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수단 내전 First Sudanese Civil War | |
수단 내전 및 중동전쟁의 일부 | |
기간 | |
1955년 8월 18일 ~ 1972년 3월 27일 | |
장소 | |
수단 및 남수단 전 지역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수단 공화국 (~1969년)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수단 민주공화국 (1969년 ~ 1972년) 전투지원국: [[우간다| ]][[틀:국기| ]][[틀:국기| ]] (1965년~1969년)[1]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틀:국기| ]][[틀:국기| ]] (1970년) 비전투지원국: [[틀:깃발| ]][[틀:깃발| ]][[아랍 연합 공화국| ]] [[틀:깃발| ]][[틀:깃발| ]][[소련|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중국| ]][[틀:국기| ]][[틀:국기|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동독|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체코슬로바키아| ]] [[사우디아라비아|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리비아 아랍 공화국| ]] [[알제리| ]][[틀:국기| ]][[틀:국기|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서독| ]] | ]][[틀:깃발| ]][[앵글로-이집트 수단| ]] (~1956년)[[틀:깃발|수단 방위군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아자니아 해방전선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아냐냐 [[이스라엘| ]][[틀:국기| ]][[틀:국기| ]] 지원국: [[에티오피아 제국| ]][[틀:국기| ]][[틀:국기| ]] [[우간다| ]][[틀:국기| ]][[틀:국기| ]] (1970년~) [[틀:깃발| ]][[틀:깃발| ]][[레오폴드빌 콩고| ]] [[케냐| ]][[틀:국기| ]][[틀:국기|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틀:깃발| ]][[틀:깃발| ]]
지휘관 | |
[[틀:깃발|녹스 헬름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이스마일 알아자리 [[틀:깃발| ]][[틀:깃발| ]][[가파르 니메이리| ]] | ]][[틀:깃발| ]][[틀:깃발| ]] [[틀:깃발|조셉 라구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고든 무오르타트 마옌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데이비드 벤우지엘 | ]][[틀:깃발| ]][[틀:깃발| ]]
병력 | |
수단군: 약 6,000~7,000명(1955년) 약 36,000명(1971년 후반) | 아냐냐: 약 6,000명~12,000명 약 18,000(1960년 후반) |
피해 | |
500,000~1,000,000명 사망 | |
결과 | |
아디스아바바 협정 체결 남수단 자치주 설립 |
[clearfix]
1. 개요
1955년에서 1972년 사이 수단 공화국 및 남수단 지역에서 발생한 내전2. 배경
북수단과 남수단은 19세기 이전까지는 단일한 국가를 구성한 적이 없었다. 남수단 일대의 문화와 식생은 오히려 케냐와 유사했으며 북수단은 문화적으로 이집트와 공통 분모가 많았다. 그러나 북수단과 남수단은 중세부터 경제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는데, 수단 아랍인들의 주 수입원 중 하나가 남수단의 흑인들을 약탈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2]19세기 초 알바니아 출신으로 이집트의 태수가 된 메흐메트 알리는 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하는데 이 과정에서 아랍인들과 경제가 긴밀히 엮어 있었던 남수단 일대까지 정복하기 이른다.[3] 이집트가 영국의 보호국이 되면서 해당 지역은 영국과 이집트의 이중 식민지인 앵글로-이집트 수단이라는 식민지 행정 구역이 되었다.
앵글로-이집트 수단은 이집트의 입김을 받아 아랍어가 주로 사용되었고 아랍인들이 우대받던 체제였다. 한 편 토속신앙을 믿던 남수단 주민들은 영국인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북수단과 남수단은 이슬람 대 기독교 구도로 양분되었다. 앵글로-이집트 수단이 수단 공화국으로 독립하면서 남수단의 누에르족과 딩카족 등은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실세를 잡은 북수단의 수단 아랍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남수단 흑인들을 탄압하는데, 이는 수십여 년에 걸친 제1차 수단 내전으로 이어졌다.
3. 영향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제국 황제가 주도한 아디스아바바 협정으로 인해 수단은 남수단 자치주 설립을 하게 된다. 이후, 헌법 개정으로 이어졌고 남수단 지역에서는 이와 별개로 자치적인 정부기관을 설립하게 된다. 그러나 수단 정부는 남수단은 자체적인 군대 설립을 금지했고 수단 정부의 자치주로만 남아있을 수 있도록 했다.이러한 상황에서 1970년대 중반 이후 남수단 내에서는 사회적 불안감이 조성되었고 결국 1983년 제2차 수단 내전으로 이어진다. 22년간의 전쟁 후 남수단이 결과적으로 독립하게 된다.
[1] 우간다 영토 내 작전 수행[2] 수단에서의 상아 채집은 직접 아랍인들이 코끼리를 사냥할 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아랍인 코끼리 사냥꾼들이 남수단 일대의 쉴룩족, 누에르족, 딩카족 마을에 쳐들어가서 사람들을 고문해서 상아를 받아내는 일이 더 많았다. 전근대 수단은 도로 시스템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고 결국 노예 사냥꾼들은 노예가 된 마을 주민들을 직접 도보로 상아를 들고 나르게 시켜 상아와 노예를 함께 수출하곤 했다.[3] 북쪽으로는 오스만 제국 군대를 격파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일대까지 정복하였으나, 서구 열강이 오스만 제국이 갑자기 무너지면 뒷감당이 힘들다고 이집트에게 정복한 영토를 반환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수단은 유럽 열강이 개입하기 다소 애매한 위치였고, 이집트의 영토로 한동안 그대로 남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