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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들의 예술로 세상을 밝히고, 그들의 지식으로 가르치며, 그들의 통치 기술과 능력을 통해 새 영토에 튼튼한 국가 조직을 마련할 것"
- 파시스트 사상가 주세페 보타이(Giuseppe Bottai), 이탈리아 식민 제국에서의 이탈리아인의 역할에 대한 설명에서.
- 파시스트 사상가 주세페 보타이(Giuseppe Bottai), 이탈리아 식민 제국에서의 이탈리아인의 역할에 대한 설명에서.
스파치오 비탈레(Spazio vitale)는 이탈리아어로 생존권(生存圈)을 의미하며, 이탈리아 파시즘의 주요 팽창 정책이었다. 같은 추축국인 나치 독일의 레벤스라움과 유사하게 이탈리아 신민을 위한 대규모 영토 확장 정책이었으며, 그 콘셉트 자체는 로마 제국에 있었다.[1] 한마디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왕국을 옛 로마 제국으로 회귀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사상의 뿌리는 레벤스라움처럼 생각 이상으로 깊다. 이탈리아 통일전쟁으로 미수복 이탈리아(Italia irredenta, 이탈리아 이레덴타)라는 미수복영토가 생겼고 이탈리아 수복주의(Irredentismo italiano, 이레덴티스모 이탈리아노)라는 사상이 퍼졌다. 이는 이탈리아 왕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약속받은 영토와 비교하여 일부만 받으면서[2]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로부터 불구의 승리라는 오명을 들었다. 이렇게 다른 강대국들에게 배신당했다는 생각이 퍼져나가면서 무솔리니가 집권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존에 있던 미수복 이탈리아 사상에 로마 제국으로 회귀라는 민족주의적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 요소를 첨가해 탄생한 개념이 스파치오 비탈레였다.
이탈리아 파시즘에서, 지리적 팽창주의는 "국경을 넘어 팽창할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강력한 통합 조직을 갖춘 국가의 필수적 필요나, 팽창주의적 자극을 포함하는 지구의 한 부분"으로 정의된 스파치오 비탈레(Spazio Vitale)로 정당화되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스파치오 비탈레의 식민 제국주의는 정복지 주민들의 문화적 동화를 필요로 한다는 발언을 했다.
스파치오 비탈레는 이탈리아인을 정복지의 "한물간" 정치 체제를 대체하고, 원주민들을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식민지 주민으로써 "문명화"시키는 "우수 문명의 대리인이자 전달자"로 소개되었다. 파시스트 사상가 주세페 보타이(Giuseppe Bottai)는 스파치오 비탈레의 역사적 사명은 고대 로마의 그것과 같다고 언급했다. 피지배 민족들은 로마 시대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식민 제국 안에서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는 것을 허락받을 것이었다.
무솔리니 정권은 20년대부터 가지고 있었던 리비아 식민지부터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내륙 지역 사막에서 준동하는 게릴라들을 완전히 진압했다. 리비아를 방문한 무솔리니는 검을 휘두르며 자신이 이슬람을 보호하겠노라고 선언했고, 몇몇 무슬림은 무솔리니를 '이슬람의 수호자'로 대우하였다. 또한 무솔리니는 이탈리아는 영국, 프랑스와 달리 이슬람 말고도 아프리카 토착 종교도 존중하겠다고 홍보하였다. 이후 파시즘의 홍보를 위해 리비아를 배경으로한 소설이 많이 쓰여졌다. 가장 많이 쓰이던 클리셰는 쾌락에 찌든 문란한 이탈리아 여인이 리비아의 가정에 충실하고 신앙적으로 독실한 무슬림 여인을 본받아 성숙한 파시스트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슬람교를 존중한 것과는 별개로 리비아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진압해서 수만명 이상의 리비아인들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어나갔다.
이탈리아는 스파치오 비탈레의 기치 아래 '30년대에 에티오피아와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식민지로 만드는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그리스 침공과 북아프리카 전역을 일으키지만 그 결과는 처참했다.
1945년 몰락을 앞둔 히틀러는 무슬림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했으면 중동 전역이 달라졌을텐데 괜히 이탈리아 눈치보느라 못했다고 후회했다. 지중해를 이탈리아의 레벤스라움으로서 인정해줬기 때문에 무슬림에게 반제국주의 봉기를 사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창업군주 이븐 사우드 같은 경우 실제로 추축국과 선을 긋는 행보를 보였다.
2. 계획상의 이탈리아 제국
짙은 초록색은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1940년 직전의 이탈리아의 영역, 짙은 연두색은 이탈리아가 전쟁 중 확보한 최대 영역, 옅은 연두색은 스파치오 비탈레에 따른 계획상의 이탈리아 제국.
스파치오 비탈레로 실현될 제국의 영토 확장은 대서양에서부터 인도양까지의, 지중해와 북아프리카를 석권했다. 이탈리아 파시즘의 생존권은 이탈리아인들만 거주하게 될 소권역(piccolo spazio)과, 이탈리아 식민 제국이 들어설 대권역(grande spazio) 두 부분으로 나눌 계획이었다.
3. 관련 문서
[1] 다만 독일의 경우와는 다르게 인종말살이 아닌 사회적, 정치적인 동화를 목적으로 두었다. 이들이 꿈꾼 로마 제국은 수많은 인종에게 로마 시민권을 나눠준 대표적인 보편제국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인과 이탈리아에 협조적인 유럽 민족(알바니아인, 계획상의 그리스인 등)을 정통 로마 시민으로 우대하고 다른 민족은 차별하고 학살하는 일이 있어도 인종말살까지는 안되는 일이었다.[2] 원안대로라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쥐트티롤과 트렌토(현 트렌티노알토아디제.)과 고리치아, 트리에스테, 달마티아 전역을 받아야 했으나 쥐트티롤과 트렌토, 이스트리아 반도 일부에 그쳤으며 자다르와 리예카는 각각 1920년, 1924년에야 손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