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차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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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9b75><colcolor=#fff> 불가리아 차르국 제2대 차르 보리스 3세[1] Борис III | |||
출생 | 1894년 1월 30일 | ||
불가리아 공국 소피아 | |||
사망 | 1943년 8월 28일 (향년 49세) | ||
불가리아 왕국 소피아 | |||
재위기간 | 불가리아 차르 | ||
1918년 10월 3일 ~ 1943년 8월 28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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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보리스 클레멘스 로베르트 마리아 피우스 루드비그 스타니슬라우스 크사버 삭스코부르고츠키 (Борис Клемент Роберт Мария Пий Луи Станислав Ксавие Сакскобургготски) | ||
아버지 | 페르디난트 1세 | ||
어머니 | 부르봉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 ||
형제자매 | 키릴 프레슬라프스키, 불가리아의 에브도키야, 불가리아의 나데즈다 | ||
배우자 | 이탈리아의 조반나 | ||
자녀 | 시메온 2세, 마리야 루이자 | ||
종교 | 불가리아 정교회 | }}}}}}}}} |
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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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 왕국의 제2대 차르.2. 생애
1894년 불가리아 공국 소피아에서 태어났다. 1896년 2월, 러시아 제국과의 화해를 위해 부왕 페르디난트 1세는 어린 보리스 왕자를 가톨릭에서 정교회로 개종시켰다.[2]페르디난트 1세가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의 책임을 지고 10월 3일 양위하자 곧바로 즉위했다. 1923년 쿠데타로 알렉산더르 스탐볼리스키[3] 총리가 암살당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보리스는 군경의 지원을 받아 전제정을 수립했다.
1930년 10월 25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에서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셋째딸인 조반나 공주와 결혼하여 슬하 1남 1녀(마리야 루이자, 시메온 2세)를 두었다.
1934년 5월 19일 키몬 게오르기에프 대령이 이끄는 극우 군사조직 '즈베노'의 회원 다미안 벨체프 대령이 쿠데타를 일으켜 게오르기에프를 총리로 하는 군사독재 정권이 수립되었으나, 보리스 3세는 1935년 1월 22일 즈베노가 왕정을 폐지하려 했다는 명분으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즈베노를 축출했다.[4]
제2차 세계 대전때 추축국에 협력하여 영토를 불렸지만[5] 독소전쟁 참전을 거부하여 나치 독일의 눈엣가시였다.
1943년 아돌프 히틀러와의 회담 이후 소피아로 돌아와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독일인 의사들이 피상적으로 검사한 결과 2년전 그리스 총리 요안니스 메탁사스의 시신에서 발견한 반점과 같은 증상이 검출됐다고 한다. 독일인 의사들은 왕이 독살됐다고 거의 확신했지만, 불가리아 관리들이 부검을 반대하고 조반나 왕후의 동의를 얻지 못해 부검은 하지 못했다. 이후 강력한 여론에 따라 결국 왕후가 동의하여 부검을 하긴 했지만 방부처리 후에 해서 무의미한 부검이었고 또 독일인 의사들의 개입은 거부되었다.
여하간 이로써 독살당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용의자는 보리스 3세가 소련 파병을 거부한 데 분노한 히틀러라는 설이 있다.[6] 한편 아들 시메온 2세나 딸 마리야 루이자는 소련 NKVD가 한 짓이라는 주장을 했다. 1943년에 발표된 경찰 비밀보고서에 의하면 영국의 개입이라는 설도 있다. 정작 독일의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그의 일기에 조반나 공주의 언니 마팔다[7]가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통해 당시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을 무너뜨린 이탈리아 왕실과 피에트로 바돌리오 총리가 보리스 3세를 살해한 것이라는 가설을 내세웠다. 이후 마팔다는 독일 국방군에 체포되어 부헨발트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연합군의 폭격을 맞고 사망했다.
한편 보리스 3세의 서거 후 왕위는 고작 6살밖에 안된 아들 시메온 2세에게 계승되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섭정들이 권력을 장악했고 시메온 2세는 얼마 안 가 1946년에 불가리아가 공산화되며 시메온 2세는 폐위된다.
릴라 수도원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는 1944년 조국전선에 의해 브라나 궁전 안뜰로 옮겨졌으며 이후 인민공화국 당국에 의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이장되었다. 불가리아가 민주화된 후 브라나 궁전에서 발견된 그의 심장만이 1994년 아내 조반나에 의해 릴라 수도원에 재안장 되었다.
3. 여담
- 오리엔트 급행 열차를 직접 운전할 정도로 철도를 좋아하는 철도 애호가였다고 한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후 지타의 조카이자(모후 마리아 루이사가 치타의 이복언니), 오토 폰 합스부르크, 룩셈부르크 대공 장의 사촌형이다.
4. 대중매체에서
- Hearts of Iron IV에서 불가리아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현실처럼 즈베노를 제거하고 파시스트와 협력할수도 있고 자유적인 입헌민주정을 수립할수도 있으며, 독살을 시행하여 페르디난트 1세를 다시 옹립하거나 아니면 사회주의 국가로 변신해 보리스를 죽일수도 있다.
5. 둘러보기
[1] 불가리아 왕국에서는 보리스라는 왕호를 쓴 앞선 왕이 없으나 불가리아 제1제국 시절의 보리스 1세와 보리스 2세의 넘버링을 이어받아 보리스 3세가 되었다.[2] 하지만 왕비와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반발하고 교황청에서 파문하겠다고 하자, 나머지 자녀들은 가톨릭 신자로 세례를 줬다.[3] 불가리아 농민당 지도자로, 1차 대전에서 친협상국 입장을 보여 페르디난트 1세에게 대들었다가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1918년 9월 석방되어 한때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보리스 3세가 즉위하자 내각에 들어갔고 1919년 10월 총리가 되었다.[4] 게오르기에프는 이후 친소-친공 인사로 변신해 아들대에 공산정권으로의 과도기에 총리가 되었다.[5] 크라이오바 조약으로 루마니아에게서 남부 도브루자를 되찾고,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그리스 침공을 도와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의 영토를 일부 차지했다. 전후 불가리아는 남부 도브루자를 제외한 나머지 영토를 포기했다.[6] 다만 당시 왕과 회담을 같이 한 불가리아 총리 보그단 필로프는 당시 회담은 서부발칸에 파병하는 것이 주제였고, 소련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고 한다.[7] 1902~1944, 헤센 대공국의 방계인 헤센카셀 가문(빌헬름 2세의 조카(막내 여동생 마르가레테의 아들))의 필리프(1896~1980)와 결혼했다. 참고로 필리프의 동생 크리스토프의 부인이 필립 공의 누나 소피아 공주이다. 헤센 대공국을 통치하던 헤센다름슈타트 가문의 남계가 단절된 1968년 이후 헤센 가문의 수장(헤센 대공국의 공위 요구자)은 헤센카셀 가문이고, 현재 수장은 필리프의 손자 하인리히 도나투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