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0:08:51

철위대

전위조국당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10px"<tablebordercolor=#118959> 파일:전위조국당 로고.svg철위대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ffffff,#118959><colcolor=#000000,#FCDD01> 관련 조직 전위조국당 · 철위대 암살단
이념 교권 파시즘 · 국수주의 · 대중주의 · 반공산주의 · 반유대주의 · 반자본주의 · 신비주의
학살 질라바 학살 · 부쿠레슈티 포그롬
기타 1934년 몽트뢰 파시스트 회의 · 국민군단국가 · 나의 군단을 위하여 · 루마니아 왕국
관련 인물
지도자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 · 호리아 시마
소속 인물 게오르게 A. 러저레아누-러주리커 · 게오르게 칸타쿠지노-그러니체룰 · 게오르게 클리메 · 라두 레카 · 미하이 스텔레스쿠 · 미하일 마노일레스쿠 · 바실레 마린 · 이온 모차 · 이온 젤레아 코드레아누
기타 카롤 2세 · 미하이 1세 · 알렉산드루 C. 쿠자 · 이온 안토네스쿠
}}}}}}}}} ||

파일:전위조국당 당기.svg파일:전위조국당 로고.svg
당기 로고
철위대
Garda de Fier
창설일1927년 7월 24일
해산일1941년 1월 23일
창립자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
당수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1927~1938)
호리아 시마(1938~1941)
기관지단어(쿠븐툴;Cuvântul)
좋은 소식(부나 베스티레;Buna Vestire)
이념군단주의(Legionarism)
조직원272,000명,(1937),

1. 개요
1.1. 명칭 관련
2. 역사3. 해산 이후4. 철위대 암살단
4.1. 니카도리4.2. 데쳄비리4.3. 러즈부너토리

[clearfix]

1. 개요

철위대(Garda de Fier)는 루마니아의 교권 파시즘 조직이다. 유대인에 대한 린치 등 과격 폭력 행위로 당시 루마니아에서 악명을 떨쳤다.

종교와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던 당대 주류 파시즘과 달리 철위대는 특이하게도 종교적 성향이 매우 짙은 정당이었다. 또한 지도부와 당원의 연령이 상당히 낮았는데, 예를 들어 철위대 지도자 코드레아누는 죽을 때 나이가 39세, 코드레아누의 후임자 호리아 시마가 직위를 승계할 당시 나이가 32세였다. 이는 철위대의 주요 지지층이 대학생과 같은 청년층이 많았기 때문이다.

1.1. 명칭 관련

이 단체는 1927년 ‘대천사 미하이 군단(Legiunea Arhanghelul Mihai)’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고, 1930년에는 ‘철위단(Garda de Fier)’, 1935년에는 ‘모두다 조국을 위하여(Totul pentru ţară)’, 그리고 1940년에는 ‘철위단 운동(Mişcarea Legionară)’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출처]

해당 명칭들은 다양하게 통용된다. '대천사 미하이 군단'은 '대천사 미카엘 군단'으로, '모두다 조국을 위하여'는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국가를 위한 전부', 나무위키에서는 '전위조국당'으로 번역되었다. 또한 '철위단'은 '철위대'로도 통용된다.

2. 역사

1927년 7월 24일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가 처음 대천사 미카엘 군단을 창단하였으며 1938년 코드레아누가 사망할 때까지 이 조직은 그에 의해 영도되었다. 이 조직은 '군단' 또는 '군단 운동'으로 불렸다. 1930년 3월 코드레아누는 철위대(Garda de Fier)를 대천사 미카엘 군단 내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돌격대처럼 군사조직으로 만들었는데, 이 이름은 나중에 대천사 미카엘 군단 자체의 별칭이 되었다.[2]

1933년 12월 29일 자신들을 탄압하는 수상 이온 두카(Ion Duca)를 암살하였다. 1933년에는 조직이 해산되었고 명칭을 전위조국당(Totul pentru Tara)으로 변경하였다. 1937년 선거에서 15.38%의 지지와 390석 중 66석의 의석을 획득하여 원내 제 3당으로 약진하였다. 1938년, 카롤 2세와의 갈등으로 인해 코드레아누는 미성년 학생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폭력을 선동하는 명령을 내리고 외국 단체들과 연계를 유지하고 화재 행위를 조직한 죄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 이후 그는 10년간 소금 광산에서의 일하게 되는 형벌을 받게 된다. 다만 코드레아누는 육체 노동을 면제받았고 구금 조건도 개선되어 주변 인물들과 여러 차례 면회하기도 했다. 그는 탈옥 시도를 모두 거부하고 폭력 행위를 자제하도록 명령하며 전위조국당의 임시 지도부를 구축했다. 하지만 이 임시 지도부는 코드레아누가 감옥에서 가혹한 처벌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교도소 측에 대한 보복을 예고해 교도소 보안이 강화되기도 했다.

뮌헨 협정 이후 독일의 세력이 강해지자 이 임시 지도부는 국왕을 위협하는 선언을 발표하며 루마니아 전역에서 폭력 행위를 벌였고, 이 때문에 화가 난 카롤 2세는 코드레아누를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1938년 11월 30일, 루마니아 정부는 코드레아누는 '니카도리(Nicadori)와 데쳄비리(Decemviri)'로 불리는 철위대의 수상 암살자들과 함께 사살되었다고 발표한다. 이후 자세한 진실이 드러나는데, 이들이 교도소에서 이송된 후 헌병대가 비밀리에 목을 졸라 죽이거나 총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참살한 것이었다. 시신의 행방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린다. 질라바 교도소 안뜰에 매장되었다는 증언도 있으며, 역사학자 노먼 데이비스(Norman Davies)의 저서 유럽: 하나의 역사(Europe: A History)에 따르면 이들의 시신이 산에 녹여진 후 7톤의 콘크리트 아래 매장되었다고 한다.

코드레아누는 정통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고 유력한 후계자들은 카롤 2세에 의해 제거당했기에 코드레아누 사후 전위조국당의 후계자를 놓고 당 내 파벌 싸움이 격화되었다. 대표적으로는 바나트 출신의 지역 지도자 호리아 시마를 중심으로 모인 가장 실용적이자 정교회와는 거리가 멀었던 파벌, 코드레아누의 가족(이온 젤레아 코드레아누와 그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한 파벌, 종교성을 강화하고자 했던 '모차 마린'[3] 파벌 등이 있었다. 이들 중 호리아 시마가 지도자가 되었고 카리스마적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었던 시마는 1940년 9월 6일 자신의 주도로 임시로 만들어진 단체인 '군단 포럼'에 의해 군단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1940년 9월 28일 이온 젤레아 코드레아누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신이 '지도자의 아버지이자 세속적 대표"라고 주장하며 부쿠레슈티의 군단 지부를 습격했지만 실패하였다. [출처]

1939년에는 총리인 아르만드 컬리네스쿠를 친영파, 친폴란드파라는 이유로 또 다시 백주대낮에 대놓고 살해했다. 그것도 총리의 퇴근길에 의전용 리무진을 막아세우고 총기난사를 하여 벌집으로 만들었다.[5]

1940년, 전위조국당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이온 안토네스쿠와 협력하여 카롤 2세를 퇴위시키고, 미하이 1세를 복위시켰다. 또한 안토네스쿠와 함께 파시스트 정부인 국민군단국가(Statul National Legionar)를 구성하였고, 전위조국당 당수인 호리아 시마가 루마니아의 부수상[6]이 되어 일당독재를 펼쳤다.

그러나 전위조국당은 군부 독재를 원하던 안토네스쿠와 점점 대립했고, 1941년 1월 21일에서 23일까지 부쿠레슈티에서 무장 폭동을 일으켰으나[7][8] 안토네스쿠가 이끄는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전위조국당은 해체되었고 당원들은 숙청되었다. 당수이던 호리아 시마는 추방되다시피 자기를 따르는 일파와 나치 독일로 망명했다. 이와 더불어 국민군단국가도 같은 해 2월 14일 해체되었다. 전위조국당의 강제 해산 이후, 정적들을 쓸어버린 안토네스쿠는 원했던 군부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시마는 이러한 상황을 두고 '군단 운동은 혁명의 단계에서 통치의 단계로 이전되지 못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고 평가했다.

3. 해산 이후

국가의 수반이 된 안토네스쿠는 스스로를 '콘두커토르'(Conducâtor)라고 칭하며 유사 파시즘 정권을 수립해 독소전쟁에 참전하였으며 독일 국방군의 우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한 나치 독일 못지않게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기도 했다. 다만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지도자 우상숭배는 제한적으로 벌였다. 이런 류의 지도자 우상숭배는 오히려 코드레아누의 후임자인 호리아 시마(Horia Sima)가 훨씬 노골적으로 저질렀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말에 루마니아는 줄을 잘못 탄 대가를 제대로 치른다. 나라는 소련군의 침공을 받아 공산화되었으며, 지도자였던 안토네스쿠는 처형당했다. 안토네스쿠 자신도 미하이 1세 국왕의 쿠데타로 축출되고 소련으로 넘겨졌다. 독일에 머무르던 시마는 안토네스쿠 정권이 무너지자 망명정부를 조직했지만 전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고 전후 스페인으로 다시 도망쳐 1993년 마드리드에서 죽었다. 루마니아 공산정권은 시마에게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했다고 한다.

현대 루마니아에는 이 정당의 영향을 받은 전위조국당(Partidul Totul Pentru Țară)신우파당 등의 정치 조직이 있다.

4. 철위대 암살단


{{{+4 Echipa Mortii}}}
Suntem echipa morţii, Din Moldova azi venim
Aruncat e zarul sorţii Ori învingem, ori murim.
우리는 암살단, 몰도바에서 걸어가네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이기지 않으면 죽을 것이네

Purtăm cu noi stindardul Unei sfinte noi credinţi,
Pe el este scris cu sânge Fapte mari şi biruinţi.
거룩한 새 신앙의 깃발을 드네
거기에는 피로 쓰인 위대한 업적과 승리가 적혔네

E jale multă în ţară Că străinul e stăpân,
Cerşetor la el acasă A ajuns bietul român.
우리 나라는 이방인 정권 때문에 슬프다네
집안에 거지가 있네, 가련한 루마니아인...

De aceea azi la luptă Noi pornit-am să scăpam,
Patria de toţi tâlharii Cinstea iar s-o întronăm.
그래서 오늘 전투에서 우리는 탈출하러 가네
모든 강도의 고향을 다시 명예롭게 만드리

În rând cu Căpitanul Bucuroşi ne vom jertfi,
Peste leşurile duşmane Ţara nouă vom clădi!
선장과 함께 기꺼이 불태워지리
적의 침상을 넘어 새 나라를 만드리

Cu zâmbetul pe buze, Moartea-n faţă o privim
Că suntem echipa morţii Ori învingem, ori murim!
입가에 미소를 띄고 죽음의 얼굴을 보리
우리는 암살단, 이기거나 죽거나!

4.1. 니카도리

1933년 12월 29일 이온 두카를 암살한 인물.

4.2. 데쳄비리

미하이 스텔레스쿠를 암살한 인물들.

4.3. 러즈부너토리

아르만드 컬리네스쿠를 암살한 인물들.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2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2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출처] 박정오. (2014). 루마니아 공산화 과정 연구. 동유럽발칸연구, 38.[2] 물론 공식명칭은 여전히 대천사 미카엘 군단이었으며, 철위대는 공식명칭이 아니었다.[3] 이 둘은 스페인 내전 당시 국민파에 가담해 전사한 인물이다. #[출처] IDEOLOGIES AND NATIONAL IDENTITIES, Constantin Iordachi[5] 컬리네스쿠 총리도 자신이 암살당할 수 있다고 직감하였는지 자신의 의전용 차량인 캐딜락 리무진을 장갑차로 대체해야한다고 번번히 요청했었지만 묵살당했다.[6] 수상은 당연히 이온 안토네스쿠.[7] 폭동을 일으킴과 동시에 겸사겸사 포그롬을 일으켜 125여명의 부쿠레슈티 유대인들을 같이 학살했다. 호리아 시마는 이 때 정육점 갈고리에 유대인들을 매달아 놓고 몸에 '코셔'라고 새겨놓았고, 이런 잔혹행위들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루마니아 주재 미국 대사 프랭클린 모트 건터에 의해 워싱턴에도 보고된다. 정육점에 매달린 시체 중에는 5살난 소녀도 있었다.[8] 독일도 이 상황에 개입했는데, 서로 손발이 안 맞아서 독일 국방군은 안토네스쿠 군부를, 무장친위대는 시마의 철위대를 지원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아돌프 히틀러가 안토네스쿠를 도울 것을 결의하면서 철위대는 완전히 버려진다. 시마는 독일로 망명하긴 했으나 거기서도 감시를 받는 등 찬밥 대우가 이어지자 이탈리아 왕국으로 다시 탈출하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걸려 갈레아초 치아노가 다시 독일로 추방해 버리고, 독일에 있던 철위대 망명객들이 다 같이 부헨발트 수용소에 갇히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물론 다른 수감자들에 비하면 훨씬 인도적이고 편한 환경이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