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왕국 콘두커토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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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이온 안토네스쿠 | 미르체아 엘리아데 |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 | 콘스탄틴 브랑쿠시 | 나디아 코마네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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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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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이온 루카 카라지알레 | 니콜라에 이오르가 |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 | 제오르제 에네스쿠 | 그레고리안 비볼라루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미렐 러도이 |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 | 니콜라에 티툴레스쿠 | 페르디난드 1세 | 미하이 1세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데케발루스 | 트라이안 버세스쿠 | 게오르그 뮤레산 | 이온 I. C. 브라티아누 | 러즈반 루체스쿠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니콜라에 파울레스쿠 | 이울리우 마니우 | 이울리우 호수 | 에밀 시오랑 | 아브람 이안쿠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부레비스타 | 에든버러의 마리 공녀 | 페트레 투테아 | 코르넬리우 코포수 | 아우렐 블라이쿠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이오시프 트리파 | 니키타 스터네스쿠 | 이온 크레안거 | 마델리나 마놀 | 코르넬리우 바딤 투도르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트라이안 부이아 | 루치안 블라가 | 조지 에밀 퍼레이드 | 아나 아슬란 | 아드리안 무투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플로린 피에르시크 | 미하일 코갈리차누 | 야노스 코뢰시 | 디미트리에 칸테미르 | 일리에 너스타세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게오르그 잠피르 | 기카 페트레스쿠 | 엘리사베타 리제아 | 불라 | 암자 펠라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마차시 1세 | 미르체아 1세 | 티투 마이오레스쿠 | 토마 카라지우 | 미하이 트라이스타리우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안드레아 마린 | 에밀 라코비차 | 빅터 바베슈 | 니콜라에 발체스쿠 | 호리아로만 파타피에비치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이온 일리에스쿠 | 마린 프레다 | 외젠 이오네스코 | 두미트루 스타닐로아 | 알렉산드루 토데아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투도르 게오르게 | 이온 티리아크 | 일리에 클레오파 | 아르세니 보카 | 바넬 니콜리타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두미트루 코르닐레스쿠 | 그리고레 모이실 | 클라우디우 니쿨레스 | 플로렌틴 페트레 | 마리우스 모가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니콜라에 스타인하트 | 로라 스토이카 | 커털린 흘단 | 안겔 살리그니 | 이반 피차이진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마리아 터나세 | 세르지우 니콜라에스쿠 | 옥타비안 팔러 | 무명용사 | 치프리안 포룸베스쿠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니쿠 코바시 | 두미트루 프루나리우 | 후녀디 야노시 | 콘스탄틴 노이카 | 바데아 카르탕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002b7f><colcolor=gold> 제43대 루마니아 왕국 총리 초대 루마니아 왕국 콘두커토르 이온 빅토르 안토네스쿠 Ion Victor Antonescu | ||
출생 | 1882년 6월 15일 | |
루마니아 왕국 피테슈티 | ||
사망 | 1946년 6월 1일 (향년 63세) | |
루마니아 왕국 질라바 | ||
국적 | [[루마니아|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군인 | |
최종 계급 | 원수 | |
경력 | 루마니아 총리 | |
1940년 9월 6일 ~ 1944년 8월 23일 | ||
서명 |
[clearfix]
1. 개요
"나는 소루마니아의 낙원에서 사느니 대루마니아의 늪지에서 죽겠다."
이온 안토네스쿠
이온 안토네스쿠
루마니아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2차 세계대전에 루마니아가 추축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했으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도 적극 가담했다.
2. 생애
루마니아의 피테슈티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랑스에서 군사 교육을 받은 후 장교가 되어 1907년에 일어난 농민 반란을 진압했다. 1913년의 헝가리 전쟁,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전후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군사간섭에 참가하여 부다페스트의 함락에 기여했다.파리, 런던 주재 무관을 거쳐 기병학교 교장, 참모대학 교장을 지내고 사단장 경험을 거쳐 1933년에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루마니아 왕국군의 근대화를 실시했다.
1937년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반유대주의-극우 집단인 철위대와 가까워 투옥되었다. 석방 후 카롤 2세와 대립한 끝에 1940년 9월 6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콘두커토르(Conducător, 지도자)[1]라는 지위를 확보한 그는 추축국에 가담하고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호리아 시마가 이끄는 철위대를 끌어들인다. 1940년 9월 14일 루마니아는 "국민군단국가"임을 선포하였고 독일군의 주둔을 허용함과 동시에 독일과의 새로운 협정을 체결하여 독일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높였다.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의 재산 압류 방식과 압류 재산의 분배 문제를 두고 철위대와의 관계에서 불화와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급기야 철위대원들이 루마니아 최고의 역사학자인 니콜라에 이오르가 등 많은 사람들을 암살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자 그는 철위대와 차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941년 1월 20일 철위대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철위대원들은 부쿠레슈티 포그롬으로 불리는 유대인 학살을 벌였고, 120명의 유대인이 사망하고 유대인 거주구역이 습격을 받는 등의 피해를 입혔다. 반란 실패 이후, 이들의 수장 호리아 시마는 독일로 보내졌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때 철위대를 숙청하는 것을 승인했다.
독소전 때 독일을 편들어 소련을 공격하며 독소전쟁에 참전했다. 루마니아 왕국군은 절정기에는 추축국에서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 제국 바로 다음인 최대 120만 명의 병력을 자랑했다.[2] 동부전선에서는 독일 바로 다음의 병력을 파견했지만 루마니아군이 다른 열강의 군대에 비하면 상당한 약체였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3]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포위망, 즉 천왕성 작전을 저지하는 데 실패한 군대가 바로 루마니아군. 애초에 천왕성 작전을 위해 준비된 소련군의 양과 질, 그리고 추축군의 얇은 전선을 생각한다면 방어군이 독일군이었어도 답이 없긴 했다. 그럼에도 '전차가 온다!'라는 한마디에 단체 모랄빵이 나서 멀쩡한 부대가 붕괴되는 수준이니, 루마니아군을 커버쳐주긴 힘들다. 다만, 루마니아군은 프랑스 침공 이후 얻은 구식 장비를 독일군이 줄 정도로 무시당하였고, 초기 소련군의 병력을 확인해 지원 요청을 하는 등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했다. 자세한 내용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조.
그렇게 스탈린그라드부터 슬슬 물러나더니 숫제 히틀러의 전선 사수 요청을 거부할 정도가 되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패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국왕 미하이 1세는 "합법적 평화"를 원한다고 선포하였고, 루마니아 외무부 장관 미하이 안토네스쿠는 영국, 미국과의 강화를 위해 접촉을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적인 상황으로 인해 영국과 미국, 소련의 폭격이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 유전 지대와 콘스탄차의 해군 기지에 집중되면서 전쟁은 지속되었고 1944년이 되자 소련군의 엄청나게 빠른 진격으로 전쟁에서 빨리 손을 떼거나 아니면 소련에게 점령을 당하게 되는 상황 중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결국 추축국의 패색이 짙어지고 8월 20일 소련군이 1940년 6월 이전의 국경선을 넘어서 진격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다급해진 미하이 1세는 8월 23일 궁정쿠데타를 일으켜 친추축국 세력을 숙청하고, 나치 독일에 대한 단교를 선언했다. 이온 안토네스쿠는 총리직에서 해임된 후 측근 세력들과 함께 체포당했다.[4] 9개월 뒤 전쟁이 끝나자 소련으로 보내졌으며, 유대인을 학살한 죄, 독일에 협력한 죄[5]로 1946년 6월 1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본인이 총살형을 요청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루마니아의 총리이자 독재자이기 이전에 군인이였기 때문에 교수형보다 총살형을 희망했던 것 같다.
3. 전쟁 범죄
전쟁이 끝난 후 위젤 위원회의 추정에 따르면, 이온 안토네스쿠의 지배 하에 28만 명에서 38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당시 루마니아의 반유대주의의 분위기는 1941년 7월 8일의 부총리 겸 외무장관 미하이 안토네스쿠의 다음 발언에서 확인된다. 그는 국무회의에서 그의 동료 장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여러분들 중 몇몇은 나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베사라비아와 부코비나의 모든 유대인 일파를 강제로 이주시키는 데 찬성한다. 그들을 국경 밖으로 추방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우리 역사에서 완전한 인종 해방, 갱생된 민족의 재검증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정화를 위한, 이보다 더 적당하고, 더 완벽하고, 더 자유로운 순간은 없었다. 이같은 역사적 기회를 이용하도록 하자. 만약 필요하다면, 기관총을 동원해서라도 말이다."[6]
이온 안토네스쿠는 나치 독일의 요구로 약 4만 명의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보낸 혐의를 받았으며 이온 안토네스쿠 치하 루마니아의 반유대주의 정책은 나치 독일 다음 가는 잔인성을 보여주었다. 아니 어떤 점에서는 오히려 더 악독했다. 이같은 철저한 반유대주의를 실천하면서 안토네스쿠는 히틀러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루마니아에 있던 75만 7천 명의 유대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학대받는 측에 속했다. 루마니아 정부는 히틀러를 따라서 천천히 반유대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1940년 8월부터 루마니아 정부와 안토네스쿠는 유대인들의 재산과 직업을 박탈하였고 그들을 강제 노동자로 만들었다. 1941년 1월에는 부쿠레슈티에서 170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학살은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본격적으로 심해졌다. 루마니아인들은 독일의 소련 침략에서 온갖 학살을 저질렀는데 베사라비아에서 20만 명의 유대인들을 죽였다. 유대인들은 물이나 음식도 공급받지 못한 채 가축용 열차에 실렸는데, 일부는 벌거벗겨진 상태였으며, 나머지 옷이 있는 사람들도 신문으로 간신히 몸을 가릴 수 있는 정도였다.
남부 소련에서는 기동대와 함께 학살했던 루마니아군의 잔혹함은 독일군에게도 충격을 주었을 정도였다, 1941년 10월 23일 한 지뢰밭에서 루마니아군 본부 중대가 몰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유대인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루마니아군 본부 중대가 몰살당한 다음날 루마니아군은 네 개의 커다란 창고에 유대인들을 쑤셔넣은 다음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질러서 2만에서 3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을 태워서 죽여 버렸다. 이 사건을 보고 크게 좋아했던 나치 독일은 루마니아군에게 베사라비아 지역을 맡겨서 이곳에서 21만 7757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하게 했다.[7] 결국 루마니아인들은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 다음으로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다.[8][9] 그들은 구타와 고문, 강간도 일삼았는데 특히 장교들은 예쁜 유대인 소녀들을 뽑아다가 그들의 성기를 잘라낸 다음 난교 파티를 벌였을 정도였으며, 또한 돈을 얻기 위해서 유대인들을 총살하고 난 후에 그 시체를 농부들에게 팔았으며, 농부들은 그들의 옷을 벗겨갔다. 그리고 루마니아군은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 때는 유대인을 산 채로 팔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군사학교 학창 시절부터 친구였던 빌헬름 필데르만은 유대인이었다.[10]
결국 이러한 극악무도하고 악랄한 루마니아군의 전쟁범죄가 드러났고, 이러한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전후 소련군에 체포된 이온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 공산정권에 인계되었다.
웃기게도 소련이 점령한 구 루마니아 영토와 우크라이나 점령지의 유대인은 무자비하게 학살했지만 루마니아 국내의 유대인은 살려뒀다. 같은 루마니아 시민이라서가 아니라, 전황이 기울자 연합국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어서였다. 물론 이 유대인들도 갖은 수탈을 당해 알거지가 되었고 전후 이스라엘로 대거 이주, 오늘날은 3천 명밖에 남지 않았다.
4. 처형
[11]
총살되는 안토네스쿠. 19세 미만 및 심약자는 시청하지 말 것.
이온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 공산정권에 인계된 후 전범 지목을 받고 재판에 넘겨져 사형을 선고 받는다. 사형 선고를 받게 되자 자신을 총살형에 처해 달라고 요청해서 수락되었으며, 1946년 6월 1일 토요일 오후 6시 6분 질라바(Jilava) 제4 형무소 근처 처형장에서 총살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비록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대로 총살형 방식으로 사형에 처해졌지만, 군복을 착용한 채로 군인들에게 총살시켜 달라는 부탁은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 대신 본인 취향에 따라 중절모를 쓰고 양복을 멋들어지게 입은 채로 총살형에 처해졌다.
물론 이온 안토네스쿠의 측근인 콘스탄틴 Z. 바실리우[12], 게오르게 알렉시아누[13], 미하이 안토네스쿠[14]와 함께 총살형을 당했다, 저 사진은 총살형 전에 판결문을 읽는 순간을 찍은 사진인데 저 판결문 낭독이 끝나고 25명이 만리허 소총을 쏴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그런데 총을 맞았는데도 이온 안토네스쿠와 측근들이 완전히 숨을 거두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알렉산드루 비시네스쿠[15]가 권총으로 확인 사살했다.[16]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마지막으로 사형 집행 사병 한 명이 만리허 소총으로 1인당 한 발씩 재차 확인 사살했다. 그러고 난 후 의사가 오후 6시 15분에 이 4명의 사망을 확인했다. 여담으로, 두렵다며 눈을 가려달라 한 바실리우만 제외하고 처형 영상을 보면 유언 대신 죽기 직전 중절모를 벗어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이 인상깊다.
5. 기타
- 궁정 쿠데타로 체포됐을 당시 매독에 걸렸는데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치료를 거부했다고 한다.
- 1989년 공산주의 붕괴 이후 반공적 분위기로 인해 루마니아에서는 반공주의자였던 안토네스쿠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형성되어, 2006년 12월에 트라얀 바세스쿠 정권은 이온 안토네스쿠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그러나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 동참으로 인해 이스라엘 정부 및 유대인 생존자 단체에선 루마니아 정부의 이 같은 결정을 강력하게 비난했고, 다른 나라에서도 안토네스쿠는 여전히 전범으로 분류되어 있다.
6. 매체에서
-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 루마니아의 파시즘 지도자로 등장한다. 다만 소속이 철위대인 오류가 있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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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카롤 2세 · 미하이 1세 · 알렉산드루 C. 쿠자 · 이온 안토네스쿠 |
[1] 우습게도 이 호칭은 훗날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의 독재자이자 비슷하게 총살형으로 인생을 마감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재활용하게 되었다.[2] 소련 영토에서 밀려나고 풍전등화가 된 시점에서 15세 이상 남성은 모두 동원했기 때문에 가능한 수치.[3]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는 스탈린그라드 후방지구에 주둔한 루마니아 우익의 4군과 좌익의 3군이 독일군보다 약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천왕성 작전을 입안해 그들을 압도적인 전력으로 박살내고 독일군 6군을 포위해 분쇄해 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4] 그러나 이러한 루마니아의 노선 변경과 관계 없이 소련군의 진격은 계속되어 며칠 뒤에는 부쿠레슈티가 함락되고, 문테니아와 트란실바니아 지방으로 퇴각하는 독일군과 싸우고 있던 루마니아는 전쟁 피해 보상금으로 3억 달러를 지불해야 했으며, 독일군에 대항하는 전투에 동참해야 한다는 조건과 10만 명의 루마니아 노동자를 소련으로 파견하는 조건으로 휴전 협정을 맺게 된다. 다만 그 덕택에 전후 별도의 보복 조치를 당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5] 존 래프랜드가 쓴 나는 죄 없이 죽는다에 따르면 그는 독일에 협력한 죄로도 기소되었다.[6] 이후 궁정쿠데타 때 체포되어 이온 안토네스쿠와 함께 처형됐다.[7] 이들 중에 소련 출신이 13만 명, 루마니아 출신이 8만 7757명이였다고 한다.[8] 아랫나라 불가리아가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참여 요구와 압력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을 학살하지 않고 보호한 것과 대조적이었다.[9] 불가리아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을 따라 추축국에 참전하긴 했지만 자발적으로 히틀러의 요구를 따라 전쟁에 참전했던 루마니아, 헝가리 등 동부유럽의 다른 추축국 국가들과는 달리 추축국 합류도 히틀러의 반강제적 요구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고, 전쟁 당시 불가리아군에서도 약탈과 강간, 학살 등을 각 부대들마다 자제, 단속하는 등 규율을 지켜 아예 점령지와 전선에서 전쟁범죄를 대놓고 저질렀던 나치 독일군이나 이탈리아군, 일본군, 루마니아군, 헝가리군 등 다른 추축국 군대들에 비하면 온건한 편이었다.[10] 그래서 필데르만과 가족들은 예외로 살아남게 해줬다고 한다. 이 사람은 훗날 루마니아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가 되었다.[11] 위 사진에서 가운데 있는 인물이 이온 안토네스쿠. 처형 직전 바실리우는 두렵다면서 자신의 숄로 눈을 가려 달라고 부탁 했으며 동시에 기둥에 묶여 포박되었다. 그러나 알렉시아누, 미하이 안토네스쿠, 이온 안토네스쿠는 눈을 가리지 않았으며 포박도 당하지 않았고 아무런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옆에 있는 사형수는 미하이 안토네스쿠.[12] Constantin Z. Vasiliu, 1882.5.16.출생. 장군, 내각 차관. 이 자는 독소전쟁 발발 전부터 인종청소 법안 추진과 트란스니스트리아, 베사라비아의 집시들과 유대인들을 즉각 학살 및 추방하기 위해 사전에 명단을 작성하여 추진했던 인물이다. 이로 인해 많은 유대인과 집시들이 학살을 당하는 참변이 일어났으며 전후 학살혐의로 기소되어 법정에 출두했으나 자살 시도를 여러 번 하고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아 재판 중 재판정에서 피해자와 증인들이 그를 향해 쌍욕을 퍼부었다.[13] Gheorghe Alexianu, 1897.1.1.출생. 부쿠레슈티 대학교 법률학 박사, 변호사 출신. 2대 트란스니스트리아 총독(1941년 8월 19일~1944년 1월 26일). 임기 동안 집시와 유대인의 강제노동 및 학살을 주도.[14] Mihai Antonescu, 1907.11.18. 출생. 대학강사 출신, 부총리겸 외무부 장관. '유대인 추방법'을 추진하고 유대인 학살을 조장 및 선동.[15] 루마니아 공산 정권 하에서 정치범을 가두는 름니쿠서라트 교도소 소장 역을 하면서 양심수 고문과 의문사에 적잖이 관여했다. 차우셰스쿠 정권 붕괴 후 징역 20년을 선고받았으며, 2018년 사망했다.[16] 권총으로 측근들에게는 각각 한 발씩, 이온 안토네스쿠에게만 두 발을 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