쟁의 의의는 이탈리아가 대독 공동전선에서 이탈해 독일과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다는 데 있다. 사실 베니토 무솔리니도 처음에는 독일과 협력하기보다 그냥 영국이 뒤통수 때린 김에 식민지나 넓히자는 생각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도 같은 이유로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방관했지만 이후 라인란트 재무장에서 무솔리니가 아직 에티오피아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에 적극적으로 영프에 협력하지 못하고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을 묵인하게 되었다. 이 일 이후 스트레사 체제는 사실상 붕괴하고 영프와 이탈리아는 서로 등을 돌리게 되었다. 1937년 이탈리아는 결국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1939년 알바니아 점령,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그리스 침공으로 침략을 확대했다.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일단은 반세기 전 아드와 전투의 굴욕을 갚았다는 선전거리가 되었지만 실제 전쟁 과정에서는 태반이 제대로 근대화도 안 된 에티오피아군을 상대로 종종 졸전을 벌이며 미숙함과 부족한 역량을 노출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좀 자숙해서 역량을 먼저 키워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는지 전쟁이 끝나자마자 옆동네에서 터진 스페인 내전나치 독일보다도 훨씬 더 큰 규모의 대규모 개입을 하면서 1년 예산의 20% 정도를 까먹었다. 이는 메인 라운드라고 할 만한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 이탈리아군이 졸전을 벌이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국가 산업과 국력을 전쟁에 쏟아붓는 총력전으로서의 2차대전은 적어도 이탈리아에게는 1939년이 아닌 1935년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패전 후 영국으로 망명 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유명무실했던 국제연맹 회의에 출석하여 이탈리아가 참칭 중인 에티오피아 황제직이 가짜 자리로 인정되어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제 폐하'로 정중하게 소개되었고 이탈리아의 제국주의적이고 잔인한 침략전쟁을 강하게 규탄했는데 이는 회의에 참석했던 각국 대표들에게 비장하지만 동시에 결연한 의지가 보이고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자국의 정의를 호소한 명연설로 칭송받았다.[9]
"....특수 분무기가 비행기에 달리면서 그들은 광대한 땅에 죽음의 비를 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서 1936년 1월 말부터 병사들, 여성, 어린이, 소, 강, 호수와 목초지는 이 죽음의 비에 의해 줄곧 오염되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조직적으로 살해하기 위하여, 식수와 목초지에 보다 확실하게 독이 스며들도록 이탈리아 지휘부는 그들의 비행기들을 계속해서 보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주된 전쟁 방식이었습니다. (중략) 이 가공할 전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사람들과 동물들은 굴복했습니다. 비행기에서 뿌려진 죽음의 비는 그것에 접촉한 모든 것들을 고통으로 비명지르게 했습니다. 수만명이 이탈리아인들의 머스타드 가스에 의해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제가 제네바에 오기로 결심한 이유는 에티오피아인들이 강요당한 괴로움을 문명 세계에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하실레 셀라시에 황제의 국제연맹 연설 중 이탈리아군의 독가스 공격을 묘사하면서.번역 출처

하지만 당시 국제 여론이 좋아 봐야 애초에 난리치고 깽판치는 나치 독일, 일본 제국 같은 국가들이 국제 여론을 신경 쓰고 사는 국가들이 아니니 실질적 효과는 없었다. 그래도 미국, 소련 두 강대국이 에티오피아 점령의 합법성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 의의가 있었다. 하일레 셀라시에가 입장하자 갈레아초 치아노 백작의 지시를 받은 이탈리아 측 대표들과 언론인들은 야유와 함성을 내지르며 셀라시에의 연설을 방해하려 했다.

아무리 인종차별사회진화론이 판치던 시대라지만 한 나라의 군주를 상대로 공식석상에서 열등인종 깜둥이 드립을 치며 훼방을 놓으려 한 것이다. 인종차별이 지독하던 시절에도 인종보다는 계급이 우선이었고 그 때문에 베트남 황제가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프랑스인들이 예를 표했다. 심지어 줄루 전쟁에서 패전하고 망명한 줄루 왕국의 국왕 세테와요는 그래도 일국의 군주 대접을 받아 런던까지 가서 빅토리아 여왕을 대면하기도 했고 다시 남아프리카로 돌아가 흩어진 부족을 통합해 왕국을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영국의 젠트리들에게 지지를 받기까지도 했다. 흑인인 데다 자신들이 전쟁으로 멸망시킨 나라의 군주인데도 말이다.[10]

게다가 에티오피아는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서도 아드와 전투 같은 전례뿐만 아니라 고대부터 기독교 국가였다는 점을 매개로 중세부터 그 존재가 알려져 있었던 당당한 민족의 가족들(family of nations) 중 하나였다.[11] 그 제국주의 시대에도 '이런 제국을 세운 사람들이 미개한 흑인일 리 없다'며 구성 민족이 사실 그리스, 로마의 후예라고 하면서까지 띄워줬던 게 에티오피아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이탈리아 기자들의 폭동을 말없이 경멸어린 시선으로 쏘아보면서 품위를 잃지 않았고 이 때문에 당시 동석했던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으로부터 당시 제네바에 있던 인물들 중 유일하게 침착했던 인물이라고 칭송을 받았다. 이 꼴을 보다 못한 다른 나라 대표들은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고 결국 외교적으로는 우방국에 가까웠던 루마니아 왕국[12] 대표로 자리에 참석했던 니콜라에 티툴레스쿠(Nicolae Titulescu)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탈리아 측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프랑스어"누가 저 야만인들에게 출구 좀 보여줘라!(A la porte les sauvages!)"[13]라고 일갈하자 인종차별하다 막상 자신들이 야만인 취급받은 이탈리아 측 인사들은 퇴장당했고 스위스 경찰은 이들을 체포해서 국가원수 모독죄로 감방에 처넣었다. 다음날 훈방되어 이탈리아로 추방된 이들은 이탈리아에서 국민영웅으로 대접받았다.(...)

에티오피아는 점령당한 후 인종차별적 법안과 강제 노역으로 가득 찬 이탈리아 점령당국의 학정에 시달리며 레지스탕스를 조직하여 싸우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초반인 1941년 영국군 주도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비록 점령 기간이 짦았지만 이탈리아 점령당국은 에티오피아의 주류 민족인 암하라인들을 비롯한 같은 기독교인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를 믿는[14] 암하라인들은 탄압하고 중간행정직 같은 위치에 그동안 암하라인들과 반목했던 무슬림 소말리인, 오로모인들을 채워넣어 훗날 에티오피아 제국의 내부갈등이라는 큰 씨앗을 심어 놓았다.

이탈리아군은 에티오피아인들을 가혹하게 디루었다. 소위 신사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이탈리아군이지만 에티오피아전에서의 이탈리아군은 파시스트 침략군의 스테레오타입 그대로였다. 실제로 이탈리아 역사학계 내에서는 한바탕 시끄러운 수정주의 논쟁을 거치며 도달한 결론이지만 현대 크로아티아달마티아 해안처럼 (파시즘 성향을 띈 민족주의자들에게) 이탈리아의 성스러운 고토로 취급받았던 지방들에선 이탈리아군이 나치와 별 다름 없이 패악질을 저지르며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트리에스테를 주도로 오스트리아령 연안주(Österreichisches Küstenland/Litorale Austriaco)라 불렸던 지방은 슬라브인들을 겨냥하여 지역 인구 20%를 살해한 전적이 있으며 비슷한 분쟁지역이었던 쥐트티롤 같은 지방은 독일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대놓고 학살만 안 했지 심한 문화, 언어적 탄압을 가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말마따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독일만큼의 국력이 없어서 패악질을 나치 스케일로 저지르지는 못했던 것뿐이다. 로돌포 그라치아니 사령관은 누군가 자기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3만명을 학살했으며, 낌새가 수상하다며 정교회 사제들이 가득 차 있었던 데브레 리바노스 수도원을 수백명의 순례객들과 함께 불태워버렸다.[15] 이 '아비시니아의 도살자' 로돌포 그라치아니 사령관은 전후 처리를 하는 동안 승전국 에티오피아[16]의 기소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 죄값도 치르지 않고 제명에 죽었다. 당장 1943년 무솔리니 실각 후로도 충성스러운 그의 부하 노릇을 하였으며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소속으로 자국인 이탈리아 빨치산들도 엄청나게 죽인 전적 덕분에 본인도 전쟁 끝나고 무사하게 넘어 갈 거라는 생각을 안 했다. 하지만 빨치산의 대다수를 장악했던 이탈리아 좌파에 맞서 우익 세력을 키워 줄 필요가 있었던 영국과 미국 당국의 개입으로 징역 19년을 선고받고 몇 달 뒤에 바로 풀려났다. 독일과 일본에서 그러하듯 냉전으로 덕을 본 케이스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5년간 짧게나마 황제 노릇을 해 봤지만 자국 식민지가 전부 증발하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으며 10년 뒤엔 이탈리아 국민들의 선택으로 자신의 가문이 이탈리아 왕좌에서 쫓겨나며 본인도 외국으로 망명하는 치욕을 경험했다. 물론 그 황위란 것을 막 겸임하던 때조차도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 소련 양국은 점령 인정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잠시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점령을 승인했던 영국, 프랑스도 그의 황제위 겸임은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1] 요한네스 4세의 장손으로, 에티오피아 황족이다. 이탈리아가 침공하자 고향인 티그라이의 지배권을 노리고 이탈리아에 붙어먹었다.[2] 짐마 왕국의 왕으로, 1932년 이탈리아에 협조하려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있었고, 이탈리아군에 의해 해방되어 그들에게 협력했다.[3] 고잠의 왕.[4] 요한네스 4세의 후계자 라스 멩게샤 요한네스의 아들. 에티오피아 황족이다.[5] 아드와 전투에도 참전한 노병으로, 이탈리아가 또 다시 침공하자 다시 참전하여 이탈리아군과 교전하다 1936년 전사하였다.[6] 그러나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자 영국의 지원을 받은 저항군이 1941년 에티오피아 전역을 해방하엿다.[7] 그나마도 전량이 1차대전 직후 생산된 피아트 3000 전차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피아트 3000은 이탈리아제 전차이다.[8] 이탈리아는 생화학무기 사용을 규제한 제네바 의정서에 10년 전 서명했다.[9] 이때 한 명언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이 내일 당신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였다.[10] 멀리 갈 것 없이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양녕대군의 16대손인 이승만이 미국 생활을 했던 시절에 자신을 프린스 리로 자칭하자 현지의 백인들이 그래도 과거 왕족이었다고 다른 동양계 미국인들과 다르게 본 것은 물론이고 그냥 동양계라면 안 만나 줄 것을 왕족 출신이니까 만나줬던 사례가 있었을 정도로 나름 잘 먹혔다. 독립 이후 왕정이나 신분 제도 자체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미국인들조차 이랬는데 당시 왕정이 유지되던 국가가 즐비한 데다 공화정으로 전환한 국가들조차 왕정이 폐지된 지 수십 년밖에 안 되었던 유럽 국가들의 국민들이 왕, 그것도 외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왕위를 잃어버린 국왕 본인에 대해서 예우를 안 해 줄 리가 없다.[11] 단순히 알려지다 못해 포르투갈과 동맹을 맺어 포르투갈군과 대이슬람 전선을 형성한 국가다.[12] 베니토 무솔리니는 루마니아를 같은 로마 제국의 후예라면서 엄청 띄워줬다.[13] 티툴레스쿠는 프랑스 파리 대학에 유학한 엘리트 출신으로 외무장관 등의 요직을 거친 루마니아의 외교관이며 국회의원이었다. 그는 루마니아 상임대표로 두 번 선출되었던 인물로서 파시즘의 행보를 걷던 루마니아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이 강골의 지식인은 이후 독일의 개 노릇을 자처하고 나선 루마니아 파시스트 정권을 정말 가루가 되도록 씹었으며 결국 1940년 3월 17일 망명지인 프랑스 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이때 지병으로 죽은 것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는 게, 몇 달 후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이다.[14] 사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에 비해 유달리 종파간 갈등이 심한 종교이기도 하다. 일부 근본주의 가톨릭, 개신교 신자들은 서로를 진짜 기독교도로도 안 보는 경우가 흔하며 16세기 종교개혁 때도 교황령이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개신교도 수십만명을 종교재판으로 처형하기도 했고 요즘은 개신교도들끼리도 교파에 따라 기독교인 취급도 안 하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비칼케돈파 종파였던 테와히도 정교회를 가톨릭을 믿는 이탈리아인들이 탄압하고 차별하는 것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마치 수니파 무슬림들이 시아파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들처럼 우상숭배 문제에 매우 민감한 개신교 신자들과 친하게 지내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15] 그나마 그라치아니가 리비아로 떠난 이후 부임한 아메데오 공작은 좀 더 유화적이었다.[16] 해방을 맞이한 1941년에 영국은 미국의 압력을 받아 에티오피아 독립을 다시 승인하고 조약을 맺어 연합군의 일원으로 편입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