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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분할과 파쇼다 사건. |
1. 개요
1898년 7월 10일 프랑스 육군 원정대가 북아프리카 수단 남부 파쇼다(Fashoda. 오늘날 남수단의 코도크)에 자국 깃발을 게양하여 영국 육군과 충돌한 사건.대한민국 세계사 교과서 등에선 제국주의 시절 서구 열강의 대표적 충돌 사례 중 하나로 사건 이름만 언급되는데, 결과적으론 충돌보단 양국간 동맹 관계가 강화된 사건이다.
2. 배경
흔히 '영국의 종단 정책(케이프타운-카이로 정책)과 프랑스의 횡단 정책의 충돌'로 알려져 있지만 영국의 육상 종단이 가능해진 것은 독일의 식민지였던 지금의 탄자니아를 획득한 1919년 이후이며 남아프리카 이북은 그닥 쓸모도 없었던 만큼 파쇼다 사건을 그러한 관점에서만 바라보기는 어렵다.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의 "횡단 정책"의 압력이 떨어지던 와중에 "수단 남하 정책"의 필요성이 높아지던 영국이 서로 공조하지 못했던 해프닝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2.1. 영국
당시 영국에게 가장 중요했던 지역은 이집트와 식민지 인도 제국을 잇는 항로였다. 두 국가는 식민지화되기 이전까지 다른 지역에 비해 정치,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국가였고 무엇보다 영국이 당시 식민지와 약소 국가들에게 수출하던 면화 산업의 경쟁 국가였다. 따라서 두 국가를 효율적으로 점령하는 것이 영국에게는 급선무였고 이를 위해 장악해야 하는 것이 홍해 지역의 항로였다. 이 때문에 영국은 홍해 주변의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갉아먹기 시작하고 수단에도 힘을 써야 했다. 그러나 영국에게 수단은 어디까지나 주된 목적이 아니었던 만큼 점진적으로 지배하며 대충 허수아비 체제로 놔 두려던 상황이었다.마흐디 운동의 지도자 무함마드 아흐마드 |
찰스 조지 고든 |
그런데 고든 총독은 수단이나 북아프리카에선 의외로 평이 나쁘지 않았는데 그는 청교도 성향이 강하고 성공회인으로 신앙심이 투철했지만 정작 외국인들의 종교에 대해 관대했기 때문이다. 성격도 침착했으며 청나라에서도 현지인들에게 종교 강요는 하지 않았던 인물이었고 수단에서도 똑같았다. 게다가 현지에 남아 있던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노예들의 교육이나 자립에까지 관심을 보였으며[3][4] 현지인이 믿는 이슬람에 꽤 관대하게 대했고 현지인 부하들도 잘 대해 줬기 때문에 대부분이 무슬림인 7천여명 이집트 및 수단인 부하들은 마지막까지 그와 같이 하다가 모두 죽었다. 마흐디도 그에 대한 평을 듣고 '유럽 기독교놈치곤 그나마 나은 놈'이라며 죽이지 말라고 했지만 부하들이 죽여서 목을 베어 가지고 오자 불같이 화냈다는 기록도 있다.[5]
당시 상황을 보면 마흐디는 사전에 협상을 시도하면서 고든에게 타협의 여지를 주었는데 아예 무슬림으로 개종하라고 몇 번이나 고든을 설득하게끔 대리인을 보낼 정도였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무엄하게 요구해서 기분이 상했나?" 하여 다음에는 부드럽게 설득하고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마흐디 신민들은 그대를 아주 찢어죽일 정도로 미워하니 나로서도 지켜드릴 수 없소, 칼 같이 무슬림이 되라는 게 아니오. 아니, 하다못해 적당히 무슬림으로 개종했다고 하고 나중에 영국으로 돌려보내드리겠소. 거기서 다시 기독교인이 되던지 그건 자유요." 같은 내용의 편지까지 보냈다! 이게 참 놀라운 게 마흐디는 수단에서 잡힌 기독교인에게 '너 개종할래, 안 할래?' 한 마디 하고 안하면 '즉각 참수!' 이렇게 하던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이렇게까지 편지로 여럿 보내면서 설득했다는 건 그만큼 고든이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다. 이에 고든은 "마흐디 당신의 성의는 감사하지만 잠깐이라도 내 신앙을 버릴 수 없소. 반대로 마흐디 당신이 거꾸로 되어 내가 잠깐이라도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척 하라고 하면 하실 수 있으시오?" 라며 거절한다고 답변했다.
고든의 최후를 상상하여 그린 그림.[6] | 영국에 세워진 고든의 동상 |
당시 국내 정치적으로도 위기에 빠졌던 영국 자유당의 글래드스턴 영국 총리는 고든이 참수당한 후 목이 내걸렸다는 정보를 듣곤 "하필이면 이 때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니!"라고 화내면서 큰소리를 냈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조차도 전보를 보내 사임을 권했을 정도로 인기가 떨어진 글래드스턴은 결국 곤경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반 년만에 사임했다. 뒤를 이은 것은 보수당의 솔즈베리 경 소수당 내각이었다.[7]
수단의 마흐디 신국은 이후에도 일시적으로 방치되었으나 대영제국의 떨어진 위신을 상징하는 생선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영국군은 결국 굴욕으로부터 13년 만에 고든의 복수를 위하여 대규모로 수단 침공에 나섰다.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 정책의 수행을 위해 허버트 키치너(Herbert Kitchener) 장군은 수단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면서 철도를 부설하였고 1898년 9월 옴두르만 전투에서 맥심 기관총을 앞세워 고작 47명의 전사자만을 내고 마흐디군 5만 2천 중 1만 명 이상을 그 자리에서 말 그대로 지워 버렸다. 이후 하르툼을 다시 함락시키고 마흐디 신국을 멸망시키면서[8] 빠르게 남하하고 있었다.
2.1.1. 고든의 죽음은 순교인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지만, 순교는 선교와 관련이 없다. 순교는 나무위키 문서에 적혀있듯 기본적으로 신앙을 포기하면 충분히 살아날 수 있는 경우임에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죽는것을 의미하기에, 당사자가 선교활동을 했나 하지 않았나는 고려대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종교적 신념을 일시적으로나마 포기하면 살려주겠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거절한 고든을 순교했다고 표현하는것이 틀린것은 아니다.하지만 제국주의 시절, 해외로 파견된 열강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제국주의적 신념을 따랐든 따르지 않았든, 제국주의 의 첨병이 되어 식민지배의 앞잡이가 되었으며, 이들이 그곳에서 죽으면 그들의 죽음을 열강은 순교라고 포장했기에 결국 순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점차 퍼져나가고 위의 순교=선교라는 오해가 생겨난 것이다. 그렇기에 훗날 미국에서 복음주의 선교로 유명한 목사 빌리 그레이엄이 위대한 순교자라고 고든을 찬양하며 기리자 고든의 증손자가 증조부를 따라죽은 무슬림들은 개종도 하지 않았듯이 적어도 종교에 미치지 않은 분을 종교에 미친 놈으로 멋대로 포장한다고 비난했다.
2.2. 프랑스
인도차이나 반도와 남태평양 일대에 존재하던 그들의 식민지로 진출하는 빠른 항로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프랑스는 홍해 인근을 노리던 영국과 이탈리아[9]를 견제하기 위해 다카르 & 브라자빌 - 서아프리카 & 중앙아프리카 - 수단 - 에티오피아 - 프랑스령 소말릴란드(현재의 지부티)를 잇는 지역을 장악하려고 했다.[10]1893~1895년 서아프리카 식민지를 공고히 한 프랑스는 동진을 계속했다. 프랑스의 외무장관 가브리엘 아노토(Gabriel Hanotau)는 1896년 프랑스 육군 대령 장 바티스트 마르샹이 이끌던 1개 중대급 원정대를[11] 동쪽으로 파견하였다. 마르샹 원정대가 파쇼다에 도착하면 지부티에서 원정대를 파견하고 파쇼다에서 조우함으로써 횡단 정책을 완성하겠다는 의도였다. 마르샹 원정대는 브라자빌을 출발하여 콩고 강과 우방기 강을 거슬러 올라간 뒤 중앙아프리카의 정글과 수단의 사막을 헤쳐나가는 14개월의 원정 끝에 1898년 7월 10일 남수단 파쇼다에 도착해 프랑스 국기를 내걸었다.
하지만 지부티에서 출발한 원정대는 현지 주민의 적대적 태도에 당초 원정을 위한 통로 이용을 허가한 에티오피아 황제 메넬리크 2세가 원정을 중단할 것을 통보하면서 1897년 실패로 돌아갔고 파쇼다에 도착한 것은 먀르샹의 원정대뿐이었다. 마르샹의 원정대 홀로 파쇼다에서 버티는 상황 속에 키치너가 이끄는 영국 원정군이 9월 18일 파쇼다에 들이닥치면서 파쇼다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게 되었다.
열 배가 넘는 1,500명의 병력에 영국 해군의 포함까지 거느린 영국 원정군의 우세가 명백한 상황이었지만, 양측 지휘관은 본국의 명령을 기다리기로 합의하고 충돌 없이 동시 주둔에 들어갔다. 파쇼다에는 영국 국기와 프랑스 국기, 그리고 명목상 수단의 지배국인 이집트 국기가 일단 함께 내걸렸다. 이런 갈등 소식이 본국에 날아들자 가뜩이나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에 불붙었던 양국 국민의 여론은 급격히 나빠졌고 양국은 함대까지 준비하는 상황에 몰렸다.
3. 해결
그러나 이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났다.[12]결국 프랑스는 영국의 우세를 인정해 11월 3일 마르샹의 원정대에게 철수를 지시하면서 파쇼다 문제는 쉽게 해결되었으며 다음해인 1899년 3월에는 나일 강과 콩고 강의 수원 중간 지점을 경계로 하자는 내용에 양국이 동의했다.
프랑스의 횡단 정책이 상실된 데는 단기적인 원인과 장기적인 원인이 있었다. 단기적인 원인으로는 1898년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다는 점이 있다. 파나마 운하 비리 사건과 드레퓌스 사건으로 대다수의 내각이 몇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단명했으며 이 때문에 4년간 재임했던 아노토 장관은 7월 말에 사임해야 했다. 뒤를 이은 앙리 브뤼송(Henri Brisson) 내각의 테오필 델카세(Théophile Delcassé) 장관#은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탈리아 왕국의 삼국동맹을 극히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과 불필요한 갈등을 빚는 것은 지극히 무익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애당초 당시 파쇼다에서 프랑스가 영국에 열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프랑스군은 영국군을 만나 대립하게 되자 개전 여부를 상대편인 영국군에게 부탁해서(...) 영국군이 카이로로 전령을 보내 카이로에서 런던으로 가설되어 있던 해저전신을 통해 런던에 소식을 전한 뒤 런던에서 파리에 해당 소식을 전한 뒤(...) 파리로부터 다시 그 과정을 역으로 거쳐서 현지의 프랑스군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명령 전달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당연히 모든 정보를 알고 있던 영국은 이미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프랑스 본국으로써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장기적인 원인으로는 친영국 입장의 델카세가 이례적으로 7년 동안 장기 재임했으며[13] 프랑스가 횡단정책을 재개할 수 없는 환경이 더욱 공고해졌기 때문이었다. 프랑스가 노리던 에티오피아는 메넬리크 2세가 내륙으로 진출하려던 이탈리아를 격퇴[14]했던 상황이었다. 자신만만하던 메넬리크 2세는 1902년 철도 건설을 구실로 에티오피아에 손을 써 보려던 프랑스의 계획을 파악해 철도 건설을 중단해 버렸는데 이것이 결정타가 되었으며 1899년 초에 마흐디 신국은 영국에 의해 완전한 진압 단계에 있었다. 결국 프랑스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기존에 장악하려던 횡단선을 계속 추구할 이유가 점점 사라졌던 것이다. 또한 군사적인 측면에서 원정군을 파견할 수 있는 해군 함대가 프랑츠 측이 영국에 열세한 사실도 한 몫했다.
결국 1904년 영국-프랑스 협상#(영불협상)에서 프랑스는 수단을 영국에게 확실하게 양보했고 대신 모로코를 보장받게 되었다. 이로서 영국과 프랑스는 각자 고립을 완벽하게 해소했다.[15]
이로서 수단은 '영국-이집트령 수단'[16]으로서 영국의 식민지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단 민중이 대거 학살되었고 수단 측의 극렬한 저항과 같이 기독교에 대한 증오가 철저하게 뿌리내리면서 뒤에 종교적 갈등 요소를 남겼고 기독교를 믿는 남수단과의 갈등에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또 수단과 에티오피아의 역사가 극명하게 갈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17]
4. 미디어 믹스
- 1966년에 개봉한 영국 영화 하르툼(Khartoum)이 있다. 다만 파쇼다 사건을 다루지 않고 고든 장군의 죽음까지 다루고 있다. 한국에서는 1967년 1월 27일에 카쓰므라는 일본 발음을 반영한 제목으로 개봉했다.... 1990년 초반에 '카슘 공방전'이라는 제목으로 SK그룹계열인 SKC에서 비디오로 출시됐다. 지상파에서 더빙되어 방영도 여러 번 했는데 1977년 1월 2일 오후 12시 40분에 TBC에서 <카튬>이란 제목으로 더빙 방영할 때 유강진이 고든 역, 마흐디는 최응찬이 맡았다. 1982년 4월 10일 명화극장으로 재방영했고 이후에도 1989년 광복절 특선으로 오후 2시 40분에 KBS 1TV로 재방영했는데 <카르툼>이라는 제목으로 방영했다.
찰턴 헤스턴이 고든을 연기했는데 여기에선 창에 맞아 죽는 걸로 나온다. 마흐디는 로런스 올리비에가 맡았는데 부하들이 참수된 고든 장군의 목을 가져오자[18] 괴로워하며 "내가 그를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잖느냐!"며 화낸다. 이 영화는 제작 당시 마흐디의 증손자들에게 감수받았는데 그들도 전해듣던 증조부 이미지와 맞다고 매우 호평했다.
- KBS1 도전 골든벨 경기 향남고 편 최후의 1인인 김다은 학생이 48번 문제에서 맞추지 못한 정답이었다. 문제의 답 대신 미안해라고 적었다.
- 이 사건을 다룬 책인『카르툼』이 2013년 12월 발매되었다.리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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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밑에 후술한 영화 하르툼 공방전 초반부에 마흐디군에게 공격받아 영국-이집트 혼성군이 전멸당하는게 바로 샤이칸 전투다. 영화에서 힉스 대령은 마흐디군이 던진 창을 등에 맞고 전사한다.[2] 하지만 조사 끝에 마흐디를 빨리 잡겠다고 닥돌한 힉스 대령이 패배 원인이 되었다는 게 드러났다. 물을 충분히 보급하지 않아 병력이 목마름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던 것.[3] 이런 점 때문에 지금도 남수단에서 고든에 대한 인식이 좋은데 노예의 다수가 바로 흑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마흐디 신국은 흑인 노예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흑인들은 마흐디 신국을 싫어했다. 다만 마흐디 신국도 무조건 흑인을 차별한 게 아니라 흑인 성직자나 흑인들도 일원으로 우대했기 때문에 흑인 신분차별 정도로 봤지 인종차별을 한 것은 아니다. 아무튼 이것이 흑인들이 영국을 따르게 만들어 이후 남수단 갈등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4] 또 고든 총독은 현대적인 도덕관점과 인권주의적인 행보를 자주 보였는데 제2차 아편전쟁에 참전했을 때 동료들의 원명원 약탈과 방화를 야만스럽다고 비판했으며 태평천국의 난 당시 청나라에 상승군 용병대장으로 고용되었을 때 자신의 협상으로 소주 무혈항복을 받아냈으나 이홍장의 뒤통수로 항복한 태평군이 학살당하자 이홍장을 죽여 버리겠다고 크게 분노했고 종전 후 황제가 참전 장군들에게 선물을 보내자 이때 소주 학살을 들면서 선물을 거부했다. 물론 이홍장도 태평군이 벌인 학살을 이야기하긴 했지만.[5] 이런 점도 있지만 마흐디가 국제적 외교에 대한 안목이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영국인 총독을 죽이지 않고 잘 우대하면 영국에서는 일단 명분 없이 쳐들어갈 수 없으니까 마흐디 신국에 대하여 닥돌공격을 자제한다든지 이런 걸 노렸다는 것이다. 고든이 죽고 효수되자 영국 신문들이 1면으로 보도하면서 영국의 굴욕 드립을 쳤으니 여론이 분노했다.[6] 총독이었던 그는 현지인들처럼 페스를 쓰고 다녔으며 죽을 때도 현지인 부하들처럼 입고 페스를 쓴 채 싸우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래서인지 그의 사후 세워진 동상도 페스를 쓴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단순히 문화 존중 차원에서 페스를 쓴 것은 아니고 고든이 이집트 정부에서 파견된 수단 총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국화되기는 했으나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제후국이었으며 따라서 고든도 이집트에 파견되면서 형식상으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관직을 받았다. 영화 <하르툼>에 등장하는 영국-이집트군이 정작 터키 깃발을 휘날리면서 진군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7] 글래드스턴 총리는 6년 뒤에 다시 총리로 재임하여 2년 가까이 일하다가 85세에 고령으로 은퇴했다.[8] 마흐디는 이미 병으로 죽어서 묻혀 있었는데 바로 고든의 아들이 이끌던 영국 육군은 마흐디의 무덤을 박살내고 시체를 불태우면서 분풀이를 했다. 하지만 영국 타임스 지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비난하며 "관대함으로 베풀었다면 몰라도 똑같이 따라하니 갈등은 계속 될 것이다."라는 기사를 썼다. 결국 그 기사처럼 현지인들은 영국 식민지배 아래에서 이를 갈았고 심지어 마흐디의 후손들은 70년 가까이 지난 1966년 영화 하르툼을 제작할 때 찾아온 미국인들에게 증언하면서도 이를 갈았다고 한다. 결국 77년이 지난 1975년에야 고든의 후손과 마흐디의 후손이 만나 서로 화해하고 고든의 후손이 사과했다고 한다.[9] 현재의 소말리아와 에리트레아 지역을 식민지화했다.[10] 마다가스카르와 코모로가 비슷한 시기에 식민화되어 이것까지 고려한 횡단 정책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마다가스카르나 코모로는 따로 뚝 떨어져 있는 섬이기 때문에 지정학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11] 원정대원 12명, 경비대 120명으로 총 132명.[12] 다만 이게 시일이 훌쩍 지난 오늘날의 국제관계와 결과론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거대 열강의 전면전으로 비화하지 않아서 해프닝이라고 치부되는 것이지 19세기 말 기준으로는 분명히 세계 1, 2위 열강간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수 있는 현실적 위협이었다.[13] 내각이 장수해서가 아니라 델카세의 능력이 뛰어나서였다. 총리의 변화에도 각료가 변하지 않는 이런 보수적인 프랑스 제3공화국의 특성이 장점으로 작용한 예다.[14]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1895년~1896년. 1893년 에티오피아의 조약 거부와 1895년 반란이 원인이 되었다. 아도와 전투가 유명하다.[15] 사실 영국은 당시에 고립(정확히는 불 - 독 대립에서의 중립)을 취해도 손해 볼 게 그다지 없는 입장이었는데 이것을 "명예로운 고립"이라고 한다. 반면 프랑스는 러시아만으로는 동맹국이 충분하지 않았고 여기에서 적국을 더 늘린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결국 델카세는 지속적으로 영국과의 동맹을 추진했으며 이것이 친프랑스적인 에드워드 7세와 영국의 랜스다운 경에 의해 빛을 발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이 협상은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가 확실하게 몰락하고 빌헬름 2세의 적극적인 팽창 정책과 건함 경쟁으로 독일의 위협 수위가 급격히 올라가게 되면서 삼국협상으로 이어졌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의 발판이 되었다. 양면 포위의 위기에 빠진 독일은 2차례의 모로코 위기로 양국 사이를 갈라 놓으려고 시도했으나 도리어 이 시도는 영-불 협상을 강고하게 했다.[16] 하지만 사실상 이집트도 영국의 보호령이었으므로 수단은 영국의 식민지였다고 봐도 된다.[17] 에티오피아의 역사가 극명히 갈린 데는 앞서 말했듯이 이탈리아 왕국이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를 두고 찝쩍거리다가 털린 것도 원인이 되었다.[18] 검열 때문인지 목을 보여주진 않고 장대를 가져와 환호하는데 마흐디가 이겼다는 말에 기뻐하다가 장대를 쳐다보면서 괴로워하며 화낸다. 장대에 목이 꽂혀 있다는 건 카메라가 장대 위를 비치더니 나중에 세워지는 고든의 동상에 목이 장대로 연결되면서 상징적으로만 보여줬다.